부자가 된 괴짜들

   
김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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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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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08��



■ 책 소개
비즈니스앤TV에서 방영되고 있는동명의 프로그램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아이디어를 짜내고 열심히 일해 대박을 터뜨린 "남들과 1% 다른" 13명의 괴짜들을 소개한다. 저자는21세기 성공키워드는 "괴짜"라고 말하며, 이제는 세상을 무대삼아 타고난 끼와 재능으로 자기 자신이 최고의 브랜드가 되어 이 세상에 자신의영역을 넓혀야 한다고 강조한다.

 


설탕을 하나의 예술로 승화한 설탕공예가 정영택, 외국의 문화를 독학으로 익혀 한국에그래피티 문화를 만들어간 그래피티 아티스트 지성진, 패션의 본고장 뉴욕에 한국인 모델을 최초로 진출시킨 쇼 디렉터 김소연 등 우연히 자신만 알게된 매력에 사로잡혀 그 분야의 최고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인생에 얼마나 큰 행복과 성공을 가져다주는지를알 수 있다. 그리고 괴짜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정상적인 경로에서 벗어난 엉뚱한 인생을 뜻한다기보다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열정적이고 더 열심히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저자 김유미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고,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KBS <독서토론 책과의 만남&&으로방송작가가 된 후, 13년 동안 각종 프로그램의 작가로 활동하였다. 현재는 비즈니스앤TV <부자가 된 괴짜들&&, KBS<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의 대본을 집필하고 있다.
 
■ 차례
1부 괴짜, 세상에 자신의 영역을 넓혀라 
와인처럼 붉은 열정 -와인사업가 김정미 
회색빛 도시에 꿈을 입히다 - 그래피티 아티스트 지성진 
설탕, 초콜릿, 그리고 달콤한 인생 - 설탕공예가 정영택
허브의 향기로 세상을 사로잡다 - 허브사업가 이상수 


2부 괴짜, 끼와 열정으로 세상을 지배하라
발끝을 짜릿하게 감싸는 유혹 - 구두 디자이너 이겸비 
백만장자가 된 바텐더 - 바텐더 박재우 
못 고치는 차고쳐드립니다 - 자동차명장 박병일 


3부 괴짜, 세상을 자신의 팬클럽으로 만들어라
화려한 무대를 지휘하는 ‘미다스의 손’- 쇼 디렉터 김소연 
젊은 여행군단을 조직하라 - 여행사업가 엄기원 
밥상의 어머니,김치는 나의 힘 - 김치사업가 이하연 


4부 괴짜, 독특한 발상으로 세상에 덤벼들어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잔치를 열다 - 홈웨딩사업가 안경자 
핑크빛 트럭에 꿈을 싣고 - 패션사업가 김효신 
음식문화군단 100만양병설 - 식문화사업가 조태권





부자가 된 괴짜들


회색빛 도시에 꿈을 입히다 - 그래피티 아티스트 지성진
막막해 보이는 검은 벽, 그저 벽일 뿐이다. 한동안 벽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청년이 결심이라도 한 듯 움직인다. 스프레이를 손에 들고 밑그림도 없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쓱쓱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손끝에서 무수한 선들이 생명을 받아 나온다. 검은 천 뒤에 숨어 있었던 것처럼 어느새 근사한 자동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서서히 그의 그림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는 그래피티의 힘을 안다. 그것은 작은 벽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수 있다는 것. 그는 사람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즐긴다. 사람들은 그가 그래피티 하는 걸 직접 보면서 그래피티에 친숙해지기 때문이다. 그래피티가 돈을 벌 수 있는 수단도 되지만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그래피티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오랜만에 압구정 거리에 나온 지성진은 굴다리를 찾았다. 그곳은 그래피티의 메카와도 같은 곳이다. 지금은 낙서가 금지되어 있지만, 아직도 곳곳엔 그 흔적들이 유물처럼 남아 있다. 사람들은 그 굴다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배우고 교류했다. 우리나라의 그래피티가 저변으로 확산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오래 전 그는 이곳에서 그래피티 아티스트의 꿈을 키웠다. 무한한 자유를 꿈꾸었던 곳이지만 돌이켜보면 어두운 터널처럼 앞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무런 꿈과 기대도 가질 수 없던 그에게, 어느 날 벼락처럼 다가온 것이 있었다. 텔레비전을 멍하니 쳐다보던 성진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것은 시사르포 프로그램이었다. 한 흑인이 담벼락에 낙서를 갈긴 후 그 밑에 자기 이름을 쓰고 재빨리 도망쳤다. 카메라는 그의 뒤를 쫓아가면서 찍어댔다. 그것은 예술적인 면을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그에게는 달리 보였을까. 스프레이로 담벼락에 글자를 써내려가는 흑인의 행동은 그에게 느닷없는 충격이었다. 단순한 범법행위가 아니라 너무나도 근사한 그 무언가였다.


그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스프레이를 샀다. 요령도 없이 무작정 벽에 대고 스프레이를 뿌렸다.


쏴아악 쉭쉭. 스프레이 입자들이 곱게 흩뿌려지면서 벽 위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손끝에서 뿜어 나오는 소리. 스프레이 입자가 일시에 퍼져 벽의 표면에 내려앉는 느낌. 그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환희였다.


사고만 치고 다니던 불량소년이 이번엔 벽에 낙서만 해댄다고, 사람들은 더욱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이미 지성진은 학교에서 쫓겨난 소년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 남들의 시선이나 비아냥대는 소리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마음속에는 오직 그래피티를 하고 싶다는 갈망으로 가득했다. ‘나는 앞으로 쭉 그림을 그릴 것이다!’


한번은 새로 생긴 클럽의 인테리어 그래피티를 거의 도맡아서 그렸다. 클럽 안을 몽땅 작업해주고 고작 80만 원을 받았다. 그때는 돈을 벌었다는 사실에 마냥 좋아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4천만 원짜리 작업을 해준 셈이었다. 호프집이나 PC방 등의 그래피티도 했지만 그리 큰돈은 되지 못했다. 연습하는 데 드는 재료들을 사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어느 날 뮤직 비디오의 미술감독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서태지의 뮤직비디오에 그의 작품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는 기회를 잡았고,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서태지의 뮤직비디오에 그의 그래피티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단숨에 연예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양동근, 휘성 등 내로라하는 스타들의 뮤직비디오 작업에도 그의 그래피티가 등장했다. 때맞춰 비보이들이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키면서 뮤직비디오뿐 아니라 방송사의 음악 프로그램과 오락, 드라마, 영화, CF 등 다양한 매체에서도 그를 찾기 시작했다.


가난한 뒷골목에서 배를 곯아가며 그림을 그리던 불량소년 지성진은 어느덧 그래피티 마니아들의 우상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그래피티 아티스트의 반열에 오르고 있었다.
 


못 고치는 차 고쳐드립니다 - 자동차명장 박병일
병일은 배고픔쯤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기술을 배우지 못하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제대로 된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고참들에게 질문을 하면 꿀밤세례가 돌아왔고, 도무지 속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원래 그래! 쪼끄만 녀석이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보냐?”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돼.”


당시 정비기술은 어깨너머로 보고 소리로 듣고 고치는 것이 고작 일 만큼 주먹구구식이었다. 제대로 된 정비서적이 있을 리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청계천 헌책방을 뒤지기 시작했고, 운 좋게도 영어로 된 자동차백과사전 한 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을 고작 두 달 다니고서는 영어로 된 글을 읽을 수 없었다. 병일은 사전을 하나하나 뒤져가며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어찌된 일인지 단어의 뜻을 알아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시 현장에서 쓰던 용어는 일본어였고, 책은 영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 끝에 병일은 자동차 부품 카탈로그를 구해서 회사 사무실로 갔다. 아르바이트로 회사 경리일을 하던 대학생 형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형, 이거, 가무 샤우드 같은데, 도대체 뭐라고 읽는 거야?”


“여기는 캠 샤프트라고 되어 있네. 이건 클러치, 블로바이 가스, 브레이크 드럼이라고 읽어.”


병일은 클러치 밑에는 ‘구라치’, 블로바이 가스 밑에는 ‘나마카스’, 브레이크 드럼 밑에는  ‘도라무’라고 적어 넣었다. 병일은 암호문을 해독하듯 현장용어와 책 속 용어를 맞추고 달달 외웠다. 어렵게 공부하는 병일을 보면서 선배들은 비웃기만 했다.


“야, 기름밥 먹는 놈이 책은 무슨 책이야? 진정한 쟁이는 원래 책 같은 건 안 봐.” “난 머리에 먹물 든 놈만 보면 재수가 없어. 당장 관두지 못해?” 하지만 아무도 병일의 불타는 학구열을 말릴 수 없었다. 그는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선배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가며, 남들이 7, 8년 걸리는 기술을 3, 4년 만에 익혔고, 23세에는 일급 자동차 정비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1999년 당시, 차량의 급발진 사고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하루에도 두세 건의 급발진 사고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자동차 회사들은 소비자 과실을 주장할 뿐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고, 대학교수들은 물론 쟁쟁한 자동차 전문가들도 속시원히 그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병일은 꼭 그 일을 해내고 싶었다. 20년 넘게 수많은 자동차를 다뤄온 그의 판단으로는, 자동차 자체의 결함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직접 실험 계획을 세워 관련기관을 찾아다녔다. 학력도 보잘것없고 작은 정비소의 정비공에 불과한 그가 전문가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낼 리 만무하다는 생각에 기관의 관계자는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그의 실험계획은 검토도 되기도 전에 거절당했다. 결국 박병일은 ‘나 홀로 실험’을 감행했다. 우선 모아뒀던 돈을 털어 자동차 5대를 샀다. 다행히 한 방송사의 기자가 그의 실험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왜 사재를 털어서 실험을 하시려는 겁니까? 이렇게 혼자 실험을 하시면 나중에 보상도 받지 못할 텐데요.”


“단지 급발진의 원인을 밝히고 싶을 뿐입니다. 다른 욕심은 없어요. 궁금하잖아요?”


그는 기자와 함께 한강 고수부지로 자동차를 끌고 나갔다.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무조건 실험을 거듭했다. 석 달 동안 수만 번의 끈질긴 실험 끝에 마침내 급발진 사고의 원인이 자동차 자체의 결함에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기업 측에서는 박병일의 연구 결과가 방송에 나갔어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예상되는 사회적 파장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기업들과 건설교통부는 그의 연구 결과를 인정하게 되었다. 자동차 회사들은 서둘러 차의 결함을 고쳐나갔고, 이후 급발진 사고로 목숨을 잃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병일이 이처럼 급발진 사고의 원인을 정확히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은 늘 새로운 기술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때문이다.



음식문화군단 100만 양병설 - 식문화사업가 조태권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1988년, 난데없이 부친의 부음이 날아들었다. 조태권의 부친인 조소수 옹은 우리 도자기의 희망을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일본에서 하던 사업을 접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1963년 광주요를 열었다. 명맥을 잇고 있던 ‘독 짓는 늙은이’를 찾아내 도공으로 모시고, 관요 폐쇄로 절멸된 청화백자 제작술을 찾아내 우리 도자기의 부흥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타계한 것이다.


어머니의 당부로 맡은 광주요였지만, 시늉만 내는 것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조태권은 무슨 일이든 하기로 결정하면 불도저 같은 저력으로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그는 부친에게서 듣고 배운 도자기 이야기에, 해외 체류 경험으로 체득한 타국 문화를 접목시키며 자기만의 문화사업을 펼쳐나갔다. 일단 일본식이 아닌 진짜 한국식 도자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도공들을 이끌고 박물관 순례에 들어갔다. 그때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것은 상감기법의 도자기였다.


‘금속을 발라낸 상감 도자기를 가마에 구우면 정말 멋진 색채가 되는군! 일본과 중국에서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감기법의 도자기야말로 최고의 명품이다. 이걸 이용해서 좀 더 대중화된 우리 도자기를 만들어내자!’


조상들이 사용했던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를 실생활에 적용해보자는 생각으로, 그는 생활식기용 고급 수제 도자기를 만들었다. 당장 샘플만 1만 가지를 만들어 세상에 선보였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세상의 냉대였다. 소비자들은 모두가 똑같이 생긴 ‘세트 그릇’에 길들여져 있었다. 하지만 유약을 발라 굽는 도자기에는 같은 색감, 같은 문양이 나올 리 만무하다. 가마에 구워 만드는 우리 도자기의 가치를 어쩜 이리도 몰라주는지 야속하기만 했다. 어머니 역시 그를 만류하고 나섰다.


“아직 우리 경제수준으로는 수작업으로 만든 도자기를 부엌에서 쓰기 어렵지 않겠느냐? 우리나라에서 도자기는 감상용일 뿐이야.”


“아닙니다, 어머니. 그릇으로 태어난 이상 그릇 본래의 노릇을 해야 합니다. 예술작품으로 모셔놓고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밥과 국을 담아내는 생활자기로서의 기능을 회복해야 앞으로도 승산이 있습니다.”


조태권은 잃어버린 우리의 도자기법과 종류를 계속 복원하여 시장에 내놓았다. 다른 도자기 회사에서는 서양식기인 ‘본차이나’에 가까운 날렵한 형태의 자기를 내놓으면서 식기 시장을 장악해 나갔지만, 그는 끝까지 투박한 그릇만을 고집했다. ‘한국식 그릇은 사발이다. 사발은 서민 그릇이던 옹기와도 일맥상통하고 고대로 올라가면 빗살무늬 토기와도 연결된다. 사발을 오므리면 밥그릇이 되고 넓히면 국그릇이 된다. 사발식 식기만이 세계에서도 통할 수 있는 한국식 식기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5년이 지났을까? 언젠가는 우리 도자기의 가치와 역사를 알아볼 것이라는 그의 믿음이 드디어 탄력을 받았다. 우리 그릇과 음식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계기가 된 ‘아름다운 우리 식탁전’을 통해 내로라하는 명문가에서 그의 그릇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양에서 들어온 화려한 색감과 문양의 세트 그릇만 찾던 사람들이 우리 도자기의 담백함과 정갈함에 매료되었고, 그에 힘입어 조태권은 대중화된 브랜드를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릇이 빛을 보게 되자, 그에겐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도대체 이 그릇에 무엇을 담아낼 것인가? 도자기에 담아 세계에 내놓을 우리의 문화란 과연 무엇일까?’


그 당시 한국의 김치와 불고기가 전 세계에서 수출되고 있었고, 대체로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김치와 불고기뿐 아니라, 밥과 국, 찌개 등 모든 것이 함께 세계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조태권은 일본의 스시집에서 그 힌트를 얻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스시(초밥)입니다. 일본인들은 스시집을 통해 스시만 수출한 것이 아니라, ‘노렝’이라고 하는 일식집 특유의 치장과 고유의 그릇, 회칼을 비롯한 주방용품, 종업원 복장과 일본식 예절, 그리고 다다미방까지 다양한 그들의 문화를 수출한 것입니다. 김치와 비빔밥을 따로따로 세계에 진출시켜 봤자 의미가 없습니다. 음식과 함께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 공간, 문화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