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힘

The life of George stephenson

   
새무얼 스마일즈(역자: 정경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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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북스
   
18000
2007�� 04��



■ 책 소개
『인격론』의 저자 새무얼 스마일즈의최고작으로 꼽히는 책으로, 탄광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던 조지 스티븐슨의 어린 시절부터, 숱한 야유와 비난에도 굴하지않고 증기기관차와 철도건설에의 목표를 이뤄내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일주일에 12실링을 벌면서 하루 12시간씩 기관을 점검한 일, 오늘날 기관차의 원형이 된"로켓 호"를 제작한 일, 수많은 반대와 편견을 이겨내고 대규모 철도망을 이루게 된 일 등의 일화를 통해 조지 스티븐슨이 그 어떤 배경 없이오로지 끊임없는 노력과 의지로 당당히 성공을 거두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새무얼 스마일즈는 조지 스티븐슨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통해 "지름길부터찾지 말라. 목표는 실패에 부딪히고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는 의지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 조지스티븐슨은 1781년 6월 9일 뉴캐슬 부근의 와일램 탄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던 어린 조지는 굳은 의지,부지런함, 현명함으로 가난과 싸워왔다. 또한, 사물에 대한 유별난 호기심을 잃지 않았던 그는 바쁜 가운데에서도 야학을 만들어 문맹에서 벗어나는열의를 보였다. 


기계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설계와 수학, 화학, 물리학에 대해서도 여느 학자 못지않은실력을 쌓았다. 1815년에는 ‘조디’라는 광산용 안전등을 발명하면서 이름을 알렸으며 최초로 증기분사방식이라는 획기적인 방법을 도입해,증기기관차 모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1821년에는 세계 최초의 철도인 스톡턴-달링턴 철도공사의 기술자로 채용되어 기발한 아이디어로 완공에크게 기여했으며, 5만 파운드의 연봉을 받는 당대 최고의 기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영국 전역은 그의 공로로 대규모 철도망을 이루게 되었고,그 철도망은 19세기 산업 혁명을 이끄는 주역 중 하나가 되었다.


■ 저자 새무얼 스마일즈(SamuelSmiles)
작가, 정치개혁가, 저널리스트, 의사, 도덕주의자. 스마일즈는 ‘개인 개혁’의 중요성을강조하며 ‘자조(self help)’의 정신을 설파했다. 근면, 절약, 자기계발을 논하는 그의 책 『자조론』은 1859년 출간돼 전 세계로번역돼 나갔다. 이후 그는 ‘스마일즈의 4대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후속작 『인격론』『검약론』『의무론』 등을 계속 집필했다. 그 외에도 어려움을딛고 자수성가한 인물들의 전기를 썼는데, 철도의 아버지 조지 스티븐슨의 삶을 다룬 『의지의 힘』『위대한 기술자들의 생애』 등이 그것이다.


■ 역자 정경옥
1971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를졸업했다. Gates Korea(주)와 에릭양 에이전시에서 근무했으며, 2007년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전쟁에반대한다』『생활의 조건』『서구 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Self-Talking』 등이 있다.

■ 차례
추천 : CEO 제진훈이 읽은『의지의 힘』


1장 네 안의 가능성을 깨워라 
2장 연약한 뿌리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3장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 
4장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라 
5장 지름길은 없다 
6장 강철은 두드릴수록 강해진다
7장 작은 의지가 모여 세상을 바꾼다 
8장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 
9장 의지는 신화를 만든다 


저자 후기 : 의지로 신화가 된 사람, 조지 스티븐슨 
부록 : 세상을 바꾼 철도시스템과 그 결과




의지의 힘


1장 네 안의 가능성을 깨워라
조지 스티븐슨도 때가 되자마자 일을 시작해야 했다. 듀얼리의 이웃 농가에 작은 목장을 운영하는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마침 그녀는 일을 도와줄 남자 아이가 필요했다. 소가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게 지키고, 밤에 문마다 빗장을 거는 일이었다. 조지는 그 일을 하겠다고 자청하여 일당 2펜스의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일은 수월한 편이었고 남는 시간도 많았다. 그래서 조지는 여전히 새 둥지를 찾아다니거나 갈대와 보드라운 지푸라기를 엮어 피리를 만들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시절의 조지 스티븐슨은 친한 친구인 톰과 함께 진흙으로 기관 모형을 만들며 노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듀얼리 번과 블랙캘러턴에서 석탄 마차를 운전하던 조지는 마침내 듀얼리 탄광에서 기관에 불을 때는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손꼽아 기다린 승진이었다. 하지만 탄광 주인이 올 때는 숨어 있어야 했다.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어 얼마 안 되는 돈마저 못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개천가에서 진흙으로 기관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기관사가 되겠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화부 조수는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거쳐야 할 첫 단계였다. 열네 살에 일당 1실링의 화부 조수로 채용된 것은 그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듀얼리 번의 석탄이 고갈되면서 탄광은 곧 ‘폐쇄될’ 위기에 처했다. 조지의 가족은 다시 이사 준비를 해야 했다.


열다섯 살이 된 조지는 성인 남자의 임금을 받는 정식 사원이 되고 싶었다. 그는 기관에 관한 지식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기관사로 채용되어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료들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늘 꾸준하고 진지하고 성실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미드밀 탄광이 문을 닫자 조지와 조지의 단짝 코는 스로클리 다리 부근에 세워진 또 다른 양수기 기관을 맡아 몇 달 동안 일하게 되었다. 그의 임금이 주당 12실링으로 오른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는 토요일 저녁, 임금을 받고 감독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동료들에게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이제 정말 성공했어!”


로버트 스티븐슨이 일하던 뉴번의 탄광이 적자로 문을 닫을 무렵 워터로(Water-row)에 새로운 탄광이 생겼다. 그곳에서 아버지 로버트 스티븐슨은 화부로, 조지는 기관사로 일자리를 얻었다. 이때 조지의 나이는 열일곱에 불과했다. 기관사는 나이 어린 그가 맡기에는 너무 막중한 자리였다. 게다가 화부보다 더 높은 직위로, 다양한 실용지식과 기술이 필요했고, 보수도 더 높았다.


조지 스티븐슨은 화부로 일할 때부터, 특히 기관사가 된 이후에는 줄곧 기관과 기관의 동력 장치를 공부하고 연구했다. 여가 시간에는 공부 삼아 부품을 닦거나 기계를 분해했다. 그리하여 조지는 짧은 시간 안에 기관의 구조와 조작법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조지 스티븐슨은 기관의 세부 기술을 숙달하고 그 취약점을 파악하며 동력을 높이는 방법을 연구하는 동안 점차 지혜롭고 진취적인 기술자의 자질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철저하게 잘하려고 노력했다. 작은 문제를 소홀히 생각하지 않고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기술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렇게 기술적인 능력을 완성시켜 나가면서 그는 동료들로부터 존경받고 고용주들의 신뢰와 호감을 얻게 되었다.


그의 첫 스승은 월보틀 마을의 가난한 교사 로빈 코웬스였다. 그가 운영하는 야학에는 인근의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와 인부의 아들들이 몇 명 참여했다. 스티븐슨은 일주일에 세 번씩 그로부터 철자와 읽기를 배웠다. 로빈 코웬스의 수업을 들으려면 일주일에 3펜스를 내야 했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지식에 목말라 있던 스티븐슨은 기꺼이 그 돈을 지불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스티븐슨은 금세 읽기를 배웠고 또한 부지런히 글씨 쓰는 연습을 하여 열아홉 살에 드디어 자기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1799년 겨울, 앤드루 로버트슨이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교사가 뉴번 마을에서 야학을 열었다. 조지 스티븐슨은 이 학교에 다니기로 결심했다. 학교가 직장 부근이었던 데다 앤드루가 수학에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주일에 4펜스를 내고 그의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는 저녁이면 앤드루 로버트슨을 찾아가 ‘문제풀이’ 숙제를 제출하고 이튿날까지 할 숙제를 새로 받았다. 학습 속도가 무척 빨랐던 데다 진심으로 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스티븐슨은 곧 수학에 능숙하게 되었다. 앤드루 로버트슨은 그런 스티븐슨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얼마 후에 워터로 탄광이 폐쇄되면서 조지가 블랙캘러턴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자 뉴번에는 변변한 인간관계가 없었던 이 가난한 교장은 학생들을 따라 블랙캘러턴으로 옮겨가 야학을 계속했다.


스티븐슨이 기관을 정지시키는 제동 기술을 처음으로 배운 것은 워터로 탄광에서 일할 때였다. 탄광에서 비교적 높은 자리에서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 직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조지는 예전부터 제동 기술을 무척 배우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빌 코가 탄갱에서 석탄을 끌어올리는 목적으로 세워진 작은 윈치기관(감아올리는 기관)의 제동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주 조지를 불러 제동기를 직접 만져보게 하고 작동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스티븐슨은 열심히 공부해 제동 기술을 습득했다.


스티븐슨은 워터로와 뉴번 인근의 탄광에서 3년 동안 코와 함께 일했고, 1801년에는 블랙캘러턴 탄광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스티븐슨은 돌리(Dolly) 탄광에서 정식 제동사로 일하게 되었다.



2장 연약한 뿌리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조지 스티븐슨은 어느새 스무 살 청년으로 성장했다. 호리호리하고 건장한 체격을 지닌 그는 진지하고 성실하며 숙련된 일꾼이었다. 그러나 근면성과 끈기, 호기심에서 우러나온 특별한 습관 외에는 이렇다 내세울 게 없었다.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보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남들보다 교육도 덜 받았다. 이제 겨우 배움의 처음 단계를 밟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늘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로 불타올랐다. 기회만 있으면 부지런히 노력해서 모두 실질적인 이익으로 전환시켰다. 그 당시만 해도 그는 노동자로 성공하는 정도에 만족했던 것 같다. 그 이상의 지위는 올려다보지 않았다.


돌리 탄광에서 제동수로 일하는 동안 스티븐슨이 받은 임금은 2주에 1파운드 5실링에서 2파운드 정도였다. 그는 남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블랙캘러턴 탄광 시절부터 동료들의 신발을 만들거나 수선하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갖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부업을 하고 싶어했던 건 마을의 참한 처녀 패니 헨더슨을 연모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탄광의 인부들은 토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술집으로 직행하거나 근처 들판에서 닭싸움이나 개싸움을 지켜보면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에 스티븐슨은 기관을 분해하고 연구했다. 이는 기계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는 부품을 일일이 닦고 빈틈없이 조립한 뒤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곤 했다. 그의 기관은 늘 깔끔했고 문제없이 돌아갔다. 아울러 기관의 동력과 작동 방식에 관한 지식도 날로 풍부해져 갔다.


겨울이면 저녁마다 앤드루 로버트슨 선생과 함께 수학 공부를 했다. 그러나 로버트슨은 얼마 못 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게 되었다. 제자가 스승을 따라잡은 셈이었다. 하지만 쓰기 수업은 계속됐다. 이듬해에 스티븐슨은 패니 핸더슨과 결혼하면서 뉴번의 교구 명부에 또박또박하고 멋진 필체로 자기 이름을 쓸 수 있었다.


스티븐슨의 집은 작은 앞마당이 딸린 아담한 이층집으로, 부두의 뒤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2층 서쪽 끝에 보금자리를 틀었는데, 바로 뒤로 높이 치솟은 짐 언덕이 보였다. 월링턴에 정착한 조지 스티븐슨은 규칙적이고 성실한 노동자로 살았다. 하지만 밤에는 여유 시간을 이용해 단순한 노동자 이상의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사람들이 술집에서 진탕 술을 마시는 동안 그는 기계와 기관의 작동 원리를 공부하고 연구했다. 노동자라고 해서 모든 일을 추측으로 일관하지 않았으며, 낯선 이론에 매달려 기계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겨울밤이면 아내 옆에 앉아 기계 실험을 하거나 실험용 기계를 설계하는 데 몰두했다.


그는 영구운동(Perpetual Motion,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영구히 움직이는 기계 운동-옮긴이) 연구에 빠져 있었다. 그의 실험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계속 실패였지만 이때 기울인 노력은 그의 창의력과 잠재력을 자극했다. 이 기계에는 나무 바퀴가 달려 있었고, 그 주위에는 수은으로 채워진 유리관이 끼워져 있었다. 바퀴가 돌아가면서 수은이 아래쪽에 있는 관으로 흘러 들어갔는데, 장치는 계속해서 스스로 운동을 했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이것이 영구운동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가 이 기계에 관한 발상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누군가와의 대화나 독서를 통해서 얻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혼자만의 생각으로부터 나왔는지도 모른다. 『발명의 역사』에 나온 유사한 종류의 장치에 관한 설명을 참고했을 수도 있다. 이 무렵에는 책을 접하거나 쉽게 읽을 수 없었으므로 어디선가 영구운동의 발명에 관해 전해듣고 자기 방식대로 진위를 실험해 본 것인지도 모른다.


조지 스티븐슨이 월링턴 키에 살고 있던 1803년 12월 16일, 그의 외아들 로버트가 태어났다. 이 아이는 단 한순간도 빈둥거리며 보내지 않고 꾸준하게 일거리를 찾는 부모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다. 아버지는 신발을 수선하거나 만들고 구둣골을 파고 시계를 청소했다. 그러지 않을 때는 설계도나 모형을 들여다보면서 자기계발에 전념했다. 로버트는 어려서부터 그런 아버지를 무척 따랐다. 로버트는 아버지가 집에 있는 저녁시간을 아주 좋아했다. 조지 스티븐슨은 부성애가 무척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새나 개, 토끼, 심지어는 캘러턴 탄광에서 석탄차를 끄는 늙고 불쌍한 말까지 애정으로 돌보았는데 그 사랑을 이제 자식에게 아낌없이 쏟아 붓게 되었다.


1808년, 스티븐슨은 또 다른 제동수 로버트 웨더번과 조지 도즈와 함께 탄광 소유주가 지켜보는 앞에서 웨스트무어 탄광의 기관에 대한 제동을 책임진다는 간단한 계약을 맺었다. 제동수들은 협력하고 성과를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하는 일만큼 많은 보수를 받았다. 그곳에는 두 대의 기관이 밤낮으로 돌아갔는데 세 명중 두 명은 항상 근무를 섰다. 주급은 한 사람당 18~20실링이었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늘 그랬듯이 그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렸다.


인생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두는 비결은 늘 준비하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포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지 스티븐슨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지식을 송두리째 이익으로 전환하는 준비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시간이 나면 수입을 올리거나 지식을 늘리는 데 그 시간을 활용했다. 단 1초라도 시간을 소중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다. 특히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는 늘 관찰하는 자세를 가졌다. 그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자기가 맡은 일을 개선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여겼다. 때로는 실패도 했지만 바로 그 실패가 그를 더 강하게 단련시켜 성공으로 이끌어주었다.



3장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
1784년, 와트는 자신의 첫 번째 특허에서 언급한 것과 유사한 기관을 다시 얘기하며 바퀴 달린 수레의 이동에 증기를 이용하는 방식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와트가 제안한 이 방식은 의문투성이였지만 그의 창의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수레는 두 사람을 태울 예정이었지만 실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와트는 응축기관을 더욱 완벽하게 개선하는 문제에만 매달려 있었으므로 고안한 기관차를 더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미국인 발명가 올리버 에번스 역시 같은 발명에 매달렸다. 그는 1772년에 일반도로를 다니는 증기차를 발명했으며, 1787년에 메릴랜드 주에서 증기차를 제작하고 이용할 수 있는 독점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이 발명은 실용화되지 못했다.


1784년에 증기선을 발명한 윌리엄 시밍턴은 증기력을 화물차 추진에 이용하는 발상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786년에 증기차의 실용 모형을 제작했고 이 모형을 에든버러의 교수들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에게 보냈다. 하지만 열악한 스코틀랜드의 도로사정 때문에 발명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또한 증기선과 관련된 계획 때문에 증기차는 곧 포기하고 말았다.


1784년, 와트의 친구이자 조수인 윌리엄 머독은 영국 최초의 증기차 모형을 만들었다. 고압기관의 원리를 활용한 이 모형에는 세 개의 바퀴가 달려 있었다. 이 기관은 알코올램프가 보일러를 가열하는 방식으로, 높이가 30센티미터를 약간 웃도는 아주 작은 크기였다. 하지만 속도는 매우 빨라서 와트의 것을 능가했다.


버클에 따르면 어느 날 저녁에 머독이 콘월 레드러스의 탄광에서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 자신의 기관차 모형을 작동시켜 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실험 장소는 마을에서 1.6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교회로 통하는 보도였다. 이 길은 폭이 좁고 양쪽으로 높은 울타리가 있었다. 머독은 깊은 밤에 은밀히 실험에 착수했다. 먼저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이자 보일러가 금세 끓기 시작했다. 곧이어 기관이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보고 머독은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자지러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지만 그는 기계 쪽으로 달려갔다. 도움을 요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교구의 덕망 있는 목사였다. 목사는 볼일이 있어서 마을 쪽으로 오다가 으슥한 길에서 괴상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조그마한 괴물과 맞닥뜨린 것이었다. 목사는 악마를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머독은 증기기관차와 관련된 그의 발상을 더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1811년, 리즈의 블렌킨솝이 한쪽에 톱니가 달린 레일의 특허를 획득했다. 1812년 8월 12일, 블렌킨솝의 기관들이 미들턴 탄광에서 리즈의 마을까지 연결된 약 5킬로미터의 선로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기관은 한동안 인근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시찰을 나올 정도로 매우 유명했다. 1816년에는 후에 러시아의 황제가 되는 니콜라스 대공이 블렌킨솝의 기관차에 강한 호기심과 존경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관 한 개가 서른 대의 석탄차를 시속 5킬로미터의 속도로 끄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블렌킨솝의 기관은 이후 오랫동안 석탄 운반에 이용되었고, 기관차의 동력을 상업적인 용도로 이용할 수 있음을 최초로 증명했다.


1813년에는 더비셔에 위치한 버털리워크스의 브런턴이 기관차에 다리를 다는 특이한 발명으로 특허를 땄다. 그러나 이 기관차 역시 실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실험 중에 기관이 폭발하는 바람에 구경하던 사람 몇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당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런저런 의견이 활발하게 나왔으며, 그 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기관차의 견인력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처럼 초기의 발명가들이 난관을 만나고 해결해 가는 과정은 와일램의 블랙킷의 실험을 통해 가장 잘 설명된다. 조지 스티븐슨 역시 그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증기기관차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었다.


와일램의 석탄찻길은 영국 북부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1807년 무렵, 스티븐슨의 아버지가 일하는 와일램 탄광에서 타인 강을 따라 약 6킬로미터 떨어진 리밍턴의 마을까지 목재 선로가 깔렸다. 화차에 실려 리밍턴에 도착한 석탄은 석탄 운반선이나 짐배에 실려 뉴캐슬을 경유해 런던의 시장으로 운반되었다. 보통 석탄차 한 대에 말 한 필과 마부 한 명이 배정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속도였다. 이 차는 너무 느려서 두 번 오가는 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마부는 1회 운반에 7펜스의 수당을 받았다. 이 원시적인 석탄찻길은 조지 스티븐슨이 태어난 집 앞을 지나쳤다. 어린 스티븐슨은 목재선로 위를 오가는 석탄차를 보며 자란 것이다.



4장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라
스티븐슨은 힘겨운 노력 끝에 얻은 지식이야말로 진정한 재산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스티븐슨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춘 유능한 기술자들이 많았다. 모두 학교에서 과학과 지식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킬링워스의 ‘제동수’, ‘기관사’만큼 머리에 든 것을 실생활에 응용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의 성공에 숨은 최대의 비결은 안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끈기였다. 그는 한 번도 장애물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더 현명해지고 더 강해졌다. 그에게는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병적인 환상이 없었다. 가난하고 부족했지만 그것 때문에 고난을 박차고 일어나는 성격이 꺾이지는 않았다. 그는 한 번 실패하면 성공할 때까지 도전하고 또 도전했다.


스티븐슨은 기술자협회에서 젊은이들에게 연설을 하곤 했다. 그는 그 모임에 가장 자주 초대받는 인기 연설자였다. 스티븐슨은 젊은 시절의 노력과 성공하기까지 거쳐온 과정들을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교육의 중요성에 관한 그의 견해는 확고한 신념으로 뿌리박혀 있었다. 때문에 젊은이들을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그 점을 강조했다. 스티븐슨은 웨스트무어 탄광에서 야간 근무를 맡아 기관을 손질하면서부터 줄곧 비는 시간마다 동료의 손목시계를 닦거나 신발을 수선했다. 아들을 학교에 보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아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굳힌 것은 바로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다.


1818년, 로버트는 학교를 마치고 킬링워스의 니콜러스 우드 밑으로 들어가 탄광 일을 배웠다. 그리고 3년 동안 웨스트무어 탄광의 부감독관으로 일했다. 로버트가 킬링워스에서 부감독관으로 보낸 3년은 두 부자에게 모두 유용한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저녁이면 친구이자 동지로서 독서와 공부에 전념했다. 특히 매일 석탄찻길을 오가는 기관차와 기관차의 동력이 화제에 오르면 토론은 끝날 줄 몰랐다. 기관차에 관해서라면 아들이 아버지보다 더 열을 올렸다. 아버지는 오히려 기존의 방식을 변호하며 아들의 의견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아들이 내심 자랑스러웠다. 또한 아들이 기관차가 결국은 승리할 것이라는 명석한 예측을 내놓을 때면 괜히 마음이 부풀어 오르고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1820년, 스티븐슨은 웨스트무어 탄광에서 부감독으로 일하던 로버트를 에든버러대학에 보냈다. 당시 영국에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사람이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은 없었다. 로버트는 에든버러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는데, 안전등이나 기관차와 관련된 아버지의 명성도 작용했던 것 같다. 그가 에든버러대학에서 공부한 것은 한 학기밖에 안 됐지만 강한 열정과 의욕으로 학문에 전념했다. 그의 정신은 지식을 구하고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1821년 여름에는 로버트가 수학 과목에서 받은 상을 가지고 킬링워스로 돌아왔다. 이는 조지 스티븐슨에게 무엇보다 커다란 선물이었다.



5장 지름길은 없다
1821년,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 광차 선로를 건설할 계획이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제임스는 소문을 전해 듣고 서둘러 리버풀로 건너가 계획자들과 면담했다. 이 무렵, 오지의 물자를 제조 지역으로 운반할 방법을 찾는 일이 시급했다.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의 무역량이 놀라운 속도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두 도시가 거래하는 원면(原綿)의 양이 9년 만에 2000만 킬로그램 이상으로 늘어났을 정도였다. 다른 원재료의 거래량도 같은 추세를 보였다. 이에 발맞추어 맨체스터 부근의 촌락들이 도시에 버금가는 규모로 성장했다. 주민들은 리버풀에서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원면에 생계를 걸었다.


1821년 6월경, 손더스, 제임스, 프랜시스 자일스, 패들리(제임스의 처남이며 측량사)가 모여 리버풀 인근의 땅을 조사했다. 도시로 철도를 연결하려면 어느 지점이 가장 적합한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우선 이스턴 힐 주변의 땅을 조사하기로 했다. 이스턴 힐 근방의 주민들은 측쇄(測鎖, 거리를 측정하는 사슬-옮긴이)와 경위의(經緯儀, 측량에 사용하는 소형 망원경-옮긴이)를 들고 낯선 작업을 하는 그들에게 득달같이 몰려왔다. 그들은 측량사를 몰아내고 작업을 중단시켰다. 철도 때문에 농장과 정원을 망칠 수도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것이다. 이 와중에 패들리의 조수가 붙들려 측량지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리고 다시는 그곳에서 측량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손더스는 주민들의 반대로 리버풀 인근에서는 측량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프레스콧으로 가서 측량을 재개하자고 제안했다. 리버풀 인근 마을을 거치지 않고 머시 강과 맨체스터로 선로를 연결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측량사들에게 이 방법이 가능한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제임스는 프레스콧 부근부터 측량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주변의 지주와 농민들이 측량 작업을 방해하고 갖은 욕설을 퍼붓는 등 거세게 저항했다.


리버풀과 맨체스터 구간에 대한 측량은 1822년 초에 진행되었다. 지역 주민들은 여전히 그들의 작업을 방해했고 측량사들은 여러 번 강제로 쫓겨났다. 측량사들은 하는 수 없이 주민들이 깨지 않은 이른 새벽을 틈타 일을 해야 했다. 채트모스에서는 습지 위에 합판을 올려놓고 측량을 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선로 측량은 마무리되어 갔다. 그러나 아직 철도가 상용화되기는 어려웠다. 의회가 철도 건설 계획을 강력하게 반대할 것으로 보였고, 지엽적인 지지로는 그런 반대를 극복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철도 건설 계획은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손더스는 이 문제를 계속 제기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지지자는 늘어났다. 그만큼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1825년 9월 27일, 마침내 스톡턴-달링턴 철도가 개통되었다. 최초의 공공 철도가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애초에 도로 수탁자 등 많은 사람들이 철도 건설을 강하게 반대했고 공사를 중단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여전히 철도의 성공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국민의 호기심은 한층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보러 온 사람, 혹은 ‘거품이 터지는 것’을 지켜보러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동식 기관이 폭발하는 모습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며 악의 가득한 예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개통식은 달링턴 위쪽으로 약 14.5킬로미터 떨어진 브러셀턴 인클라인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먼저 고정기관이 짐을 실은 화차를 서쪽 사면 위로 끌어당기자 동쪽에 있던 빈 화물차가 아래로 내려갔다. 다음 순간 스티븐슨이 비탈길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직접 기관차를 운전하며 등장했다. 다음으로 인파의 환호 속에서 석탄과 밀가루를 가득 실은 6량의 화물차, 회사의 간부들과 친구들을 가득 태운 객차, 승객이 앉을 임시 좌석을 고정시킨 21량의 객차, 6량의 석탄차가 그 뒤를 이었다. 총 38량의 기관차 행렬이었다.



6장 강철은 두드릴수록 강해진다
한번은 스티븐슨이 리버풀에 가고 없는 동안 버팀목을 제대로 대지 않은 천장에서 흙과 모래가 쏟아져 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인부들은 무사했다. 스티븐슨이 돌아와 보니 피신한 인부들이 터널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었다. 그는 직접 안으로 들어가면서 일터로 돌아가도록 다독였다. 천장 보수가 마무리되면서 작업이 재개되었다. 이처럼 그는 위험이 발생하면 늘 인부들과 함께 했다. 그들은 그의 두려움 없는 행동을 보며 자신감을 되찾았고 빛을 볼 때까지 열심히 땅을 뚫고 파냈다. 스티븐슨은 힘겨운 터널 공사를 감독하면서 제자이자 조수인 로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로크 덕분에 터널 구간을 연결시키는 공사도 정확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1828년 6월에 터널이 완공되었다.


같은 해 말, 공사에 46만 파운드를 지출했는데 완공까지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회사의 중역진은 투자의 이익과 손실을 따져보더니 공사 지연에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또한 바로 수익을 올리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므로 1829년 봄이 되자 스티븐슨에게 더 빨리 작업을 진행하라고 재촉했다.


회사는 공사 도중 여러 번 자금 압박을 받았다. 1825년의 경제공황의 여파로 주주들에게 투자를 요구하기도 어려웠다. 1826년에는 재무부 차관위원회에서 10만 파운드를 대출받았고, 1829년에는 회사가 철도 건설을 위한 장비를 구입할 추가 자본을 조성할 수 있는 법안이 마련되었다. 공사 도중에 계획을 변경하고 수정할 수 있게 하는 두 개의 법안도 통과되었다. 하나는 레인 힐 부근의 커브를 개선하고 선로 길이를 줄이는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선로가 어웰을 지나 맨체스터 시내를 통과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기술자의 열정, 인부들의 성실함, 회사의 원활한 자금 공급 능력 덕분에 선로 공사는 1829년 한 해 동안 급속도로 진척되었다. 채트모스를 비롯한 여러 지점에 두 배의 인부들이 채용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야간 교대자는 횃불과 모닥불 옆에서 작업했다. 전 구간에서 동시에 작업이 진행되자 회사는 공사를 목표대로 끝마칠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사장으로 임명된 스티븐슨은 철도 공사가 한창일 때 중앙아메리카에 가 있는 아들 로버트를 불러오기로 결심했다. 역사적인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던 그는 곧 자신의 예측이 실현될 거라 판단했다. 그러자면 철도 시스템과 기관차 운행에 관한 계획을 함께 세울 사람이 필요했다. 성공에 대한 신념과 희망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아들의 성숙한 판단과 경험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는 아들에게 급히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1827년 중순, 로버트는 콜롬비아를 출발해서 같은 해 12월에 영국에 도착했다.



7장 작은 의지가 모여 세상을 바꾼다
1803년, 울프는 연관식 보일러(tubular boiler)로 특허를 땄다. 이는 콘월 지방의 탄광에서 널리 이용하던 방식으로, 가열 표면적을 확대하면 증기 생산을 크게 촉진할 수 있다는 원리를 바탕으로 했다. 울프는 세로 모양의 화로 중앙에 여덟 개의 관을 수평으로 촘촘하게 설치했는데, 불꽃이 관을 모두 지나야 연통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보일러를 구성하는 관들이 잘 연결되고 화로가 견고해야 한다. 불꽃과 가열 공기가 관 주위를 돌아다니게 만들어 표면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이 구조에서는 관 속에 증기와 물이 들어 있었다.


연관 보일러는 계속 개량되었다. 천재 트레비식도 가열 표면적을 늘리기 위해 ‘작은 수직 관’을 이용하는 방법을 떠올려 1815년에 특허를 획득했다. 이 관들은 아래쪽은 막혀 있고 공용 물탱크 쪽은 뚫려 있었다. 공용 물탱크는 물을 공급하고 모든 관의 증기가 합쳐지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에 따라 제작된 기관차는 없었던 것 같다.


1825년, 리버풀-맨체스터 철도 회사에 처음 취직한 측량사의 아들 W. H. 제임스는 새로운 구조의 보일러를 발명해 특허를 땄다. 고리 모양의 관들을 나란히 놓고 볼트로 죄어 묶어 가열 표면적을 넓히는 방식이었다. 이 관들을 결합시켜 긴 원통 모양의 보일러를 만들고 한쪽 중앙에 화로를 설치했다. 제임스는 1827년 무렵에 이 관상 보일러 모형을 로시와 스티븐슨에게 소개했다. 로시는 이 보일러를 스티븐슨의 기관에 설치하면 무한한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제임스가 시속 30~50킬로미터도 문제없을 거라고 말하자 스티븐슨은 고개를 저으며 시기상조라고 대답했다.


1829년 중반에 리버풀의 터널이 완공되었다. 회사는 일주일에 한번 가스로 불을 밝히고 터널 내부를 일반에 공개했다. 1실링의 요금을 내고 많은 사람들이 터널을 구경했다. 이렇게 모인 돈의 일부는 선로 건설에 참여하다가 부상을 당한 인부의 가족을 돕는 데 쓰였고, 나머지는 맨체스터와 리버풀의 병원에 기부되었다. 한 해 동안 비가 많이 내렸지만 공사는 크게 진척되었다. 1830년 1월 1일까지 두 도시 사이에 단일 선로가 완공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셈이었다.


스티븐슨은 약속한 날짜에 공사를 마쳤다. 로켓 호는 객차에 철도회사 이사들, 기술자들, 그리고 친구들을 가득 태우고 채트모스의 전구간과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의 나머지 구간을 달렸다. 석탄 운송 차량은 이미 여러 구간에서 운행되고 있었지만 승객용 차량 운행은 늦춰졌다. 기관차와 객차 제작에 상당한 추가 비용이 들었고 우기라는 계절적 악조건도 겹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티븐슨과 로버트는 그동안에도 기관차의 결점을 수정하고 개량하는 작업에 열중했다. 뉴캐슬 공장에서는 철도 운행에 적합한 새로운 기관차 구조를 개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로켓호의 성능이 경주 때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공사의 완료는 범국민적인 사건이었으므로 그에 걸맞은 행사가 거행되었다. 당시 총리였던 웰링턴 공작, 국무장관 로버트 필, 리버풀의 의원이자 처음부터 철도 계획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허스키슨 등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참석했다. 마침내 ‘노섬브리언(Nothumbrian) 호’를 선두로 다른 기관차들과 부속 차량들이 600명의 승객을 태우고 연이어 출발했다. 기관차가 올리브 산의 깊은 골짜기를 통과하고 서른 몇 번이나 비탈길을 오르고 군중이 밀집해 있던 생키 고가교를 건널 때 수천 명의 관중이 환호성을 올렸다. 좁은 골목길에는 마차가 가득 차고 강에는 짐배들이 붐볐다. 사람들은 위로 고개를 들고 시속 37킬로미터의 속도로 선로를 따라 달리는 기차를 놀랍고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철도 개통은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중 하나가 주변 땅값의 상승이었다. 기관차 소음, 불꽃, 연기에 놀라 모두 달아날 것이라던 예상과는 달리 역 주변 땅에 갑작스러운 수요가 발생하면서 땅값이 치솟았다. 법안위원회의 한 증인은 증기기관에 대한 공포를 매우 실감나게 묘사한 바 있다. 그는 증기기관이 풀밭을 파괴하고 건축 예정지의 땅값이 급락해 땅주인이 파산할 것이라고 했다. “기관차 선로가 대문 앞을 망칠 테니 멀쩡한 정신으로 그곳에 집을 짓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순식간에 주택들이 들어섰고 땅값도 어마어마하게 뛰었다.



8장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
1838년, 런던, 리버풀, 맨체스터를 잇는 거대한 철도가 개통되자 반대자들의 예상이 틀렸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운하 소유주들은 철도가 엄청난 교통량을 수용하는데도 운하의 교통량과 수입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또한 철도의 확장으로 무역과 상업이 활기를 띠었고, 다른 집단과 이익을 공유할 수 있었다. 목장 주인들은 말 수요가 눈에 띄게 커지고 수익이 오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철도가 확장되면서 말고기 가격이 오르고, 또 역마차들이 역과 역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기 때문이었다.


철도가 런던까지 확장되면 대도시가 몰락하고 교외에서 양배추를 재배하는 농민들이 파산할 거라고 장담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새 길이 생기면서 시민은 교외로, 외지 사람들은 시내로 이동했다. 원심성과 구심성의 원리가 모두 적용된 셈이었다. 이제 수많은 시골 사람들은 태어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대도시를 빠르고 값싸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시골 구경을 거의 해보지 못한 런던 시민들은 대도시의 공해와 분주함에서 벗어나 푸른 들판과 청명한 하늘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교외에서 재배하는 양배추 가격이 떨어지면 한가득 운반되어 오는 신선한 양배추가 손해를 메웠다. ‘부분 악’이 훨씬 더 큰 선을 베풀어준 것이다. 특히 싱싱한 고기와 야채가 공급되면서 도시의 음식 수준이 크게 개선되었다. 게다가 석탄 가격은 크게 내렸다. 이는 대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축복이었다.


요크셔와 랭커셔의 주요 지역에 효율적인 철도를 건설하고 이 지역을 런던-버밍엄 철도와 그 지선인 미들랜드 철도를 이용해서 대도시와 연결하고 나자 스티븐슨의 관심은 전국의 철도 시스템을 완성시키는 쪽으로 집중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북부의 스코틀랜드와 남부의 아일랜드를 연결하고 이 지역의 중심지들을 영국의 심장인 런던과 직접 연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미 아들 로버트의 도움으로 뉴캐슬에 이르는 북부 지방까지 주요 선로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로버트는 가끔씩 남은 선로를 완공할 좋은 방법을 제안했다.


스티븐슨이 1838년에 측량한 리즈-브레드포드 선로는 비교적 규모는 작지만 요크셔의 주요한 두 제조 도시를 연결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이 계획은 이듬해에 순조롭게 진행되기 시작했지만 같은 시기에 나온 많은 계획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전역을 휩쓴 재정난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몇 년 전부터 철도에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진 것도 한 가지 원인이었다. 1836~1839년에 철도가 건설된 속도는, 그 이후의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무척 놀라운 수준이었다. 특히 1836년과 1837년 회기에는 철도 법안이 무더기로 통과되었다. 철도 사업은 호황을 맞았고 교통 수익을 산정하는 방법을 연구한 천재 수학자들은 철도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곧바로 증명해 냈다.


1837년 회기에는 118건의 새로운 철도 법안에 대한 심사가 진행되었다. 이 중 79건이 의회 상정 절차를 거쳤고 42건이 통과되었다. 대부분은 이전의 법안을 보충하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열네 개의 신설회사가 808만 7000파운드의 비용으로 74킬로미터의 철도를 건설할 수 있는 승인을 얻었다. 철도의 수익이 점점 눈에 띄게 증가하더니 이 회기 동안 최고치를 달성했다.



9장 의지는 신화를 만든다
리버풀-맨체스터 철도가 성공적으로 개통되면서 철도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 때를 맞춰 과학자라는 높은 신분과 현장 기술을 겸비한 유능한 기술자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자유 경쟁이 허용된 영국의 산업사회에서는 뛰어난 기술자에 대한 수요가 있으면 곧바로 충당되었다. 철도 분야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거듭된 시행착오와 엄청난 비용 문제를 낳았지만 기술자로 하여금 천재성과 모험심을 유감없이 발휘할 토대를 다져준 것도 사실이었다. 또한 철도 사업의 배당률이 8퍼센트에서 15퍼센트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 지속되면서 철도 투자에 뜻을 둔 자본가를 영입하거나 자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 때문에 경쟁의식이 팽배했고, 두 개 이상의 철도가 같은 시기에 착공되는 경우에는 담당 기술자들이 나서서 경쟁을 주도했다. 이런 경쟁은 전문 기술뿐만 아니라 개인의 명예를 실험하는 무대가 되기도 했으며,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할 때도 많았다. 이 때문에 야심 많은 후배가 선배의 자리를 꿰차거나 의회위원회에서 선배의 계획을 무참히 짓밟는 일도 허다했다. 새로 등장한 수많은 인재들은 과거보다 더 창의적이고 독창적으로 철도 계획을 보강하고 실행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기술자들의 경쟁의식은 각자의 능력을 자극하고 강화할 뿐만 아니라 질투와 불평도 유발했다. 조지 스티븐슨은 수많은 토목공사를 계획하고 진행했지만 한참 후에야 ‘정식’ 토목 기술자로 인정받았다. 견습 과정을 거치지 않은 그에게는 남에게 보여줄 견습계약서가 없었다. 증기기관 제작에 관여하는 기술자들 역시 그를 불법 침입자로 낙인찍었고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온 세상이 그의 주장을 명백하게 인정한 뒤에도 「기계학회지」의 지면을 빌려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스티븐슨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스티븐슨이 확립한 철도 방식은 너무 새로워서 그 명성을 따라잡을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유능한 기술자들은 철도가 이제야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으므로 앞으로도 무한히 개선할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대도시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수많은 신선 철도를 측량하는 일을 맡은 그들은 스티븐슨의 계획을 바탕으로 스스로 능력을 배양하고 명성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언론들은 이런 행동을 두고 뉴캐슬의 탄광촌에서 잔뼈가 굵은 무지한 기술자들의 꽁무니만 좇는다며 비웃었다. 하지만 독자적으로 길을 개척하려는 기술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1838년 무렵부터 새로운 견해와 계획을 제시하면서 스티븐슨의 방식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1841년, 스티븐슨은 특별위원회의 증인으로 더 안전한 철도 여행을 위해 개선할 것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의 제안 중에는 일반 방식보다 더 빠르고 쉽게 기관차를 정지시키기 위해 자동 제어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는 이 방식을 발명해서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에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유사한 장치에 관한 특허가 있었기 때문에 따로 특허를 받을 수는 없었다.


스티븐슨은 기관차의 모든 차량에 제동장치를 설치한다면 기관이 작동을 멈추면 뒤의 차량들도 영향을 받아 바퀴의 구르는 힘이 방해를 받을 거라고 주장했다. 기관차의 차장이 차량마다 설치된 제동 장치를 연결한 손잡이를 움직이면 수월하게 조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 톱니바퀴는 동시에 작동을 멈추게 된다. 스티븐슨은 안전 운행을 위해 한 가지 제안을 더 했다. 기관차가 선로를 따라 움직일 때 신호가 자동으로 바뀌는 방식이었다.


스티븐슨은 궤간 변경, 대기압 기관 도입, ‘파상형’ 선로 건설 등 기술학교를 나온 기술자들의 제안에는 반대했다. 모두 비용과 수익 문제 때문이었다. 그는 철도 주주들의 돈을 이용해서 명성을 얻거나, 돈을 ‘물 쓰듯’ 쓰면서 기술자로 성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철도가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대중이 실제로 이용하고 주주들이 돈을 벌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곧 경제성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삼은 것이다. 철도는 국가가 건설한 길이 아니라 개인이 이익을 바라고 투자한 사업이었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많은 수익을 올려야 했다.


스티븐슨은 철도가 ‘수지맞는’ 사업이라고 믿지 않았다면 자신은 절대로 관여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도 여러 번 했다. 그래서 계획한 선로가 수익을 올리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거나 예산이 너무 낮게 책정되면 기술자로 일해 달라는 제의를 거절했다. 철도의 천재보다는 실생활에 유용하고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철도의 기술자로 인정받고 싶은 바람이 더 컸던 것이다. 스티븐슨이 건설한 철도의 성공은 그와 같은 판단이 확고했음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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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