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이 운명이다

   
마크 솔터· 존 맥케인(역자 : 윤미나)
ǻ
21세기북스
   
12000
2006�� 10��



■ 책 소개
"운명"은 없다. 태어날 때부터 무엇이되기로 정해진 사람은 없다. 대신 "운명적"이라 할 만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인격이다. 조건에 따라 변질되는 외형적인 가치와 달리 인격은생물학적인 수명을 넘어 도덕적인 부재에 대항하며 인간의 운명을 움직여 왔다.

 


책은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불가능에 도전한 사람들과 불의에 맞섰던 강직함, 역경 속에꽃피운 희망, 신념을 위한 희생 등 총 22명의 삶의 클라이맥스를 생생하고 현장감 있게 엮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인격이다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한다. 결국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선택하는 순간 삶의 행보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3대째 미국의 고위관리로 지내고 있으며, 개혁파 정치가로서도 승승장구를 하던 존 맥케인은한때 전쟁 포로로서 온갖 고문을 당하며 5년 동안 심한 고초를 겪는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운명처럼" 본래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옳았던인격의 가치를 깨우치게 된다. 책은 저자의 이런 깨달음을 통해 성격이나 재능, 신체적으로 핸디캡을 가진 평범한 인물들이 위대한 인간으로 거듭나는과정을 존엄, 용기, 자비, 정의, 이상 등 22가지 인격의 덕목으로 정의했다.


■ 저자 
마크 솔터
 - 존 맥케인의 행정참모로,「Why Courage Matters」「Worth the Fighting for」를 쓴 공저자이다. 


존 맥케인 - 미국 해군에서 복무하고 하원의원으로 두 번당선된 후, 현재 애리조나 주 상원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Why Courage Matters』『Worth the Fightingfor』가 있다.


■ 역자 윤미나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현재 출판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출판번역 및 기획 그룹인 바른번역 회원이며, 번역가 커뮤니티 왓북의 공동 운영자다. 주요 역서로 『벤저민프랭클린 인생의 발견』등이 있다.

■ 차례
저자 서문 : 나는 인격을 믿는다


character 1 역경을 이겨내는 힘 
신뢰 -어니스트 새클턴 
존엄 - 빅터 프랭클 
호기심 - 찰스 다윈 
희망 - 윌마 루돌프

character 2 철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 
지혜 - 엘리자베스 1세 
리더십 -테쿰세 
신념 - 토머스 모어 
인내 - 윈스턴 처칠 
자제 - 조지 워싱턴 


character 3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희생 - 막시밀리안 콜베 
자비 - 안토니아 수녀 
인류애 - 로메오 달레르 
선행 - 오시올라 맥카티
용기 - 이디스 카벨 


character 4 불꽃보다 뜨거운 삶 
이상 -소저너 트루스 
창조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유머 - 마크 트웨인 
협동 - 존 우든 


character 5 어둠을 비추는 촛불 하나 
평화- 마하트마 간디 
사랑 - 테레사 수녀 
우정 - 넬슨 만델라 
친절 - 아웅산 수지 


역자 후기 : "인격이 운명이다", 그 마법의주문





인격이 운명이다


character 1 역경을 이겨내는 힘
신뢰  - 어니스트 새클턴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탐험가. 1901~1914년 사이 3회에 걸쳐 남극을 탐험하며 자남극을 발견했다.


위험천만한 눈밭에서 목숨을 걸고 전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09년 1월 9일, 그들은 목표 지점으로부터 약 1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남극에 도달한 최초의 인간이 될 뻔했다. 그러나 눈보라, 질병, 굶주림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탐험 역사상 길이 기억될 혹독한 여정을 견뎌내고, 인간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남쪽 끝까지 내려갔다.


원정대의 리더인 어니스트 새클턴은 냉철하고 단호한 사람이었다. 그는 탈진하고 굶주린 세 사람의 목숨을 구해내기 위해 영광을 포기했다. 그들은 맥버도 해협까지 필사적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2700킬로미터 여정을 시작했다. 하루에 말고기 약간과 마른 비스킷 네 쪽으로 연명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클턴은 점점 안색이 나빠지고 있는 원정대의 일원인 존 로버트 프랜시스 와일드에게 자기 몫의 비스킷 하나를 건네주었고, 와일드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세상 누구도 비스킷 하나가 얼마나 큰 호의를 의미하는지 진실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맹세코 그 의미를 이해한다. 그리고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리더로서 새클턴은 가장 신뢰했던 이유는 아랫사람에 대한 충성이었다. 그들에게는 새클턴이 항상 자기 야심보다 그들의 안위를 먼저 챙겨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새클턴과 대원들이 서로에게 가졌던 신뢰와 충성심은 다음 원정에서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


1874년 2월 15일, 아일랜드 카운티 킬다레에서 태어난 어니스트 새클턴은 직업 선원이 되어 상선에서 항해를 했다. 선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규율에 엄격했기에 새클턴은 상선에서 눈에 띄는 속도로 진급할 수 있었는데, 22살 어린 나이로는 최초로 항해사가 되었고, 2년 후에는 선장이 되었다.


1901년 새클턴은 영국 해군 대령인 로버트 팔콧 스콧과 남극 원정을 떠났는데, 사악한 날씨 때문에 전진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결국 그들은 출발한 지 석 달 만에 탈진 상태로 맥머도 해협에 도착했다. 스콧은 괴혈병을 앓고 있는 새클턴을 먼저 영국으로 돌려보냈다. 새클턴은 원정대가 국민의 영웅이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들은 불가능한 확률에 맞서 그들이 보여준 용기에 환호하고 있었다. 그래서 새클턴은 다시 남극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새클턴이 이끈 두 번째 남극 탐험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후 스콧 대령은 새클턴보다 먼저 남극에 갔지만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비록 새클턴과 사사건건 의견 충돌을 보였던 스콧이지만, 그와 상관없이 운명에 맞선 탐험 영웅의 용기는 세계를 감동시켰다. 물론 새클턴도 감동했다.


새클턴의 남극 원정은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무렵인 1914년 8월 1일 다시 시작되었다. 10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원정을 함께할 마지막 대원들이 합류했고 그들은 마침내 황량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사우스조지아 섬의 포경기지를 향해 고된 항해를 했다. 이제 하루만 더 가면 남극 대륙에 닿을 참이었는데 인듀어런스 호는 광풍에 휩쓸려 유빙 안에 갇혀버렸다. 1915년 11월 21일, 대장은 결국 배를 포기하기로 결정했고 며칠 후 인듀어런스 호는 거대한 빙하의 압력을 받고 부서져 가라앉았다. 이후 다섯 달 동안 원정대는 형편없는 식량으로 유빙 위에서 버텼고, 1916년 4월 16일, 처음 빙하에 갇힌 지 열다섯 달 만에 구명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보트를 타고 광풍 속을 항해한 끝에 엘리펀트 섬에 도착했다. 대원들은 ‘지옥 섬’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었고, 이곳에서 물고기와 펭귄을 잡아먹으며 다섯 달가량을 버텼다.


인듀어런스 호가 침몰한 후 새클턴은 갈 데까지 간 원정대를 인간적으로 통솔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중간 대원을 통해 명령을 전달하지 않았다. 그는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지칠 줄 모르고 대원들을 격려했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같이 희생하고 의논하고 농담하고 노래를 불렀다. 새클턴은 상황이 얼마나 처참한지 알고 있었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옥 섬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새클턴 대장은 구조 요청을 하러 가기로 결정했다. 대원 5명과 함께 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세계 최악의 코스 1200킬로미터를 17일 동안 항해하여 사우스조지아 섬에 도착했으나 그곳이 포경 기지가 있는 해안 섬 반대편이었기 때문에 다시 대원 3명과 함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36시간 만에 포경 기지에 도착했다.


새클턴은 우루과이 정부를 설득하여 어선을 빌렸고, 1916년 8월 30일, 네 번째 도전만에 엘리펀트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원 프랭크 와일드는 구명보트에 탄 대장의 모습을 발견하던 순간을, “물에 거품이 이는 걸 보고 기뻐서 기절하는 줄 알았죠. 몇 분 동안 말을 할 수 없었어요”라고 회상했다. “모두 무사합니까?” 새클턴은 멀리서 소리쳤다. “네, 무사해요.” 다들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한 사람도 잃지 않았다. 어니스트 새클턴 경은 목표에 충실했고 대원들도 그 점을 잊지 않았다. 워슬리는 새클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계산된 말과 행동 뒤에는 언제나 단 한 가지 결심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바로 대원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마음이었지요.”


새클턴은 이 특별한 탐험에 대한 책 『어니스트 새클턴 자서전(South)』을 ‘동지들’에게 바쳤다. 이 책에는 몹시 감동적인 구절이 나온다. “기억 속의 우리는 풍족했다.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것들의 허식을 사무치게 깨달았다. 우리는 고통스러웠고 굶주렸으나 승리했다. 바닥을 기어다녔지만 결국 싸움에서 이겼다. 우리는 큰 전체 속에서 더욱 성장했다. 신의 광채를 보았고 자연의 메시지를 들었다. 우리는 인간의 벌거벗은 영혼을 접했다.” 구조 후 60년이 지난 어느 날, 원정대의 일등 항해사였던 라이오넬 그린스트릿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어떻게 그런 극한 상황에서 생존할 수 있었는지 질문을 받았다. 그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새클턴이었으니까요.”



character 2 철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
인내 - 윈스턴 처칠

영국의 정치가?저술가?웅변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내각의 수상이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41년 10월 29일 윈스턴 처칠은 해로우의 학생들에게 연설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영국의 수상이 된 지 17개월이 지난 무렵이었다. 처칠이 취임한 다음 불과 며칠 후에 프랑스가 히틀러의 군대에 함락되어 대패했다. 처칠은 매우 중요하고 두려운 시기에 영국의 지도자가 되었다. 독일은 영국을 무릎 꿇게 하려고 애썼건만 적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영국 공군은 히틀러의 예상보다 훨씬 영웅적으로 조국을 수호했다. 결국 히틀러는 1940년 9월 영국 침공 계획을 철회했다. 영국군은 독일, 이탈리아 동맹군과 히틀러의 최측근 어빈 롬멜 장군을 상대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40년 6월 히틀러는 또 다른 곳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은 거의 4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영국은 전패는 모면했지만 승리할 가능성도 보이지 않았다. 영국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끝이 시작되지도 않았다.


처칠은 모자를 벗어 연단 위에 올려놓고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러고 나서 이 나라가 겪은 어려움과 극복한 시련, 그리고 앞에 펼쳐져 있는 가시밭길에 대해 간략하면서도 포괄적으로 이야기했다. 그가 연설을 마무리하며 했던 말은 곧 유명한 전설이 되었다.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예외는 없습니다. 절대, 절대,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포기하지 마십시오. 명예와 정의를 위한 확신 때문이 아니라면 포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1874년 팔삭둥이로 태어난 윈스턴 처칠의 어린 시절은 병력과 불행이 장황하게 나열된 긴 서사시였다. 그는 천성적으로 약한 신체를 극복하기 위해 남보다 몇 곱절 노력해야 했다. 훗날 운동선수와 기병대 장교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약한 신체 조건으로 태어나 비실거리기 일쑤였던 소년으로서는 거두기 힘든 대단한 성과였다. 그러나 처칠의 부모는 힘들어하는 아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작은 성과라도 인정해 주길 원하는 바람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학창시절 대부분의 교사와 그의 부모는 역사와 영어 과목에 대한 처칠의 재능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폄하했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 기병대의 소위로 임관되었고, 인도와 수단에서 극렬했던 전투를 담대하게 지휘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영국에서 엄청난 명성을 얻은 그는 다음 선거에서 당당히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때부터 처칠의 일대기에 가속도가 붙는다. 그는 1900년 처음으로 보수당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11년에는 영국 해군의 최고 지위이자 매우 명예로운 요직인 해군 대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가 해군 대신으로 재직하는 동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서부 전선에서 궁지에 몰린 참호전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뛰어난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하였고, 결국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육군 사령관 직을 맡아 프랑스 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1917년 내각에 복귀하여 제1차 세계대전 말에는 육군장관과 공군장관으로 재직했다. 그후에는 광활한 대영제국의 영토를 관리하는 식민장관이 되었다. 1924년 재무장관이 되었다가 몇 년 후 영국 경제를 금본위제로 돌린 실수와 정부의 인도 정책을 반대한 덕분에 다시 내각에서 배제되어 평의원으로 돌아갔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정치 인생 막장에 들어섰다고 생각했으며 예전과 같은 지위를 절대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의 나이 57세였다.


이제 처칠의 ‘황야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의 공직 생활에서 가장 용감하고 외로운 시기였을 것이다. 당시 영국의 정치가들이 현실을 외면하고 유화 정책을 펴는 동안, 막을 수도 있는 전쟁의 위협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처칠은 당시 정치가들 중 거의 유일하게, 히틀러를 싸고도는 정부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약 8년 동안 처칠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는 가운데 황야에서 홀로 악전고투했다.


영국이 무장을 해제하고 있는 동안 독일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영국의 여론은 “히틀러가 제대로 된 약속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독일을 믿을 수 없으며 결국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한 처칠에게 새로운 존경을 보냈다. 챔벌레인은 처칠을 내각으로 불러들여 그는 다시 해군 대신이 되었고 1940년 5월 10일, 마침내 영국의 수상이 되었다.


남들보다 몇 배 부지런했던 윈스턴 처칠은 딸의 죽음, 파산, 사람들의 조롱과 경멸 등 수많은 시련에 굴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운명 앞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는 싸우고 패배했지만 다시 일어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 결과 세계 역사의 위대한 민주 지도자들의 반열에 들어섰다. 그는 연설의 힘과 굴하지 않는 용기의 본을 보이면서 조국의 유구한 역사에서 가장 위험했던 시기를 잘 이끌었다.


처음에 그는 혼자였으나 영국이 혼자일 때 영국의 리더가 되었다. 그는 패배나 위험, 불가능할 만큼 위압적인 가능성 때문에 용기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처칠은 절대, 절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큰 힘이 되어준 조국을 절대 버리지 않았다.



character 3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자비 - 안토니아 수녀

미국 출생 수녀. 비벌리 힐스의 풍족한 생활을 버리고 수녀로 전향. ‘형무소의 천사’라 불리며 멕시코의 가장 악명 높은 형무소에서 기거하고 있다.


멕시코 티후아나의 악명 높은 라 메사 교도소의 죄수들은 돈이 없으면 감방 밖에서 판자로 밤이슬만 피한 채 자거나 아니면 아예 노천에서 자야 했다. 침대, 담요, 옷, 약 등 대부분의 물건에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재수가 없는 사람은 정기적으로 간수나 다른 죄수들의 밥이 되었다. 때리는 건 기본이고 여러 가지 종류로 괴롭혔고 죽이기도 다반사였다. 멕시코에는 경찰 부패가 만연해 있고, 죄 한 번 짓지 않은 운수 나쁜 사람들이 추악하고 난폭한 라 메사에 갇히곤 했다. 라 메사는 정의만큼이나 희망을 찾기 힘든 지옥 그 자체였다.


그곳에서 죄수들과 함께 있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몸집이 작고 병이 들어 쇠약하며 나이 든 그녀는 연한 푸른 눈을 가진 안토니아 수녀였다. 그녀는 한 평이 조금 못 되는 분홍색 감방에서 산다. 그녀는 방에 쳐놓은 커튼 뒤에서 찬물로 몸을 씻고 산소 탱크 곁에 있는 침대에서 잠을 잔다. 심장이 약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수성가한 아일랜드 이민자의 딸로 태어났다. 비벌리 힐스 컨트리 클럽에서 테니스를 쳤다. 인기가 좋아서 친구가 많았고, 아름다운 아가씨로 잘 자랐다. 열 아홉 살에 레이 모나한과 결혼하여 20살이 조금 못 되었을 때 첫 아기를 낳았지만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행복하지 못한 두 번의 결혼을 거치면서 헌신적으로 카톨릭 신앙에 헌신했다. 그리고 자선활동을 시작했다. 메리놀 수녀들이 운영하는 단체, 아동 병원에서 열심히 일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메리는 여러 가지 가치 있는 일에 점점 더 많이 관여하게 되었고, 비로소 결혼 생활이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일을 하면서 부족하다고 느꼈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인생의 스승이었고 영적인 가르침을 준 가톨릭 신부 앤서니 브루워스가 죽은 후 다른 신부와 함께 티후아나로 갔다. 그녀는 교도소 안으로 들어가 더럽고 고통스러운 현장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다. 그녀는 의약품과 음식, 옷 따위를 챙겨서 정기적으로 라 메사를 찾았다. 그녀는 이 끔찍한 장소에 익숙한 사람이 되었고, 모두가 기다리는 손님이었다. 죄수들은 물론 간수들도 그녀를 존경했다.


그녀는 자신의 소명이 종교에 귀의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메리놀 수녀는 35세 미만의 여성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중년의 견습 수녀를 기꺼이 받아들여주는 종교 단체는 없었다. 1977년 무렵, 어떤 단체로 받아주지 않았지만 주교의 허락을 받은 메리는 수녀복을 입고 이름을 안토니아 수녀로 바꾸었다. 그러고 나서 무소속 수녀 자격으로 티후아나로 갔다.


라 메사의 많은 죄수들에게 안토니아 수녀는 인생에서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녀가 준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인생에서 목적과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힘을 주는 희망이었다. 그녀는 그들이 아플 때 간호해 주고, 헐벗었을 때 옷을 주고, 배고플 때 음식을 주고, 이가 썩어 고통스러울 때 치과의사를 구해주고, 추위에 떨 때 담요를 주었다. 그녀는 그들의 뺨에 키스하고 안아주었다.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고하게 잡혀 있는 사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애썼고 교도소 당국에 개혁을 요구했다. 죄수들이 석방되면 직업을 찾는 일도 도왔다. 그녀는 마음이 굳어버린 범죄자들에게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여 더 나은 삶을 살라고 설득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은 고뇌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을 깊이 사랑합니다.” 그녀는 그들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근 30년 동안 그녀는 폭력과 잔인함과 고난의 현장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친구가 살해당하는 것도 보았고, 변했다고 생각한 죄수가 다시 범죄와 타락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슬퍼하기도 했다. 최악의 비인간적인 대우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인생의 의미를 찾은 데 만족했고 기쁜 마음으로 봉사했다. 그녀는 인생의 후반기에 진정한 소명인 자비를 깨우쳤다. 그녀는 인생의 마지막을 최고로 장식하게 해준 신에게 형용할 수 없는 감사를 돌렸다.


지금 아마 작은 감방의 딱딱한 침대 위에서 쉬고 있을 그녀는 이제 여든이 다 되었다. 우리 모두에게 닥치는 인생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 중에 그녀보다 생의 마지막을 잘 준비한 사람이 있을까? 그녀의 인생에서 마지막 30년은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녀가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벌리 힐스의 아리따운 아가씨였던 안토니아 수녀는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지만 이제 자비의 천사가 되었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character 4 불꽃보다 뜨거운 삶
유머 - 마크 트웨인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 『허클베리 핀의 모험』등을 쓴 미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소설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전에도 이후로도 이만큼 훌륭하거나 이처럼 미국적인 소설은 없었다. 이 소설을 쓴 사람은 27살이 될 때까지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로 불렸고, 그 이후에는 마크 트웨인이 되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배경은 전쟁 전 남부의 강가 마을이다. 사회의 도덕 관념상 노예제를 성경에서 허락한 제도로 인정하는 이곳에서는 잔인한 관습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응징을 한다. 탈주 노예를 돕는 행위는 중죄였다. 허크는 모험을 하면서 짐을 좋아하게 된다. 짐은 아버지란 이름으로 저주를 받은 허크의 친아버지보다 그에게 훨씬 자상한 아버지 노릇을 해주었다. 그러나 허크는 짐의 탈출을 도운 것 때문에 처벌을 받을까봐 몹시 두려워했다. 이야기의 도덕적 결론으로 작용하는 중심 장면에서, 허크는 오랫동안 양심과 싸운 끝에 이렇게 말한다. “좋아, 까짓것, 지옥에 가면 되지 뭐.”


마크 트웨인은 사회의 불의, 인간 본성의 약점, 인생의 잔인한 불행, 마음으로 저지르는 죄에 저항했다. 트웨인은 대단한 저항 운동의 지도자도 아니었고 지하 군대에서 활동하지도 않았고 공직에서 일하거나 정당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사람, 장소, 사물을 보는 눈이 특별한 ‘뛰어난 관찰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그것들을 묘사하거나 변형한 글을 썼다. 그의 유머는 전 시대를 통틀어 어느 작가보다도 재미있고 의미가 깊었다. 그는 동시대의 가장 웃기는 사람으로서 재능을 충분히 발휘했다. “인간에게는 효과적인 무기 하나가 있어요. 그건 바로 웃음입니다.”


그의 어머니 제인 램턴 클레멘스는 언제나 생동감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특히 눈에 띄는 냉소적인 유머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아들의 말썽으로 골치를 썩으면서도 즐거워했다. 샘은 수영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9번이나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제인 클레멘스는 아들이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심각한 사고를 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크게 웃으며 말했다. “목매달려 죽을 팔자는 물 속에선 안전하단다.”


또한 샘 클레멘스는 어린 시절 노예들과 우정을 나누었고 그들에게 애정을 느꼈다. 노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양심은 결국 그가 살고 있던 남부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거대한 위선을 받아들이지 않는 쪽으로 정해졌다. 그 위선이란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백인보다 덜 인간적이라는 통념이었다. 그가 누구보다도 가장 우러러보았던 사람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인격을 지닌 늙은 노예, 엉클 대니얼이었다. 엉클 대니얼은 피부색을 막론하고 농장 아이들 모두의 아버지였다. 그는 허크가 그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지옥에 가도 좋다고 생각한 착한 사람 짐의 모델이 된다. 마크 트웨이는 나이가 들어서 자신이 흑인에게 애정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여름을 보내던 존 퀼스 삼촌 농장의 노예들과 나누었던 따뜻한 우정과 엉클 대니얼의 훌륭한 인품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샘 클레멘스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 3년이 지나 가난한 살림을 돕기 위해 공식적인 교육을 포기했다. 그리고 인쇄소의 도제, 신문사의 기고자 등을 거쳐 미시시피 강의 증기선 기사가 되었다. 증기선 생활에 합류한 동생 헨리를 사고로 잃은 뒤 미시시피 강에서 보낸 시절은 막을 내린다.


이후 강연과 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조금씩 사람들에게 알려지다가 유럽여행과 성지순례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 출판하면서 그의 명성이 전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필명으로 ‘마크 트웨인’을 썼다. 마크 트웨인은 이제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작가이자 대중 강연자가 되었다.


올리비아 리비 랭던과 결혼하여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로 이사해 그곳에서 20년을 살았는데, 하트포드에서 보낸 나날은 트웨인에게 가장 행복하고 생산적이며 성공한 시절이었다. 그는 이 시절에 대중적이면서도 걸출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즉 『왕자와 거지』『미시시피 강의 삶』『톰 소여의 모험』그리고 걸작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썼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는 줄거움뿐 아니라 교훈도 주는 작가이자 강연자였다. 그는 우리가 저지르거나 방관한 불의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시정하려는 마음이 들도록 이끌었다.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인생은 시행착오인 동시에 특권이고, 매우 재미있는 농담이었다. “신은 원숭이를 보고 실망했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문제를 다룰 때도 종종 겸손을 과장하곤 했으며 유머가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양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의 어리석음과 불행을 비꼬고 ‘울퉁불퉁한 경계를 허물고 가시를 무디게 하고 잔인함의 독성을 빼내기 위해’ 유머를 활용했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좀더 정직하고 희망적으로, 적어도 좀더 즐겁게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다. 심지어 우리의 허세와 여러 가지 결함을 조롱할 때조차도 말이다.



character 5 어둠을 비추는 촛불 하나
우정 -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최초의 흑인 대통령. 1990년까지 약 27년간 감옥생활을 하면서 남아프리카 흑인의 희망이 되었다.


23살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제임스 그레고리는 상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런 그를 진심으로 위로한 것은 20년 전에 23살의 아들을 사고로 잃은 넬슨 만델라였다. 넬슨 만델라의 아들이 당한 사고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레고리였다. 당시 그레고리는 소용없을지라도 진심으로 그를 위로하려고 노력했다. 며칠 후 그레고리는 더 나쁜 소식을 갖고 왔다. 친구는 아들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정부에서 그의 요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레고리의 임무였다. 제임스 그레고리는 교도관이었고, 그의 친구 넬슨 만델라는 죄수였다.


두 사람의 우정이 매우 눈에 띄고 놀랍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태어난 나라의 잔인한 역사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모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오랫동안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펴면서, 소수 백인 지배 계급이 다수의 흑인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해왔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는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베풀 줄도 안다. 오늘날 남아프리카의 역사가 좋은 방향으로 변모하고 인종 차별의 만행을 그치게 된 것은 상당 부분 만델라의 고결한 인품에 빚진 바 크다. 특히 그에겐 자신과 같은 흑인을 괴롭힌 자들을 용서할 수 있는 미덕이 있었다.


롤리흘라흘라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트란스케이 흑인 자치구에 있는 움타타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법률회사의 수습사원으로 들어가 법정 경험을 쌓은 넬슨은 동료들과 함께 1944년 아프리카 민족회의 청년 연맹을 결성해 이 조직의 활동을 적극적인 대중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했다.이들의 저항 수단은 철저한 비폭력이었다. 이 접근 방식은 점점 효과를 발휘하고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52년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는 대중 운동을 이끌다가 처음으로 체포된 이래 1950년대 내내 수시로 체포되었고 공적 활동이 금지되거나 감옥에 갇혔다.


넬슨 만델라는 무장저항 단체 MK(국가의 창)를 지휘하면서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1961년 남아프리카를 탈출하여 아프리카 전역과 유럽을 돌아다녔다. MK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고 MK 게릴라 군을 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듬해 다시 돌아왔고 바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후 로벤섬에 투옥되었다. 그와 다른 피고들은 종신형을 선고 받았고, 넬슨 만델라는 이로부터 27년이 지난 후에야 석방된다. 그리고 자신이 꿈꾸던 이상을 실현한다.


로벤 섬에서 죄수의 우편물을 검열해온 제임스 그레고리는 흑인 죄수들, 특히 만델라는 지독한 테러리스트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레고리는 그들을 경멸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델라는 간수의 위협에도 자신감이 넘쳤고 당당하게 자신의 존엄을 주장했다. 그는 어떠한 종류의 굴욕도 순순히 참지 않았고 로벤 섬의 죄수들이 인정하는 가장 유명한 리더였다. 그의 인격에는 분명 간수들보다 훌륭한 점이 있었다. 그들도 그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제임스 그레고리 또한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 사실을 간파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친한 친구가 되었고,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레고리는 만델라가 주장하는 정의를 이해하게 되었고 진심으로 동조했다. 그들은 상대방을 깊이 신뢰했다. 서로에 대한 따뜻한 연민을 가지고, 섬 생활이나 가족의 혈통, 피부색이 인격을 결정한다고 믿는 멍청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지기 시작할 무렵, 그레고리는 만델라를 남아프리카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 데려갔다. 결국 이 만남으로 만델라의 사면이 결정되고 남아프리카의 진정한 다민족 민주주의가 도래하게 된다. 그리고 만델라가 석방된 지 3년 뒤 남아프리가 최초로 민주적인 선출 방식을 거쳐 대통령이 되던 날, 그레고리를 특별손님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그레고리는 한때 적으로 오인했던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델라는 자신을 억압한 정부의 대리인인 그레고리를 용서하는 법을 배웠다. 그레고리가 피부색과 상관없이 존경과 우정을 받아 마땅한 품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사랑은 증오보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심성이다. 넬슨 만델라는 자신이 사랑하는 나라에도 똑같은 지혜와 관용과 용서하는 마음을 베풀었다. 그의 희생과 헌신,흔들리지 않는 기품 덕분에 남아프리카는 그토록 염원하던 사랑이 충만한 나라가 되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