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이 아니라 ‘완벽에의 충동’인 이유에 대하여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삶을 향한열정은 언제나 진행형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빈틈없는 마침표인 ‘완벽’보다는 쉼 없이 도전하고 활화산 같은 역동의 에너지인 ‘완벽에의 충동’이야말로 세상을 움직이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은 모두 ‘완벽에의 충동’을 동력삼아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격정적으로 삶의 위기를 뚫고 삶의 새 지평을 연 사람들이다.
■ 저자 정진홍
성균관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중국연변과학기술대학 겸직 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 등을 지냈다. 2006년 현재 중앙일보논설위원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커뮤니케이션 중심의제 시대』『아톰@비트』『감성바이러스를 퍼뜨려라』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 삶의 고투하는 본능 - ‘완벽에의충동’
1. 시도하지 않은 것도 실패다
한계는 없다, 도전하고모험하라
가고자 하는 길에 모든 것을 걸어라
완벽에의 충동
마음에 새기는 글 - 과감하라, 과감하라, 항상과감하라!
2. 고난은 신의 선물이다
고난에담금질하라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패배를 패배시켜라
이 세상 모든 것은 희망이 만든다
마음에 새기는 글 -새클턴의 위기탈출 10계명
3. 세상을 사랑으로 숨쉬게 하라
당신의 이름은사랑입니다
삶은 나눌 때 더 커진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감동시켜라
영혼으로 승부하라
마음에 새기는 글 - 돈 없이도베풀 수 있는 7가지 보시
4. 삶의 향기를 뿜어내라
스타일이 곧매력이다
가슴으로 울고 웃게 하라
책 든 손이 이긴다
괴짜가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
마음에 새기는 글 - 디지털 시대 감성리더의 7가지 덕목
5. 리더는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족은 나의힘
리더는 혼자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한테도 배운다
마음에 새기는 글 - 성공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성공하는 화술도 따로있다
6. 나만의 리더십을 디자인하라
첫째도 둘째도사람이다
좋은 습관이 성공을 부른다
단순하게 살아라
긍정과 낙관을 퍼뜨려라
오로지 한마음으로 승부하라
업(業)의사람이 되자
마음에 새기는 글 - 인생 레이스의 7가지 원칙
맺음말 - 미리 쓰는 유서(遺書)
완벽에의 충동
1. 시도하지 않은 것도 실패다
반세기 전만 해도 1마일(약 1,609미터)을 4분 안에 달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의 통념은 1마일을 4분 안에 달리려 고집하면 결국 인간의 폐와 심장이 파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넘을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육체적ㆍ정신적ㆍ심리적 장벽이었던 셈입니다.
세계 최초로 이 ‘1마일 4분 벽’을 깬 로저 배니스터(Roger Bannister)는 전형적인 영국의 아마추어 육상선수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엑서터 칼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간 의대생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1마일 4분 벽에 도전하는 것은 영혼의 도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로저 배니스터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 1,500미터 경기에서도 유력한 우승 후보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성적은 예상을 깨고 기대에 턱없이 못 미친 4등에 그쳤습니다. 만약 그가 이 경기에서 우승했더라면 그는 아마도 ‘1마일 4분 벽’을 깨는 도전에 나서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헬싱키 올림픽에서의 패배를 만회해야 했습니다. 아니 그 패배를 패배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1마일을 4분 안에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1954년 5월 6일, 25세의 로저 배니스터는 드디어 1마일을 3분 59초 4로 주파해냈습니다. 결승점에 들어온 뒤 그는 산소 부족으로 온몸의 기관들이 작동을 멈추는 듯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로저 배니스터는 스스로 어떤 장벽을 깼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로저 배니스터가 마의 4분 벽을 깨고 난 후 잇달아 다른 선수들도 차례차례 4분 벽을 돌파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년 후엔 37명이 4분 벽을 넘었고, 2년 만에 그 숫자는 3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달리기 능력이 개선된 것이라기보다는 결코 넘을 수 없다고 여겨졌던 마음의 장벽을 로저 배니스터라는 젊은이가 깼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의 한계는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로저 배니스터가 돌파한 것은 단지 4분이라는 시간의 벽이 아니라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심리적 장벽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세상에 결코 도전하지 못할 것은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로저 배니스터.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는 진정으로 도전하는 리더의 표상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6여 년의 공백기를 극복하고 47세의 나이에 2003년 7월 윔블던 대회 혼합복식 우승컵을 거머쥔 나브라틸로바는 근 130여 년 된 윔블던 챔피언십의 역사에서 두 가지 의미 있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하나는 윔블던 대회에서 단식 9회, 복식 7회, 혼합복식 4회 등 통산 20회의 우승 타이틀을 거머쥠으로써 그동안 빌리 진 킹이 누렸던 다수 우승부문 기록과 타이를 이루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또 마거릿 듀폰이 지난 1962년 마흔넷의 나이에 세웠던 최고령 우승기록을 41년 만에 갈아치웠습니다. 1975년 프로에 데뷔한 이래 여자 프로테니스 투어 통산 단식 167회, 복식 170회 이상의 금자탑을 쌓은 나브라틸로바의 다음 목표는 그랜드슬램 대회 통산 타이틀 부문에서 1위에 오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96세를 일기로 타계한 전설적인 영화배우 캐서린 헵번이 생전에 나브라틸로바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에서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끝내느냐 하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끝내지 않은 일이 무엇인가를 되물었고, 자신이 끝내지 않은 일이 이미 6여 년 전에 은퇴했던 테니스 그 자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테니스는 화려한 성취였지만 그것이 단지 과거의 영광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미래를 던져서 끝마무리해야 할 인생의 전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6년의 공백을 깰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시간의 공백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테니스를 처음 시작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노력하고 분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챔피언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는 몇 개의 계정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성공의 계정’이고 다른 하나는 ‘실패의 계정’입니다. 그런가 하면 ‘도전의 계정’도 있습니다. 시도했다가 이루어낸 것은 당연히 성공의 계정으로 카운트해야 합니다. 하지만 시도했다가 이루지 못한 것은 실패의 계정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의 계정’으로 카운트해야 할 것입니다. 실패의 계정에는 해볼 만했던 것인데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가능성의 잔해들’로 이미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꿈을 이루는 사람은 끊임없이 시도하고 도전합니다. 그럼으로써 도전의 계정을 성공의 계정으로 탈바꿈시켜 갑니다. “시도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서 실패다”라고 말하는 나브라틸로바. 그녀는 우리에게 진정한 도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2. 고난은 신의 선물이다
파산 직전의 크라이슬러를 기사회생시켰던 전설적인 경영의 귀재, 리 아이아코카는 1946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받고 포드에 자동차 견습 엔지니어로 취직해 32년 동안 근무하며 이른바 ‘포드의 황금시대’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머스탱’의 대성공으로 1970년에는 포드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8년 7월 13일 헨리 포드 2세에 의해서 32년간 몸담았던 회사에서 한순간에 내동댕이쳐졌을 당시 그의 나이는 쉰다섯이었습니다. 포드에서 쫓겨난 아이아코카는 넉 달 후인 1978년 11월 2일, 크라이슬러 사장으로 취임합니다. 그를 기다린 것은 엄청난 적자와 누적된 재고, 그리고 무능한 간부들과 고질적인 사내분규였습니다.
그는 방만하게 운영되던 사업을 정리하고, 실용성과 파격적인 애프터서비스를 강조한 마케팅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1,2차에 걸친 석유파동 이후 절체절명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에 돌입했고, 크라이슬러의 가장 오래된 공장인 닷지 메인을 포함해 몇몇 공장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계열기업 중 21개를 정리해 수익성이 없는 사업을 과감하게 청산했습니다. 아울러 18만 명의 종업원 중 자그마치 5만 명을 정리해고하고 남은 종업원들의 연봉도 5% 삭감했습니다. 자신을 포함해 크라이슬러의 모든 구성원, 이해관계자들에게 균등희생의 원칙을 적용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비용절감을 위한 피나는 노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협력업체와 자동차 딜러, 그리고 소비자들에게 크라이슬러가 결코 파산하지 않을 것임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코카는 자신이 직접 광고에 출연해 ‘크라이슬러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와 ‘미국이 제조업을 버리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아울러 숱한 우여곡절 끝에 정부 보증대출 15억 달러를 얻어내 가까스로 크라이슬러의 숨통을 틔웠습니다. 그리고 위기가 걷힐 때를 대비해 전륜구동의 K-모델을 개발했습니다.
결국 1983년 아이아코카가 이끄는 크라이슬러는 상환기간을 무려 7년이나 앞당겨 정부 보증대출을 포함한 모든 부채를 청산합니다. 그리고 정리해고한 종업원들을 5년 만에 다시 불러들였고 5% 삭감했던 종업원들의 연봉도 원래 수준으로 올려놓았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단지 기적이 아니라 한 조직의 CEO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생존의 사투를 벌인 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었습니다. 아이아코카는 더욱더 노력하여 크라이슬러를 성장의 반석 위에 올려놓고 1992년 회장직을 사퇴한 뒤 아름다운 노년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이아코카가 현역에서 은퇴한 지 십 수년이 지났지만 그가 위기의 현실을 돌파하며 보여준 리더십을 아직도 사람들은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도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울려나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이렇게 던집니다. “피하지 마라, 고난을. 그것은 당신에게 내린 신의 선물이니까.”
언젠가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천년간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한 바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탁월한 리더로서의 몇 가지 역량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대규모 부대를 먼 곳까지 신속하게 이동시키는 지휘력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동수단을 갖고 있어도 그것을 한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지휘 역량이 없으면 결코 속도는 나지 않습니다. 둘째는 숱한 전장에서 보여준 신속한 판단력입니다. 모름지기 리더는 현장을 중시하고 그 속에서 신속하고도 즉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위대한 리더의 존재 이유입니다. 셋째는 과감한 결단력입니다. 그는 사태를 예의 주시했지만 사소한 걱정 때문에 큰일을 주저하지는 않았습니다.
훗날 징기스칸은 자신이 테무친이던 시절에 겪었던 가혹한 시련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난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마라. 나의 병사들은 적들의 백 분의 일, 이백 분의 일에 불과했지만 세계를 정복했다. 배운 게 없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내 이름도 제대로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고 또 지혜를 구했다. 너무 막막해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도 살아남았다.”
칭기즈칸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과 부족의 미래를 긍정하고 낙관했습니다. 바로 이 긍정과 낙관이 그를 일개 부족장의 아들 테무친에서 칭기즈칸으로 위치 이동시킨 근원적 힘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 세상을 사랑으로 숨쉬게 하라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였던 마더 테레사. 그녀는 작은 키에 주름투성이 손과 앙상한 얼굴을 가졌지만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1928년 그녀는 18세 때 아일랜드에 본부를 두었던 로레토 수도회에 들어가 그곳에서 영어와 수도회의 회헌 및 규칙을 배운 후 그해 12월 선교에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자청해서 인도 벵갈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21세였던 1931년 2년간의 수련생활 끝에 첫 서원을 하고 수녀가 되었고 27세 때인 1937년에 종신서원을 합니다.
그후 로레토 수도회가 운영하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십 수년간 지리와 역사 그리고 가톨릭 교리를 가르쳤고, 34세 때인 1944년 성 마리아 학교의 교장이 되었습니다. 그 즈음 인도 벵갈 지방에는 극심한 기근에 전쟁,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유혈충돌이 벌어져 벵갈 주의 수도였던 캘커타의 거리에는 고아와 난민, 병자들로 넘쳐났습니다.
마데 테레사는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로레토 수도회를 나와 아예 인도 국적으로 귀화하고자 캘커타 빈민가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40세가 되던 1950년에는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해 빈민, 고아, 나병환자,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적극 나섭니다. 죽더라도 보다 인간답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 버려진 아이들, 장애아들을 돌보는 집, 장기요양소와 무료 급식소도 열었습니다.
그녀는 각종 단체와 나라로부터 수많은 상을 받았지만 그 어떤 상도 마더 테레사의 섬기는 삶의 숭고한 가치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997년 마더 테레사는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쓰다 남을 것을 남에게 주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동정이지 베풂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베풂은 진정한 섬김입니다. 거기에는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마더 테레사는 자기 희생에 바탕한 서번트 리더십의 절정입니다. 평생 옷 두 벌과 성경책 한 권이 가진 것의 전부였던 마더 테레사. 하나님의 작은 몽당연필뿐이라며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었던 마더 테레사. 그녀로 말미암아 사랑의 결핍으로 질식할 것 같던 지구는 다시 숨을 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화 <툼 레이더>의 매혹적인 여전사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안젤리나 졸리. 세계 27개 국 1,500만 명의 남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여성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지아> <처음 만나는 자유> <본 콜렉터> <툼 레이더> <알렉산더> 등을 통해 우리 시대의 탁월한 여배우로 자리를 굳혔습니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 워싱턴에 있는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탈북자를 포함한 세계난민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국제난민지원운동은 결코 화제성의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안젤리나 졸리는 지난 2001년 <툼 레이더> 촬영을 위해 캄보디아를 방문하면서 내전을 겪고 있는 난민들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곤 이를 계기로 국제난민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도울 방법을 모색하던 그녀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을 찾아가 자원봉사활동에 나섰습니다.
바쁜 영화 촬영 일정 틈틈이 전 세계 난민밀집지역을 직접 방문해 주로 어린이 난민지원활동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원해서 캄보디아의 난민 고아를 자신의 아들로 입양해 키우고 있으며, 최근 아프리카에서 또 한 명의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그동안 난민지원을 위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등에 기부한 돈도 한 집계에 따르면 300만 달러가 넘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그 사람의 외모나 마음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는 방식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안젤리나 졸리는 그 사는 방식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전 세계의 가난한 난민들의 수호천사로 나선 그녀야말로 이 광포한 시대에 아직도 우리로 하여금 살맛나게 하는 진정한 매력의 원천입니다.
4. 삶의 향기를 뿜어내라
『당신이 죽을 때 누가 웃어줄까?(Who Will Cry When You Die)』라는 책의 저자이자 리더십 분야의 권위자 중 한 사람인 로빈 샤르마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 당신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죽을 때 사람들은 울음을 터뜨리겠지만 당신 자신은 웃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본명이 정주일인 고(故) 이주일은 로빈 샤르마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빈소에 놓인 그의 영정은 웃고 있었지만 그를 떠나보내는 사람들은 다들 너무나 슬프게 울고 있었기에 하는 말입니다. 이 나라의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그의 빈소를 찾았고,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들이 사설이나 칼럼으로 또는 추모특집을 방영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의 무엇이 그토록 한결같은 추모의 분위기로 몰고갔던 걸까요?
그는 ‘20년 바닥, 20년 정상’이라는 말처럼 인생의 희비쌍곡선을 극적으로 그리며 살다간 사람입니다. 지난 1999년 겨울, ‘이주일의 울고 웃긴 30년’이란 그의 생애 마지막 고별 무대에서 그는 무대 위에 벌렁 드러누워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울고 있는데 왜 여러분은 웃으십니까?” 어쩌면 이 한마디가 그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니었나 싶군요. 그렇게 알게 모르게 그의 아픔을 반대급부로 해서 삶의 위안을 얻었던 사람들이었기에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향해 미안한 마음까지 겹쳐 진심으로 애도해 마지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그는 죽는 날까지도 사람들과 언론의 관심 속에 있었습니다. 관심이 지나쳐 그의 죽음을 알리는 부음기사가 정작 그의 진짜 운명시각보다 5분 앞서 타전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저 세상으로 가면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던져준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진짜 코미디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살아서는 사람들의 고달픔을 웃음으로 달래고 그것도 모자라 죽어서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우리 모두에게 되묻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결핍되었던 ‘웃음의 비타민’을 가장 값싸게 공급해주었던 코미디언 중에서도 ‘비실이’ 배삼룡은 그 특유의 개다리춤과 바보스러운 연기로 별반 웃을 일 없던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웃음의 비타민을 뿌려주곤 했습니다. 1946년 유랑 악극단의 연습생으로 있다가 우연히 ‘대역’으로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2002년 쓰러졌다가 기적적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한 달의 절반 정도는 전국 각지로 공연을 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현재까지 배삼룡은 근 60여 년 가까운 세월을 한 길만 고집해온 코미디언입니다.
그의 코미디 연기에는 나름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낮춰서 남을 높인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결국 그의 바보 연기는 “나는 당신만 못합니다.”, “나는 매사가 부족합니다”라는 것을 바탕에 깔고서 사람들을 무장해제시키고 난 후 그 틈새로 웃음의 비타민을 쏟아붓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경계심을 풀잖아요”라는 말 속에는 그가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리더라면 누구나 강해 보이길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강해보이려고 할수록 허점이 더 많이 눈에 띄게 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 아닐까요? 차라리 자신이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 상대의 긴장을 풀고 더 나아가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웃음과 유머를 한 자락 깔 수 있다면 상대는 결코 당신을 우습게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친근감을 표시하고 우러러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웃음의 승리학이며 유머의 리더십인 셈이죠.
“가슴으로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야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라고 말하는 원로 코미디언 배삼룡. 그는 긴장의 연속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신을 낮추면서 상대의 경직된 틈새를 타고 넘어 상대의 긴장을 풀게 만들고 함께 웃을 수 있게 하는 유머와 웃음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5. 리더는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통령의 부인을 ‘퍼스트 레이디(first lady)라고 부르듯이 대통령의 어머니를 가리켜 ’퍼스트 마더(first mother)라고 말합니다. 『대통령의 성격(The President Character)』이란 책을 쓴 제임스 데이비드 바버는 대통령의 성격이 대체로 그의 어머니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을 이끌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지칠 줄 모르는 자신감과 낙관은 당시 길을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미국인들의 사기를 높여주었는데 그에게 그런 자신감과 낙관을 심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 사라 덜레노 루스벨트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급작스런 서거로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에 오르게 되자, 트루먼의 어머니 마사 영 트루먼은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장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라.” 마사 영 트루먼은 평생토록 그의 아들에게 상식적인 이야기만 반복했지만 바로 이것이 결국 트루먼으로 하여금 긴급한 상황 하에서 대통령으로서 일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사실 해리 트루먼은 대학을 다니지 못했지만 어머니 마사에게 물려받은 독서습관 덕분에 20세기의 미국 대통령 중 역사에 대해 가장 해박했던 인물이란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로즈 피츠제럴드는 보스턴의 막강한 시장 딸로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와 결혼한 뒤에도 자신의 처녀 때 성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딴 큰아들 조지프 케네디 2세 대신 그녀의 자랑스러운 피츠제랄드 성을 이름으로 가진 둘째 아들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아이들에게 야망을 키워주고 스포츠에서든 정치에서든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역설했던 반면에, 어머니 로즈 피츠제럴드는 그들에게 이기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써줘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지미 카터의 어머니 릴리안 고디 카터, 조지 W. 부시 현 미국 대통령의 할머니 도로시 워커 부시 등 퍼스트 마더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힘이 다름 아닌 어머니의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었습니다.
1930년대의 대장정에서 1940년대의 항일전과 국공내전 그리고 1950년대의 대약진운동과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을 거쳐 1970년대의 대미수교에 이르기까지 저우언라이(周恩來)가 걸어온 길은 곧 파란만장한 중국현대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 파란의 세월 속에서 저우언라이는 줄곧 2인자였습니다. 그 덕분인지 중국에서 절대권력의 화신, 마오쩌둥을 제외하고는 류사오치, 린뱌오, 장청과 4인방, 그리고 덩샤오핑 등 숱한 인걸들이 부침을 거듭했지만 저우언라이만은 예외였습니다. 그는 부동의 2인자 자리를 고수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1인자는 부동의 2인자를 내켜하지 않는 법입니다. 2인자가 언제 어느 순간에 돌아서서 자신에게 칼 끝을 들이댈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1인자는 끊임없이 2인자 그룹을 경쟁시키면서 계속 2인자를 갈아치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그 어렵고 위험한 자리를 40년 이상 지켜왔습니다. 그것도 단지 자신의 영달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헌신하며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1인자 마오쩌둥이 동물적인 정치 감각과 농민 출신 특유의 저돌성 그리고 때론 광기로 돌변하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무기로 했다면 2인자 저우언라이는 치밀한 균형감각과 인텔리풍의 세련된 이미지, 그리고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어떤 상황에서도 놓치지 않는 대단한 현실 감각의 소유자였습니다. 즉 마오쩌둥은 크게 사고치는 스타일이었지만 그것을 뒷수습해서 일이 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철저히 저우언라이의 몫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때로 시기하고 그에게 결코 전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내지도 않았지만 저우언라이가 아니고서는 그처럼 모든 일을 규모 있게 수습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결국 그를 부동의 2인자 자리에 놓아두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저우언라이에게는 비밀경찰의 지휘권도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도 없었지만 인민 대중의 지지라는 가장 확실한 버팀목을 지니고 있었기에 마오쩌둥은 그를 결코 외면할 수도 쳐낼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저우언라이는 사실상 중국이라는 거대한 함선의 키를 쥐고 숱한 풍파를 넘어온 탁월한 조타수였습니다. 또 ‘포스트 마오’, 즉 마오쩌둥 이후를 책임질 사람이 덩샤오핑임을 가장 먼저 간파하고 그의 후견일 역할을 죽을 때까지 했던 사람도 바로 저우언라이였습니다. 사실상 저우언라이가 깔아놓는 길 위에서 덩샤오핑이 개혁ㆍ개방의 마차를 굴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마오쩌둥은 신으로 군림했지만 저우언라이는 인민대중과 고락을 같이 하면서 그만의 향기를 짙게 남겼습니다. 그는 오늘도 중국민의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딱딱한 동상의 모습이 아니라 짙은 눈썹과 온후한 미소를 머금은 대중의 벗으로 말입니다.
6. 나만의 리더십을 디자인하라
1981년 2월 재선에 실패한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백악관을 떠나야 했을 때 그의 나이 겨우 쉰여섯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완숙한 나이였고 신체적인 건강도를 감안하더라도 은퇴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습니다. 솔직히 카터에게 대통령직에서의 퇴임이란 무덤 앞에 선 것과 다를 바 없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카터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이란 점점 확대되는 것이지 결코 축소되는 것이 아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서에서도 중간 정도 되는 대통령이었던 카터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지난 사반세기의 세월 속에서 아무런 보수나 명예도 없이 니카라과, 북한, 쿠바, 동티모르 등지를 찾아가서 화해와 협상의 메신저 역할을 해냈습니다. 또한 그는 손수 망치와 톱을 들고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Hanitat) 운동 같은 소박한 일상 속의 실천활동을 통해 우리 앞에 한 사람의 평범한 일꾼의 모습으로 서 있으면서도 진정한 당당함과 위대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영원한 현역 지미 카터는 『나이 드는 것의 미덕』이란 자신의 책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후회가 꿈을 대신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늙기 시작한다.” 카터가 진정으로 위대한 까닭은 그가 퇴임 후 나이가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상을 ‘꿈’으로 채워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결코 늙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현역’입니다.
이미 평생직장이란 말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심지어 요즘에는 30대에 무슨 수로든 승부를 내지 않으면 미래가 보장되지 못하는 초단기 사이클의 직업세계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우리가 ‘인생 60’이 아니라 ‘인생 80’ 아니 ‘인생 100’의 시대로 내닫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인생 60’이라는 전제 하에 디자인된 삶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녕 ‘인생 100’의 시대를 열어가려면 우리 사회 전체가 다시 디자인되어야 합니다. 개개인들 역시 자기 삶의 디자인을 다시 짜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 100’의 시대를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첫째, 시간 쓰는 법을 새로 배워라. 둘째, 일과 여가를 조화롭게 배치하라. 셋째, 한 우물만 파지 말고 할 수만 있다면 여러 우물을 파라. 넷째, 끊임없이 새로 친구를 만들어라. 다섯째, 두 번 결혼할 각오를 해라. 여섯째, 항상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이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긍정하라. 일곱째. 인생이란 점점 확대되는 것이지 결코 축소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마라.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