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IMF 시절 잘 나가던 사업가에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길거리호떡장수로 나선 김철호 사장과 그 가족의 가슴 찡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1장, 지금의 본죽이 탄생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담긴 2장, 본죽의 성공비결과 경영 전략과 비법, 조직관리 노하우가 실린 3장, 본죽과 김철호 사장의 경영 철학과 삶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저자 김철호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충남대학교를졸업하고 1988년 한국일보사에 입사하여 광고개발부에서 일했다. 1993년 인삼제품 제조 및 판매회사인 (주)우신으로 사업을 시작하며 목욕용품전문업체인 우신HM, 우신홈쇼핑의 대표를 역임하는 등 사업을 크게 일으켰으나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부도처리되는 아픔을 겪었다. 1999년연세대학교 생활환경대학원 외식고위자과정을 수료하고 (주)맛깔컨설팅을 창업하여 경영 컨설턴트로 활동하였다. 그러다 2002년 아내 최복이와 함께서울 대학로에서 죽 전문점 "본죽"을 개업하면서 다시 사업의 길로 나섰다. 2005년 현재 비제이아이에프(주), 비제이식품(주),비제이유통(주), BJIF.JAPAN(株), BJIF.U.S.A.INC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으며, 올해 "2005 한국 프랜차이즈 대상"을수상하였고, SBS "중소기업의 힘"에 성공사례가 방영되었다. 저서로는 『그래도 음식장사가 승부가 빠르다』 『일억 버는 음식점, 일억 날리는음식점』 등이 있다.
■ 차례
제1장 인생에는 참고 버텨 내야 할 시기가 있다
나의 실패를 냉정하게 직시했다
고난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닥쳐온다
남겨진 것은 승합차 한대였다
과감히 포기하는 지혜를 배웠다
먼지 묻은 관심거리를 찾아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업료를 치르다
이를 악물고버텨야 한다
아내는 내 희망의 뿌리였다
아내의 빈자리
서로에게 미안했던 부부
정장차림을 한 호떡장수
무얼하든 아내는 나의 힘
가화만사성이야말로 변치 않은 진리다
제2장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띄운 승부수
오직내 판단을 믿었다
고정관념을 깨자 기회가 보였다
확신한다면 끝까지 고집한다
시장조사를 통해 자신감도 얻었다
6개월동안 죽만 먹고 살ㄹ았다
점포 선정은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본에 충실하자는 뜻에서 본죽
인테리어 컨셉이 바로 본죽의 미래였다
장사 하루 이틀 할 게 아니다
이왕 벌려 놓은 일, 희망의 싹을 틔워보자
처음 정한 원칙이 정답이다
정장을 한 본죽부부의 전단 뿌리기
3개월 만에 1차 목표를 달성하다
1호 가맹점을 오픈하며 흘린 눈물
그냥 얻어진 행운이 아니다
제3장 혼을 담은 죽 한 그릇, 본죽 이야기
잊혀진음식, 죽을 되살리다
소형 전문화 전략이 답이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맞춤 죽
여성의 입맛을 만족시켜라
전국어디서나 똑같은 맛으로
퍼줘도 망하지 않는다
배달은 절대 사절
스파르타식 일대일 맞춤교육
내 형제가 한다는 마음으로점포를 선정한다
철저한 준비와 리허설 없이는 오픈할 수 없다
많이 파는 것보다 제대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친정어머니의마음이 바탕이다
본사와 가맹점은 한 가족이다
무리한 사업확장을 경계한다
꿈꾸는 죽장수가 있는 곳
제4장 본죽이 고수하는 음식장사의 본
죽의 미래를확신하다
정성, 사랑, 건강이 기본이다
오직 당신을 위하여
본을 지키는 경영철학
본죽에는 암해어사가 있다
브랜드는 살아 있는 생명이다
본사와 가맹점은 2인3각 경주자이다
전통죽으로 세계를 겨냥하다
꿈을 담은 죽 한그릇
에필로그
꿈꾸는 죽장수
제1장 인생에는 참고 버텨 내야 할 시기가 있다
고난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닥쳐 온다
현실이 절망적일수록 나는 긍정적인 면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체념하고 포기하기 쉽다. 하지만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내게 닥친 절망의 순간에 ‘살다 보면 내 뜻과는 상관없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 뜻이 있기에 닥쳐온 시련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교만을 버리고 잃어버린 감사의 마음을 되찾으라고 주어진 시련’으로 내게 닥친 일들을 정의할 수 있었다.
장에 가면 소도 보고 말도 본다? 이 말뜻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장에 가면 자신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이것저것 보게 되는 것처럼, 살아가다 보면 좋은 일도 생기고 나쁜 일도 겪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좋은 일 나쁜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장에 가면 소도 보고 말도 본다!’ 그 순간 포목점을 하여 1남 4녀를 가르친 어머니가 평소 하시던 말씀을 떠올린 것은 행운이었다. 자칫하면 절망과 좌절에 빠져들었을 그 순간, 인간의 뜻과는 상관없이 고난과 행복이 다가온다는 어머니의 말씀처럼 위안이 되는 말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고난은 언제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다가왔다.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누구에게나 고난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되어 찾아온다. 그것은 내게만 주어진 특별한 시련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다가올 수 있는 고난이었기에 남겨진 것은 선택이었다. 고난 앞에 절망하고 좌절하느냐,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가느냐, 선택해야만 했다. 나는 과감히 다른 길을 찾아 나가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억울해 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시작할 때는 빈손이었다. 몇 년 동안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그것은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밑진 것은 없었다. 그 동안 사회도 경험했기에. 경험만큼 값진 것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그리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다른 길을 찾아나가기 위해서 지금 해야 할 일을. 그것은 바로 나로 인하여 손해 보는 사람이 없도록 노력하는 것이었다.
제2장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띄운 승부수
1호 가맹점을 오픈하며 흘린 눈물
하루 평균 매출이 100그릇을 넘어서면서 매출 증가는 탄력을 받았다. 꾸준히 손님이 늘어나면서 입소문도 널리 빠르게 퍼져 나갔다. 초창기에는 매출의 기복도 심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리고 개업 후 약 3개월이 지난 12월부터는 점심시간이면 항상 계단 아래 점포 입구까지 손님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 자리에서 장사하면 망한다”며 충고하던 사람들과 죽 전문점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말하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주변에서 본죽은 가장 성공한 점포로 자리 잡았다.
그때까지 가맹점 개설에 관한 어떤 광고나 안내도 한 적이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가맹점을 오픈하고 싶다는 문의가 계속 들어왔다. 그러다가 결국 2002년이 채 가기 전에 가맹점 개설을 시작하게 되었다. 본죽의 맛과 색다른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프랜차이즈 사업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가맹점 개설을 앞두고 아내가 본죽의 사업화에 반대하고 나섰다. 아내는 가게가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는 편안하게 살자고 했다. 나의 사업 실패로 호된 시련을 겪은 아내였기에 그런 불안한 심정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아내가 본죽을 시작하게 된 것은 내가 가계에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서였다. 그랬기에 아내가 그리는 성공은 소박했다. 가계에 필요한 수입을 거두는 선에서 본점 운영만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나는 시작할 때부터 죽 전문점의 사업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터였다. 그리고 이미 가능성을 확인했기에 성공할 자신도 있었다. 나는 아내를 설득했다.
“좀 더 넓게 생각합시다. 우리만 먹고사는 것보다 여러 사람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겠소.” 나의 계속된 설득에 아내는 마지못해 본죽의 사업화를 찬성하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니까 찬성하는 거야.” 그 이후로 가맹점 개설은 급물살을 탔다. 아내는 새로 본죽을 창업하는 점주에게 꼬박 3일에 걸쳐 본죽의 모든 노하우를 전수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3일 동안은 시장을 보는 것에서부터 오픈 현장 지원까지, 아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내주었다. 당시만 해도 하나에서 열까지, 창업과 운영에 관한 모든 것을 아내가 철저하게 준비해 주고 직접 노하우를 전수하는 방식이었다.
첫 번째 가맹점을 오픈하여 주던 날, 아내는 교육을 마치고 나서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무기력하고 말이 없었다. 그동안 어렵게 노력하고 준비한 것들이 일순간 다른 사람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전수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허전함과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첫 번째 가맹점을 내주던 날 아내는 눈물을 흘렸다. 본죽을 시작하고 난 뒤에 흘린 두 번째 눈물이자 마지막으로 흘린 눈물이었다. 나는 아내의 허전함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 복잡한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나 또한 아내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아내는 가맹점이 오픈할 때마다 온 정성을 다해 가맹점 사장들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아무런 경험이 없던 그들이 문제없이 창업을 하고 성공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 누구보다도 커다란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지금도 아내는 가맹점 사장들을 교육하면서 얘기한다. 마치 딸을 시집보내는 친정 엄마의 심정이라고.
제3장 혼을 담은 죽 한 그릇, 본죽 이야기
잊혀진 음식, 죽을 되살리다
“왜 하필이면 그 많은 음식 중에서 죽인가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물었다. 향후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외식사업 업종은 많이 있었다. 폼 나고 깔끔한 업종도 고르려고 들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케케묵은 음식이라고 생각한 죽을 뽑아 들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은 환자나 어린아이들이 먹는 음식이었다. 아이디어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환자나 어린아이에게 먹이는 음식의 특징이 무엇인가. 바로 영양가 높은 완전식품이 아닌가. ‘식은 죽 먹기’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죽은 누가 먹어도 소화하기 쉬운 음식이다. 죽에 주목한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뒤집어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나는 당시 유명한 죽집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님들의 구성과 반응을 보면서 죽도 충분히 외식사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의외로 일본인들이 죽집을 많이 찾는 것을 보면서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여러모로 죽집의 성공 가능성과 전망을 확인한 뒤에 나는 창업 컨설팅의 일환으로 사람들에게 죽 전문점을 권했다. 하지만 컨설팅을 받는 사람들은 내 설명에는 대체로 수긍하면서도 막상 결심을 해야 할 단계가 오면 예외 없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 말이 맞긴 한데….”
많은 사람들에게 죽 전문점을 권했지만, 아무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직접 하겠다고 나섰을 때에도 모두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말렸다. 그 중에는 아내도 있었다. 대학로 본점이 개업한 지 3년이 지난 지금, 본죽 470여 개 가맹점에서 한해 올리고 있는 매출은 1,600억 원에 이른다. 여기에 다른 죽 전문 가맹점과 일반 죽 전문점에서 올리고 있는 매출을 감안하면, 국내 죽 전문점 시장은 대략 2,000억 원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어느 음식점에나 걸려 있을 법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구절에 딱 들어맞는 것이 바로 죽 시장이다. 게다가 죽은 성장이 멈춘 시장이 아니라, 이제 막 성장 단계에 접어들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발전 가능한 시장이다. 그만큼 잠재적 수요가 많다. 나에게는 죽이야말로 블루오션이었다. 죽이라는 훌륭한 전통음식으로 개척한 새로운 시장이 바로 본죽이었다.
제4장 본죽이 고수하는 음식장사의 본本
꿈을 담은 죽 한 그릇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죽이었다.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죽은 죽이지’ 하는 것이 불과 몇 년 전까지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죽 전문점을 만들고, 죽을 통해 프랜차이즈 사업을 구상했던 나 역시 죽을 통해 이렇게 크게 얻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노력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시작했을 뿐이다. 그 믿음이 이렇게 현실로 되고 보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본죽 지킴이’를 자처하는 나는 꿈을 꾸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꿈일 뿐이라고 할 때는 마음도 많이 아팠다. 하지만 나는 실패의 경험을 안고 있었기에 빨리 성취하는 것의 위험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원칙과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마침내는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포기하지 않고 간직한 꿈은 어느 날부터 서서히 현실에서 이뤄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죽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방법으로는 음식점을 운영할 수 없다고 했지만, 정직하게 ‘본’을 지켜 가자 고객들이 먼저 알아주었다. 내가 제시하는 방법으로는 절대 프랜차이즈 사업을 할 수 없다고 했지만, 지금은 본죽을 일컬어 프랜차이즈 사업계의 전형과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과분한 평가도 들려준다. 대학로 후미진 골목 귀퉁이에 죽 전문점을 내면서 꿈을 꾸었던 죽장수는 이제 새로운 꿈을 꾼다. 죽을 팔아 얻은 수익으로 이 땅에서 한 끼 ‘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통 받는 사람들 곁에 다가가려고 한다.
내 어머니는 자신이 한 일을 떠벌리는 것을 큰 수치로 여기며, 아니한 것만 못한 것으로 생각하신다.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나는 본죽이 실천해온 것과 목표를 이야기하려 한다. 본죽 가족 전체가 자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나와 본죽이 받은 축복에 비하면 너무 작지만, 작은 실천이 모여 큰 것을 이룬다는 믿음으로 계동 등 직영점의 수익을 떼어 ‘밥생명공동체’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밥생명공동체 운동에 대한 지원은 9개 전 직영점과 얼마 전 문을 연 일본 아카사카 직영점에서도 실시하고 있다. 이렇게 모인 돈은 대학로와 천안역 광장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이웃들에게 밥으로 변해서 제공되고 있다. 이것은 대학로 본점이 문을 연 이래, 첫 손님에게 판 음식 값은 모아두었다가 불우이웃돕기나 성금 등으로 기부했던 활동의 연장이다. ‘조금만 나중에’, ‘형편이 좀 더 나아진 다음에’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실천하기 어려워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것을 가지고 본죽이란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너무 부끄럽다. 하지만 내게 이것은 약속이다. ‘더 크게 얻어 나누리라’던 약속의 실천이다. 앞으로 본죽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얻고 더 많은 열매를 나누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지금은 그 도움이 미미하지만, 본죽이 존재하는 한 지원은 계속될 것이고 점차 늘어날 것이다.
나는 요즘도 꿈을 꾼다. 그 꿈은 예전에 비해 좀 더 커졌다. 본죽으로 인해 한 끼 식사를 해결하지 못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줄어들기를, 본죽이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가 우리의 입맛과 원칙이 알려지기를 희망한다.
나는 이 꿈을 꼭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미 ‘그깟 죽으로’라는 선입관과 편견을 딛고 지금의 본죽이 이뤄지지 않았는가. 꿈을 버리지 않는 이상, 본죽 가족의 헌신과 원칙이 살아 있는 이상, 본죽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처음의 모습 그대로 성장할 것이다. 나는, 그리고 본죽 가족 모두는 그렇게 믿고 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