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리치

   
마틴 S. 프리드슨(역자: 안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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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미디어
   
18000
2010�� 02��



>& ■ 책 소개
존 록펠러, 워렌 버핏, 빌게이츠, 샘 월튼, 로스 페로, 리처드 브랜슨, 폴 게티는 어떤 통찰력과 전략으로 억만장자가 되었을까? "거대한 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억만장자 14인의 통찰력과 전략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존 록펠러, 워렌 버핏, 빌 게이츠, 샘 월튼, 로스 페로같은 슈퍼리치들은 과연 끈질긴 집념과 근면성실한 태도, 큰 야망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일까? 이 책은 그들이 독점과 합병, 정치적 로비와 노조무력화, 저가 매입 후 매각, 세금 혜택, 아이디어를 훔쳐 모방하기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부를 축적해갔다고 말한다. 이 책은 억만장자14인의 부의 비밀을 파헤쳐보고, 구체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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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마틴 S. 프리드슨(Martin S.Fridson)

메릴린치앤드컴퍼니의 전무이사를 역임했으며 미국 투자관리연구협회(AIMR, Association forInvestment and Research)의 중역으로도 활동했다. 저서로는 『It was a Very Good Year』『InvestmentIllusions』『Financial Statement Analysis』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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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안정원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경영대학원 MBA 석사를 마쳤으며 하이닉스 인재개발원에서 교육 업무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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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제1부 슈퍼리치의조건
1. 당신은 정말로 부자가 되고 싶은가?
2. 어떤 사업에 뛰어들어야 할까?

제2부 슈퍼리치의 전략
3. 불멸의 모험을 즐겨라- H. L. 헌트, 존 클러지 
4.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라 - 로스 페로, 샘 월튼 
5. 시장을 선점하고 지배하라 - 존록펠러, 빌 게이츠 
6. 사업을 더 크게 합병하라 - 웨인 휘젠거 
7. 낮은 가격에 매입하라 - J. 폴 게티, 로렌스 티시,워렌 버핏 
8. 협상을 냉철하게 즐겨라 - 커크 커코리언, 칼 아이칸, 필 안슈츠 
9. 경쟁심을 자극하라 - 리처드브랜슨
10. 정치적 영향력에 투자하라
11. 노조와의 협상에서 이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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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슈퍼리치의 탄생
12. 이제 당신차례다




슈퍼리치


제1부 슈퍼리치의 조건

당신은 정말로 부자가 되고 싶은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듯이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억만장자들의 기본적인 특징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부의 추구를 즐긴다는 것이다. 상을 받는 것보다 이겼다는 만족감 그 자체가 그들을 보통의 재력가에서 순자산 가치 10억이라는 슈퍼리치의 대열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자수성가한 억만장자들 중 많은 사람의 삶은 소박하다. 샘 월튼과 워렌 버핏은 자신들의 막대한 재력으로 사치스러운 토지를 사들이는 것을 거절했으며, 로스 페로와 필 안슈츠는 그리 비싸지 않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만족했다. 다른 슈퍼리치들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물질적 욕망을 좇기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했다.


웨인 휘젠거는 쓰레기 수거 회사인 웨이스트 매니지먼트의 성공을 바탕으로 블록버스터 엔터테인먼트도 성공하는 쾌거를 이룩한 다음 자동차 판매업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데 착수했다. 마찬가지로 필 안슈츠도 퀘스트 커뮤니케이션스를 설립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분야의 사업인 석유와 철도사업에 뛰어들어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전반적으로 억만 달러의 순이익을 거두는 데 성공한 사람들은 그들이 이룩해놓은 것을 단순히 지키려 하기보다는 자신을 능가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커크 커코리언이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 목표는 10만 달러였다고 한다. 나중에 그가 100만 달러를 벌었을 때, 자신이 마침내 해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1억 달러를 벌고 난 후에 그는 무엇이 그를 자극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 돈은 아닙니다." 30년이 지나 10억 달러를 벌고 난 후 80대에 들어선 그는 여전히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단순한 부의 소유는 부의 추구에서 오는 짜릿함을 결코 대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2부 슈퍼리치의 전략

불멸의 모험을 즐겨라 - 존 클러지

존 클러지는 경제 공황이 한창이던 때 컬럼비아 대학에서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도박에 거의 미쳐 있었다고 한다. 그가 도박에 너무 집착하자 대학 학장이 경고를 하기에 나섰고, 존 클러지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까지 해야 했다. 훗날 그가 사업을 할 때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대학 강의실에서 익힌 원칙들이 아니라 포커 게임을 하면서, 그리고 감시망을 피해가면서 익힌 여러 가지 교훈들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는 모교에 1억 달러 이상을 기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정보부에서 복무한 후에, 클러지는 대형 음식도매 할인점에서 일하면서 드디어 그의 첫 사업인 라디오 방송국을 사들이게 되었다. 그는 은행에서 5천 달러를 빌려서 그중 1천 달러만 사용했다. 그리고 사업체를 50만 달러에 팔았다. 클러지는 1984년에 메트로미디어를 사들였다. 그가 25%의 주식 지분을 가지고 지난 25년간 운영해왔던 미디어 제국이 주식시장에서 그다지 좋은 가치평가를 받지 못하자 그 회사를 아예 통째로 사들이기로 결심했다. 클러지는 인수를 위해 12억 달러를 빌렸다. 그것은 미디어 업계 역사상 가장 큰 차입매수(LBO, leveraged buy out, 기업 매수자금을 매수대상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조달하는 방법)였다. 전문가들이 보기에도 그 당시까지 시도된 거래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었다.


클러지는 단기간 내에 빚을 청산하기 위해 메트로미디어를 해체시켜서 계열사별로 팔아치워야 했다. 그러나 곧 프리미엄 가격에 자산을 빨리 처분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문제는 잠재적인 인수자들이 미국 연방통신위원회가 정한 추가로 소유할 수 있는 방송국 수의 제한에 걸린다는 것이었다. 2년이 지난 후에 방송국 자산에 대한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클러지는 7개의 TV 방송국과 11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내놓았다. 경매로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아이스 커페이즈와 같은 사업체와 클러지의 이동통신 사업체도 팔렸다. 통이 큰 노련한 이 경영자는 마침내 엄청난 부채 더미를 청산했을 뿐만 아니라 어림잡아 16억 달러의 순익까지 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러지는 그렇게 남긴 수익을 이동통신 사업에 재투자했고 관련 벤처들을 인수하여 1989년까지 「포브스」 선정 미국 최고 부자 리스트에 오를 수 있었다.


클러지는 메트로미디어를 차입매수하면서 재정적으로 약삭빠르게 움직이며 채권 보유자가 떠안고 있는 리스트의 상당 부분을 줄여나갔다. 당시에는 높은 수익률을 제공하는 채권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소액 투자자들은 이러한 고위험-고수익 증권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뮤추얼 펀드에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그 결과 월스트리트는 전형적인 고수익 채권 발행 회사들, 즉 성숙기 산업에서 투자 자금을 날리기 일쑤이며 심각한 부채를 떠안고 있는 회사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입매수가 그 틈새를 메우기 시작했다. 비록 그런 거래가 이전부터 사채와 주식의 중간 형태를 취한 중간층 사채 시장에 의존해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한 시장에서는 채권 보유자에게 부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벤처기업의 리스크를 상당 부분 보상해주기 위해 신주인수권과 같은 주식 감미료를 제공했다.


클러지는 금융재무적인 식견을 활용하는 데 민첩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큰 리스크를 감수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 즉 행운의 특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만약 이자율이 상승했거나 또는 클러지가 사들인 방송국 자산의 가격이 오르지 않았다면, 메트로미디어의 차입매수가 결국 클러지를 파산시켰을 것이다. 물론 클러지에게도 훗날 불행이 찾아왔다. 메트로미디어 매각을 끝낸 후에 그가 선택한 오리온 픽처스라는 영화 스튜디오와 폰데로사 앤드 보난자 스테이크 하우스 체인점 모두 대박을 터뜨리지 못했다. 또 푸가지(Fugazy) 익스프레스 리무진 프랜차이징 사업에 3,200만 달러를 투자했지만 파산하고 말았다.


그의 성공에 있어 운과 전략의 상대적 기여도를 묻는 질문에 클러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만약 나의 성공과 실패가 모두 운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나는 진실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약 모든 성패가 전략의 결과라고 말한다면 그것 또한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라 - 샘 월튼

월마트의 샘 월튼은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모험을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80년대 초에 이미 독자적으로 가장 큰 잡화점 체인을 운영하고 있는 그가 새로운 할인판매라는 사업에 입문해 성공할지는 미지수였다. 「던 앤 브래드스트리트」에 따르면, 1962년 월튼이 아칸소의 로저스에서 월마트를 처음 개점한 그 해에 146개의 할인판매 소매업자들이 파산했고 그 다음해에는 더 많은 158개의 소매업 점포가 문을 닫았다.


월튼이 아칸소의 뉴포트에서 잡화점을 운영할 당시, 월튼의 주요 경쟁자가 크로거 잡화점을 매입해 사업을 확장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월튼은 그 길로 140마일을 달려가 핫 스프링에 있는 그 잡화점의 주인을 만나서 자신의 경쟁자보다 먼저 계약해버렸다. 이 일로 월튼은 아주 작은 백화점을 열게 되었지만 이 모험으로 이익을 보지는 못했다. 이를 통해 월튼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모험을 하는 것이 언제나 긍정적 보상만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하튼 월튼은 자신의 경쟁자가 2500평방피트의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었다.


점포 수가 증가하고 월마트의 시장 점유율이 높아지자 월튼은 첨단기술 분야에서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선을 이용해 각 점포를 연결하고 그 운영을 점검하며 관리하는 일이 엄청난 양의 데이터 때문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1983년 월마트의 컴퓨터 책임자가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 위성통신 시스템이었다. 이로써 회사는 초고속으로 음성과 데이터를 송수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한 월튼의 화상 위성방송 전송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당시까지 아직 이 기술은 검증받지 못한 것이었으며, 월마트의 규모에 비해 설치비용이 막대했다. 이러한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월튼은 대규모 위성통신 프로젝트를 적극 지원했다.


월튼의 모험은 막강한 경쟁력의 획득으로 이어졌다. 월마트는 모든 배송 차량의 이동 위치를 추적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각종 교육 프로그램에 관한 비디오를 순식간에 전송할 수 있었고, 신용카드 거래를 신속히 처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용카드 이용 사기를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얻은 비용 절감액은 그 시스템의 투자비용을 훨씬 뛰어넘고도 남았다.


월튼이 점포 숫자를 계속 늘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은 그가 하나의 목표 달성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관 사업의 다각화를 추진했다. 잡화상을 운영하면서 할인판매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했고, 할인판매점을 하면서도 도매업의 개념을 사업에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그는 할인판매 매장에 식료품을 추가하여 식품과 공산품을 한곳에서 살 수 있도록 한 월마트 슈퍼마켓을 열었다. 하이퍼마켓의 축소판인 월마트 슈퍼마켓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월마트가 소비자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점포 입구에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직원들을 배치한 것이다. 이 혁신으로 나이든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은 고객을 반갑게 맞아주고 친절하게 쇼핑 카트도 가져다주었으며 할인판매중인 품목의 광고 전단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고객 입장에서 이런 유익함은 이 아이디어를 맨 처음 도입했던 루이지애나 크로울리의 월마트 매장 책임자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본래 그의 고민은 소매치기들이었다. 그가 새롭게 안 사실은 정복을 입은 경호원보다는 환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이 매장 입구에서 손님을 반기면 정직한 손님들에게는 훨씬 친근하게 느껴지면서도 소매치기들에게는 경각심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소매치기 발생률을 줄이고 싶었던 월튼에게는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었다.


월튼의 직업윤리, 모험을 받아들이는 적극성, 그리고 성공의 다른 원칙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은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강한 열망이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돈에 목을 매지 않더라도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만약 그가 1960년대에 사업을 확장하지 않고 빚을 갚기 위해 일했다면 그는 결코 억만장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가 할인판매 소매업의 특별한 확장 가능성을 인식한 이상 그는 최고가 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했다.


시장을 선점하고 지배하라 - 존 록펠러

오늘날 록펠러는 석유 산업을 지배하면서 어마어마한 부를 창출한 사람으로 기억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가 펼친 자선활동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베풀기 좋아했던 그는 황열병 백신, 십이지장충 약, 잡곡류 해충 박멸제 등의 개발을 후원했을 뿐 아니라 시카고 대학, 록펠러 대학, 스펠만 칼리지, 록펠러 재단과 북경 유니언 의과 대학도 설립했다. 엄청난 재산을 기부하고 나서도 1937년 록펠러가 사망했을 때 그의 순자산 가치는 당시 미국 국내총생산의 1/65과 동일한 액수인 14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러한 방법으로 비교한다면 록펠러는 역대 최고로 부유했던 미국인이다.


록펠러는 젊은 시절에 클리블랜드의 농산물 매매업자로 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 정유라는 신생 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시장을 점유하는 것과 그 지배적인 힘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곧바로 알아차렸다. 원유를 정유업체로 선적하거나 정제된 석유를 전국 각지에 분포된 시장에 공급할 때 드는 방대한 운송비용을 고려할 때 규모가 주는 이점은 자명한 것이었다.


스탠더드 오일 사는 석유 운송에 공격적인 투자를 하면서도 독점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철도회사들은 미국 내 석유 매장지가 조만간 고갈될 것이라는 지질학자들의 예측에 겁을 먹고 업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비용 투자를 주저했다. 록펠러는 이들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석유 선적 시설이 현대화되어 있는 뉴저지 에리 레일로드의 위하켄 터미널을 인수했다. 그 과정에서 스탠더드 오일은 다른 정유업체들의 중요한 선적 정보를 얻어냈을 뿐만 아니라 운송 요금의 특혜도 받아냈으며, 더 나아가 경쟁사의 석유 선적을 차단할 수 있는 힘까지도 확보했다.


철도회사들이 기존의 석유 저장통을 대체할 최신의 석유 운반용 차량에 투자하지 않자 스탠더드 오일은 직접 나서서 해결했다. 철도회사에 운반용 차량을 내주지 않을 수 있는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그는 소규모 정유업체보다 월등히 유리한 수송비용 특혜를 이끌어냈다. 결국, 석유 수송에 있어 송유관의 중요도가 높아지자 스탠더드 오일은 자체 시스템을 만들었다. 또한 록펠러는 다른 송유관 네트워크의 지분을 사들이면서 스탠더드 오일과는 별개로 보이는 것처럼 운영했다. 얼마 있지 않아 록펠러의 송유관 네트워크와 표면적으로만 경쟁사인 회사들은 카르텔을 형성하여 생산량을 배분하고 가격 담합을 했다.


록펠러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석유 송유관의 중요성을 뒤늦게 인식했지만, 일단 그 점을 파악하자마자 그는 결단력 있게 그 사업에 뛰어들었다. 비슷한 이치로 그는 원유 생산이라는 변동성이 심한 사업에 상당한 투자를 하는 것을 처음에는 싫어했지만 이를 극복했다. 록펠러는 미국의 스탠더드 오일 사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국 자원에 의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지만, 그는 미국 석유 생산의 33%를 차지하는 사업 수완을 보여주었다. 


낮은 가격에 매입하라 - 워렌 버핏

워렌 버핏은 주식과 채권, 곡물, 광물자원 등에 성공적으로 투자하여 버크셔 해서웨이라는 놀라운 자금 공급원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자기가 좋아하는 회사의 주식을 사기보다는 상황만 허락한다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을 확보했다. 단순히 저가매수 사냥꾼으로만 잘못 인식되는 억만장자 로렌스 티시처럼 버핏도 자주 이사회의 임원이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자신이 투자한 회사의 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사고자 하는 회사의 수익성 향상을 염두에 두고 통째로 회사를 매수하는 버핏의 투자기법은 그의 경력의 성숙 단계에서 완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버핏은 자신의 투자를 피우다 남은 담배꽁초에 비유함으로써 자신의 스승인 벤저민 그레이엄의 투자법인 가치투자가로 자신을 분류하는 사람들을 비난했다. 버핏은 컬럼비아 대학 재학시절 증권 분석의 아버지 그레이엄으로부터 유일하게 A+를 받은 학생이다. 그레이엄은 1929년의 주식시장의 폭락에서 크게 손해를 본 뒤 무형자산은 신뢰하지 않으면서 순 자산가치나 주가수익률과 같은 재무 비율을 강조했다. 버핏은 1954년부터 1956년까지 그레이엄-뉴먼의 자금운용 회사의 주식 분석에 탁월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버핏은 그레이엄이 고안한 엄격한 법칙에 따른 저가 매입의 기회를 몇 번밖에 얻지 못했다.


그레이엄의 접근 방법에는 심각한 제약이 있다. 어떤 회사를 곧장 정리하면서 그 회사의 내재 가치와 낮은 주가 사이의 차익을 언제나 챙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시간이 째깍째깍 흐르면서 그 회사가 손실을 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투자의 결과는 실망스러운 결말을 한없이 기다리는 것이며, 그나마 저가로 산 덕분에 다행히 약소한 수익이라도 건지는 식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심한 불황 뒤에는 매력적인 가치주들이 많지만 장이 좋을 때 가치주들을 발견하기란 더욱 힘들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개인 투자자들은 그레이엄의 통계학적 방법들을 사용해 주식에 투자해서는 억대의 수익을 거두기 어렵다는 것이다.


버핏은 오래 전에 80%의 그레이엄과 15%의 필립 피셔로 자신의 접근법을 설명했다. 피셔도 그레이엄처럼 주식 매입을 체계화하려고 시도한 투자 전문가였는데, 피셔는 그 회사의 기존 이익을 바탕으로 한 재무비율이나 대차대조표 상의 수치보다는 미래에 이익이 얼마나 성장할 것인지를 더 중요시했다. 그레이엄은 가능한 한 다양하게 투자할 것을 권한 반면, 피셔는 앞으로 전망이 좋은 몇몇 회사의 주식에 투자하라고 권했다. 버크셔 해서웨이의 포트폴리오 방법은 피셔의 접근법과 매우 유사하다. 버핏이 독특한 사업 특허를 가지고 있는 회사를 선호하는 것을 보면 피셔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버핏이 벤저민 그레이엄의 통계법 암기를 통해서 수십억 달러를 모으지는 않았지만, 멘토인 그레이엄의 다른 방법들을 모방하여 큰 이익을 보았다. 그레이엄은 자신의 1934년 저서인 『증권분석』을 출간하기 한참 전에 주주행동주의라고 알려진 것을 통해 유명해졌다. 주주행동주의와 관련해서 그의 유명한 성공 중 하나는 원유 수송업체인 노던 파이프라인에 관련된 것이다.


1911년 스탠더드 오일의 독점이 깨지면서 등장한 31개의 회사 중 하나로, 노던 파이프라인은 매우 보수적인 재정정책을 고수해왔다. 록펠러와 그레이엄은 감독기관의 보고서를 통해 회사가 주당 90달러의 가치를 갖는 채권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회사의 재정정책을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회사의 주식은 주당 65달러에 거래되었고, 채권 포트폴리오는 회사의 운영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는 주식을 팔아 주주들에게 그 수익금을 나누어 주라고 노던 파이프라인을 재촉했다. 회사의 사장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그레이엄은 노던 파이프라인 주식을 23% 보유하고 있는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레이엄의 이런 특징들을 몸에 익힌 버핏은 기업 지배권을 위한 수많은 전투에 뛰어들었다.   


워렌 버핏은 자수성가한 많은 억만장자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특별한 면이 있다. 버핏을 잘 알고 있는 존 바이른 주니어는 워렌 버핏은 평균 이상으로 똑똑하다고 말하곤 했다. 버핏은 많은 양의 재무 자료를 기억하고 주식의 가치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트럼프 카드 실력은 거의 세계적인 수준이다. 기자가 그의 사무실에 컴퓨터가 없는 것을 지적했을 때 버핏은 내가 바로 컴퓨터라고 말할 정도였다.


버핏은 물질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IQ보다는 성격과 추진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억만장자가 된 사람들은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특별한 지적인 능력을 강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핏의 성공은 수백만 명의 투자자들에 의해 정밀하게 조사된 주식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선별하는 데 있었다. 이는 억만장자 부류에 들어가기 위한 특별한 방법을 자신의 재능과 연결시킬 때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쟁심을 자극하라 - 리처드 브랜슨

열다섯 살 학생 신분으로 출간한 잡지를 시작으로 리처드 브랜슨은 자신이 말하는 소위 유기적 확장이라는 과정을 통해 100가지가 넘는 사업을 이끌어왔다. 그의 사업 영역은 레코드 소매점은 버진 메가스토어를 비롯해 버진 애틀랜틱 항공, 버진 호텔 그룹을 포함하고 출판뿐만이 아니라 텔레비전, 라디오, 소프트드링크, 웨딩복에서 모델 에이전시까지 망라하고 있다. 1999년 4월에는 우주여행 서비스를 제공하는 버진 갤럭틱 항공을 만들었다.


브랜슨은 사업체를 통합하면 여기저기 뻗어 있는 자신의 비즈니스 왕국을 좀더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의견에 반대했다. 그는 서비스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기부여가 잘 돼 있고 행복한 사원들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전 직원을 한 지붕 아래 몰아넣는 것보다 한 빌딩 안에 50~60명만 일할 정도로 회사의 규모를 작게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브랜슨의 경영방식에서 나타나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는 그를 성공적인 혁신가로 만들었다. 초기에 히피 비즈니스맨이라고 불렸던 브랜슨은 영국 최초의 우편 주문 방식의 레코드 할인 사업인 버진 레코드를 시작함으로써 영국 레코드 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레코딩 스튜디오를 사들여 첫 번째 앨범인 마이크 올드필드의 <튜블러 벨즈>를 제작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7백만 장 이상 팔려나가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브랜슨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구속되지 않고 다른 제작자들이 손대기 싫어했던 펑크락 그룹인 섹스 피스톨즈로 다시 한 번 대성공을 거두었다. 동성애자였던 가수 보이 조지는 브랜슨이 발굴해서 대성공을 거둔 또 다른 예였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 보면 브랜슨은 두 번째 사업인 버진 애틀랜틱 항공은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다. 우선 브랜슨은 거칠기로 악명 높은 항공 사업에 아무런 경험이 없었다. 워렌 버핏이나 칼 아이칸 같은 유능한 억만장자들도 항공 사업에서는 실패했다. 프레디 레이커스의 스카이트레인을 포함한 다른 저비용 운송업체들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브리티시 항공과의 직접적인 경쟁에서 모두 패했다. 브랜슨의 자문단도 항공 산업에 뛰어들려는 그에게 경고를 보냈다. 재정 전문가들도 버진 왕국이 지나치게 팽창하고 있다고 말했다. 브리티시 항공의 회장은 브랜슨을 두고 록큰롤을 하기엔 너무 늙었고 하늘을 날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혹평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불굴의 의지와 열망을 간과했다. 브랜슨은 기존의 항공사들이 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시스템을 도입했다.  


런던의 개트윅 공항과 뉴욕의 뉴워크 국제공항 사이를 하루에 한 번 왕래하는 것에서 시작한 버진 애틀랜틱은 승객들에게 좌석 밑에 다리를 뻗을 수 있는 좀더 넓은 공간을 제공하고 좌석 뒤에 비디오 스크린을 설치함으로써 여행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했다. 사업이 안정권에 들어서면서 퍼스트 클래스 손님들에게 라운지를 제공하고 무료 목 마사지와 매니큐어 서비스 그리고 요리사가 만들어주는 식사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을 위해 놀이 교사와 페이스페인팅 전문가를 고용하는 등의 차별화된 서비스를 추가했다. 승객들은 브리티시 항공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할 때 지불하는 요금의 절반 가격으로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브랜슨을 새로운 모험에 뛰어들게 했다. 그는 사생활을 보호하겠다는 예전의 생활방식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언론의 관심 대상이 될 수 있는 이벤트를 시작했다. 그는 버진 애틀랜틱의 창립을 1차 세계대전 당시 조종사의 복장을 하고 발표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다음에 그는 작은 보트로 대서양 횡단에 도전했다. 1985년에 행한 이 시도는 보트가 목적지를 150마일 남겨두고 가라앉으면서 실패로 돌아갔으나 다음해에 다시 도전해 새로운 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1987년에 브랜슨과 스웨덴 기구 조종사인 페 린드스트랜드는 열기구로 대서양을 횡단하는데, 이는 또다시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무료광고 효과를 가져왔다. 이쯤 되자 모험주의 자본가라는 브랜슨의 이미지는 버진 그룹의 살아 있는 PR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브랜슨의 괴상한 전략에는 부와 갈채가 뒤따랐다. 1998년에 「포브스」는 그의 순자산 가치가 19억 달러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영국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 순위에 브랜슨은 테레사 수녀 다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또 다른 여론 조사에서 그는 로마 교황과 작고한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뒤를 이어 3위에 오르기도 했다. 성격 면에서 볼 때 브랜슨은 매우 독특한 면모를 보이고 있지만 사업을 하는 그의 방법들은 다른 억만장자들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버진 애틀랜틱 항공을 시작할 때 그는 브리티시 항공에 의해 운영되던 다른 저가 운송업체의 경영자들과 면담을 했다. 즉, 경쟁사의 실수를 통해 배운다는 샘 월튼의 방법을 따라했다. 브랜슨은 항공기를 구입할 때 도망갈 통로를 미리 마련하는 커크 커코리언의 방법을 정확히 모방했다. 그는 항공사 최초로 보잉 747기를 사들이면서 만약 버진이 실패할 경우 비행기를 다시 제조업체에 팔 수 있도록 계약서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제3부 슈퍼리치의 탄생

이제 당신 차례다

단순히 부자가 되고 싶다고 열망하는 일은 쉽다. 복권 열풍이야말로 수백만 사람들이 간절히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겨우 수백 명만이 억만장자의 대열에 들어섰다. 즉,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과 실제로 부자가 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진정으로 억만장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목표에 전력을 다해 몰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다른 목표들보다 부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모든 사항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부자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당신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억만장자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의 희생이 불가피하다. 만약 억만장자가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슈퍼리치의 의미를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고도 여유롭게 잘살 수 있는 정도로 정의하면 된다.


당신이 목표로 하는 수치의 재산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것이다. 가족에 대한 의무, 휴식과 여가생활보다 재산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경우가 수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슈퍼리치가 되고자 하는 당신의 강한 집념이 평등주의자들의 방해로부터 당신을 방어하고 자유롭게 할 것이다. 당신은 항상 사업에 대해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경쟁을 피하고 독점적으로 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전략들을 고안해낼 것이다.


또 타인이 장애 요인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관습은 당신에게 디딤돌이 되어줄 것이다. 경쟁자의 시장을 잠식할 수 있는 기회는 경쟁자들이 현상 유지를 위해 불문율로 정한 협약들을 고수할 때 나타난다. 당신보다 주변의 평가와 시선을 의식하는 사업가들은 비난을 야기할 수 있는 결정들을 보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가 당신에게는 시장을 잠식할 기회이다. 협상 테이블에서 당신보다 집념이 부족한 협상 대상들을 제압할 수도 있다.


자수성가한 억만장자들은 모든 활동에 열정을 가지고 접근했다. 어떤 이는 놀랄 만큼 검소하고 그들의 소비에 대해 심사숙고했지만 어느 누구도 고루하고 인색한 생활을 영위하지는 않았다. 끈기 또한 거대한 부를 이룬 사람들이 갖춘 공통된 특성이다. 이 책에 소개된 개개인들은 행운 하나만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이루어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잠깐의 휴식을 취할 때까지 인내를 실천했다. 이것 역시 당신이 배우고 만들어야 할 습관이다. 자수성가한 억만장자들은 돈을 좋아하기보다는 돈을 추구하는 모험 자체를 좋아했다.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한다면, 당신은 그들의 전략, 전술, 원칙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고방식까지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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