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존 보익
재무 감사관이자 전직 주식 브로커로,미시간 주립대학에서 금융학 BA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위대한 주식투자자들로부터 배우는 교훈(Lessons from theGreatest Stock Traders of All Time)』『월가 100년을 움직인 전설적인 투자자들의 주식투자전략』 등이있다.
■ 역자 김기준
중앙대 영어영문학과와 고려대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 현재 인트랜스 번역원의 전문 번역가 및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의마이크로소프트 재창조』『게릴라 마케팅』『블루스 클루스의 성공 스토리』『2005년 세계 대전망』 등이 있다.
■ 차례
감수의 글 ― 전설적인 투자자들에게 배우는성공투자 불변의 법칙
여는 글 ― 과거를 연구하면 미래를 알 수 있다
서문 ― 역대 최고의 투자자들은 어떻게 고수익을 올렸는가?
제1장 공업주가 백만장자를 만들다(1897~909)
제2장 시장의 흐름을 거스르면수익이 크게 줄어든다(1910~1919)
제3장 통찰력 있는 투자자가 백만장자가 된다(1920~1929)
제4장 참을성과 유연성이 큰수익을 가져다준다(1930~1939)
제5장 성공한 투자자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1940~1949)
제6장 혁신주가 막대한수익을 가져다주다(1950~1959)
제7장 호황이 엄청난 수익을 이끌다(1960~1969)
제8장 변덕스러운 시장에서도 흔들리지않는다(1970~1979)
제9장 강세장을 내다보고 폭락을 피한다(1980~1989)
제10장 신기술이 유례없는 기회들을제공하다(1990~1999)
제11장 전문가는 약세장을 피해 수익을 보호한다(2000~2004)
제12장 역사와 위대한 투자자들이주는 교훈
주식투자전략
공업주가 백만장자를 만들다(1897~1909)
찰스 다우는 원래 「익스프레스」와 「뉴욕 메일」에 금융 통계와 관련한 기사를 쓰던 언론인이었다. 그는 동료와 함께 다우존스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월스트리트 저널」을 창간했다. 찰스 다우는 증시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많은 투자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혼란을 줄이기 위해 다우평균을 개발했다. 시장의 움직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지수를 개발한 것이다. 다우는 1884년 11종목의 주식에 대한 다우평균지수를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1896년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로 발전됐다. 주식투자자들은 덕분에 시장의 움직임을 잘 파악할 수 있었고, 그런 사람들 중에는 버나드 바루크가 포함되어 있었다.
경기는 과거 몇 년 동안의 침체기를 벗어나고 있었다. 1897년 초에는 금융업, 상업, 철도업, 중공업과 같은 분야의 움직임이 매우 활발했다. 국가 경제가 꾸준히 성장했고 기업인들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가 빠르게 회복됐다. 투기도 성행했다. 미국은 차기 경제대국으로 부상했고 은행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시기였다.
바루크는 경험과 증시 활동에 대한 안목으로 주가가 하락하면 곧바로 상승하는 사이클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한 상승 추세가 시작되면 큰 수익을 올릴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상승장일 때 펀더멘탈이 튼튼한 새로운 주도주를 매수할 수 있는 기회를 잘 잡으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루크는 성공적인 주식투자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주식을 매수할 때 가장 선호하는 시점은 주가가 한동안 하락한 후 강하게 반등하기 시작할 때였다. 그는 오직 증시와 주가의 추세에 따라 매매 타이밍을 결정했다.
20세기 초의 성공적인 또 다른 주식투자자로는 리처드 와이코프를 꼽을 수 있다. 와이코프는 여러 회사를 거쳐 맥코믹 앤 코에 들어갔다. 그는 일에 열중했고 승진을 거듭했다. 1897년 윌리엄 맥킨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증시가 회생하기 시작했다. 와이코프가 주식을 대량으로 매입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와이코프는 다른 투자자들보다 더 많은 인내심을 갖고 있었다. 이는 그가 증시가 하락할 때 매매로 큰돈을 잃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유명한 투자자 중의 한 사람인 제시 리버모어는 초기에 많은 실수를 했지만 1901년 초 노던 퍼시픽의 주식을 사들여 5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리버모어도 증시의 흐름에 따라 매매를 했는데, 주도주들 중에서도 펀더멘털이 튼튼한 주도주(철도)를 매입했다. 이 종목으로 많은 수입을 올렸으며, 이것이 그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노던 퍼시픽의 주식은 1901년 5월 1일 115달러에 거래되고 있었지만 5월 7일에는 143.50달러, 5월 8일에는 160달러까지 치솟았다. 5월 9일은 정말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날이었다. 경영권을 거머쥐려는 투자자들과 과대평가된 주식에서 수익을 챙기려는 단기투자자들이 경합을 벌이면서 최고 1,000달러까지 주가가 치솟으며 등락을 거듭하다 325달러에 장이 마감되었다. 이 주식을 매도한 많은 단기투자자들은 매수할 물량이 없었기 때문에 손실을 만회할 주식을 되살 수가 없었다. 다음날인 5월 10일 노던 퍼시픽의 주가는 150달러로 급락했다. 현금이 필요해진 손해를 본 많은 단기투자자들이 보유 주식을 더 많이 매도했고 이로 인해 주가가 더 떨어졌던 것이다.
1907년 초 산업생산지수는 최고치를 기록했다. 호경기가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증시 전망은 별로 좋지 않았다. 리버모어의 탐색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수익성 있는 매도 포지션을 확대했다. 그는 증시가 분명한 하락세를 보임에 따라 공매도를 계속했고 주도주들의 하락을 이용했다. 1907년 여름 증시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도주였던 철도주들의 수익은 감소했다. 자본이 줄어들고 펀더멘털이 약화되었으며 철도주들의 수익이 감소하고 대출을 받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증시의 하락은 당연한 것이었다. 10월 말에 경기침체가 확산되면서 은행의 예금 인출 사태가 발생했다. 리버모어는 바닥을 감지하고 1907년 10월 24일 매도 포지션을 정리했다. 그리고 약 300만 달러의 수익을 실현했다. 그는 주가가 계속 하락했기 때문에 매도 포지션을 유지하고 확대함으로써 수익을 증대시켰다. 이렇게 수익을 올림으로써 그는 진정한 주식투자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1909년 10월까지 와이코프는 연구를 계속하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증시의 추세를 판단한다.
*공급과 수요가 증시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주식 거래량의 증감은 매우 중요한 분석 요소이다.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원칙이다.
시장의 흐름을 거스르면 수익이 크게 줄어든다(1910~1919)
1910년 1월부터 1912년 1월까지는 장기간의 침체기였다. 많은 투자자들이 좌절을 맛보았고 그중에는 리버모어도 있었다. 리버모어는 상품시장에 관여해 당시 "코튼 킹"이라 불리던 퍼시 토머스에게 많은 정보를 입수했고 그를 바탕으로 투자했으나 1907년의 공황 동안 과거 매도 포지션으로 벌어들인 수백만 달러의 수익을 모두 잃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거래를 하는 것은 매우 무모한 짓이다. 잃어버린 돈을 회수하기 위해 그는 침체되고 위험한 증시 환경에서도 필사적으로 거래를 계속했다. 수익의 기회를 제공할 수 없는 환경을 갖고 있는 시장에서 활동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약세장에서 수익을 고집하기보다는 증시의 흐름에 따라 거래를 해야 한다.
자제력이 있던 바루크는 월스트리트에서 벌어들인 돈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당분간 거래를 중단했다. 수익의 기회가 최소화됐을 때 한동안 증시를 떠나 있는 것도 위대한 투자자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이 원칙은 증시 투자자들을 최악의 사태(지나친 매매)로부터 보호해준다. 이 동안 그들은 분석을 더 잘 할 수 있고, 과거의 거래에서 저지른 실수를 검토할 기회를 갖게 되며, 매일의 거래활동으로부터 벗어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 와이코프는 인내심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명성도 더 높아졌다. 그는 자신의 잡지 「티커」의 이름을 바꿔 「월스트리트 잡지」로 펴냈다.
1915년 1월, 다시 찾아온 2년간의 경기침체기가 끝났을 때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증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미국 수출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많은 기업들의 수익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이런 예상이 주가를 끌어올렸다. 미국이 전쟁에 무기와 식량을 공급하게 됨으로써 많은 주도주들이 확고하게 수익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증시는 다시 꺾이기 시작했다. 와이코프는 투자자들에게 손실을 회피하는 방법을 조언했다. 1916년 9월 초 증시가 두 달 동안 상승했을 때 와이코프는 자신의 주도주를 매도하고 차익을 실현했다(그는 추천을 하고 자신도 그 추천 내용에 따라 행동했다). 바루크처럼 그도 주가가 오르고 있을 때 주식을 처분하곤 했다.
와이코프의 성공의 열쇠는 다음과 같았다.
*오직 증시에서 확인된 트렌드만을 따라 거래한다.
*증시가 단조롭거나 횡보를 계속하는 동안은 주식투자에서 손을 뗀다.
*수익을 배가시키기 위해 수익성 높은 포지션을 피라미드형으로 증대시킨다.
*손절매 원칙을 엄격하게 준수한다. 그의 원칙은 매수 포인트에서 3포인트 하락했을 때다.
*한 번에 소수의 종목에만 집중한다. 보통 한 번에 10종목 이하를 취급했다.
*주도적인 산업의 주도주만 거래한다.
통찰력 있는 투자자가 백만장자가 된다(1920~1929)
1921년 초부터 하락한 증시는 1922년이 되자 완만하지만 꾸준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제럴드 로브가 증시에서 실질적으로 거래를 시작한 것은 1923년 즈음인데 그는 몇 번이나 큰돈을 잃게 되었다. 로브는 이 경험 덕택에 1929년 대공황 때 손실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점차 신중해졌다.
1925년부터 증시는 꾸준히 오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새로운 강세장의 시작점이었다. 그러나 상승세가 한 번에 1년 이상 지속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투자자들이 보유 주식의 처분으로 수익을 실현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1926년 3월과 4월 수익 실현을 위해 매도 수량이 증가하자 증시는 눈에 띄게 하락세를 보였다. 와이코프도 수익을 현금화했다. 그는 1925년 증시의 상승세를 타고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로브는 증시가 상승할 때 보수적인 접근 방법을 통해 거둔 수익은 하락할 때 투기적인 방법을 통해 얻은 손실로 인해 상쇄되어 버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1927년이 되기까지 증시는 거의 하락하지 않았지만 경제지표들과 균형이 맞지 않았다. 이때 로브는 증시에서 군중심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1929년이 되자 더 많은 사람들이 증시에 뛰어들었다. 증시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증시에 낙관주의가 팽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둔화되고 있었다. 자동차와 건설 부문의 경기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유럽의 주가들은 이미 하락하기 시작했다. 증시가 최고점을 찍은 날은 9월 3일이었다. 이때 지수는 381.17이었다. 로브는 이 상승세에 의심을 가졌다. 증시는 1924년 말 이후 거의 4배 가까이 성장했다. 로브 같은 현명한 투자자들은 9월에 들어서면서 매도를 시작했고, 일부는 소유 주식들을 처분하고 현금으로 보유하거나 공매를 시작했다. 다우지수는 고점에서 공황이 시작된 10월 29일까지 45퍼센트가 폭락했다.
참을성과 유연성이 큰 수익을 가져다준다(1930~1939)
1930년대부터 20여 년이 지난 1950년대 초반까지 주가는 결코 그보다 더 오르지 않았다. 하락을 하는 동안 반등세는 매우 짧았고 상승세가 끝나면 곧바로 더 깊은 골짜기로 떨어졌다. 1935년 3월부터 11월까지는 1920년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단 8개월 만에 지수가 100에서 150으로 상승했던 것이다(그리고 1937년 3월까지 200으로 뛰었다). 신뢰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로브는 다시 미국 증시에 뛰어들었다. 그해 시장이 상승세를 타면서 로브는 많은 수익을 올렸다.
1930년대는 대공황과 약세장, 규정 변경, 제2차 세계대전 등을 경험한 시련의 10년이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증시는 1930년대 초부터 말까지 지수가 40퍼센트 하락했다. 하지만 1933년 초부터 1937년 초까지 증시가 상승세에 있을 때 큰 기회를 잡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증시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을 때조차도 엄격하게 자신의 원칙을 준수해 손실을 최소화하고 수익을 올림으로써 스스로의 능력을 입증할 수 있었다.
성공한 투자자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1940~1949)
새로운 10년의 증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불확실성과 함께 시작됐다. 1942년에는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4월까지 증시가 가파르게 하락했다. 4월 말 다우지수는 7년 만에 처음으로 100포인트 이하로 떨어졌다. 그 이후로 증시가 100수준 이하로 떨어진 적은 없었다.
1944년이 시작되었다. 등락을 거듭했지만 결과적으로 4월까지 지수의 변화는 없었다. 전세는 연합군의 우세로 기울어지고 있었고 로브는 증시가 더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후 경제 상황이 더 나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증시는 항상 미래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때가 투자를 위한 최적기였다. 그때부터 22개월간 지수가 65퍼센트 상승했으므로 적절한 투자 시점이었다.
종전 후 1946년 1월에도 주가가 올랐다. 하지만 다른 문제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연방준비은행의 적극적인 통화 팽창 정책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확대되었고 정부가 지출을 최대한으로 억제했기 때문에 경제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냉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고 미국에서는 노동쟁의 문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증시가 악화되고 고점에서 옆걸음질을 치는 동안 로브는 보유한 주식들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너무 늑장을 부렸다. 1929년과 1937년, 빠르게 보유 주식을 처분하고 100퍼센트 현금화했던 때와 똑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는 주저했다. 그는 이 하락장세에서 돈을 잃었지만 손실을 줄이기 위해 주식을 모두 처분했다. 이것은 투자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자신의 생각이 때때로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혁신주가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주다(1950~1959)
시장은 느리지만 꾸준한 성장세로 시작되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증시가 하락하긴 했지만 하락폭은 크지 않았다. 높은 기업 수익과 전쟁으로 인한 신규 주문이 한국전쟁의 부정적인 영향을 둔화시키는 듯했다. GNP도 전년 대비 10퍼센트 상승했고 기업의 세전 이익도 크게 증가했다.
잭 드레퓌스는 주식들의 가격과 거래량의 변화를 연구하면서 우량주식들이 일정한 패턴에 따라 제대로 바닥을 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이는 시장이 빠르게 상승한 탓에 많은 종목들의 상승세가 이미 과도하게 연장된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저명한 분석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주식을 모두 팔아 현금으로 보유하기도 했다. 그게 1937년의 일이었다.
직장 생활을 통해 계속 배우고 성장했던 드레퓌스는 뮤추얼 펀드 사를 설립했다. 그가 투자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시장의 추세를 판단하는 일이었다. 추세가 강한 상승세면, 그는 확신을 갖고 주식을 사들였다. 그가 주식을 매입하는 시점은 주가가 평소의 거래 범위에서 벗어나 강하게 상승하면서 "신고가"를 기록하는 때였다. 그는 이때에는 이 주식에 대한 수요가 강하며, 그 상승 모멘텀이 십중팔구 지속된다고 굳게 확신했다.
1950년대 중반의 강한 상승장 동안 그는 전액을 주식에 투자했고, 그의 주식 보유량도 시장과 함께 증가했으며, 그가 선정한 종목들 중 다수가 상승장에서 진정한 주도주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1957년 9월이 끝나갈 무렵, 시장의 추세가 바뀌자 그는 지난 수년간 투자했던 주식을 매도해 75퍼센트를 현금으로 보유했다. 드레퓌스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드레퓌스 펀드를 운영한 12년간 604퍼센트의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같은 기간에 그 다음으로 우수한 성적을 올린 펀드의 수익률은 502퍼센트였다. 다우지수 상승률이 같은 기간 동안 346퍼센트였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다.
호황이 엄청난 수익을 이끌다(1960~1969)
1961년 12월부터 1962년 5월까지 지수가 25퍼센트 하락했다. 주식 투자에 실패했던 윌리엄 오닐이 1962년에 가장 절실하게 마음에 새겨두었던 것은 버나드 바루크의 유명한 말이었다. "잘못된 결정을 신속하게 손절매할 수 있다면 열 번 중 세 번 내지 네 번만 옳은 판단을 내려도 막대한 수익을 거둘 수 있다." 오닐이 관리한 계좌 중 하나는 지수가 29퍼센트 하락하는 동안에도 실제로 수익을 냈다. 이 계좌로 매입한 종목 3개 중 단지 1개만이 바른 선택이었다. 바루크의 말을 기억한 오닐은 이 위험한 시장에서 손실을 억제했다. 그가 제대로 선택한 33퍼센트의 주식에서 얻은 수익이 잘못 선택한 주식에서 발생한 손실보다 2배 더 많았다. 시장이 폭락할 때 절제된 행동은 효과를 발휘한다. 오닐은 엄격하게 손절매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60년대는 경기침체 현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실업률도 낮았으며, 인플레도 전반적으로 잘 억제되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인플레를 불러오면서 시장을 짓눌렀다. 많은 예리한 투자자들은 1960년대의 상반기에 훌륭한 수익을 얻었고, 시장 움직임에 적절히 대응해서 주식을 팔고 현금을 보유함으로써 힘들게 번 수익을 지켰다.
변덕스러운 시장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1970~1979)
1970년대의 경제와 주식시장은 출발이 순조롭지 않았다. 사업 환경의 악화로 발생했던 1960년대와 같은 경기침체는 끝나고, 새로운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함께 새로운 10년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 내내 완만하게 감소하던 실업률이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미군이 캄보디아에 진군하자 반전 분위기가 고조되고, 값비싼(실제 비용도 많이 들었지만 소중한 목숨이 많이 희생되었다) 전쟁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다. 이자율도 상승했다.
1971년이 열리자 시장의 매수 분위기가 살아났다. 그러나 장래에 기업 환경을 악화시킬 수 있는 불확실한 외부적인 요소가 너무 많이 존재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높은 인플레 때문에 통화 긴축정책이 지속됐다. 미국 경제는 국제 시장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재정 적자도 확대되었다. 만사가 불확실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시장은 5월부터 7월까지 계속 하락했다. 주식시장은 10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지속적으로 하락해 6주 만에 100포인트 이상을 잃었다. 그러나 갑자기 시장이 반등하기 시작했다. 시장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계속 성장했고 소비자물가지수 역시 떨어진 것이다. 시장은 매수세와 매도세 간의 거친 전쟁터로 변했다. 추세가 분명하지 않을 때에는 잠시 쉬거나 로브나 와이코프처럼 단기투자로 전환해야 한다. 커다란 불확실성이 보이자 사람들은 분명한 방향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1975년이 되자 몇 가지 변화가 시장에 대한 믿음을 가져다주었다. 연방준비은행은 금융긴축 정책을 완화했고 금리를 인하했다. 시장은 이에 호의적으로 반응해 그달에만 14퍼센트 상승했으며, 이는 35년 만의 최대 월간 상승폭이었다. 다우지수와 나스닥은 1976년까지 승승장구했지만 또 하락세가 지속됐다.
그러나 1978년 3월, 오닐은 「스트리트 저널」에 "이제 황소의 뿔을 잡을 때입니다"라는 전면광고를 실었다. 이 광고는 나스닥 시장의 움직임을 근거로 중소형 성장주 중심의 강세장을 예고하여 비관적 견해와 시장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점을 포착했다. 다음 3개월 동안 다우지수는 19퍼센트, 나스닥지수는 20퍼센트 상승했다. 이 강세장을 주도한 업종은 주로 전자, 석유, 에너지, 소형 컴퓨터 등이었다.
강세장을 내다보고 폭락을 피한다(1980~1989)
1980년대는 희망차게 시작했지만 등락이 심했던 1970년이 재현되는 듯했다. 경기침체, 실업률 증가, 높은 인플레이션, 고금리, 정부의 재정적자 등은 우울한 징후였다. 그러나 유가는 떨어지고 있었고, 상승세에서 반전되어 하락하던 석유 및 석유 서비스업종들의 주가 움직임이 다시 한번 증시의 미래 예측 능력을 보여주었다. 1982년 2월, 오닐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또 전면광고를 냈다. "인플레이션은 수그러들고, 이제 다가올 회복에 대비해 투자할 때입니다."
1982년 8월 증시는 바닥을 쳤다. 다우지수는 1972년 상승세에 있을 때보다 25퍼센트 더 낮은 수준이었다. 투자자는 증시가 바닥을 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도 모든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말이다. 연방준비은행의 이자율 완화와 통화 공급 확대, 대규모 거래자들의 증시 참여 같은 일들은 반복적으로 일어나므로 관심을 갖고 연구하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오닐과 그의 회사는 1982년 늦여름 한도껏 신용거래를 했고, 그들은 그때까지 거둔 성과 중 최고의 실적을 올렸다. 1978년부터 1991년까지 그의 회사 보유 자금은 20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1985년이 시작되자 여러 경제 요소들이 서로 잘 어울려 건강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상승 추세의 모멘텀은 1986년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85년 10월부터 1986년 6월 말까지 9개월 동안 다우와 나스닥 모두 40퍼센트 이상 상승했다. 그러나 몇 가지 우려할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부자 거래 관련 스캔들, 엄청난 무역 적자와 예산 적자가 문제였다.
증시가 꽤 오랫동안 강세를 유지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요한 신호들을 간과하고 상승의 열풍에 휘말려들고 만다. 하지만 영리한 투자자들은 매도를 하여 수익을 보호한다. 이것은 강세장에서 매도하는 위대한 투자자들의 전형적인 행동으로, 증시의 추세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조기에 알려주는 경고 신호이다. 증시의 움직임이 경고 신호를 보내오자 오닐은 보유 주식을 모두 매도해 100퍼센트 현금으로 보유했다. 리버모어가 1907년에 그렇게 한 전례를 따라 오닐 역시 1962년의 약세 시장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10월이 되자 증시는 폭락했다. 이 시기에 옵션을 거래하던 짐 로펠은 옵션 거래가 매우 큰 리스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대폭락이 일어나기 직전에야 풋옵션에서 손을 떼었고 돈을 잃었다.
1987년 붕괴 후의 증시 환경과 이전의 폭락 사이의 주요 차이점은, 1980년대 후반의 경제는 아직 견실했고 기업이나 경제가 약해졌다는 징후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수의 뮤추얼 펀드 매니저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주가는 1930년대 초반에 보았던 것과 같이 오랜 폭락으로 이어지지 않고 비교적 빠르게 회복했다. 1989년 다우는 27퍼센트, 나스닥은 19퍼센트 상승으로 1980년대를 마감했다.
신기술이 유례없는 기회들을 제공하다(1990~1999)
1995년의 상반기 동안 실질 GDP는 조금 성장했지만 미래는 더욱 밝았다. 인플레이션이 잘 통제되자 연방준비은행은 이자율 인상을 중단했다. 기업 이윤도 증가하고 있었고, 실업률도 향상되고 있었다. 경제에 긍정적인 요소들이 많았고, 혁신적인 업체들이 기업공개를 했다. 최고의 종목 대부분은 기술업계에서 나왔다. 1995년 2월, 증시는 꽤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다우는 2월 말 4,000선을 넘고 계속 위를 향했다. 나스닥도 상승해 7월 중순 마침내 1,000선을 돌파했다. 나스닥은 6개월이 조금 넘는 동안 36퍼센트나 상승했다. 심리적으로 중요한 1,000선을 넘어선 다음, 나스닥은 다시 2일 동안 50포인트 이상 하락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휴식이었다.
로펠은 7년째 손실을 보았지만 주식투자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큰 거래는 아이오메가의 거래였다. 그는 나스닥이 강한 상승세이고 아이오메가가 대량 거래 속에 바닥패턴에서 막 상승했을 때 3,000주를 샀다. 그후 곧 하락하자 보유 물량 중 20퍼센트를 매도했다. 하락은 적은 거래량 속에 이루어졌고, 주가는 50일 이동평균선 위에 머물렀다. 로펠은 남은 물량을 인내심을 갖고 계속 보유했고, 이 주식은 대량 거래 속에 급상승하기 시작해 다음 3개월 내내 치솟았다. 그런 다음 전형적인 정점 형성 과정에 들어갔고, 로펠은 투자의 대가들과 마찬가지로 정점에 근접했을 때 매도했다.
1996년은 견실한 상승의 해였다. S&P500지수는 23퍼센트 상승했고, 다우지수는 26퍼센트 상승해 6년 연속 상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나스닥지수는 23퍼센트 상승했다. 이 해의 최고 종목 예로는 80퍼센트 상승한 반도체, 41퍼센트 상승한 컴퓨터 하드웨어, 36퍼센트 상승한 소프트웨어 등을 들 수 있다.
바닥을 쳤던 증시가 다시 회복됐던 1998년, 나스닥은 다우보다 훨씬 높은 40퍼센트 상승을 기록했다. 1998년 시장이 보여준 반등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최고의 투자자들이 어떻게 증시와 움직임을 같이 했느냐 하는 것이다. 1998년 오닐의 계좌는 401퍼센트나 수익을 올렸다. 이것은 그해 가장 높은 시장 평균보다 10배나 높은 수치였다! 시장과 같이 움직이면서 큰 폭락은 피하고 조건이 좋아지면 다시 돌아와 엄청난 수익을 올린 결과이다.
전문가는 약세장을 피해 수익을 보호한다(2000~2004)
2000년 1분기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시장의 열풍은 극에 달했다. 3월 10일, 나스닥은 처음으로 5,000선을 돌파했다. 3월 1일, 나스닥지수는 지난 12개월 동안 108퍼센트나 상승했지만, 같은 기간 다우지수는 겨우 9퍼센트, S&P500지수는 12퍼센트가 올랐다. 이것은 분명 기술주에 근거한 열풍이었다. 3월 6일, 나스닥은 이전 5개월 동안 86퍼센트나 상승했다는 사실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나스닥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대량매도 때문에 오닐은 주식을 전부 매도하고 현금으로 보유했다. 그는 이전에 이런 정점 형성 움직임을 수차례 봐 왔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또 그때까지 매우 견실한 수익을 올렸기 때문에 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도 매도를 했다. 로펠도 자신이 거둔 막대한 수익을 잃지 않을 작정이었다.
로펠은 모든 주식을 매도하고 하루 만에 200퍼센트 매수 포지션(허용 한도 내 신용거래)에서 100퍼센트 현금 포지션으로 돌아섰다. 보유 주식을 모두 매도했을 때 로펠 계좌의 총 가치는 200만 달러 이상이었다. 1997년 그가 실적을 향상시키기 시작했을 때는 1만 4,000달러였다. 2000년 3월 17일, 로펠은 대량매도가 나스닥을 강타하기 직전 애리조나에서 골프를 치고 있었다.
2000년에 다우는 겨우 6퍼센트, S&P500은 10퍼센트 하락했지만 나스닥은 39퍼센트나 하락하며 한 해를 마감했다. 2000년은 기술주들이 평균 이상으로 크게 하락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로펠은? 그는 시장이 하락한 그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시장을 떠나 있었고, 50퍼센트의 수익률을 기록했으며, 백만장자 대열에 합류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2002년 10월, 시장이 바닥을 치기 오래 전부터 주식시장을 포기한 가운데, 오닐은 꼼꼼하게 연구를 계속했다. 이 하락 기간 내내 그가 주시한 주식 중 하나는 이베이였다. 그리고 그는 이 주식이 2002년 내내 꽤 잘 버텨왔다는 점을 포착했다. 이 주식은 16주 동안 이중 바닥을 형성했는데 이것은 약세장을 감안할 때 매우 건설적인 모습이었다.
2003년 3월까지 주식시장에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주식투자를 포기했다. 2003년 봄, 로펠조차 상황이 나아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을 정도였다. 나스닥은 3년째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큰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이 포기할 때가 마침내 시장이 위로 방향을 바꾸는 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 확인했다.
3월 17일, 로펠은 시장의 새로운 움직임을 포착했다. 시장 상황이 나쁜 시기에 완전히 익숙해지려던 무렵이었다. 시장이 마침내 상승세를 확인시켜줄 때 많은 투자자들은 단지 그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 최고의 기회들을 놓쳤다. 시장의 상황이 오랫동안 너무나 나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대부분은 시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이런 황금 같은 기회들을 잡지 못한다. 로펠은 주의를 기울였고, 재빨리 시장에 뛰어들어 몇몇 훌륭한 기회들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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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의 첫 5년은 주식투자자들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우리는 70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하락을 목격했고, 많은 주도주들이 시장이 붕괴할 때 급락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두 전문가가 심한 하락장에서 물러나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는 모습도 보았다. 그들이 적용한 섬세한 기술, 건전하고 유효성이 증명된 전략들은 그들이 제대로 투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