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마르와리는 인도 라자스탄 주 지역 출신 상인들을 말한다. 황량한 사막 지역의 소상인이었던 이들은 16세기를 전후로 인도 전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이후 영국의 지배를 받던 20세기 인도의 독보적인 상인집단으로 성장하며, 1991년 인도가 경제개방을 한 이후 세계적인 기업가로 떠올랐다. 세계 1위 철강기업인 아르셀로미탈스틸, 세계 3위 ICT 기업 바르티에어텔 등도 모두 마르와리 상인이 소유한 기업이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세계적인 비즈니스 대부로 떠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남다른 ‘기업가정신’ 덕분이다.
이 책에서는 대표적인 마르와리그룹과 이들의 성공전략을 소개하며, 마르와리가 사막의 소상인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떠오르기까지의 역사를 심도깊게 파헤친다. 이들의 기업가정신과 성공전략은 더불어 비즈니스 성공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귀중한 교훈과 시사점을 줄 것이다.
■ 저자 오화석
글로벌경영전략연구원(GMRI) 원장과 산하기관 인도경제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인도 네루대학교(JNU) 국제학부에서 수년간 경제학을 가르쳤고, 현재 배재대학교 글로벌교육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년 가까이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매일경제」에 근무하던 2000년 ‘인도 IT 산업 발전상’을 국내 언론 최초로 기획특종 보도한 것이 계기가 돼 인도에 특별한 관심을 쏟게 됐다.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미국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100년 기업의 힘 타타에게 배워라』, 『잠셋지 타타』, 『사리 속치마를 벗기다: 구석구석 만져보는 인도이야기』, 『Indian Billionaires’ Secrets of Wealth』, 『인도 비즈니스 진출』, 『부자들만 아는 부의 법칙』, 『철강왕 락시미 미탈』, 『슈퍼코끼리 인도가 온다』, 『인도: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것』 (공저), 『인도 진출 20인의 도전』 (공저), 『대중남미 중소기업 진출방안 연구』 (공저), 『차이나 쇼크』 (공저), 『국제뉴스로 세상을 잡아라』 (공저) 등이 있다.
■ 차례
PART01. 유대상인도 줄행랑치는 마르와리
01. 삼베상인에서 세계적인 기업가로 아디티야비를라그룹 ‘G.D. 비를라’
*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는 ‘비를라 제국’
02. 세계1위 철강기업의 위엄 아르셀로미탈스틸 ‘락시미 미탈’
* 락시미 미탈의 특별한 세계화 전략
03. 35만 원으로 세계 3위 ICT기업을 일구다 바르티에어텔 ‘수닐 미탈’
04. 위험 즐기는 비즈니스 승부사 달미아그룹 ‘람크리쉬나 달미아’
05. 디지털시대에도 빛나는 마르와리의 비즈니스 능력 플립카트 ‘사친 반살&비니 반살’
06. ‘혼란 마케팅’으로 유통황제가 되다 퓨처그룹 ‘키쇼르 바야니’
07. 돈 냄새 맡는 천부적 감각 모디그룹 ‘구자르말 모디’
08. 혼자하기 어려우면 합작하라 아드벤츠그룹 ‘사로지 포다르’
09. 건설산업에 꽃핀 마르와리의 이단아 살라르푸리아사트바그룹 ‘비제이 아가르왈’
PART02. 마르와리 상인들의 성공전략
01. 상호협력과 타고난 근면성
02. 마르와리만의 독특한 가족경영
03. 비즈니스 감각을 키워주는 특별한 자녀교육
* 내가 받은 마르와리 교육
04. 탄탄한 네트워크와 합작사업
05. 신뢰를 중시하는 시장주의자
PART03. 사막 출신 소상인에서 세계 비즈니스 대부로
01. 인도 산업화의 주역
02. 낙타 타고 모래폭풍 맞으며 대모험 감행
03. 비즈니스 기회 찾아 수만리 대장정
04. 뛰어난 교역상인과 대금업자로 활약
05. 마르와리 전국으로 진출하다
* 18세기 ‘인도의 로스차일드’ 자가트 세트 가문의 부흥과 몰락
PART04. 교역 상인에서 글로벌 산업가로
01. 탁월한 사업능력으로 인도를 장악하다
02. 무역업을 넘어 제조업 신화 창조
03. 세계적인 기업가로 거듭난 현대의 마르와리
04. 21세기 새롭게 태어난 마르와리
마르와리 상인
유대상인도 줄행랑치는 마르와리
삼베상인에서 세계적인 기업가로 -아디티야비를라그룹 G.D. 비를라
삼베상인에서 최대 다국적 기업 황제로
G.D. 비를라는 1894년 마르와리의 고향인 인도 북서쪽 사막지역 라자스탄 주 필라니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라자 발데오다스 비를라와 어머니 요게시와리 사이의 네 아들 중 셋째였다.
부친 발데오다스도 18세의 어린 나이에 자기 사업에 뛰어든 마르와리 비즈니스맨이었다. 그는 봄베이에서 면화 투기사업을 해 2층짜리 집을 마련할 정도로 수완이 좋았다. 그래서 발데오다스가 비를라 그룹의 공식 창업주로 불린다. 그러나 실질적인 창업주는 G.D. 비를라로 지칭된다. 왜냐하면 그가 거대한 비를라 제국을 건설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G.D. 비를라가 고향에서 자신의 사업을 이어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1910년 16세에 불과했던 그는 자신의 사업을 개척하기 위해 인도 동부 항구도시인 캘커타로 떠난다. 당시 캘커타는 인도의 수도로 전 세계의 많은 사업가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G.D. 비를라는 첫 사업으로 아편과 은 투기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이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거래하던 은행이 부도가 난 것이다. 그는 이듬해인 1911년 황마 중개업자로 변신한다. 회사 이름은 GM 비를라 컴퍼니. G는 자신의 이름에서, M은 형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가 시도한 첫 번째 사업이 실패한 것을 본 주변 사람들은 황마사업 대신 아버지가 하던 면화 투기사업을 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거부했다. 향후 황마사업이 돈이 될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판단은 나중에 정확한 것으로 판명된다. 황마는 부상자에게 쓰는 붕대 등에 사용됐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해 황마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기 때문이다. 사업은 제품이 없어 못 팔 만큼 잘 됐다. 1919년 그의 회사는 인도의 황마회사 중 두 번째로 큰 수출회사로 급부상한다.
금기에 대한 도전 정신
사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사업 아이템을 선택해 어디서 파느냐다. 그는 황마라는 품목과 캘커타라는 사업지역을 잘 선택했고, 이것이 그의 초기 사업성공의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황마사업 성공요인은 이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존 관례와 금기에 도전하던 기업가정신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요인이다. 이는 당시를 풍미했던 많은 마르와리의 특성이었다.
그는 자신의 황마사업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영국 런던사무소 설치가 긴요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영국 등에서는 수입산 황마가 비싼 값에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도에서 생산된 값싼 황마를 직접 갖다 팔면 장사가 잘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세계 최강국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인도로서 최고의 해외 판매지사는 런던이었다. 그러나 인도사람이 외국에, 그것도 사업을 위해 나간다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인도인은 바다를 건너 외국에 가는 것을 힌두교 교리상 오염되는 일로 생각해 금기로 여겼다. 따라서 해외 사무소 설치에 대한 반대도 극심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외 지사 설치를 강행한다. 마침내 1917년 런던에 사무소가 열렸다. 당시 인도인이 소유한 황마회사 가운데 최초였다. 인도 회사로는 영국 내에서 거의 독점 판매였다. 이 같은 기존 관습과 금기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조치로 인해 그의 회사는 승승장구한다.
런던사무소 설치로 그는 이제 황마 거래에 관한 한 모든 부문을 관장할 수 있게 됐다. 황마 원료 구입에서부터 포장, 공장 공급, 완성품 구입, 수출에 이르기까지 포괄했다. 오직 하나 빠진 부문이 있다면 황마원료를 삼베로 만드는 제조 단계였다. 이 과정만 완성하면 단순무역 거래상에서 명실상부한 산업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G.D. 비를라는 앞으로 이 제조 부문이 돈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제조업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여기저기서 돈을 마련해 황마공장을 세운다. 이름하여 비를라 황마공장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모험이었다. 왜냐하면 인도인이 황마공장을 경영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도 황마산업은 영국인이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여기서도 G.D. 비를라의 기업가적 도전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시련이 도사리고 있었다. 황마사업을 독점하고 있던 영국인들은 그가 황마공장을 세우자 이를 강하게 견제하고 방해했다. 가장 강력한 경제 세력은 은행이었다. 고정 운영자금을 빌려야 했으나 영국계 은행들은 사실상 거부했다. 인도인이란 이유로 터무니없이 높은 이자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식민지 백성인 인도인으로서 사업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게다가 황마공장 운영을 위해 주변 땅을 사야 했으나 영국인 땅 주인들은 그에게 땅을 팔지 않았다.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가 황마 제조업을 시작하자 영국계 사업가들의 방해와 비방이 절정에 달했다. 그동안 독점적 이득을 향유하던 자신들의 사업영역에 식민지 백성 인도인이 끼어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황마 재배업자들에게 압력을 행사해 그에게 황마를 공급하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또 그가 자신의 공장 부근 땅을 정당하게 구매했음에도 이에 대한 소유권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결국 법정까지 가게 됐고, 비를라의 승소로 끝났다.
영국인 사업가들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비를라 황마공장은 나날이 번창했다. 삼베 제조사업이 유망할 것이라는 그의 전망이 들어맞았고, 다른 인도인들이 감히 꿈꾸지 못한 분야에 앞서 진출함으로써 선점의 이득을 톡톡히 누렸다. 처음으로 진출한 제조업의 성공은 그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다. 이는 보다 큰 사업에 대한 야망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그는 면직물사업에 진출한다. 당시 영국인들은 인도산 면화를 싼값에 사서 영국 공장에서 면직물을 만들어 인도에 들여와 비싸게 팔았다. 따라서 비를라는 면화공장을 세워 면직물을 제조하면 잘 팔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면직물사업의 성공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하루 열두 시간 이상을 면화공장에서 보냈다.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우고, 손수 작업도 해보았으며, 기계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도 하루에 수차례씩 했다. 물론 경영과 관련된 원료 구입과 상품판매, 재무회계 등에도 철저했다. 면직물사업도 크게 성공했다.
마르와리 상인들의 성공전략
상호협력과 타고난 근면성
불굴의 의지 키운 열악한 자연환경
마르와리 상인공동체는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유명하다. 이를테면 미국, 중국, 일본, 호주, 영국, 서독, 인도네시아, 아프가니스탄, 케냐, 우간다, 에티오피아, 수단, 탄자니아 그리고 유럽 등이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마르와리 상인공동체는 뛰어난 기업가정신으로 이름이 높다. 그 이유는 이들이 지닌 특유의 지형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요소와 마르와리 공동체가 기업가적 자질을 타고났고 그렇게 양성되었기 때문이다.
척박한 땅 라즈푸타나 전 지역에서 나타나는 비참한 자연 재앙들은 마르와리의 삶을 제한하고 결정했다. 라즈푸타나는 인도의 용맹한 전사들인 라즈푸트 왕자들의 땅이란 의미이다. 라자스탄과 구자라트를 포함하는 인도의 북서부 일대를 말한다. 라즈푸타나 지역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설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강우량이 적어 사람들은 기근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통신과 교통수단의 미비, 그리고 고용 기회의 부족은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을 더 악화시켰다. 사람들에게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열악한 지형적 상황은 오히려 마르와르 지역 사람들이 모험과 사업을 즐기도록 유도했다. 이는 마르와리 사람들로 하여금 힘들고 고된 상황을 참아내는 인내와 끈기, 적응력을 갖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제 차원에서 근면함과 기업가정신 그리고 경제적 관념에 대한 천부적인 자질을 갖추도록 만들었다. 이 지역의 중요한 모든 마을에는 교역경로가 연결되어 있었고, 교역시장인 만디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마르와르 지역 사람들에게 교역과 상업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어쨌건 마르와르 지역의 경제적, 지형적 상황이 교역을 하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진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단련된 이들은 이주한 지역에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성공을 부르는 상호협력과 근면함
살기가 어려웠으므로 마르와리 사람들은 서로 협력 또는 상호 부양하는 여러 제도를 만들었다. 이들 상호협력체제 역시 마르와리 상인들이 성공에 이르게 하는 열쇠였다. 마르와리 상인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 중 한 명인 미국의 토머스 팀버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라자스탄의 지형적, 경제적 상황 등 특수한 입장은 마르와리 상인들로 하여금 상호 간 협력과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동료 사업가와 공동체를 위한 교육, 오락시설 등 다른 여러 수단들을 채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호협력수단들은 마르와리 사업가들에게 상당한 지원과 공동체 구성원들 간 친목을 도모하게 하였고, 결국 성공으로 이끌었지요."
다시 말해 라자스탄의 열악한 지형적, 경제적 상황이 마르와리간 상호부양 제도를 구축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마르와리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는 말이다. 인도의 유명한 경영컨설턴트인 구르차란 다스도 이렇게 말했다.
"마르와리 사람들은 비즈니스에 있어 똘똘 뭉쳤습니다. 이들은 마르와리 출신이면 친 가족처럼 대했습니다. 이들이 인도 어느 곳을 가든 대부분 바사라는 마르와리 숙소가 마련돼 있고, 이곳에서 잠을 자고 음식을 해결했지요. 이에 드는 비용은 마르와리 상인들이 공동으로 마련한 자금으로 해결하거나 현지 성공한 마르와리가 제공했습니다."
팀버그와 다스의 말대로 마르와리 기업가들은 상호협력차원에서 여러 가지 특별한 특징을 갖고 있다. 마르와리 연구자인 발찬드 모디는 마르와리 공동체의 성공을 이끈 사회,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특징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마르와리의 대가족 제도는 이들의 성공에 명백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공동숙소인 바사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바사는 마르와리와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인도인인 구마스타를 포함한 모든 고용인들이 함께 자고 저녁식사를 하는 장소였습니다.
아침이 되면 그들은 갠지스강에서 몸을 씻고 사찰을 방문한 후 아침식사를 했어요. 그들은 정확히 아침 아홉 시에 일터로 갔지요. 그들은 학력수준이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산에는 도가 통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마르와리는 자신들의 은행계좌를 잘 유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마케팅에도 매우 능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종교적으로 아주 독실했고 완전한 공동체 의식을 지니고 있었지요.
가능한 한 그들은 가난한 마르와리에게 거주지를 제공해주고 이들을 자신들의 공장에 고용했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공용하지 못할 경우에도 이들은 다른 마르와리를 정착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검소하게 생활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마르와리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대가족 제도와 무료 공동숙소인 바사, 종교적 공동체 의식, 뛰어난 계산능력, 검소하면서도 부지런한 생활태도가 성공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마르와리는 돈을 저축하는 면에 있어서 눈에 띄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1907년 봄베이 잡지에서는 마르오리에 대해 "저축을 많이 하는 계급 중에서 으뜸은 마르와리"라며 그들의 간소한 생활과 검소한 씀씀이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이곳에 있는 여러 마르와리 기업을 방문해 보면 한결같이 내부 시설이 간소하고 소탈하다. 사장실에는 대개 누추한 소파에 덩그러니 낡은 책상 한 개가 놓여 있다. 낭비하지 않는 마르와리 기업인들의 검소함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검소함은 마르와리의 성공을 가져오는 중요한 특성이다. 마르와리 공동체의 성장과 발전에 있어 이들의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태도는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요즘도 그렇지만, 과거 마르와리 교역상인들은 매우 검소하게 살았다. 인도인들은 한결같이 마르와리의 절약 정신과 사업재능을 높이 평가한다. 마르와리는 이러한 자질들을 완전히 체화해 생활화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르와리는 편히 살기 어려운 지형적인 특색과 환경 조건 때문에 생존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르와리는 사전에 정규 회계공부를 받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기업 경영에 파르타시스템이라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회계방식을 활용했다. 또 놀랍게도 그들은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회의 언어인 영어로 아주 잘 소통했다. 그 결과 마르와리는 이후 많은 회사를 효율적이고 성공적으로 경영할 수 있었다. 이는 이들이 가진 중요한 자질, 즉 타고난 근면함과 성실성에 기인한다. 이들은 매우 부지런히 열심히 일했다.
교역 상인에서 글로벌 산업가로
세계적인 기업가로 거듭난 현대의 마르와리
인도 독립 이후 마르와리
20세기 들어 고양된 인도의 사회적, 민족적 자각은 산업 부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점점 경제적 위상을 높여가던 마르와리는 간디의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적극 지원하는 것으로 민족의식을 표출했다. 안타깝게도 1930년 이후 인도의 산업발전상을 정확히 추적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인도정부의 정책이 특정 산업에 대해 보호주의적이고 규제적이 되면서 기업들이 이 당시 기업 정보 공개를 극히 싫어했기 때문이다.
비를라그룹은 독립 후 눈부시게 발전했다. 1947년 이 회사는 그때부터 향후 20년간 인도 내 최대가 될 인조견 공장을 설립했다. 이 공장은 또한 당시 외국 회사와 인도 회사가 합작한 최초의 사례였고, 기계를 외국에서 수입해 들여온 것도 처음이었다. 바즈그룹은 1951년 힌드램프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는 오늘날에도 그룹의 주력기업 가운데 하나다. 달미아그룹은 1949년 오리사에 시멘트공장을 설립했다.
마르와리의 뛰어난 기업가정신은 인도 산업발전에 대단한 기여를 했다. 당시 인도 산업의 총 자산 가운데 60%가 마르와리 수중에 있었다. 마르와리의 자산은 치열한 경쟁자인 구자라티 공동체에 비해 지역적으로, 또 산업구성 측면에서도 훨씬 광범위했다. 마르와리 출신 기업인들은 독립 후 산업에 대한 장악력을 더욱 강화해갔다. 독립 전에 비해 독립 후 자회사를 늘리는 등 덩치가 매우 커졌다. 1931년 마르와리의 소유 기업은 여섯 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독립 후 96개로 대폭 늘어났다.
새로 독립된 나라의 인도정부는 창업 기업들에게 다양한 지원방안을 마련했다. 새로운 기업들을 완전히 보호해주는 정책을 폄과 동시에 신용대부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도움을 주었다. 전쟁 기간 동안 많은 외환이 위축돼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신생 기업들을 위해 돈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1951년 이후에는 결국 외환은 고갈된다.
외환이 고갈되자 외국 소비재 상품을 수입하지 못하게 되면서 국내 소비재시장은 상품 부족에 허덕인다. 이는 신설 소비재 기업들에게 기회였다. 비록 제품의 질은 떨어질지라도 이에 대한 수요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1951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됐다. 정부는 이를 위해 대규모 투자를 실시했고, 이는 민간 기업들의 성장을 부추기는 주요한 동력이 됐다.
독립 후 실시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1, 2차 기간 동안은 인도의 민간기업의 발전에 황금기였다. 산업생산이 연평균 9% 성장했다. 어떤 상품의 생산은 대단히 빠르게 증가했다. 비즈니스 그룹의 자산도 비슷한 속도로 팽창했다. 이 기간 동안 마르와리 기업은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마르와리의 빠른 성장은 적어도 독립 초기에는 일정 부분 정치적 지원을 받은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마르와리가 독립 후 집권당이 된 인도국민회의 독립운동의 재정적 후원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르와리가 정치인과 협력 하에 인도의 경제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강한 의욕이 이 같은 기업의 급속 성정에 큰 기여를 했다. 여러 학자들도 마르와리의 강한 경제발전 의욕이 기업을 빠르게 성장시키는 견인차가 됐다고 지적한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마르와리
마르와리 출신 그룹의 성장은 계속됐다. 이들 가운데 많은 기업은 대규모 자본을 축척, 규모의 경제를 활용해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규모가 크지 않은 여타 마르와리 기업들은 자본을 계속해서 제조업 분야에 투입했다. 물론 새로운 산업 분야에의 투자도 이 같은 고속성장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대규모 마르와리 기업들의 성장은 다른 여타 인도 대기업과 달리 내부 자금조달에 크게 의존했다. 자금의 내부 조달이 가능했던 것은 그룹 내 제휴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마르와리 기업들은 주로 독립 이후 자회사들을 눈덩이처럼 불려나갔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독과점조사 위원회의 조사대상인 151개 비를라그룹의 기업 가운데 1945년 이전에 소유한 기업은 20개도 채 안 된다. 비를라그룹의 대부분 기업이 독립 후 신설된 것이다. 방구르와 달미아그룹의 거의 대부분도 1940년 이후 획득했다. 또 자티아와 고엔카그룹의 모든 기업은 1945년 이후 인수한 것들이다.
캘커타 전화번호부에 나와 있는 제조기업 명단의 절반 이상이 마르와리 기업들인데, 이의 대부분이 중소기업이고 최근 신설된 것이다. 즉, 이는 교역을 위주로 하던 마르와리 상인공동체가 산업가로 계속해서 전환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인도의 독립 후 마르와리 공동체도 급격한 변하를 겪었다. 대학 혹은 그 이상의 전문적 학위를 받는 등 정규교육 수준이 혁명적으로 높아졌다. 젊은 마르와리 세대는 영국식의 생활을 받아들인 앵글로 인디어식 생활태도에 빠르게 적응했다. 예를 들면 배타적인 사교클럽이나 엘리트 학교에 나가는가 하면 골프나 승마를 즐기는 등 서구적 생활을 했다. 이런 현상은 마르와리 가문에서도 일정 부분 발생하면서 공동체적 장벽이 낮아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마르와리 기업들은 여전히 가족적이고 전통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보다 근대적인 경영스타일이란 방향으로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마르와리 기업의 젊은 경영자들은 대체로 경영학석사학위 졸업생이거나 엔지니어링 학위를 갖고 있다. 이들은 기업경영 문제를 점점 더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있다. 예를 들어 판매나 생산 등 분야의 매니저들은 전문가들이다. 저명 경영학자인 사가르는 이미 1971년에 "이제 인도의 비즈니스는 대체로 대학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경영을 하는 것이 당연한 추세가 되었다"고 말했다.
전통적 마르와리 기업들도 인간적 유대와 현금 흐름을 중시하는 회계절차 등을 주의 깊게 사용하여 매우 정교한 사업도 수행해왔다. 인력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활용하고 있다. 친족과 공동체 사람들을 쓰되 주요한 직책을 맡길 때는 잘 훈련을 시키고, 외부 인력에겐 이들이 능동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역할을 맡김으로써 공동체 내·외부 인력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그래도 마지막 재정 관련 결정권은 아직은 외부 인력에 맡기지 않고 있다. 마르와리계 기업과 미국계 기업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기업 회계를 매일 하느냐, 아니면 월 단위로 하느냐이다. 마르와리 기업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매일 회계 시스템을 유지하는 사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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