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의 신

   
이기찬
ǻ
중앙경제평론사
   
13800
2015�� 06��





■ 책 소개


소설로 읽는 무역의 모든 것
위기일발 미래전자가 해외시장을 개척하기까지 무역의 신, 홍 대리의 고군분투 성장기

 
짜임새 있는 구성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통해서 무역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국내 최초의 본격 무역소설. 무역입문자들에게 실제로 무역거래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 소설의 형식을 빌려 썼다. 국내 영업을 담당한 홍 대리가 해외시장을 개척하며 배우고 실수하며 극복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저자 이기찬
종합상사에서 무역에 입문한 이래 현재까지 무역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미국, 일본, 유럽 등지의 유수한 업체들의 에이전트로 활동하였고, 그 외 중남미, 중동, 동남아시아 업체들을 상대로 다양한 무역경험을 쌓았다. 풍부한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다수의 무역 관련 도서를 집필하여 무역부문 최고의 베스트셀러 저자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으며, 무역을 가장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는 명강사로서 대구가톨릭대학교, 경희대학교 테크노경영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하고, 한국무역협회를 비롯한 각종 기관, 기업체,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무역왕 김창호』『이기찬 무역실무』『무역실무자를 위한 해외마케팅』『무역실무 이것만 알면 된다』『무역영어 이렇게 하면 된다』『당신도 무역을 할 수 있다』『세계를 향한 끝없는 도전』『진실』『세계시장에 나를 팔아라』『나 홀로 창업 오퍼상이나 해볼까?』『무역오퍼상 창업 119』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프롤로그 - 위기에 처한 미래전자


1장 무역 전쟁의 서막
특명, 해외시장을 뚫어라
귀인을 만나다
풀리지 않는 실마리
두바이에서 온 메일
첫 번째 오더
신용장의 비밀


2장 추격자
후계자
반격의 시작
이탈리아 클레임
해리스전자
일곱 가지 협상전략


3장 기회의 땅, 뉴욕
뉴욕의 밤
초대받지 않은 미팅
알코바 상륙작전
역전의 실마리
베이루트에 지다
끝없는 미로(迷路)


4장 마지막 승부
끝나지 않은 전쟁
또 하나의 카드
끝날 때 더 잘하라
9회 말, 마지막 승부
승부의 끝
아버지와 딸


에필로그 - 무신(貿神)의 탄생
맺음말


부록 - 한눈에 파악하는 무역실무


 




무역의 신


프롤로그 – 위기에 처한 미래전자

미래전자 회의실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난 달 영업실적이 말이 아닙니다. 3개월째 판매 신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어요. 회사의 자금사정도 좋지 않고. 이대로 가면 정말 큰일입니다." 아무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이 부장 생각은 어떤가?" 최만호 전무의 시선이 영업책임자인 이종국 부장에게로 향했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테크의 공격적인 마케팅 때문입니다. 몇 달째 제이테크에서 대대적으로 광고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보상판매에다 경품까지 내걸고 새로운 모델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광고마다 미국시장 진출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미국 소비자들이 사용할 정도의 제품이라면 믿고 구입해도 좋다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전략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 이 부장. 생각을 좀 하고 말을 해.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게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잖아. 해외영업을 담당할 조직도 없고, 지금 시작한다고 해도 당장 오더를 따낸다는 보장도 없잖아. 공연히 해외시장에 진출한다는 명목으로 시간만 허비하기 십상이지. 지금 급한 건 해외시장 진출이 아니라 국내시장에서 추락하고 있는 시장점유율을 한시바삐 끌어올리는 거라고. 그게 영업부의 할 일이고."



무역 전쟁의 서막

특명, 해외시장을 뚫어라

며칠 전 이종국 부장이 홍석진 대리를 찾았다. "자네가 할 일이 생겼네." "무슨 일입니까?" "우리 회사 제품의 수출가능성을 알아보는 걸세. 홍 대리도 알다시피 우리 회사엔 해외영업담당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사람을 새로 뽑아야……." "그럴 시간이 없어. 게다가 당분간 이 일은 비밀리에 추진해야 하네. 최 전무님은 해외시장 진출 건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네. 공개적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힘든 상황이네. 일단 수출오더가 확정되고 나면 지원을 요청해야지. 그때까지만이라도 비밀을 유지하자는 거야. 공연히 수출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망신만 당할 수도 있으니 말일세. 아무튼 자네만 믿겠네." 이 부장이 서둘러 말을 끝냈다.


홍 대리는 꽤 유명한 대기업 해외영업부에 다니는 대학동창 박민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참, 현주를 만나보지 그래. 모르고 있었어? 현주 아버님이 자타가 인정하는 무역 전문가잖아. 종합상사를 비롯해서 무역현장에서만 30년간 활동하신 분이지. 무역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집필하고, 강의경력도 화려할 뿐만 아니라 개인 웹사이트를 통해서 무역초보자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무역연구소 소장이기도 하지. 한마디로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최고의 무역전문가야. 무역을 아주 쉽게 가르친다고 소문이 자자해. 한두 시간만 설명을 듣고도 당장 무역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귀인을 만나다

홍 대리는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차를 멈췄다. 인적이 드문 산 중턱 한 편에 자리 잡은 아담한 전원주택이 눈에 들어왔다. 나승환 소장이 반갑게 맞았다. "무역이라면 나를 찾지 않고도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많을 텐데." 홍 대리는 나 소장에게 궁지에 몰린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단시일 내에 해외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사정을 늘어놓았다. "지금 자네가 무역을 배우려는 목적이 뭔가? 해외바이어를 개발해서 물건을 팔려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바이어를 개발하고 어떻게 거래를 성사시켜서 물건을 수출하는지만 알면 되지 않겠나." 홍 대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여기 적혀 있는 네 가지 용어를 기억해 두게." 나 소장은 미리 준비한 강의노트를 꺼내서 식탁 위에 펼쳐놓았다. 거기에는 FOB, CIF, T/T, L/C라고 적혀 있었다. "FOB 하고 CIF는 일반적인 무역거래에서 사용하는 거래조건이네. 가격을 정하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지. 즉 가격에 어디까지의 비용과 위험을 포함시키느냐를 정해놓은 걸세. 국내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도 가격에 배송료를 포함시킬 수도 있고 포함시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FOB 조건은 가격에 선적항에서 물건을 실을 때까지의 비용만 포함시킨 것이고, CIF 조건은 도착항에 물건이 도착할 때까지의 비용이 포함된 조건이라네." "그럼 무역거래를 하기 위해서 가격을 표시할 때는 거래조건을 함께 표시해야 하겠네요?" "그렇지. 예를 들어 FOB Busan이라고 하면 부산항에서 물건을 선적할 때까지의 비용만 포함시킨다는 뜻이고, CIF New York이라고 하면 물건이 뉴욕항에 도착할 때까지의 비용, 즉 뉴욕항까지의 운임과 보험료까지를 포함시킨다는 뜻이지."


"T/T와 L/C는 뭔가요?" "무역거래에서 사용하는 결제방식이라네. T/T는 Telegraphic Transfer의 약자로서 상대방의 은행계좌로 물품대금을 송금하는 방식이고, L/C는 Letter of Credit의 약자로서 신용장이란 뜻이지. 신용장이란 수입자를 대신해서 수입자의 거래은행에서 수출자에게 물품대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는 증서일세. 수출자는 은행을 믿고 물건을 선적한 다음에 선적서류를 챙겨서 은행에 제출하고 물품대금을 지급받으면 되고, 수입자는 물품대금을 지급하고 선적서류를 인도받아서 선박회사로부터 물건을 인수하면 되는 거네."


"무역거래를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템과 거래처를 개발하는 걸세." "저희 회사는 이미 수출할 아이템이 정해져 있으니까 바이어만 개발하면 되겠네요. 바이어는 어떻게 개발하나요?" "바이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취급품목이나 상대국, 거래형태 등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야 하네. 우선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인터넷이지. 알리바바(www.alibaba.com), 이씨21(www.ec21.com), 이씨플라자(www.ecplaza.net) 등과 같은 인터넷 무역거래 알선 사이트를 통해서 바이어를 개발할 수 있다네. KOMPASS(www.kompass.com)와 같이 전 세계 무역업체들의 정보를 책으로 묶어 놓은 디렉토리를 이용할 수도 있고, 무역협회(www.kita.net)나 KOTRA(www.kotra.or.kr)와 같은 무역관련기관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활용할 수도 있지. 또한 전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통해서 바이어를 개척할 수도 있다네. 문제는 제대로 된 바이어를 만나기가 힘들다는 거지." "왜요?" "생각해보게. 구매력이 있고 믿을만한 바이어라면 이미 거래하고 있는 거래처가 있을 거 아닌가? 그런 바이어들이 뭐가 아쉬워서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와 새로 거래를 트려고 하겠나?" 


"바이어를 개발하면 협상을 통해서 품명(description), 수량(quantity), 가격(price), 거래조건(tradeterms), 포장(packing), 선적항(shipping port), 목적지(destination), 선적기일(shipment), 결제방식(payment) 등과 같이 계약조건에 합의해야 하네. 그 다음엔 합의된 내용대로 계약을 이행하면 되네." "물건을 외국으로 내보내려면 절차도 복잡하고 챙겨야 할 것이 많을 것 같은데요." "우리가 해외여행을 할 때 여행사의 도움을 받듯이 무역운송과 관련된 모든 업무는 포워더(운송주선인)의 도움을 받아서 처리할 수가 있다네. 그뿐이 아닐세. 운송 도중의 사고를 보상해 주는 적하보험은 보험회사에 맡기면 되고, 통관과 관련한 모든 업무는 관세사에서 대신 처리해 준다네."


풀리지 않는 실마리

변종수 상무는 한성그룹 내에서도 최고의 해외영업통으로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한성그룹 강병국 회장의 셋째 사위인 허준표 사장의 중소전자업체인 제이테크에서 일하고 있다.


홍 대리는 지난 한 달 동안 바이어를 잡기 위해서 안 해본 것이 없었다. 나 소장이 일러준 대로 인터넷 무역거래 알선사이트에 게시물도 올리고, 디렉토리와 국내외 무역 관련기관의 웹사이트를 뒤져서 매일같이 수십 통의 메일을 발송했다. 심지어 각국 대사관 상무관실을 들락거리며 바이어를 물색하기도 했다. 몇몇 바이어들이 제품에 대한 자세한 사양이나 가격을 문의하곤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상담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두바이에서 온 메일

"세상에 거래제의를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더를 하는 바이어가 몇이나 있겠나. 해외거래처를 개발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서두르는 걸세. 서두르다보면 무역사기에 휘말릴 가능성만 높아질 뿐이지." "그건 알지만 워낙 회사 상황이 급해서요." "정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지. 가능성이 높은 목표물을 찾아내서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걸세. 우선 시장조사를 해야지. 목표시장을 정한 다음 해당 시장에서 유력한 바이어가 누구인지, 유력 바이어 중에 새로운 거래파트너가 필요한 업체가 어딘지를 알아내야지."


이왕이면 세계 제일의 시장이라는 미국부터 진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문제는 미국시장에는 이미 제이테크가 진출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국시장에서 제이테크와의 대결에서 승리한다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홍 대리에게 낭보가 날아들었다. 두바이에 소재한 업체에서 보내온 메일이었는데 오더를 발주하려고 하니 가격을 조금만 깎아달라는 내용이었다. 홍 대리는 이 부장에게로 달려갔다. "부장님, 잘 하면 첫 오더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격을 네고해 달라고 합니다." "일단 한 3퍼센트 정도 깎아주겠다고 제시해 보게. 거래를 트기 위해서 특별히 깎아주는 거라고 하고." 홍 대리는 가격인하폭을 얼마로 할 것인가를 놓고 잠시 고민한 끝에 일단 2퍼센트를 제시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오더

다음 주 월요일, 홍 대리는 별 생각 없이 메일함을 열었다. 두바이 업체에서 보낸 메일이 눈에 뜨였다. 가격인하에 감사하여 첫 오더를 발주한다는 것이었다. 첫 오더 치고는 물량이 적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나를 물 먹여도 되는 건가?" 최 전무의 노여움은 쉽사리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더가 확정되면 우선 확정된 오더내역을 서식으로 작성해서 바이어에게 보내주어야 하네. 어떤 물건 몇 개를 어떤 거래조건에서 단가는 얼마고, 총액은 얼마며, 포장은 어떻게 하고, 물건을 어디서 싣고, 어디까지 싣고, 언제 싣는지, 결제는 어떤 방식으로 할 건지를 기재하면 된다네." "서식을 보내준 다음에는 어떻게 하나요?" "합의된 결제방식에 따라 물품대금이 입금되거나 신용장이 개설됐는지를 확인해야지. 계약한 대로 물건을 선적하고 수입자 또는 은행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준비해서 보내주면 일이 마무리되는 걸세. 일반적으로 무역거래에서 공통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서식은 세 가지일세. 우선 수출자는 상업송장(commercial invoice)과 포장명세서(packing list)를 작성해야 하네. 상업송장은 물품명세서와 대금청구서의 역할을 하는데 수입자뿐만 아니라 운송회사나 보험회사, 세관, 은행 등과 같이 무역거래에 개입하는 기관이나 업체에 물품내역과 금액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걸세. 포장명세서는 물건의 포장상태와 내역을 알려주는 서식이네. 다른 하나는 선하증권(bill of lading)일세. 선박회사 또는 포워더에서 발행하는 일종의 화물인수증이라고 할 수 있네. 수출자가 물건을 싣고 선하증권을 챙겨서 수입자에게 보내주면 수입자는 물건이 도착한 다음 선하증권을 제출하고 물건을 찾게 되는 거지. 물건을 비행기에 실어 보낼 때는 선하증권 대신에 항공운송장(airway bill)을 사용한다네."


"그밖에 필요한 서류는 없나요?" "거래조건이 CIF일 때는 수출자가 보험을 들고 보험회사로부터 보험증권(insuarance policy)을 받아서 앞서 언급한 서류들과 함께 은행에 제출해야 하네. 또한 수입자의 요구에 따라 원산지증명서(certificate of origin)가 필요할 수도 있지."


홍 대리는 우선 확정된 오더내역을 명시한 proforma invoice를 작성해서 바이어에게 발송했다. 며칠 후 신용장이 도착했다. 신용장의 내용을 검토하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포워더와 관세사에게 물건의 운송과 통관을 의뢰하고, 보험에 가입함으로써 수출업무를 일단락시켰다. 우여곡절 끝에 물건을 선적하고 선적서류들을 챙겨서 은행에 제출하자 수출대금이 회사계좌로 입금되었다. 수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어느새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신용장의 비밀

거래은행으로부터 홍 대리를 찾는 전화가 왔다. "지난번에 네고한 두바이 신용장 건 때문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언페이드(unpaid)됐어요. 바이어측에서 신용장 대금지급을 거부합니다." "일단 신용장에서 요구하는 물건을 싣고 신용장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보내면 바이어는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설사 바이어가 대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바이어를 대신해서 대금지급을 약속한 은행이 책임지고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서류상 이상이 없으면 당연히 대금을 지급해야 하지요. 하지만 서류상 하자가 있을 때는 바이어가 대금지급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개설은행에서도 대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고요." "도대체 서류가 뭐가 잘못됐다는 건가요?" "신용장에는 품명에 모델번호가 들어가 있는데 서류에는 모델번호가 빠져 있다는 겁니다." 홍 대리는 서류작성 당시를 떠올렸다. 인보이스를 작성하면서 품명에만 신경을 쓰느라 모델번호를 기재하는 걸 깜빡했던 모양이었다.


"근데 바이어가 대금지급을 하지 않으면 은행에서 선하증권을 비롯한 서류들을 바이어에게 주지 않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 바이어는 물건을 찾을 수 없는데, 대금지급을 거부함으로써 바이어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이 뭐란 말입니까?" "바이어가 노리는 것은 수출자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자는 거죠. 신용장 대금을 결제하는 조건으로 물건 값을 깎아달라든지 또는 별도의 자금을 송금해 달라는 식으로 말이죠." 은행원의 분석은 정확했다. 바이어에게 서류작성상의 실수를 눈감아 달라고 요청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답신이 날아왔다. 미화 5천 달러를 송금해주면 서류를 인수하겠다는 것이었다. 홍 대리는 바이어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에 물건을 도로 싣고 오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추격자

후계자

변 상무가 합류한 이후 제이테크의 해외영업실적은 괄목할만한 신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참, 미래전자가 해외시장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습니다." "제이테크가 후발주자로서 미래전자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보다 앞서 해외시장 진출에 성공했기 때문이죠. 만약 미래전자에서도 해외시장 진출에 성공한다면, 제이테크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 미국시장에 진출하는 것만이라도 막아야 합니다. 미래전자가 미국시장에 진출하면 우리가 내세우는 광고 전략에도 차질이 빚어집니다. 상무님만 믿겠습니다." 허 사장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반격의 시작

홍 대리는 현주가 보내준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자료에 따르면 현재 미국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업체는 세 곳이었다. 그중에서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은 업체는 해리스전자라는 업체였는데, 이미 한국의 제이테크와 거래를 하고 있었다. 다른 한 업체는 수입품보다는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는 해외공장에서 생산한 물건을 판매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나머지 한 업체는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물건을 수입해서 팔고 있었다. 모어스전자라는 업체였는데, 업계 1위 자리를 놓고 해리스전자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홍 대리는 일단 모어스전자를 공략해 보기로 마음을 정하고, 장문의 거래제의 서신을 작성했다. 미래전자가 이미 미국에 진출한 제이테크와 한국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도 부각시켰다. 모어스전자로부터의 회신은 예상 외로 빨리 왔다. 거래제안서를 보내주어서 고맙고 검토한 후에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의례적인 내용이었다.


해리스전자

홍 대리는 뉴욕의 해리스전자를 찾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해리스전자에선 제이테크뿐만 아니라 여러 회사의 제품을 수입해다 미국시장에 팔고 있습니다. 저희 제품이라고 팔지 못하라는 법이 없잖습니까? 뉴욕 구경도 할 겸 자비로 다녀오겠습니다." 홍 대리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홍 대리는 뉴욕 출장을 앞두고 나 소장 집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한다. "그동안 내가 기업체 특강 등을 통해서 강조한 협상전략은 크게 일곱 가지라네. 첫 번째 전략은 협상 초기 단계의 상대방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지 말라는 걸세. 모든 협상에선 초반의 분위기가 이어질 확률이 높네. 두 번째는 상대방의 문화와 상관습(商慣習)을 이해해야 하네. 세 번째는 주고받으라는 걸세.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다가는 협상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네. 네 번째는 서두르지 말고, 다섯 번째는 경쟁심을 자극하라는 걸세. 그리고 여섯 번째 전략은 상대방을 코너로 몰지 말라는 걸세.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 하네." "이젠 마지막 한 가지 전략만 남은 거네요?" "일곱 번째 전략은 당분간 자네에겐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니 나중에 들어도 상관없네."



기회의 땅, 뉴욕

초대받지 않은 미팅

홍 대리는 뉴욕에 도착해 해리스전자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해외사업을 총괄한다는 마이클은 출장 중이며 언제 돌아오는지도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 현주의 친구인 제니가 마이클과 통화했다며 다음날 오후 3시 약속을 잡아주었다. 제니가 무슨 수로 마이클의 전화번호를 알아냈으며 직접 통화까지 해서 약속을 잡았단 말인가? "이게 다 언론의 힘이죠. 기업 담당 기자를 동원했어요."


마이클은 사무실 한편에 자리 잡은 자기 방으로 홍 대리를 안내했다. 마이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니한테 대충 얘긴 들었습니다. 저희와 거래를 하고 싶다고요. 저희 회사가 이미 제이테크와 거래하고 있는 걸 알고 계십니까? 아무래도 저희 입장에서 한국산 제품을 두 가지나 취급한다는 게 여러 면에서 쉬울 것 같지 않습니다." 표현은 부드러웠으나 거절의 뜻이 분명했다.


역전의 실마리

메일함을 확인하던 홍 대리는 해리스전자의 마이클이 보낸 메일을 발견하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이클이 보내 온 메일의 요지는 자기네 브랜드로 물건을 만들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소위 주문자상표 방식의 거래를 제안한 것이다. 그동안 주문자상표 방식으로 물건을 공급하던 중국 업체에서 문제가 발생해 급하게 새로운 공급업체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향후 자체 브랜드로 거래할 기회가 열려 있다는 내용도 덧붙여져 있었다.


끝없는 미로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해리스전자와의 2차 오더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금방이라도 오더를 할 것 같았던 해리스전자의 적극적인 태도는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대량주문에 따른 가격인하 요청을 최대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더확정은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했다. 생산라인을 비워놓고 오더가 확정되기만 기다리던 공장에서는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진 홍 대리는 마이클에게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침묵을 지키던 마이클은 며칠이 지나서야 답장을 보내왔다. 거기에는 현재 다른 업체와의 오더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승부

끝나지 않은 전쟁

홍 대리는 제니가 확인한 해리스전자 관련 정보를 현주를 통해서 듣기로 했다. "제이테크가 원래 해리스전자에 주문자방식으로 공급하던 중국 공장을 인수해서 물건을 공급하기로 했대. 해리스전자 측에서는 기존 모델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나봐. 제이테크가 중국 공장을 인수해서 기존 모델을 공급하는 대신 미래전자와의 거래를 즉각 중단하라는 요구조건을 내세웠대. 해리스전자에서 미래전자와의 거래를 꺼리는 것은 제이테크의 요청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해리스전자에선 신 모델이 출시되면 소비자들의 반응을 체크해서 후속오더를 결정한대. 불행히도 미래전자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이 별로였나봐. 그래서 재오더 여부를 고민하고 있던 차에 제이테크의 제안을 받게 된 거래."


또 하나의 카드

"어차피 미래전자의 입장에서 제이테크처럼 중국 공장을 인수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위탁가공무역은 어떤가? 제품기획 능력도 있고 제조노하우도 있는데 인건비가 비싸서 국내에서 물건을 만들 수 없을 때 인건비가 싼 나라의 공장에 가공을 위탁함으로써 가격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이네." "그럼 일단 해리스전자에 위탁가공무역 방식의 거래를 제안해 놓고 공장을 물색해봐도 될까요?"


"좋은 생각이네. 어차피 제이테크에서 아직 중국 공장을 인수한 게 아니니까 해리스전자 측에 대안이 있다는 걸 알려줄 필요가 있네. 그리고 이왕 제안서를 작성하려면 위탁가공계약을 어떤 식으로 체결하고 원부자재를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안을 제시해 보도록 하게. 해리스전자에서 위탁가공무역 방식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일세." 나 소장이 조언했다.


끝날 때 더 잘하라

해리스전자의 마이클은 바로 답신을 보내 왔다. 제안서를 정독했으며 일단 가공업체를 확정해서 최종 견적을 보내주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는 내용이었다. 답신 말미에 가급적 빨리 최종 견적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덧붙였다. 답신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아직 제이테크와의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 소장이 말했다. "일곱 번째 방법은 협상전략이라기보다는 거래처를 상대하는 요령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네. 바로 끝날 때 더 잘하라는 걸세. 거래관계라는 것이 언젠가는 끝이 있기 마련 아닌가. 중요한 것은 거래관계가 끝난다고 해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냉정하게 돌아서지 말라는 걸세.


9회 말, 마지막 승부

최종제안서에 대한 해리스전자의 답변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마이클이 보내 온 메일에는 미래전자의 최종제안서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적혀 있었다. 해리스전자와의 제휴를 통해서 기사회생의 전기를 마련하려던 미래전자로서는 마지막 희망조차 사라진 것이다. 또 다른 거래처를 개발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제이테크와의 승부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승부의 끝

최 전무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채권단에서 최후통첩을 보내왔습니다. 미국시장에 진출하는 데 실패했다는 걸 눈치 챈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장실 문이 열리고 이종국 부장이 홍석진 대리와 함께 나타났다. "해리스전자와의 제휴가 성사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제출한 최종제안서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입니다. 메일에는 정식계약서 초안까지 첨부되어 있습니다. 상호 간의 안정적인 거래를 위해서 계약기간은 3년으로 하고, 오더량도 매년 늘려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장기적으로는 미래전자 자체브랜드 제품을 수입 판매하는 것도 검토해보겠다고 합니다."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던 김 사장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당장 이 사실을 채권단에게 통보하고 추가 지원을 요청해야겠습니다."


자리에 돌아 온 홍 대리의 휴대폰에 처음 보는 전화번호가 떴다. 제니였다. "해리스전자가 미래전자에서 주문자상표 방식으로 공급한 모델에 대한 소비자 반응을 체크하던 중에 이상한 점이 발견됐대요. 특정 판매점에서만 악평이 접수됐고, 악평의 내용이 비슷한 데다 문체까지 같더래요. 예전에 접수했던 설문조사지를 뒤져서 문제의 소비자 평을 확인해보았더니 영락없이 같은 사람이 쓴 것이더래요. 근데 문체는 같은데 내용은 정반대, 즉 제품에 대한 호평만을 늘어놓았더래요. 그 제품은 바로 제이테크에서 새로 출시한 모델이었고요. 문제의 평이 접수된 판매점 근처에 한성그룹 뉴욕지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한성그룹 지사원 중 누군가의 소행으로 보인다고 하더군요. 결국 제이테크에서 소비자 반응을 조작한 것으로 보는 거죠. 최근 등어 제이테크 자체브랜드 제품에서 하자가 자주 발생한대요. 해리스전자의 분석으로는 불량부품의 사용이 하자의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요. 원가를 낮추기 위해서 저가의 부품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예요." "그건 그렇다 치고 해리스전자와 제이테크 사이에 또 다른 문제는 없었는지 궁금하네요." "물론 해리스전자와 제이테크 사이에 보다 중대한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신뢰를 중시하는 서양 사람들이 시각에서 보면 아무리 좋은 조건을 내세운다고 해도 소비자 반응을 조작하고 불량부품을 사용하는 상대를 제휴파트너로 삼기는 힘들 거예요." "아무튼 여러모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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