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관치금융·정경유착 경제 시대의 거대한 축인 네거티브 임팩트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를살펴봄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한국형 경제실용주의 시대에 한국 경제를 이끌어갈 긍정적인 축, 즉 포지티브 머니 임팩트(Positive MoneyImpact)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용하는지, 또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알려준다.
■ 저자 윤광원
한양대학교를 졸업한 뒤1989년 금융경제 전문지인 『은행계』의 취재부 기자로 입사한 이래 줄곧 일선 기자 생활을 해왔다. 현재는 시사경제주간지 『이코노믹리뷰』에서금융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깐깐 경제 맛깔 논술』이 있다.
■ 차례
머리말
1. 해방·분단·전쟁과 금융인들
2. 제1차 통화개혁
3. 재벌의 손에넘어간 은행들
4. 자유당정권의 권력형 부정대출
5. 3·15 부정선거와 금융계의 수난
6. 쿠데타정권 은행을 점령하다
7. 제2차 통화개혁
8. 4대 의혹사건의 그림자
9. 한국은행, 정부에 예속되다
10. 차관 시대와 편타대출사건
11. 외환은행의 설립
12. 부실기업 정리와 8 3 조치
13. 금융사기의 대부 박영복
14. 박정희정권의정치자금
15. 율산사건과 제세그룹·원기업·대봉그룹
16. 제5공화국의 금융자율화
17. 장영자에게 당한 남자들
18. 명성그룹 영동개발 광명그룹사건
19. 신한은행의 성장 신화
20. 국제그룹 해체와 부실기업 정리
21. 5공정치자금과 금융계
22. 6공 북방외교와 은행경협차관
23. 한국은행의 35년 독립전쟁
24. 잘못된 금융시장 개방
25. 잇따른 대형 금융사고
26. 나라까지 말아먹은 한보 망령
27. 파리 목숨 은행장들
28. 엎치락뒤치락금융실명제 15년
29. 금융과 정치자금 그리고 권력
30. 부도 또 부도, 재벌 붕괴 대행진
31. IMF, 그 막전막후의 이야기들
32. 은행도 망했다, 금융 구조조정의 애환
33. 기업 구조조정, 망한 재벌이 남긴 것
대한민국 머니 임팩트
자유당정권의 권력형 부정 대출
현대판 봉이 김선달 목포 앞바다를 팔아먹다
1958년 11월 20일 제30회 국회 재경위원회 3차 회의에서 양일동 의원은 “옛날에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요새 떠도는 말을 들으면 봉이 김선달이 아닌 문창숙이라는 사람이 목포 앞바다 물을 팔아먹고 있습니다”라며 일종의 사기 사건을 폭로했다.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유령 회사가 염전을 한다면서 대출을 받아 방파제를 쌓고 염전 자리만 잡아놓은 채 3년이 넘도록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현대판 봉이 김선달’ 사건의 주인공은 척방염전과 수수께끼의 인물 문창숙이었다. 산업은행은 척방염전에 염전개발자금으로 당초 3억 환을 대출해 줄 계획이었으나 척방염전은 설계 변경을 통해 5억 환을 대출받았다. 게다가 이후 4억 환이 더 대출될 예정이었다. 담보는 전혀 없었다. 있다면 바닷물과 갯벌뿐이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거액 대출이 이뤄지게 한 것은 융자를 해주라는 전매청의 추천서 달랑 한 장이었다. 게다가 당시 김현철 재무장관은 이 같은 부실 대출을 감독하기는커녕 200만 달러의 개발차관자금을 척방염전에 지원해 달리는 추천서를 미국에 공식 전달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사후관리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천만 환의 자금 용도 확인을 영수증 달랑 한 장으로 처리했고 이자 연체가 상당 규모 발생하고 있었음에도 국정조사 제출서류에서 연체 사실 부분은 검은 줄을 그어 지워버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지 염전업자들은 가동 중인 염전을 매입하더라도 1정보당 140환. 아무리 시설이 좋더라도 200환이면 충분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척방염전에 대한 시설자금 융자금액은 정보당 330환이었다. 자금관리 서류의 자금용도란에 붙어 있는 영수증도 확인해 보니 인물과 주소가 가짜였다. 완전한 사기극이었다.
대출액 절반이 자유당 선거자금이라는 소문
양 의원의 추궁은 이어졌다. “산은(산업은행)의 조서를 보면 대기업가인 김성곤 씨가 보증을 해서 잘못돼도 책임진다는 의견서가 붙었는데 나중에 무슨 이유인지 김성곤 씨 보증은 취소가 되고 지금은 전혀 변상할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보증인이 교체돼 있습니다.”
여기서 낯설지 않은 이름이 등장한다. 김성곤, 바로 1950~1970년대 정?재계 실력자이자 쌍용그룹 창업자다. 당시 국내 굴지의 섬유업체인 금성방직 사장인 김성곤은 적산불하와 원조달러 지원, 정권과의 유착이라는 초창기 재벌의 전형적인 코스를 걸어 재벌이 된, 1950년대의 대표적 자유당계 기업인의 한 사람이다. 특히 그는 정경유착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어 여당 국회의원이 됐고 5?16 쿠데타 이후에도 살아남아 공화당의 거물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반 김종필 라인이던 그는 삼선개헌의 막후 주역이기도 했다. 이 김성곤이 1958년 8월 22일 국회에서 금성방직이 산업은행 연계자금(連繫資金) 2억 환을 대출받은 것에 대해 신상발언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산업은행 역사상 최대 오점 중 하나인 연계자금사건이다.
연계자금이란 한국은행의 돈을 산업은행이 지목한 기업에게 시중 은행창구를 통해 대출한 자금을 말하는데 3개 기관이 연계된 대출 과정은 복잡하다. 우선 산업은행이 재무부의 승인을 얻어 융자 순위를 정한 다음, 한국은행에 대해 지불보증을 한다. 이를 근거로 시중 은행이 한국은행에서 재할인을 받은 후 그 돈을 산업은행 관리계정에 넣어 해당 업체에 대출케 하는 것이다. 산업은행의 대출 재원이 고갈되자 나온 편법이다. 결국 산업은행은 돈 한 푼 없이 한국은행의 돈을 가져다 원하는 기업에 대출해 주었던 것이다. 이 연계자금은 거의 친자유당계 기업에 지원됐다. 특히 1958년 5?2 총선거를 앞두고 특정 업체에 집중 지원됐고, 이 중 상당 부분이 자유당 선거자금으로 흘러갔다는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야당이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쇠고기 군납, 영화사가 국가기간산업?
1958년 2월부터 4월까지 연계자금으로 대출된 금액은 정부에서 밝힌 액수만 35억 5,800만 환, 야당 측 주장으로는 39억 7,000만 환에 달했다. 정부는 대한중공업, 금성방직, 태창방직, 조폐공사, 동양시멘트, 조선방직, 중앙산업, 삼호방직, 동립산업, 동양사료, 국제보도연맹, 수도영화사 등에 대출됐다고 국회에서 밝혔다. 정부는 국가기간산업으로 국민 경제에 꼭 필요한 업체여서 대출해 줬다는데 달걀과 쇠고기 및 건빵 군납업체와 영화사 등도 국가기간산업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친여 기업 또는 국영업체들이었다. 이 업체들이 이렇게 대출받은 돈의 상당 부분을 5?2 선거 때 선거 자금으로 바쳤다는 의혹이 불거졌고 야당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야당의 조사보고서 내용이다. “첫째, 연계자금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이 산업은행의 각서 한 장으로 시중 은행을 통해 방출됐다. 둘째,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서에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산업은행 증자를 한 다음 산업금융채권을 발행, 연계자금 대출액을 연내로 시중 은행에 상환토록 돼 있다. 셋째, 금통위(금융통화위원회)의 일부 위원들은 강경하게 반대하고 퇴장했으나 어거지로 승인시키도록 했고 넷째, 융자 업체들이 담보물이 확실치 않은 점으로 미루어 산은 대출은 명백히 선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꾸며낸 계획적인 부당대출사건이다.”
연계자금과 관련한 야당의 집요한 추궁에 견디다 못한 김 재무장관은 이렇게 실토했다. “솔직히 큰 기업 하시는 분들이 자유당에 가까이 가려고 선을 대고 있지 않나 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융자가 상당히 나간 걸로 봅니다. 정치 자금에 대해서는, 이번 5?2 선거에 어떠한 정도의 정치 자금이 전국적으로 나갔는지 잘은 알 수 없습니다만 거액이 나간 것은 사실이 아닌가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한국은행, 정부에 예속되다
중앙은행의 굴욕, ‘재무부 남대문출장소’
1962년 5월 하순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증권 파동과 한국은행법 개정, 그리고 당시 유창순 한국은행 총재의 퇴진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사건들이다. 한은법이 개정된 1962년 5월 24일은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이 정부, 특히 재무부에 예속된 날이다. 이날 이후부터 김영삼정부 말년인 1997년까지 무려 35년 동안 한은은 ‘재무부 남대문출장소’, 금융통화운영위원회는 ‘금융통과위원회’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으며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이날의 한은법 개정이 위태롭던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단칼에 날려버린 것이다.
대체 이 한은법 개정의 골자는 무엇인가? 우선 통화신용정책의 최고의결기구인 금통위가 금통운위로 바뀌었다. 종전 금통위는 재무부장관, 한은 총재, 금융기관 선출 2명, 대한상공회의소 추천 1명, 농림부장관 추천 1명, 기획처 경제위원회 추천 1명 등 7명의 정 위원과 아울러 대리 위원 7명을 포함해 14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하지만 개정 한은법은 정 위원을 2명 늘리고 대리 위원을 없앴으며, 상공회의소 추천을 상공부장관 추천으로 바꿨다. 금융기관 추천도 시중 은행 주식이 정부 손에 넘어갔으므로 정부 몫이었다. 즉 금통운위에서는 민간 대표가 사라지고 위원 전원을 정부가 좌지우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은 총재 역시 대통령이 국무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토록 돼 있던 것에서 재무장관의 제청권을 삽입, 사실상 한은 총재도 재무부가 입맛에 맞는 인물로 고를 수 있도록 바뀌었다. 금통위가 임명하던 감사임명권도 재무장관에 주어졌고 수석부총재는 부총재로, 부총재는 이사로 격하됐으며 은행감독부는 은행감독원이 됐다.
가장 큰 문제는 금통위 승인만으로 끝났던 한은의 예?결산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승인토록 변한 것이다. 이로써 기관의 목줄인 예산권이 정부로 넘어갔고 한은은 예?결산 때마다 국무회의 심의에 앞서 먼저 재무부의 심사를 받아야 했다. 금통위와 한은에 대한 또 다른 결정적 족쇄는 재무장관의 재의요구권 및 업무감사권이다. 즉 금통운위 의결사항에 대해 재무장관이 재의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재의 요청이 3분의 2 이상의 결의로 부결될 경우 대통령이 최종 결정토록 했다. 또 한은은 연 1회 이상 재무장관의 업무검사를 받도록 규정, 재무부가 직접 간섭 및 통제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외환 정책에 관한 권한도 정부로 넘어갔다. 1961년 12월 제정된 외국환관리법은 한은의 외환 업무와 외환 정책 관계조항을 대부분 삭제, 대외지급준비금의 관리권이 정부로 이관됐다. 하나같이 한은의 손발을 묶는 조치들이었다. 35년간 한은을 예속시킨 독소 조항들이 대부분 이때 만들어졌다.
‘죽어도 앉기 싫었던’ 한은 총재 자리
증권금융 문제로 정부와 갈등을 빚었던 유 총재는 한은법 개정마저 겹치자 취임 1년 만에 사표를 제출했다. 후임 한은 총재로 낙점된 민병도 당시 제일은행장은 당시 사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기왕 금융계에 발을 디딘 이상 한 번쯤은 중앙은행 총재가 되어 한 나라의 금융 정책을 수립, 집행해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나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때 죽어도 이 자리에 앉기가 싫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정부에서 한은 총재를 경질한다는 것은 단순히 증권파동의 뒷수습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총재가 되면 유 총재가 반대해온 일이 곧 해결될 것으로 당국에서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상 증권파동에 관한 한 금융이 그 문제에 간여할 바가 전혀 아니라는 유 총재의 의견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5월 26일 유 총재를 포함, 한은 임원 4명이 퇴진하고 전면적인 물갈이가 단행됐다. 우여곡절 끝에 총재가 된 민 총재는 ‘죽어도 앉기 싫었던’ 이 자리의 괴로움을 톡톡히 맛봐야 했다. 취임하자마자 증권파동의 뒷수습에 고초를 겪었고 숨 돌릴 틈도 없이 통화개혁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채 뒷감당에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이어 프랑스?이탈리아 어업차관 문제가 터졌다. 민 총재는 정부의 부당한 차관 승인 압력에 맞서 자리를 걸고 정면충돌했다. 1963년 3월 22일 그는 비상한 심정으로 사표를 썼고 정부가 이미 결정해버린 어업차관에 반대하는 내용의 건의문을 경제기획원장관 및 재무부장관에 발송했다. 그러나 써놓은 사표를 제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감독원 가져가려는 재무부와 정면충돌
당시 재무부는 한은법 개악으로 만족하지 않고 은행감독원까지 가져가기 위해 또다시 한은법 개정을 기도하고 있었다. 재무부는 1963년 3월 11일 이 문제에 대해 금통운위에 자문을 요청했다. 이 역시 한은 총재가 자리를 걸고 막아야 할 사안이었다. 금통운위는 감독원 이관을 반대하는 답신서를 보냈지만 이는 단순한 요식 행위에 그칠 공산이 다분했다. 오히려 이 답신서는 보안업무규정상의 비밀문서로 분류돼 함부로 볼 수도 누설할 수도 없게 됐다. 그렇게 한은법 개정안은 소리 소문도 없이 최고회의에서 그대로 통과될 것이 분명했다.
민 총재는 고민 끝에 보안업무규정을 위반해서라도 답신서를 터뜨려 공론화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에 대한 폭로 기자회견과 사퇴 발표를 동시에 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하자는 계산이었다. 5월 22일 오전 기자회견을 자청한 민 총재는 사표 제출 예정이라는 폭탄선언과 함께, 정부의 한은법 개정안과 금통운위의 답신서를 공개했다. 또 “혁명정부는 민정이양에 앞서 금융의 정치적 중립 및 민주화를 이루어놓기를 바랍니다”라고 강조했다. 이 센세이셔널한 회견은 즉각 여론을 들끓게 했다. 언론들이 일제히 정부를 비판하고 나서자 군사정권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한은법 개악에 이어 감독원마저 차지하려던 재무부의 욕심은 일단 꺾였다.
박정희정권의 정치자금
한국비료 관련 정치자금 및 밀수 공모 의혹
1960년대 후반 이후 삼성그룹은 박정희정권과 관계가 별로 좋지 못했다. 이병철 회장이 “권력과는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의 관계”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 박 정권 초반에는 박 정권과 밀월관계였던 삼성이 그렇게 된 것은 1966년 한국비료사건 때문이다. ‘장군의 아들’ 김두한 의원의 국회 똥물투척사건으로 더 유명해진 한비사건은 삼성이 건설 중이던 한비(현 삼성정밀화학)가 사카린을 밀수해 관세를 포탈하고 부당 이득을 취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이병철은 경영 일선에서 퇴진하고 둘째 아들 이창희 상무가 구속됐으며 한비도 완공한 후 송두리째 국가에 헌납돼야 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1986년 출간된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자신은 정치적 희생양이라며 억울함을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야당은 정치자금 의혹을 들고 나왔다. 당시 김대중 의원의 질의 요지다. “비료공장 건설을 위해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은 4,390만 달러다. 같은 규모의 공장을 짓는데 일본에서는 2,200만 달러면 충분하고 소련에 2,800만 달러를 판매한 적도 있다. 적어도 1,000만 달러를 일본으로 도피시켜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간 것 아니냐?”
이와 관련해 의문사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회고록에 의미 있는 대목이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이병철은 한비 건설과 관련해 200만 달러의 커미션을 상납하고 이를 벌충하는 동시에 내자조달을 하기 위해 사카린?표백제?전화기?수세식 변기?욕조 등 국내에서 인기 있는 품목만 골라 건설자재로 위장해 밀수했다고 한다. 이병철은 한비의 국가헌납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김형욱에게 “저도 사실은 박 대통령 각하에게 정치자금을 5억 원이나 바쳤는데 이럴 수 있습니까? 억울합니다”라고 폭탄 발언을 했고, 이에 김형욱은 “억울하면 대통령 각하에게 가서 따지시오. 나는 다만 법에 의해 수사를 재개하여 한비공장 건설에 얽힌 전모를 밝힐 수밖에 없소. 한비를 국가에 바치는 것은 어떤 특정 개인에게 정치자금을 헌금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오”라고 일축했다고 한다.
한편 이병철의 장남이자 CJ그룹 창업자인 이맹희는 1993년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더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폭로했다. 100만 달러어치 물건을 밀수해 팔면 400만 달러를 벌 수 있다는 계산으로 삼성이 박 정권과 합의하에 리베이트 100만 달러어치의 물건을 밀수, 암시장에 내다 팔아 그중 일부를 정치자금으로 내고 나머지는 한비 건설에 내자로 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일본 기업이 공화당 예산 3분의 2 제공?
박 정권 시절 정치자금 의혹사건 중 대표적인 것이 서울지하철 차량 도입사건이다. 1974년 6월 23일 국내 최초의 지하철인 서울지하철 1호선 서울역과 청량리 구간 개통 당시 박 정권이 일본에서 지하철 차량을 도입하면서 리베이트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긴 것 아니냐는 의혹 사건이다. 의혹은 일본의 미쯔비시?마루베니?미쓰이 및 닛쇼이와이 등 4개 사가 지하철 차량 납품 가격을 정상 가격의 2배나 높게 받은 데서 비롯됐다.
당시 일본에서 먼저 이슈가 됐다. 4개 사가 지하철 차량 납품으로 거둔 이익은 총 21억 7,000만 엔인데, 미쓰비시 사장은 “그중 250만 달러를 한국의 유력 인사의 지시로 외환은행 뉴욕지점에 송금했다”라고 밝혔다. 그가 누구인지 곧 드러났다. 아사히신문 사회부 오치아이 기자에 의해서였다. “그 돈의 취지를 물어보니 특별 커미션이란 말을 했다. 나는 미쓰비시상사도 정부도 말 못하는 한국의 거물이 누구인지 알아봤다. 그래서 체이스맨해튼과 외환은행에 계좌명을 알아보니 공화당 재정위원장인 김성곤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됐다. 외환은행 뉴욕지점에서 김성곤의 계좌로 입금된 250만 달러 중 130만 달러가 일본으로 역송금된 것이었다. 이 사실이 확인되자 일본에서는 큰 이슈가 됐다. 이 130만 달러가 일본 정치인에게 간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특히 박 정권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이 거론됐는데, 그 내막은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일본 재계와 박 정권이 얽힌 또 다른 정치자금 관련 의혹이 있다. 다음은 1966년 미국 CIA가 작성한 ‘한일관계의 미래’라는 내부 보고서의 내용이다. “민주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받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다. 일본 기업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1961~1965년 사이의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다. 또 6?7차 한일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에 일본 기업들이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다고 기록돼 있다. 6개 일본 기업이 총 6,600만 달러를 지불했고, 기업별로 액수는 100만~2,000만 달러에 이른다고 했다. 또 김종필은 한일협상을 추진한 대가와 일본 기업들로부터 한국에서 독점권을 행사하도록 해준 대가를 받았으며 한국 정부가 방출한 쌀 6만 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을 함께 통제했던 8개 한국 기업들이 민주공화당에게 11만 5,000달러를 주었다고 한다.”
박 정권 때의 정치자금 관련 의혹에 대해 박정희 측 인사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1971년부터 박 대통령 서거 때까지 대통령 경제2수석 비서관으로서 권력의 심장부에서 박 대통령을 모셨던 오원철은 자서전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을 만들었나』에서 “정경유착이라는 말은 원래가 일본어다. 언론계에서 먼저 사용했다. ‘한?일 정경유착’이라고 했다. 그 뜻은 ‘일본 업계가 일본 정치계를 동원해서 한국 정치계와 교섭, 한국 정부로부터 이권을 따낸다’는 뜻이었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 처음 수입된 것은 1960년대 말이다”라고 썼다. “한편 당시에 필요한 정치자금 조성을 위한 정치자금 담당기구가 생겨났는데 소위 ‘4인방’이다. 이것이 한국형 정경유착의 출발점이다. 이 4인방에 청와대 비서실장과 부총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한국형 정경유착’이라는 말에는 정치계?경제계뿐만 아니라 관리, 즉 정부도 포함된 말로 인식하게 되었다. 정경유착의 피해는 막심했다. 우선 관리들은 소신껏 일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한국비료 밀수사건이 발생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부실기업들이 발생했다.” 여기서 4인방의 다른 2명은 공화당 재정위원장과 중앙정보부장일 가능성이 높다.
국제그룹 해체와 부실기업 정리
위헌적 기업 해체, 특혜 의혹 얼룩진 5공 비리
지난 1993년 7월 29일 헌법재판소는 1985년 2월의 국제그룹 해체에 대해 “공권력이 힘으로 사기업을 해체한 것은 기업의 자율과 경영권 불간섭 원칙을 위배한 것이며 재산권 침해”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실상의 위헌판결을 내렸다. 재계 랭킹 7위의 국제그룹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된 이 사건은 5공 재계의 최대 화제였다. 당시 5공 정권의 핵심 인사들은 “우리가 군기 빠진 국제그룹을 날려버렸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정도였다. 위헌판결 이후에도 국제그룹과 관련된 소송은 끊임없이 진행됐으나 이미 해체된 국제그룹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위헌소송 당시 최병모 변호사는 “국제그룹 해체 당시 국제가 주당 1원꼴로 제일은행에 넘겼던 주식은 해체 발표 당시에도 장외에서 주당 300원대에 거래되고 있었다. 국제그룹 해체는 명백한 불법이었다”고 진술했다.
구제금융 지원 방침 왜 갑자기 철회됐나?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신발 재벌이던 국제그룹은 모기업은 국제상사를 중심으로 연합철강, 국제방직, 국제제지, 동서증권 등 22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1984년 매출액 1조 7,913억 원, 수출액 9억 3,400만 달러를 기록했고, 종업원 수 3만 8,800여 명에 달하는 매머드급 복합기업집단이었다. 총여신 규모는 1984년 10월 말 현재 1조 4,458억 원으로 부채비율이 946.6퍼센트였다. 당시 10대 재벌이 평균 527퍼센트였으니 국제그룹의 재무 구조가 나쁘고 부실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은 국제그룹의 자금난 타개를 위해 2,000억 원의 구제금융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 와중인 1984년 12월 23일 정부는 국제그룹에 대한 완매채 대환 지원방침을 철회했다. 당초 국제의 완매채 잔액 865억 원을 전액 은행여신으로 지원하기로 한 결정이 갑작스럽게 철회된 지 4일 후인 12월 27일 제일은행은 교환에 돌아온 국제상사 어음 78매 432억 원을 부도 처리했다. 국제그룹은 다음날 이 어음들을 전량 회수해 결제를 끝냈으나 이를 계기로 항간에서는 국제그룹 해체설이 나돌고 신용도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국제그룹에 5,504억 원을 빌려주고 있던 제2금융권은 일제히 여신회수에 나섰다. 마침내 2월 21일 국제그룹은 전격적으로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당시 김만제 재무장관은 국제그룹 해체의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사업 운이 따르지 않은 결과다. 벌여놓은 일들이 수습되지 않고 부실 구멍은 자꾸 커져갔다. 건설 부문의 경우 아주 엉망이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한 푼 두 푼 넣어서 될 상황도 아니었다. 또 그런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통화량을 그만큼 늘려야 한다는 제약도 있었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해체 당하게 된 것이 국제다.”(이종재, 『재벌이력서』)
부실경영의 결과인가? 괘씸죄 때문인가?
김 장관은 국제그룹의 해체가 부실경영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는 여론의 시각은 이들과 전혀 다르다. “항간에 국제그룹의 해체를 둘러싸고 설이 분분했다. 즉 양정모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미움을 사 정부 지원이 중단, 금융권으로 하여금 서둘러 여신을 회수케 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양 회장은 정치적 로비 활동에 소극적이었으며 준조세 납부에 상당히 비협조적이었다고 한다. 국제그룹은 타 그룹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적은 액수를 기부했고 그나마도 고위층의 협박성 압력이 돌아온 후에나 참여했다. 더욱이 1984년 12월 22일(완매채 지원방침 철회 바로 전날)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재벌총수의 모임이 있었는데 지각하는 바람에 전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한다. 또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당시 정권은 부산 총선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였다. 양 회장은 1985년 2월 5일 부산 총선 지원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당시 연고가 없던 재벌총수들도 총선을 지원하기 위해 부산에 집결한 반면, 양 회장은 부산이 연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전 대통령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괘씸죄’가 적용된 것이다. 총선 이후 9일 만인 2월 21일 국제그룹은 완전 분해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양 회장이 정치성 로비자금의 제공에 인색했던 것은 일해재단 설립 시의 출연내역으로도 확인된다. 전 대통령이 퇴직 후를 대비하기 위해 설립한 일해재단은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재벌총수들로부터 찬조금을 받았는데, 양정모의 기부액은 5억 원에 불과했다. 30대 재벌 중 가장 적은 액수였다.”(이한구, 『한국재벌사』)
김만제의 재무부, 부실기업 정리 밀어붙여
양 회장이 이렇게 빼앗긴 기업들을 정권에 잘 보인 몇몇 재벌들에게 나눠준 것은 1986년 부실기업 정리의 일환이었다. 5공의 부실기업 정리는 국회의 청문회 대상이 될 정도로 정치적 의혹투성이었다. “1986년부터 하나씩 발표된 부실기업 정리는 5공이 끝날 때까지 재계를 온통 뒤흔들었으며 전 국가를 뒤흔든 대사건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게 됐다. 부실로 정리된 기업들이 하나같이 정부의 대상 기업에 포함된 것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으며 부실기업을 인수한 기업은 또 정부로부터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이종재, 『재벌이력서』)
1985년 이전 경제기획원의 부실기업 정리는 주로 산업합리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정책조정 차원에서 산업 전체를 대상으로 통폐합을 유도한다든지 개별 기업 대상일 때도 공기업이거나 재정 지원과 관련된 경우로 한정됐다. “이런 수준의 관여가 개별 기업 차원까지 확대된 것은 1985년 이후다. 1983년 10월 재무부는 발등의 불처럼 다가선 부실기업 정리 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대처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부실기업 문제를 더 이상 방치했다가는 금융 시장이 와해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김흥기, 『비사 경제기획원 33년, 영용의 한국경제』)
재무부의 구상은 부실기업의 제3자 인수 방식이었다. 그 방편으로 부실기업의 은행 부채를 유예해 주고 이에 따른 은행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중앙은행의 발권력도 동원, 한국은행이 연 3퍼센트의 특별융자(한은특융)를 실시하며 인수 기업의 세금까지 줄여준다는 것이었다. “재무부와 상공부의 의견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만제 장관의 재무부는 부실기업 정리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하나하나 처리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조세감면규제법(조감법)의 개정과 한은특융 부활을 추진했다. 반면 금진호 장관의 상공부는 개별 기업 차원보다는 산업정책 차원에서 접근할 것을 주장했다.”(김흥기, 『비사 경제기획원 33년, 영용의 한국경제』) 부실기업 정리는 김만제 장관의 재무부가 다른 부처의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인, 8?3 사채동결조치에 비견될 일종의 극약처방이었다.
조감법 국회 상정에 앞서 정부는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한은특융을 의결했다. 당시 한은의 일반 은행에 대한 재할인율은 연 6~8퍼센트였는데 이를 3퍼센트짜리 특융으로 바꿔주고 그 돈으로 은행이 기업들에게 11.5~13.5퍼센트로 대출해주게 함으로써 예대마진을 대폭 늘려주는 방식으로 은행의 수지 개선 및 부실채권 정리를 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조감법 개정안은 야당의 반대로 표류하다가 1985년 연말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됐다. 이렇게 ‘불법적’으로 부실기업 정리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정부는 1986년 1월 김만제 장관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옮겨와 산업정책심의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부실기업 정리 작업을 본격 추진했다.
인수 기업 엄청난 특혜, 재계 서열 급상승
1986년 5월 1차 정리가 단행됐다. 대한중기는 기아에, 풍만제지는 계성제지에 인수시켰다. 2차 정리 대상은 삼호그룹과 국제그룹의 일부 계열사였다. 삼호그룹은 해외 건설업체 4개가 대림산업에 일괄 인수됐다. 국제그룹의 국제방직은 (주)동방, 국제제지는 아세아시멘트, 한주통상은 서우산업, 동우산업은 대양물산, 성창섬유는 동양고무와 대양에 각각 인수됐다. 3차 정리 역시 이미 주인이 어느 정도 결정돼 있던 국제그룹 계열사가 그 대상이었다. 9월 22일 발표된 4차 정리 대상은 무려 28개 사에 이르렀다. 이들 정리 대상 기업들을 인수한 업체들은 한일합섬과 동국제강, 우성, 대우, 쌍용, 한국화약 등이었다. 대부분 부실기업 정리를 계기로 재계 서열이 급상승한 케이스다.
“4차 정리는 규모의 방대함에서도 재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나 정작 관심을 환기시킨 것은 인수 기업에 주어지는 엄청난 특혜였다. 더욱이 주무부처인 재무부나 한국은행이 인수에 따른 지원 방안을 일체 밝히지 않아 의혹은 더욱 증폭됐다. 기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인수 기업은 거저나 다름없이 기업을 챙겼으며 심한 경우 오히려 은행으로부터 정상화라는 명목으로 거액의 신규 대출까지 받아 사세를 넓혔다. 결국 5공 시절에 취해진 부실기업 정리는 온갖 의혹과 특혜시비만 남긴 채 특정 기업을 재계의 앞자리로 밀어 올리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이종재, 『재벌이력서』)
잘못된 금융시장 개방
외환위기로 치달은 어설픈 개방 실험
1986년 9월 제8차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 서비스교역 문제를 다자간협상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당시 세계 10대 교역국으로 부상한 우리나라의 금융시장 개방이 예고됐다. 더욱이 1986년 국제수지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된 이래 흑자 규모가 계속 확대되면서 미국 등 선진국들의 국내 금융시장 개방 압력은 더욱 높아갔다. 1985년 외국 은행에 대한 금전신탁업무 및 어음교환소 가입 허용, 1986년 미국 생명보험사 국내 진출 허용, 1988년 12월 자본시장 개방에 따른 외국인 전용 수익증권 및 해외증권 발행 등으로 외국 금융자본에 대한 국내 시장 개방과 국내 금융기관의 해외 진출의 길이 열렸다. 이와 병행해 금융자율화와 금융업 진입제한 완화가 추진됐는데, 재벌들은 이에 적극 대응, 금융업 신규 진출이 러시를 이뤘다.
금융사 난립, 후발 은행 6개 중 1개 생존
“재벌들은 1980년대 후반 이후 1990년대 전반기까지 경쟁적으로 금융업에 진출했다. 국내 재벌사상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분명 1990년대는 금융업에 대한 재벌들의 러시 시기였다. 국내 금융시장의 개방화?국제화는 국내 재벌들의 성격 변화를 초래했는데 첫째, 재벌들이 앞 다퉈 금융 산업에 진출함으로써 국내 재벌들의 성격이 종래 상업 민 산업자본적 성격이 엷어지는 대신 금융 자본으로서의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둘째, 재벌들의 외부 자금조달 방식에 변화가 초래됐다. 종래 주로 은행 등 외부 금융기관을 통해 자금을 조달받는 간접조달방식에서 증권 시장 및 해외 기채(起債) 등을 통해 직접 조달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는 점이다. 셋째, 자본 시장의 자유화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기업들의 해외 차입도 급증했다. 국내적으로 여전히 고금리일 뿐 아니라 대기업들이 국내에서 은행 대출을 받을 경우 여신관리를 받는 등 상대적으로 제한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신용도가 높은 국내 기업들은 자기 신용만으로 얼마든지 해외 차입이 가능했다. 그 결과 국내 기업들의 대외 종속의 심화 및 외채 누증, 환율변동 시환차손으로 인한 기업 도산의 항상화 등 위험성도 커졌다.”(이한구, 『한국의 재벌사』)
이런 재벌들의 변화 중 부정적 효과들이 누적되고 증폭되면서 외환위기로 치달은 것이 1990년대의 불행이었다. 금융기관의 난립에 따른 과당경쟁과 동반 부실화는 더욱 큰 문제였다. 1980년대 후반 생기 후발 시중은행 6곳 중 외환위기 이후 금융구조조정 과정에서 살아남은 은행은 단 1곳, 하나은행뿐이다.
속 빈 강정 종금사, ‘아니면 말고’식 영업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까지는 단자회사들의 전성기였다. 이 기간 동안 17개의 단자사가 새로 생겼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단자사들의 좋은 시절은 끝났다. 예전에는 기업들이 단자사를 찾아가 사정사정하면서 기업어음에 무담보배서를 받아야 했으나 그 무렵부터는 거꾸로 단자사에서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담보든 무담보든 제발 거래만 좀 해달라고 사정하는 처지가 됐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종금사, 후발 단자사들과의 경쟁과 기타 금융권의 시장 잠식에 따른 현상이었다. 기업어음을 취급하는 직원들은 외판사원 물건 팔듯이 거래처를 찾아다녔다. “1990년대 초에는 단자회사들의 수익성이 극히 악화됐으며 (종금사로 전환한 뒤) 이의 만회를 위해 무리한 영업을 하다가 IMF를 전후하여 결국 금융권이 몰락하게 됐는데 이러한 유의 영업이 모든 금융권에 예외 없이 적용되다 보니 다들 속 빈 강정들이었다.”(최용근, 『명동 30년, 금융의 격랑을 헤치며』)
단자사 종금 전환은 한건주의 아이디어 수준
잘 나가던 단자사들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종금사들이 생겨나면서 장기금융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1982년 7월 28일 발표된 ‘제2금융권 활성화대책’에 따라 12개의 단자사가 무더기 설립허가를 받아 32개로 늘어난 단자사는 과당경쟁에 말려들었고 금융사고가 터질 때마다 무담보 단기거래를 위주로 하는 단자사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에 정부는 1991년 ‘금융기관의 합병 및 전환에 관한 법률(합전법)’을 만들어 단자사들의 합병 및 다른 금융기관으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김영삼정부는 ‘신경제 5개년 계획’에 따라 단자사와 종금사의 업무 영역을 통합하고 그 공통의 업무 영역 내에서 각자가 비교우위에 따라 국제금융업무?단기금융업무?기업금융업무 등으로 특화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94년 9개 지방 단자사들이 무더기로 종금사로 전환했으며, 1995년에는 나머지 15개 단자사가 일제히 종금사로 전환했다.
합전법의 실무 주역이었던 강만수 전 재정경제부 차관은 이 조치를 이렇게 비판했다. “우리나라는 30개나 되는 종금사 천지가 됐다. 두 차례에 걸쳐 단자사에서 무더기로 전화된 24개사 종금사는 200억 달러에 달하는 무분별한 단기 해외 차입으로 1997년 IMF 사태를 몰고 온 뇌관이 되어 엄청난 화를 자초하고 사라졌다. 합전법의 당초 취지는 전환된 새 업무 영역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는 우량 단자회사만 선별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태국에서 배워온 단자사와 영국에서 배워온 종금사의 실험은 너무 큰 대가를 치르고 실패로 끝났다. 한건주의 아이디어 차원의 어설픈 정책은 다시 없어야 한다.”(강만수,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아무 대책 없이 정치적 욕망으로 OECD 가입
한국의 OECD 가입은 우리 금융 시장의 마지막 담장도 완전히 허물어버린 계기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신경제와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1996년도에 OECD에 가입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OECD 가입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랐다. 우선 서비스 및 외환?자본 거래의 자유화를 확대해야 했고 OECD 규정 수용을 위해 국내 제도들을 개편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OECD에 옵서버 자격으로 몇 차례 참석했을 뿐 가입을 위한 어떤 연구나 사전 준비가 전혀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WTO의 한 고위간부는 친분이 있는 오원철 기아경제연구소 상임고문에게 “한국은 왜 OECD 가입을 서두르는지 모르겠다. 한국이 OECD에 가입함으로써 잃는 손실이 얼마나 큰 줄 아느냐?”고 충고를 했다. 오원철은 “OECD 가입을 위해 외환?자본시장을 개방하자면 우리나라의 경상수지가 흑자 기조로 확실히 들어선 다음이라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1994년부터 경상수지가 적자로 반전된 후 해마다 적자폭이 커져서 1997년에는 사상 최악의 경상수지 위기에 직면하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OECD에 가입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
1996년 12월 우리나라는 29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됐다. 이는 국민들에게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외환자유화를 취하고 나니 해외여행과 해외유학이 급증하고 사치성 소비재 수입과 과소비 등으로 경상수지 적자폭은 급증했으며 외환보유고는 급감했다. 그렇게 IMF의 망령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망국적 외화차입, 최악의 시나리오 현실로
금융기관 난립과 준비 없는 금융 개방이 만난 결과 발생한 것이 외환위기의 직접적 도화선의 하나가 됐던 종금사의 과잉 외화차입이다. 단자사의 일괄 종금 전환으로 30개의 종금사 모두 해외에서 외채를 빌려 원화로 환전, 어음을 교환해줄 수 있게 됐다. 외채금리는 국내 대출금리보다 훨씬 낮다. 교환해준 어음이 결제되면 엄청난 이익이 발생한다. 당연히 종금사들은 더 많은 외채를 빌리기 위해 혈안이 됐다. 망국적인 외화차입 행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환율이 상승하게 되면 앉아서 환차손을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하면 종금사는 경영이 악화돼 파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외국 금융기관이 한국에 대한 달러 대출을 늘림으로써 국내 금융기관은 무분별한 달러 차입과 원화대출을 늘렸고 국내 기업은 원화채무가 증가했다. 국고는 외환보유고 및 통화량 증가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통화량이 증가하자 물가를 걱정한 김영삼정부는 달러 소비를 권장, 사치와 낭비를 부채질했다. 그 결과 차입한 달러는 급속히 소진되고 외환보유고가 급감했다. 1996년 말의 외환보유고는 332억 달러였고 언제라도 쓸 수 있는 가용자금은 294억 달러뿐이었다.
이를 우려한 외국 금융기관이 빚 상환 독촉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미리 대비를 못한 국내 금융계는 정부(국고)로부터 달러를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달러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시장에 알려지자 하루가 다르게 환율이 폭등했다. 막대한 환차손이 발생하자 금융계는 공황에 빠졌다. 은행과 종금사들은 황급히 기업대출을 강력하게 회수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기업들은 자금난에 빠졌고 부도와 파산 도미노가 발생했다.
금융과 정치자금 그리고 권력
과거 정치자금과의 숨바꼭질 아직도 현재진행형
“(1993년의 실명제는) 1982년과 달리 기존의 비실명예금도 소급하여 실명으로 전환하도록 하고 비실명에 의한 인출을 금지시킬 뿐만 아니라 5,000만 원 이하의 소액 자금을 제외하고는 자금출처조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불법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과거의 예금까지 소급 적용된 실명제에 의해 수많은 과거의 비리가 드러나게 되어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사정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중에는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이 구속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실명제로 발목이 잡혀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거액 예금도 상당액이었고 지하에 묻혀 있는 거액의 현금을 신권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사기사건이 몇 번 일어나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물러난 후 국가안전기획부 자금사건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됐다. 남을 향해 던진 실명제는 부메랑이 되어 자기를 치게 된 것이다.”(강만수,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실명제 실시되면 가장 큰 피해자는 대통령
“기업의 비자금과 대통령의 비자금은 금융 ‘가명제’ 하에서만 마음 놓고 유착과 내통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비자금이란 바퀴벌레에게 있어서 실명제는 햇빛과 같다. 실명제가 실시되면 가장 큰 피해자는 다름 아닌 대통령이다. 정치자금의 흐름, 그것에 의한 축재 상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난 1982년과 1990년에 실명제 실시가 유보돼버린 원인을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와 연관시켜 규명해볼 필요가 있다.”(「월간조선」, 1992년 3월)
6공의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는 정치자금 양성화를 국민들에게 약속하기도 했다. 취임 첫해에는 세 번 언급했고, 이듬해에는 한 번 얘기했지만 3년째부터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정치자금 양성화가 6공에서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대통령의 음성적 정치자금 모집이 계속돼왔고 대통령이 여당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그것을 긴요하게 썼으며 선거에서 야당에 대해 여당이 유리할 수 있는 부분이 돈과 행정조직의 지원이기 때문이다. 정치자금 양성화는 여당으로부터 돈이란 프리미엄을 빼앗는 것이다.”(「월간조선」, 1992년 3월) 그 후 노태우는 전임자 전두환처럼 기업들에게 대놓고 손을 벌려 돈을 걷었다. 그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 바로 노태우 비자금사건이다.
금융종합과세가 노태우 비자금 노출 불러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 의원은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의에서 이같이 폭로했다.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주)우일양행 명의로 128억 2,700여 만 원이 예치돼 있다. 이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퇴임 직전인 1993년 1월 말까지 상업은행 효자동지점에 예치했던 4,000억 원의 비자금 중 일부로 이원조 씨가 시중 은행 영업담당 상무를 시켜 각 시중 은행에 100억 원씩 40개 계좌로 나누어 분산 예치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박의원은 보성고 동문 후배인 하 모씨에게서 이 얘기를 처음 들었다고 한다. “하씨가 박 의원에게 비자금 얘기를 털어놓은 이유는 바로 금융종합과세에 따른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씨 부친이 경영하는 우일양행 명의로 된 비자금 계좌를 그대로 둘 경우 1996년부터 실시키로 돼 있는 종합과세 정책에 따라 7억 200여 만 원의 세금을 추가로 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그래서 이 차명계좌를 어떻게든 처리, 억울한 과세를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신동아」, 1996년 1월)
이튿날 검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사실 검찰이 노씨의 비자금 계좌를 들여다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검찰은 일찍부터 노씨의 비자금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단지 노씨 처벌을 목적으로 전면적인 수사를 벌이지 않았을 뿐이다.”(「신동아」, 1996년 1월) 노태우 비자금의 꼬리가 처음 검찰에 밟힌 것은 1993년 동화은행장 비자금사건 때였다. 노태우 비자금은 이미 1993년 4월에 1,000억 원 이상이 발견됐던 것이다. 권력 핵심과 검찰수뇌부의 의지만 있었다면 노태우 비자금의 전모를 훨씬 일찍 파헤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정치자금 남은 의혹이 구권화폐 사기꾼 양산
검찰 수사 결과 노태우의 비자금은 총 4,500여 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검찰이 밝혀낸 금액은 실제 비자금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재벌총수들이 대부분 뇌물 제공 액수를 절반 가까이 줄여 진술했으며 실제로는 비자금 총액이 8,000억 원 이상이라는 것이다. 축소 진술한 이유는 검찰이 1992년 대선자금으로 기업이 지출한 것은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비자금 사용처에 대한 수사도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검찰 수사가 미진하다 보니 여러 가지 의혹과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구권화폐’ 사기사건이다. 구권화폐 사기사건이란 과거 정권들이 정치자금으로 모아뒀던 수조 원에서 최대 수십 조 원의 거액을 1993년 실명제 실시 직전에 당시의 현금 1만 원짜리(구권)로 바꿔 은밀한 곳에 보관 중이라는 소문이 명동과 강남 사채시장을 중심으로 경제계에 널리 퍼져 있는 상황에서 이런 소문을 악용한 사기꾼들이 벌인 사기 행각을 말한다. 이 구권화폐 사기사건은 199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10년 동안 잊을 만하면 또 터지고 또 터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구권화폐의 주인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전두환?노태우 그리고 YS의 차남 김현철 등이다.
?
지난 2000년 4월 희대의 사기여왕 장영자가 3번째로 구속된 것도 수백 억 원대의 구권화폐 사기극 때문이었고, 그해 3월과 6월에도 사기사건이 계속됐다. 2001년 1월에도 대기업 이사 출신을 비롯한 유력 인사가 다수 포함된 구권화폐 사기단이 적발됐다. 최근에는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수십 억 원대의 구권화폐 사기사건에 연루됐다. 사라진 줄 알았던 구권화폐 사기가 2007년에도 횡행하고 있음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검찰은 구권화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누누이 밝히고 있지만 사채시장에서는 검찰 얘기를 믿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