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에 시장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정부에게는 중요한과업이고 기업에게는 중요한 "기회"다. 책은 역사적·경험적 연구를 토대로, 인간 역사에서 가장 다이나믹하고 독창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는"시장"의 작동 원리와 시장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짚어준다.
네덜란드의 알스메르 꽃시장, 일본의 스키지 어물시장, e베이, 실리콘벨리, 하노이의"개구리 시장" 등 풍부한 사례를 통해 시장에서 정보, 인센티브, 소유권과 특허권의 역할을 살피고, 시장의 남용 사례를 통해 시장이 어떻게설계되어야 하는지 그 원리를 균형 있게 설명한다.
건전한 시장경제의 핵심은 시장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전제하고, 시장지상주의자에게 시장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선이 아니라 불완전하지만 최상의 수단이라는 점을, 반시장주의자에게는 시장이 정의와 공존할 수 있다는점을 주장하고 있으며, 시장 회의주의자에게는 시장의 효율성을 증명해 준다. 아울러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도 소개하였으며,시장경제가 어떤 나라에서는 경제 기적을 낳고, 또 어떤 나라에서는 철저히 실패하는지에 관한 해답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진짜 경제가 어떻게돌아가는지를 파악하고 현실경제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 저자 존 맥밀런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경제학 교수이자스탠퍼드 경제정책연구소 연구원으로 뉴질랜드 캔터베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널오브 이코노믹 리터러처」「컨템포러리 이코노믹 팔러시」「저널 오브 더 재패니즈 앤 인터내셔널 이코노믹스」 편집위원, 캐나다 웨스트온타리온 대학교과캘리포니아 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캐나다 경제 연합(CEA)에서 수여하는 "해리존슨 상"을 받았다. 이코노메트릭 소사이어티와 영국윌리엄데이비슨 경제연구소 회원이며, 컨설팅 회사 마켓디자인의 공동창립자로서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주로 규제철폐와 시장 구조에 대해 조언을 했다.특히 미국 연방 통신위원회(FCC)를 도와, 「뉴욕타임즈」가 "역사상 최고의 경매"라고 칭한 통신사업자 심사 제도를 마련하는 데 큰 역할 을했다. 국영기업의 인센티브 활용문제와 개발도상국의 시장 개혁을 연구했다. 최근에는 베트남과 동유럽의 기업들이 당면한 문제를 통해 금융 시장과기업의 관계를, 또 페루의 사례를 통해 정부의 부패와 기업의 관계를 연구했고, 특히 일본 사업 현장과 중국의 국영기업 연구에 초점을 두었다.시장 설계, 시장 기구 비교 연구 등에 관한 논문이 다수 있으며, 저서로는 게임 이론을 연구한 『게임, 전략, 매니저』(1992)를 포함하여다섯 권을 지었다. 2007년 3월 암으로 눈을 감았다.
■ 역자 이진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같은대학원을 수료했다. 「뉴스위크」 한국판 제작위원 및 번역위원, 「파이낸셜 뉴스」 국제부 기자, 「인더스트리 스탠더드」 한국판 편집국 차장,「포브스」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아시아 경제신문」 기자다. 옮긴 책으로 『수소 혁명』『알츠하이머란 무엇인가?』『중국의 시대』『레닌과철학』『나이트 우먼』『탐욕에 관한 진실』등이 있다.
■ 차례
1. 시장경제야말로유일한 자연 경제다
2. 상인은 자신의 영리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사회의 영리도 효과적으로 높인다
3. 돈 없는 자는 죽을 수밖에없다는 논리가 정말 신물 난다
4. 경제학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새로운 개념은 바로 정보
5. 돈에 관한 한 최선의 정책은정직이다
6. 그림의 가치를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지표는 경매장
7. 역사상 최고의 경매
8. 소유권은 기적도 만들어낸다
9. 특허권은 혁신의 동기 vs. 실리콘밸리의 성장 원인은 아이디어의 공유
10. 어떤 인간도 혼자 살 수는 없다
11.관료 사회는 전반적으로 다 썩었다
12. 치즈만 246가지에 달하는 나라를 어떻게 통치할 수 있을까?
13. "시장 혹은 국가"가아니라 "시장과 국가"
14. 크리스마스날 오염물질 배출권을 선물하다
15. 시장은 자유화, 개방,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통로
16. 공장에서 축구공을 만드는 방글라데시 아이들, 세계화의 희생자일까?
17. 시장경제, 악한 자들이 끼칠 수 있는 해악을최소화하는 시스템
시장의 탄생
경제학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새로운 개념은 바로 정보
현대 경제학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정보다. 197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케니스 애로는 2000년 “지난 30여 년 사이 경제학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새로운 개념이 정보의 편차, 점증하는 정보의 중요성”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불균등한 정보 공급으로부터 두 가지 시장 마찰이 발생한다. 무엇보다 탐색 비용이라는 것이 있다. 탐색 비용이란 가용정보를 어디서, 얼마에 얻을 수 있는지 알기까지 들어가는 시간, 노력, 돈이다. 그리고 소비자가 상품의 질을 판단할 때 쓰게 되는 평가비용도 있다. 제대로 된 시장이라면 정보편차로부터 야기되는 거래 비용을 낮게 유지하는 메커니즘이 마련돼 있어야 한다.
탐색 비용이 시장에 크고 작은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정보 획득에 소요되는 시간과 돈을 다른 곳으로 전용하는 게 더 나을 때도 있고, 적절치 못한 당사자들 사이에서 거래가 진행되기도 한다. 거래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탐색 비용이 많이 들 경우 소비자는 오래 탐색하지 않거나 탐색을 아예 포기할지 모른다. 다른 상인이 어디 존재하는지 찾아내기 어렵다는 것은 소비자가 익히 알고 있는 상인으로부터 물건을 구입한다는 뜻일 수 있다. 이는 좋은 가격 혹은 좀 더 좋은 물건을 제시할 수 있는 상인이 다른 곳에 존재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탐색 비용은 상인과 소비자의 적절치 못한 만남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서로에게 득이 되는 거래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게다가 탐색 비용은 경쟁에 찬물을 끼얹는다. 선택의 폭만으로는 경쟁을 담보할 수 없다. 효과적인 경쟁이 조성되려면 소비자가 여러 선택안을 쉽게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정보란 시장의 생명을 유지하는 핏줄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용정보가 무엇이며, 어디 있는지, 그 정보를 누가 원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시장에 정보가 흐르지 않는다면 시장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정보의 흐름이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기능이 원활한 시장이라면 정보의 흐름을 도와줄 수 있는 다양한 메커니즘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결과 소비자는 시장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게 된다. 흔히들 이런 메커니즘을 너무 당연시한 나머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이 잘못 굴러갈 경우 그제야 메커니즘의 결핍을 깨닫게 된다.
시장의 기능을 좌우하는 것이 탐색 비용이다. 그중에서도 노동시장이 가장 심하다. 미국의 제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을 수 없을 때 실업률 증가로 이어지기 마련”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간단히 말해 일하고 싶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은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탐색 비용 때문이라는 뜻이다. 일자리를 탐색하는 데도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된다.
대다수 시장은 탐색 비용에서 비롯된 마찰을 극복하고 제반 경쟁 세력에 가격 인하를 허용할 수 있는 온갖 장치까지 갖추고 있다. 소비자 정보 전문잡지 「컨슈머 리포츠」와 가격 정보지들은 탐색 비용을 낮추는 데 한몫한다. 입소문도 중요한 쇼핑 정보다. 오랫동안 계속 장사할 상인이라면 고객에게 사기 치지 않는다. 광고와 특별 할인가로 경쟁 상점의 손님들을 끌어올 수는 있다. 브랜드와 상표가 소비자들의 탐색 비용을 줄여줄 수도 있다. 도매상이나 종합상사 같은 시장 매개체는 기업의 탐색 비용을 절감시켜준다. 정보 획득에 도움을 주고 탐색 비용이라는 반(反)경쟁적 효과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시장 장치는 많다.
탐색 비용은 기업의 기회로 이어지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사소한 탐색 비용이라도 그 효과를 막을 수 있는 장치가 따로 마련돼 있지 않으면 가격이 높게 매겨질지 모른다. 탐색은 소모적 행동이다. 따라서 구매자는 탐색을 대신해 줄 서비스만 있다면 대가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탐색 비용이 존재할 경우 서로에게 득으로 작용할 수 있는 거래가 성사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 상대방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동산 공인중개사 등 시장 매개체가 값진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탐색 비용으로 발생할 수 있는 비효율성을 바로잡는다면 이익 창출에 성공할 수 있다.
특허권은 혁신의 동기 vs. 실리콘밸리의 성장 원인은 아이디어의 공유
햄버거 업계의 공룡 맥도널드는 자사 이름에 대한 재산권을 철저히 수호한다.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있는 레스토랑 맥스마일(McSmile), 뉴욕 소재 제과점 맥베이글(McBagel), 캘리포니아 주 커피 전문점 맥커피(McCoffee), 덴마크 실케보르 소재 소시지 상점 맥앨런(McAllans)도 맥도널드로부터 경고 편지를 받은 바 있다. 맥도널드의 경계 어린 눈초리가 식음료 부문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스위스의 인터넷 의료 서비스업체 맥웰니스(McWellness), 캐나다의 호텔 체인 맥슬립(McSleep), 오스트리아의 미장원 맥헤어(McHair)도 맥도널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적재산권 보호가 확립되지 않을 경우 현대 경제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브랜드명 구축에 투자해 온 기업은 이를 보호받아 마땅하다. 작가와 작곡가들이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는 것은 당연하다. 발명가는 자신이 쏟아 부은 노력에 따른 대가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사회는 그들의 아이디어에 대해 재산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혁신의 동기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지적재산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이디어 창안자는 창안에 들어간 비용을 건질 수 없다. 그럴 경우 이뤄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창안자는 그들이 창출하는 가치의 일부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디어는 본질적으로 비배타성을 갖고 있다. 사회는 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법으로 아이디어에 배타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아이디어 소유자에게 아이디어 사용에 다른 수수료 징수권을 법으로 부여하면 된다. 지적재산권법을 제정하고 관리하는 것은 정부다. 정부는 특허로 발명을, 저작권으로 창작물을, 상표권으로 브랜드명을 보호해야 한다.
특허는 새롭고 유용한 어떤 공정, 기계, 제조법, 물질 배합, 설계 등에 부여할 수 있다. E=mc² 같은 자연법칙은 특허 대상이 아니다. 하나의 창작물이 특허를 인정받으려면 새롭고 유용하며 독특한 것이어야 하고, 특허권 보유자는 20년 동안 특허 대상인 자신의 창안물을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배제할 수 있다. 특허가 침해당할 경우 소송으로 특허권을 행사할 수 있다. 특허권 침해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다음의 네 경우다. 창안물이 전혀 새롭거나 독특하지 않기 때문에 특허를 부여하지 말았어야 할 경우, 이전 기술을 새로운 것인 양 고의적으로 신청했을 경우, 일찍이 특허를 받았거나 이미 널리 사용중인 경우, 특허 범위가 적정선을 벗어났을 경우다.
특허권이나 저작권 보유자는 특허, 저작의 이용 정도에 따라 로열티 혹은 다른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이때 프리미엄은 특허권 보유자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 특허로 프리미엄을 얻을 수 있다면 혁신적 노력이 배가된다. 특허는 창조성을 고양시킨다. 특허에도 결점은 있다. 특허는 상거래에 대한 법적 제한이다. 아이디어가 이미 존재할 경우 아이디어 이용을 제한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아이디어 소유자가 아이디어 구현이 가능한 어떤 물건에 대해 독점가격을 부과한다면 일부 잠재적 사회가치는 실현되지 않는다. 독점가격이 부가 장치 생산가보다 높게 책정되면 아이디어 상품을 찾지 않는 소비자도 있기 마련이다. 특정 아이디어에 독점권을 부여할 경우 아이디어 창안자에게 보상이 돌아간다. 하지만 가격이 아이디어에 접근할 수 있을 만큼 적절해야 한다. 특허란 말 그대로 과다 청구권이다.
지적재산권은 새로운 아이디어 장려와 기존 아이디어 활용 사이의 타협점이다. 아이디어의 생산적 활용을 방해하지 않는 테두리 안에서 혁신자에게 보상이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방법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대다수 국가는 지적재산권 만료 시한을 정해놓고 특허의 이익과 비용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이뤄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특허 기간이 만료되면 아이디어 소유권도 사라진다. 따라서 이후 누구든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의 성공은 다양한 요소에 기인했다. 실리콘밸리는 인접해 있는 스탠퍼드 대학으로부터 큰 도움을 얻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은 실리콘밸리에 고도로 훈련된 엔지니어와 경영인을 끊임없이 공급했다. 캘리포니아 주의 생활양식은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실리콘밸리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은 제조 부문 대다수를 아웃소싱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결국 노동력의 유연성으로 이어졌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벤처자금을 언제든 확보할 수 있어 기업 설립이 용이했다. 이는 실리콘밸리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지만 실리콘밸리가 성공한 결과이기도 하다. 운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애널리 색세니언은 저서 『지역적 우위(Regional Advantage)』에서 실리콘밸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을 기동성과 공유의 문화로 보고 있다. 엔지니어 노동시장의 움직임에서 실리콘밸리와 루트128은 서로 달랐다. 실리콘밸리는 경쟁업체들 인력 사이에 열린 관계가 발전하고 있었다. 엔지니어들은 자주 직장을 옮겼고, 이 과정에서 전 직장에서 얻은 노하우를 다른 직장으로 갖고 가도 아무 상관 없었다. 이에 비해 매사추세츠 주의 문화는 다소 완고했다. 기업에 대한 충성과 장기 근무가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아이디어는 사내에서만 공유할 수 있었다.
실리콘밸리에서 일자리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다. 엔지니어가 한 직장에 머무는 기간은 평균 11개월이다. 미국 평균 3년에 비하면 매우 짧은 셈이다. 동부 출신인 한 기업인은 “인력의 유동성이 커다란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며 “실리콘밸리에서는 인력 이동이 심한 반면 실질적 리스크가 적다.”고 전했다.
인력의 기동성은 두 결과를 낳는다. 하나는 직접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간접적인 것이다. 엔지니어들이 새 직장으로 옮길 경우 옛 직장에서 터득한 노하우도 함께 갖고 간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업계 전반에 확산되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한 기업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기업이 아닌 개인 기술에 대한 충성도가 더 높다. 회로 설계자의 경우 능숙한 기술이 절대적이다. 한 기업에서 자신의 기술을 발휘할 기회가 없을 경우 다른 회사로 옮기면 그만이다.”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은 소속 기업이 서로 달라도 커피숍이나 음식점에서 이따금 만난다. 그들은 서로 도와가며 각자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에 대해 논의한다. 경쟁업체의 엔지니어와 아이디어를 서로 주고받을 경우 자기 이력에도 도움이 된다. 엔지니어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특정 기업에 자리가 생길 경우 다른 업체 엔지니어의 이름이 거론되곤 한다.
시장 혹은 국가가 아니라 시장과 국가
규모가 국가만 한 기업도 있다. 제너럴모터스(GM)의 연간 생산 규모는 우루과이보다 크고 헝가리보다 적다. GM의 부가가치, 다시 말해 순이익에 직원들 임금까지 합할 경우 350억 달러다. 우루과이의 국민총생산(GNP)은 200억 달러, 헝가리는 460억 달러다. 월마트는 세계 곳곳에서 11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인구로 따지면 인도양의 섬나라 모리셔스만 하고 에스토니아보다는 좀 적다.
시장경제의 시각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정표가 기업이다. 여기에 역설이 하나 존재한다. 기업은 일종의 중앙계획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책임은 최고 임원이 진다. 사내 거래는 시장이 아니라 계층 통제에 종속된다. 기업들은 상호 거래에서 시장을 활용한다. 그러나 내부 거래에서는 고의적으로 시장을 무시한다. 기획이란 공산주의 경제의 역사 속에서나 존재한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기업에서 기획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월마트와 GM은 기획체제로 생산성이 높은 반면 헝가리와 에스토니아의 경우 낮은 이유가 무엇일까? 기획체제가 경제 전반에 도입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낭비를 기업은 어떤 식으로 방지하는 것일까? 답은 세 가지다. 기업 소유주들은 기업 실적에 직접적 이해관계를 갖고 경영진의 의사결정도 감시한다. 하지만 대기업의 경우 개인 소유권만으로 효율성을 확보할 수 없다. 기업 밖의 시장 세력이 경영진에게 효과적인 경영을 촉구한다. 처벌은 상품 시장에서 비롯된다. 자사 제품의 판매 여부는 고객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금융시장도 기업에 처벌을 가한다. 경영이 형편없는 기업은 파산하거나 다른 기업에 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마켓플레이스의 처벌은 정부 조처에 더러 좌우되기도 한다. 일례로 반독점법이나 금융 규제를 들 수 있다.
기업 내의 중앙집중화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많은 대기업이 시장에서 이득을 챙기기 위해 애쓰는 것은 당연하다. 대기업 부서들은 독립채산제로 운영된다. 그러나 기업이 시장을 완벽하게 모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직도로 보면 의사결정권이 하부에 속한 것 같지만 결국은 최상층의 통제권 아래 있다. 기업들의 예산 편성 및 보고 체계는 중앙에서 운영한다. 사내 거래에서 최종 중재인은 경영진이다.
기업 내부 거래가 중앙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다는 것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 고용 관행이다. 피고용인은 회사의 규정에 따라 임금을 받는다. 사외 노동시장이 임금을 어느 정도 제한한다. 하지만 노동자는 현 직장에서 다른 회사보다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 임금이 연공서열제에 따라 지급되기도 한다. 노동자 개인의 생산성에 딱 맞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중간 관리층에서 주된 ‘당근’으로 작용하는 것이 승진, ‘채찍’으로 작용하는 것이 해고다. 이는 최고 경영진이 중간 관리층의 인센티브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기업은 성장한다. 생산 과정에 내재된 본질 아니면 제품 수요 때문에 기업은 성장한다. 그리고 철강과 자동차 같은 몇몇 산업에서 대기업은 대량 생산으로 경제성을 획득한다. 규모의 경제가 기업과 시장 사이에 경계선을 정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필요한 제품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다. 직접 만들거나 사는 것이다. 기업 내 거래는 수직 명령 체계로 조정된다. 각기 다른 기업들 사이의 거래는 시장이 중재한다. 생산 과정 일부를 아웃소싱하는 업체, 다시 말해 직접 생산하기보다 구매하는 기업은 시장 메커니즘에 대해 믿는다는 뜻이다.
시장이 이처럼 괄목할 만한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는데, 왜 많은 거래가 시장 밖에서 이뤄져 기업이라는 제2의 계획경제 체제로 환원되는 것일까? 너도 나도 독립적인 하도급 업자로 존재하지 않고, 왜 굳이 피고용인이 되는 것일까? 기업이 필요한 제품을 직접 생산하느냐 아니면 다른 기업으로부터 구매하느냐 하는 것은 각 거래 형태의 상대적 비용에 달려 있다. 경제학자 로널드 코스가 1937년 기술한 바 있듯이 상대적인 비용을 결정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시장의 효율성이다. 시장을 이용할 때 거래 비용이 많이 들 경우 기업은 스스로 생산한다.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면 생산 과정 중 상당 부분을 아웃소싱한다. 규모의 경제로 득을 본답시고 자체 생산력까지 꼭 보유할 필요는 없다.
시장은 자유화, 개방,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통로
러시아는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면서 일대 약진이라는 접근법을 취했다. 러시아의 충격 요법은 세 요소로 구성됐다. 정부 예산의 균형, 가격 통제의 즉각 철폐, 신속한 기업 민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충격 요법의 목적은 기존 경제 제도를 새 제도로 아예 대체하는 것이었다.
1992년 1월 1일, 러시아 정부는 거의 모든 상품에 대한 가격통제를 철폐했다. 에너지와 운송 부문만 그대로 놔뒀다. 1992년 10월~1994년 6월 러시아 정부는 국유 기업의 ‘민영화 증서’(대중의 사유화를 위해 정부가 발급한 것으로 이것을 국영기업 주식과 교환한다.)를 시민들에게 분배하는 식으로 민영화에 나섰다. 막대한 자산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산업의 66퍼센트, 다시 말해 1만 5000여 개 기업이 민영으로 바뀌었다. 정부 예산의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는 애초 강력하게 추진됐으나 이후 다소 흔들렸다. 하지만 결과는 다소 성공적이었다. 1992년 2,500퍼센트였던 인플레율이 서서히 잡혀 1996년 22퍼센트로 떨어졌다. 그러나 인플레율이 다시 치솟을 가능성은 여전했다.
러시아의 정치와 경제 제도들이 안으로 폭발하면서 정부는 모든 부문에서 개혁을 급속히 추진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당시 개혁을 책임지고 있는 아나톨리 추바이스 부총리는 대안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점진적 접근법이 상책이지만 러시아처럼 붕괴를 눈앞에 둔 나라는 다르다.”고 말했다. 충격 요법 지지자들이 충격 요법의 정치적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떤 경제에서든 충격 요법이 개혁의 최선책이라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러시아 국민들은 개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떠든 것 모두가 새빨간 거짓말이었던 반면 자본주의에 대해 떠든 것 모두는 사실이었다.”는 냉소적 우스갯소리까지 나돌 정도였다. 1997년 러시아 전역에서 여론조사가 실시됐다. 민영화 정책이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러시아 국민 중 70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했다. 일부는 충격 요법이 러시아 경제를 파괴하기 위한 미국의 음모라고도 생각했다.
생활 수준은 급락했다. 가격 자유화가 단행된 첫날, 식료품 값이 250퍼센트나 뛰었다. 하지만 임금은 오르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극심한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평생 모은 돈은 거의 아무 가치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 먹을거리를 재배하며 연명했다. 민영화 이후 물가가 올랐다. 이전의 계획경제 당국이 물가를 너무 낮게 책정했기 때문이다. 수요가 충족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물가가 오르면 시장에 더 많은 상품이 쏟아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장을 멈춘 1990년대 러시아에서는 물가 상승이 생산의 급감으로 이어졌다.
루블화로 표시된 제품 가격이 오르면서 인플레가 발생했다. 하지만 생산의 양대 요소인 노동과 에너지 부문에서 루블화 가격에 큰 변화는 없었다. 1993년 임금 대비 제품 가격의 상승은 더 많은 생산으로 이어지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충격 요법이 실시된 첫해인 1992년 러시아 경제 전반의 생산은 19퍼센트 감소했다. 1993년 12퍼센트, 1994년 15퍼센트가 더 줄었다. 생산이 다시 늘기까지 수년을 기다려야 했다. 가격 자유화는 충격 요법의 단점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가격에 대한 공급의 반응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면 가격 자유화는 역효과를 낳는다.
개혁 초기 러시아의 모든 기업은 국유였다. 그들 업체가 가격 신호에 반응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구조조정이 필요했다. 더 나은 의사결정 과정, 실적에 바탕을 둔 임금 체계, 현대화한 회계 관행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구조조정에 소요될 자본을 끌어 모으고 새로운 제품과 고객도 모색해야 했다. 당시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는 “급속한 민영화로 문제 대부분을 개선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소련의 계획경제 당국은 몸집이 크면 클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많은 업체가 독점기업으로 군림했다. 민영화 이후에도 독점기업들은 경쟁에서 비롯하기 마련인 감시 체계로부터 자유로웠다. 많은 기업이 포진한 산업에서도 경쟁은 더디게 발전했다. 시장 정보의 유통 채널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신규 고객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민영화로 기업 소유권은 대개 내부자 손에 쥐어졌다. 일반적으로 관리자와 근로자들이 지분의 66퍼센트 정도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외부 주주들은 인습에 젖은 기존 관리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효과적인 파산법이 없다는 것은 악덕 관리자에 대한 제재 수단이 없다는 뜻이었다. 악덕 관리자를 퇴출시키는 것은 여전히 국가의 몫이었다.
러시아에서 생산량이 떨어진 좀 더 근원적인 이유는 충격 요법으로 기업들 사이의 관계가 파괴됐다는 점이다. 어떤 경제에서든 제조는 협력 과정이다. 기업은 자사 제품을 다른 업체의 필요에 맞게 만든다. 개혁 전 어느 업체가 어떤 업체에 제품을 팔지 정한 것은 계획 당국이다. 당시 기업들의 관계가 적절치 못한 경우는 흔했다. 개혁과 더불어 기업은 더 나은 상거래 대상을 스스로 찾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상호관계를 처음부터 새로 구축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새로운 상거래 파트너를 물색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기업들은 투자를 꺼렸다. 누구를 위해, 어떤 제품을 만들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생산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시장은 기다리며 지켜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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