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제국

   
존 고든(역자 : 안진환 · 왕수민)
ǻ
황금가지
   
23000
2007�� 06��



■ 책소개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된 원동력을 "미국의 경제력"으로 보고, 미국이 어떻게 "부의 제국"이라 불릴 만큼의 경제력을형성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본 책.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였던 시절부터 독립 전쟁 및 남북 전쟁 그리고 제1,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미국이변모하는 모습을 경제적 측면에서 자세히 그려낸다.

 


식민지 경제의 동력원이 된 담배 이야기부터 뉴욕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 과는과정, 알렉산더 해밀턴과 J. P. 모건 등 미국 경제계의 영웅들과 각종 비리 스캔들, 역대 대통력의 실책과 업적, 미국 독립전쟁과 남북 전쟁,그리고 양차 세계 대전이 미국 경제에 끼친 영향, 최근의 컴퓨터 기술과 관련한 발전상까지 미국 경제의 다양한 면면을 살필 수 있다.


‘성공적인 부의 역사’를 담아낸 이 책을 통해 오늘날 경제를 바라보는 지혜와 미래를 설계할수 있는 경제적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저자 존고든
저명한 미국 경제사가로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에 경제 기사와 논평을 쓰고, 「아메리칸 헤리티지」의 시사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수의 저서를 썼으며 대표작으로는 『대서양 횡단 케이블(A Thread Across the Ocean)』『위대한게임(The Great Game)』『해밀턴의 은총(Hamilton’s Blessing)』『월스트리트의 매춘부(The Scarlet Womanof Wall Street)』 등이 있다. 현재 뉴욕의 노스 세일럼에서 살고 있다.


 역자
안진환
 -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를 졸업했으며, 현재 번역회사 인트랜스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저서로는『영어 실무 번역』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리스크』『빌 게이츠@생각의 속도』『애덤 스미스 구하기』『판도라의 시계』『포지셔닝』『허브코헨의 협상의 법칙』『강한 국가의 조건』『미운 오리새끼의 출근』『피라니아 이야기』『사내 정치』등이 있다. 


왕수민 - 서강대학교에서 철학과 역사학을전공했고, 현재 인트랜스 번역원의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교황 베네딕토 16세 평전』『브라보! 마이 라이프』『논리는 힘이세다』『Abs 다이어트』『2007 세계대전망』(공역) 등이 있다.


■ 차례
Ⅰ. 황무지에서 부의 제국을 꿈꾸다 
1. 기회의 땅, 신세계를 찾아서 
2. 종교적 신념과 부를 위하여
3. 독립을 꿈꾸는 북아메리카의 대영 제국 


Ⅱ.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 부의 역사
역사적 배경 - 미국 독립 전쟁 
1. 해밀턴식 재정 정책의 탄생 
2. 남부의 농업 부활과 노예 제도
3. 도로와 운하의 건설, 엄청난 노동의 힘 
4. 공황을 부른 재정 정책의 실패 
5. 증기 기관과 산업 혁명 그리고 철도
6. 차례로 실현된 일상의 기적들 
7. 폭풍 전야의 황금열 


Ⅲ. 부의 집중과 경제 거인들의 탄생
역사적 배경 - 남북 전쟁 
1. 이빨과 발톱이 난무하는 경쟁 자본주의 
2. 정부, 드디어 경제 규제에나서다 
3. 카네기와 록펠러, 부자들의 출현 
4. 미국 금융의 영웅 J. P. 모건 


Ⅳ. 부의 제국, 세계 무대에 등장하다
역사적 배경 - 제1차 세계대전 
1.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시대 
2. 미국 경제의 심장, 박동을 멈추다
3. 대공황을 극복한 낙관주의의 힘 


Ⅴ. 부의 제국의 현재와 미래 
역사적 배경- 제2차 세계대전 
1. 전쟁이 불러온 20년간의 대호황 
2. 뉴딜 질서의 위기와 레이거노믹스 
3. 새로운 경제, 새로운전쟁





부의 제국


황무지에서 부의 제국을 꿈꾸다
독립을 꿈꾸는 북아메리카의 대영 제국

17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의 제국이 팽창하면서 영국의 무역권도 크게 확대되었다. 1600년 영국의 교역에서는 이웃의 북서유럽 국가들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100년 후 영국은 유럽 최대의 교역국이었던 네덜란드를 따라잡았다. 영국 선박들은 멀리 인도까지 가서 아시아 국가들과 교역했는데, 영국 상선의 40퍼센트가 아메리카 상선이었다. 런던의 정부가 이러한 무역을 규제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당연히 조세를 부과할 힘을 더 갖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당시 경제 사상을 지배하고 있던 원칙을 따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현재 이 원칙은 ‘중상주의’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말을 고안한 건 바로 중상주의를 적대시했던 애덤 스미스였다. 하지만 중상주의는 외국과의 경쟁에서 보호받기를 원했던 상인 및 제조업자들의 강력한 경제적 이기주의와 우연히 맞물리면서 한동안 지적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애덤 스미스가 등장해 서양 역사상 설득력이 가장 큰 동시에 영향력이 가장 막강했던 몇 권의 저서들로 중상주의를 격퇴하기까지는 말이다.


1651년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무역을 규제하기 위해 일련의 항해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 조례로 인해 식민지들은 영국 신민들이 건조하고 소유하고 승선한 배만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수출하는 특정 상품은 오직 영국으로만 운송하도록 규정하여 담배, 쌀, 설탕, 인디고, 모피, 구리, 타르, 피치, 테레빈 등 규정에 포함된 상품 상당수는 유럽 대륙으로 재수출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국은 그 상품들이 영국 세관을 통과할 때 세금을 부과할 뿐 아니라, 영국 상인들이 유럽과의 무역을 담당하도록 할 수 있었다.


또, 아메리카로 수입되는 유럽 상품들은 반드시 먼저 영국, 즉 영국 세관을 통과하도록 했다. 다만 스페인이나 마데이라 제도, 아조레스 제도의 와인과 같이 영국의 우선 생산 품목이 아닌 남부 유럽의 특정 상품은 예외였다. 이런 규정의 주목적은 영국의 제조업자들을 위해 아메리카 시장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영국의 생산성이 유럽에서 가장 높아져 영국 제조업체들이 거의 항상 보다 낮은 가격에 제품을 공급하게 되었으므로 아메리카도 그다지 손실을 입지는 않았다.


18세기에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계속 발전하자 영국은 이제 막 발달하기 시작한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아메리카의 제조업자들에게 보다 강도 높은 계약을 가했다. 금지 상품을 뚜렷이 명시한 것은 아니지만 시장 규모가 제약을 받게 되었고, 특정 상품에 대해서는 새로운 공장 및 제조소 건설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조례는 철저히 시행되지 않았다. 일부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고, 적절하게 뇌물만 건네면 책임자들이 고의로 눈감아 주는 일도 다반사였다. 아메리카의 여러 항구가 있는 항만 도시의 징세관은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에 특히 부러움을 사는 자리였다. 밀무역은 식민지 시대 전반에 만연해 있었다.


영국은 법을 제정해 식민지에서의 은행 설립을 효과적으로 막고 있었고, 자국의 통화 공급 보호를 위해 영국의 화폐 수출 역시 금지했다. 이로 인해 식민지들은 가능한 최선의 통화 공급 방법을 창안해 내야 했다. 1652년 매사추세츠는 왕실 조폐국 외에는 조폐 활동이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는데도, 자체적으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했다. 북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주조된 동전인 ‘소나무 실링(pine tree shilling)은 엄격한 과정을 거쳐 생산되었다. 식민지인들은 일단 자체적으로 은을 확보해 시금한 뒤, 영국 실링의 은 함유량의 4분의 3을 함유한 동전을 주조했다. 소나무 실링은 매사추세츠 경제에 아주 중요한 자산이었기 때문에 영국 정부도 30년 동안은 생산을 억제하지 않다가, 1684년 매사추세츠가 처음 받았던 특허장이 취소되었을 때에야 조폐 금지 명령을 내렸다.


다른 식민지 이주민들은 당시 국제 통화 표준에 가장 근접해 있던 스페인 달러를 해결책으로 삼았다. 스페인 달러는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유통되던 화폐의 절반 가량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는 여행객들이 가져온 잡다한 동전 및 프랑스 동전 등이었다. 하지만 영국과의 끊임없는 무역 적자로 아메리카 정화(正貨)가 고갈되었기 때문에 스페인 달러는 화폐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우월한 기술을 사용하는 경우에 늘 그렇듯, 경제적 교환 활동에서 화폐 사용에 익숙했던 북아메리카의 영국 이주민들은 화폐 경제의 혜택을 계속 누리고 싶어했다. 그들은 ‘실질 화폐’를 대체할 만한 다른 것을 찾기 시작했다.


화폐로 인한 잡음이 경제의 주된 현상이기는 했지만, 18세기 중엽 북아메리카의 대영 제국은 번영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이런 번영을 누리는 곳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농산물 및 원료 수출지, 선박 건조지, 무역 거점으로서 중대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제조품에 대한 수요도 점차 자체적으로 충족시키고 있었다. 거의 모든 마을에 대장장이, 통 제조업자, 수레바퀴 제조업자, 구두 수선공, 목수, 제혁업자 및 기타 기능공이 적어도 한 사람씩은 있어서 지방의 수요를 충족시켰다. 제분소와 제재소는 그 수도, 운영 규모도 점차 늘어났다. 규모가 큰 마을에서는 많은 기능공이 원시 산업 형태의 사업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북아메리카 대영 제국의 경제는 이제 식민지 성격에서 벗어나 다각화하고 발전된 모국의 경제를 닮아가고 있었다. 식민지에서 사치품 생산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한 신호였다. 경제는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주민이 계속 들어오고, 대가족에 속한 아이들 대부분이 죽지 않고 성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거주 지역 역시 빠른 속도로 늘어나, 독립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46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렀다. 이는 영국의 1.5배에 달하는 넓이로, 서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인 프랑스를 급속도로 따라잡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 부의 역사
도로와 운하의 건설, 엄청난 노동의 힘

미국은 프랑스의 네 배, 영국의 열 배에 달하는 국토를 가진 거대한 국가였지만, 그 크기에 걸맞은 도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역동적인 국가였다. 신대륙 정착 이후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서부로 터전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캐나다의 국경을 오하이오 강까지 확장하고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에 백인 정착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1764년 퀘백법은 미국 독립 혁명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혁명 이전에 산맥 서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수세기 동안 존재해 온 인디언들의 길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니얼 분이 켄터키 지역으로 들어갈 때 개척한 ‘황야의 길’이나 테네시로 통하는 컴벌랜드 협곡 사이의 길이 그랬다. 여행자들이 마차를 타고 다니기 위해 나무를 베어 내고 덤불을 헤치면서 만든 작은 오솔길들은 넓은 도로로 확장되었다. 늪지대에서는 여행자들이 나무를 베어 이른바 ‘통나무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도로들은 여름에는 바퀴 자국과 먼지 투성이였고, 봄과 가을에는 진흙탕이 되기 일쑤였다. 이런 길로 짐마차나 역마차를 겨우 몰고 간다고 해도, 불과 몇 킬로미터를 가는 데 몇 시간이나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혁명 이후 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헨리 애딩턴처럼 모험을 좋아하는 여행자들의 편의나 이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업적인 필요 때문이었다. 필라델피아는 랭커스터 카운티의 비옥한 농토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들을 시장으로 내다 팔 통로가 필요했다. 서스쿼해나 강 또는 체서피크 만을 통한 거래는 볼티모어에 이익을 가져다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필라델피아는 1790년 유료 도로를 건설할 민영 기업의 설립을 허가했다. 여행자들의 발자국에 의해 만들어진 초기의 도로들과 달리, 필라델피아와 랭커스터 간 유료 도로는 규격에 맞게 건설되었다. 도로는 정해진 너비로, 잘게 부순 돌과 자갈을 깔아 표면이 고르게 만들었다. 또한 도로 가운데 부분을 불룩하게 해 비가 와도 배수가 잘 되도록 했다.


필라델피아와 랭커스터 간 유료 도로는 도로를 건설한 회사에 큰 수익을 안겨 주었다. 이후 수십 년간 뉴잉글랜드와 중부 대서양 지역에서는 수많은 유료 도로 건설 계획이 착수되었다. 1840년대에 이르자 남부 뉴잉글랜드와 뉴욕 주, 뉴저지 주, 남부 펜실베이니아 주의 도로망은 크게 개선되었고 이동 속도도 빨라졌다. 운송 수단도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도로가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말이 끄는 마차에 실을 수 있는 물량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물건은 여전히 수로로 운반해야 장거리를 가도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산업화 이전 시대에 자연적인 수로가 없는 지역에서 해결책은 단 한 가지였다. 인공 수로, 즉 운하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1817년 7월 4일, 새로 취임한 주지사 드윗 클린턴은 뉴욕 주 롬 외곽에서 첫 삽을 뜨고 운하 공사가 10년 안에 완공될 거라고 공언했다. 공사는 실제로 8년 만에 완료되었다. 운하 건설 프로젝트에는 수천 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었다. 공사가 한창일 때는 5만 명의 노동자가 현장에서 일했다. 그 중에는 지역 주민들도 있었지만, 아일랜드와 웨일스에서 이민 온 노동자들도 많았다. 이들은 뉴욕의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건설 현장에 고용되었다. 운하를 파는 일은 오로지 수작업으로 이루어졌지만, 양키 특유의 창의성으로 인해 작업은 예상보다 쉽게 진행되었고 비용도 절감되었다. 나사와 케이블을 사용해 나무를 베는 새로운 방법이 개발되었고 곧이어 또 다른 기계가 발명되어 노동자 일곱 명과 소 한 조가 하루에 30~40개의 나무 그루터기를 뽑아 낼 수 있게 되었다.


1821년에는 운하 352킬로미터가 완성되었다. 수로가 실제로 사용되기 시작하자 외국의 관심이 이리(Erie) 운하에 집중되었다. 런던의 자금 시장에서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베어링 브러더스 한 곳에서만 30만 달러의 운하 공채를 구입할 정도였다. 이리 운하는 즉각적이고도 놀라운 경제적 성공을 불러왔다. 1825년 총 1만 3100척의 선박이 운하를 사용했고, 통행료 수입은 50만 달러에 육박했다. 이는 건설 당시의 빚을 해결하고도 남는 액수였다. 채 10년도 안 되어 부채는 모두 청산되었고, 남은 돈은 지선 운하를 추가로 건설하는 데 쓰이게 되었다. 운하가 통과하는 지역의 인구는 몇 년 만에 세 배로 불어났다. 촌락은 마을이 되고, 마을은 도시가 되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수천 명이 운하를 따라 뉴잉글랜드의 불모지를 등지고 중서부의 비옥한 농토를 찾아 떠났다는 사실이다. 운하의 건설로 인해 동부로 물자를 수송하는 비용이 크게 떨어지자, 이들은 중서부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동부로 내다 팔 수 있게 되었다.


운하가 건설되기 전에는 밀가루 1톤을 버펄로에서 뉴욕 시까지 보내는 데는 120달러의 비용과 3주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뉴욕 시에 도착한 밀가루 가격은 원산지 가격의 세배에 달했다. 운하가 생긴 이후 수송 비용은 6달러, 시간은 8일로 단축되었다. 운하의 건설 이후 뉴욕 시는 단순히 미국 최대의 도시에서 서반구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부의 집중과 경제 거인들의 탄생
이빨과 발톱이 난무하는 경쟁 자본주의

1865년 미국은 이미 주요 산업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농업 기반 국가에 머물러 있었다. 뉴욕 증권 거래소의 상장주 명부에도 산업 회사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불과 한 세대 후 20세기에 돌입하면서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현대적인 산업 경제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1865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대규모 유한 주식회사가 시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건국 초기부터 줄곧 자본 수입국이었던 미국이 이제 대영 제국과 맞먹을 정도의 재정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농부와 대목장주들이 철도를 통해 북아메리카 내륙의 대평원 지대로 몰려감에 따라, 중심 경제의 자리에서 밀려난 농업까지도 생산성 면에서 현저한 증가 추세를 보인다.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 미국 정치계는 혼돈에 휘말리고, 경제는 부패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요컨대 감시 역할을 맡은 경찰이 순찰을 소홀히 함으로써 이빨과 발톱이 난무하는 치열한 경쟁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어떤 이들, 적어도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재미있는 광경이었을지 모르지만, ‘경제’가 운영되는 데에는 결코 적합하지 않았다. 규제와 감시자가 없는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체제 전체의 이익보다는 단기적인 사리사욕을 향해 움직이게 된다. 그 결과 사회는 대혼란 혹은 금권주의로 치닫게 된다.


전후 시대의 부패는 뉴욕의 자본가들과 주 정부 혹은 철도 회사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철도 프로젝트, 즉 1864년부터 건설되어 1869년에 완공된 대륙 횡단 철도는 19세기 최대의 금융?정치 스캔들을 낳았다.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은 1850년 캘리포니아가 연방에 편입된 후 줄곧 계획되어 왔지만, 남부와 북부간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그러다 1862년, 연방에 충성을 다하던 주들만 의회에 참석한 상태에서 퍼시픽 철도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법안에 의해 창설된 유니언 퍼시픽 철도 회사는 1816년 제2 미합중국 은행 이후 연방 정부가 직접 승인한 최초의 기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상업적인 특성을 가짐과 동시에 연방이 지속될 것이라는 일종의 상징이기도 했다. 유니언 퍼시픽은 처음부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당시 미국 동부와 유럽에 건설된 철도들은 대개 경제 활동이 활발한 지역들을 연결하면서 경제 활동량을 크게 증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부에서도 경제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 생겨났고, 사람과 상거래가 철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깊이 개입하고 있었음에도 대륙 횡단 철도 프로젝트는 위험천만한 도박과도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주들이 아닌 경영진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직접 건설 회사를 설립해 ‘크레디 모빌리에(Credit Mobilier)라는 예쁘장한 프랑스어 이름을 붙인 다음,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고용해 최고의 건설 비용과 서비스 비용을 설정했다  크레디 모빌리에는 오마하 서쪽 첫 번째 구역에 철로를 설치하는 데 1킬로미터당 평균 3만 7500달러가 소요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주임 기사 피터 데이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실제 비용은 3만 달러에 불과했다.


1869년 1월, 1880년대에 유니언 퍼시픽 철도 회사의 사장이 되는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는 「노스 아메리칸 리뷰」에서 크레디 모빌리에가 사리사욕을 채우는 불한당이라고 비판했다. “회사의 운영진은 모두 의회에 앉아 있다. 그들은 채권 소유자들의 수탁자다. 그들은 중역이자 주주들이다. 그들은 계약자 본인이다. 워싱턴에서 그들은 회사에 원조금을 주는 데 찬성표를 던지고, 뉴욕에 돌아와서는 그 돈을 받는다. 그들은 대평원에서 돈을 소비하고, 크레디 모빌리에에서 나눠 갖는다.” 애덤스의 비난은 주장일 뿐 충분한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뇌리에서 금세 잊혀졌지만, 도둑들은 으레 내분을 일으키기 마련으로 마침내 자신이 속았다며 불만을 품은 모빌리에 주주 헨리S. 매컴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그 와중에 재판 기록이 「뉴욕 선(New York Sun)」의 편집자인 찰스 A. 데이나에게 유출되어 1872년 9월 4일, 이 정보가 기사로 대서특필된다.


스캔들을 조사하기 위해 의회 위원회가 소집되고 오크스 에임스와 다른 의원, 즉 몇 되지 않는 민주당 의원 중 한 명이 제명당했다. 불행하게도 당시 비난을 뒤집어쓴 사람은 이 두 명뿐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공화당은 1874년 선거 때 고된 시련을 겪고 결국 백악관을 내주게 된다. 이 문제와 관련해 개인적으로는 결백했던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부패한 행정부의 수장으로 기록된다.



부의 제국, 세계 무대에 등장하다
대공황을 극복한 낙관주의의 힘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일 뿐임을 명심하십시오.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인 이름 없는 공포, 후퇴를 전진으로 되돌리는 데 필요한 모든 노력을 마비시키는 두려움 말입니다.”


이 연설은 미국 국민들에게 거의 마법과도 같은 효력을 발휘했다. 단 한 주만에 45만 통의 편지와 카드가 백악관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다음 날, 루스벨트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적대국과의 교역법’을 통과시켰던 그 대통령령을 활용해, 다음 주 목요일 특별 회기를 소집하고, 의회가 시작될 때까지 전국의 모든 은행에 휴업을 지시한 다음, 중요 은행장들과 긴급 회의를 가졌다. 다음 며칠 동안, 그때까지 후버의 인물들로 채워져 있던 재무부와 은행가들은 ‘긴급 은행법’을 준비하느라 숨 가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긴급 은행법은 루스벨트가 이미 실행한 일을 승인하고 또한 앞으로 은행 체제와 외환 거래를 규제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정부에 안겨 주었다. 법령은 3월 13일 월요일, 은행이 다시 문을 여는 시점부터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3월 12일 일요일, 루스벨트는 최초의 노변 담화(fireside chat, 뉴딜 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이 시작한 이 라디오 담화는 난롯가에서 친지들과 정담을 나누듯 친밀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옮긴이)를 발표했다. 그의 목소리는 당당하면서도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했고, 감화적이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는 국민들에게 은행이 운영을 재개하면 “매트리스 아래에 돈을 숨겨 놓는 것보다 은행에 예치하는 편이 훨씬 안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국민들은 대통령을 믿었다. 다음 날 금과 통화가 은행으로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의 심장이 다시 박동을 시작한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취임식 후 첫 3개월, 즉 소위 ‘100일 의회’ 기간 동안 미국의 독재자나 다름없었다. 그 시기의 법률 제정 기록을 살펴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불경기란 경기가 위축되는 특정 시기를 발한다. 그리고 루스벨트의 ‘100일 의회’는 1929년 초반에 시작된 이런 경제적 위축에 종지부를 찍었다. 미국 국민들은 대통령의 인성과 신속한 움직임, 결코 꺾이지 않는 낙관주의에 힘입어 경제에 대한 믿음을 되찾았으며, 곧 전국적으로 회복과 재건이 시작되었다. 끔찍한 경제 재난의 여파가 다소 존재하기는 했지만, 1933년은 월 스트리트에 20세기 최고의 해였다. 다우존스 지수는 60퍼센트 상승했으며, 일부 증권 회사는 고용을 늘리기 시작했다. 번창과는 아직 거리가 멀었지만, 미국 경제가 오르막길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초기 뉴딜 정책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경제 분야는 대공황 당시 거의 붕괴 직전까지 갔던 은행업일 것이다. 글래스-스티걸 법은 전국 은행체제에 대한 연방 준비 제도의 통제력을 강화시켰고, 저축 은행과 같은 더 많은 은행을 연방 준비 제도에 합류시켰다. 또한 연방 준비 은행에 증거금 비율을 결정할 수 있게 됨으로써 월 스트리트의 투기를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은행 체제와 이자율 규제에 있어 중요한 도구인 공개 시장은 12개의 지방 연방 준비 은행이 아닌 워싱턴의 연방 공개 시장 위원회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 위원회는 일곱 명의 총회 위원과 지방 연방 준비 은행에서 지명한 다섯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한 명은 반드시 뉴욕 연방 은행이 선출했다. 또한 통화 공급량과 이자율을 제어하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으로 연방 준비 제도가 은행들의 지급 준비율을 책정하도록 했다.


1937년 연방 준비 제도는 새로이 획득한 권력을 이용해, 여러 가지 기술적인 이유를 내세워 은행의 지급 준비율을 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루스벨트 정부는 예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공공사업 지출액을 서서히 줄이기 시작한다. 그 결과 새로운 불황이 찾아왔다. 다음 해에 실업률이 갑자기 19퍼센트까지 급증하고 GNP는 6.3퍼센트 하락했다. 이로써 경기 순환 곡선의 최고치가 과거의 최고치를 능가하지 못했다. 1937년의 최고점이 1929년의 최고점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불황’이란 용어는 4년간 경기가 회복세이긴 했지만, 1930년대 전반에도 적용되었다. 또 경제학자들은 이 두 번째 불황을 불경기 중의 ‘경기 후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이후 경제 침체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한편 ‘대공황’이란 말은 1930년대의 처참하고 어두운 시대를 일컫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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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이 되자 경제가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으나, 실업률은 여전히 높은 수준이어서 1940년에는 14.6퍼센트를 기록했다. 결국 미국 경제를 치료하고 부활시킨 것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이 아니라, 바로 전쟁이었다. 1919년 베르사유에서 체결된 끔찍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20년 동안의 휴전이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과, 그보다 훨씬 많은 인명과 자원을 낭비하게 될 전쟁 사이의 막간 휴식 시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피에 젖은 20세기를 연 제1차 세계 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폭격과 총탄이 마침내 잦아들었을 때 미국은 지정학적으로 이전보다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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