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를 그만두다

   
히라카와 가쓰미(역:정문주)
ǻ
더숲
   
14000
2015�� 01��



■ 책 소개

 

일본의 한 행동하는 지식인이 왜곡되고 부조리한 현대 소비사회에 제시하는 실천적 대안

 

『소비를 그만두다』는 2014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지식인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으로, 소비자본주의의 모순을 날카롭게 짚어내고, 개인의 삶에 맞닿은 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히라카와 가쓰미는 자신의 생활을 통해 생각을 증명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여러 저작과 강연을 통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대안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그의 대표작 『소상인이 돼라』는 일본과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의 저자가 크게 공감한 책으로, 실제로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곳곳에는 히라카와 가쓰미의 ‘소상인’에 대한 개념이 차용되고 있다. 『소비를 그만두다』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건강한 개인의 삶과 공동체로까지 그 의미를 확장시키며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저자 히라카와 가쓰미
1950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75년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시부야에 우치다 다쓰루와 함께 번역 회사 어번 트랜스레이션을 설립, 대표이사에 취임한다. 실리콘 밸리의 투자회사 비즈니스 카페(Business Cafe, Inc.) 설립에 참가하고, 이후 비즈니스 카페 재팬 대표 이사를 맡는다. 현재 주식회사 리눅스 카페의 대표 이사와 릿쿄(立敎)대학 특임교수를 맡고 있으며, 음성 콘텐츠 다운로드 사이트 ‘라디오 데이즈’를 운영하는 주식회사 라디오 카페 설립에 참여했고, 현재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에 『소상인이 돼라』『비즈니스에 ‘전략’은 필요 없다』『주식회사라는 병』『경제성장이라는 병』『이행기적 난세_경제성장 신화의 종말』『나를 닮은 사람』 등이 있다.


■ 역자 정문주
한일 국제회의통역사 겸 번역사로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졸업 후 한일 정부, 국회, 유엔 산하기관, 기업 등 다수의 국제회의 통역을 수행했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 출판기획 및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나는 왜 소통이 어려운가』『손정의 경영을 말하다』『손정의 미래를 말하다』『새벽형 인간』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10분 투자로 메일의 달인이 되는 비즈니스 일본어 이메일』이 있다.


■ 차례
머리말

 

1장 | 나, 소비자 제1세대
2장 | 전쟁이 끝난 뒤 찾아온 소비화의 물결
3장 | 소비 비즈니스의 격랑 속에서
4장 | 그것은 전쟁이었다
5장 | 그럼에도 미국을 동경하다
6장 | 월마트 효과는 상생이 아닌 파괴효과
7장 | 소비자 마인드를 넘어서

 

맺음말 사라지는 풍경에 적극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저자 후기




소비를 그만두다


나, 소비자 제1세대

전쟁을 겪은 세대, 그들은 모두 생산자였다

나 자신에 대해 소비자 제1세대라는 그럴싸한 표현을 썼지만 사실 나는 상당한 낭비가다. 수중에 돈이 있으면 남아나지를 않는다.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물건을 사는 나쁜 버릇이 있다. 타고나기를 돈을 묻어두고는 못 견디는지라 저축과는 연이 멀었는데도 미래에 관해 늘 불안을 안고 살았다. 그러다 남아 있는 미래도 점점 줄어드는 나이에 접어들고 보니 이제는 불안해하지도 말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각설하고, 대략 내 아버지 세대까지는 정말 돈을 쓰지 않았다. 내가 1950년생이니 아버지 세대라 하면 전중파를 말한다. 그들은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돈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안 썼다기보다는 쓸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네. 아무튼 세상은 뜻대로 안 돼. 아서라, 푸념 말고 힘내서 살아보자"라는 노래가사에도 나오듯 돈이 있었어도 바빠서 쓸 시간이 없었으니 전쟁을 겪은 그 세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저축을 하며 살았다.


아버지는 도쿄도 이케가미선 철로변의 구가하라라는 동네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셨다. 아버지뿐 아니라 다른 공장 사장들도 "그때는 휴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당시에는 스물 살 안팎만 되어도 회사를 차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타구에는 소규모 공장이 9천 군데나 몰려 있어 도쿄 도내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그런 작은 공장은 대부분 젊은이들이 차린 곳이었다. 일이 힘들었냐고 물으면 "한 달에 하루나 이틀 쉬었을까?"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쉬는 날도 종업원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지 경영자들은 거의 매일 일만 했다. 쉼 없이 달리느라 돈을 쓸 여유도 없었으니 아버지 세대는 소비자가 될 수 없었다. 그 세대 사람들이 모두 생산자였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다. 아버지 세대는 개미같이 일했고, 수중에 남은 돈은 공장을 키우는 데 쓰거나 저축을 하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금전만능 사회와 보시라는 병

삶의 의미가 노동에서 소비로 변한 현상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시간을 두고 되짚어보고 나서야 이해가 갔다. 핵심은 돈이 가장 중요해졌다는 것, 사회에서 돈의 만능성이 극대화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돈은 중요하다.


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었던 시대도 있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없는 자의 삐딱한 시각일지도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는 세계를 상상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 않을까.


돈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물론 입증할 수 있는 이론은 아니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근거가 되는 신앙 내지 신념 같은 것이다. 이런 신념은 극도로 경쟁적이고 야박해지는 세상의 변화를 막을 수 있다. 또 조금이나마 신중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해준다. 생활에 규범과 기준이라는 것을 제공한다는 얘기다.


시대가 흘러 나라가 잘살게 되고 상품이 시장에 넘쳐나게 되자 돈이 만능이 되었고 돈은 물처럼 써야 미덕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돈이 만능이 된 이유 중 하나는 돈이 인습적인 인간관계를 청산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돈이 없는 세계에서 사람과 사람의 결속은 빌리고 빌려주는 행위를 통해 단단해졌지만, 돈이라는 유일한 수단을 휘두르면 빌리고 빌려주는 관계를 청산할 수 있다. 증여적, 호혜적인 세계는 나름 성가신 데가 있었지만 돈을 매개로 하는 등가교환의 세계에서는 돈이 쉽게 사람을 엮어주고 끊어내게 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마침 돈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기서 상점가의 변질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아버지 세대의 상점가와 지금의 쇼핑몰은 비슷한 것 같아도 전혀 다르다. 상점가는 우리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날마다 들러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상품교환은 사실 이차적인 행위였다. 무엇보다 그곳에서는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만을 샀으며, 장보기 품목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모두가 같은 물건을 매일 사러 오니 상점가의 소매점 주인들도 생활이 가능했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옷장을 정리하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옷장 속에는 가격표도 떼지 않은 아버지 속옷, 나와 동생의 양말 등이 꽤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년의 어머니는 집에서 거의 밥을 안 해드셨는데 그러면서도 아픈 다리를 끌고 매일 일정 시간이 되면 동네 상점가로 장을 보러 나갔다가 매일 비슷한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가 드실 회를 좀 사서 돌아다니다가 양품점에 들러 필요도 없는 속옷과 양말을 샀던 것이다. 순수한 소비 행위라기보다는 동네 가게 주인들과 잡담을 나누고, 나간 김에 무엇이 됐건 한두 가지 물건을 사오는 행위였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대화가 주였고 장보기는 인사치레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쇼핑몰에서는 그런 광경을 볼 수 없다. 쇼핑몰에 가면 정말이지 없는 것이 없다. 상품 더미를 보고 있으면 갖고 싶다는 욕망이 자극을 받아 고개를 쳐든다. 이것저것 죄다 갖고 싶어진다. 하지만 진짜 필요한 것은 거기에 없다.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에게 쇼핑몰에 진열된 상품 더미는 아무 의미가 없다. 없이 살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생활필수품을 갖추고 나면 쇼핑몰에 늘어선 상품 따위는 무의미해진다. 그래도 쇼핑몰에는 매일 상품이 쌓인다.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바로 그곳에서 필요도 없는 물건까지 사도록 부추김을 당한다. 똑같이 필요 없는 물건이라 할지라도 우리 어머니의 경우와 현대 소비자의 경우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어머니에게 그것은 이차적인 행위이고, 상점가 사람들과의 친밀감이 우선이었으나 현대 소비자의 소비는 공허한 욕망을 물건으로 채우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소비는 채워지지 않는 생활을 반영하며 한편으론 정신적인 허기를 채우기 위한 보상행위로 변질된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이 소비병에서 탈출해야 한다.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소비행동 바꾸기

어떤 의미에서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유일한 답일지도 모른다. 대단히 어렵겠지만 소비사회에 일격을 가하고, 거기서 탈피하기 위해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방식을 통째로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혁명이나 전쟁 같은 방법은 현실적인 해법이 아니다.


2010년 미국에서 발표된 『스펜드 시프트』(존 거제마, 마이클 단토니오 저)라는 책이 힌트를 준다. 소비자가 현 상황에서 도망치는 제일 빠른 길은 구매를 중단하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구매행위 없이 살 수는 없다. 구매를 피핼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이름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스펜드 시프트다. 선택하는 물건을 바꾸고, 사는 장소를 바꾸며, 사는 행위와 관련된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비자 가진 근본적 문제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이 스펜드 시프트다.


예를 들어 바지가 낡았을 때 그것을 버리고 새로운 바지를 사는 것이 소비인데, 그 행동을 바꾸자는 주장이다. 새로운 바지 대신 덧깁기 위한 천을 사거나 바지를 버리고 잠방이나 그것을 대신할 만한 다른 옷을 입는 것도 하나의 스펜드 시프트다.


익명의 소비자라는 지위는 반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반은 기업, 주식회사가 만들어놓은 것인데, 소비 행동을 바꿈으로써 소비사회에 절어 있던 상태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느냐는 제안이다. 소비를 정말 바꿀 수 있는지 나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당 부분 가능했다. 게다가 아주 쉽게 할 수 있었다.


옷을 예로 들어보자. 유니클로가 대유행인지라 나도 유니클로를 종종 이용한다. 다만 지금은 이전보다 빈도가 훨씬 줄었다. 유니클로보다 싸고, 또 유니클로에는 절대로 없는 옷을 파는 헌옷 가게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 스펜드 시프트다. 그러는 사이 입을 옷을 어느 정도 갖추었으니 더는 필요 없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렇게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면 반드시 사야하는 물건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만 되면 부자가 아니어도 그럭저럭 살 수가 있다. 단, 빚만 없다면 말이다. 빚은 무섭다. 내게는 상당 금액의 빚이 있기 때문에 계속 일을 하고, 책도 많이 써서 돈을 벌어야 한다. 사실 일 따위 하지 않고 편하게 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


어찌 됐건 아까도 언급했다시피 소비자라는 타이틀은 반은 스스로 선택했고, 반은 기업 또는 시장의 조종을 받는 지위다. 거기서 탈출해야 한다. 거창한 결심까지는 필요 없다. 생각을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기업과 시장에 조종당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부터 함께 생각해보자.



소비 비즈니스의 격랑 속에서

사장이 된 아르바이트생

앞에서 잠시 언급했다시피 나는 대학 졸업 후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고 한동안 아르바이트생으로 생활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남에게 고용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제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때는 1977년, 석유 파동의 혼란 따위는 깡그리 잊기라도 한 듯 사회는 다시 평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일을 시작했지만 어딘가에 취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함께 어번 트랜스레이션이라는 번역회사를 차렸다. 창업 멤버는 나, 초등학교 시적부터 친구인 우치다 다쓰루, 아르바이트 하던 곳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는 중학교 동창 요코야마 도루 셋이었다. 경리를 보는 사원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20대 후반의 혈기 왕성한 남자 셋이 중심이었다.


얼떨결에 나는 사장직을 떠맡았다. 회사 설립자금은 부모님께 빌린 자본금과 전에 아르바이트하던 곳에서 알게 된 번역자에게 빌린 돈을 합해 40만 엔이 전부였다. 다들 빈털터리라 자기 자금도 없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들인지 알 수도 없는 청춘들에게 돈을 빌려줄 은행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피같은 돈 40만 엔으로 법인 설립 등기와 사무실 설립에 드는 경비를 충당했다.


회사 설립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예상대로 실적도 없는 애송이 셋이 경영하는 구멍가게 같은 회사에 선뜻 일을 맡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처음 한 달 동안 수주 건수는 겨우 두 건, 매출은 다 합해 십수만 엔이 고작이었다. 그런 상태로는 밥도 못 먹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우리는 곧 고급 주택가에 보습학원을 차렸다. 시로카네 세미나라는 학원이었다. 장소를 제공해준 사람은 당시 일본 5대 상사 중 하나로 꼽히던 아타카 산업의 과장이었다. 아타카 산업 과장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지인이었다.


그는 시로카네에 투자용 아파트를 구입한 직후라 대출금을 갚아야 했는데, 돈은 없어도 의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애송이들을 붙잡아 자기 아파트에 학원을 차려보지 않겠냐고 제안해준 은인이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살기 우해 돈이 필요했던 처지인지라 흔쾌히 그 말에 따랐다. 학원은 표면적으로는 입시학원이었지만 프랑스어와 영화도 가르쳤다. 입시는 그 방면의 프로인 친구가 철저히 주입식 교육을 실시했지만, 한편으로는 공부의 즐거움을 알게 하자는 생각에 교양, 취미 관련 강좌도 개설했던 것이다.


나와 우치다, 입시 강사를 한 사노라는 친구는 당시 오토바이를 배우기 시작했다. 가죽점퍼에 부츠를 신고 교실 문을 발로 차 열곤 했다. 그런 치기 어린 녀석들이 운영하는 학원이었지만 근처의 평판이 좋았다. 특히 학부모들에게 인기가 높아서 순식간에 학생 수는 100명까지 늘었다.


아타카 산업의 과장이 매달 갚아야 하는 대출금은 7만~8만 엔. 과장은 우리에게 집세 대신 그 돈을 갚게 하고 자신은 한 푼도 내지 않고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던 것 같다. 서로 손해볼 일 없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학원 수입에서 집세를 제한 나머지를 똑같이 나누자 내 월급은 금세 20만 엔을 넘었다. 당시 대졸 초임이 10만 엔 정도였으니 우리는 제법 돈을 버는 축이었다. 번 돈 중 5만 엔은 생활비로 썼고, 나머지는 회사 운영자금으로 돌려 번역회사를 연명했다. 회사를 설립한 다음 해인 스물여덟 살에는 결혼도 했다.


내 인생 암흑의 10년

생각해보니 1990년대 중반부터 사장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딱히 열심히 하지도 않았는데 회사는 설립 후 사반세기를 지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갈 수는 없다라는 초조함이 밀려오던 무렵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나는 1999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어떤 회사 설립 과정에 참가하게 되었다.


벤처기업의 창업과 성장을 지원하는 벤처인큐베이팅이 주 업무인 비즈니스 카페라는 회사였다. 2000년에는 비즈니스카페를 일본에서 지원하는 조직인 비즈니스 카페 재팬을 설립했다. 원래 나는 이 인큐베이팅 사업의 고문 역할을 제안 받았는데, 어느새 일본 조직의 사장은 히라카와 씨가 맡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처음엔 거부했지만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다는 욕구에 못 이겨 사장직을 수락했다.


2000년 무렵은 미국, 일본 할 것 없이 거품이 최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비즈니스 카페 재팬을 설립햇을 당시 출자를 받기 위해 몇 군데 설명회를 다녔을 뿐인데도 무려 5억 엔이나 되는 거금이 모일 정도였다. 출자에 응해준 이들 중에는 미국상공회의소 회원도 있었고, 일본의 은행과 통신회사도 있었다. 잘 써달라며 억 단위의 돈을 맡기는 사람들을 만나기는 내 인생 처음이었다. 과연 인큐베이팅 사업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10년 만에 5억 엔을 까먹고 회사를 접었다.


대충대충 일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열심히 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세상에 내놓지 못하는 사이에 인건비와 투자 실패는 산더미처럼 쌓였고 순식간에 돈이 날아갔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암흑의 10년이었다. 그 경험 덕에 나는 주주 주권이나 성장 지상주의의 한계를 통감하게 되었다.


2004년까지 나는 비즈니스 카페 재팬과 어번 트랜스레이션 두 회사의 사장을 겸했다. 전혀 다른 두 가지 일을 병행하기 위해 비즈니스 카페 재팬의 사무실을 어번 트랜스레이션 근처에 차렸지만 둘 다 잘하기는 힘들었다. 1999년부터 5년 동안은 비즈니스 카페 재팬에 매달리느라 어번 트랜스레이션의 일은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2004년이 되어서야 겨우 인수할 사람을 물색해 회사를 넘겼다.


주주 자본주의의 한가운데에서

비즈니스 카페 재팬의 사업은 한마디로 장래성이 있는 벤처에 출자를 하고, 출자한 대상 기업이 이익을 내면 배당 또는 주식매각을 통해 투자를 회수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벤처 캐피털이라 해도 좋고 투자회사 또는 인큐베이터라고 해도 무방하다. 투자한 회사가 성장을 해야 비즈니스 카페 재팬은 수익을 낼 수 있다. 그래서 우선은 흥미로운 사업 아이디어와 혁신적 기술을 가진 회사를 발굴해내는 일이 중요하다. 아이디어와 기술을 씨앗 단계부터 키워가기 위해서다.


순조롭게 출자로 이어지면 씨앗을 키우기 위해 출자자, 즉 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한다. 사업 내용에 대해 이것저것 주문을 하고 임원도 파견하며 기업 간 매칭도 한다. 여러 방법을 동원한 뒤 투자한 자본으로 최대의 이익을 끌어내는 것이 비즈니스 카페 재팬이 하는 일이었다.


요컨대 이 사업은 주주 자본주의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주주 입장에서는 이익의 극대화만이 목표인지라, 주주의 당연한 권리로서 출자한 회사가 이익을 올리기만을 기대하고 요구했다. 가끔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투자펀드사도 하는 일은 거의 비슷하다. 출자한 기업에 대해 우리가 주주로서 요구한 사항은 우리의 주주로부터 요구받는 내용이기도 했다. 팍팍 투자하고 팍팍 불려라라는 요구에 따라 우리는 5억 엔이라는 거금을 줄줄이 출자하는 데 썼다. 출자한 회사는 20여 군데나 됐다. 놀랍게도 그 모두가 몇 년 만에 사라졌다. 어느 한 군데도 제대로 된 이익을 내지 못한 채 도산했던 것이다.


안목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도 틀린 지적은 아니다. 하지만 나 혼자서 투자 대상을 정한 것은 아니었다. 투자 위원회를 만들고 유명한 IT 기업의 경영자와 인터넷 전문가, 대형 광고회사의 컨설턴트가 구성원으로 참여했다. 그런 성공한 자들의 눈에 든 회사가 모조리 무너진 것이다.


세상에는 잘나가는 기업의 경영전략을 최고로 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같은 전략과 이론을 적용한다고 해서 후발 주자가 선발 주자의 영광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점은 분명하다. 결국 회사가 잘되느냐 안되느냐는 사람에 달린 것이고, 대부분 성공에는 운이 따라야 한다. 투자회사는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대더라도 본질상 도박과 별반 다르지 않다. 5억 엔이라는 거금과 10년이라는 시간을 낭비하면서 배운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참 오래도 걸렸다.



소비자 마인드를 넘어서

소상인을 덮친 소비세 인상

요즘 나는 고령화 사회를 실감하고 있다. 워낙 동네 목욕탕을 좋아하는 탓에 짬이 날 때마다 들러 피로를 풀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동네 목욕탕에 오는 고객의 연령층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60세를 넘은 내가 최연소일 정도로 주위를 둘러보면 죄다 노인이다.


내가 목욕탕에 가는 시간대가 평일 낮이었던 탓도 있는데, 실제로 낮에 동네를 돌아다녀보면 지나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노인이다. 그들은 직장을 은퇴하거나 생업에서 손을 놓아 수입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앞으로 매년 인구의 몇 퍼센트씩 늘어날 것이다. 경기는 침체의 늪을 헤매는데 사회는 늘어나는 노인을 부양해야 한다.


또 한 가지 걱정은 동네 가게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 집 근처의 동네 목욕탕도 하나, 둘 문을 닫고 있다. 목욕탕 요금은 어른이 450엔으로 커피 한 잔 값이다. 하루에 100명이 다녀가도 목욕탕의 수입은 4만 5천 엔에 불고하다. 넓은 목욕탕에 물을 채우려면 수돗물 값, 가스 값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임대했다면 임대료까지 감당해야 하므로 경영적으로 힘들 것이 뻔하다. 목욕탕에는 기력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앉아 카운터를 지키고 있다. 그 분들이 돌아가시면 그 뒤를 잇는 사람도 없을 테니 목욕탕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요즘은 개인이 경영하는 동네 찻집도 위기를 맞고 있다. 직접 찻집을 운영해본 경험에 따르면 요즘 동네 찻집만으로 생계를 꾸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한 잔에 500엔 하는 커피가 하루 몇 잔 안 팔린다. 게다가 커피 체인점 중에는 200엔이나 300엔이면 마실 수 있는 곳도 있으니 개인 찻집이 대적할 방법이 없다. 집세도 오르고, 물가도 오르는데 가격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가게를 접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2014년 들어서는 소비세도 올랐다. 세금이 올랐다고 개인 가게가 커피 한 잔 가격을 올릴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어렵다. 목욕탕도 가격을 올리지 않고 소비세 인상을 감수하려 무진 애를 쓰는 모습이다. 고객이 서민층인 동네 가게는 가격인상을 엄두도 못 낸다. 소상인들의 가게는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하층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 모든 동네 가게가 마찬가지 상황이다. 구멍가게도 그렇고 문방구도 그렇다.


한편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산업은 도태되어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경제성장론자들은 부가가치도 뭣도 없는 동네 목욕탕과 찻집까지 살릴 수는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들은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하면 농업도 포기할 사람들이다. 소상인이 존속하는 데 위협을 받는다면 큰 문제다. 부가가치가 높은 업태만 남기다 보면 사회와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돈의 부침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도 생활의 질을 유지하려면 물가의 안정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는 그 정반대 방향에 전력을 쏟고 있다.


미국의 방식을 흉내 내듯이 돈을 찍어 뿌리고, 돈의 가치를 떨어뜨려서 인위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려 한다. 득을 보는 것은 은행, 대기업, 부유층이다. 서민 입장에서는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제자리에 멈춰 있으니 결국 그 둘의 격차만 확대되는 상황을 떠안게 되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 일본에서도 일어난다는 말이다.


올림픽을 개최한다고 낡은 시설을 부수고 다시 짓는 것도 문제가 있다. 현재 있는 것을 쓰면 될 텐데, 돈을 회전시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크랩 앤드 빌드를 하려는 것이다. 지금 일본은 대단히 위험한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나는 요즘 도쿄 오타구에 있는 인공섬 게이힌지마를 흥미롭게 취재 중이다. 1970년대 도쿄도에서 소음과 배기가스 등 공해 피해를 줄이기 위해 동네 공장을 차례차례 이전시켜 조성한 공업지대다.


그 소규모 공장들이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금속가공 공장은 당초 이전한 24개 사 중 현재 7개 사만 남아 있다. 거품경기를 타고 경영을 제대로 못한 기업들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자취를 감췄다. 제 분수를 넘어 중국으로 진출하거나 과잉 설비투자를 한 탓에 투자금을 회수하지도 못하고 도산한 것이다.


아직 남은 곳은 거품경기에 부화뇌동하지 않았던 꾸준하고 견실한 기업들이다. 다만 그런 회사가 돈을 잘 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은 여전히 어려운 환경에서 조업을 하지만 제조업 장인으로서의 자부심만은 굳건하다. 그 기업들을 보면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거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돈이란 것은 언제나 부침을 거듭한다. 그 흐름에 생활과 일을 맞추려 하면 실패한다. 부침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혜다.


다양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세상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사는 세상이다. 못난이나 옹고집쟁이 등 온갖 특이한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 있는 사회야말로 좋은 세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돈만이 지표가 되고, 돈이 없는 사람을 소외하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어렴풋이나마 세상은 돈이 다가 아니다라고 느끼면서도 비난 받을까 두려워서 표현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고립이 두려워서 스스로 익명의 소비자가 되려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돈만이 힘을 쓰는 세상에서 돈을 좇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가거나, 설사 거기서 벗어났다 해도 공상 속에서 자기만족에 빠져 산다. 아무도 지지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가 조금씩만 손을 내밀면 앞이 안 보이는 쳇바퀴로부터 자진해서 내릴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화가 친구는 제대로 일도 하지 않고 그림만 그린다. 그림을 파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수입은 거의 없다. 그래도 살아 있다. 그림을 가지고 가면 그 대신 생활에 필요한 소소한 돈을 주는 친구가 주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직 소비문명에 빠져 있어서 그를 만날 때마다 "돈을 빌리면 안 된다. 그냥 받아야지"라는 설교를 듣는다.


그는 현대의 살아 있는 요타로다. 그가 모두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돈은 결국 살아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화가 친구의 사례는 극단적이지만 밭이 있어서 식량을 얻을 수 있거나 생계를 이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 현금 수입이 없어도 살 수 있다.


문제는 현대 소비사회의 한가운데에 익명의 존재로 내던져진 개인이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생각을 주입받는 것이다. 돈이 없어도 사는 방법은 있다. 오히려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가 위축되어가는 미래의 사회에서는 돈에만 기대서는 곤란하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야 살 수 있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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