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분야 스테디셀러 가운데 하나인 『마케팅 어드벤처』의 후속작으로 전편이 마케팅대중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면, 후편에서는 성공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쳐 시장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브랜드가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공고히 하기까지의과정과 전력을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일본, 미국, 유럽 등 다양한 나라와 문화권의 스테디셀러 브랜드를 다루고 있으며, 캐논, 질레트,스와로브스키 등 우리에게 익숙하고 잘 알려진 제품 뿐 아니라 뉴욕 양키스, 에딘버러 축제, 뚜르 드 프랑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과 같이 100년이상 장수하는 문화 이벤트의 마케팅 사례도 소개하고 있다.
전개 방식도 독특해 유명 스테디셀러 제품의 마케팅 스토리를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이야기형식을 빌어 서술하고 있다. 전편에 등장했던 이과장과 마대리는 베스트셀러 공기청정기 개발로 이팀장과 마과장으로 승진했으나 이를 스테디셀러로장수시키기 위한 고민에 봉착해 있는데, 이들이 스테디셀러의 비결을 배우기 위해 일본 출장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실제 출장을준비하는 듯한 객관적인 자료와 현지에서 마케팅 포인트를 하나씩 짚어 관찰하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각 나라, 각 브랜드만의 파워풀한 마케팅 전략을습득, 비교해 볼 수 있게 했다.
■ 저자 김민주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시카고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은행과 SK그룹, SK㈜를 거치며 금융 및 실물분야의 다양한 리서치 업무와 신규사업개발 업무를 담당했다. SK계열사 ㈜더컨텐츠컴퍼니 대표이사, ㈜골든민커뮤니케이션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으며,현재 ㈜리드앤리더 대표이사이다. ㈜리드앤리더는 사례연구 중심의 비즈니스 지식 사이트인
■ 차례
서문
장수 브랜드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일본을 가다
편의점 왕국의 제왕 -세븐일레븐 저팬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초대 합니다 - 다카라
여성의 몸과 함께 한 55년 - 와코루
일본 최고의 하이테크기업 - 캐논
일본의 토종 위스키 브랜드 - 산토리
일본의 ‘資生堂’에서 세계의 ‘Shiseido’로 - 시세이도
지퍼하나로 세계를 장악한 작은 거인 ?YKK
미국을 가다
‘서비스 신화’의 주인공-노드스트롬
소비자의 충실한 벗 - 컨슈머 리포트
어덜트 디즈니, 플레이보이의 Up&Down -플레이보이
세계최고의 츄잉껌 브랜드 - 리글리
면도기 하나로 세계를 제패하다 - 질레트
위험한 고객들을 환영합니다 - 프로그레시브
미국최고의 명문 야구 구단 - 뉴욕 양키스
유럽을 가다
축구 클럽이 아니라 기업!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영국 유통업계의 새로운 신화 - 테스코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 드비어스
축제가 도시를 키운다 -에딘버러 축제
스포츠와 마케팅의 절묘한 조화 - 뚜르 드 프랑스
크리스털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다 - 스와로브스키
명품초콜릿의 최고급 브랜드 전략 - 고디바
이탈리아의 개성이 듬뿍 담긴 디자인의 메카 - 알레시
전 세계 출판인들의 잔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마케팅 어드벤처 2를 마치며
스테디셀러 브랜드의 조건
참고문헌
마케팅 어드벤처 2
여성의 몸과 함께 한 55년 -와코루
1949년 선보인 일본 최초의 브래지어
와코루는 1946년 창업자인 츠카모토 고이치에 의해 ‘와코 쇼지’라는 이름으로 교토에서 출발했다. 액세서리, 귀급속 판매 등을 통해 사업 수완을 발휘한 고이치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던 중 ‘서양식 속옷’ 사업을 생각하게 된다. 그때까지 서양식 속옷에 익숙하지 않았던 일본 여성들이 1949년 10월에 백화점 박람회에 출시한 브래지어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본 최초로 제조되어 판매된 ‘브라 패드(Bra Pad)’였다. 1952년에는 일본 최초로 란제리 쇼를 개최하여 여성용 속옷 시장에서 선두의 이미지를 굳혔다. 1964년 회사 이름을 ‘와코(Waco)’에서 ‘와코루(Wacoal)’로 바꾸고 ‘인간과학연구소’를 설립하여 과학적인 속옷 개발을 시작했다.
스테디셀러의 비결
-수준 높은 R&D에 바탕을 둔 기능성 속옷 개발
와코루의 역사는 일본 속옷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히트 상품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여성들의 필요에 맞는 상품을 내놓아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이는 인간과학연구소의 역할이 컸다. 이 연구소에는 상상을 초월한 다양한 연구와 시험이 시행되는데, 예를 들어 속옷의 기온, 압력, 감촉에 따라 피부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나이가 들면서 여성들의 신체가 어떻게 변하는지 등을 다각도로 연구한다. 매년 1천 명의 데이터가 축적되며, 현재 3만 명이 넘는 여성들의 신체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다. 이 연구소의 연구 결과는 1:1 마케팅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딱 한 사람에게만 맞는 맞춤형 브래지어 생산이 가능하다. ‘두브레브(Dubleve)’ 브랜드는 고객이 자신의 치수를 재서 알려주면 그에 맞는 브래지어를 제작해 준다. 인간과학연구소를 통해 와코루는 미적인 아름다움보다 기능성을 강조한 속옷들을 개발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속옷만큼 기능과 착용감이 중요한 옷은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은 것이다.
-유통 채널의 다양화 -SPA 숍
1980년대까지 와코루의 중심 유통망은 백화점과 속옷 전문점이었다. 백화점에서 팔리는 고급 이미지를 구축하여 30~50대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런 유통망은 한정된 시장 규모와 급격하게 변하는 시장 환경에 부적합했다. 특히 새로운 소비 세력으로 등장한 20대 여성 고객들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유통 채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SPA(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숍’이다. 제3자를 거치지 않고 와코루가 직접 고객들과 만날 수 있는 브랜드숍의 개념으로 2001년 처음 오픈되어 2003년에는 일본 전역에 67개로 확대되었다. SPA 숍에서는 20대 젊은 여성들을 타깃으로 저렴한 가격에 디자인을 강조한 속옷을 팔고 있다. 총 7개의 브랜드로 운영되고 있는데, 각각의 브랜드는 특정 타깃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콘셉트 별로 구성되어 있다. SPA 숍은 와코루가 현장에서 수집한 고객들의 의견을 재빠르게 제품에 반영하여 출시하는 데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인터넷 사용 인구가 많아지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온라인 쇼핑몰과 카탈로그 통신 판매로 유통망을 확대했다. 기존 백화점과 전문점 중심의 유통 채널에서 탈피해 SPA 숍, 온라인, 카탈로그 등의 유통망을 다양화함으로써 와코루는 다양한 고객층과의 접점을 시도했으며, 그 결과 시대와 고객층이 변해도 계속 시장 1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역사가 오래된 기업들이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는 자신의 강점을 전통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바꾸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와코루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전통을 바꾸어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다양한 마케팅 활동의 전개
사업 초반에 이루어졌던 마케팅은 주로 교육적인 목적이었다. 서양식 속옷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일본 여성들에게 속옷의 장점 및 필요성을 매장에서 란제리 쇼를 개최하거나 『와코루 뉴스』와 같은 홍보성 잡지를 발행해 알려주었던 것이다.
이런 교육적 마케팅의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브래지어와 직접 관련이 있는 여성들의 유방암 예방을 위한 마케팅도 활발하다. 의학적 연구를 지원하는 기관을 세웠는가 하면, 유방암으로 가슴을 제거한 여성들을 위해 1974년부터 ‘리맘마(Remamma)’ 프로젝트를 시행해 오고 있는데, 수술로 인해 가슴이 없는 여성들을 위해 집에서 무료 컨설팅을 해주고 그에 맞는 브래지어를 만들어 주고 있다. 또한 2000년부터는 미국의 유방암 재단인 ‘핑크 리본’ 캠페인에 참가하여 유방암의 조기 발견과 예방에 힘쓰고 있다.
지역 사회를 위한 공익 마케팅도 빼놓을 수 없다. 단순히 속옷만을 만드는 회사가 아닌 지역사회 더 나아가 일본 사회와 함께 발전하고 커가는 기업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1978년에 세워진 KCI(Kyoto Costume Institute)는 다양한 문화 활동을 지원하면서 복식 및 속옷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출판물로 출간하는 기관이다. 1985년 도쿄에 세운 스파이럴 빌딩은 콘서트, 갤러리 등 각종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플래그십 스토어의 개념에 공익적 개념을 더 첨가한 형태로 카페, 레스토랑, 뷰티 살롱 등 부가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지역 주민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으며 그 지역의 명소로 부상했다.
사업 다각화와 해외 시장 진출
-속옷 제작의 노하우를 활용한 사업 다각화
보디 디자이닝(Body Designing). 이 말은 와코루의 사업 방향을 한 마디로 나타내주는 콘셉트이다. 지금까지 속옷만을 만들던 노하우를 바탕으로 인간의 신체 전체를 디자인해 주는 회사로 탈바꿈하겠다는 뜻이다. 스포츠 의류에 진출하거나 ‘웰빙’의 개념을 강조한 브랜드 출시가 모두 이런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현재 와코루는 여성용 속옷 외에 아동용, 남성용 속옷 사업부 등 모두 7개의 사업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업부는 철저히 속옷과 관련된 사업을 중심으로 다각화한 것이 특징이다.
2003년 매출액 결산 보고서를 살펴보면 아직까지는 속옷, 란제리가 71.3%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와코루는 각 사업부 별로 40개가 넘는 브랜드를 가지고 있지만 여성 속옷의 브랜드 개수가 가장 많다. 그리고 최근에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스포츠와 남성 속옷 브랜드(3개)와 청소년 전용 속옷 브랜드도 생겨났다. 최근에 가장 공을 들이는 다각화는 스포츠 의류 쪽이다. 인간과학연구소까지 설립하여 R&D를 통한 기능성 속옷을 만들던 노하우를 발휘하여 스포츠 의류로 진출한 것이다. 운동복, 아웃웨어 등을 만드는 CW-X 라인은 철저히 과학적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다. CW-X 라인은 유명한 스포츠 선수를 기용한 스타 마케팅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다른 업종에 있는 회사들과 제휴를 통한 사업 다각화도 활발하다. 생활용품 회사인 P%G와는 여성의 생리 기간 동안 입을 수 있는 속옷을 함께 판매하는 프로모션을 했는가 하면, 나이키 저팬과는 2000년에 여성 수영복 라인을 만드는 제휴를 맺기도 했다. 유럽에서도 2003년부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스포츠용품 체인인 데카슬론(Decathlon)과 제휴를 맺어 사이클복 전 라인을 생산하고 있다.
-국내 시장을 발판으로 한 해외 시장 진출
와코루는 무작정 해외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후 다른 해외 시장으로 진출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성장 속도는 느리지만 그만큼 해외 시장 진출의 실패 위험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해외 시장 진출 역사는 1970년 아시아 국가인 한국, 태국, 대만에 합작 투자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1993년 신영사에 직접 지분을 투자하는 방법으로 ‘신영 와코루’를 설립했다. 아시아 시장에서 톱 브랜드로 성공한 와코루는 다음 타깃 시장을 미국으로 잡고 1983년 ‘와코루 아메리카’를 설립했다. 미국 시장 진출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1990년에는 패션의 본 고장이라 일컫는 프랑스 시장에 진출했으며, 2002년 영국에 자회사를 설립하면서 전 세계 주요 도시 어디서나 와코루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전 세계 10개국에 진출해 전체 순이익의 11%를 해외에서 거둬들이고 있다.
하지만 각 나라별로 와코루의 진출 전략은 조금씩 다르다. 특히 미국에서는 일본 내에서 와코루가 가지고 있는 대중적 이미지 대신 고급화 전략으로 하이 엔드(High-end)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 이를 위해 와코루는 도나 카란과 제휴하여 DKNY 브랜드로 와코루의 속옷을 판매하고 있다.
면도기 하나로 세계를 제패하다 -질레트
매일 아침 남자들의 거친 수염을 말끔하게 깎아주는 면도기, 한 번 사용하고 쓰레기통에 휙 던져지는 일회용 면도기, 여성만을 위한 면도기까지 모두 질레트 컴퍼니에서 발명되어 만들어진 제품이다. 창업자 킹 질레트가 기차 시간에 늦기 않기 위해 서둘러 면도를 하다가 얼굴을 베인 후 이발사가 빗으로 머리를 누르고 이발을 하는 데서 힌트를 얻어 면도기에 빗 역할을 하는 받침을 붙여서 안전면도기를 개발했다. 얼굴이 베이지 않는 면도기를 세계 처음으로 발명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현재 전 세계 12억 명이 사용한 일회용 안전면도기가 탄생했다.
세계인이 사용하는 안전한 면도기의 탄생
1901년 안전면도기 개발을 시작으로 킹 질레트는 미국 보스턴에 공장을 차려 자신의 발명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판매 첫해이던 1903년에는 단 51개의 면도기와 168개의 면도날을 파는 데 그쳤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알려지면서 면도기가 무려 90,884개, 면도날이 123,648개나 팔렸다. 판매량이 급증은 1903년 10월에 처음으로 실시한 신문 광고 덕분이었다. 질레트는 제품 개발에도 주력했지만 마케팅에도 일찍 눈을 떴다. 1904년에는 안전면도기 특허를 취득했고, 1905년부터는 면도날 포장에 창업자 질레트의 초상화가 들어가기 시작한다.
질레트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군납 전략으로 큰 성장을 하게 된다.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에게 350만 개의 면도기와 3,600만 개의 면도날을 납품한 것이다. 전쟁 기간, 질레트 면도기의 편리함을 경험한 군인들은 전쟁 후 고향에 돌아와서도 질레트를 계속 사용했다. 질레트의 충성 구매자가 된 것이다. 그 후 질레트는 미국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해 주는 통과의례와 같은 상징물이 된다.
1932년에 나온 ‘블루 면도기’는 1960년대까지 질레트의 표준 제품이 되었으며, 그 후 면도날과 면도기로 이루어지는 면도 시스템을 처음 사용하며 질레트만의 고유 전략을 선보였다. ‘면도 시스템’이란 우선 면도기를 개발한 후 면도 시스템을 촉진시키기 위해 이 면도날을 낮은 가격으로 파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맞는 면도날이 개발되어 소비자들에게 면도날 재구매를 통해 수익을 내는 것을 말한다. 질레트 사는 이런 면도기 시스템 외에도 쉐이브 크림, 데오드란트, 모발제 등의 보완 제품을 판매하여 부가적 이익을 냈다.
-‘센서’의 개발로 확고부동한 최고의 자리를 굳혀
그러나 질레트가 항상 성공가도만을 달려왔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들어 빅(Bic), 윌킨슨 스워드(Wilkinson Sword)와 같은 경쟁 기업이 등장해 일회용 면도기를 출시한 것이다. 경쟁사를 따라 일회용 면도기를 생산하게 된 질레트는 가격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일회용 면도기가 큰 인기를 얻음에 따라 질레트의 내부 수익성은 크게 저하되었고, 시장점유율 하락 역시 불가피했다. 더욱 큰 문제는 소비자들의 일회용 면도기 사용이 늘어나면서 질레트 기업의 이미지까지 훼손되어 값싼 일회용 면도기를 생산하는 기업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일회용 면도기 시장으로 경쟁사들이 몰리면서 제품 자체보다는 가격 경쟁으로 치닫고 있다는 문제도 발생했다. 이에 질레트는 장기적인 목표 아래 면도기에도 첨단 기술을 접목하자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고품질의 면도기를 생산하여 ‘최고의 남성 제품’ 이미지와 면도 제품에서도 품질과 기치의 중요성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센서(Sensor)이다. 결과는 대히트였다.
질레트 면도의 스테디셀러 전략
-자사의 기존 제품을 경쟁사 제품으로 생각하라
질레트가 100여 년이란 오랜 기간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선두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제품 개발을 하여 자기 자신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특히 두 개의 면도날이 나란히 놓인 양날 면도기, 스프링의 이용, 얼굴 곡선의 상태를 감지하는 센서 면도기, 여성용 면도기와 같은 신제품을 최초로 시장에 내놓았다. 이런 질레트의 자기 공격 전략은 5년마다 수익의 40%는 신제품에서 나와야 한다는 기술 전략에서 나왔다.
보스턴에 위치한 질레트 회사 연구소에서는 사원들이 매일 아침 면도를 하지 않은 채 출근하여 세면대 앞에 줄선다. 각자 면도를 한 후 회사에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서이다. 1999년에 은퇴한 알프레드 제인 전 회장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얼굴 한쪽은 자사 제품 면도기로, 다른 한쪽은 경쟁사 제품으로 면도를 했다고 한다. 자사 제품을 몸소 사용해봐야 기존 제품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또 신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최고 히트 상품, 센서
센서는 출시된 첫 해인 1990년도에 예상보다 30% 초과한 1억 5천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센서 프로젝트는 무려 13년의 개발 기간과 7천 5백만 달러의 연구개발비, 1억 1천만 달러의 광고 예산 등 총 3억 1천만 달러가 투여되어 탄생되었다. 이런 센서의 성공에 자극받아 경쟁자들도 새로운 제품을 출시했다. 미국 내 시장점유율 2위인 쉬크는 센서에 대항하는 트레이서를 발표했지만 센서의 고객 일부만을 끌어오는 데 만족해야 했다. 유렵 지역 경쟁자였던 윌킨슨 스워드도 신제품을 발표했지만 오히려 일부 사업부가 질레트에 인수되고 말았다. 2002년에는 새롭게 업그레이드한 ‘센서3’라는 일회용 면도기를 출시했다.
-여성용 면도기를 최초로 개발, 시행착오 끝에 성공
질레트는 세계 최초로 여성을 위한 면도기도 출시했다. 이 여성용 면도 제품이 나오기 전까지 여성들은 사용 용도와 신체 구조가 다르지만 어쩔 수 없이 남성용 면도기를 잠시 빌려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질레트의 여성 면도기에 대한 관심은 1963년 레이디 질레트 레이저 시절로 올라간다. 그 후 1975년 출시된 여성용 면도기 데이지까지는 진정으로 여성을 위한 면도기라기보다는 남성용 면도기에 컬러만 여성 취향의 핑크 컬러로 바꾼 제품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안전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질레트는 여성의 사용 목적과 환경, 그리고 신체 특성에 맞도록 디자인을 근본적으로 다시 설계했다. 이 결과 탄생한 것이 1993년도에 출시한 ‘여성용 센서’이다. 센서는 광고가 채 나가기도 전에 33%의 시장을 점유했으며, 미국 내에서 첫 판매 후 6개월간 760만 개가 팔릴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2001년에는 여성용 센서 면도기를 업그레이드하여 삼중 날을 가진 ‘질레트 비너스’를 발표했다.
-‘마하3’로 선두를 지켜라
센서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미국 면도기 시장의 67%를 장악한 질레트는 1999년 세계 최초로 삼중 면도날인 ‘마하3’를 발표함으로써 또 한 번 끊임없는 신제품 개발의 철학을 보여준다. 처음 마하3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기존의 이중 면도날인 센서가 잘 팔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껏 면도날이 하나 추가된다고 해서 면도 기능이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6년이라는 기간 동안 7억 5천만 달러의 R&D 비용을 투자해 탄생한 마하3는 다시 한 번 질레트의 우수한 기술력을 과시했다. 질레트는 마하3를 출시하면서 또 한 번의 도전을 했다. 많은 기능이 첨가되긴 했지만 기존의 센서보다 50%나 비싼 1달러 60센트의 고가 전략을 내세운 것이다. 성능이 뛰어나다면 가격이 비싸도 소비자들이 구매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마하3는 실패할 것이라는 경쟁사들의 바람 섞인 예상을 보기 좋게 깨고 6개월 후 미국에서 시장점유율 1위 제품이 되었다. 질레트는 마하3의 성공으로 지난 1962년 이후 가장 높은 70.7%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한 것이다.
경쟁사와의 싸움에서 지지 않는다
역사가 100년이 넘는 질레트에게도 강력한 경쟁자들 때문에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다. 그 중에 이기고 지는 것을 반복한 프랑스 회사인 빅과의 싸움은 유명하다. 첫 번째 전쟁은 주력 제품인 면도기 시장이 아니라 일회용 라이터 시장이었다. 1970년대 초 질레트는 첫 번째 일회용 라이터인 크리켓(Cricket)을 출시했으나 빅이 ‘나만의 빅을 켜세요(Flick My Bic)’라는 캠페인으로 도전해 왔다. 결국 질레트는 채 10년도 버티지 못하고 시장에서 크리켓을 철수키고 매각했다.
빅과 질레트의 2차 전쟁은 일회용 면도기 시장에서 벌어졌다. 1970년대 경쟁사인 빅이 먼저 일회용 면도기를 선보였다. 이에 질레트는 미국 시장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1976년에 양날이 달린 일회용 면도기 ‘굿 뉴스(Good News)’를 출시해 미국 시장의 60%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은 낮은 수익률이었다. 빅이 면도기 시장을 고품질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바꾸어 놓아 질레트의 막대한 R&D 투자가 오히려 발목을 잡히는 약점이 된 것이다.
질레트는 빅과의 전면 경쟁을 포기하고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게 된다. 가격 경쟁에 치중하는 것보다 전통적으로 질레트가 강점이 있는 R&D 투자와 제품 기능과 면도의 질을 높일 수 있는 혁신적인 제품을 고가에 출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 후 연속적인 신제품 출시로 질레트는 다시 한 번 면도기 산업에서 선두 자리를 탈환할 수 있었다. 질레트는 경쟁자를 무작정 계속 따라가지 않고 자신만의 핵심 역량을 다시 돌아와 면도기 황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100여 년간 축적된 공격적인 마케팅 노하우
질레트의 세 번째 성공 전략은 100여 년간 쌓아온 질레트만의 마케팅 노하우이다. 질레트는 사업 초기 마케팅을 강조했다. 그래서 제품개발 비용만큼이나 마케팅 비용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2003년의 경우 매출 93억 달러의 9%에 해당되는 8억 4천만 달러를 광고에 투자했다. 질레트는 지금까지 가격을 강조하는 대신 ‘남성과 함께 하는 최고의 제품’이란 콘셉트를 유지해 오고 있다. 또한 경쟁 제품을 사용하고 있는 소비자 40만 명을 대상으로 한 프로모션도 유명하다. 이들에게 무료로 면도기와 3개의 교체용 카트리지, 1달러 할인 쿠폰이 들어 있는 우편물을 배송한 것이다. 이는 경쟁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들이 센서를 직접 체험하도록 자사 제품의 우수성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질레트=스포츠’라는 등식을 꾸준히 전개
질레트는 사업 초기부터 남성의 대표적인 제품인 면도기와 남성적인 스포츠를 적극 연계시키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1910년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이용한 광고를 시작으로 월드시리즈의 라디오 중계와 TV 중계를 할 때 독점 광고를 하기도 했다. TV가 등장하고 난 이후부터는 복싱 경기를 지속적으로 스폰서했다. 1980년부터 월드컵에 참여하기 시작해 파트너로서 지속적 활동을 하고 있다. 꾸준히 마케팅에 스포츠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질레트=스포츠’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도록 남성 소비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성공적인 사업 다각화
현재의 질레트 전체를 두고 볼 때 면도기의 기여도가 제일 높다. 하지만 질레트는 면도기 제품에만 머무르지 않고 틈틈이 다양한 제품군으로 사업을 확장해 왔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현재 질레트는 브라운 전기용품과 화장품 및 화장도구, 파커와 워터맨 같은 필기구, 오랄비 칫솔, 듀라셀 건전지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업 다각화 과정에도 질레트가 그동안 축적한 경영 노하우가 발휘된다. 백년 가까이 쌓은 마케팅 노하우와 혁신적인 조직 문화, 과감한 기술 개발을 통해 기존의 브랜드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독일 브랜드인 브라운을 인수하여 마케팅과 기술을 가미해 유럽 브랜드를 넘어서 세계적 브랜드로 만들어 낸 것이 그 예이다.
질레트가 다른 회사를 인수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인수할 브랜드의 가치이다. 그 다음은 기존의 소매 유통망을 강화시킬 수 있는가이다. 즉,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의 계산대 앞의 매대에 질레트 면도기는 물론 오랄비 칫솔, 듀라셀 건전지가 놓여 있으면 소비자의 눈길과 손길을 더 잡게 된다는 것을 질레트는 잘 알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1996년 썬파워, 1999년 로케트의 건전지 상표권도 사들였다. 물론 사업성이 떨어지는 사업 부문은 과감하게 매각을 했다.
듀라셀, 오랄비, 파커 등은 각각 건전지, 칫솔, 만년필 분야에서 시장점유율 1, 2위를 다투고 있다. 면도기는 100년 역사의 스테디셀러에 걸맞게 전 세계 시장의 73%를 점유하고 있으며, 칫솔 시장은 34%, 건전지 시장은 39%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전 세계 매출을 대륙별로 보면 북미 38%, 유럽 32%, 아시아와 아프리카 19%, 남미가 11%로 분포되어 매출이 지역적으로 잘 균형 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질레트는 2003년 브랜드 가치 전 세계 8위, 매출 93억 달러(약 11조 원), 순익 20억 달러(약 2조 3천억 원)를 올렸으며, 매일 아침 세계 220개국에서 12억 명이 질레트 면도기를 사용한다.
크리스털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다 -스와로브스키
스와로브스키의 탄생
현재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샹들리에 제품의 80%는 스와로브스키(Swarovski)라는 회사의 제품이다. 뉴욕 카네기홀이나 오페라 하우스,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전, 사우디아라비아 왕궁에도 샹들리에가 있는데, 이 제품들이 바로 스와로브스키 제품이다. 물론 부분적으로 티파니나 입으로 불어서 만드는 블로우(Blow) 방식의 크리스털인 바카라 브랜드가 있기는 하지만 독특한 크리스털 커팅 기계로 만든 스와로브스키는 이들을 멀찍이 따돌리고 있다.
지금은 체코에 속해 있는 보헤미안 지방은 17세기 초부터 유리 제조와 유리 커팅 기술로 유명한 유리 산업의 중심지였다. 유리 커팅 기술자를 아버지로 둔 다니엘 스와로브스키는 유리에서 크리스털을 직접 손으로 만들려면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공업 방식에서 탈피하여 크리스털을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크리스털 커팅 기계를 발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기술이 다른 곳으로 유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1895년 오스트리아 서부의 알프스에 둘러싸인 티롤 지방의 와텐스라는 작은 마을로 이주해 크리스털 커팅 공장을 세웠다. 이 회사의 특수 절단기는 아직도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 그 후 크리스털을 연마하는 기계도 발명해 오늘날까지 연마 기계의 대명사라는 명성을 지니고 있다.
-우연히 만들어진 크리스털 마우스
그런데 우리들이 스와로브스키의 크리스털 제품 하면 맨 처음에 떠오르는 것이 동물 형상의 크리스털 제품들로 동물 형상이 무려 130여 종에 이른다. 현재 스와로브스키가 사용하는 심볼도 1988년 에델바이스에서 백조로 바뀌었다. 에델바이스는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의미가 있었지만 세계화를 꿈꾸는 스와로브스키가 순수하고 우아한 백색 이미지를 듬뿍 담고 있는 백조로 그 심볼을 바꾼 것이다. 이런 기업 이미지 전환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스와로브스키의 첫 번째 라인인 실버 크리스털 라인이 생기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이 회사가 있는 티롤 지방의 인스부르크에서 1976년 동계 올림픽이 열렸는데, 이 회사가 올림픽 기념물을 만들게 되었다. 때마침 호텔 천장에 매달려 있던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일부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 크리스털 조각들을 접착제로 붙여 마우스 형상을 만들어 보았는데 정말 깜찍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동물 제품인 크리스털 마우스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식기나 고급 장식품으로만 쓰였던 크리스털 제품이 아닌 동물 모형을 만드는 새로운 라인이 형성된 것이다. 특히 이때 사용된 투명 접착제는 그 뒤로 이 회사의 핵심 역량이 되었다. 동물 모형 제품이 인기를 끌자 스와로브스키는 실버 라인보다 한 급수 위의 제품을 만들어 내는 크리스털 파라다이스 라인을 새로 만들었다. 여기서 나오는 제품들은 실버 라인 제품보다 훨씬 더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만든 크리스털 데코를 비롯해 한정판매 제품들은 그 희소가치 때문에 중고 제품이라 하더라도 소더비 같은 경매에서 원래 가격보다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지포라이터나 스와치 시계가 예술 작품으로 인정되어 경매에서 고가로 거래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또 다른 라인인 패션 주얼리 라인은 198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제일 마지막에 나왔다. 특히 스와로브스키 코리아의 경우 패션 주얼리 라인이 매출의 90%나 차지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다.
-사업 다각화에 성공
현재 스와로브스키는 컷 크리스털 완제품뿐만 아니라 주얼리와 의류 제작을 위한 ‘Swarovski Component’, 크리스털 커팅 기계를 생산하는 ‘Tyrolit’, 크리스털 조명 제품 제작을 위한 컴포넌트를 공급하는 ‘Strass’, 광섬유를 이용한 사업인 ‘Swarolite’, 망원경 생산의 선두주자인 ‘Swarovski Optics’ 등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크리스털을 중심으로 한 스와로브스키의 사업 다각화는 적절한 타이밍과 뛰어난 품질 및 기술을 바탕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인기 유지를 위한 마케팅 노력
-수집가를 위한 시리즈 개발과 수집가 모임
크리스털은 이제 단지 일회성으로 구입하는 상품의 단계를 지났다. 예술적 가치를 지닌 상품이 되면서 마니아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들 마니아를 위한 한정판 시리즈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무용가 시리즈에서는 현대 무용의 혁명가 이사도라 던컨, 플라맹고 댄서 안토니오, 발레리나 아나 파블로바 같은 전설적인 무용가들을 크리스털로 만들어 수집가를 위한 모임(Swarovski Collectors Society)의 멤버들에게 한정 판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와로브스키가 타깃으로 하고 있는 고객층은 누구일까? 언뜻 여성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이 회사의 주요 고객층은 20대 후반과 30대의 여성이다. 그러나 생각 밖으로 남성 고객들도 많다. 스와로브스키에는 1987년부터 수집가를 위한 모임(SCS)이 발족되었는데, 그 구성을 보면 40~50대의 남성이 많다. 스와로브스키가 큰 자랑으로 여기는 이 소사이어티에는 우리나라에서는 3천 명이 가입되어 있다. 연회비 3만 원을 내면 계간으로 나오는 수집가 전용 잡지를 받게 되고 매년 나오는 애뉴얼 에디션(Annual Edition) 제품들을 구입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물론 회원이 된다고 해서 애뉴얼 에디션을 할인받지는 못하지만 이 에디션의 희소가치 때문에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들은 주로 크리스털 장식의 시계를 많이 구입하지만 수집용으로 일반 제품들도 구입한다.
-젊은 여성 공략을 위한 액세서리 제품과 스타 마케팅
스와로브스키는 여성 고객층을 확대하기 위해 30대를 중심으로 하던 주 연령층을 20대로 낮추고 있다. 이들을 공략하기 위해 내놓은 제품이 20대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휴대폰 액세서리의 크리스털 제품이다. 스와로브스키는 아예 애니콜 준(June) 핸드폰이나 모토로라 핸드폰 자체에 크리스털을 상감하기도 했다.
스와로브스키는 TV 같은 매체를 이용해 마케팅을 하지는 않지만, 스타 마케팅을 일부 하기도 한다. 톱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TV 드라마 <섹스 앤 시티> 등장인물에 크리스털 브로치를 제공했고, 니콜 키드먼이 온통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톰 포드의 드레스를 입고 공개석상에 나타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수 샤크라 4집 앨범 내부에 스와로브스키 제품을 넣기도 했다. 또 타투(Totoo)가 인기를 끌자 크리스털 타투 제품을 스타의 피부에 붙이기도 했다.
-환상적인 ‘크리스털 월드’ 박물관과 현실적인 ‘크리스털 갤러리’
스와로브스키는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1995년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4,000평방미터나 되는 광활한 지역에 ‘크리스털 월드’라는 멋진 박물관을 열었다. 이곳에는 스와로브스키가 맘껏 자랑하고 싶은 명품뿐만 아니라 크리스털 전반에 관한 신비로움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놓고 있다. 우선 외관을 보면 녹색의 거인이 하나 있다. 거인의 두 눈은 크리스털로 되어 있고 입에서는 폭포처럼 물을 쏟아내고 있다. 그리고 거인의 몸 안에는 13개의 테마 방이 있다. ‘떠다니는 시’ 방에는 독일의 시인 한스 엔젠베르거가 쓴 씨가 크리스털 글자라ㅗ 만들어져 공중에 떠다니기도 하고, ‘크리스털 숲’ 방에는 천장에 달려 있는 대나무에서 비디오 영상이 흘러나온다. ‘크리스털 돔’ 방에는 590개의 거울이 붙어 있어 매우 신비로워 현기증이 날 정도다. ‘월드 네트워킹’ 방에는 대형 지구본이 있어 스와로브스키 그룹의 역사가 크리스털로 보여진다.
또 스와로브스키는 시내 최고 번화가에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갤러리를 개관하고 있다. 이 갤러리는 크리스털 매장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크리스털 월드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면, 크리스털 갤러리는 각종 액세서리, 인테리어 제품, 과학 제품 등 실생활에 쓰이는 크리스털 제품들을 다양하게 선보이게 있다.
비즈니스는 예술이고, 예술은 비즈니스이다
‘비즈니스는 예술이고 예술은 비즈니스이다.’ 미국의 유명한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말이다. 스와로브스키는 이 말을 아주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예술적으로 가공된 크리스털이 우리 생활에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끊임없는 노력과 혁신으로 보여주며 100년 동안 성장해온 스와로브스키. 스와로브스키는 2003년 전세계적으로 16.8억 유로(약 2조 3,688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직원 수도 1만 4천 명이나 되고, 스와로브스키 숍도 전세계적으로 92개나 있다. 와텐스에 있는 크리스털 월드에는 1995년 개관 이후 2003년까지 500만 명이 방문하여 오스트리아에서 빈의 쉔부른 궁전 다음으로 방문객이 가장 많은 명소가 되었다. 와텐스라는 작은 마을을 완벽한 관광명소로 만든 셈이다. 와텐스의 인구 8천 명 중 5천 명이 스와로브스키와 관련된 사람이라고 하니 지역 경제를 살리는 기업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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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로브스키는 건축과 인테리어를 향후 주력 사업으로 보고 추진하고 있다. 스와로브스키의 향후 사업 방향을 알려면 2003년 런던에서 개최된 ‘100% 디자인’ 전에 나온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궁전 프로젝트’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전시에서는 디자이너 마르셀 원더스가 만든 크리스털 커튼과 크리스털 꽃나무도 등장했다. 앞으로도 스와로브스키와 건축?인테리어의 만남이 기대된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