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의 역사 1

   
로렌스 프리드먼(역: 이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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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북스
   
32000
2014�� 12��



 

책 소개

인류 역사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힘과 힘의 대결,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문명을 변화시킨 전략의 모든 것!

 

전략 역사학자 로렌스 프리드먼 교수의 책. 전략(Strategy)은 어떻게 생겨나서 시공간을 넘나들며 인간사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는가. 전략의 역사(2)전략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되어 왔는가라는 거대한 질문에 답을 제시하는 최초의 책이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됐던 전략은 손자와 마키아벨리의 시대를 거치면서 지배층이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공고히 하는 도구로 변모했다. 이후 1800년대 나폴레옹 전쟁과 더불어 클라우제비츠나 조미니 같은 군사이론가들의 등장과 함께 전략은 전술과 그 의미를 달리하며 보다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전략의 함의는 지속적으로 달라졌는데, 핵무기가 개발된 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냉전 시대의 전략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략 모델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작동하기도 했다.

 

저자는 광범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전략이 어떻게 변모했고, 어떻게 해서 우리 삶 곳곳에 파고들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소개한다. 그는 침팬지 사회에 등장한 전략부터 고대 그리스 신화, 1, 2차 세계대전, 냉전 시대와 현대의 선거 그리고 기업 경영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와 함께 발전해온 모든 형식의 전략을 총망라했다. 기원부터 현대까지 3,000년 동안 국가 인간 군사 경영 전략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힌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지금까지의 세계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앞으로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통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로렌스 프리드먼

전략의 문명사를 단 한 권의 책으로 집대성한 현 시대 최고의 지성! 런던 킹스칼리지 전쟁연구학부의 교수이자 부학장이다. ‘국제 전략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는 그는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외교 정책 자문관을 역임했다. 맨체스터 대학교와 요크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이후 세계적인 싱크탱크인 영국 국제전략연구소와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뛰어난 지성과 식견으로 영국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 저자는 대영제국 훈작사와 작위급 훈장을 수여받았다. 1997년에는 포클랜드 전쟁의 공식 역사기록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99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발표한 블레어 독트린작성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2009년부터는 이라크 전쟁의 영국 공식조사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치와 군사 전략에 대한 많은 글을 써온 저자는 지금도 정기적으로 논평을 해오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적들의 선택: 미국이 직면한 중동 세계』『핵 전략의 발전』『전쟁 억지력』『케네디의 전쟁: 베를린, 쿠바, 라오스 그리고 베트남』『걸프전』『전략 연구의 변화』『전쟁의 역사: 냉전외 다수가 있다. 저자의 책 중 적들의 선택2009년 라이오넬 겔버상을 수상했으며, 군사학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인 저작물에 수여하는 웨스트민스터 공작 메달을 받았다

역자 이경식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와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는 신호와 소음』『승자의 뇌』『살아 있는 역사, 버냉키의 금융전쟁』『스노볼』『투자전쟁』『욕망하는 식물』『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오바마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소셜애니멀』『팬덤의 경제학』『컨닝, 교활함의 매혹』『유전자 인류학』『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외 다수가 있다.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 <나에게 오라>, TV 드라마 선감도’, 연극 동팔이의 꿈’, ‘춤추는 시간여행’, 칸타타 칸타타 금강등의 대본을 썼고, 저서로 청춘아 세상을 욕해라』『미쳐서 살고 정신 들어 죽다』『대한민국 깡통경제학』『이건희 스토리등이 있다.

차례

한국어판 서문 - 전략,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르다

서문

 

1부 전략의 기원

1장 기원 1 - 진화

폭력의 전략

 

2장 기원 2 - 성경

10계명, 전략적 위압 > 위압적이라는 평판 > 다윗과 골리앗

 

3장 기원 3 - 그리스

오디세우스 > 메티스의 방법 > 투키디데스 > 말과 속임수 > 플라톤의 전략적 쿠데타

 

4장 손자와 마키아벨리

손자와 손자병법> 마키아벨리와 군주론

 

5장 사탄의 전략

천국에서 벌어지는 전투 > 판데모니움 > 교활한 속임수의 한계

 

2부 군사 전략

6장 전략이라는 새로운 학문

전략과 전략가 > 나폴레옹의 전략 > 보로디노 전투

 

7장 클라우제비츠

앙리 조미니 > 클라우제비츠의 전략 > 승리의 원천

 

8장 가짜 과학

톨스토이와 역사 > 몰트케

 

9장 섬멸이냐 소모냐

미국의 남북 전쟁 > 공세 전략의 숭배자 > 머핸과 코베트 > 지정학

 

10장 뇌와 근육

항공 전력 > 장갑전

 

11장 간접적인 접근법

처칠의 전략

 

12장 핵 게임

새로운 전략가들 > 게임 이론 > 죄수의 딜레마

 

13장 비합리성의 합리성

억지력 > 토머스 셸링 > 선제공격과 보복 공격 > 실존적 억지

 

14장 게릴라전

아라비아의 로렌스 > 마오쩌둥과 보응우옌잡 > 대 게릴라 활동

 

15장 관찰과 지향

우다 고리 > 소모전과 기동전 > 작전술

 

16장 군사 혁신

비대칭전 > 4세대 전쟁 > 정보 작전

 

17장 근거 없는 믿음, 전략의 대가

 

주석

찾아보기

 




전략의 역사 1


서문&

전략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군대의 지휘관이나 대기업과 정당의 지도자라면 당연히 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조직이든 간에 진지한 목적이 있는 조직이라면 전략이 없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인간사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돌파할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인 접근이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위로 대응하는 것과 비교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단순한 전술적인 접근보다 한결 유리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전략을 세운다는 것은 단기적이고 사소한 관점이 아닌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내용을 바라보는 능력, 증상보다는 원인을 밝히는 능력, 다시 말해서 나무보다는 숲을 바라보는 능력을 지닌다는 뜻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할 때는 어떤 것이든 간에 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경우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군사 작전이든 기업의 투자든 혹은 정당의 선거 운동이든 간에 전략이 없으면 적절한 지원을 원활하게 받지 못한다. 만일 어떤 결정이 전략적으로 유의미하다면 그것은 늘 하던 관행에 따라 나온 결정들보다 당연히 더 중요하다. 더 나아가 이런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단지 조언을 하거나 명령을 실행하는 사람들보다 당연히 훨씬 더 중요하다.


‘전략’에 대해 합의된 정의는 없다. 이 단어가 아우르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그 경계선을 어디에다 그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통상적인 정의로 규정하자면 전략은 목적과 방법 및 수단 사이에 일정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 객관적인 실체와 목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그리고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자원과 수단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균형을 이루려면 우리가 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원 가능한 수단들을 가지고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들을 마련할 수 있도록 목적을 조율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추구하는 과제가 정말 단순할 때가 있다.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을 때, 사람이 아니라 무생물을 다스릴 때 그리고 설정된 목적이 별로 중요한 게 아닐 때, 이런 과정에 전략이라는 개념을 붙일 수는 없다. 대체로 전략은 실질적이거나 잠재적인 갈등이 존재해서 서로의 이익이 충돌하고 어떤 형태로든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을 때 적용되는 개념이다. 전략이 계획보다 훨씬 더 비중이 높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계획(plan)은 일련의 사건 배열로서, 사람은 계획을 바탕으로 확신을 가지고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런데 전략은 다른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자기와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자기가 설정한 계획을 망가뜨리려고 할 때 필요하다.


인간사에서는 우연한 일이 많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하고 또 우호적인 사람들이 실수하는 일이 예사로 벌어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전략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또 전략을 중심으로 해서 매우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지기도 한다. 흔히 사람들은 전략이 바람직한 최종 상태를 염두에 두고 시작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미리 설정된 목적을 향해서 질서 정연하게 나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목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애초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련의 상태들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진화한다. 따라서 궁극적인 목적을 포함한 애초의 전략은 중간 평가를 통해서 수시로 재조정해야 한다.


적대적인 상대가 다른 사람(조직)과 손을 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 역시 중요한 행동이다. 또한 1 대 1 대결은 오로지 한 사람만이 승자가 된다는 것을 상정하기 때문에 전략의 좋은 비유가 되지 못한다.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제3의 협력자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갈등을 해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유형의 행보가 가능할 수 있으려면 복잡한 협상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양보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거나 혹은 현명한 선택임을 당사자들에게 설득하는 일은 어려운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전략의 영역은 위협과 압박뿐만 아니라 협상과 설득,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인 영향력, 또한 행동뿐만 아니라 말까지 아우른다. 전략이 정치적 기술의 중심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전략은 주어진 상황에서 보다 많은 것을 얻어내는 과정을 다룬다. 그러므로 단지 힘의 균형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전략은 힘(권력)을 창조하는 기술이다.



제1부 전략의 기원

기원 1 - 진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전략 지능’strategic intelligence은 침팬지에게서든 인간에게서든, 거친 자연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복잡한 사회 환경 속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도 진화했다. 리처드 번Richard Byrne과 나디아 코프Nadia Corp는 영장류에 속하는 열여덟 개 중요 종들을 분석한 끝에 특정한 종의 신피질(포유동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대뇌 피질 가운데서 가장 최근에 진화된 부위 ― 옮긴이)의 크기가 그 종이 속임수를 구사하는 비율과 상관성을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은 뇌의 크기와 (협동 능력과 갈등 관리 능력 그리고 아울러 속임수 능력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사회 지능 사이의 상관성을 확인했다. 만일 특정 동물의 신피질 크기가 이 동물 종이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의 한계를 결정한다면, 이 동물 종이 다른 동료들과 상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더 나아가 갈등의 시기에 결합할 수 있는 동맹자의 수를 결정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즉 뇌가 크면 클수록 튼튼한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하는 능력도 그만큼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번이 제기했던 이른바 ‘마키아벨리 지능’Machiavellian Intelligence이라는 개념은 전력과 진화 사이의 상관성을 확립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가 밝혀낸 기본적인 생존 기술들이 가장 원시적인 사회 집단들 속에서 생존에 필요한 기술들과 비슷하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되었다.


폭력의 전략

한 가지 중요하면서도 복잡한 문제는 사회적인 유대가 전혀 없던 다른 집단들과 어쩔 수 없이 함께 해야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이것을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불렀다. 협력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갈등을 자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집단 ‘안에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지만 ‘외부’ 집단과 대결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불가피한 책임이 작동한다. 개별적인 공격 행위는 동물 세계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집단 대 집단이 벌이는 전쟁은 흔한 일이 아니다.


제인 구달Jane Goodall은 침팬지의 사회적 삶을 연구한 개척자이다. 그녀는 침팬지가 벌이는 전쟁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뛰어난 관찰을 했다. 구달은 1960년에 탄자니아의 곰비 국립공원에서 침팬지 관찰을 시작했으며, 이웃 지역에 사는 수컷들의 침입으로 침팬지들이 살해당하는 경우를 여러 차례 목격했다. 수컷 침팬지 두 마리가 우두머리 자리를 놓고 싸워서 승패가 결정 나 공동체가 쪼개지고 나면 놀라운 갈등이 전개되었다. 특히 카사켈라(북쪽 침팬지)와 카하마(남쪽 침팬지)라는 두 공동체 사이의 적대 관계는 오래 지속되었다. 이 갈등은 1973년부터 1974년까지 이어졌고 결국 카하마 공동체가 소멸되었다. 카사켈라의 수컷들은 카하마의 영토와 암컷들을 차지했다.


구달은 한 공동체의 침팬지들이 방어적으로 행동하면서도 서로에게 싸움에 나서라고 호출하며 신속하게 자기들이 있어야 할 자리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분쟁의 소지가 높은 영토를 중심으로 순찰 활동도 이루어졌다. 이런 순찰 활동은 수적으로 우세한 상대 집단에게 발각될 수 있으므로 매우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불필요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으며 또 적대적인 집단의 구성원이 주변에 있지 않은지 수시로 경계하며 확인했다. 이런 순찰 활동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적대적인 집단의 영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벌인 약탈 행동이었다. 이들은 오랜 시간 숨 죽여 기다리다가 마침내 희생자를 공격할 기회가 찾아오면 순식간에 기습 공격을 한 다음 죽거나 죽어가는 적을 남겨두고 유유히 자리를 떴다.


침팬지들은 왜 싸울까? 리처드 랭엄Richard Wrangham(미국의 동물학자이자 진화 인류학자 ― 옮긴이)은 이런 갈등은 ‘식량, 수컷 혹은 안전 등과 같은 자원들에 대한 보다 유리한 접근성’ 때문에 생긴다고 규명했다. 이웃한 집단들 사이의 힘 관계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이들에게 잘 익은 과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익은 과일은 침팬지의 소화기 계통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과일이 드물 때 침팬지들은 혼자서 혹은 몇몇이 무리를 지어 보다 많은 과일을 찾아서 여행을 한다. 과일은 지리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으므로 어떤 공동체의 영토에는 과일이 많고 다른 공동체의 영토에는 과일이 드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갈등의 원인이었다. 힘이 센 공동체가 힘이 약한 공동체를 약탈하는 이유를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랭엄은 성인 수컷 침팬지들은 ‘폭력의 비용 편익 분석을 하고 (……) 편익이 비용보다 높다는 판단이 나오면 공격을 감행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 차례의 살해 행위를 저지른 집단의 상대적인 위치는 상당히 높아졌다(침팬지 집단의 개체 수는 많지 않으므로 구성원 한 개체의 손실이라 하더라도 해당 집단으로서는 상당히 큰 피해를 입는 셈이 된다). 랭엄은 이것을 ‘권력 불균형 가설’이라고 불렀다.


“무리를 지어서 행하는 살해 행위는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일어난다. 하나는 두 집단 사이의 적대성이고, 또 하나는 경쟁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의 불균형이다.” 이 가설은 살해 행위가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했지만 내재적인 갈등 즉 희소하고 필수적인 자원을 향한 투쟁의 기원은 설명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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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폭력보다 더 두드러진 것은 갈등을 대하는 계산적인 태도였다. 구달은 침팬지들을 지켜보면서 관찰한 내용을 이렇게 정리했다. “소규모 정찰대는 자기들보다 규모가 큰 집단 혹은 수컷이 많은 집단을 만날 경우 달아난다. 심지어 자기 영토 안에서조차 그렇다. 반면에 덩치가 큰 집단은 자기 영역을 벗어난 구역에서라도 소규모 정찰대를 만나면 추격하거나 공격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사실은 유인원은 힘의 균형을 계산하는 데 매우 기민하다는 점이다. 자기들이 약할 때는 재빨리 달아나며 싸움을 피하려 하지만 자기들이 수적으로 우월할 때는 곧장 싸움을 건다. 그러므로 먼저 공격을 감행한 쪽에서 사망자가 나오는 경우를 보여주는 학술적 보고가 없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투에서 발휘되는 힘이 아니라 ‘두 집단이 맞닥뜨렸을 때 두 집단의 상대적인 크기 및 수컷의 구성 비율’이었다. 폭력에 대한 이런 실용적인 태도가 침팬지들의 행동을 좌우했다.


이와 비슷한 패턴들은 이른바 문명기 이전 단계의 인류의 전쟁에서도 확인된다. 비록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야 ‘관례적이고 암묵적’이었으며 지금은 오로지 ‘전쟁 행동과 그것의 결과’로만 추론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당시의 전략들은 주로 소모전이었던 것 같다. 전면전과 기습 공격으로 상대 진영을 수적으로 조금씩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보통은 사망자가 지극히 적었지만 때로는 전 부족을 몰살하는 행위도 나타났다. 승자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 재산과 음식을 약탈하고 집과 들판을 파괴했으며 여자와 아이는 죽이거나 포로로 삼았다. 보급 능력이 떨어져서 식량이나 무기가 일찍 바닥을 드러냈으므로 장기전을 펼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기습 공격에는 많은 이점이 있었다. 밤이라 눈에 잘 띄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계를 서는 병력은 대개 소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곧바로 후퇴하면 그만이었다.&&


이스라엘의 군사 전략 전문가인 아자르 가트Azar Gat에 따르면 공개적인 전투를 피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공격을 할 때는 공격자로서는 상대방이 ‘무기력하고,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저하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공격자를 효과적으로 해칠 능력이 거의 없는 상태’가 최상이다. 이런 요인들로 해서 ‘원시 시대의 수렵 채취 사회 및 농경 사회를 연구한 저작물에 등장하는 모든 사회에서’, ‘놀랍도록 획일적인’ 전쟁 양상이 일관되게 펼쳐진다.



제2부 군사 전략

전략이라는 새로운 학문

보로디노 전투

이제 모범적인 성공의 사례도 아니고 그렇다고 두드러진 실패의 사례도 아니지만 나폴레옹의 방법론에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한 전투로 눈을 돌려보자. 보로디노 전투이다. 보로디노는 모스크바 서쪽 약 9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도시이고, 여기에서 벌어진 전투는 결과적으로 전쟁의 운명을 결정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1812년 11월 7일에 프랑스군과 러시아군 사이에 벌어진 이 전투에 참가한 양측의 인원은 약 25만 명이었고 이 가운데 약 7만 5,000명이 사망했거나 부상당했거나 포로로 잡혔다. 비록 프랑스군이 이기긴 했지만 러시아군도 자기들이 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로디노에 이어 모스크바도 점령당했지만 러시아는 평화 협정을 거부했고, 나폴레옹은 전쟁을 더 계속할 여력이 없음을 깨닫고 결국 5주 뒤에 그 유명한 처참한 퇴각을 시작했다.


1812년 여름에 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나폴레옹에게 전략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적으로 하여금 계속 추정하게 만들고 압도적으로 우월한 전력을 치중할 지점을 찾고 이어서 그 지점을 공격하는 기존의 전투 관행을 그대로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나면 러시아의 차르(황제) 알렉산드르와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쟁을 일찍 끝내버리고, 러시아 영토 깊숙한 곳으로 진입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기에 나폴레옹은 국경 근처에서 전투를 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을 어렵지 않게 이길 것이라고 자신했다. 1805년에 아우스터리츠(슬로바키아와 접경에 있는 체코의 도시 ― 옮긴이)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압도적으로 격파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지도력은 그동안 계속 추락을 거듭해온 터라 일단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프랑스군의 우월함을 보여주기만 하면 러시아의 줏대 없는 귀족들이 알렉산드르를 압박해서 평화 협상의 테이블로 등을 떠밀 것이라고 나폴레옹은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나폴레옹보다 더 좋은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에 있는 러시아의 우수한 정보망을 통한 것이었다. 이 정보망을 통해서 알렉산드르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1810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응 전략을 깊이 생각하고 준비했는데 러시아는 프랑스에 비해서 동맹국도 적다는 사실 등을 포함해서 러시아가 안고 있던 약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러시아가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은 러시아군의 높은 사기와 기습 작전에 보장하는 이점에 기대서 프랑스군이 성스러운 러시아 영토로 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이 전략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력 부대를 그렇게 먼 곳까지 이동시켜서 싸우는 건 위험했다. 보급 물자가 충분하지 않았고, 게다가 프랑스군은 훌륭한 보급책과 잘 갖추어진 진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 전투에서 진다면 국가의 생존을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방어 전략을 선택했다. 이렇게 할 경우 동맹을 통해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선택권은 포기해야 한다는 불리한 점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는 후퇴를 계획하는 러시아와 반反 프랑스 동맹을 맺기를 꺼렸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설령 러시아가 공격 전략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 두 나라가 끝까지 러시아의 동맹국으로 남아줄 수 있을지 의심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폴레옹이 전투를 원한다는 사실을 그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나폴레옹이 전투를 원한다면 전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므로 본능적으로 공격적이던 많은 장교들이 분통을 터트렸음에도 러시아의 계획은 물러서는 것이었다. 공간을 내어주는 대신 시간을 벎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프랑스군이 보급선을 뒤로 멀리 두고 진격해올 때 러시아군으로서는 보급선이 점점 더 짧아져서 오히려 유리했다. 나폴레옹의 전략은 대규모의 전투와 신속한 승리였으므로, 러시아군은 퇴각을 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훨씬 우위에 있는 경기병을 동원해서 적의 병참선을 기습하면서 프랑스군을 지치게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최대한 후퇴를 하면서 대규모 전투를 피해야 한다.” 러시아군은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후퇴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후퇴를 위한 실제적인 계획이 없었다. 그 계획은 나폴레옹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최초의 기동을 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러시아군은 대부분 즉흥적인 계획 아래 후퇴를 했다. 하지만 이 후퇴는 나폴레옹의 진격보다 더 잘 이루어졌다. 나폴레옹은 초전박살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을 뿐 혹독한 기후 조건 아래에서 용서를 허용하지 않는 땅 깊숙이 진격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전투를 하려고 러시아군을 추격하면서 자기 병사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특히 말들이 많이 지쳤다. 그리고 모스크바 가까이 다가가서야 비로소 전투를 할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러시아가 모스크바를 포기하면서까지 전투를 회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러시아 군대를 이끈 장군은 미하일 쿠투조프Mikhail Kutuzov였다. 그는 사병과 러시아 국민의 태도를 잘 아는 기민한 지휘자였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전쟁 경험을 갖춘 노련한 장군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쿠투조프는 예순다섯 살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예전과 같지 않았고, 또 그의 주변에는 아첨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러시아로의 진격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고 인력이나 물자 면에서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만 했다. 그[보로디노] 전투 직전까지 프랑스의 대군대Grand Amée는 이미 45만 명이던 병력의 3분의 1을 이렇다 할 전투도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잃었다. 나폴레옹의 예하 장군들은 거의 각자 알아서 전투를 수행했다. 예전에 나폴레옹이 주문했던, 혹은 각자 실천했던 응집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프랑스군의 우월한 화력이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뚫긴 했지만 러시아군은 끈질기게 저항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당황했다. 돌파가 가능한 순간에도 나폴레옹은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댔다. 과거의 여러 전투에서 그는 늘 말을 타고 진중을 돌아다니며 전선의 상황을 직접 살피고 부대를 지휘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었다. 하지만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그날이 끝나갈 무렵에 마침내 프랑스군이 전투 현장에서 러시아군을 쫓아냈으며 러시아군이 입은 피해가 프랑스군이 입은 피해보다 크다는 사실에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전멸한 게 아니었다. 죽지 않거나 부상당한 러시아군은 대부분 도망쳤다. 나폴레옹은 포로를 많이 사로잡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실제 포로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나폴레옹에게는 이제 다른 전투를 다시 벌여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끝낼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러시아는 많은 인구를 가진 대국이었기에 병력은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었다.


쿠투조프의 러시아군은 야음을 틈타서 질서 정연하게 퇴각했다. 쿠투조프의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이었던 선택은, 나폴레옹이 자기를 뒤쫓아서 정말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할 마지막 패퇴를 안겨주는 길을 택하지 않고 모스크바로 입성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폴레옹은 우리로서는 감히 물길을 돌릴 수 없는 격렬한 급류와 같다’고 말했다. 모스크바는 그 급류를 빨아들이는 스펀지 역할을 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한 뒤에 도시에 불을 질렀고, 도시의 3분의 2가 파괴되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가 평화를 애원하며 무릎을 꿇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또 다른 전투를 벌일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협상 테이블에 나올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마침내 나폴레옹은 자기가 덫에 걸려들었음을 깨달았다. 이제 프랑스군은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낼 여유조차 없었다. 프랑스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쓰라린 길에는 엄청난 피해가 동반되었다. 그리고 러시아군이 마침내 다시 결집했을 때 알렉산드르는 자기가 선택한 전략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유럽에 반反 나폴레옹 동맹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패배와 첫 번째 유배 뒤에 예전의 영광을 회복하려고 시도했지만 1815년 워털루에서 쓰라린 패배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전쟁의 천재였던 나폴레옹은 이렇게 패배했고, 전쟁 교본을 쓰는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거둔 독창적인 승리의 원천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패배의 원인도 함께 생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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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전

게릴라전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 형태가 아니었다. 가깝게는 미국의 독립 전쟁에서도 채택된 적이 있다. 게릴라전은 19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이미 스페인 사람들이 프랑스 점령군에 맞서서 벌였던 ‘작은 전쟁’little war에서 구사한 매복과 끈질긴 괴롭힘이라는 전술을 통해서 명성을 얻었다(스페인어로 ‘게릴라’는 ‘작은 전쟁’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


그러므로 게릴라전은 자기 영토에서 싸우는 수비 전략이며, 대중의 지지 및 익숙한 지역 사정이라는 강점을 기반으로 한다. 적이 지쳐서 나가떨어지거나 무언가 다른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면서 시간을 버는 일종의 소모 전략이다. 이런 전쟁은 그 자체만으로는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 비정규군은 보다 전통적인 방식의 전투로 정규군과 맞서기도 하지만 적과의 거리가 떨어져 있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싸운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영국 육군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또 비슷한 사례를 러시아 농민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 농민은 1812년에 그렇잖아도 지쳐 있던 프랑스 군대를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프러시아 점령을 경험했으며 스페인 폭동과 프랑스군이 러시아에서 당했던 혹독한 시련을 지켜볼 수 있었던 클라우제비츠는 강의를 하고 저술을 하던 초기에 바로 이 게릴라전을 소재로 선택했다. 『전쟁론』에서 그는 게릴라전을 방어의 한 형태라고 보았다. 『전쟁론』의 원고를 거의 다 써가던 18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게릴라전은 그리 통상적이지 않은 전략이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19세기 동안에 유럽의 여러 제국들이 세계로 팽창하면서 전 세계에서 툭하면 봉기와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움직임은 정규군 부대가 출동해야 하는 수준까지 치달았다. 영국군은 봉기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제를 제국 경찰의 임무로 설정했다. 1896년에 발간된 칼웰C. E. Calwell의 『작은 전쟁들』Small Wars에서는 이와 관련된 고전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 책은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여러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것은 성과도 잘 드러나지 않으며 아무리 해도 하나마나한 것 같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전쟁을 치르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게릴라전을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펼쳐야 할 것인가에 관한 중요 원리를 개발한 인물은 전직 고고학자였던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 육군의 정보장교로 복무하면서 오토만의 지배에 반대하며 독립을 꿈꾸던 아랍의 반란군을 선동하는 방안을 찾아내며 명성을 얻었다(당시 아랍은 터키의 식민지였고, 터키는 독일과의 동맹을 선택했다 ― 옮긴이).


게릴라전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철학은 1920년 10월에 반란의 간략한 역사와 함께 처음 발표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그는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만들었던 헛된 신화와 싸웠고 자신이 아랍 사람들에게 했던 독립의 약속을 존중하기 위해 싸웠다(로렌스는 아랍의 일은 아랍에게 맡기고 간섭하지 말자고 주장했으나, 전후의 밀담 끝에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을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서 분할했고, 로렌스는 자기가 아랍인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불어넣은 걸 후회하며 조지 5세에게 받은 훈장을 반납했다 ― 옮긴이).


터키에 저항하는 작전은 1916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메디나와 다마스쿠스를 잇는 주요한 공급로이던 철도를 오가는 기차를 타격 대상으로 한 작전이었다. 터키는 이 철도 노선에서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습격에 무척 화가 났다. 터키로서는 이 철도를 아랍의 게릴라로부터 온전하게 보호하는 일이 불가능해 보였고 결국 이 투쟁은 아랍의 전면적인 봉기로 이어졌다. 터키에게는 이 봉기가 심각한 골칫거리였다. 로렌스는 1917년 초의 한 시점을 회고록에서 묘사했는데 당시는 그가 비정규군의 한계와 씨름하고 있던 때였다. 비정규군으로는 무장 군대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즉 ‘적의 부대를 찾아내 전투를 통해서 적의 중심을 파괴하는 것’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요충지를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 어떤 지점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도 없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넓이가 아니라 깊이’에 있으며 공격의 위협만으로 터키군을 수세적으로 묶어둘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군사 이론에 관한 저술을 ‘상당히 많이 읽었고’ 특히 클라우제비츠의 저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한 차례의 전투 과정’에서 적의 부대를 파괴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이른바 ‘절대 전쟁’absolute war(쌍방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적이 완전히 섬멸될 때까지 벌이는 전쟁 ― 옮긴이)이라는 발상에 혐오감을 느꼈다. 그건 마치 피로써 승리를 사는 느낌이었고, 아랍 사람들도 그걸 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자유(‘살아 있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즐거움’)를 위해서 싸웠다).


군대는, 비유하자면 ‘전체적으로 보자면 움직일 수 없지만 땅에 단단하게 뿌리를 박고 긴 줄기를 통해서 머리까지 영양을 공급받는’ 식물이었다. 그러나 아랍의 비정규군은 ‘뚜렷한 형체도 없고 타격을 입힐 수도 없으며 앞뒤도 없는, 그야말로 공기와 같은 것’이었다. 로렌스는 터키가 ‘아랍 민중의 원한’을 꺾기에는 병력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특히 반란군을 정규군처럼 대응하려 하면 특히 더 그렇다고 생각했다.


터키의 보급선을 공격하면 터키군은 물자 부족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므로 로렌스는 근접전이 아니라 멀리서 빙빙 돌아가 치고 빠지는 식의 전투 방식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격 기회가 있을 때만 적에게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적이 ‘완벽한’ 정보를 바탕으로 공격할 기회 자체를 차단하는 전투 방식이었다. 여기에는 심리적인 측면의 효과가 발생했다. 로렌스는 당시 상식이던 ‘군중심리’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사기 진작의 문제 즉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의 여론을 특정한 하나의 목적에 고정되도록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로렌스는 규모가 작으면서도 고도로 기동성이 높고 훌륭하게 무장된 부대를 만들었다. 이 부대로 터키군의 병력을 분산시킬 터였다. 아랍 사람들은 방어해야 할 게 아무것도 없었고 사막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많이 알았다. 이들이 구사한 전술은 ‘공격하고 달아나며, 추적하지 않고, 정확하게 노려서 타격한다’였다. 한 곳을 공격해서 성공을 거둔 다음에는 그곳을 버리고 다른 곳을 치러 가는 식이었다. 승리는 ‘속도와 은폐 그리고 명중도’에 달려 있었다. 로렌스는 ‘비정규전은 돌격전이 아니라 정보전’이라고 보았다. 이런 전술로 터키군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비정규전이 오토만 제국을 꺾는 데 주된 과업이 아님을 그도 인정했다. 결국 최종적인 승리는 에드먼드 앨런비Edmund Allenby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의 보다 전통적인 공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로렌스는 게릴라전이라는 비정규전이 발휘할 수 있는 강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선 기지가 절대로 적에게 공격받지 않는다. 로렌스의 경우 게릴라군의 기지는 영국 해군이 보호하고 있던 홍해의 여러 항구들이었다. 또 외국의 군대는 게릴라군이 작전을 펼치는 지역을 관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주민이 게릴라군에게 우호적이다(‘인구의 2퍼센트만 적극적이고 나머지 98퍼센트가 수동적으로 동조적인 곳이면 반란군이 형성될 수 있다’). 이런 내용을 로렌스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50개 단어 미만으로 설명하면 기동성, 안정성(공격 표적을 적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간 그리고 강령(모든 사람을 우리 편으로 바꾸어놓을 어떤 생각)이 주어진다면 승리는 반란군에게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대수적algebraic 요인들이 결국은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고, 이런 것들을 거스를 때 아무리 수단이 완벽하고 사기가 높다 하더라도 헛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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