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혁신을 말하다

   
천영준
ǻ
시드페이퍼
   
15000
2013�� 04��



■ 책 소개
신화에 가려진 예술사 속 거장들에게서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배운다!

대학에서 창조경영을 연구하면서 클래식 음악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창조혁신과 관련된 해답을 300년 전 클래식의거장들의 성공 전략에서 탐구해보는 책.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이 활동하던 300년 전 서양의 음악시장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치열한 성공의 각축장이었다. 그들은 음악이라는 창조적 콘텐츠를 생산하는 예술가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과 후원자들을 상대로 인기와 성공을얻어내야 하는 경영자들이었다. 

책 속에는 다양한 형태로자신의 성공을 거머쥐거나 한때 승승장구하다가 혁신에서 실패해 쓸쓸한 뒤안길로 사라져간 음악가들의 면면이 등장한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처럼 뻔히알려져 있는 라이벌 관계와는 전혀 다른 반전을 안겨주는 음악가들의 이야기도 새롭게 조명된다. 더 이상 혁신적인 아이템을 생산할 수 없을 때음악가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과감히 요리사로 전업한 로시니의 이야기 등 이제까지는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선으로 경영적인 입장에서 음악가의 성공전략들을 살펴볼 수 있다.

■ 저자천영준&nbsp&&nbsp&&nbsp&&nbsp&&nbsp& 
연세대학교에서 경영학과 교육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정보산업공학과에서 기술정책과 소프트웨어산업을 연구했다. 현재 연세대 창조경영센터에서 소셜 플랫폼 기업의 기술 전략, 예술가와 과학자의 생산성과관련된 네트워크 구조 등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공연단체의 기획/자문 역할로도 일한 경험을 살려 바로크음악 전문 연주단체인 Chanteza Dieu의 전문위원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Asian Social Science」「경영학연구」「군사과학기술」 등 국내외 다수 학술지에 논문을게재한 바 있으며 현재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의 「동아비즈니스리뷰(DBR)」에 ‘Lesson from Classic’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고있다. 
taisama@naver.com

■ 차례
Chapter 1 리베로 vs 게이트키퍼
비발디, 선두주자가 된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북독일의 작곡가들, 생산적인 정치는 성공의 지름길이다 
살리에리, 혁신을 포기하고 네트워크의 대가가 되다
모차르트, 성공한 천재의 전략적 패러독스 
Lesson from Classic 1
Chapter 2 다각화 vs 전문화
바흐,경계를 뛰어넘은 진정한 혁신가 
헨델, 문화기업가 정신으로 꽃을 피우다 
로시니, 똑똑한 바보, 거장들의 거장이 되다
멘델스존, 혁신적인 문화기업가 멘델스존의 명암 
Lesson from Classic 2
Chapter 3 오피니언 리더의 시대
케루비니,전략적 모호성도 선택적 관리가 필요하다 
베토벤과 그의 시대 上, 오피니언 리더는 준비된 것이다 
베토벤과 그의 시대 下, 위기를극복하는 자기 성찰의 힘 
바그너, 역량 파괴적 변화를 주도한 오피니언 리더 
Lesson from Classic3

Chapter 4 예술 경영과 창조경제
플랫폼 리더십의 시대, 전략적 오케스트레이션의 미학 
예술로 보는 경영, 이론으로 보는 예술과 경영





바흐, 혁신을 말하다


Chapter 1 리베로 vs 게이트키퍼

비발디, 선두주자가 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훼예포폄이라는 말이 있다. 칭찬과 비난을 함께 받는 것을 일컫는 이 사자성어만큼 안토니오 비발디의 일생을 잘 표현해 주는 문구도 없을 것이다.


협주곡 분야의 선두주자였던 비발디는 아직까지 현악 오케스트라 연주가 다채로운 표현을 시도하지 못할 때, 거대 규모의 악단을 상대로 한 협주곡과 종교곡을 쓰면서 선율과 리듬의 합을 구사한 작곡가였다. 그러다 보니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17세기 중·후반 유럽 문화시장에서 일종의 표준으로 인식되곤 했다.


비발디는 뛰어난 기량으로 일찍이 작곡가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이후 환경의 변화에 맞춰 스스로를 재무장하는 노력에 소홀했다. 연주자로서 화려한 경력을 쌓는 데 더 집중해 오페라 무대를 연출하면서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는가 하면 서두만 들어도 금방 그 다음의 전개가 이해될 만큼 비슷비슷한 범작들을 양산했다.


한때는 바흐와 헨델 같은 바로크 시대 명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지만 나중에는 모든 작곡가들이 그의 작품 중 일부를 베끼거나 패러디할 정도로 손쉬운 모방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일찍 기회의 구조를 알아차린 비발디의 명민함

UC 버클리대학의 데이비드 티스 교수는 최근 자신이 주창한 개념인 동태적 역량(Dynamic Capability)을 이야기하면서 이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어젠다를 세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했다.


우선 주변 환경을 스캐닝(Scanning)하고 기회 요소를 파악할 수 있는 촉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가리켜 티스 교수는 감지(Sensing)라고 말한다. 재빠른 감각으로 상황 판단을 했다면 다른 경쟁자보다 먼저 기회를 획득(Seizing)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과 조직이 환경을 인식한 절차에 맞게 변화할 수 있도록 꾸준히 관리하고, 외부의 위협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다.


현대의 경영자나 17세기의 음악가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경쟁이 치열한 환경에서 변화와 적응을 거듭해 가며 생존 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혜성처럼 등장한 그들은 산업이나 시장을 재정의할 만한 표준과 지배구조를 확립한다. 대체로 이들은 초기에는 성공적으로 운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은 기존의 지위를 유지하고 경력을 관리하는 데 골몰하기가 쉽다.


이렇게 조직이나 개인이 기존의 관행에 젖어 새로운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을 전략적 관성이라고 한다. 필드에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경쟁자, 협력자들도 같이 뛰고 있다. 따라서 잠시 뒤처지는 사이에 새로운 트렌드가 등장하거나 후발주자들이 등장해 군웅할거(群雄割據)의 국면이 이루어져 또 다른 경쟁 환경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


오페라 업계로 진출해 리베로의 길을 가다

비발디가 활동하던 1710년대의 이탈리아는 리베로들의 시장이었다. 비발디는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작품의 카테고리에도 거의 제한이 없었다. 협주곡이나 오페라, 오라토리오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영역에서 실험을 할 수 있을 만큼 지원과 관심이 잇따랐다. 그를 지켜보는 귀족들의 시선도 매우 호의적이었다. 1723년의 로마 여행에서는 교황 앞에서 오페라를 상연하는 영광을 누렸다. 만토바에 있을 때는 거의 가신(家臣)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으면서 협주곡집인 <사계(Four Seasons)>를 작곡하기도 했다.


약속의 땅은 영원하지 않다

로마 여행은 비발디가 시장 전체의 트렌드를 선도할 만큼 영향력이 있는 인물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하는 기회였다. 1728년에 그는 트리에스테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 6세를 직접 알현할 기회를 얻는다. 이 만남은 황제 쪽에서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황제는 1730년에 비발디를 프라하로 초대해 오페라를 상연해 줄 것을 부탁했다. <파르나체>를 비롯해 이탈리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흥행작들을 오스트리아에서 재현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비발디의 전략 부재가 문제를 일으켰다. 본토 이탈리아에서 서서히 베네치아 극음악의 트렌드가 사그라들고 있었던 것이다. 2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비발디의 작품들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흥행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3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나폴리 파의 오페라가 유행하게 되면서 비발디와 같은 기성 작곡가들의 작품은 인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비발디의 오페라는 바로크 초기의 영향을 받아 성악 독창자가 극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세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나폴리 파 오페라 작곡가들은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그리고 솔로이스트가 동시에 어우러지는 종합 음악극으로서의 방향을 지향했다. 표현 역시 훨씬 다채로웠고, 무대의 움직임이나 시각적 효과 이외에도 풍부한 음향이 제공되었다. 그러자 새롭게 등장한 자극에 대중의 관심은 금세 돌아섰다.


비발디의 작품들이 거의 리바이벌 수준이었던 것도 한계점이었다.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들 중 대부분은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형식에 있어서도 거의 리트로넬로 스타일이라는 유형을 반복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패러다임 전환기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협주곡으로 성공한 그는 오페라를 성경 속 하나님이 약속한 약속의 땅처럼 여겼지만, 유감스럽게도 지속적인 성공의 보증수표가 되지 못했다.


진화론적 관점에 따르면 비발디는 기존의 장점을 재탕하는 동안에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전략적 성공은 영원하지 않다. 주변 환경의 변화에 알맞게 자신을 전략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코드로 자신을 장식하는 행동은 분명 필요하고 급변하는 환경에서 자신의 존립 이유를 주변인들에게 설명하는 정치적 역량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가지고 있던 경쟁 우위를 반복적으로 답습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면 결국 처절한 몰락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선두주자로는 부족하다

바로크 시대 트렌드세터였던 작곡가 비발디의 몰락은 선두주자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체감하게 한다. 그는 충분히 기성 예술인으로서 경쟁 우위를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프랑스의 릴리나 라모처럼 기악 작곡가로서는 독보적이지만 어용 예술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이들과는 차별화된 명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실험적인 도전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관객과 지인들도 상당수 확보하고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장점을 단점으로 바꾸어버리는 경쟁 환경은 가차없이 비발디를 외면해버렸다. 일시적인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는 작품을 양산할 수는 있었지만, 예술사조의 본질적 차별화와 변화에는 둔감했고, 스스로를 새롭게 포장하는 데 게을렀던 결과였다.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에 따르면 그는 96편의 오페라를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발견된 작품은 46편에 지나지 않는다. 열정적으로 다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그의 가치를 잃어버린 셈이다.


비발디가 오랫동안 천재의 명성을 유지하고자 했다면, 혁신의 성과가 일시적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는 대중으로부터 인정받는 데 초점을 맞춰 결국 스스로를 성공신화의 도식에 가두어버리고 말았다. 인생의 중년기부터 비발디는 경력 관리에 주력했고,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또 독일로 떠돌면서 진정한 경쟁력이 아닌 원조 이탈리아 작곡가라는 퇴색된 명성에 기대게 되었다.


명인에 대한 개념은 매우 주관적이다. 대부분의 청중들은 대세를 따라 평가를 내릴 뿐, 자기만의 감식안으로 훌륭한 예술가를 알아보기 어려워한다. 당대에 비발디 같은 위치를 얻은 사람이라면, 그 지위를 유지하고 다른 경쟁자들의 진입을 막기 위해 꾸준히 모방 불가능한 전략을 수립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Chapter 2 다각화 vs 전문화

바흐, 경계를 뛰어넘은 진정한 혁신가

시간의 테스트를 이겨내려 했던 천재

수많은 대가들이 바흐에게 음악의 아버지라는 존경 어린 표현을 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전략(strategy)과 정책(policy)보다 비전(vision)이 앞선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많은 이들이 그 중요성을 지적하지만, 실전에서는 활용하기 어려운 덕목이기도 하다. 바흐는 동시대 작곡가들에 비해 영광과 번영보다는 자신에게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길을 걸어갔다. 무엇보다 신앙인이라는 자아의식이 강했다. 지상 최대의 예술인 종교의식에 참여한 지식인으로서 창작 활동은 단순한 문화적 생산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음악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최상의 경험을 창출할 수 있도록 고도화된 체계를 정립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 때문인지 다른 작곡가들이 양산 전략을 택했던 데 비해 바흐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곡을 남겼지만 작품의 주제의식 면에서는 매우 심오하고도 창의적인 수준을 보여주었다. 그는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각지에 퍼져 있는 무곡, 조곡들의 패턴을 학습하고 자신의 예술적 혁신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바흐 전문 음악사가인 크리스토프 볼프의 표현처럼 그의 음악이 모든 바로크 작품들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게 들리는 것은, 바흐 자신이 바로크 음악의 백과사전에 가깝게 작품세계를 재정의하려 했던 비전의 결과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두 번째로 그는 고도의 전문화(Specialization)를 지향했다. 합창과 기악 작품의 분석과 재조명에 오랜 시간을 투자했고, 스스로 학자적인 정체성을 가졌다는 평가에 대해 매우 만족했다. 따라서 다른 작곡가들처럼 오페라 작업을 하기 위해 궁정을 기웃거리거나 후원자들을 설득하러 다니지 않았다. 이는 결과적으로도 바흐가 음악 생태계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물론 교회음악 중심의 창작 활동을 했던 바흐의 집중화 전략이 경로의존성의 결과라는 해석도 있는데, 활동 당시 세간의 평가가 가장 대표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그는 훌륭한 작곡가로서보다는 오르가니스트이자 연주자로서 더 존경받았다. 심지어 라이프치히 시의회나 고용주들로부터 "조금 다른 창작을 할 뿐, 초일류의 스타는 아니다"라는 다소 이해할 수 없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바흐의 전문화 방향이 강력한 정체성 유지의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마이클 라운즈버리를 비롯해 많은 경제사회학자들은 다각화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여러 영역에 손을 대는 창작자, 조직 등에 대해 우려한 바 있다. 과도한 다양화 전략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잘못된 범주화의 오류에 빠지게 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바흐는 스스로 제대로 된 범주에 위치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진정한 혁신은 지치지 않는 열정에서 완성된다

1750년 사망하기 전까지 바흐는 거의 당대 북독일 음악계의 명사처럼 활동했다. 프로이센의 계몽군주였던 프리드히리 2세와 푸가의 주제를 주고받으며 즉흥 연주를 함께 했다는 기록이나, <음악의 헌정(Musical offering)>이라는 푸가와 캐논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바쳤다는 대목에 이르면, 바흐는 비록 독일권에서 머무른 작곡가였지만 외교적 역량으로 상당한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폴란드 계몽주의 소사이어티의 명사였던 크리스토프 미츨러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예술적 조력자로서 활동했던 이력도 발견된다. 그렇지만 실제 작품 활동에 있어서는 수구세력 취급을 당했던 사람이 바흐였다.


바흐는 누군가를 지도하면서 예술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자신의 대위법과 피아노 작품을 정리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분의 음악은 오래 연구된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 기교적이고, 자연스러움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에 이르면 바흐는 과거의 오피니언 리더였지만 더 이상 담론을 주도할 수 없는 고집스런 수학적 모델링의 옹호자에 비견되는 듯했다.


그렇지만 후대의 살리에리나 과거 바흐에게 롤 모델이었던 라인켄, 북스테후데와 같은 이들처럼 원로 예술가로서 지분 행사를 하는 모습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왜였을까? 그 이유를 필자는 영원한 현역이고 싶어 했던 그의 열정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 스스로 작품의 조형성과 장식미를 지향했던 것은, 고루한 체계성을 지향한 발로가 아니라, 미학적인 완성도를 추구하기 위한 나름의 방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늘날 그의 작품이 음악적 성서로 추앙되는 데에도 이러한 고집스러울 만큼의 형식주의가 뒷받침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소셜 네트워크 분석이나 시뮬레이션 모델 같은 것들도 이해하기도 복잡하고 배우기도 어렵지만 익히고 나면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 피츠버그의 카네기 멜론대에 모였던 네트워크 과학의 천재들이 고집스럽게 수학과 행렬 기법으로 자신들의 창의적인 영역을 개척해 나갔던 결과가 오늘날 점과 선분의 지도(map)를 이룩했던 것처럼, 바흐의 혁신은 바로크 시대의 음악적 지도를 완성하려고 했던, 지치지 않는 열정의 완성이라고 할 것이다.


흔히 그를 가리켜 음악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천재나 악성처럼 뚜렷하게 성향을 짐작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매우 총론적이고 권위적이라고 할 만큼 넓은 비유다. 결국 그를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결정적인 이유도 이처럼 지속적인 항구 혁신의 의지에 대한 존경이 아닐까. 사실 자신의 음악적 유산에 만족한 채 원로(元老)로서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는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흐는 자신이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고도의 집중력과 전문화 역량, 그리고 남 못지않은 경계를 넘나드는 실력과 자기 혁신의 노력은 65년의 생애에 걸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 어떤 기업의 성공 케이스보다도 그의 생애는 훨씬 드라마틱하고 영광스러운 자취를 남겼다. 이제 우리는 바흐를 천재들의 고향이라고 칭송하는 것에 더해서 경영자들의 고향이자 혁신가들의 고향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Chapter 3 오피니언 리더의 시대

베토벤과 그의 시대 上, 오피니언 리더는 준비된 것이다

신뢰와 매력

베토벤이 활동할 무렵에는 그동안 예술계를 지배했던 유쾌하고 가벼운 문화적 취향이 칭송받던 시절이 지나가고, 삶의 의미를 숙고하는 깊은 사유와 고민을 통한 논의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진지한 예술을 하는 품격 있는 인간을 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베토벤은 어려서부터 이러한 트렌드에 가장 부합하는, 신뢰성 있고 매력 있는 인재였다. 친구였던 의사 베겔러의 소개를 받아 식객으로 초청받았던 폰 브로이닝 가문은 아직 어리지만 어딘지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성숙한 태도를 가진 베토벤의 스토리에 깊이 감동받았다. 본의 유력자 가문이었던 이 집안은 적은 급료를 받고도 성심성의껏 자녀들을 지도하고, 곡을 연주하기 위해 요구되는 세심한 테크닉까지 자세하게 설명하는 젊은이의 태도에 반했다. 단순히 기량 있는 예술가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됐다고 평가받은 그는 폰 브로이닝 가문으로부터 교육 지원과 함께 생계를 감당할 수 있는 정기적인 급여를 받으며 연주 기회를 제공받는다. 부유했던 이 집안은 당시 중서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왕족이었던,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 테레지아의 아들인 막시밀리안에게 베토벤을 소개하고, 시간을 들여 공공 연주회에서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 주었다.

궁중이나 지역 제후의 가문에 소속된 예술가만이 자신의 실력을 선보일 수 있었던 시기에 야인 베토벤에 대한 지원은 거의 파격적인 것이었다. 마케팅 연구자인 크리스토퍼 반 덴 불트 교수는 연결망의 허브(Heb)에 위치한 사람과 가치를 교환할 때에 비로소 네트워크가 힘을 발휘해 덕을 본다고 하였다. 베토벤에게는 바로 이런 행운이 이른 시기에 찾아온 것이다.


속도 조절의 미학

기록에 따르면 1800년에 베토벤이 받았던 연봉은 600플로린 가량(문화경제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오늘날 기준으로 약 3억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한다)으로, 궁중에서 활동하는 카펠마이스터나 받을 수 있던 보수를 수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토벤이 이토록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 가운데서 자신을 과시했다면,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지적한다. 그의 가장 큰 덕목은 바로 속도 조절이었다. 그는 빠른 출세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했다. 다른 이들에게 칭찬받고 영향력을 입증받았다 하여 금세 대작(大作)의 길로 이행하려는 조급함을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로 그는 자신의 포지션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줄 알았다. 왕족이나 명문가에게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해서 금세 카펠마이스터가 되는 단꿈에 젖는 이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젊은 날의 베토벤은 충실한 건반 연주자이자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평가받았다. 물론 출판 시장에서 그의 피아노 소곡집들이나 트리오들은 절찬리에 판매되었다. 출판업계가 특허나 지적 재산권을 통해 작곡가의 노고를 좀체 인정하지 않던 시절에 이는 보기 드문 대접이었다.


베토벤의 속도 조절 전략은 자신의 작품이 갖고 있는 타깃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과거의 작곡가들이 듣기 쉬운 음악을 지향했다면, 1790~1800년대 초반 문화계는 고급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청중들끼리 진지한 토론을 하면서 즐기는 장르를 선호했다. 실제로 베토벤은 음악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줄 아는 후원자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작품을 설파했다.


당시 괴테를 비롯해 독일어권의 청중은 원숙한 천재의 등장을 원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현학적이고 특정 집단의 성향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매체를 갈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따라서 베토벤은 제한적으로 작품을 공유하고 시대를 앞서 나가는 장르를 만들고자 했던 이들의 취향과 접점이 있는 결과물을 내놓는 데 주력했다. 확실히 베토벤의 점진적인 성장 방식은 많은 이들에게 안정적으로 설득력을 얻는 데 공헌했다.


단계 전략을 통해 성장했던 오피니언 리더

과거의 작곡가들에 비하면 베토벤의 일생은 57년의 기간에 걸쳐 다양하고 입체적인 사건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명문 귀족들 사이에서 천재로서 호평받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개인적인 어려움과 전란으로 인해 사회가 피폐해지면서 사교 자체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베토벤을 괴팍스런 천재라거나 막연히 낭만파의 대부라고만 평면적으로 조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젊은 시절의 베토벤은 생각보다 전략적인 사람이었다. 철저하게 음악적 전통과 시대적 요구에 맞게 준비된 오피니언 리더였던 것이다. 다만 그는 과거의 네트워킹 시스템에서 추구되던 상식을 기반으로 한 음악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음악을 하고자 했고, 그러한 이상이 당대의 문화인들과 맞아떨어졌다. 만약 베토벤이 스스로 이슈를 셀링하고자 하는 노력 없이 독자적인 작품 경향을 추구해 나갔다면, 금세 보수적인 지식인들로부터 외면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토벤이 활동했던 시기부터 음악인은 더 이상 상류층이 원하는 결과물을 제조해 내는 직인이 아니라, 고유의 영혼과 작품관을 지닌 창조자(Creator)로서 존중받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원동력 뒤에는, 베토벤처럼 자신의 내공을 갈고 닦기 위해 긴 기간 동안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외부와 환경과 소통하고자 했던 노력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변화를 추구하려는 모든 리더가 처음에는 점진적인 성과의 축적과 자기표현을 통해 정당성을 입증 받아야 함을 알게 된다.



Chapter 4 예술 경영과 창조 경제

예술로 보는 경영 - 이론으로 보는 예술과 경영

경제학의 관점 : 제품 시장의 수요와 공급 논리에 비친 경쟁의 논리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나 케루비니의 오페라 <2일간>과 같은 작품들은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그것을 분석하는 데 필요한 이론들은 제대로 과학적인 틀을 갖추어 정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음악학의 이론이라는 것도 비평이나 양식 분석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서 화성이나 선율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을 시도하게 된 것은 거의 20세기 초·중반부터였다. 따라서 그 이전까지 작곡가들의 활동과 산출물은 거의 관행에 따른 것으로 해석될 수 없었다. 바흐의 아들인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가 작품에 대한 해석과 연주법을 지시한 『트리티스』 같은 서적을 전문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던 것도 음악의 기술적 요소가 대부분 관행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매우 유용한 사회과학의 프레임워크가 마련됨으로써 문화시장이 재정의될 수 있었다. 바로 19세기 후반부터 세계 사회의 질서를 분석적으로 짚어낸 경제학이다.


18세기 후반부터 애덤 스미스가 그림, 무용, 음악에 대한 에세이를 썼던 것도 경제학자들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유효수요 이론으로 뉴딜 정책의 성립과 국가의 시장 개입에 큰 역할을 했던 케인즈도 오페라 극장을 후원했던 사람이다. 독점적 경쟁과 기술혁신의 관계를 제기했던 조셉 슘페터의 애인 중 상당수는 음악인이었다.


경제학에서 음악을 비롯한 예술시장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은 1970년대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대부분 기존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수요-공급의 논리, 이윤 극대화의 논리 등을 예술 분야라는 맥락에서 검증해 보는 정도에 불과했거나, 언급한다 하더라도 사례 제시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미국 정부가 경제호황의 분위기에 힘입어 세수 증대를 위해 미술품에 세금을 매기게 되고, 예술 분야에 대한 체계적 관리 개념이 등장하게 되면서부터 과연 문화시장(cultural)은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 제기가 가능해졌다. 따라서 작품의 가치가 본격적으로 경제성 평가를 받게 된 셈이다.


음악의 소비자(Consumer)들에 대한 관심은 전통적인 수요이론과 문화시장을 연계하는 작업으로 직결됐다. 따라서 대중의 예술에 대한 취향은 일반 생산재를 구매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공급자와 수요자가 만나는 균형점에서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고전주의경제학 이론이 제기했듯이 예술 소비자의 취향은 주어진(Given) 것이었고, 합리적 판단에 기초한 것이었다. 조지 스티글러 같은 전문적인 수학적 모델링을 지향하는 경제학자들이나, 윌리엄 보몰과 같은 경제학자들의 데이터 검증을 바탕으로 한 실증 연구에서 분석 가능성이 현실화됐다.


한편 파리, 베를린, 런던과 같은 문화 중심(cultural Centre)을 중심으로 분포했던 작곡가들이 과연 군집효과(Cluster Effect)와 같은 것들로부터 수혜를 누렸을까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경제학적 분석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지리학 분야의 한 획을 그었던 알프레드 마샬이 기업과 연구소, 정부와 같은 기관이 특정 지역에 모였을 때 과연 시너지가 발생하는가의 문제를 다루었던 중심지 분석이 클래식 음악에도 적용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대로 변방에서 프리랜서처럼 활동했던 인물들보다 문화 수도 인근에서 모여 살았던 작곡가들일수록 훨씬 뚜렷한 생산성 수준을 보여줬다(통계 분석에 의하면 파리의 작곡가와 18~19세기 당시 비교적 변방에 속했던 지역의 작곡가들은 3배 이상의 생산성 격차를 보였다).


경제학이 클래식 음악을 비롯해 문화시장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제도적으로 보다 타당한 경쟁 질서를 만들기 위한 시사점을 이끌어왔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바로크 시대나 르네상스 시대처럼 객관적인 통계 데이터가 남아 있지 않은 시대의 상황도 작품의 수나 활동 기간 등을 기준으로 정량화한 것은 평가해야 할 업적이다. 그러나 제품 시장을 중심으로 한 경제학의 프레임은 작곡가의 사회적 지위나 전략적 격차와 같은 의사결정의 질에 기반한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일찍이 거래비용경제학의 주창자인 올리버 윌리엄슨 교수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전통 경제학은 경쟁의 문제를 독점이나 가격차별화와 같은 제품시장의 문제로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한편 이윤 추구와 합리성 중심의 설명은 창작자의 활동을 작품을 통한 이익과 경제적 성과 이외에 다른 요소로 해석하기 어렵게 한다. 마이클 포터의 스승인 리처드 케이브스가 창조산업에 대해 다루었으면서도 바로크와 고전주의 시대처럼 연주자와 작곡가가 겹치는 시대의 상황들을 분석하지 않은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경제학의 시장에서 제일 중요한 성과변수인 화폐 효용으로 분석하기 어려운 탓이다. 따라서 우리는 경제학이 추구해 왔던 과학성과 논리성은 충분히 인정하되, 수정된 관점에서 바흐나 슈베르트와 같은 작곡가들의 열정을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레몬 시장 개념을 제안했던 노벨상 수상자 조지 애컬로프가 최근 들어서는 정체성 관리 관점의 이타적 행동이나 사회적 기여 활동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개개인의 행복이나 만족감 이외에도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한 기여 활동이 전 분야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는 요지다. 예술 창작의 측면에서도 충분히 검토해 볼 만한 측면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