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무너질 때

   
구사카리 가쓰시
ǻ
미래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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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12��



■ 책 소개
기업의 평균 수명은 지난 한세기 동안 놀라운 속도로 줄어들었다. 1935년 90년이었던 기업의 평균 존속 연도가 20년 만인 1955년에는 45년으로 절반 가량 줄어들었고1975년에는 다시 30년까지 떨어졌다. 지난 1955년에는 22년까지 내려와 급기야 2005년의 경우 평균 15년 수준으로 낮아질 것으로전망된다. 이는 맥킨지 컨설팅 보고서에 나온 말이다.

 


이제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회사의 중심인 기업가, 즉 회사의 사장은 항상 변화에 대비하지않으면 안 된다. 경영 환경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위험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이야말로 성공하는 기업가의 필수조건이다. 파산은 미리 예정하고다가오는 것이 아니므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주는 교훈처럼 위험에 대한 사전적 대비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본격적인 위험관리에 앞서 위험이란 무엇일까? 위험은 어떠한 상황에서 다가오는지정확하게 파악기기는 어렵다. 이 책에는 기업가가 자칫하면 놓칠 수 있는 위험발생 요소를 다섯 가지 군으로 나누고 23가지 에피소드로 세분화하여기업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위기의 발생 단계에서 파산이라는 결말을 마치 드라마와 같이 실제적이고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 저자 - 구사카리 가쓰시 
1942년나가시키 현에 태어나 중소기업 경영 실태 조사 기관인 "도쿄 상공 리서치"에 입사, 정보사업 총괄본부 정보부장을 거쳐, 파산 전문 정보지"TSR"정보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기업경영과 경영 혁신화 등을 주제로 한 글을 쓰고 있다.


■ 역자 - 양원곤
일본 生. 숙명여자대학교와 명지대학교 일본어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출판번역 전문회사 (주) 엔터스코리아의 대표다. 옮긴 책으로는 「억만장자가 들려주는 가난탈출법」,「조직에서 살아남는 50가지 기술」 등이 있다.


■ 차 례
1장 방심, 자기 과신이 화를부르다
에피소드 1. 찾아든 기회에 소신을 잃어버린 기업가
에피소드 2. 소득신고를 누락해 "탈세파산"하다
에피소드 3."고급" 만 고집하다 디플레이션에 침몰하다
에피소드 4. 3대 경영자를 무너뜨린 "전통의 자부심"
에피소드 5. "회사보다 공직이우선"


2장 초조함으로 인한 성급한 판단
에피소드 6. 전통 깊은 업체가 빠진 "돌려막기"의함정
에피소드 7. 거래처를 속여 신용을 잃다
에피소드 8. 노골적인 "미끼상품"이 수명을 단축시키다
에피소드 9. 원산지를속였다가 신용이 추락하다
에피소드 10.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인한 "인건비파산"


3장 경영독재, 체계 없는 성장
에피소드 11. 하청업체를 무시한 독단적인경영자
에피소드 12. 자멸을 부른 성급함
에피소드 13. 전통 기업을 망친 "3대째 경영자"의 공명심
에피소드 14. 즉흥적인전략 수정으로 치명타를 입다
에피소드 15. 수명을 단축한 "무모한 도박"


4장 분식회계, 어음 발행의 유혹
에피소드 16. 손실을 메우려고 서두르다 유혹의수렁에 빠진 침구업체
에피소드 17. 분식회계가 발각되어 순식간에 몰락하다
에피소드 18. 사활을 건 회계조작으로 나락에떨어지다
에피소드 19. 허영에 빠진 "벌거벗은 임금님"
에피소드 20. 감언에 중독 된 "급성장 기업"


5장 내분
에피소드 21. 가족간의 내분으로 은행거래가 정지되다
에피소드 22.구조요청이 파국의 도화선이 되다
에피소드 23. "유산 싸움"으로 신용이 추락하다




회사가 무너질 때


1. 방심, 자기 과신이 화를 부르다


찾아온 기회에 소신을 잃어버린 기업가 - 급성장에 눈이 멀어 경비 남용을 방치한 열쇠 전문 체인
초고속으로 성장하던 기업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이유는 무리하게 규모를 확장하고 비용을 방만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회사가 잘 나갈 때 경영자들은 비용관리에 소홀해져 필요 이상으로 인력과 설비를 늘리는 일이 많은데, 순풍이 잦아들면 잘못된 비용관리가 회사를 기울게 하는 원인이 된다. 열쇠 전문점으로 성공을 거두며 뒤늦게 꽃을 피웠던 한 기업가가 바로 그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도쿄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쇠판매회사에서 일하다가 27세의 나이로 1969년 독립한 스에카와는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경영자였다. 그는 독립해서 키 월드를 설립하고 맞춤열쇠 판매점 경영에 뛰어들었지만 회사는 생각처럼 성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동안은 건설회사에서 열쇠부착공사를 하청받아 근근이 회사를 꾸려 나갔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포를 4개까지 늘리긴 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연간 매출이 3억 엔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아 구멍가게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런 스에카와에게 1990년대 후반에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이 무렵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불법 체류자 정도단의 현관문 따기 범죄에 눈을 돌린 스에카와는 지금의 맞춤열쇠 전문점이라는 컨셉트를 대폭 전환하려는 구상을 했다.


스에카와의 번뜩이는 영감으로 탄생한 새로운 가계는 1998년 2월 도쿄에 처음 문을 열었다. 현관문 따기 범죄 수법에 대해 해설한 브로셔와 신형 자물쇠의 견본을 점포 안에 진열하고, 영업을 개시하자 첫날부터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분량의 주문이 쏟아졌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비용에 무대책
1호 안테나숍의 성공을 지켜본 뒤 스에카와는 곧바로 프랜차이즈 체인점 방식으로 점포를 늘리기 시작했다. 그는 프랜차이즈 체인점을 운영하면서 가맹점에 상품을 공급하는 일을 본사의 주요기능으로 삼고, 매출이나 이익에서 로열티를 징수하는 방식은 일부러 채용하지 않았다. 이 로열티 없음이라는 광고문구가 성공을 거둬, 1998년 6월부터 체인점 모집을 시작하자 개업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대부분은 열쇠가게를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스에카와는 짧은 기간 안에 그들을 전문가로 키울 수 있는 교육과정을 개발해 맹렬한 기세로 체인점을 확대해나갔다. 이 시기에 스에카와의 만족감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최고 실적의 결산을 거래 금융기관에 보고한 다음 달, 하늘을 날 것만 같았던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했다. 스에카와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밤늦게 혼자서 사무실에 남아 있는 시바가키 전무를 발견했을 때였다.


"늦은 시간에 뭘 하는 건가? 그런데 안색이 좋지 않군." 스에카와가 말을 걸자 시바가키는 자신이 고민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오늘 은행에서 재무내용을 개선하지 않으면 거래를 끊겠다고 통지해왔습니다. 그곳은 우리와 오랫동안 거래를 한 곳이라 우리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재무내용을 개선하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매출이 몇 배로 늘어나고 있는데?" "그 쪽에서는 매출이 증가하는데 이익이 1엔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문제로 삼고 있습니다." "적자가 난 이유는 체인점을 지원하여 지점 수를 늘리고 본사의 인원을 증원했기 때문이라고 이미 설명했을 텐데? 그런 선행투자를 이제 와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건가?" "최근 2년 동안 사원이 10명에서 70명으로 증가한 것은 아무리 급성장을 감안한다 해도 너무 지나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구조조정을 하라는 말이군." "그렇게까지 딱 꼬집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런 뜻일 겁니다. 신용금고 쪽에서는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서도 경쟁이 심해져서 지금까지처럼 술술 풀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시바가키가 이렇게 설명하자 스에카와는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하게!"라고 소리치고 사무실을 떠났다. 다음날 스에카와는 아침 일찍 시바가키를 불렀다. 평소처럼 문이 열려 있는 사장실로 시바가키가 들어가서 보니 스에카와가 어젯밤과는 완전히 다른 밝은 표정으로 신문을 펼쳐보고 있었다. "아, 어제는 이야기 도중에 나가서 미안했네. 나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은행의 말처럼 우리에게도 반성해야 할 점이 있었어." "그렇게 말씀하시니…." "현재의 이익을 무시하고 체인점 확대에만 힘을 쏟는 것은 역시 문제가 있어. 그래서 나는 체인점 확장사업 말고 두 가지 사업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네."


스에카와의 예상 밖의 대답을 듣고 시바가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휘청거렸다. 전혀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스에카와를 보고 시바가키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경쟁에 힘없이 무너지다
그후의 상황은 은행과 시바가키가 걱정한 대로 진행되었다. 대형 홈센터와 편의점들이 범죄 예방 효과가 높은 열쇠판매와 부착사업에 뛰어드는 바람에 키 월드는 성장이 정체되는 어려운 상황에 몰렸다. 2002년 봄에는 판매부진에 빠진 체인점이 줄이어 문을 닫아, 본사의 열쇠 판매액은 최고였을 때의 70% 수준으로 떨어졌다. 신규사업은 고사하고 본업까지 위험하게 되자 스에카와는 은행에 급여 지급 등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 달라고 고개를 숙여 부탁했다. 하지만 여름이 되기 전에 대출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급여가 계속 밀리는 상황 속에서 10월 중순이 지나고 시바가키가 모든 것이 끝났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너무 들떠서 내 분수를 몰랐어…." 이렇게 중얼거리는 스에카와를 보면서 시바가키는 일생을 열쇠사업에 바친 이 사내의 좌절이 애처로워 견딜 수 없었다. 200년 11월 1일 키 월드는 법원에 파산을 신청하였다. 부채는 총 8억 엔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고생을 참아 온 경영자는 도약할 기회를 잡은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다. 그 때까지 했던 고생을 보상받으려는 생각이 너무 강한 나머지 갑자기 무모하고 허황된 정책을 내놓는 것이다. 스에카와의 실패가 대표적인 본보기이다. 사업규모 확대에 눈이 먼 그에게 파산은 필연적인 결말이었다.



2. 초조함으로 인한 성급한 판단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인한 인건비 파산- 신규사업의 아이디어에 도취해 아버지의 충고를 잊은 2대 사장
하청업체에서 벗어나는 일은 모든 중소업체의 간절한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망한 자사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소재를 발견한 경영자는 조급하게 서두른 나머지 회사의 자금 사정을 잊고 무작정 신규사업을 시작하는 일이 많다. 주택자재를 하청 생산해 판매액을 늘리던 한 건축자재업체의 사장은 그 함정에 빠져, 신규사업 진출에 따른 사원 증가로 인건비 파산을 초래했다.


하청업체만 해서는 돈을 벌 수 없다
히로스에의 아버지가 1967년에 창업한 히로스에 제작소는 원래 대형 주택회사의 하청업체로서 조립식 주택용 건축자재를 생산했다. 지방의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가업을 이어오던 히로스에는 1996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 후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청업을 계속하면서 신규 거래처를 적극적으로 개척해 사업실적을 향상시켰다. 특히 주택외장재 업체에서 새로 하청을 맡은 아파트용 현관틀의 수요가 눈에 띄게 성장해, 그 결과 히로스에 제작소의 판매액은 1996년 9월 6억 엔이던 것이 1999년 9월에는 13억 엔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히로스에는 그 정도의 성공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판매액은 늘었지만 매년 단가가 하락하는 바람에 순이익은 줄어들고 있어.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청업체인 현재 상태로는 평생 거래처에 이용만 당할 뿐이야.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이러한 생각에 히로스에는 자사 제품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비계의 자동 승강장치는 하청업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꿈에 사로잡힌 히로스에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고안해낸, 운명을 건 아이디어였다.


가야마 건설과 공동개발을 하기로 결정된 후 히로스에가 그 일을 보고하러 갔을 때 아버지는 "축하한다"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도취되어 조급하게 행동하는 일은 없도록 해라"라고 주의를 줬다. 히로스에는 아버지의 충고를 조용히 듣고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자동 승강장치의 발표회를 연 후 히로스에에게 더욱 순풍이 불어 왔다. 가야마 건설이 토목공사와 건물건설에 널리 응용할 수 있는 전천후형 공법의 특허를 사지 않겠냐고 타진한 것이다. 이 특허를 양도받으면 자동 승강장치의 고객에게 비를 피할 가설지붕 등도 공급할 수 있게 된다. "가야마 건설은 지금 보유 특허를 정리하는 중인데 이것도 그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라는 설명을 듣고 히로스에는 두말없이 그 특허를 사기로 결심했다.


자동 승강장치와 가설 지붕을 기둥으로 단숨에 자립 업체로 나아간다. 앞으로 바빠지겠군.


히로스에는 쏟아지는 행운에 가슴이 뛰어 이미 목표를 달성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런 히로스에에게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때는 그 후 약 반 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사장님, 큰일입니다! 세타 강철이 내일 부도를 낼 것이라고 합니다." 2000년 3월 2일, 경리부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세타 강철은 히로스에 제작소가 자사 제품을 만들 공장을 확보하기 위해 매수를 계획했던 건축자재업체로, 사장과도 벌써 일주일 전에 최종 상담을 끝낸 참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경리부장의 보고를 듣고 히로스에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매수를 전제로 빌려 준 1,500만 엔으로 자금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히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저희에게는 숨기고 있던 장부 외의 채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돈을 끌어내는 것이 목적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완전히 속아 넘어갔단 말인가…. 세타 강철 문제는 내가 대응책을 생각하겠네. 자네들은 빨리 다음 매수업체를 찾아보게."


히로스에 제작소는 자동 승강장치 개발로 중소기업 창조활동 촉진법의 적용 기업으로 인정받아 정부계열의 금융기관에서 3억 2,000만 엔을 낮은 금리로 대출받았다. 히로스에는 머릿속으로 설령 세타 강철에 속았다 해도 아직 돈은 충분해라며 계산기를 두들겼다.


다행히 세타 강철을 대신할 매수업체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사업 실적 부진이 오랫동안 계속된 창틀제조업체의 자회사로, 이미 청산 방침을 결정한 상태였지만 공장 설비나 넓이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창틀 업체는 자회사의 공장을 매각하면서 히로스에에게 처음부터 아주 싼 가격을 제시했다. 다만 회사를 청산하기 전에 히로스에 제작소가 사원 27명을 모두 끌어안는다는 조건이었다. 27명을 모두 고용하면 히로스에 제작소의 사원 수는 단숨에 배로 늘어나 인건비 부담이 한 달에 1,000만 엔 가까이 증가한다. 경리부장은 그것을 예상하고 히로스에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을 요청했지만 히로스에는 "돈이 부족하면 은행에서 빌리면 되지. 이제 우리는 유망한 벤처 기업이잖아"라며 그의 충성어린 진언을 물리쳤다.


사장의 독단적인 행동에 경계심을 강화한 은행
그러나 그 후의 상황은 경리부장이 걱정한 대로 진행되었다. 히로스에는 매수한 업체의 사원을 모두 고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동 승강장치 대여회사의 설립도 강행해 새로운 인재를 7명 더 채용했다. 거래은행은 그런 히로스에의 독단적인 행동에 경계심을 강화해 운영자금의 추가대출을 승인하지 않겠다라는 방침을 통보했다.


"사장님, 이제 한계입니다." 매수업체의 사원을 고용한 후 몇 달 동안 자금확보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경리부장은 9월에 들어서자 항복을 선언했다. "금융기관을 찾아가다 보면 아직 자금을 빌려 줄 곳이 있을 거야." "하지만 계속 이렇게 하다가 부도라도 난다면 지금까지 했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법적 절차를 밟아 다시 일어서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리부장의 말을 듣고 히로스에는 "조급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막이 오르기도 전에 무대를 부숴 버린 꼴이 되고 말았어.


히로스에는 그제서야 깨달았지만 실수의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2000년 9월 26일, 히로스에 제작소는 법원에 민사재생법의 적용을 신청했다. 부채액은 약 13억 엔이었다.


히로스에 제작소의 파산은 전형적인 인건비 파산이었다. 하청업체로서 순조롭게 사업을 확장했고 신규사업으로도 유망한 자사제품을 확보했으면서도 운영자금 조달에 실패해 경영이 파탄을 맞이한 것이다. 히로스에는 하청업체에서 벗어난다는 꿈에 도전하는 야심찬 2대 경영자였지만 중소기업의 경영에서는 자금 융통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철칙을 잊는 바람에 목표 달성을 눈앞에 두고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3. 경영 독재, 체계 없는 성장


하청업체를 무시한 독단적인 경영자 - 기대하던 신제품이 실패한 후, 등 돌린 하청업체에 의해 파산한 건축자재업체
회사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독단적인 경영자의 나쁜 버릇이다. 과거의 성공에만 매달려 시대를 읽지 못하면 회사도 함께 추락하고 만다. 한 중견 건축자재업체의 경영자는 구조조정을 하라는 거래처의 건의를 끝까지 무시한 채 거액의 설비투자를 강행해 파산의 길로 빠져들었다.


2000년 1월 5일, 가게우라 스틸의 새해는 예년과는 다른 분위기로 막을 열었다. 이른 아침부터 임원들이 사장인 가게우라의 호출을 받고 본사 회의실로 속속 모여들었다. 임원들이 출석하기를 기다리던 가게우라는 전원이 모인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일어섰다.


"연초부터 심려를 끼쳐서 미안하지만, 오늘 부도가 날 것이 확실해졌소. 따라서 공장 조업은 잠시 멈추기로 하겠소. 빠른 시간 내에 조업을 재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지만, 직원들과 거래처에 동요가 확산되지 않도록 여러분도 냉정하게 대처해 주길 바랍니다. 조업 재개를 위해, 재료를 공급하는 거래처에 현금지불을 해달라고 요청하시오. 직원은 한 사람도 해고하지 않을 것이오. 다만 임원은 50% 이상, 일반 사원도 20% 정도 급여를 삭감할 것이니 다들 그 점은 각오하기 바라오."


사장의 말에 회의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독불장군인 가게우라 사장이 이렇게 말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임원은 없었다. 사장의 각본대로 정말 이대로 무사할까? 참석한 임원들 사이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이 퍼져 나갔다.


100억 엔을 투자해 한 판 승부를 노리다
"기존의 플레이트는 철판을 물결 모양으로 구부려 만들었지만 우리는 판 끝부분을 두 겹으로 접음으로써 강도를 유지하면서도 바닥 면을 평평하게 만드는 기술에 성공했습니다." 시작품을 손에 들고 흥분된 어조로 말하는 기술 부장에게 가게우라는 "그걸 어떻게 사업에 이용한다는 말이지?"라고 물었다. "판을 평평하게 만들면 바닥을 얇게 해서 건물의 높이를 억제해 콘크리트와 철근 등의 사용량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저희의 계산으로는 건축비를 15% 정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기술부장의 말을 듣고 가게우라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가게우라는 신제품에 크게 기대를 걸고 공장 신축 등 적극적인 설비투자에 나섰다. 신형 데크 플레이트의 발매를 위해 투자한 액수는 최종적으로 100억 엔 가까이 불어났다. 거품경제가 붕괴된 후 건설경기가 악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업계에서는 "가게우라의 투자는 무모하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가게우라는 "그냥 지껄이게 놔둬"라며 상대도 하지 않았다.


불황일수록 설비를 강화해, 경기가 회복되면 단숨에 공세에 나선다. 이것이 경영의 왕도가 아닌가? 나를 비판하는 놈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놈들이니 평생을 가도 그 모양 그 꼴로 살겠지. 업계에서 독불장군이라는 평가를 받는 가게우라는 험담을 들으면 들을수록 오히려 힘을 얻었다.


그러나 과감한 설비투자로 사업을 확대해 온 가게우라도 1990년대의 불황에 대해서는 완전히 잘못 예측했다. 2~3년만 지나면 경기가 나아지리라는 기대와는 반대로 건설수요는 도무지 회복되지 않았다. 가게우라 스틸의 판매액은 1991년 12월을 기점으로 계속 감소했다. 시장이 축소되는 가운데 업계에서는 손익을 무시한 덤핑전쟁이 일상화되었고, 가게우라 스틸도 적자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거래처에서는 가게우라에게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한다라는 충고를 몇 번이나 했지만 가게우라는 고집스럽게 거부했다.


가게우라는 준비 끝에 투입한 신제품의 판매상황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지켜봤다. 하지만 그럭저럭 성과를 올린 것은 발매 첫해뿐이었다. 1998년에 들어서자 신형 데크 플레이트의 강도가 부족하다는 점이 계속 지적을 받아 신규주문이 뚝 끊겼다. 결국 천하의 가게우라도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어, 1999년에 들어서자 이익이 없는 부문의 철수와 인원감축을 골자로 한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거래처에서 볼 때는 너무나도 뒤늦은 결단이었다. 주 거래은행인 산타마 은행은 입으로는 "지원하겠다"라고 말했지만, 이미 내년이 되기 전에 파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가게우라의 오만한 태도를 참지 못한 하청업체
부도를 낸 후, 가게우라는 조업 재개를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채권자 집회를 열어 사정을 설명하는 한편, 은행과 거래처를 찾아다니며 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저는 사장에서 물러나도 괜찮습니다. 다만 회사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가게우라의 정성에 감복한 은행과 거래처는 차입금 변제를 일시 연기하고 구입대금을 나중에 지급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에 차례차례 응했다.


미도리 운수가 가게우라 스틸에게 파산신청을 한 것은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2월 21일부터 조업을 재개한 직후였다. 미도리 운수의 사장 고바야시가 파산을 신청한 것은 대기업에는 고개를 숙이면서 하청업체에는 변함없이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 가게우라의 자세를 참고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도리 운수는 이미 몇 달치나 쌓인 운송대금을 지급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가게우라는 "지금까지 자네 회사를 써줬으니까 그 정도는 좀 참고 기다려"라는 대답만 했다. "가게우리 씨, 저도 사원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돈부터 준 다음에 억지를 부리든 말든 하세요." 파산을 신청하기 3일 전에 고바야시는 결심을 하고 가게우라에게 호소했다. 이에 대해 가게우라는 "내가 자네를 잘못 봤군. 그렇게 이기적인 친구일 줄은 몰랐어"라고 무시하는 듯한 말을 했다.


4월 3일, 가게우라 스틸은 파산청구에 대한 대응조치로 법원에 민사재생법 적용을 신청해 사실상 파산했다. 부채액은 93억 엔이었다.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던 가게우라식 사업방식이 완벽하게 실패하는 순간이었다.


불황일수록 설비투자를 강화해, 경기가 상승하면 단숨에 점유율을 높인다. 이것은 1980년대까지 수많은 제조 분야에서 통용되던 승리공식이었다. 하지만 거품경제가 붕괴되고 일본 경제가 구조적 불황의 늪에 빠진 이후에는 합리적인 경영방식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고도 성장기의 성공에 매달린 가게우라는 시대의 변화를 깨닫지 못해, 만류하는 주위의 목소리를 무시하다 결국 침몰하고 말았다.



4. 분식회계와 어음발행의 유혹


치명적인 회계조작으로 나락에 떨어지다 - 거래처 간부와의 유착, 도덕성을 잃은 운송회사의 사장
경영자의 마음에 틈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은 회사의 앞날이 창창하게 펼쳐질 때이다. 좀처럼 쉽지 않은 신규사업을 괘도에 올려놓을 유능한 파트너를 찾은 때 그런 일이 가장 많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대기업과 손잡고 미국산 과즙의 수입 판매사업을 시작한 한 운송회사의 사장은 상대의 재무담당 임원과 유착해 회계 조작에 손을 댔다가 회사를 망치고 말았다.


다각화를 공언한 2대째 사장
가자미가 경영하는 나니와 산운은 철강 제품의 육상수송과 해상수송을 하는, 간사이에서 꽤 규모가 있는 운송회사였다. 창업자는 가자미의 아버지로, 가자미는 대학을 졸업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29세라는 젊은 나이로 사장에 취임했다. 가자미는 특유의 추진력으로 사원을 이끌어 철강관련업계의 고객을 차례차례 개척했다. 그 기세는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지만 해외업체의 등장 등으로 업계가 구조적 불황에 빠지자 사업실적은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1990년 4월, 사업실적 부진으로 점점 초조해진 가자미는 임원회에서 신규사업에 진출할 것을 공언했다.


"나는 최근 몇 달 도안 유망한 사업을 찾아다녔는데, 수입 자유화를 눈앞에 둔 농산업이야말로 유망한 사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네. 구체적으로는 2년 후에 자유화가 예정된 오렌지 과즙으로 대상을 좁혀서, 미국산 과즙을 국내의 식품재료업체에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할까 하네." "하지만 운송회사가 오렌지 과즙을 판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라고 영업상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가자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크게 화를 냈다. "상당한 모험이라는 건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아! 이러쿵저러쿵 군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이 난국을 타개할 아이디어를 내보라고!"


이 회의가 열리고 난 지 1개월 후, 부사장인 난고가 가자미에게 신규사업 건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낭보를 가지고 왔다. 가자미의 오른팔인 난고는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그 날은 사장실에 들어올 때부터 보기 드물게 흥분한 상태였다. "굉장히 서두르는 것 같군. 무슨 사고라도 일어났나?" "아닙니다. 사고가 아니라 우리에게 매우 좋은 소식입니다. 조금 전까지 재팬 물류의 아사모토 상무와 식사를 했는데, 오렌지 과즙 사업에 꼭 참여하고 싶다고 합니다. 아시겠지만 재팬 물류는 재팬 제지의 자회사로, 지금까지 모회사의 물류업무를 혼자서 담당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재팬 제지가 구조조정을 하면서 그 영향으로 업무량이 격감했답니다. 그래서 제가 신규사업을 함께 해 보지 않겠냐고 말을 하니까 매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재팬 물류가 파트너가 된다면 사업 진행의 걸림돌인 자금 융통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과즙의 수입원인 나니아 운수와 새로이 설립할 과즙 판매회사 사이에 재팬 물류를 참여시켜서 자금 융통을 맡기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미국회사가 희망하는 분량으로 과즙 거래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 당장이라도 내가 가서 정식으로 신청을 하지. 약속을 잡아 주게." 가자미는 난고의 어깨를 두드리고 기분 좋게 회담 준비를 지시했다.


유착의 온상이 된 상호 의존
그 후 두 회사의 교섭은 척척 진행되었고, 1991년 5월에는 나니와 산운이 과즙 판매를 위한 자회사인 가와치 상사를 설립해 실제 사업이 시작되었다. 재팬 물류에서 재무와 경리를 책입지는 아사모토는 교섭 과정에서 가자미와 친분이 두터워져 미국에서 첫 물건이 도착할 무렵에는 "모두 가자미 씨에게 맡기겠습니다"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가자미가 생각했던 대로, 값이 싼 미국 산 과즙의 판매액은 수입 자유화 이후 순조롭게 성장했다. 가와치 상사의 연간 판매액이 50억 엔을 돌파한 1995년에는 규슈의 지하수를 원료로 한 생수의 판매로 사업을 확대해 더욱 공세를 강화했다. 그러나 가자미가 하는 일마다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까지였다.


실패의 계기는 1997년에 생수사업에 새로이 해양심층수를 이용하려고 계획한 것이었다. 해양에서 물을 채취하는 설비를 도입하려면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가자미는 그 자금을 주거래 은행에서 빌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금융위기가 시작되어 은행은 순식간에 딱딱한 자세로 돌아섰다. 그래서 가자미는 아사모토에게 매달렸다.


"해양심층수를 추가하면 식품관련사업의 판매액이 늘어날 것이 분명해. 그 점을 감안해서 8억 엔 정도를 빌려 주지 않겠나? 기한은 반 년이면 충분하네. 그 사이에 반드시 은행을 설득할 걸세. 지금까지 자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한 번도 없지 않은가? 재팬 물류에도 이익이 되는 일이네." 가자미가 이렇게 말하자 아사모토는 "정말 반년 만입니다"라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8억 엔의 차입금을 갚지 못하다
그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자미는 재팬 물류에서 빌린 8억 엔으로 새로운 생수공장 건설에 착수하는 한편, 주거래 은행 이외의 거래은행에도 새로이 융자를 요청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반응을 보이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그대로 반 년이 지나 재팬 물류에 돈을 갚아야 할 날이 오자 가자미는 "이 모든 게 자네를 위해서네"라고 아사모토를 설득해, 빌린 돈을 회계 장부에 기록하지 않게 했다.


그 후 경기가 악화되어 과즙과 생수 판매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자 장부 맞추기가 전표조작을 통한 가공판매액 충당으로 발전했다. 원래 가와치 상사가 재팬 물류에 지급해야 할 결제 대금을 재팬 물류가 가와치 상사에 빌려 줘 두 회사가 외견상의 판매액을 만드는 수법이었다. 이 조작을 통해 가자미는 나니와 산운 그룹의 사업 실적이 계속 증가하도록 꾸몄다. 하지만 본업인 운송사업의 하락세까지 겹쳐, 경영 실패는 해를 거듭할수록 엉망이 되었다. 2000년 이후에는 파산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가 되었고, 재팬 물류의 뒷돈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사장님, 아사모토 씨가 자회사에 가공 판매액 문제를 보고하고 사표를 냈다고 합니다." 다음날, 난고에게 이 소식을 들은 가자미는 "그렇군. 그 남자도 끝장이 난 건가"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6월 하순, 재팬 물류와 나니와 산운 그룹은 법원에 잇달아 자기 파산을 신청했다. 나니와 산운 그룹의 부채액은 150억 엔이었다.


가자미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경영자로서 자신을 다스릴 규칙 없이 눈앞의 이익에 얽매여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중소기업으로서 대기업과 양호한 협력관계를 맺는 것은 분명히 이익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자립정신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가자미는 자금 조달이 막힌 시점에서 노력을 포기하고 아사모토와 맺은 유착관계에 몸을 맡기고 말았다.



5. 내분


유산 싸움으로 신용이 추락하다 - 독불장군 회장의 황혼의 사랑에 휘둘린 전통 있는 건축자재 도매업체
기업의 경영자에게 상속은 가장 골치 아픈 문제다. 상속세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한편으로 가족의 싸움을 막을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경영위기의 불씨를 남기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쿄의 한 전통 있는 건축자재 도매업체는 유산을 둘러싼 가족간의 싸움으로 시작된 회사 쟁탈 소동으로 신용을 잃어 파산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했다.


우메즈 가문은 메이지 시대부터 건축자재 사업을 해왔지만 규모가 확대된 것은 야노스케의 대에 와서이다. 1956년에 사장에 취임한 이후 야노스케는 강력한 독자경영을 했다. 그는 시대의 변화를 일찌감치 예감하고 시멘트와 자갈 등으로 품목을 확장해 중견 건축자재 도매업체로서 사업기반을 확립했다.


둘째인 후미타카는 대학을 졸업하고 우메즈 산업에 입사해 오로지 영업만을 담당했다. 하지만 갑자기 장남이 병으로 쓰러졌고, 결국 1987년에 그가 형을 대신해 경영 총수의 자리에 올랐다. 사장이 된 후미타카는 본업 이상으로 신규사업 개척에 힘을 쏟아 판매액에서 신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을 40%로 끌어 올린다는 장기 계획을 세웠다. 아버지의 황혼의 사랑이 들통난 시기는 바로 그 때였다.


후처로 들어온 여장부
미치요는 1992년에 야노스케와 결혼했다. 당시 야노스케는 76세였고 미치요는 44세였다. 야노스케의 뒤를 이어 우메즈 산업의 사장으로 일하던 후미타카와 나이가 같았다. 두 사람의 결혼은 갑작스러웠다. 야노스케의 가족들은 혼인신고를 마친 다음에야 그 사실을 알고 어안이 벙벙했다. 후미타카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미 혼인신고가 이루어진 다음이었기 때문에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그저 불길한 예감만이 가슴 속을 스쳐 지나갔다.


결혼 이듬해에 미치요는 우메즈 산업의 이사로 취임했다. 후미타카는 야노스케에게 항의했지만 야노스케는 들은 척도 안 했다. 후미타카는 심한 분노를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까지 우메즈 산업의 최고 권력자는 야노스케였던 것이다. 결혼할 때와 마찬가지로 후미타카는 미치요의 임원 취임을 승낙해야 했다.


야노스케 회장은 1996년 6월에 세상을 떠났다. 가족의 싸움은 야노스케 회장의 49재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회장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당신과는 한 번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 아버지의 부인이에요. 지금 분명히 말하는데, 상속에 대해서는 제 권리를 분명히 주장하겠습니다. 후미타카 씨, 잘 기억해 두세요." "이런 자리에서 꺼낼 이야기가 아닐 텐데요." 아들인 후미타카는 흥분해서 마구 말을 쏟아내는 미치요에게 한 마디 내뱉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돈, 돈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당신 보고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모두가 어차피 돈 보고 한 결혼이라고 말합니다."


표면으로 떠오른 회사 강탈 계획
"이건 강탈이야!" 1997년 1월, 우메즈 산업의 임원회의는 고성으로 가득했다. 임시 주주총회의 결의로 새 임원을 선임했다는 통지가 후미타카에게 전달된 것이다. 새 임원은 10명이었다. 대표이사는 신미 기요시로 미치요의 측근이었다. 그 아래로는 미치요가 데리고 온 아들의 이름도 있었다.


후미타카는 상속 문제가 불거지는 가운데 미치요가 강경책을 선택했음을 금방 깨달았다. 미치요가 주주총회를 소집할 수 있었던 것은 야노스케가 생전에 주식의 일부를 양도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도화선이 되었다. 미치요가 노린 것은 우메즈 산업이 자산으로 보유한 토지였다. 야노스케는 보유한 나머지 주식을 후미타카에게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상속이 확정되면 후미타카가 최대 주주가 될 것이 분명했다. 회사의 재산을 노리는 미치요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전에 경영권을 쥐어 돈을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새 임원 선출 통지가 도착한 후, 후미타카는 임원회에 이어 간부 사원을 모은 긴급회의를 열어 사내의 단결을 호소했다.


"회사를 빼앗으려는 자들의 목적은 회사의 땅이지 사업이 아니오. 모두의 고용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결속해 싸웁시다." 후미타카는 열변을 토하고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고문 변호사를 통해 도쿄 지법에 새 임원의 직무 정지를 신청하고 동시에 임시 주주총회의 무효화와 임원등기소멸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1997년 2월, 지방 법원은 후미타카의 요청을 받아들여 새 임원의 직무를 정지하는 가처분을 내렸다. 이에 이어 4월에는 상속 문제가 결론이 나서 야노스케 명의의 주식이 정식으로 후미타카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에 회사 탈취 공작은 일단 봉쇄되었다.


업계에 퍼지는 경영 위기 소문
그러나 주주총회를 둘러싼 재판이 장기화되면서 그 영향이 점점 누적되었다. 재판이 길어짐에 따라 거래처는 후미타카에 대한 불만이 강해졌다. 그러나 후미타카와 미치요 양쪽이 계속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화해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업계에는 1998년 초부터 우메즈 산업의 경영 위기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재 납품처인 종합건설회사의 신용 불안에 대해 보도될 때마다. 사람들은 우메즈 산업도 위험하다고 수군거렸다. 게다가 끝날 줄 모르는 내분이라는 악순환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거래처와 은행측에 불신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후미타카는 구입처의 사장에게 파산할 각오를 굳히는 편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미치요 씨가 노린 토지를 팔면 채무 변제의 기초 자금을 마련할 수 있소. 당신이라면 거기에서 재출발할 수 있을 것이오." 부도를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그 충고에 따르는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 우메즈 산업은 다음 달에 도쿄 지법에 화의를 신청했다. 부채액은 약 100억 엔이었다.


가족 기업의 상속 문제에서는 회사가 소유한 토지가 최대의 초점이 되는 일이 많다. 상속세 대책의 일환으로 소유주가 회사 명의로 부동산을 보유하는 일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우메즈 야노스케도 그렇게 해서 세금을 절약하려고 한 경영자였는데, 중요한 자사주식 상속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젊은 후처가 조르자 주식의 일부를 넘겨 준 것이 골육상잔의 불씨가 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