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김종래
1952년 충남 논산출생. 서울 경복고와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사회부·정치부·편집부에서 근무했고, 이후 조선일보 사회부장, 편집총괄 및디지털미디어 담당 부국장, 조선일보 출판국장을 역임했다.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대우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몽골대통령 고문이다. 칭기스칸과유목민의 역사를 21세기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한국에 몽골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리는 등 두 나라 우호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몽골정부로부터 최고훈장인 북극성 훈장과 친선훈장을, 몽골국립대학과 칭기스칸 아카데미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밀레니엄맨 칭기스칸』『CEO 칭기스칸-유목민에게 배우는 21세기경영전략』『우마드-여성시대의 새로운 코드』『유목민이야기-유라시아 초원에서 디지털 제국까지』『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프로마니아』가 있다.『밀레니엄맨 칭기스칸』『유목민이야기』는 몽골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CEO 칭기스칸』은 독일어로 번역 출간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시회에 전시돼있다.
■ 차례
프롤로그 - 또 다른 유목민DNA를 찾아서
1장 말 위에서 천하를 정복할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통치할 수는 없다
1. 우리는 점령군이다. 그러나 약탈과 강간을 일체 금한다
2. 물의 고속도로, 중국 지도를바꾸다
2장 꿈을 잃어버린 신바람의 땅
1.벼랑 끝에 선 칸의 손자
2. 피의 숙청시대
3장 오늘은 어제의 끝이자 내일의시작이다
1. 스스로 택한 굴욕은 굴욕이 아니다
2. 죽기 전에 죽는 자는 묻힐 곳도 없다
3. 전에는 제가,지금은 형이 옳습니다
4. 기회든 위기든 모든 것은 현장 속에 있다
4장 매 초마다 지구 단위로생각하라
1. 신개념 국가 대원제국
2. 쿠빌라이노믹스
5장 세계를 뒤흔든 대원제국 쇼크
1.바다를 누비는 대원제국 무역선
2. 유럽인들, ‘왕 중 왕’을 찾아 나서다
3. 아랍인, 정치 없는 경제도시의 위력에놀라다
4. 유대인, 마르코 폴로보다 먼저 원제국을 찾다
5. 대도를 오가는 고려인들
에필로그 - 을(乙)로 살아 갑(甲)으로 부활한후계자
결단의 리더 쿠빌라이칸
프롤로그 - 또 다른 유목민 DNA를 찾아서
쿠빌라이칸. 칭기스칸의 손자다. 1215년에 태어나 80세에 사망할 때까지 몽골초원과 중국대륙을 누비며 인류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풍운아 중의 풍운아이다. 칭기스칸의 네 아들 중 막내아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주위의 숱한 핍박과 역경과 맞서 싸우며, 대원(大元)제국을 창업한 유목민이다.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틀어쥔 뒤 이민족으론 처음으로 중원의 황제에 오른 몽골인이다. 인류사상 처음으로 글로벌 경영시스템을 탄생시켜 지구촌 시대를 연 끈질기고 신념에 찬 통치자였다. 원대한 비전으로 북경과 그 주위에 지상 최대의 메트로폴리스를 건설하고, 북경과 항주, 북경과 천진을 운하로 연결해 물류 네트워크의 신기원을 이룩한 개혁정치가였다. 은본위제에 바탕한 고액의 소금 인출권(염인, 鹽引)과 교초라는 지폐를 만들어 중세에 달러 같은 기축통화를 유통시킨 치밀하고 노련한 경영자였다. 도자기를 구울 때 나무 대신 석탄을 이용하는 기술을 보급해 에너지 혁명을 일으키고, 양자강 아래의 경덕진(景德鎭)을 세계의 공장지대로 키운 실용주의자였다. 길고 넓은 시야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를 면담하고, 16세 된 딸을 고려에 시집보내 고려를 부마(駙馬) 국가로 삼은 세계인이다.
쿠빌라이는 할아버지 칭기스칸과는 다른 인간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초원과 말의 시대를 과감하게 마감하고, 바다와 배의 시대를 출범시켰다. 할아버지가 열었던 정복과 약탈과 정치의 시대를 단호하게 끝내고, 통치와 통합과 경영의 시대를 개척한다.
쿠빌라이의 족적을 쫓다보면 오늘날 위기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전율처럼 와닿는 사실, 쿠빌라이 생애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결단력 있는 자만이, 결단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 더 큰 꿈, 더 원대한 꿈을 가진 자만이 결단할 수 있으며, 진정한 결단은 하나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유부단 좌고우면 우왕좌왕은 위기의 시대엔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개인, 조직, 공동체 그 어느 것도 예외일 수 없다.
쿠빌라이는 일평생 위기를 먹다 간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덮치는 위기 때마다 결단의 힘으로 정면돌파해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불행, 죽음을 오가는 위기가 그를 단련시켰고, 스스로 야수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낭만적 유목민이 아니었다. 약탈과 전쟁에 승부를 걸지도 않았던 또 다른 유목민 DNA의 소유자였다.
1장 말 위에서 천하를 정복할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통치할 수는 없다
1. 우리는 점령군이다. 그러나 약탈과 강간을 일체 금한다
- 전쟁 장터
때는 1268년. 몽골제국 제5대칸이자 대원제국의 황제에 오른 쿠빌라이칸이 남송 정벌을 선언하고 군사를 움직였다. 1차 목표는 양자강의 지류인 한수 접경이자 악주의 초입에 있는 상양과 번성. 강의 양 옆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쌍둥이 도시였다. 그런데 맹렬한 속도로 진군해오던 몽골군이 갑자기 말을 세웠다. 그리고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후 몽골군이 쌓은 거대한 토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양과 번성을 둘러싼 무려 100킬로미터의 성벽이었다. 상양성과 토성이 마주 선 채 지리한 대치상태가 계속됐다.
- 전함을 만드는 몽골병사
상양 번성이 포위된 지 3년이 지난 1271년 6월, 남송은 최후의 수단으로 수륙기동부대를 파병했다. 육로가 아니라 물길을 이용한 지원 병력이었다. 그러나 육군 전투력에서 세계 최강의 몽골군이 수군 전투력에서도 막강해진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남송군. 결과는 전멸이었다. 이로써 남송은 사실상 끝났다.
- 초원을 대체할 신천지를 찾아라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통치할 수는 없습니다.“ 『원사』에 기록된, 한인 참모 유병충이 쿠빌라이에게 건의한 말이다. 쿠빌라이 노선을 이보다 더 절묘하게 상징하는 표현은 없다. 정복보다 통치가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우쳐주는 말이다. 먹을 것이 절대 부족했던 몽골 유목민의 전통적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정복을 의미했고 정복은 파괴 약탈 살육을 뜻했다. 그러나 통치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유병충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복 대신 통치를 택한 쿠빌라이는 이단자인가?
그럴 수도 있다. 쿠빌라이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선조 대대로 삶의 근거지로 삼았던, 그리고 무엇보다 할아버지 칭기스칸의 창업 이념이기도 했던 초원의 가치를 버렸다. 그럼 그 다음 수순은 무엇일까. 중국이었다. 중국은 초원을 대체할 신천지였다. 마지막 목적지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더없이 중요한 지역이었다. “몽골제국이 초원에 안주하는 한 반드시 무너지게 돼 있다. 그걸 막으려면 제국의 중심을 중국으로 옮기는 길밖에 없다. 그 신천지를 수중에 넣어야 제국의 위기를 끝낼 수 있다.”
2장 꿈을 잃어버린 신바람의 땅
2. 피의 숙청시대
- 과거의 덫
칭기스칸 사후 벌어진 후계구도 갈등은 어거데이칸, 구육칸, 멍케칸으로 이어지면서 점점 격렬하고 무자비해진다. 창업자 칭기스칸의 성공 밑거름은 수십 년 계속된 5개 부족 60개 씨족간 내전을 종식시킨 데 있었다. 그 내전의 악몽이 다시 현실로 되살아난 것이다.
권력투쟁은 칭기스칸의 후계자 선정과정에서부터 시작됐다. 제2대 칸에 오른 삼남 어거데이칸이 1241년, 어거데이칸이 집권 12년 만에 사망하고 장남 구육이 5년 뒤 제3대 칸에 취임했으나 1248년 봄, 유럽 원정에 나섰다가 사망했다. 멍케칸과 쿠빌라이 세대 입장에서 보자면 칸위쟁탈전은 톨루이의 장남 멍케의 즉위로 마감됐어야 했다. 칸에 오를 자격이 있었지만 적장의 아들이란 이유로 비껴간 조치 가문, 혹은 의문사당해서 부당하게 기회를 놓쳤다고 억울해 하는 막내 톨루이 가문이 연합해 과거를 정상으로 돌려놓았으니까 명예도 회복된 셈이었다. 그때부터는 몽골초원에 희망과 꿈의 싹이 새록새록 돋아나야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 물고 물리는 권력쟁탈전
멍케는 칸에 오르자마자 바투의 지원 아래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다. 숙청대상은 자신의 가문(톨루이 가문)과 바투 가문(장남 조치 가문)을 소외와 몰락으로 내몬 어거데이와 차가타이(차남) 가문이었다. 이제 44세의 멍케 앞에 나설 자가 없었다. 그럴수록 제국은 또다른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갔다. 톨루이 가문의 형제간 혈투였다. 아버지를 잃은 설움을 딛고 똘똘 뭉쳐 다른 가문과 혈투를 벌였던 멍케를 포함한 네 형제들은 이제 서로를 할퀴는 권력투쟁에 돌입했다. 권력투쟁 이면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생생하게 목격하며 성장한 형제들이어서, 쟁투는 더 치열하고 비열했다. 투쟁의 직접 당사자는 멍케와 쿠빌라이,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였다. 훌레구는 약간 비켜 있었다.
- 제 갈 길 가는 형제들
훌레구는 아랍에 자신만의 새 세상 일칸국을 창업한다. 막내 아리크 부케는 초원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쿠빌라이는 24세 때 어거데이칸으로부터 형주를 영지로 받았다. 그는 카라코롬에 머물며 형주 경영을 현지관리들에게 맡겨놓고 있었다. 멍케가 칸에 오르자 쿠빌라이는 떠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때마침 멍케는 섬서, 하남을 주면서 쿠빌라이에게 중국 경영을 떠 안겼다. 지금의 만리장성 주변과 내몽골 자치구 지역에 해당하는 북중국 자투리땅이었다. 쿠빌라이는 그때 처음 중국땅을 밟는다. 자신의 이름이 몽골 역사에 새겨지는 순간도 이때부터이다.
중국은 농경과 도시와 문명의 상징이었다. 그 중국을 경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멍케에겐 골이 아픈 과제였을지 모르지만 쿠빌라이는 생각이 전혀 달랐다. “정체된 몽골제국에는 활로가 없다. 이대로 가면 제국은 무너진다. 일대 위기에 봉착해 있는데도 형 멍케와 그 측근들은 초원 중심 사고방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그러자면 새로운 생각,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졌다. 중국이 새로운 미래를 가져다 줄 신천지이다. 중국은 더 이상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통치의 대상이다. 이단자로 매도당해도 좋다. 제국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지금 시작해도 늦었는지 모른다.”
3장 오늘은 어제의 끝이자 내일의 시작이다
3. 전에는 제가, 지금은 형이 옳습니다
- 살생부 프로그램
700~800년 전, 몽골제국 대칸의 사망은 유라시아 전체에 폭풍을 몰고 왔다. 멍케칸이 사망한 뒤 1년도 그랬다. 초원의 실력자들 대부분이 가장 강력한 후보자였던 아리크 부케 진영에 가담했다. 한편 쿠빌라이 진영은 멍케칸 사망 직후 멍케칸과 아리크 부케 진영 실력자들에 대한 성향 분석부터 착수했다. 쿠빌라이가 칸에 오른 지 1주일, 아리크 부케가 미처 칸에 오르기도 전의 일이다. 쿠빌라이는 이들을 처리할 선무사들을 지역별로 지명했다. 사전에 정보교환을 하며 치밀하게 움직인 쿠빌라이 진영. 그들에겐 별다른 군대도 없었지만, 상대방들은 그들의 기습작전에 속속 무너졌다. 제거 작업에는 약 2개월이 소요됐다. 7백 50년 전, 중국 대륙에서의 2개월이다. 정보의 힘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다. 혼돈 속에서 발휘하는 정보의 가공할 위력은 소름끼치도록 무섭다.
- 전방위 기습작전
반대파를 제거한 쿠빌라이 진영은 곧바로 물자, 특히 전쟁에 필요한 군수 병참물자 확보에 나섰다. 1260년 8월 18일, 모든 것을 총점검한 쿠빌라이는 직접 아리크 부케 진영의 기습공격을 지휘한다. 초원과 중국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가히 유라시아판 남북전쟁이라 할 만 했다. 쿠빌라이측은 초반 전투에서 대승했다. 예상을 뒤엎은 결과다. 아아리크 부케는 몽골고원 서쪽 멀리의 알타이 산맥 쪽으로 도주했다. 아리크 부케 진영 본거지였던 초원에서조차 밀리는 형국이었으니, 쿠빌라이의 근거지 중국에서는 싸우나 마나였다. 거의 모든 전투에서 아리크 부케 진영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 물자봉쇄로 결판내다
“이제 전쟁을 끝낼 때가 왔다.” 쿠빌라이는 전쟁을 마무리할 카드로 물자보급로 차단을 꺼내들었다. 그가 점령한 중국은 초원을 먹여살리는 물류기지였다. 쿠빌라이는 초원의 카라코롬으로 향하는 물자공급 루트를 봉쇄해 버렸다. 아리크 부케 진영의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다. 쿠빌라이의 중국 근거지인 개평부는 원래 초원으로 향하는 물자의 집결지였다. 쿠빌라이는 개평부를 장악하고 보급로를 차단했다. 경제 봉쇄는 곧바로 위력을 발휘했다. 물자 없이는 전쟁도 없다.
쿠빌라이 입장에서 보면 이 전쟁은 강자를 향한 약자의 과감한 도전이 승리를 거둔 쾌거 중의 쾌거였다. 아리크 부케가 막내라는 프리미엄과 어머니의 사랑과 대칸인 형의 지지와 초원세력이라는 거대한 군사력에 갇혀 안주해 있는 동안, 절치부심하며 위기를 돌파해 온 아웃사이더의 승리였다.
4장 매 초마다 지구 단위로 생각하라
1. 신개념 국가 대원제국
- 대원(大元)에 담긴 뜻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한 전방위 건설 작업에 착수한 쿠빌라이. 출발점은 나라 이름 짓기였다. 그는 중국인 참모 유병충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정한다. 대원(大元). 원은 『역경(易經)』의 ‘대재건원(大哉乾元)’에서 따왔다. 건(乾)은 천지(天地)를, 원(元)은 시작(始)을 의미한다. 따라서 건원(乾元)은 하늘의 시작, 혹은 만물의 근원을 뜻한다. 새로운 시작은 근원에서 나온다. 그것은 쿠빌라이의 철학이었다. 원(元)은 추상명사다. 중국에서 추상명사를 왕조 이름으로 삼은 나라는 원나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쿠빌라이만이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의지를 국호에 담아냈다. 실제로 그가 세운 대원제국은 동양에서 발원한 최초이지 마지막 세계 국가였다.
그가 연호(年號)를 사용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 연호는 통치자가 무한한 시간의 흐름을 자신의 의지에 대해 획정하는 것이며, 또 자신을 위한 기록을 후세에 남기는 것이다. 쿠빌라이는 쿠데타로 칸에 오른 후엔 중통(中統)이란 연호를, 동생 아리크 부케가 항복한 1264년부터는 지원(至元)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쿠빌라이칸의 지배를 상징하는 지원 연호는 그가 죽은 해인 지원 30년까지 이어진다.
쿠빌라이는 ‘하늘(天)’을 나타낸다 하여 ‘대원(大元)을 국호로 정하고, 그 하늘의 아래인 ’땅(地)‘의 중심이 되는 제국의 수도를 ’대도(大都)‘로, 천지의 운행을 새기는 시간(時)’의 이름으로 ‘지원(至元)’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 세계의 허브도시, 대도
몽골과 중국, 이슬람을 합친 세계제국. 거기에 킵차크칸국과 일칸국, 어거데이칸국과 차가타이칸국을 일종의 연방국가로 거느린 쿠빌라이제국은 그에 걸맞은 수도건설이 절실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가 오늘날의 북경인 대도(大都)이다.
그런데 대원제국은 왜 수도를 현재의 북경으로 정했을까. 중국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북경의 위치는 동북쪽에 치우쳐 있다. 남송지역을 포함한 전국 통치에 유리한 곳이 아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제국의 중심을 북경보다 더 남쪽으로 할 수는 없었다. 몽골초원 때문이었다. 동생 아리크 부케를 제압하긴 했지만 남아있는 초원보수세력은 여전히 불안요소였다. 유럽과 페르시아쪽의 몽골세력 동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감안했을 때 초원과 중원을 동시에 통치하기 위한 최적지는 북경이었다. 북경은 초원의 최남단이자 농경의 최북단이었던 것이다.
- 공존하는 라이벌세력
쿠빌라이 권력의 원천은 몽골의 군사력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중국의 행정력‘은 몽골의 정치 군사력에 이어 쿠빌라이 권력의 두 번째 토대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군사와 경제, 초원과 도시 두 세계의 기계적 결합만으로는 안 된다. 신체에 빗대어 초원을 뼈대, 중국을 살이라고 한다면 신체를 도는 혈액이 필요했다. 그걸 이룰 물류와 통상은 누가 담당해야 했을까? 오래전부터 몽골과 연을 맺고 유라시아 대륙의 통상을 장악하고 있던 ‘색목인의 상업력’이었다. 색목인은 갈색 눈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몽골인, 중국인이 아닌 위구르인이나 이슬람인, 유럽인들이다. 그들은 쿠빌라이 권력의 세 번째 토대가 된다.
군사력의 몽골인, 행정력의 중국인, 상업력의 색목인. 대원제국은 이 3대 라이벌세력이 ‘함께 또 따로’ 사는 공동체였다. 쿠빌라이는 라이벌세력의 공존이라는 원칙 아래 대원제국의 시스템을 함께 만들고 운영할 엘리트들을 모았다. 능력만 있으면 인종과 종교와 출신을 가리지 않았다.
5장 세계를 뒤흔든 대원제국 쇼크
1. 바다를 누비는 대원제국 무역선
- 정화의 대항해가 가능했던 이유
중국을 통일한 쿠빌라이는 바다를 통한 남해 원정을 시작했다. 원정 대장은 천주시박사이면서 대원제국 최대의 해상왕이던 포수경이었다. 그는 베트남, 태국, 미얀마, 자바, 수마트라에 이르는 원정을 수행했다. 말이 원정이지 경제적 이권 확보가 목표였다. 원정에 참가한 사람들도 대부분 자원자들, 주로 해상 무역상들과 이슬람 상인들이었다. 원정함대는 각국을 방문해 경제 교류를 하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무역의 이점을 알리는 일종의 선전부대였다. 이 원정 결과 대원제국은 천주에서 동남아시아를 거쳐 이란의 호르무즈 등으로 이어지는 해상 무역 루트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같은 대원제국의 항해 노하우의 무역시스템이 낳은 걸작품이 명나라 정화의 해외원정이었다. 정화함대는 60여 척의 대형함선과 100여 척의 소선으로 구성됐다.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힘든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승선한 장병 수가 무려 27,800명이나 됐다고 한다. 정화 함대 중 대장선은 황제에게 바칠 보물을 싣고 오는 배‘라는 뜻에서 보선(寶船)으로 불렸다. 보선, 즉 정화가 탄 기함은 길이가 150미터, 폭이 60미터에 달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보선의 선적량을 3,100톤으로 추정한다. 정화는 7차에 걸쳐 항해했다. 18만 5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뱃길이었다. 처음에는 동남아 각국을 순방했지만, 나중에 인도양과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 아프리카 동부 연안에까지 다녀왔다.
정화가 활약했던 바다에 유럽의 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정화의 대항해보다 80~90년 뒤의 일이다. 바르톨로뮤 디아즈가 희망봉에 도달한 때가 1487년이었으며,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인도 서해안에 다다랐다. 정화 함대는 시기뿐 아니라 규모면에서도 유럽인들의 대항해를 압도했다.
- 육지에 갇힌 동양, 바다를 차지한 서양
아이러니컬한 것은 체제정비를 마친 명나라는 해상활동을 강화한 게 아니라 중단시켰다는 사실이다. ‘죽의 장막’을 쳐 세계와 중화를 차단시킨 것이다. 명대에 더 굳건해진 만리장성은 육로를 막았고, 해금(海禁) 정책은 바다를 막았다. 명은 몽골유목민들의 재침공에 대비하고 내부 결속을 다지는 등 국력을 북방으로 쏟은 것이다. 여진족과 몽골인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다 간신히 나라를 되찾은 중국인들이어서 북방초원을 경계하고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류사의 반전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됐다. 명이 몽골 쇼크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쏟는 사이 바다는 유럽인들의 수중에 넘어가 그들의 대항해 경쟁장이 됐다. 그로부터 유럽은 비약적 발전을 이루고, 동양은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한다.
처음 유럽에 대원제국 쇼크를 전한 사람들은 여행가들이었다. 마르코 폴로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가 전한 대원제국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대원제국 쇼크가 유럽에만 몰아친 게 아니다. 충격을 받기는 무슬림도 유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세계를 오가는 여행가가 됐다. 그들의 일부가 남긴 기행문들을 보면 오늘의 세계문명을 주도하고 있는 유럽인들 그리고 아랍인들, 유대인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대원제국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