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실록 속에 나타난 세종의 모습을 신하들과의 소통, 백성에 대한헌신, 국가의 최고경영자로서의 리더십,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본다. 특히 “15세기 조선의 기적”을 이룬 세종대왕의 리더십을 현대 경영에접목시켜, 실록에 나타난 세종의 모습을 ‘신하들과의 소통, 백성에 대한 헌신, 국가의 최고경영자로서의 리더십’ 등 3가지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 저자 박현모
서울대학교에서‘정조(正祖)’로 박사 논문을 쓴 그는 원래 베버(Max Weber) 연구자였다. 베버가 말하는 ‘지도적 정치가’를 우리 역사에서 찾고자 읽기시작한 『정조실록』에서 국왕 정조가 직면한 ‘정치세계’의 음험함과 개혁군주의 운명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정조에게 받은 의외의 선물은바로 세종대왕이었다.”고 하면서 정조가 가장 존경했으며 오천년 우리 역사의 전성기를 연 세종 리더십의 비밀을 찾기 위해 『세종실록』을 탐독했다.지난 몇 년간의 ‘실록학교’ 강의는 그러한 탐독의 과정이자 결과였고, 이 책 『세종처럼-소통과 헌신의 리더십』은 그 귀중한 결실이다. 현재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겸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으로 국왕 및 재상의 리더십을 연구, 강의하고 있다. 「역사와 사회」 편집위원장을 지냈고,중앙일보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정치가 정조』『세종의 수성 리더십』『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등이 있고, 50여 편의연구논문이 있으며, ‘실록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 "실록학교" 홈페이지 :
■ 차례
프롤로그 - 왜 지금 세종을재발견해야 하는가?
여는 강의 : 마인드맵으로 읽는 세종 리더십
제1부 위대한 지도자의 조건
제1강세종의 ‘습관노트’ - 세종은 누구인가
제2강 태종의 위대한 선택 - 세종시대를 위한 길닦기
제3강 왕의 조건 - 왜충녕인가
제4강 정치비전 -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세운다
제5강 성공적 왕위 승계자 태종의 행복 - 억만금으로도 어진 후계자 살 수없다.
제2부 세종식 경영 : 인재경영과지식경영
제6강 인재충원 - 인재의 선발, 검증, 재교육 과정
제7강 강점경영 - 공적으로 허물을 덮어라
제8강혁신경영 - 수령 임기 늘려 유능한 관료로 만들라
제9강 독서경영 - 제왕학 교과서 『대학연의』의 정치학
제10강 토론의 힘 -파저강 토벌 대논쟁
제11강 세종의 열린 수업 - 책 읽는 순서와 공부 내용
제3부 세종의 비전 경영
제12강 창조와문화국가 비전 - 훈민정음 창제
제13강 영토비전 - 4군6진 개척
제14강 법 제도의 존립 이유 - 수령고소금지법개정
제15강 마음경영 - 백성을 감동시켜라
제4부 어록으로 보는 세종 리더십 : ‘세종십계명’
제1계명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제2계명 왕을 추대한 백성들에게 헌신하라
제3계명 인재를 기르고 선발하고맡겨라
제4계명 싱크탱크를 활용하고 회의를 잘 하라
제5계명 억울한 재판이 없게 하라
제6계명 외교로 전쟁을 막고 문명국가를건설하라
제7계명 영토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
제8계명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온 힘을 기울여 실천하라
제9계명 자기 관리를철저히 하라
제10계명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라
에필로그 - 다시, 세종처럼
부록
세종대왕과 그의 시대
조선임금 계보도
세종처럼
프롤로그 - 왜 지금 세종을 재발견해야 하는가?
"요즘 사람들은 역사를 좋아하면서도 배우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백여 년 전 마키아벨리가 『로마사론』을 쓰면서 한 말입니다. 국왕?장군?시민들의 영웅담을 즐기면서도 정작 “그들이 어떻게 공화국을 정비하고, 전쟁을 지휘하고, 질서를 세워갔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세태를 꼬집은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어떻게’입니다. 그동안 역사적 사건과 사실을 배울 기회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과 장영실과 김종서가 일을 할 때 장애물이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세종대왕처럼 유명한 분도 드물지만, 세종만큼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정치가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개선해 보고자 만들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세종실록』에 있는 내용을 국민들께 생중계한다는 마음으로 사료를 재구성해서 엮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지난 3년간의 ‘실록학교’ 강의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실록학교’는 『세종실록』『정조실록』『영조실록』 등을 주제별로 나누어 6주 만에 완성하는 강좌인데 강의를 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세종이 결코 ‘고분고분한’ 왕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후세의 조광조나 이이가 말한 것처럼 그는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 임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추진력이 강한 군주였습니다. 세종 자신의 말처럼 북방영토개척이나 수령육기제나 세제개혁 등은 “여러 사람의 논의를 배제하고” 왕의 결단으로 추진했던 일이었습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그리고 황희를 정승으로 발탁할 때 신하들의 반대가 얼마나 거셌습니까? 한마디로 그는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일단 정해지면 끈질기게 구성원들을 설득하고 다독이며, 또 어떤 때는 위협까지 하면서 ‘이끌었던’ 리더였습니다.
세종은 또한 일상적인 일들은 신하들에게 위임했지만, 중대한 문제는 직접 계획을 세우고 추진과정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종이 목표를 정할 때까지, 그리고 결단을 내릴 때까지 끊임없이 신하들과 의논하고 토론했다는 사실입니다. 제아무리 고상한 비전이 있다 하더라도 신하들의 동의와 백성들의 지지 없이는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신하들에게 “함께 의논하자”라고 말했고 재위기간 중에는 ‘국정대토론’의 장을 열어서 신하들로 하여금 말과 아이디어를 쏟아놓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황희, 최윤덕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는 반대자로 하여금 그 일을 책임지고 추진하게 하였습니다. ‘소통하지 않는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다’라고 보았던 세종은 설정된 목표에 왜 도달해야 하는지,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조만간 어떤 파국을 맞게 되는지를, 상세하고 명확하게 일깨워가면서 함께 나아갔습니다. 바로 여기에 세종 리더십의 요체가 있습니다.
그는 ‘말’에 멈추지 않고 ‘일’을 이루어낸 지도자였습니다. 조선을 ‘세계 최고의 문명국’으로 올려놓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재위 중반부가 되면서 온몸은 망가지고 갖가지 질병으로 힘들어하면서도 그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설득하고, 추진하고, 확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이 아니라 몸으로써, 결과로써 백성을 하늘같이 섬기는 정치를 해낸 것입니다.
위대한 지도자의 조건
왕의 조건 - 왜 충녕인가
양녕은 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이 그 자리를 잇습니다. 태종은 1418년 6월 3일 이렇게 말합니다. “백관들이 양녕 이제가 잘못이 많다 하여 글을 올려 폐하길 청함에 그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하게 하려 한다.“
태종은 적장자 원칙에 따라 양녕의 장자에게 왕위를 계승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신하가 그래서는 앞날의 무사함을 보장할 수 없다, 어린 왕을 쫓아내기 위해서 무슨 일을 꾸밀지 알 수 없다며 반대합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바로 다음의 단종 시대에 일어났지 않습니까. 어쨌든 이런 이유 때문에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합니다. “어진 이를 골라서 왕으로 세우시길 바라옵니다.” 그러자 태종이 말합니다. “그러면 경들이 어진 이를 말해 보아라.“ 하지만 이 대목은 신하들로서 굉장히 위험한 순간입니다. 왕자 누군가의 이름을 댄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들이나 신하는 아버지나 임금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직접 고르십시오.”
다시 태종이 말합니다. “충녕대군이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아서 몹시 춥거나 몹시 더운 날씨라도 밤을 새워 글을 읽는다. 또 정치에 대한 대처를 알아서 언제나 나라에 큰일이 생겼을 때 의견을 내는데 소견이 범상치 않고 뛰어났다. 또 그 아들 중에 장차 크게 될 자격을 지닌 자가 있으니, 내 이제 충녕으로 세자를 삼고자 하노라.” 『태종실록』태종18년/06월/03일
그러니까 태종은 충녕을 선택한 이유로 배우기를 부지런히 한다는 것을 첫 번째로 꼽았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것은 이씨 가문에서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이성계가 무인이었기 때문에 이성계 가문에서는 성균관 출신의 지식인들, 유학자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태종부터 과거의 문과에 급제했지만, 그 아들 양녕이 공부를 안 하면, “무인 이성계의 후손이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싸움만 잘 하는 가문이 아니라 공부도 잘 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충녕대군이 학문을 좋아하여 밤새도록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가 정치의 대체(大體)를 안다는 것입니다. 정치의 대체, 다시 말해 다스림의 본질을 안다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의견을 많이 내고, 현실정치에 도움이 되는 창조적인 생각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충녕대군은 이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현안처리 능력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장차 크게 될 자질을 갖고 있는 자식이 있으므로 왕위계승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태종은 충녕을 세자로 세우면서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합니다. 그 첫째로, “누구를 세자로 세우느냐 하는 것은 인심을 얻거나 잃는 관건이다. 따라서 원량(元良)을 기리어 나라의 근본을 바로 잡으려 할진대 오직 지극히 공정해야 한다”라고 강조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면 “그 마음에 지극한 공정함이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약 그렇지 않고 사사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 나라는 그 순간부터 혼란에 빠지고 국력은 쇠퇴할 것입니다. 따라서 대권후보자의 마음가짐을 잘 가려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종이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한 것은 바로 그의 “지극히 공정한 마음”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태종은 충녕에게 사랑과 공경으로 어버이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다음 두 번째는 국왕으로서 항상 진중하게 일을 처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총명한 자질을 키우고 배움을 즐겨서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다음 네 번째로는 나랏일을 맡겼으면 확실하게 믿고 맡겨서 편안한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제대로 된 인재를 뽑되, 일단 뽑은 다음엔 믿고 충분한 권한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하와 백성의 존경을 받는 왕이 되어달라고 당부합니다.
세종식 경영 : 인재경영과 지식경영
인재충원 - 인재의 선발, 검증, 재교육 과정
세종 치세를 가능케 한 인물들은 여럿 있지만 그 중에 핵심적 인물로는 허조를 들 수 있습니다. 나중에 조선 후기의 정조에 의해서도 허조는 황희와 함께 세종을 좌우에서 보필한 재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허조의 여러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인사시스템의 정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조는 10여 년간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추천된 인물들을 검증하는 데 진력했습니다.
허조의 인재검증 시스템은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어떤 관직에 사람을 임용할 때 그는 먼저 이조의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매우 정밀하게 간택하게 했습니다. 인사 담당 사무관에게 해당 후보자의 경력과 자질, 그리고 부패 혐의는 물론이고 그 가족관계까지 꼼꼼히 살펴보도록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이조 내부의 관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재차 평론에 평론을 거듭하도록 했습니다. 그 후보자가 그 자리에 적합한지, 더 나은 적임자는 없는지에 대해서 내부의 전문가들로 하여금 격렬히 토론하게 했습니다. 마지막은 이조 밖의 여론을 들어보는 단계입니다. 특히 고위 인사의 경우 인사를 주관하는 부서의 ‘적합 판정’에도 불구하고 조정 안팎의 의론이 좋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중의(衆議)가 합한 연후에야 임명하도록 했습니다.“ 『세종실록』태종21년/12월/28일(21/12/28)
그런데 허조에게 있어서 인재검증의 3단계, 즉 ‘간택’과 ‘평론’과 ‘중의’의 절차를 거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인사원칙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인사담당자의 공적인 자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재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허조는 인재의 선발 못지않게 유능한 관직자를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거나 국가정책을 비판하다가 곤경에 처한 관리들을 보면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구원하곤 했습니다. 세종도 그런 허조를 믿고 일을 맡겼습니다.
세종은 정승을 임명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인 임금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국가에 운명을 맡길 만한 신하”를 선발하기 위해 세종은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는데, 훌륭한 정승을 선발하면 나라의 근심을 없앨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최윤덕을 정승에 임명하는 과정이 그 좋은 예가 됩니다.
재위 15년에 최윤덕은 1만 5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중강진 건너편의 파저강 일대에 사는 여진족을 토벌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의 국경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처음에 세종이 파저강 토벌의 공로로 최윤덕에게 무슨 상을 줄 것인가 물었을 때, 허조는 영중추(領中樞)를 가설하여 포상하자고 말했습니다. 중추부 소속의 정1품의 무인소 대신직으로 예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맹사성은 자신이 맡고 있는 관직, 즉 좌의정이 좋겠다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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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만약 한 사람의 훌륭한 정승을 얻으면 나랏일의 근심을 없앨 수 있다”면서 “최윤덕은 가히 영의정도 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영의정은 그 임무가 지극히 무거우므로 전공(戰功)만 가지고 임명할 수는 없다”(『세종실록』 14/06/09)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세종실록』의 다음 대목은 ‘정승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현재의 우의정 권진의 벼슬을 대신하게 하라. 내가 작은 벼슬을 제수할 때도 반드시 마음을 기울여서 고르는데, 하물며 정승이리요. 최윤덕은 비록 배우지 않아서 말을 하는 데 어두우나, 밤낮으로 게으르지 아니하고 일심봉공하기 때문에 족히 그 지위를 보전할 것이다.” 『세종실록』15/05/16
인재선발과 관련해 세종은 최윤덕의 기용에서 볼 수 있듯이, 능력만 있다면 문벌과 신분 고하를 초월해서 등용하곤 했습니다. 서얼 출신의 황희를 중용하여 ‘국가의 저울추’ 역할을 담당하게 한 것이라든지, 천민 출신의 장영실을 등용해 물시계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킨 것 등이 그 예입니다.
특별히 세종의 말 중에서 중요한 부분은 영의정은 ‘일’과 함께 ‘말’도 잘 해야 한다는 대목입니다. 일심봉공하는 자세로 일을 성공적으로 잘 해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가가 지금 하는 일이 백성과 임금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적절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능력이라는 점입니다. ‘정치’는 모름지기 ‘행정’의 범위를 넘어서는 의미와 소통의 영역에 잇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작은 벼슬을 제수할 때도 반드시 마음을 기울여서 고르는데, 하물며 정승이리요“라는 대목은 세종의 정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작은 벼슬까지도 ‘반드시 마음을 기울여서 고르는’ 자세, 그리고 ‘내외의 권한을 온전히 맡게 하는 무거운 직책’인 정승의 선발에 온 정성을 다하는 왕의 태도가 ‘품평(豊平)의 시대’를 여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세종의 비전 경영
마음경영 - 백성을 감동시켜라
세종 리더십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정치라고 하겠습니다. 가까이는 조정 신하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혼신을 다해 국가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며, 밖으로 나가서는 백성들의 마음을 감읍시켰고, 멀리는 명나라 황제까지도 감동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세종시대에 가장 감동을 받은 사람은 조선의 백성들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그럴 수 있었을까요?
첫째, 세종은 노인을 공경하는 정치를 펼쳤습니다. 90세 이상의 노인에게 관직과 봉작을 제수하곤 했습니다. 천인의 경우 90세가 되면 남녀 모두에게 각각 쌀 2석을 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100세 이상인 경우는 남녀 모두 천인을 면해 주었고, 동시에 남자에게는 7품을, 여자에게는 봉작을 주어 “늙은이를 늙은이로 여기는 어짊”을 베풀었습니다.(『세종실록』17/06/21)
둘째,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보호입니다. 세종은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처지에 놓여있는 병자나 죄수들이 잘못되지 않도록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예컨대 재위 16년 한여름에는 궁궐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활인원(活人院)에 보내 열병을 앓는 사람들을 치료케 했으며(『세종실록』 16/06/11), 재판을 신속히 진행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세종은 가벼운 죄로 갇혀있는 죄수는 보석으로 내보내게 했습니다. (『세종실록』16/06/04)
이처럼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세종은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영구히 끊어져서 각기 생생하는 즐거움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국왕 본연의 임무라고 보았던 것이지요. (『세종실록』05/07/03)
사회 구성의 대다수이면서도 사회적 약자인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것이 수성기 조선왕조가 민심을 얻고 공고화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라고도 보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 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리가 시스템의 정치나 경영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세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예제에 따라서 예제의 법과 규칙에 따라서 나라가 돌아가게 해야지 매번 사람에 따라서 지시해서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바로 이것이 세종의 꿈이자 목표였고, 나아가 조선왕조 창업의 정신을 공고화시키는 것이 그의 정치적 목표이자 비전이었습니다.
셋째, 사람들을 건강하게 살고 제 수명을 누리게 하는 일입니다. 사실 요절하거나 비명횡사하지 않고 제 수명을 누리다가 가족들 앞에서 편히 눈을 감는 마지막 순서의 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누리기 힘든 ‘삶의 질’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비명횡사나 요절과 같은 불행은 국가제도나 사회적 여건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상당 부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세종이 천재(天災)와 지이(地異)의 있고 없는 것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마는, 배포 조치(配布措置)를 잘 하고 못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다할 수 있다“(『세종실록』 19/01/12)라고 말할 때 ‘사람의 힘’이 바로 그 점에 대한 세종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세종은 제생원 제도를 보완해 버려진 아이들의 사망을 막는 한편, 노비의 출산휴가를 산후 7일에서 출산 전후 100일로 파격적으로 개선했습니다. 또한 의료제도를 개선해 질병으로 사망하는 경우를 줄이려 노력했으며, 감옥에서 억울하게 병들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법규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세종은 거기서 더 나아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앙부일구를 만들어 도성 가운데 내어놓았습니다. 무지한 백성들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지 않도록 우리말에 일치하는 글자를 창제해 배울 수 있게 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세종이 앙부일구, 즉 해시계를 만들되 백성들이 보는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앞에 놓도록 하여 해시계의 시신(時神)을 그려서 “무지한 자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게”(『세종실록』 19/04/15)한 세종의 의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합니다. 이것은 권력과 돈을 가진 세력이 정보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공유하겠다고 하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록으로 보는 세종 리더십 : 세종 십계명
제1계명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임금으로 있으면서 백성이 굶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진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 하물며 지금 묵은 곡식이 이미 다 떨어졌다고 하니,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준다 해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되거늘, 오히려 굶는 백성에게 조세를 부담시켜서 되겠는가. 더욱이 감찰(어사)을 보내어 백성의 굶주리는 상황을 살펴보게 하고서 조세조차 면제를 해주지 않는다면, 백성을 위하여 혜택을 줄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세종실록』01/01/06
세종은 여기서 국왕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세금을 걷는 것’이 아니라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제2계명 왕을 추대한 백성들에게 헌신하라
법을 시행하려고 할진대, 모름지기 금석(金石) 같이 굳어야 하고 분분히 변경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종실록』 12/08/13
일관된 법 시행으로 백성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세종의 신념이 다시 확인되는 구절입니다. 그렇다고 세종은 잘못된 법과 제도를 고수하려 한 ‘수구적’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국가의 대체를 위해 필요하다면 새 법도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3계명 인재를 기르고 선발하고 맡겨라
대체로 남의 윗자리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질박하고 정직한 사람을 좋아한다. 지금 진립(眞立)을 보건대 사람됨이 순박하고 정직하다. 이 때문에 황제가 그를 친애하는 것이다. 내 아첨하는 신하를 가장 미워하고 있으니 경들은 조심하라. 『세종실록』12/02/02
사실 진립이 명나라 선덕제의 총애받는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세종이 아부하는 사람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세종은 궁궐 안의 아부꾼을 멀리하는 데 부단히 경계했습니다.
제4계명 싱크탱크를 활용하고 회의를 잘 하라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우의정과 이조?병조의 당상관과 함께 의논하여 관리를 임명하고자 한다. 『세종실록』00/08/12
이미 스물두 살의 나이로, 당대 최고의 학자인 변계량으로부터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고, 부왕 태종으로부터도 “정치의 대체(大體: 기본이 되는 큰 줄거리)를 안다”라고 인정받았던 세종이 “인물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은 겸손의 말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① 신하들의 의견을 들음으로써 그들의 동참을 촉구하는 한편 ② 정치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더불어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설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제5계명 억울한 재판이 없게 하라
관리들이 간혹 경중을 구별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형틀에 올려매며, 또한 늙은이나 어린이에게 벌 대신 물품이나 노동력을 바치게 하는 것은 그 몸에 상해를 입히지 않게 하려는 것인데, 더러는 가벼운 범죄자에게도 곧 고문을 실시한다 하니, 지금부터는 15세 이하와 70세 이상된 자에게는 살인과 강도 이외는 구속함을 허락하지 아니하며,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구속하거나 고무하지 말고 모두 여러 사람의 증언에 의거하여 죄를 결정하라. 만일 어기는 자에게는 죄를 줄 것이니 두루 중앙과 지방에 알리라. 『세종실록』12/11/27
고문을 금지하고 증언에 의해 죄의 경중을 결정하라는 지극히 ‘현대적인’ 법률관입니다. 특히 노약자에 대한 세종의 배려가 돋보입니다.
제6계명 외교로 전쟁을 막고 문명국가를 건설하라
근래에 사신이 아니 오는 해가 없으니, 중국이 우리나라와 서로 한 집 같이 합하여 정답고 친함이 지극하나, 사람의 사귐이란 친하면 반드시 벌어져서 틈이 생기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이제 사신을 대접함에 있어 서로 친함만 믿지 말고 더욱 예도와 공경을 갖추어 대접하여야 옳다. 『세종실록』13/07/15
여기서 보듯이 세종은 “사신을 대접함에 있어 서로 친함만 믿지 말고 더욱 예도와 공경을 갖추어 대접하여야 옳다”라고 하여 외교의 원리를 꿰뚫고 있습니다. 특히 “친하면 반드시 버성겨진다(親則必疎)”라는 통찰이 흥미롭습니다.
제7계명 영토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평화로운 세상에서 어찌하여 성 쌓기에 급급히 구는가”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편안한 때일수록 오히려 위태로운 것을 잊지 않고 경계함은 나라를 위하는 도리이다. 어찌 도적이 침범하여 들어온 후에야 성 쌓을 이치가 있겠느냐. 『세종실록』14/10/10
평화로운 때일수록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은 시대를 초월해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이것은 임진왜란 이전에 이순신이 한 말이기도 했고, 세종시대 허조의 유언이기도 했습니다. 『세종실록』21/12/25
제8계명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온 힘을 기울여 실천하라
이제 행할 만한 농사법을 채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배워 익히고자 한다. 무릇 오곡이 토양의 성질에 적합함과 갈고 씨 뿌리고, 김매고 거두는 법과 잡곡을 번갈아 심는 방법을 모두 각 고을 노농(老農)들에게 물어서 요점을 모아 책을 만들어 올리도록 하라. 『세종실록』10/07/13
세종은 “밥은 백성에게 하늘과 같은 것”이라는 인식 하에 농법을 개량하는 데 열성을 보였습니다. 정초의 『농사직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이 같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제9계명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라
나는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의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이 옳겠는가. 『세종실록』08/05/11
왕의 건강을 위해 술을 마시라는 신하들의 권유에 대한 세종의 대답입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리더십’의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습니다.
제10계명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라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 아닌 이가 없으니,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것인데, 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임금된 자의 덕은 살리기를 좋아해야 할 뿐인데, 무고한 백성이 많이 죽는 것을 보고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금하지도 않고 그 주인을 추어올리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세종실록』26/07/24
노비를 함부로 구타하거나 죽이지 말라고 형조에 내린 전지입니다.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奴婢雖賤 莫非天民)“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