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부리는 기술, 수완

   
세가오더(역자: 류방승)
ǻ
아라크네
   
15000
2007�� 06��



■ 책 소개
삼성그룹에는 인재기용의 원칙이 있다.

 


疑人不用 用人不疑 


“믿지 못하면 맡기지 말고, 일단 맡겼으면 끝까지 믿는다”는 뜻의 이 한자 성어는 중국의사서(史書) 중 하나인 송사(宋史)에 나온다. 삼성그룹 이병철 선대 회장의 인사철학이기도 했던 이 말은 현재의 이건희 회장에게 고스란히전해졌다.


이건희 회장은 실패했다고 무조건 사람을 버리면 인재를 잃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믿고 맡기는스타일’로 유명하다. 차라리 다른 사업부로 옮기면 더 큰 성공으로 지난번의 실패를 만회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인술이비단 이건희 회장만의 것이 아님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책 『수완』을 통해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전국(戰國)시대 위(魏)나라 문후(文侯)와대신 악양(樂羊)의 관계가 그러하며, 조상까지 욕보인 진림(陳琳)에게 오히려 사공군모제주(司空軍謀祭酒)라는 벼슬을 내린 조조(曹操)의 경우가그러하다. 좀더 시야를 넓혀 보면 고대 로마제국 시대에도 그 같은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벌 관행에 있어서만큼은 승자와 패자 사이에서 중요한 차이를 하나발견할 수 있다. 전쟁에 패한 장수에게 사형 등 강력한 벌을 내린 카르타고(Carthago)와 달리 로마(Rome)는 패장에게 다시 한 번기회를 주었다. 인류 역사의 면면을 살펴볼 때, 국가나 사회 수준에서도 오래도록 강성한 나라는 예외 없이 패자 부활의 기회가 주어지는 풍토가있었음을 우리는 오늘에야 비로소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책 『수완』을 통해 시공간을 넘어 역사에 길이 남을 수완가(手腕家)들의 족적을 따라가며뛰어난 용인술을 배워보자!

■ 저자 셰가오더(謝高德)
1971년 후베이성(호북성)에서 출생하여화중이공(화중이공) 대학 경제관리과를 졸업했다. 『수완』, 『버펫 투자책략 전집』, 『중국역사상의 후와 흑』, 『중국역사상의 간과사』 등의 책을썼으며 중국고전을 현대인에게 가장 명확하게 이해시킨다는 평을 듣고 있다.


■ 역자 류방승
성균관대학교 중어중문과를 졸업했으며현재 중국어 전문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다빈치의 두뇌사용법』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리더의 전략 


1장 인재를 기용해야 천하를 얻을 수 있다 
첫째,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인재를 확보하라 伏龍鳳雛 
둘째, 사람을 발탁할 때는개인 감정을 초월하라 驕兵之計 
셋째, 감정의 지렛대를 이용해 인심을 얻어라七擒孟獲 

2장 인재에 둘러싸여야 비로소 천하를 넘볼 수있다 
첫째, 말 안 듣는 부하 직원부터 끌어안아라 絶長補短 
둘째, 비로소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부여하라 一諾千金 
셋째,언로를 열어 모든 소리에 귀 기울여라 反面敎師 
넷째, 날카로운 화술은 칼보다예리하다 舌戰群儒 

3장 천하는 이미 내 손 안에 있다
첫째, 적당히 거드름을 피워라 韜光養晦 
둘째,월권행위에는 강경책으로 맞서라 難攻不落 
셋째, 상벌이 분명해야 뒷말이 없다揖斬馬謖 
넷째, 과감한 결단력이 승부를 가른다 一戰立威
다섯째, 인격적 매력을 갖춘 리더가 되라 君臣水魚之交

역자의 말 - 레이저 빔형 인재와 전구형 인재





수완


자신을 욕한 인재라도 과감히 등용하라

“인재를 얻어야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옛말이 있다. 현명한 군주는 이 말의 의미를 깨닫고 재주가 뛰어난 인재들을 깊이 존경하고 또 예를 갖춰 그들을 받아들였다. 만약 청해도 오지 않으면 먼 길을 마다않고 직접 찾아갔다. 인재 등용을 통해 세상의 인심을 얻은 대표적인 인물은 조조曹操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대적하고 욕했던 사람까지 널리 포용하는 아량으로 힘을 축적했다. 조조가 기병起兵했을 때 주위의 사람이라곤 고작 친인척들뿐이었고 그러모은 병사도 채 4천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그에게 불과 수년 만에 모사謀士들과 장수將帥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큰 세력을 형성했다.


순욱荀彧과 곽가郭嘉는 삼국시대 명성이 자자했던 지략가로, 둘 다 원래는 원소袁紹 휘하의 막료로 있었다. 하지만 원소가 대업을 이룰 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판단한 순욱은 원소를 버리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순욱이 제 발로 찾아오자 조조는 “내가 드디어 자방子房[유방을 도와 패업을 이룩한 장량張良의 자]을 얻었도다”라며 크게 기뻐했다. 한편 곽가도 원소가 사람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걸 보고 실망해 조조에게 몸을 의탁했다. 관도대전官渡大戰이 한참 벌어지던 때 원소의 수하인 허유許攸와 장합張?과 고람高覽 등이 모두 조조에게 투항해왔다.

조조는 투항한 사람들에 대해서 과거를 전혀 묻지 않고 능력에 따라 똑같이 대우했다. 또한 항복했다가 배반한 자나 적에게 투항했다가 사로잡힌 자들도 능력만 뛰어나다면 다시 중용했다.


위종魏種은 조조曹操와 죽마고우였다. 연주?州 전투에서 조조가 대패하자 많은 사람이 적에게 투항했지만 조조는 “위종만은 절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위종 역시 조조를 버리고 달아나자 조조는 크게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얼마 후 위종이 잡혀오자 사람들은 그를 죽이라고 권유했다. 조조는 곰곰이 생각해본 후, “그는 재능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는 다시 그를 기용했다. 위종을 파격적으로 재기용한 일이 널리 퍼지자 배반했던 자들이 잇달아 다시 조조에게 돌아왔다.


인재가 일단 찾아오면 조조는 항상 정성껏 대접하고 너무 늦게 만난 것을 아쉬워했다. 관도대전 중에 허유가 투항해오자 조조는 신발을 신지도 않고 맨발로 급히 뛰어나가 그를 맞아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처럼 조조는 중요한 인재가 찾아오면 빨리 가서 만나 경의를 표하고서 계책을 묻고 그의 건의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을 적대시했던 사람도 마음을 바꾸면 옛 원한을 잊고 말단관직이라도 맡기는 넓은 아량을 보였다.
 
진림陳琳은 관도대전 전날 밤, 원소를 위해 조조를 토벌하는 격문의 초안을 작성하여 조조의 조상까지 욕보였다. 조조는 이 격문을 보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진림을 잡아 죽여버리겠다고 성토했다. 원소를 대파하고 진림이 잡혀오자 조조는 그를 크게 꾸짖었다.


“네가 원소를 위해 격문을 써서 나를 욕한 것은 용서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내 부친과 조부까지 끌어들여 우리 집안을 욕보일 수 있단 말이냐!”


진림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청했다. 하지만 조조는 인재를 아끼는 인물이었다. 그는 진림을 죽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공군모제주司空軍謀祭酒라는 벼슬까지 내렸다.


일찍이 제갈량은 “조조가 원소보다 명성이 낮고 군사도 적었지만 원소를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늘의 도움 때문이 아니라 지혜를 잘 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조조의 지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건없이 인재를 수용한 넓은 도량이었다.


※ 지도력의 첫 번째 열쇠는 자기 절제 
“지도력의 첫 번째 열쇠는 자기 절제이다. 자만심을 삼키지 못하면 남을 지도할 수 없다. 자만심을 누르는 것은 들판의 사자를 이기는 것 보다 어려우며, 분노를 이기는 것은 가장 힘센 씨름꾼을 이기는 것보다 어렵다.” - 칭기즈 칸成吉思汗


사람을 기용했으면 절대 의심하지 말라

리더와 부하직원 사이에는 오해나 마찰을 빚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지략이 뛰어난 정치가는 항상 절묘한 방법으로 이미 기용한 사람을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여줘 자신에게 더욱 충성하도록 만드는 기술을 잘 활용한다. 등용했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말은 부하직원을 신임하여 그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라는 뜻이다. 이미 일을 맡겼으면 모든 권한을 부하직원에게 부여하라!


전국戰國시대 위魏나라 문후文候는 대신 악양樂羊에게 군사를 내주고 중산국中山國 공격을 명했다. 하지만 악양의 아들 악서樂舒가 바로 중산국의 중신으로 있었기 때문에 위나라 조정에서는 악양이 비록 전쟁에 나섰지만 전력을 다해 싸울지 의심을 품었다. 중산국으로 쳐들어간 악양은 성을 포위하고 적들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전술을 택해 무려 수개월 동안 군대를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위나라 조정에는 그를 탄핵하는 상소문이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하지만 문후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신을 파견해 술과 음식을 하사하며 악양을 위로했다. 그래도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자 문후는 아예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악양에게 멋진 별장까지 지어주었다. 악양은 문후의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마침내 중산국을 멸망시키고 득의양양하게 위나라로 돌아왔다.


문후는 악양의 승전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따로 밀봉된 상자를 선물로 내렸다. 집으로 돌아와 상자를 열어본 악양은 문후의 배려에 감격해마지 않았다. 상자에는 문후가 하사한 금은, 비단과 함께 그가 중산국을 공격할 때 대신들이 올린 탄핵 상소문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악양은 그제야 문후의 비호가 없었다면, 또 자신을 이렇게까지 신뢰하지 않았다면 중산국 공격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목숨마저 부지하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의심나는 사람은 등용하지 말고 등용했으면 절대 의심하지 말라”는 말을 실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리더가 기왕 임무를 부하직원에게 맡겼다면 확실히 그를 믿고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야만 인재의 재능이 맘껏 발휘될 수 있다.

1926년 3월, 서북군西北軍 사령관 펑위샹馮玉祥이 하야하고 장즈쟝張之江이 직무를 대행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한푸쥐韓復?와 스여우싼石友三은 진군晉軍과 교전 중에 부하를 이끌고 진군에 투항했다.


1926년 9월, 복직한 펑위샹은 중원 수복을 결심하고 북벌전쟁에 참가했다. 이후 바오터우包頭에 도착한 펑위샹은 한푸쥐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 스여우싼의 복귀를 종용했다. 이에 다시 서북군에 합류한 한푸쥐와 스여우싼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땅에 엎드려 사죄했다. 펑위샹은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과거는 불문에 붙일 것이니 지금부터 열심히 일해보세!”하며 그들을 위로했다. 말은 비록 이렇게 했지만 펑위샹은 그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그들 사이에 틈이 벌어져 한푸쥐와 스여우싼은 항상 펑위샹을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한푸쥐가 허난성河南省 주석主席에 임명된 후, 펑위샹은 그가 지휘하던 20사단을 자신의 심복인 스징팅石敬亭에게 맡겨버렸다. 그래서 한푸쥐는 비록 주석 자리에 있었지만 사사건건 펑위샹의 제약을 받아 성의 간부들조차 마음대로 부릴 수 없었다. 이로 인해 한푸쥐는 맘속에 불만이 가득 찼고 항상 펑위샹과 마찰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펑위샹은 스여우싼 역시 참모총장 직에서 파면시키고 자신의 심복을 그 자리에 앉혀버렸다.


펑위샹은 이렇게 그들을 의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요직에 그들을 기용했다. 1929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중간에서 이득을 취하기로 생각한 펑위샹은 우한武漢을 탈취할 목적으로 두 사람을 우성관武勝關으로 파견했다. 한푸쥐와 스여우싼이 펑위샹에게 불만이 가득하다는 걸 안 쟝제스蔣介石가 이들을 적극적으로 회유하자 그들은 잇달아 펑위샹을 배신하고 쟝제스에게 투항했다.

한푸쥐와 스여우싼 같은 인물은 그 싹을 잘라 죽여버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펑위샹은 이렇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쟝제스는 이들을 이용해먹은 후 후환을 제거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산둥山東을 공격할 때 한푸쥐가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자 쟝제스는 그를 총살형에 처했으며, 스여우싼이 반란을 획책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를 생포하여 그 자리에서 법대로 처리했다.


“끊을 걸 끊지 못하면 훗날 대가를 치르고 말 것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기왕에 사람을 등용했다면 그를 믿고 자리에 맞는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기용하지 않는 게 낫다. 펑위샹은 결국 이를 지키지 못해 대사를 그르치고 만 대표적 케이스라 할 수 있다.


※ 疑人不用 用人勿疑
“믿지 못하면 맡기지 말고, 일단 맡겼으면 끝까지 믿는다”는 뜻의 이 한자 성어는 중국의 사서史書 중 하나인 송사宋史에 나온다. 삼성그룹 이병철 선대 회장의 인사철학이기도 했던 이 말은 현재의 이건희 회장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건희 회장은 실패했다고 무조건 사람을 버리면 인재를 잃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믿고 맡기는 스타일’로 유명하다. 차라리 다른 사업부로 옮기면 더 큰 성공으로 지난번의 실패를 만회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국가나 사회 수준에서도 오래도록 강성한 나라는 패자 부활의 기회가 주어지는 풍토가 있었다. 고대 로마 제국이 그렇다. 로마 제국과 패망한 카르타고에는 상벌 관행에 있어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잇었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전쟁에 패한 장수에게는 사형 등 강력한 벌을 주었으나 반면 로마는 패장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이구동성의 목소리를 항상 경계하라

어떤 일이든 사람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이 말로 표현될 때 논쟁이 벌어진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는 것은 피할 수 없으며, 또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일에 대해 사람들이 똑같은 태도를 취하고 신기하게도 의견이 일치하며 표현하는 방식이나 어투마저 이상하리만치 비슷하다면 이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구동성’ 현상은 그 안에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하다.


명明나라의 개국공신 이선장李善長은 명 태조 주원장이 안휘성安徽省 저주?州에서 기병한 이래 줄곧 그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개국 후, 주원장은 그를 한국공韓國公에 봉하고 연간 녹봉 4천 석을 내렸다. 또한 자신의 딸 임안공주臨安公主를 그의 아들인 이기李祺에게 시집보냈다. 이선장에 대한 주원장의 신임은 이만큼 두터웠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이선장의 나이 77세 되던 해, 그가 모반을 일으킨 호유용胡惟庸과 결탁했다는 고발장이 속속 접수됐다. 때마침 그해 별의 위치나 빛에 이상이 생긴 성변星變이 발생하여 점성가들은 한목소리로 대신 한 명을 처형해야 변고가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이에 주원장은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직접 나서 이선장 일가 70여 명을 극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공주와의 관계 때문에 이기 및 두 손자는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선장이 사형당한 이듬해, 우부낭중虞部郎中 왕국용王國用은 주원장에게 상소문을 올려 이선장을 변호했다.


“이선장은 전부터 폐하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무수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폐하께서 천하를 차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일등공신으로 인정받아 살아서는 국공國公이요 죽어서는 왕에 추봉될 수 있고, 아들은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친척들도 그 덕분에 관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신하된 자로 부귀영화의 정점을 누렸습니다.


이런 그가 모반을 꾸며 황제가 되려 했다면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고발장처럼 호유용을 지지하고 호유용의 신하가 되고자 했다는 말은 믿기 어렵습니다.


또 성변이 발생해 대신 한 명을 죽여야만 재난을 면할 수 있다는 주장은 황당무계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선장처럼 공로가 있는 대신도 참소로 목이 떨어지는 판에 누가 과연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할지 걱정입니다. 물론 이선장은 지금 죽고 없습니다. 저는 다만 폐하께서 이 사실을 깨닫고 앞으로 좀 더 신중하셨으면 바라는 마음에 이 상소를 올립니다.”


예로부터 성변이 발생했을 때 하늘에 제사를 올리거나 죄수들을 사면하는 등 여러 가지 대처 방법이 있었다. 이처럼 점성가마다 대응 방법이 다를 텐데도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신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는 분명 꿍꿍이가 숨겨져 있다. 결국 이선장은 완벽하게 준비된 올가미에 걸려든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당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 연간에 북방에 홍수, 가뭄, 충재蟲災가 잇달아 발생하여 식량이 모두 바닥났고 농민들은 터전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도 조정 대신들은 이재민을 구제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진해군鎭海軍 절도사인 한황韓滉을 공격하려 했다.


이유인즉, 몇 해 전 경원涇原 반란 때 황제가 수도인 장안을 잠시 떠나자 한황이 윤주潤州에 병력을 취합하여 돌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는 모반을 획책한 것이니,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덕종은 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상소를 올리자 한황의 충정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에 이필李泌을 불러 의견을 구했다.


“한황은 성품이 공평무사하고 충직합니다. 경원 반란이 발생한 후 관군에 속히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직접 식량 포대를 등에 지고 배에 운반했습니다. 또한 ‘천자께서 지금 고초를 겪고 계시니, 이는 신하 된 우리들에게 치욕이다!’라며 군사들을 격려했습니다. 줄곧 청빈한 생활을 유지해온 그의 관저는 협소하기 그지없는데다 다 낡아 비바람을 막기 힘든데도 수리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군을 지원할 때는 아낌없이 재물을 내어주어 폐하께서 장안을 떠나 계실 때 한황의 물자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폐하께서도 직접 확인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람이 어찌 반란을 도모하겠습니까?”


이에 덕종이 “한황이 충직하고 두마음을 품지 않았는데 왜 돌성을 쌓은 것이냐?”라고 물었다.


“한황이 돌성을 쌓은 것은 중원에 전란이 끊이지 않아 혹시 폐하께서 남하하실 때를 대비한 것입니다. 이는 신하 된 자의 간절한 충성심인데 어찌 죄라고 말하십니까? 저는 한황과 막역한 친구 사이라 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절대 모반을 꾸밀 사람이 아닙니다. 신이 보장하겠습니다.”


“짐이 그대를 중용한 이유는 일처리에 신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대신들과 완전히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솔직히 짐은 한황이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두렵구나. 훗날 다시 얘기하도록 하자.”


이에 이필이 가족의 목숨을 걸고 덕종을 설득하자 덕종도 한황을 신뢰하게 되었다. 대신들의 거센 중론을 물리친 덕종은 한황에게 빨리 북방의 재난을 해결하라는 명을 내렸다. 한황은 그날로 곡식 10만 휘를 보냈고, 닷새 후 또 다시 식량을 보내 다급한 불을 껐다. 덕종은 이 소식을 듣고 이필을 불러 “그대의 선견지명이 대단하구려! 한황 덕택에 무수한 백성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구나!”라고 칭찬했다.


잘못이 있다면 자기 자신도 과감하게 처벌하라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만약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친소親疎와 지위 고하에 따라 법률 적용이 달라지고, 심지어 리더가 앞장서서 법률을 위반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면 법률의 위엄은 사라지고 만다.


자신이 직접 제정한 규범을 어겼을 때, 얼렁뚱땅 넘어가거나 변명으로 일관하는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이로 인해 아랫사람들이 당신을 깔보게 되고, 더욱 두려운 건 그들이 법률을 애들 장난쯤으로 여길 수 있다는 점이다. 이때 자신의 잘못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리고 아주 그럴싸하게 자신을 처벌하면 엄청난 파급효과를 거둘 수 있다.


건안 3년[198]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동쪽 지방 정벌에 나섰다. 각종 깃발이 펄럭이고 창과 칼이 빽빽이 늘어선 위풍당당한 대군은 질서정연하게 행군하고 있었다.


때는 마침 보리 수확 계절인 오월이었다.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수많은 농토가 폐허로 변한 가운데 산들바람을 타고 은은한 보리 향기가 코를 찔렀다. 알고 보니 앞쪽에 샛노란 보리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농부들은 낫과 호미를 들고 보리 수확에 여념이 없었다.


이를 본 조조는 농민들이 고생 끝에 수확하는 양식을 자신의 군대 때문에 피해를 입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전쟁 중에는 양식은 물론 민심 또한 대단히 중요했다. 그래서 즉각 전군에 “보리밭을 밟는 자는 참수형에 처한다!”는 명을 내렸다.


조조의 명이 전군에 전달되자 군사들은 행여 보리를 밟을까 조심조심 길을 재촉했다. 보병들은 보리밭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행군했으며, 기병들은 아예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서 걸어갔다. 이에 농민들은 바쁜 와중에도 농기구를 손에서 놓고 자신들의 터전을 조금도 해치지 않는 엄정한 군대에게 감격의 눈빛을 전달했다. 많은 사람들은 밭에 무릎을 꿇고 조조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시했다. 또 몇몇 노인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하늘이 당신을 승리로 이끌 것이오! 하늘이 조 장군을 보호할 것이오!”라고 외쳤다.


조조는 이 장면을 보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 못지않은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조조가 득의양양한 기분에 도취되어 있을 때, 보리밭에서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뛰쳐나와 조조가 타고 있던 말 앞을 가로질러 다른 밭으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 이에 놀란 말이 미쳐 날뛰는 바람에 조조는 그만 말에서 떨어져 하마터면 말발굽에 밟힐 뻔했다. 조조가 정신을 차렸을 때 보리밭은 이미 이리저리 날뛰는 말에 의해 쑥밭이 되고 말았다.


눈앞에 펼쳐진 돌발 사고에 사람들은 모두 놀라 온몸이 얼어붙었다. 조조 역시 온갖 전투를 치른 백전노장이었지만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 자신이 내린 명령을 자기가 어겼으니 어떡하면 좋을꼬? 이에 갑자기 군중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난처한 문제에 봉착했지만 조조는 큰소리로 “내가 정한 군율을 내 스스로 범했다. 주부主簿는 내 죄를 정하라!”고 외쳤다.


조조는 자신의 죄가 사형에 해당함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 주부에게 물음으로써 공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방법을 택했다. 조조의 명을 들은 주부는 조조의 의도를 알아채고 급히 조조 및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춘추』春秋에 따르면 존귀한 사람이 법령을 어겼을 경우 죄를 물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장군께서는 이만한 일에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군사들이 그 말에 동조하며 “주부의 말이 옳소. 장군께서는 빨리 우리를 이끌고 길을 재촉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맘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색을 한 채 “군령은 내가 정한 것이다. 어찌 내 맘대로 깨뜨릴 수 있느냐?”라고 말했다. 이어서 혼잣말로 “아, 누가 나에게 장수의 임무를 맡겼던고! 내가 죽으면 저네들을 이끌고 싸울 사람이 없으니 황상에게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황급히 “맞습니다. 맞고말고요. 장군의 사직에 꼭 필요한 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조조는 사람들의 맘이 자신에게 돌아선 걸 보고 “그럼, 이렇게 하자. 내 머리카락을 잘라 머리를 대신하리라!”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칼을 뽑아 머리카락 한 줌을 자르고 전군에 이를 알렸다. 조조는 이렇게 해서 그가 제정한 군령을 지켰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목까지 보존했다.


스스로 칼을 뽑아들어 부하들을 놀라게 하고 대세를 휘어잡는 방법은 ‘간웅’奸雄 조조만 써먹은 수법이 아니다. 성공한 많은 지도자들 역시 이 방법을 자주 활용했다. 이는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 않다. 단지 과장된 연기를 상대방에게 잘 표현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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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의 성과를 측정하는 법 
“리더로서의 능력은 개인적으로 이뤄낸 성과나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그 팀이 이뤄낸 것으로 판단 받지 않는다. 당신의 사람들과 그 조직이 당신이 없어진 후에도 잘 해내고 있는가에 의해 측정된다.” - 존 맥스웰John C. Maxwell(경영컨설턴트)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