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들의 리더십과 헤드십(서양편)

   
박기현
ǻ
김&정
   
8500
2005�� 04��



■ 책 소개
역사가 기록한 폭군들도 한 시대의 지도자로군림하여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미치광이 폭력만으로 가능한 일인가? 악인들에는 광기가 낳은 전형적인 헤드십의인물이 있는가 하면 역사에 악인으로 기록되었을 뿐 개혁가적 기질을 가진 지도자도 있다. 후자는 생존을 위한 집념, 예측불허의 전술, 빼어난카리스마, 개혁에 대한 열정, 과감한 인재등용 등으로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악인에 대한 평가 기준은 저마다 다르므로 의견이 분분할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정말 악인이었던 지도자들을 기강이 해이해진 조직과 사회, 독선에 빠져 망해가는기업과 조직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반면교사로, 역사가 낳은 악인일 뿐 보수와 전통에 얽매여온 기존 정치세력에 도전한 개혁가 기질과 리더십을다분히 보여주는 인물들을 리더십의 올바른 모델로서 소개하고 있다.


■ 저자 박기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수학.LG그룹을 거쳐 신문사 문화부 기자, 도서신문 편집국장, 대교방송 미디어본부 편집국장, 리브로 경영기획실 이사, 서일경제연구소 부소장 등을 거쳐현재는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장편소설『러시안십자가』『별을 묻던 날』을 발표했고,『손에 잡히는 고려이야기』『마음을 다스리는 50가지지혜』『느리게 혹은 천천히』등을 펴냈다.


■ 차례
남편 패위하고 황제가 된 예카테리나
-신념과 결단, 도전의 리더십 


기마군으로 세계 3대 강국 건설한 훈족 왕 아틸라 
-두둑한 배짱, 지피지기의 리더십


흡혈귀보다 더 잔인한 블라드 테페스 
-자존자립의 영웅적 리더십 


선전선동술의 원조 네로 
-상식과 양심을 악마에게 맡긴 광기의 헤드십


말로 안 되면 몸으로 클레오파트라 
-콧대보다 빼어난 세 치 혀, 설득의 리더십


혼란한 유럽을 잠재운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 
-강력한 힘과 냉정한 절제의 리더십


빈 회의를 계륵으로 만든 메테르니히 
-우국과 보수, 타협과 설득의 리더십


조국을 혼란에서 구해낸 독재자 크롬웰 
-야심과 독선, 반항과 혁명의 리더십


여섯 왕비를 갈아 치우며 영국 국교를 세운 헨리 8세 
-여섯 번의 결혼식으로 나라의위기 초래 


사랑을 믿지 않았던 여왕 블러드 메리 1세 
-배짱과 인내, 생존의 리더십


성공한 혁명가에서 단두대 죄인이 된 당통 
-자유와 낭만 그리고 순수의 리더십


고대 로마의 힘을 되살린 철면피 무솔리니 
-선동과 모략, 쇼맨십의 삼위일체 이룬헤드십 


독일 최고의 공군을 지휘한 조종사 출신 괴링 
-막강 독일군을 패망케 한 치졸한헤드십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아돌프 아이히만 
-단순하고 평범한 돌진의 헤드십


미워할 수 없는 악인 롬멜 
-군인정신과 휴머니즘의 조화 이룬 양심적 리더십


시베리아를 공포에 떨게 한 이반 4세 
-치열한 생존력, 오기와 보복의 리더십


성서를 줄줄이 외운 철의 독재자 스탈린 
-조작과 홍보, 프로파간다의 헤드십


인간 도살자 이디 아민 
-권력 강화 위한 살인의 헤드십 


다윗의 영원한 경쟁자 사울 
-효성과 겸손에서 난폭한 살인자로 변신 





악인(惡人)들의 리더십과 헤드십(서양편)


흡혈귀보다 더 잔인한 블라드 테페스 - 자존자립의 영웅적 리더십
공포문학의 진수로 불리는 『드라큘라』는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 성주이자 대공을 모델로 한 이 작품은 브람 스토커가 집필하여 고전적 뱀파이어의 원조 작품으로 선보이게 된 것이다.


내용 중에 뱀파이어 가슴에 십자가 말뚝을 박는 행위도 실제 드라큘라 대공이 행했던 고문술을 흉내 낸 것이고, 주인공이 십자가에 겁을 내는 설정도 자신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기독교에 심취했던 것을 풍자한 것으로 보인다. 마늘이 등장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당시 마늘을 잘 먹는 헝가리계가 루마니아인 중에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것과 냄새가 지독한 향료로서의 마늘을 대비시킨 것이다.


소설 『드라큘라』는 에로틱하여 공포스러운 판타지 소설이다. 악마가 박쥐로 변신하거나 마늘이 악귀를 쫓는 등 당시의 토속신앙과 함께 성수와 십자가를 등장시켜 고문용 말뚝과 기독교의 횡포 등도 교묘히 대비시키고 있다. 『드라큘라』는 당시 시대상을 잘 반영했다는 점에서 그 어느 소설보다 풍자적인데, 풍자의 대상은 루마니아에서 영웅시되는 왈라키아 공화국 지도자 블라드 테페스라는 실존 인물이었다. 과연 그는 어느 정도 악인이었을까?


오스만 투르크 군대를 물리친 루마니아의 용장
『드라큘라』의 실제 모델 블라드 테페스는 15세기 왈라키아 공국의 미르세아 대공의 손자였다. 그의 아버지 드라큘은 잃어버린 왕권을 되찾으려 애쓰다가 자식 둘을 터키의 인질로 남겨두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블라드는 이미 전쟁의 참화와 인간의 잔혹성을 익히 알게 되었다.


1448년에 인질에서 풀려난 그는, 터키와의 전쟁에 참가하고 왕권을 되찾아 조부 시절의 명성을 되살렸다. 테페스는 루마니아 말로 ‘꼬챙이’를 뜻하는데, 블라드가 전쟁 포로나 정적, 죄인들을 긴 꼬챙이를 이용한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는 터키군과 맞서 싸워 이길 만큼 군사력을 키웠고 내정도 알차게 운영했으나 지나치게 잔인한 형벌로 악평을 들었다.


그는 ‘블라드 드라큘’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드라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용의 아들’이라고도 해석된다. 그는 재위 도중 투르크에 공납을 바치지 않은 탓에 전쟁을 겪었는데 이때 12년 동안 조국을 떠나 있었다. 다시 1475년 왕위에 올라 잠시 동안 다시 정사를 펼쳤으나 1476년 12월에 터키군에 살해되었다.


잔혹과 공포를 생존의 무기로
왈라키아는 현재 루마니아에 위치한 고대 왕국으로 1290년에 세워졌다. 1330년까지는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에는 오스만 투르크에 예속된 소국이었다. 블라드의 조부 미르세아 대공은 1386년부터 30여 년을 다스렸는데, 이때 왈라키아는 이미 오스만 투르크에 복속돼 조공과 예물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이후 권력에서 물러난 부친 드라큘은 투르크에 대항하는 기독교 십자군의 전신인 비밀결사조직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는 이 조직을 발판으로 삼아 다시 왈라키아의 권력을 잡으려 했다가 투르크의 술탄에게 잡혀 간신히 목숨만을 건졌다. 때문에 드라큘 공은 귀국하면서 차남 블라드와 동생 라두를 인질로 남겨두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투르크의 감옥에 갇히게 된 블라드는 스스로 생존법을 체득했고 적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1447년 블라드 테페스는 아버지 드라큘 공과 형의 암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후 그는 왈라키아의 권력을 되찾고 왕좌에 올라 암살자와 그 배후를 쳐부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 그의 잔혹함과 몰인정함은 이때부터 본격화된 것이다. 블라드 테페스는 소설이나 영화 속의 드라큘라보다 훨씬 잔인하고 냉혹한 살인광이었다. 그는 약 7년 동안 왈라키아를 지배하면서 무려 10만 명 이상을 처형하고 고문으로 말뚝과 꼬챙이에 꿰어 죽이는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그는 공포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고 생각했다. 그의 의도대로 인근 영주들은 물론이고 헝가리?터키 등의 군주와 병사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악행으로 말하자면 은나라의 주왕이나 로마의 네로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잔혹성이 구전되어 서구 세계에 전파되었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소설 『드라큘라』인 셈이다.


폭압정치로 왕권 강화
블라드 테페스는 죽어서도 두 가지 이름을 가졌다. 하나는 ‘말뚝 박는 이’라는 뜻인 테페스였고, 다른 하나는 악마와 용을 상징하는 ‘드라큘의 아들’이란 뜻의 드라큘라였다. 그는 헝가리 합스부르크 왕조 편을 들어 투르크군을 쳐부수는 데 일조하면서 군대의 경험과 전략을 배우게 됐다. 이 경험으로 두 번의 도전을 시도, 1456년에 왕위를 되찾았다. 블라드 2세 드라큘라의 전성시대를 연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잦은 변란과 권력 교체, 주변 강국의 위협으로부터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에 블라드 테페스만의 방법으로 왕권 강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성을 재건하고 군사들을 양성하는 한편, 식량과 물자를 비축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내부의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그가 저지른 끔찍한 사건에는 특히 다음의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모두 1460년경에 일어났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기간 중에 적이라고 간주되는 경쟁자 무리들을 체포한 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참하게 죽였다. 그 중 중요한 인물들은 모조리 말뚝에 꿰어 죽인 후 마을 입구에 달아놓았는데 이때 죽은 자가 3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말뚝 형벌은 처형될 사람의 항문에서부터 긴 말뚝을 꽂아 몸을 수직으로 관통시킨 후 입으로 꺼내게 하는 끔찍한 형벌이었다.


둘째 사건은 독일 남부 작센 지방의 상인들과 분쟁이 일어났을 때였다. 이 잔혹한 학살 장면은 당시 피해자이던 독일지방의 어느 화가가 그린 목판화에 남아 지금까지도 전하고 있다. 당시 블라드 테페스는 저항하는 상인들을 한데 모아 모조리 말뚝 형벌을 내렸고, 말뚝에 꿰인 시체들이 마을 전체를 뒤덮는 참혹한 광경을 연출했다. 이 장면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면서 왜곡과 덧칠이 가해져 드라큘라의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였던 독일지방의 상인들이 토로한 이야기라 실체 사실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 사가들의 분석이다.

세 번째 범죄는 귀족과 수도사 사냥이라는 이름이 붙은 참극이었다. 블라드 테페스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만한 근거지를 일소해 버리고자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종교 지도자들과 귀족들을 모두 모아 말뚝 형벌에 처했다. 심지어 거리의 거지들과 빈민들을 모아 밥을 먹이고는 밖에서 불을 질러 태워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공포정치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블라드가 궁전 뜰에 내놓은 황금 항아리를 경비가 지키지 않았는데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왕국 안에서는 도둑질과 거짓말, 사기꾼 등이 일체 사라져 일반 백성들은 오히려 살기 괜찮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자존자립의 전투적 리더십
블라드 테페스가 이토록 참혹한 장면을 연출하며 노골적인 살인행위를 일삼았음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그는 투르크 제국의 침입에 맞서 용감히 싸운 민족의 영웅인 동시에 자존자립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루마니아인들은 그에 대한 서방의 폄하가 독일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강변한다. 그리고 브람 스토커라는 소설가에 의해 왜곡된 면이 너무 많아 사실과 전혀 다른 인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사실 왈라키아는 독일과 헝가리와 터키의 무역 경계선에 위치한 나라라서 언제나 주변 강국의 침입 경로였고 공략 대상 1호였다. 그 때문에 이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루마니아의 왈라키아 군주 블라드 테페스는 잔혹하게 싸우지 않으면 강국 터키의 군대를 맞아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 왕조의 권위 회복 노린 승부수 : 그가 왕좌에 오르기 이전부터 왈라키아는 왕권이 흔들렸다. 헝가리 합스부르크 왕실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오스만 투르크 술탄 왕조의 지원을 받는 세력, 심지어 독일 상인들의 지지를 받는 왕권 후보들까지 난립한 상황이었다. 그는 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잔혹한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왕조의 권위를 회복하고, 주변 강국들로부터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귀족들의 횡포를 누르고 세금과 출입국의 특권을 부여받았던 독일 상인의 특권을 제한하여 중앙권력을 강화했다. 그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사가들은 블라드 테페스가 잔혹함을 보인 것은 대부분 정적과 전쟁 상대국들이었지, 내국민에 대해서는 오히려 선정을 베풀었다는 입장이다.


? 대국과 당당히 맞선 투지 : 1461년 블라드가 오스만 투르크 술탄에 대한 공납을 거부하여 이듬해 메메트 2세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술탄은 이슬람교 최고 권위자인 칼리프가 수여한 정치적 유력 지배자의 칭호이며 아랍어로 왕을 뜻한다. 블라드는 술탄과 정면 대결을 결심했다. 블라드는 오랜 인질 생활에서 터키군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국내 깊숙이 그들을 끌어들여 게릴라전을 펼쳤다. 모든 국토와 농지, 민가, 식량을 불태워 적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이미 이슬람을 믿는 터키군과 같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잔혹한 살인의 속죄라도 할 것인 양 기독교에 독실했고 교황과 십자군에 충성했다. 당연히 터키군과는 경쟁적 대립상황이 연출됐다. 초기에는 그의 뛰어난 전술 앞에 터키군이 속수무책으로 패퇴했다. 그러나 대제국과 소국과의 장기적 싸움은 그에게 타격을 주었고 결국 싸움터에서 전사하여 왈라키아의 마지막 희망을 접어야 했다.


조국을 혼란에서 구해낸 독재자 크롬웰 - 야심과 독선, 반항과 혁명의 리더십
세계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중의 하나는 영국의 청교도혁명이 시작된 순간이다. 그것은 절대왕정에서 시민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게 되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찰스 1세 국왕의 사형 장면이었다. 왕이 단두대에서 머리가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기 위하여 모인 수많은 국민 앞에서, 찰스 국왕은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는 자신이 애써 길러온 머리를 한쪽으로 돌려 집행관이 목을 치기 좋게 해주는 등 참수형을 당하는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국왕으로서 자존심을 지켜 자신을 벌하는 사람들을 용서해주도록 기도하고, 자신이 끝까지 왕권신수설을 지켜 순교하게 된 것이라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올리버 크롬웰 호국경은 이때가 가장 괴로웠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국왕의 사형만은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국 템스 강변 국회의사당 복도에는 1649년 국왕 찰스 1세 사형 판결문이 전시돼 있는데, 사형 집행을 승인한 연대 서명자 중에 올리버 크롬웰이 대표로 올라와 있다.


영광스럽지만 한편으로 가장 잔인할 수밖에 없는 역사의 현장을 꿋꿋하게 지켜보면서 자신의 의무와 사명감을 더욱 다진 크롬웰은, 영국 시민혁명의 수호자요 진정한 애국자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지나친 권위주의와 자신만이 정의라고 믿은 독재자였을 뿐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함께 받았다.


청교도혁명의 지도자로 난세 평정
영국 청교도혁명의 지도자인 올리버 크롬웰은 1599년 헌팅턴에서 출생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시드니 칼리지에서 공부한 후, 1628년 하원의원에 들어서면서 정치에 발을 들였다. 1640년 케임브리지에서 단기의회 및 장기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걸었는데, 이때 세금을 과중하게 부담시키는 국왕의 반대파에 서 있었다.


평소의 지론대로 동남부지역에서 군대를 조직, 강력한 신군대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1644년에 마스턴무어, 1645년에 네이즈비 전투에서 승리해 이름을 얻었다. 내전이 끝나자 강력한 힘을 가진 실력자가 되어 의회파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각 정파와 대립했다. 군대를 배경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그는 장로파와 수평파 및 반대세력들을 물리치고 실권을 잡았다. 1650년, 눈엣가시인 왕당파의 거점인 아일랜드를 공략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하지만 무자비한 진압으로 원성을 샀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반대론자들이 많은 의회에서 의원들을 축출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을 내세워 호국경의 자리에 앉았다.


호국경으로서 그는 힘에 의한 정의에 바탕을 둔 지배로, 대외적으로는 전쟁과 협상을 동원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과욕이 나타나면서 독재정치에 대한 반발이 수그러들지 않았는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잦았다. 결국 반대파들로부터 쫓겨나서 병에 걸려 죽었으나 시신이 다시 처벌을 받는 등 사후에도 악평을 받았다. 하지만 200년이 지나고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요즘엔 그를 영국의 질서를 회복한 애국자로 보는 경향이 많다.


반가톨릭?반진보주의자로 악평
크롬웰은 헌팅턴에서 다니던 학교의 교장, 시드니 서식스칼리지의 학장 등 독실한 칼뱅주의자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청렴하고 결백한 이미지를 쌓아 왔고, 금욕주의자적 생활로 사생활에서 스캔들이 없었다. 이런 점이 그에게 일종의 결벽증을 갖게 해, 자신과 다른 왕당파와 가톨릭 신자들에게 대단한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영국 국교에 대해 공식적인 반대 입장은 아니었으나 성직의 지나친 권위주의와 계급화된 관행 그리고 왕과 교회의 보이지 않는 밀착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크롬웰은 약 3년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있는 왕당파와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이고 극단주의 청교도 집단의 반란도 진압했다. 특히 스스로 총사령관 및 총독으로 나서서 아일랜드인에 대해 폭거에 가까운 진압을 실행했다. 아일랜드인의 저항은 이미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같은 전쟁 상대인 스코틀랜드에 대해서는 아일랜드보다 상당히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일랜드는 상대적으로 더 큰 분노에 휩싸였다.


무자비하게 내란을 종식시킨 크롬웰은 함께 힘이 커진 의회와 군대의 중간에 서게 됐는데, 의회에 불만을 가진 군대 쪽에 심적으로 기울어 있었다. 부패한 의회보다 우직한 군대가 통솔하기에 유리했던 것이다. 1653년 4월, 그는 결국 자기 휘하의 총기병을 소집해 하원에서 의원들을 강제로 축출했다. 무력 친위 쿠데타였다. 그리고는 2개월 후 친위대격인 인사들로 의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급조한 의회는 그의 성격을 닮아 과격하고 성급하기 짝이 없었다. 크롬웰은 다시 이 의회조차 불신하고 본인이 직접 통치권을 쥐기로 마음먹은 후, 의회 내에서 공작정치와 압력으로 모든 권력을 넘겨받았다. 1653년 12월, 의회의 실질적인 권력이 그에게 넘어갔다. 크롬웰은 3년마다 소집해서 형식적으로 추인해주는 의회와 국문회의의 협조를 바탕으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세 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호국경에 취임했다.


크롬웰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건강이 나빠졌는데 아일랜드 원정 때 급격히 악화되고 사랑하던 딸이 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처럼 병약한 가운데 말라리아에 걸려 런던으로 돌아왔으나 끝내 회복되지 않고 죽었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묘지에 비밀리에 안장되었으나 후에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하지만 찰스 2세가 즉위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후인 1661년 그의 무덤이  파헤쳐졌다. 생전에 그를 처벌하지 못한 반대파들이 그의 죽음에 만족하지 못한 탓이었다. 서양판 부관참시가 진행되었고 그의 시신은 죄수들이 처형되던 타이번에 내걸렸다. 이후 그의 시신은 교수대 아래 매장되었으나 머리는 웨스트민스트 홀의 꼭대기에 효시되어 찰스 2세의 집권 말기까지 그대로 있었다니 의회주의자들의 그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야심찬 옹고집 리더십
그에 대해서는 프랑스 작가 빅톨 위고의 5막짜리 운문극이 나왔을 만큼 여러 가지 평가들이 존재한다. 이 작품에서 크롬웰은 언제나 자신감 있는 행동으로 주위를 제압하지만 속으로는 더 높아지려는 야심을 갖고 있는 사나이로 그려진다.


? 초지일관으로 밀고 나간 저력 : 크롬웰은 근본적으로 왕당파를 믿지 않았지만 입법기관인 의회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공화정 아래서 의회가 처음 소집되자 크롬웰은 호국경 체제가 내란 이후 국란을 막는데 큰 도움이 된다며 반대론을 무시했다. 자신이 아니면 누가 이 위기를 막을 수 있겠는가를 역설하고 정부의 무능력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은 호국경 제도뿐이라고 소리쳤다. 이런 노선을 걷는 그는 의회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으며, 가장 큰 문제는 상대의 건전한 견제기능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법률 개정 등에서 그가 보여준 과격함은 도를 지나친 면이 있었지만, 자신의 소신을 그대로 밀고 나간 추진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반대세력을 제도권으로 순치(馴致) : 크롬웰은 왕당파를 내몰고 왕정복고를 막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의식을 깨우고, 왕이 아니라도 나라를 운영할 수 있다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결국 왕권신수설의 부정이 혁명과정을 통해 명예혁명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노력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국민의 불만이 있어도 이를 하의상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그러나 법치국가와 의회제도를 정착시켜 이후 대중의 불만을 의회제도 안에 포함함으로써 반대세력을 제도권 안으로 순치시킨 점은 그의 공로이다.


? 군사조직과 해군력 강화의 전문가 : 크롬웰은 본능적으로 군대와 가까웠다. 그는 의회주의자들에게는 신랄한 욕설을 퍼부었지만 군인들에게는 상당히 관대했다. 군사조직 전문가로서 이미 상당한 이름을 얻은 그는, 군대는 좋은 급료를 받아야 하며 직업으로서도 손색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령으로 임명받고 기병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철기병의 모델이 되었다. 그는 군을 엄격하게 통제했고 군기를 잡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 철기군은 전쟁에 투입되어 성과를 거두었고, 크롬웰은 이런 군대의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승리를 얻어냈다. 그리고 하원을 설득해 신군대의 창설에 돌입할 수 있었다. 크롬웰은 해군력의 증강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호국경이 되면서 정권을 장악하자, 해군본부를 위원회제로 개편하고 전투형 선박의 건조와 성능 개선에 주력했다. 이로써 200척 이상의 새로운 전함을 갖춘 영국 해군은 숙적 네덜란드에 버금가는 해군력을 갖추게 되었다.


성서를 줄줄이 외운 철의 독재자 스탈린 - 조작과 홍보, 프로파간다의 헤드십
흔히 세계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인물을 물으면 상당수가 히틀러를 꼽는다. 그러나 히틀러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를 인물이 바로 스탈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에서 약 5천만 명의 무고한 병사와 민간인들이 죽었는데, 스탈린은 자국 안에서만 수천만 명을 죽였다. 그러나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확실한 희생자수는 추측이 분분할 정도이다.


도대체 그는 왜 그렇게 많은 동지와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 이에 대해 역사가들은 그가 지독한 의심병 환자였고 남을 인정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권력자 특유의 정적 제거본능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당시 러시아 사회는 터지기 직전의 용광로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흐름을 읽은 스탈린은 피의 숙청을 수단으로 삼아 강력한 일당 전제주의 독재국가를 건설했다. 한때 그리스 정교회 사제가 되기 위해 성서를 줄줄이 외우기까지 했던 스탈린은 자유와 사랑의 정신을 모두 던져버리고 가장 악한 길로 들어선 것이다.


레닌의 후예, 강철의 사나이
스탈린은 1879년 12월 21일, 그루지야 카프카스의 고리에서 제화공의 아들로 출생했으며, 본명은 요시프 주가슈빌리이다. 티플리스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신학교에 재학 중 비밀 결사 메사메 다시에 가입하며 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볼셰비키파에 속해 있으면서 암살?대모?강도 등을 저지르고 이로 인해 체포와 유형, 탈주를 되풀이하다가, 레닌의 지도 아래 볼셰비키당이 결성되자 중앙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이름을 ‘강철의 사나이’를 뜻하는 스탈린으로 바꾸었다.


이후 10월 혁명 후, 내전이 종결된 제10차 당대회에서 레진, 트로츠키 등과 5인의 대열에 들어섰고, 이듬해 당서기장이 되어 실권을 쥐었다. 1942년 1월 레닌이 죽자 자신이 가장 충실한 후계자임을 알리고, 반대파 당 간부를 차례로 내쫓으며 공산당 일당 독재를 강화했다. 1934년 키로프 암살사건을 계기로 피의 숙청을 단행하여 숱한 인명을 살상했으며, 1936년에 스탈린 헌법을 제정했다. 이후 독일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부하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이를 통해 권력을 강화했다. 종전 후 연합국과 냉전체제를 강화시켰고 전후 세계질서를 양분했다.


여섯 가지로 대표되는 악의 모습
스탈린은 자유와 행복과 이상향을 꿈꾸며 피 흘렸던 민중 혁명 정신을 뒤집고 그들의 피를 바탕으로 공포 독재정치를 펼친 인물이었다. 그이 대표적인 악행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시 근로자들은 공장으로 강제 근무시키고 농장은 국영 집단농장으로 바꾸었다. 소비에트 국가 건설을 위해 농업을 버리고 공업국가로 나가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이를 위해 적성이나 경험과 관계없이 필요한 인원을 뽑아 채웠다. 2,500만 명 이상이 강제 퇴거당했고, 불과 3년 사이에 5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공장은 할당된 목표만 채워내면 그만이었다. 그 결과 1930년대 생산된 농기계와 공장설비 가운데 40%가 고장나고, 농업 생산성도 20% 가까이 떨어졌다.


둘째, 강제노동수용소 굴라크를 설치하여 정적 또는 반대파나 국민들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이 체제는 수용자들의 노동력을 대가 없이 국가가 착취하는 거대한 조직이 되었다. 1924년부터 스탈린이 죽은 1953년까지 이런 수용소에서 추위와 병마, 기아로 죽은 사람은 500~1,00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셋째, 1930년대 피의 숙청으로 숱한 목숨을 앗아갔다. 이것은 1934년 당 대표회의 때 당 위원들이 스탈린을 반대하고 키로프를 선택한 보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흐루시초프는 ‘1934년에 선출된 당 중앙위원 139명 중 98명이 숙청 또는 사살되었다’고 스탈린을 비판했다. 이때 고급 군인들과 정치인들 거의가 희생됐다. 스탈린 회고록의 집필자 드미트리는 이 당시 2,100만 명에서 2,200만 명이 숙청됐다고 증언했다. 이 정도면 스탈린은 소련 지도자들을 완벽하게 물갈이한 셈이다.


넷째, 고발과 고변의 불신사회를 만들었다. 스탈린은 모든 가정을 감시하고 동료와 조직 간의 견제 체제를 갖추고자 무고를 하더라도 상을 주었다. 특히 어린 학생들까지 동참시켜 가정의 유대를 없애버리고 체제 유지에만 도움이 되도록 했다.


다섯째,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 숱한 생명을 죽였다. 1942년 독일과의 이 전쟁에서 스탈린은 후퇴하는 수만 명의 소련 군인을 총살했다. 베를린 점령 이후 사상적으로 의심되는 군인들은 귀환하는 대로 수용소에 보내 재교육을 시켰고, 심지어는 떼죽음을 시키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만 소련인 사상자가 2,500만이 넘는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로 스탈린은 국민들을 지키지도 못했다. 오히려 이를 기회로 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살인을 저질렀다.


스탈린은 이 모든 악행의 한가운데 서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악함을 교묘히 숨겨 놓고 좋은 이미지만 보였다. 국민들은 이 같은 선전선동술에 넘어가 그를 우상화했고 추종했다. 스탈린 사후에 나타난 국민들의 정신적 공황상태가 그 수준을 잘 증언해준다.


조작과 가면의 비인간적 헤드십
스탈린은 지독한 콤플렉스의 소유자였다. 천연두와 패혈증의 후유증으로 부자유스러워진 왼팔은 어려서부터 비뚤어진 세계관을 심어 주었고, 그 때문에 그는 남들보다 훨씬 냉혹하고 냉정하게 살아갔다. 그는 공산독재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모두 버렸다. 첫 아내가 병으로 죽은 후 아들 야코프가 나치수용소에 잡혀 있었지만,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아 수용소에서 죽게 했다. 두 번째 아내는 스탈린이 그녀를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자 자살했으며, 그녀가 낳은 아들도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다는 후문이다. 모든 가족을 비정상적으로 사별한 그로서는 더 이상 사람으로서의 온정은 접어버렸을 것이다.


? 이미지 조작과 대 국민 홍보의 귀재 : 그는 언제나 수수한 옷차림, 보드카 한 잔, 잔잔한 미소 등으로 국민과 함께 하고 국민을 사랑한다는 이미지를 연출했다. 공식석상에선 언제나 예의를 갖추고 겸손했으며 금욕주의적 기질을 보여 국민의 아버지임을 연출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의심이 많았으며 정적들의 암살 기도를 우려, 공개석상에 나서길 꺼려했다.


? 타고난 프로파간다 전문가 : 그는 타고난 심리 전문가였다. 사람들의 경쟁심리를 잘 이용하여 고발 문화를 만들어냈고, 은밀한 죄와 고해성사에서나 말할 극히 개인적인 비밀도 드러내도록 유도했다. 여기에 생각이 깊지 않은 어린 청소년들을 적극 동참시켰다. 심지어 가장 유대관계가 끈끈한 가정조차도 감시와 견제가 가능하도록 공포질서를 만들어냈으며, 공개재판과 공개비난이라는 특유의 정죄를 통해 사람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그는 목표로 하는 사업 추진을 위해 구호를 제정하고 대형 걸개그림을 내걸어 조직원들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기술을 잘 알고 있었다. 음악과 스피커, 구호, 슬로건 등은 스탈린식 선전선동술의 기본 도구였다.


? 조직과 선동으로 정적 제거 : 그는 조직 전문가로 어떤 사업에서든 조직을 구성하고 목표를 실현시키는 데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 여기에 폭력으로 조직의 극대화를 이뤄냈고 반대의견은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것도 자신이 개입하지 않는 척하며 다른 사람들, 조직원들을 통해 비판하고 지적함으로써 여론을 교묘하게 선동하는 비상한 머리를 가졌다. 다만 그 비상함이 폭압과 인간성 말살에 쓰였다는 것이 이 시대의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