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마리턴

Die Puma Story

   
롤프 헤르베르트 페터스(역자: 박여명)
ǻ
브레인스토어
   
15000
2011�� 09��



■ 책 소개
나이키와 아이다스, 두 공룡이 잠식한 세계 스포츠 시장에서
푸마가 부활할 수 있었던 전략은무엇인가?


푸마의탄생에서부터 첫 번째 전성기, 몰락, 그리고 화려한 부활을 통해 그 속에 담긴 푸마의 경영철학과 마케팅, 경영노하우를 자세히 살폈다. 특히90년대부터 파격적인 경영 전략으로 재기에 성공한 푸마의 스토리 속에는 ‘푸마’만의 열정과 전략이 숨겨져 있다.
푸마는 1923년 독일에서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으로 창업해 유럽에서 큰 성공을거두다가 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나이키와 리복에게 완전히 밀려났다. 하지만 요헨 차이츠라는 젊은 청년이 CEO로 부임하면서 화려한 재도약을꿈꿨고, 이는 기존 푸마의 마케팅 방식과는 다른 마케팅과 상품 개발, 라이프스타일과 패션을 결합한 새로운 브랜드 이미지 구축 등으로 현실화됐다.그리고 현재 푸마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선수들의 유니폼에서 ‘푸마’ 로고를 볼 수 있을 정도의 브랜드가 되었고, 2011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주목하는 최고의 스타 우사인 볼트 등 유명선수들과 끈끈한 우정으로 그 유명세를 높여가고 있다.

이 책은 푸마가 다시 재도약할 수 있었던 이유, 젊은CEO 요헨 차이츠가 푸마를 글로벌 브랜드로 부활시킬 수 있었던 비결 등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잡은 푸마만의 성공적인 경영전략을공개한다.

■ 저자 롤프 헤르베르트페터스
1961년생으로 역사학자이자 지난 15년간 활동하고 있는 현직 기자이다. 뮌헨 출판사마르크트&테히니크(Markt&Technik)에서 편집부장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이곳에서 경제 및 컴퓨터 관련 도서들을 담당했다.여러 신문 및 잡지, WDR와 SWR 등에서의 프리랜서 활동 후 주간지 「비르트샤프츠보헤(Wirtschaftswoche)」의 미디어부를 책임지고이끌었다. 또한 경제 잡지 「비즈 캐피탈(BIZZ Capital)」의 부편집장으로 활동했으며 2002년부터는 「슈테른(Stern)」의정치·경제부에 기고하고 있다. 페터스는 쾰른 인근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 역자 박여명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통번역학과에 재학 중이다.독일에서 7년간 김나지움 과정을 수료했다. 책 번역과 영상 번역 등의 경력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특히 자기계발과 비즈니스 분야 쪽으로 관심이있게 번역하고 있다. 현재 방송일과 더불어 번역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나를 일깨우는글쓰기』『트렌드와 시나리오』『두려움 없는 글쓰기』 등이 있다.

■ 차례
들어가는 말 

1장 다슬러 형제 - 한 명문가의 성장과 몰락 
1. 형제가 함께
2. 치명적인 사건 
3. 독일, 한여름의 꿈 
4. 잘못된 길로 들어서다 
5. 타인의 돈 
6. 스니커즈,소리없는 아우성
7. 몸값
8. 자만심으로 무장한 클럽
9. 나락으로 
10. 혼란
2장 푸마의 귀환 
1. 모범생
2. 타인의삶
3. 미션 임파서블
4. 뭐라고요, 할리우드로 간다고요?
5. 인디펜던스 데이 
6. 여자들이 바라는 것 
7.믿을 수 없는 일들 
8. 제국의 반격
9. 차이나 커넥션
10. 백만장자의 마음 
11. 명예의 문제
12. 푸마의미래

부록 : 연대기





푸마리턴


다슬러 형제 - 한 명문가의 성장과 몰락

형제가 함께

루돌프 다슬러는 1898년 4월 29일, 직공 크리스토프 다슬러와 그의 아내 파울리네 다슬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29세였고, 부부에게는 이미 두 아이가 있었다. 첫째는 열두 살의 마리아, 둘째는 두 살의 프리츠였다. 그리고 루돌프가 태어난 지 2년 후 파울리네는 네 번째 아이를 낳았고 그 작은 생명에게 아돌프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다슬러 가족은 자신들의 삶에, 그리고 세상에 만족하며 살아갔다. 월급이 보잘것없어서 그렇지 아버지가 일하는 B. 베르나이스 신발 공장에는 일거리가 충분했다. 크리스토프는 그곳에서 열심히 일했다. 신발 공장에서의 일은 매우 고됐다. 그래도 그는 야심 찬 사람이었고 무언가를 운영하는 일도 좋아했다. 루돌프의 증조부 게오르크 요제프도 19세기 초에 직공 일을 시작했다. 직물 공장들은 신발, 그 중에서도 단순한 펠트 슬리퍼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발 제조업에 뛰어드는 것은 루돌프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루돌프는 열다섯 살부터 크랑켄 연합 신발 공장에서 신발 만드는 법을 배웠다.


루돌프가 막 16살이 되던 1914년,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이끈 사건이었다. 어머니는 전쟁으로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세탁소 운영을 포기한 상태였다. 이에 아돌프는 세탁소 자리에서 신발을 만들고 싶다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허락을 받아낸 아돌프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수공업에 대한 아버지의 조언을 받으며 신발을 만들어나갔다.


이후 가죽 도매상점에 있으면서 세일즈 전문가로 성장한 루돌프가 신발 공장의 판매와 경영을 맡았고 이로써 형제가 힘을 합친 우리 사업 공동체(Wir-AG)가 탄생했다. 주말이면 형제는 손수 작업한 상품들을 뉘른베르크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렇게 해서 버려진 세탁통과 양동이가 자리하던 좁디좁은 세탁소는 이후 전 스포츠계와 패션계에 혁신을 불러일으킨 세계적인 기업의 시발점이 되었다.


다슬러 공장의 장부에는 자산 6,000라이히스마르크가 기록되어 있었다. 루돌프는 생산 설비를 마련하는 데 투자하고, 새로운 직원들을 고용했다. 그리고 운동화와 러닝화 외에도 축구화를 생산 품목에 추가했다. 이미 1926∼27년부터 축구가 국민 스포츠 1위 자리를 쟁탈할 조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슬러 형제가 제작하는 운동화가 시대의 핵심을 정확히 찔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형제는 미끄러운 트랙에서 뛰는 육상 선수, 젖은 잔디 위에서 뛰는 축구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당시 선수들은 달리기를 멈출 때마다 운동화 안쪽에서 발톱이 꺾이는 고통에 시달렸다. 이 점에 착안한 형제는 운동화 바닥에 미끄럼을 방지해주는 스터드(stud, 일명 징이라고 한다. 선수들이 경기 중에 미끄러지지 않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지면과 신발 밑창 사이 마찰력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를 박아 고정했다. 이 새로운 운동화는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신발 공장을 설립한 지 3년 만에 루돌프 다슬러가 관리하는 장부의 상단에는 1만 7,287.75라이히스마르크라는 숫자가 적혔다.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도 다슬러 형제는 1928년에 8,000켤레에 달하는 운동화를 팔아치웠다. 암스테르담 올림픽 참가 선수 중 절반 이상이 헤르초겐아우라흐 상품에 깊은 신뢰를 보냈다. 불과 몇 주 만에 선수들 사이에서 다슬러 신발=승리의 신발이라는 공식이 탄생했다. 그때부터 다슬러 형제의 상품은 경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첨단 장비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국민적 사랑을 받는 각 분야 대표 선수들의 평가보다 좋은 홍보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치명적인 사건

형제는 약 25년 동안 한 길을 걸으며 우애가 깊어졌다. 형제는 인플레이션을 극복해냈고 최악의 경제 위기 속에서도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을 지켰다. 피부색이 다른 육상계의 스타 선수 제시 오언스의 발에 자신들의 신발을 신기고 동시에 히틀러의 정책을 사업에 활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동시대인들에게 다슬러 형제의 불화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불화로 말미암은 형제의 갑작스러운 결별은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형제 사이에 벽이 하나 생겼는데 그 크기가 너무나 커져 온갖 노력을 해도 죽을 때까지 겨우 몇 번 넘을까 말까 할 정도였던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휴전 이상의 화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가족 간에 불화가 일어나면 어김없이 이어지는 절차가 있다. 바로 재산 분할인데 다슬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 달 동안 이어진 언쟁 끝에 1948년 초 형제는 기업을 둘로 나눴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잘난 체하던 아돌프는 가족이 살던 빌라와 큰 공장을 차지했고, 자기 없이는 어차피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은 망할 것이라고 확신하던 루돌프는 회사가 1936년에 사들인 아우라흐 강 상부 뷔르츠부르크가의 작은 공장을 가졌다. 생산을 담당하던 기술자 47명은 자연스럽게 아돌프의 곁에 남았고 사무실 직원 13명과 일부 프리랜서 판매 직원은 루돌프를 따라나섰다. 회사의 자산은 최종적으로 1948년 6월 21일, 화폐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분할이 완료되었다.


혼자 남은 자신에게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이라는 이름이 부담이었던 아디는 서둘러 새로운 회사 이름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곧 자신의 애칭인 아디(Adi)와 성의 첫 음절 다스(das)를 결합해서 회사 이름을 아이다스(Adidas)로 바꿨다. 아돌프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나쁘지 않게 생각한 루돌프도 비슷한 방법으로 회사 이름을 루다(Ruda)로 바꾸려 했지만 가족은 물론 직원들에게도 호응을 얻지 못하면서 무산되었다. 얼마 후 루돌프도 자신의 별명과 이름을 넣어 푸마 루돌프 다슬러 신발 공장이라는 새 이름을 회사명으로 내세웠다. 푸마는 회사 홍보 이미지로 사용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푸마의 신발을 신는 모든 선수가 끈기 있고, 힘이 넘치고, 날쌔고, 세련된 푸마의 특성을 띠게 된다는 것. 바로 푸마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것이었다.


나락으로 

다슬러 형제는 회사 CEO 자리를 내려놓고 빈첸츠 그로트가가 푸마의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그로트가가 푸마 사장으로 선출된 데는 무엇보다 그가 미국을 꿰뚫고 있는 사람으로서 미국 푸마를 일으켜주길 바란 기대가 컸다. 푸마 사업은 다슬러 형제가 관리는 물론 파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영업화된 상태였다. 이에 푸마는 일차적으로 이들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움직였다.


해외 사업이 무너진 것은 주제넘은 판단 때문이었다. 이 판단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은 아르민(루돌프의 아들)의 사촌, 아디다스의 호르스트 다슬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미국 시장에 진출한 나이키와 리복에 대해 소비자들이 보여준 열광을 과소평가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이런 현상을 인정하지 않았고 독일의 특기인 정밀 생산을 지속하다 보면 소비자들도 곧 브랜드의 가치를 알아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르민 다슬러는 후에 "우리는 안일했습니다"라는 말로 당시의 상황을 정리했다. "값싼 제품들이 갖춘 놀라운 품질에 급습을 당한 거였죠."


그러나 1987년 초까지만 해도 그는 여전히 푸마가 나이키와 리복보다 좋은 점수를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문제는 정작 미국 매장에서 푸마 로고가 있는 상품들이 무슨 무거운 납덩이라도 매단 양 진열대에서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미국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최신 유행의 국산 브랜드였지 프랑켄 지방의 평범한 브랜드가 아니었다. 이러한 하락세가 이어지면서 미국 푸마는 결국 1986년에 수익률 0을 기록했고 이어 1987년에는 7,500만 마르크의 적자를 기록했다. 저조한 실적은 고향에서까지 지속되었고, 푸마에 드리운 실패의 그림자도 나날이 짙어졌다.


특히 상승세를 타던 리복은 푸마 경영진에게 그야말로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였다. 당시 43세의 새로운 소유주 폴 파이어맨이 지휘하던 있던 이 미국 회사는 다이내믹한 속도를 자랑하며 매일같이 성장세를 이어갔다.


당시 미국에서는 에어로빅과 피트니스 스포츠가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소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가벼운 스포츠화였다. 파이어맨은 시장 조사를 통해 평균적으로 소비자들이 스포츠화를 구입한 지 7주 정도 지나야 신발을 편안하게 느낀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그는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스포츠화를 구입한 처음 7주 동안 소비자들이 과연 무엇을, 아니 더 정확하게 운동화의 어느 부분을 불편하게 느끼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래서 스포츠화에 가벼운 가죽을 사용해보기로 하고 실험을 진행한 끝에 신고 벗기에 편리한 최초의 슬립온 슈즈(Slip-on shoes)를 개발했다. 신발은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왔다. 당시 스포츠화의 80%가 프로 선수용이 아닌, 단순한 취미 스포츠용으로 판매되는 상황을 고려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이키도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나이키는 돈 없는 사람보다 돈 많은 사람들을 타깃으로 정했다. 상품의 가격을 올려 그것을 사고 싶게끔 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었다. 푸마가 나아갈 길을 알지 못하고 헤매는 동안, 나이키는 푸마보다 5년은 더 앞서나갔다. 나이키가 파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쿨한 인생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었다. 스포츠화의 가격이 성능과 비교해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문제는 이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2장 푸마의 귀환

모범생

올슨은 푸마의 경영진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회사의 상황에 대한 짧은 보고를 마친 그는 불안했던 회사의 미래를 언급하며 앞으로는 요헨 차이츠가 새롭게 회사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푸마라는 기업의 역사에 또 하나의 획이 그어졌다. 역사상 처음으로 주주들이 노련한 기업 리더가 아닌 풋내기에게 구조조정을 맡긴 것이었다. 물론 그 풋내기를 두고 전도유망한 능력이 있다고 평가한 사람이 많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차이츠에게는 자신의 지성과 타협을 모르고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노력, 마케팅과 세일즈 분야에서의 지난 몇 년간 쌓은 경험을 제외하면 별다른 카드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CEO로서의 출발 상황도 최악이었다.


1992년에 푸마는 겨우 5억 1,200만 마르크의 매출을 올리고 한 해를 마감했다. 이는 전년보다 10%나 낮은 수치였다. 라이선스 사용료도 급격하게 줄었다. 푸마는 총 260만 마르크라는 적자를 기록했고, 직원들의 월급과 자재비 지출로 신용 대부 상한선도 매번 넘기는 상황이었다. 차이츠는 자신에게 기회가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침몰해가는 푸마라는 잠수함을 구하려면 쓸데없는 것들을 냉정하게 내던져버릴 필요가 있었다.


1993년 5월 1일 노동자의 날이었다. 푸마 직원들은 휴일을 즐겼고 헤르초겐아우라흐를 감싸는 초원에서 자전거를 탔다. 은방울꽃도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은 요헨 차이츠가 푸마에 CEO로서 첫 출근을 하는 날이기도 했다.


미션 임파서블

차이츠는 주주들 앞에 솔직하게 나섰다. 말기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일이며, 푸마가 완치되기까지는 엄청난 돈뭉치를 집어삼킬 것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익은 1995년이나 되어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절망적인 전망에도, 스웨덴의 대주주들은 차이츠가 반드시 성공을 이뤄낼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푸마가 명품 유럽 스포츠 브랜드로 도약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차이츠는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과거에는 단순한 스포츠 상품이었지만 앞으로는 시대에 맞는 디자인과 우수한 품질을 갖춘 여가용품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제 그 무엇도 우연에 맡기는 일은 없을 것이며, 모든 마케팅 활동은 그의 계획과 통지하에 이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프로벤투스는 1993년에 6,300만 마르크를 투자해 부채를 처리하고 연말에 한 번 더 1,000만 마르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차이츠는 직원들에게 상당히 많은 것을 요구했다. 예를 들면 그동안 직원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던 모든 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문제가 되는 부분을 즉각 없앴다.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과제는 인사부에 주어졌다. 직원 750명을 해고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는 전체 직원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지출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인사 평가와 공장 폐쇄의 절반은 차이츠가 맡아서 처리했다.


인사 해고만으로 푸마를 살려내기란 무리였다. 고정 비용도 약 40% 정도 줄여야 했다. 기업 예산은 전 분야에 걸쳐 두꺼운 빨간 색연필로 표시한 후 삭감되었다. 푸마 경영진은 구두쇠처럼 100가지 절약 플랜을 마련했다. 이러한 절약 활동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자회사와 라이선스 회사들도 동참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먼저 차이츠는 해당 조직의 책임자들을 교체했다. 거의 모든 자회사에 새로운 CEO가 부임했고, 스페인 자회사는 문을 닫는 대신 라이선스 회사로 운영되었다.


지사별 제멋대로식 경영에도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부터 세계 어느 곳에 있든 푸마 책임자들은 본사의 마케팅 콘셉트를 따라야 했다. 중구난방으로 다양했던 상품들도 대대적으로 줄여 몇 가지만 남겼고 분야도 축구, 육상, 농구, 실내 스포츠, 그리고 테니스만 남기고 나머지 스포츠 관련용품들은 생산을 중단했다. 그뿐만 아니라 차이츠는 푸마 홍보 대사로 푸마 월드팀을 구성했다. 새롭게 고안해낸 PR 전략이었다.


푸마 같은 기업에서 홍보와 프로모션은 하이테크 기업에서의 연구와 개발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새로운 자재나 품질 개선 하나만으로 다른 경쟁 업체들을 이길 가능성은 1993년 이래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차이츠가 보기에 아디다스에는 안전성이라는 이미지가, 나이키에는 자유, 그리고 모든 것을 다 걸어서 얻은 승리의 이미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푸마가 공략해야 할 이미지는 저항이었다. 차이츠는 스타급 선수들이 아닌 자메이카 출신의 육상 선수나 아프리카의 축구 선수들을 계속해서 광고 모델로 세웠다. 레게와 저항의 삶을 상징하는 이들이야말로 푸마의 이미지로 적격이었다.


미국 자회사를 재매입한 며칠 후 차이츠는 마이애미 공항에서 돌연 안토니오 베르톤을 상품 책임자로 승진시켰다. 베르톤은 젊은 세대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그것을 스포츠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상품에 적용했다. 홍보 영상에는 이제 축구 선수와 육상 선수 대신 스케이터와 브레이크 댄서들이 등장했다.


이후 베르톤이 CEO의 생각과 회사 경영에 끼치는 영향력은 갈수록 커졌고, 이에 따라 베르톤이 인정하지 않는 마케팅 전략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과거에 괴짜였던 그는 이제 비즈니스에 반드시 필요한, 신뢰할 수 있는 마케터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차이츠가 보호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회사에서 일주일도 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한번은 차이츠가 미국에서 돌아와 "스트리트 슈즈(street shoes, 타운웨어와 함께 사용하는 신발-옮긴이)를 만듭시다"라고 했을 때, 이번에도 베르톤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푸마 직원들은 이에 반대했다. 심지어 차이츠의 지인들조차 "정신이 나갔군!"이라며 베르톤을 당장 해고하라고 했다. "대체 스트리트 슈즈를 어디에다 판단 말이에요?" 세일즈 담당자들은 물었다. 실제로 스트리트 슈즈를 전통적인 전문 매장에서 팔 수는 없었다. 그러나 로스앤젤레스에 문을 연 최초의 푸마 매장에서는 이 스트리트 슈즈가 엄청난 매출을 올리며 팔려나갔다.


여자들이 바라는 것

푸마가 여성성을 갖다

1998년 초 어느 날 오후였다. 헤르초겐아우라흐의 푸마 본사로 전화가 걸려왔다. 질 샌더 패션하우스의 직원이었다. 직원은 디자이너가 다음 패션쇼에 스터드가 있는 푸마 신발을 사용할 계획이라며 주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패션 디자이너 질 샌더는 푸마의 훌륭한 옛 모델인 펠레 슈즈 킹을 보게 되었고 매우 멋지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차이츠와 부CEO 갠슬러는 푸마 신발을 런웨이에 올리겠다는 아이디어에 감동했다. 지금까지 푸마 사업에서 빠진 부분이 있다면 바로 명품 패션으로서의 푸마였다.


그들은 먼저 런웨이용 킹의 제작을 위해 산모 섬유(종이, 실, 나무 따위에 보풀보풀하게 일어난 섬유)로 된 특수 바닥창을 생산하기로 했다. 자칫 모델들이 런웨이에서 넘어져 뼈가 부러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차이츠와 갠슬러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푸마가 질 샌더의 화려한 이미지로 덕을 보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또 신발을 그저 공급만 할 것이 아니라 아예 푸마 라벨이 붙은 질 샌더 슈즈를 개발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들의 협력은 몇 년 동안 지속되었고 높은 수익을 올렸다. 질 샌더 푸마 슈즈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판매가 시작된 첫날부터 신발을 원하는 소비자들이 예약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브랜드의 잠재력에 놀란 것은 푸마 경영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질 샌더와의 협업은 푸마 경영진에게도 큰 용기를 주었다. 덕분에 푸마 경영진은 지난 50년간의 역사를 지나오며 깊이 뿌리내린 사고방식의 틀을 깨는 도전들을 이전보다 많이 시도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푸마라는 기업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 변화가 일어났다. 질 샌더와의 협력도 푸마에 긍정적인 여론몰이를 했다. 그러나 차이츠가 이 모든 것을 날카로운 판단을 통해서 예측하고 있었다거나 이를 목표로 이를 추진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푸마의 성공은 대부분 마치 안갯속에서 비틀거리는 것 같은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찾아왔고, 그때마다 우연도 작용했다. 차이츠는 시대의 흐름에 대한 직감을 증명해냈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을 얻었을 뿐이다.


카메룬의 키커들

스포츠 라이프스타일 패션보다 사업하기에 더 어려운 분야가 바로 순수 스포츠 분야였다. 스포츠 전문 매장들은 더 이상 디자이너들이 론칭하는 세련된 컬렉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경기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튼튼한 제품이었다. 푸마는 10억 마르크가 넘는 매출을 올리고 있었지만 마케팅에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한정되었기 때문에 육상에 투자하기는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푸마 경영진은 푸마 사업의 또 다른 강점 분야가 되어줄 축구에 집중하기로 했다. 최선의 방법은 이 분야에서도 언더도그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 아디다스 네트워커로 아프리카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호르스트 비드만이 물었다. "카메룬이라고 아십니까?"


서아프리카 대륙의 이 나라 축구 국가 대표팀은 점점 두려운 상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에 카메룬을 후원하겠다고 나서는 업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세리나 윌리엄스를 통해 흑인 스포츠 선수에게 컬러를 불어넣은 경험이 있는 푸마로서는 관심이 가는 대상이었다. 아프리카 팀을 좋아하는 축구 팬들은 카메룬만의 느긋한 정서와 삶에 대한 환희, 자유분방함을 특징으로 꼽았다. 차이츠는 이러한 특징이 푸마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곧 결정을 내렸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비드만에게 카메룬 축구협회와 계약 협상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불굴의 사자라는 별명이 있는 카메룬 대표팀과 함께 푸마는 기득권층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언론사 칼럼에 언급되기 위해 게릴라 마케팅을 선보였다. 푸마는 선수들에게 다양한 색깔의 축구화와 소매가 없는 유니폼을 보냈다. 몸의 열을 식히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유니폼을 받은 이들은 감동했고, 그중에는 비드만이 2001년 9월 중순에 아프리카에 소개해준 전 분데스리가 감독이자 새로운 카메룬 대표팀 감독인 빈프리트 쉐퍼도 있었다. 카메룬 대표팀은 2002년 2월 10일에 열린 아프리카 컵 결승전에서 세네갈을 상대로 3대 2로 승리를 거두었다. 민소매 유니폼을 입고 말이다. 그러나 피파의 거만한 관계자들은 카메룬 대표팀의 튀는 행보에 분노하면서 2002 한일월드컵에서 민소매 유니폼의 착용을 금지했다. 그러자 푸마는 즉각 선수들의 피부색과 같은 검은색 그물망으로 된 소매 부분을 만들어 붙였다. 이에 민소매 유니폼에 대한 사소한 다툼은 매일같이 언론에 등장했고 그때마다 푸마의 이름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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