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리더는 떠난 후에 아름답다

   
지미 카터(역자: 이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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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북스
   
13000
2008�� 11��



■ 책 소개
재임 당시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무능한대통령이라는 지탄을 받았고, 연임에도 실패했지만 오늘날 미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전직 대통령 가운데 한 명으로 존경받고 있는 지미 카터. 퇴임후 자신이 설립한 카터재단과 함께 지난 25년간 펼친 활약상을 담담한 필체로 그리고 있는 이 책은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묵묵히 원칙과소신을 지켰던 그의 인생과 닮아 있다. 1982년 카터재단이 설립되어 세계 곳곳에서 인권과 평화를 위해 해낸 일들을 정리하며 진정한 리더의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1982년 그가 설립한 카터재단은 전 세계 인권과 환경 문제는 물론 다양한 국제분쟁에 개입하였으며, 지미카터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저자 지미 카터
미국 제39대 대통령. 1924년땅콩농부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잠수함에서 대위로 근무했으며, 서른 살에 고향에 정착해 아내로잘린과 농기구 판매회사를 열었다. 1062년 민주당 소속 조지아 주 상원의원, 1970년 조지아 주지사를 거쳐 1976년 52세의 나이로 미국대통령에 당선됐다. 재임 중 캠프데이비드 협정,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소련과의 SALT Ⅱ 협정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오일쇼크, 이란인질사태 해결 실패 등으로 지지도가 추락해 1980년 공화당 레이건 후보에 밀리면서 재선에 실패한다. 


재임 중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평가됐던 그는 현재 "가장 존경받는 전임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2년 그가 설립한 카터재단은 전 세계 인권과 환경 문제는 물론 다양한 국제분쟁에 개입하였으며, 지미 카터는 그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저작 활동도 활발하여 『아름다운 노년』『해뜨기 전 한 시간』 등 12권의 책을냈다.


■ 역자 이종훈
1960년에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콜럼버스 항해록』『스픽스의 앵무새』『책의 적(敵)』『현명한 인생의선택』『세계를 바꾼 연설과 선언』『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피드백의 힘』『인류 이야기』『물벼룩은 위대하다』『사랑받는 대통령의 조건』 등이있다.


■ 차례
추천사 - 박원순 (희망제작소상임이사)
머리말 - 백악관을 떠난 뒤의 행복


1장 퇴임한 젊은 대통령이 무엇을 할 수있을까?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 카터재단은 "행동하는" 자선단체


2장 세계를 평화롭게, 인류를 아름답게
중동의 평화정착을 위하여 | 핵무기 확산 금지가 사명이다 | 소련의 민주화를 위한 출발 | 공정한 선거로 분쟁을 해결한다 | 김일성을 만나다 | 협상이전쟁을 이긴 아이티 | 수단과 우간다에 평화가 깃들 때 | 발칸반도의 행복을 찾아서 | 하바나에 자유를


3장 세계의 하늘 아래 민주주의를사수하라
파나마-노리에가 퇴출작전 | 니카라과-1990년 대선을 감시하다 | 가이아나-위험 속에 꽃 핀 민주주의 |잠비아-내 생애 가장 잊을 수 없는 경험 | 중국-덩샤오핑과의 유쾌한 대화 | 팔레스타인-점령지에서 치른 민주주의 실험 | 베네수엘라-차베스의승리를 지켜보며 | 인도네시아-세 번째로 큰 민주국가를 꿈꾸며 | 나이지리아-희망의 불꽃은 타오른다 | 라이베리아-아프리카 동맹국을 위한 헌신| 콩고-아픔을 딛고 얻는 자유


4장 질병 없는 세상을 위하여
건강한 삶이 목표다 |정신질환자를 위한 봉사 | 드라쿤쿠루스증을 박멸하라 | 나이지리아에서 질병과 맞서다 | 기니벌레에 맞선 위대한 전사 | 강변실명증 퇴치 노력 |사상충증으로 인한 끔찍한 경험


5장 카터재단은 내일의 꿈을 만든다
개인의 절대 권리,인권을 수호한다 | 여성 평등은 영원하다 | 빈부 격차 완화를 위한 애틀랜타프로젝트 | 지도자회의가 하는 일 | 카터재단을 움직이는 힘, 견습직원들


6장 카터재단의 미래
우리의 헌신은 계속된다 | 집없는 사람들을 위한 해비타트 운동


감사의 말 - 이 책을 위해 도움을 준 이들에게




진정한 리더는 떠난 후에 아름답다


퇴임한 젊은 대통령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우리의 재산에 대해 ‘백지신탁’을 위임받은 수탁인 찰스 커보 변호사가 나를 찾아왔다. 1980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1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우리 가족의 농장과 도매업에 관한 몇 가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좋은 소식이란 토지가 제대로 보전되어 있으며, 그곳의 소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쁜 소식은 카터 도매점이 100만 달러의 부채를 안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사적인 투자 활동이나 사업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여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이 사실은 아내 로잘린과 내가 워싱턴으로 이사한 뒤로 처음으로 전달받은 회계 보고였다.


그러나 이것은 부담이 덜한 편에 속했다. 훨씬 큰 부담은 내 집권기에 축적된 거의 2,700만 종에 이르는 공문서 및 자료, 수백만 종의 사진과 시각 기록물과 기타 기념물을 보관할 대통령 도서관 부지를 확보한 뒤 건물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대통령직에서 퇴임하면 꼭 해야 하는 의무사항이었다. 나는 평소 기금 조성에 익숙하지 못한 데다가 이제는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 후보로서 아무 준비도 없이 코앞에 닥친 사태와 맞닥뜨린 처지였다. 나는 내 사재를 털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로잘린과 나는 우리의 사업 가운데 남은 부분을 매각하고, 대통령 회고록을 집필하기로 했다. 나는 조지아 주지사와 협력해 대통령 도서관 부지를 선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립했다. 우리는 노력 끝에 애틀랜타 번화가의 상업 지구와 에머리 대학교의 중간 지점에 부지를 선정했다. 다음해, 회고록을 집필한 뒤로는 도서관 건립 기금을 마련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기부자를 널리 확보하려면 그저 ‘우리의 백악관 기록물을 보관한다’는 목적보다 훨씬 바람직한 대의를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이 필요성은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여생을 보낼 것인가?’ 하는 우리가 직면한 또 다른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 내 나이가 56세였으므로, 나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이후로 당시에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들 가운데 가장 젊은 편에 속했다. 내 수명은 통계상으로 앞으로 25년이나 남은 셈이었다. 그러다 나는 특정한 전쟁에 관련된 당사자들을 만나고, 분쟁을 해결하거나 방지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카터재단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카터재단은 ‘행동하는’ 자선단체
우리는 카터재단의 초기 구상을 발전시킨 결과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 원칙들을 수립했다.


1. 우리는 국제연합의 기구들, 미 연방정부, 다른 비정부기구, 싱크탱크, 대학교 등과 같은 조직들이 실제로 수행하는 업무와 중복되는 활동을 펼치거나 그들과 경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우리나라나 타국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안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공백을 메워갈 것이다.
2. 우리는 당파성을 초월해 외부 인사를 영입할 것이다.
3. 카터재단을 사안에 대해 이론적이거나 학술적인 분석 작업에 기여하는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일종의 행동기구가 될 것이다.
4.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태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목표가 소중한 경우 과감히 도전할 것이다.
5. 나는 개인적으로 신중하게 처신할 것이다.
6. 특정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경우, 우리는 ‘카터재단’이나 내 이름 대신 ‘글로벌 2000’처럼 일반적인 명칭을 사용해 마을의 촌장들이나 국가 수뇌부들이 진정한 동반자 의식을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7. 나는 업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뒤 카터재단과 주요 후원자에게 배부하고 사본을 백악관 등에 전달할 것이다.



2장 세계를 평화롭게, 인류를 아름답게
핵무기 확산 금지가 사명이다

1984년 5월,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과 나는 핵무기 확산 금지 현황을 평가하는 활동에 동참했다. 우리는 1985년 에머리 대학교에서 개최된 회의에 핵무기 보유국의 대표단을 초청했다. 우리의 기본 목표는 현행의 국제협정에 대한 분석, 그 협정의 이행 수준, 추가 조치에 관한 권고안을 파악한 뒤 그것을 널리 공표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반드시 실질적인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에 역점을 두려고 애쓰며, 우리의 보고서와 권고안을 핵무기 보유국이든 비보유국이든 가리지 않고 모든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전달했다. 또한 우리의 성과를 요약해 뉴스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렸다.


핵무기 보유고의 확대를 선별적으로 반대하는 데 역점을 두고 싶어 하는 미국의 입장과, 기술적 측면에서는 핵무기 생산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런 행위를 삼가며 핵 강대국들이 핵군축에 진심으로 기여하기를 바라는 강대국들의 입장 간에는 변함없이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핵무기비확산조약과 핵에 관한 여러 협정들에 대한 이행 및 위반 여부를 감시한 결과, 최근 미국이 종전에 체결된 협정들을 포기한데다 여러 억제 수단들을 따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런 미국의 태도를 강력하게 규탄한다.


김일성을 만나다
북한 문제에 대한 카터재단의 개입은 세간에 최대의 물의를 일으킨 중대 사안이었다. 1990년부터 4년 동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산주의 독재 지도자 김일성은 나에게 평양을 방문해 몇 가지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요청해왔다. 북한이 원자로의 중성자 감속재로 탄소를 사용했는데, 노후한 동력원자로에서 제거한 핵 연료봉을 재처리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에 위기 사태가 고조되어 있었다.


그들은 내가 해군 장교 시절부터 핵 원자로 설계에 관한 기초 지식을 터득해왔음을 잘 알고 있었고, 미국 및 여러 당사국들과 어떤 형태로든 대치하는 사태를 피하고 싶다고 밝혔다. 기본적인 문제는 미국이 북한과 직접 접촉해 대화를 나누는 행위를 금지해왔다는 점이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한국전쟁 이후로 효력을 발휘해온 수준보다 훨씬 강력한 경제적 제재 조치에 대한 승인을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요청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하려고 했다. 1994년 6월 1일, 나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실상 대세는 이미 (전쟁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제재 조치에 대한 미국의 방침을 따르도록 다른 국가들을 설득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서신을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냈다. 나는 현지 시찰단이 제시한 핵 문제에 관한 정보, 북미 관계의 개선 가능성, 군사 시설에 대한 상호 사찰, 그 지역에 배치된 핵무기의 존재 유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의무 사항, 한미 간 합동 군사 훈련의 현황, 미국 관리들이 장차 평양 측과 접촉할 경우 대면해야 할 인사들에 관한 사항을 포함해 북한에서 확인할 일련의 질의서를 작성했다.


우리는 6월 12일 일요일에 비공식적인 신분으로 고향을 출발했다. 모든 경비는 우리 측이 부담했다. 판문점을 통과할 때 나는 이상야릇하고도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비무장지대를 경유해 평양을 방문하도록 허용된 최초의 인물들이었다. 우리의 방문 기간 내내 접대원들은 솔직하고도 친절한 태도를 보였으며, 특히 한국에 대해 욕설을 퍼붓거나 비난하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했다. 그들은 종종 한반도에 관한 오해 및 낙후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서로간의 잘못으로 인해 이런 문제점들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첫 번째 회담은 김영남 외교부 부장과 함께 진행되었다. 경제적 제재 조치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거의 일종의 종교나 다름없는 그들의 기본 철학은 ‘자력갱생’을 뜻하는 ‘주체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어떤 제재 조치를 취하더라도 북한에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할 것이 뻔했다. 북한과 미국 및 동맹국 간의 무역 거래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연합 기구들은 북한에다 아무런 혜택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나는 워싱턴 정가에다 소식을 전달하고, 위기 사태로 인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연속 회담을 제안할 수 있는 권한을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위임받기로 결심했다.


나는 김일성 주석에게 내 비공식적인 역할, 방문 전의 최종 협의 사항들,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을 방문한 사실 등을 설명한 후, 고향을 출발하기 전에 준비해둔 제안 사항을 설명했다. 김일성 주석은 사실상 나의 모든 제안을 받아들이더니 자신도 두 가지 주요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하나는 자금과 설비가 미국으로부터 직접 유입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겠으나, 어쨌든 미국이 북한에게 경수로에 관한 기술 이전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사실상 우리가 북한에 기대해온 것이었다. 북한은 그동안 국내에서 생산된 우라늄을 정제해 사용할 수 있었는데, 경수로를 사용할 경우에는 농축 핵 연료를 해외에서 들려올 수밖에 없을 것이며, 흑연을 감속재로 사용하는 그들의 노후한 원자로의 경우처럼 핵무기를 생산할 만큼의 플루토늄을 그다지 쉽게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또 다른 요구 사항은 미국이 북한을 핵무기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공표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미해결된 모든 핵 문제를 타결짓기 위한 3차 북미회담의 개최를 원했다.


핵 문제에 대해 합의하고 나서 우리는 한국전쟁 중에 매장된 미군의 유해를 발굴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이 문제는 미래의 논란거리를 없애는 일일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게 선의를 베푸는 중대한 의사 표시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일성은 미국이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합동조사단이 유해를 발굴해 반환하도록 허용했다. 상황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계속 쉽게 풀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서울의 미국 대사관에 도착해 우리의 방북 활동이 워싱턴 정계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나와 김일성 주석 간의 합의 사항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북한에 어느 정도의 경제적이거나 군사적인 제재 조치를 취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가운데 김일성이 미국의 제안에 적절한 반응을 보였다는 내 의견을 반영한 뉴스가 미국에 방영되자, 북한에 대한 제재 조치를 추진하는 움직임은 활기를 잃어갔다. 클린턴 대통령도 나의 성과를 인정해줬다. 한 달 후,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아들 김정일은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그 약속 사항을 존중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내게 보냈다. 이어서 밥 갈루치는 핵 협상의 유효성을 확인한 공식 협정을 북한과 체결할 수 있었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나중에 평양을 방문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후임으로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과 화해를 추진할 수 있었으며 남북문제에 커다란 진전을 이룩했다.



3장 세계의 하늘 아래 민주주의를 사수하라
팔레스타인-점령지에서 치른 민주주의 실험

카터재단은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매우 끈기 있게 노력해왔다. 사람들은 내가 신임 대통령일 때 이스라엘과 관련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때 아랍석유수출국기구는 이스라엘과 사업상 관련이 있는 모든 미국 기업들에 대한 2차적 불매 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석유금수조치를 취했다. 또한 이집트의 주도로 25년 동안 4차례나 전쟁이 벌어졌다. 아랍 국가들 가운데서 이집트는 가공할 만한 군사력을 갖춘 유일한 나라였다(당시에 소련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미국은 중동 지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이스라엘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어떤 협력 방안도 모색하지 않았다. 나는 미국의 대통령이었지만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나탄 샤란스키처럼 소련 내에서 널리 알려진 인권 운동가들과 공공연하게 의견을 교환하며 그들의 편에 서서 소련 지도자들과 맞서기 시작했다. 또한 이스라엘에 대한 2차적 불매 운동을 금지시키는 법안을 제정하고 그 법률을 위반한 미국 기업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가했다.


나는 197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캠프테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다. 이스라엘은 평화, 안보,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팔레스타인에 완전한 자치권을 보장함과 동시에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요르단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의 군사 및 정치 세력을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 의회에서 85%의 지지를 얻어 비준되었다. 그리고 6개월 후 양국 간에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협정 덕택에 이스라엘에 대한 주요 아랍 국가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게 되었다.


퇴임 후, 로잘린과 나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 아랍국들 간의 우호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카터재단을 대표해 중동 지역 곳곳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1990년에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야세르 아라파트와 직접 만나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앞으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1993년 오슬로협정에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스스로 통치 기구를 수립해 자국의 지도자들을 선출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일정은 1996년 1월로 잡혀 있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백악관으로부터 승인을 얻은 후, 감시 활동가들을 매우 철저히 엄선하는 과정을 거쳐 선거 감시단을 구성했다.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 및 가자 지구 내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정치, 군사, 경제적인 모든 면을 거의 통제해왔다. 이스라엘 정착촌들이 점령 지역 곳곳에 퍼져 있었으며, 정착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연결된 고속도로들이 급속하게 건설되고 있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그 주요 도로들 가운데 일부를 이용하거나 통과할 수 없도록 금지되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의 보행자 및 차량에게 개방되어 있는 도로마저도 거의 500여 곳에 이르는 이스라엘 검문소들 때문에 통행에 지장을 받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수많은 금지 사항들을 불필요하게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문제를 요르단강 서안 지구 및 가자 지구의 치안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시몬 페레스 총리 및 우리 다얀 장군과 협의했다. 그들은 나에게 주요 검문소들이 자유롭게 개방될 것이며, 이스라엘 병사들이 절대로 투표소에 진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투표자들이 어떤 위협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했다. 나는 아라파트의 요청에 따라 하마스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하마스는 무력 행동을 고집한 채 아라파트가 이끄는 파타당과 경쟁 관계를 형성해왔다. 나는 그들에게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고 폭력을 그만둘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선거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억압을 중단할 경우’ 폭력을 중지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선거 진행 절차는 사실상 완벽했으며 요르단강 서안 지구 및 가자 지구에서 대대적으로 투표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아라파트가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되었으며, 파타당 소속의 의원 후보들도 대부분 당선되었다. 페레스 수상은 팔레스타인 자치의회의 모든 의원이 요르단강 서안 지구 및 가자 지구 내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며 의원 활동을 펼칠 수 있게 허용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2004년 11월, 아라파트가 사망하자 팔레스타인 법률에 따라 그 후임자를 몇 주 이내에 선출해야 했다. 카터재단은 다시 한 번 그 선거에 감시단을 파견했다. 선거 결과, 마흐무드 아바스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그는 막강한 세력을 지닌 온건파 지도자였다. 아라파트와 어떤 협상도 거부해온 이스라엘은 이제 자신들이 원하는 상대와 협상을 추진할 수 있었다.


2006년 1월의 세 번째 선거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팔레스타인자치의회의 132석을 뽑는 선거에서 하마스는 전체 투표자 가운데 42%의 득표율을 획득함으로써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카터재단의 분쟁 해결 분야 책임자를 맡고 있는 매슈 호데스와 나는 마흐무드 아바스에게 단일 정부를 수립하도록 촉구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파타당 소속 장관들은 모두 사임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얼마 후 팔레스타인에 단일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가자 지구의 파타당과 하마스 간의 갈등으로 인해 붕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주민들 간의 평화 회담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팔레스타인 : 인종 격리가 아니라 평화를』을 집필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주민의 어려운 처지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평화 정착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4장 질병 없는 세상을 위하여
건강한 삶이 목표다

보건 분야에서 카터재단의 세 가지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가장 만연해 있는 질병 및 사망의 원인은 무엇인가? 둘째,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지식을 활용해 이런 발병과 사망을 어느 정도나 예방할 수 있는가? 셋째, 우리가 각자 좀더 건강하고 오래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예를 들어, 65세 이전에 사망한 사람들의 3분의 2가 죽음을 미리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음이 밝혀졌으며, 위험 요인을 줄이기 위해 조치를 받은 50세 남성들이나 여성들은 수명을 11년이나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분석 결과를 널리 홍보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로잘린과 내가 함께 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모든 것 : 여생을 보람 있게』의 출간도 이것을 홍보하는 데 보탬이 되었다. 또, 카터재단은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건강위험평가’로 일컫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컴퓨터를 이용해 개인 습관과 질병에 관한 설문지를 작성하면 각자의 기대수명 예상치를 얻을 수 있다. 해당 그룹이 검사 단계에서 함께 질문에 답하면, 소프트웨어프로그램은 각자가 실제 살아온 햇수와 비교해 우리의 생물학적 나이가 얼마인지를 알려준다.


‘격차 해소’ 및 ‘건강위험평가’와 관련된 활동말고도 치명적인 습관인 흡연에 대한 나의 단호한 생각 때문에, 카터재단은 흡연의 위험을 감소시키려는 국제적 활동에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흡연의 위험성을 자각한 사람들이 미국에서 흡연에 대한 법률적 금지 조치를 더욱 강화하도록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양심적인 담배 제조회사들은 개발도상국 쪽으로 담배 판매 홍보 전략을 바꾸었다. 개발도상국은 아직 담배의 위험성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탓에 담배 판매 금지에 대한 대중적인 요구가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5장 카터재단은 내일의 꿈을 만든다
개인의 절대 권리, 인권을 수호한다
 
‘인권’은 카터재단의 모든 프로젝트가 일반적으로 다루는 사안이다. 나는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이후 각각의 인권 침해 사례를 꼼꼼하게 검토해왔다. 그런 다음 나는 보통 해당 정부의 수뇌부에게 사적인 서신을 보내거나 직접 전화를 거는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최선을 다해 중재 활동을 펼쳤다. 예를 들어 인권 침해 사례를 보고받았는데, 그것이 그 나라의 기본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국제 인권 단체들이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례를 철저히 파악할 수 있게 자세한 사실을 밝혀달라고 요청한다. 또한 신속히 조치를 취함으로써 그 인권 침해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이 빗발치듯이 쏟아지는 사태를 미리 방지할 것을 촉구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 상황을 해명할 수 있는 답변을 요청한다.


최상의 방안은 가혹 행위를 저지른 가해자가 신속히 시정 조치를 취함으로써, 발전의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좀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례들에서 긍정적인 성과를 얻었지만, 때로는 감금이나 처벌에 대한 법률적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장황한 변명만 듣거나 아예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것이 미결 상태로 남을 경우, 우리는 인내심을 발휘해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다른 인권 단체들과 제휴해 규탄에 나선다. 


국제연합의 수많은 성공 사례는 때때로 그 조직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난 속에 파묻히는 경향이 있다. 국제연합의 인권기구들은 종종 정부 간 정치 활동의 마비 상태로 인해 희생양으로 전락해 논란에 휩싸이기도 한다. 따라서 언제나 세력 다툼을 벌이며 압력을 행사하려는 거의 200여 회원국들이 국제연합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카터재단은 카터메닐상을 수여하는 것 말고도, 국제연합 내의 인권 체계를 강화시키도록 요구함으로써 억압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에 관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또한 인권 침해권이 해당 정책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6장 카터재단의 미래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해비타트 운동

로잘린과 나는 거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카터재단의 업무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해마다 한 주 동안은 해비타트 운동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해왔다. 1984년 활동을 시작한 후부터 집 없는 빈민층에게 제공할 주택을 건설하는 우리의 활동에 여러 사람들이 동참했다. 우리는 활동 초기에는 미국의 주요 도시들의 빈민가에만 역점을 두었지만 점차 외국과 미국 간의 교류를 시작했다.


우리는 해당 지역을 잘 아는 해비타트 지역 본부들이 추천한 자택 소유 가족들 가운데 성인들과 함께 활동을 전개한다. 그 주택들의 규모는 중간 수준이지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고, 설계는 주변 건축물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그 가족들은 주택 가격을 모두 지불해야 하지만, 우리는 성경 말씀에 따라 빈민층에게 무리한 가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보통 20년 동안 저당권을 설정하기 때문에 월별 납입금은 그들의 수입 수준에 알맞게 정해진다.


그 가족 구성원들은 ‘노동 부가로 얻는 소유권(황폐 건물에 입주자의 노동력을 부가해 일정 기간 싼 집세로 거주시킨 후 소유권을 주는 제도)’을 취득하려면 약 500시간의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며,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일반적으로 건축 부지를 마련해 토대를 닦아놓아야 한다. 그 후, 그들은 주택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5일 동안 우리와 함께 작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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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린과 나는 우리의 가족 구성원들, 수천 명의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멕시코(3개 도시), 캐나다, 필리핀, 헝가리,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 인도 등지에서 우리의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또한 지금까지보다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필리핀의 5개 지역에서 추진한 결과 293채의 주택을 완공했다. 카터재단의 활동에는 해비타트 운동이 뒤따라야만 활기가 넘쳐난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