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1968년 미국 항공우주국과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교수로 있던 어윈 제이콥스는 통신기술 컨설팅기업 "링카비트"를 설립했다. 1980년 링카비트는 M/A-COM과 합병했다. 그후1985년 4월 사직서를 제출하고, 3개월 후 함께 그만둔 옛 동료 6명과 "퀄컴"을 창업하였다. 그리고 퀄컴은 10년만에 세계 휴대폰 시장을선도하는 혁신적인 기업이 되었다. 샌디에이고의 작고 초라한 무명기업에서 세계 이동통신산업의 핵심기업으로 우뚝 선 퀄컴의 성공 방정식을 소개한다.
다른 성공한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퀄컴의 성공 스토리 역시 우연한 신화가 아니라 퀄컴을일궈낸 사람들의 땀과 열정의 산물이다. 이와 동시에 퀄컴은 첨단지식을 바탕으로 지적재산권 비즈니스라는 독특한 사업모델을 만들어냈다. 퀄컴은 특히와해성 혁신전략으로 기존의 업계 질서를 허물어뜨리고 시장을 선도해나갈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기술혁신이 과연 무엇인지, 그것이 기업과 산업에어떤 추진력을 제공하는지, 한걸음 더 나아가 연관 산업과 소비자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데이브 목
무선통신 분야의 엔지니어 겸컨설턴트로 일하면서 『더 피쳐』와 『모틀리 풀』 등에 이동통신산업과 관련된 많은 글을 써왔다. 저서에 『Tapping IntoWireless』(2002)가 있다.
■ 역자 박정태
15년간 신문기자로 일한 뒤 현재국제경제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에 『아시아 경제위기 1997∼1998』이 있으며, 역서에 『템플턴 플랜』 『짐 로저스의 어드벤처캐피털리스트』 등이 있다.
■ 차례
제1부 혁신적인 기술 솔루션
1.엑스터시, 피아노, 어뢰: 출발, 제2차 세계대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2. 링카비트에서 퀄컴으로: 창업과 재창업, 1960년대중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
3. 셀룰러 붐의 시작: 새로운 상용화 기술의 필요, 1980년대
4. 디지털화한 셀룰러: 본격화한2세대 이동통신, 1980년대 말
5. 셀룰러 질서의 와해를 시도하다: 배팅, 1989년
6. CDMA 메시지를 퍼뜨리다:전환점, 1989년 말
7. 신기술은 저절로 팔리지 않는다: 하나씩 인정받기, 1989~91년
8. 공동의 인터페이스를 만들다:시험운영, 1990~91년
9. 무선통신 표준이 되다: 최종 승인, 1992~93년
10. 기술이 끌고 마케팅이 밀고: 파트너십구축, 1993~94년
11. 무선통신시장에서 성전이 벌어지다: 뜨거운 논쟁, 1994~95년
12. PCS와 전세역전: 마침내흐름이 바뀌다, 1995년
제2부 지적재산권 비즈니스
13. 핵심 비즈니스를정하다: 장비 제조업체가 될 것인가, 기술 개발자가 될 것인가?
14. 지적재산권 비즈니스의 개발: 확고한 토대를 갖추다
15.가치사슬의 구축: 특허기술을 퍼뜨리다
16. 세금 징수자인가, 꼭 필요한 파트너인가: 지적재산권의 확산과 보호
17. 관료의장벽을 허물어뜨리다: 국내외 감독당국과의 협상
18. 무선통신의 미래를 만들어가다: 3세대 기술로의 차질 없는 이행
19. 최고의인재를 미리 확보해놓다: 사내외의 기술혁신가 팀 구축
20. 첨단 기술의 리더로 남으려면: 3세대와 그 너머까지 확실히자리잡다
열정이 있는 지식기업 퀄컴 이야기
불과 10년 전만 해도 퀄컴이라는 회사는 기업인들에게조차 생소한 이름이었다. 더구나 샌디에이고처럼 한적한 도시에 본거지를 둔 퀄컴 같은 기업이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키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첨단기술 분야에서 말이다. 번뜩이는 천재들이 늘 모여들고, 성공 신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곳은 여전히 실리콘밸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샌디에이고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퀄컴을 알고 있었고, 창업자인 어윈 제이콥스를 모두들 존경했다. 1990년대 초 퀄컴이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 샌디에이고 지역 경제계는 누구도 그 끝을 예상할 수 없는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에 한 장이 추가됐다고 생각했다.
퀄컴이 미국의 보통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였다. 이 해 퀄컴의 주가는 무려 25배나 치솟았는데, 7달러도 안 되던 주가가 연말에는 176달러를 넘어섰다. 그러다 보니 주식투자자가 아니더라도, 심지어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퀄컴에 대해서는 들어봤을 정도가 됐다. 이 해 주식시장에서 퀄컴의 주가가 천문학적인 상승률을 기록하게 된 원동력은 이 회사가 무선통신산업의 미래를 쥐고 있다는 인식이었다. 특히 그동안 퀄컴이 개척해온 기술은 다른 기업들이 사용하는 대가로 지급할 기술사용료(licensing royalty) 수입은 이 회사의 앞날을 열어줄 황금열쇠였다. 퀄컴은 자신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서 오랫동안 힘들게 싸워왔다. 이미 여러 회사들이 특허 기술에 대한 무제한적인 사용의 대가로 수백 만 달러의 돈을 내고 있는 상태였다.
퀄컴이 그동안 쌓아온 전과(戰果)는 거의 전설처럼 전해진다. 이 회사의 창업자들, 특히 어윈 제이콥스와 앤드류 비터비는 신화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덕분에 퀄컴에 몸담은 엔지니어들은 누구나 입사와 동시에 최고의 엘리트 대접을 받았다. 1990년대 말 신생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은 벤처캐피털로부터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퀄컴의 전직 엔지니어들을 스카우트하려고 애썼는데, 마치 그것이 신생기업의 기술 수준을 보장하는 것처럼 인식될 정도였다. 퀄컴은 존경받는 동시에 모두가 두려워하는 기업이었으며, 결코 누구도 퀄컴의 잠재력을 폄하하지 못했다.
친구와 동료들
앤드류 비터비는 1957년 MIT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그해 여름 JPL에 들어와 통신연구부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맡은 임무는 에버하드 레크틴 국장 아래서 익스플로러 I(Explore I)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는 JPL의 여러 연구원들은 물론 엔지니어들과 힘을 합쳐 궤도위성을 사용해 각종 관찰 결과와 측정 결과 같은 데이터를 송신하는 위성 원격측정법의 첫 실용화를 시도했다.
위성통신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비터비는 매우 중요한 성과를 올렸는데, 위상동기회로(phase-locked loops)와 디지털 변조(digital modulation) 기술을 개발한 것이었다. (위상동기회로는 무선통신의 하드웨어 부분으로 특정 정보를 전달하는 주파수를 추적하거나 차단하는 데 쓰인다. 디지털 변조는 아주 많은 정보를 하나의 반송신호(carrier signal)에 압축하거나, 이렇게 담아낸 정보의 압축을 풀 때 사용되는 다양한 기술을 포괄한다.) 위상동기회로와 디지털 변조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과 효과적이고 안전한 통신을 할 때 필요한 기술로, 당시까지만 해도 거의 개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도조차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비터비는 JPL에서 새로운 디지털 전자이론을 접한 뒤 이를 평생의 연구 토대로 삼아 중요한 업적들을 남겼다.
비터비는 1962년 남가주 대학교(USC)에서 디지털 통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 해 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교수가 됐다.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자 그는 정보이론을 비롯한 새로운 영역으로 시야를 넓혀야만 했다. 교수로서 정보이론을 가르치는 한편 JPL의 연구를 계속해서 컨설팅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정보이론에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됐다. 안정적으로 통신하기 위해서는 신호체계의 원칙이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게 바로 정보이론의 핵심이었다.
JPL에서 일하는 동안 디지털 통신 이론의 발전 가능성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여러 연구원들을 만났다. 1964년 말 MIT 교수 한 명이 안식년 휴가를 얻어 항공우주국(NASA)의 연구원 자격으로 JPL에 왔다. 비터비와 어윈 마크 제이콥스의 오래도록 이어질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고, 두 사람의 만남은 마침내 퀄컴의 공동창업으로 결실을 맺어 통신의 세계를 영원히 변화시켰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MIT에서 공부했지만 관심 분야는 서로 달랐다. 또 제이콥스는 MIT 교수로 계속 남아있었지만 비터비는 캘리포니아로 떠나버렸다. 제이콥스가 MIT에 남기로 한 것은 클로드 섀넌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클로드 섀넌은 정보이론의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손꼽힌다. 매우 간결하면서도 전통적인 방법과는 동떨어졌던 섀넌의 아이디어들은 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통신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이론은 통신시스템의 개발 방식을 단순화함으로써 통신 분야의 연구가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는 초석이 됐다. 섀넌은 그의 정보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모든 통신시스템에서 요구하는 보안성과 신뢰성, 수용성을 충족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정보기관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떠올려보면 신호체계 및 암호에 관한 섀넌의 이론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전화시스템이 갖고 있는 정보전달 능력과 잠재력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본 개념들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어윈 제이콥스는 원래 전자기학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MIT에서 섀넌의 이론을 접한 뒤 마음이 바뀌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1959년 MIT의 교수로 임명됐을 때 그의 연구실은 섀넌의 연구실과 아주 가까웠다. 당시 제이콥스와 함께 했던 여러 교수와 학생들은 그들이 경험한 가장 흥미롭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불타올랐던 분위기였다고 그 시절을 회상한다. MIT의 연구실에서는 정보이론이라는 신세계를 열어젖힌 획기적인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고, 제이콥스는 이제 막 싹을 틔워가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분야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섀넌의 정보이론에 담겨있는 이론적 측면을 충분히 파악한 제이콥스는 동료 교수인 잭 워젠크래프트와 함께 정보이론의 고급과정 강의를 준비했다. 이 강의의 목표는 정교한 이론 교육과 동시에 이론을 현실세계의 실제적인 문제에 응용해보는 것이었다. 이 강의는 대학원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지만, 수업시간이나 세미나가 열릴 때면 공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은 물론 학부생들까지 자리를 메웠다.
MIT에서의 경험과 정보이론을 현실에 응용해보려는 그의 끊임없는 열정은 제이콥스로 하여금 추상적인 수학 공식과 씨름하는 학문의 세계를 벗어나 첨단 통신장비를 만드는 기업에서 일하며 실제적인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현실세계로 옮겨가게 만들었다. 20세기 말의 무선통신 혁명이야말로 바로 그가 할 일이었다.
링카비트의 출범
제이콥스는 1968년 NASA의 에임스 연구센터를 떠나 집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NASA의 동료 연구원인 앤드류 비터비와 렌 클라인록에게 샌디에이고 기업들의 기술 컨설팅 수요가 폭발적이라고 이야기했다. 세 사람은 이 자리에서 공동으로 컨설팅 업무를 제공하기로 했다. 링카비트라는 벤처기업이 새로이 출범한 것이었다. 제이콥스는 이때 한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는데, 자신이 벤처기업의 경영을 맡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출범 초기 회사 경영은 클라인록이 맡았다.
렌 클라인록은 비터비와 마찬가지로 UCLA 교수로 일하고 있었고, 통신 분야의 경험이 풍부했다. 더구나 클라인록과 비터비, 제이콥스는 정보이론 및 현대통신이론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낸 시기에 함께 MIT에서 공부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링카비트는 짧은 기간 동안 기업으로서의 틀을 갖춘 뒤 로스앤젤레스에서 샌디에이고로 옮겼는데, 렌 클라인록의 이탈은 링카비트 입장에서 보면 큰 손실이었지만, 나중에 그가 이룬 성과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 그는 알파넷(ARPAnet)을 개척하는 일을 맡아 지금 “인터넷의 아버지”라 일컬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클라인록이 떠나자 제이콥스와 비터비는 그의 공백을 메워줄 새로운 인재를 물색했다. 계속 성장해나가는 사업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두 사람은 UCSD(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의 박사과정 학생으로 곧 JPL 연구원으로 일할 예정이었던 제리 헬러를 스카우트했다. 이로써 제리 헬러는 링카비트의 첫 번째 전임 직원이 됐다. 링카비트는 이 무렵까지도 여전히 고객들에게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고, 시간 당 수수료를 받는 벤처기업으로 남아있었다. 제이콥스와 비터비는 링카비트가 보다 기업다운 사업구조를 갖추면, 더 큰 계약을 따낼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재능을 훨씬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자신들이 새로이 개발할 여러 특허권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지켜낼 수 있을 것이었다.
제리 헬러가 합류한 뒤 링카비트는 곧 새로운 핵심 인재의 영입 작업에 착수했다. MIT 박사 출신인 앤디 코헨과 마그나복스의 엔지니어 클라인 길하우젠이 제리 헬러에 이어 링카비트에 들어왔다. 나중에 제이콥스와 비터비를 따라 퀄컴으로 옮기게 되는 두 사람은 통신 분야, 특히 대역확산 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제이콥스는 마그나복스에 컨설팅을 해주면서 길하우젠의 재능을 눈여겨 봤는데, 위성통신시스템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을 높이 샀다. 길하우젠 역시 제이콥스가 링카비트에 합류할 것을 제의하자 기꺼이 받아들였다.
세 명의 직원으로 출발해 불과 10년 만에 직원수가 600명이 넘는 기업으로 성장한 링카비트는 1980년 8월 M/A-COM에 매각됐다. M/A-COM은 동부지역의 대기업으로, 마이크로웨이브 어소시에이츠(Microwave Associates) 계열에서 성장해 분사한 회사였다. 제이콥스는 두 회사의 결합이 매우 이상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링카비트는 탁월한 엔지니어링 인재들로 구성된 시스템을 갖췄고, M/A-COM은 이 시스템에서 쓰는 여러 재료들을 만들어냈다. M/A-COM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인 래리 굴드 박사와 제이콥스는 두 회사가 합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고, 실제로 합병된 뒤 처음 몇 해 동안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
CDMA 메시지를 퍼뜨리다
제이콥스와 비터비를 비롯한 퀄컴의 선임 기술진들이 네트워크 사업자들을 상대로 코드분할 다중접속(CDMA)의 지지를 호소하러 다니는 동안 샌디에이고 본사에서는 직원들이 퇴근시간도 넘긴 채 일하고 있었다. 옴니트랙스(Omnitracs) 설비 구입비와 늘어난 인건비로 인해 막대한 자금이 지출되고 있었다. 이미 은행 대출을 끌어다 쓰고 있었고, 회사 임원과 알 만한 사람들로부터 자금을 수혈 받았지만 돈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빠져나갔다. 회사를 계속 운영하려면 또 한 차례 증자를 단행해야 했다. 결국 1989년 5월 250만 주의 우선주를 추가로 발행해 2000만 달러에 가까운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CDMA가 이동통신 환경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현재 개발 중에 있는 기술과 제품을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는 게 필요했다. 우선 대규모 시장을 겨냥한 홍보 공세를 시작하는 게 급선무였다. 제이콥스와 비터비는 학자 출신이다 보니 CDMA의 개념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엔지니어나 과학자들을 상대로 설명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에게는 이 개념이 무척 어려웠다. 따라서 퀄컴의 엔지니어들이나 CDMA를 띄워보려고 하는 통신업계의 많은 기술자들은 이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네트워크 사업자가 퀄컴의 CDMA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개발 자금을 투자하는 데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교육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제이콥스는 추가 펀딩 작업을 끝내자 샌디에이고에서 활동하는 PR 회사의 오너 기업가인 그렉 맥쿼터를 찾아가 CDMA 기술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그 이점을 설명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는 아주 적은 금액의 예산으로 시작했지만 맥쿼터는 이 프로젝트를 그 후 수 년간에 걸쳐 의욕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맥쿼터는 홍보 계획을 수립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이콥스를 비롯한 고위 임원진이 토론회나 세미나에 참석하도록 독려했고, CDMA 기술을 소개한 설명서도 직접 쓰도록 했다. 퀄컴의 엔지니어들도 업계 표준을 정하는 여러 단체와 위원회, 토론회에 CDMA 주창자로 참석해 퀄컴이 명실상부한 통신업체임을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했다. 퀄컴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를 시장의 구석구석까지 신속하게 전파하는 게 더욱 중요했다.
CDMA가 더 나은 이유는 무엇인가?
셀룰러 산업에는 세부적으로 매우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이 포진돼 있다. 퀄컴은 그래서 이들을 상대로 한 초창기 CDMA 시연회에서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하는 전략을 펴나갔다. CDMA 방식은 가치사슬의 모든 계층, 즉 장비 제조업체와 서비스 공급업체는 물론 이동통신의 최종 사용자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퀄컴은 자신들이 개발한 솔루션이 갖고 있는 이 같은 메시지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제이콥스와 퀄컴의 엔지니어들은 수식이나 기술적 용어를 써서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셀룰러 업계를 상대로 CDMA 기술을 팔려면 소비자들에게 돌아갈 혜택이나 온갖 특장점들을 내세워야 했다. 바깥 세상에 CDMA를 파는 일은 맥쿼터의 몫이었다. 그가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CDMA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대단한 셀룰러 방식이 되었는지 핵심적인 이점들을 사람들이 이해해야만 했다. 맥쿼터는 CDMA 기술의 여러 가지 우수한 요소들을 추려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뒤 셀룰러 업계에 뿌렸다.
▲ 네트워크 사업자들에게 유리한 점
?용량 확대 규모가 가장 크며 유연한 확장이 가능하다 - CDMA는 지금까지 나온 어떤 방식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무선통신 수단이다. CDMA는 사용 가능한 한정된 주파수 대역 지원을 FDMA(주파수분할 다중접속 방식)나 TDMA(시분할 다중접속방식)보다 더 능률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동시 대화자의 숫자를 최대화할 수 있다. CDMA는 기존의 아날로그 네트워크에 비해 적어도 10배 이상의 용량 확대를 보장한다. 또한 CDMA에서는 각 셀에서 소화할 수 있는 최대 통화자 숫자가 고정돼 있지 않고, 수용 한계가 보다 유연하다. 기본적으로 CDMA에서는 셀의 통화자가 너무 많아질 경우 일시적으로 통화 품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네트워크 사업자에게는 이런 상황에서 통화 품질을 떨어뜨리는 게 일종의 옵션 사항이므로, 무조건 신규 통화가 차단된다든가 통화가 끊기는 것보다는 더 나은 조건이다. TDMA에는 이런 옵션이 없으며, 따라서 소화할 수 있는 용량이 고정돼 있다.
?우수한 보안성 - 아날로그 장비를 이용해 무선 전화를 하게 되면 도청당하기 쉽고, 전화번호도 쉽게 추적당한다. CDMA에서는 암호화 기법을 쓰므로 도청이나 추적이 불가능하다. CDMA는 원래 보안성이 요구되는 군사적인 용도로 개발됐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CDMA는 네트워크 사업자들이 별도의 보안시스템에 투자해야 할 돈을 절약할 수 있게 해준다.
?전체 주파수를 공유한다 - FDMA나 TDMA 시스템은 아날로그 네트워크와 유사해 주파수 채널 배분이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바로 붙어있는 두 셀조차도 신호간섭 문제로 인해 비슷한 주파수 채널을 쓸 수 없다. 따라서 아주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주파수 할당 기법이 불가피하다. 반면 CDMA 시스템에서는 모든 주파수 채널이 모든 셀에서 사용되므로, 이 같은 주파수 할당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아날로그에서 쉽게 옮겨갈 수 있다 - CDMA는 원래 아날로그 네트워크와 병행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그것도 아날로그 네트워크의 대역 용량 가운데 10%만 있으면 CDMA 구현이 가능하다. 따라서 네트워크 사업자는 아날로그 무선전화기를 갖고 있는 다수의 사용자를 계속해서 지원하면서 동시에 같은 지역에서 첨단 디지털 CDMA 무선통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아날로그 네트워크의 가용 자원 중 10%만 CDMA에 넘겨줘도 네트워크의 전체 용량은 두 배로 확대된다. 반면 TDMA 기술은 아날로그 사용자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CDMA와 같은 수준의 디지털 서비스 용량을 공급하려면 훨씬 더 많은 가용 자원을 아날로그 네트워크로부터 제공받아야 한다.
?송신탑의 숫자를 줄여준다 - CDMA 네트워크는 같은 범위의 지역이라 해도 아날로그 네트워크에 비해 더 적은 숫자의 기지국으로 통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이 점은 이론적으로도 입증됐다. 추정치에 따르면 CDMA 시스템에서는 네트워크 사업자가 여타 시스템들에 비해 2분의 1 내지 5분의 1정도의 송신탑만으로도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아날로그 네트워크에서 CDMA로 이행하는 비용이 엄청나게 절약된다.
CDMA는 또한 최종 소비자, 즉 유선전화기가 아닌 무선전화기를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혜택을 가져다 준다. 네트워크 사업자들은 당연히 최종 소비자의 눈길을 끌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관심을 가졌으며, 소비자들에게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는 기술이야말로 바로 그들이 찾는 것이었다.
무선통신시장에서 성전이 벌어지다
코드분할 다중접속(CDMA) 기술의 상용화는 마치 물결이 일 듯 발전해왔다. CDMA가 1993년 IS-95라는 또 하나의 산업 표준으로 결정되자 퀄컴은 캐리어 업체들을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했고, 시분할 다중접속(TDMA) 시스템이 시험운영 초기에 많은 문제를 노출시키면서 퀄컴의 입지는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이제 퀄컴이 도마 위에 오를 차례였다. 퀄컴의 파트너 업체들이 속속 장비를 생산해 시험운영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업계는 CDMA 네트워크의 운영상 문제점들에 부딪치게 됐다. 칼자루는 상대방에게 넘어갔다. TDMA 지지자들은 기술적으로 그들이 더 성숙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는 앞의 주장을 더욱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TDMA 네트워크는 처음에 노출했던 많은 문제들을 해결했고, 이제 당초 기대했던 성능과 거의 비슷한 성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반면 CDMA는 비로소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1995년 초가 되자 퀄컴은 CDMA 구현과 관련된 숱한 문제점들을 풀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초창기의 시험운영과 시연회에서는 제대로 작동하는 장비를 만들기 위해 퀄컴의 엔지니어들이 소수의 파트너 업체 및 공급업체들과 협력하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이제는 제3의 제조업체들이 생산한 장비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새로운 표준 문서에 따라 생산했다고는 하지만 근간을 이루는 기술은 제조업체들조차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사 이해했다 하더라도 퀄컴에 비해서는 수준이 많이 떨어졌다. 심지어 전세계적으로 테스트용 네트워크에 많은 장비가 쓰여 퀄컴의 엔지니어들마저도 놀랄 지경이었다.
특히 치명적인 문제는 아날로그 방식의 AMPS 신호와 근접했을 때 너무 많은 잡음이 난다는 점이었다. 이 아날로그 신호는 인근 기지국에서, 때로는 해당 지역의 기지국에서 나온 것인데, CDMA 이동통신 단말기는 가까운 곳의 아날로그 신호로 인해 야기된 잡음에 취약했다. 심지어 통화 중에 끊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테스트에서는 통화가 끊기는 빈도가 너무 높아 조사 결과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퀄컴은 네트워크를 잘 조정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TDMA 지지자들은 CDMA의 성능에 대해 그동안 지적해왔던 사실 하나가 비로소 드러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퀄컴과 CDMA를 상대로 상황을 반전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TDMA에 거액을 투자한 기업들은 홍보부서를 동원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CDMA를 구현하는 초기 과정에서 문제점들이 발견되자 CDMA 개발 그룹(CDG)은 신기술의 성능을 폄하하는 주장을 무력화시키느라 분주해졌다. 문제가 장비의 결함 때문이든, 사람의 실수 때문이든, 공급업체의 제조상의 하자 때문이든, 비판론자들은 퀄컴의 기술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초기 단계에서 제기된 CDMA 비판론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고 감정적이었다. 셀룰러 업계의 행사가 열릴 때마다 CDMA를 비롯한 경쟁 기술들을 주제로 난상토론이 벌어졌고, 행사장은 참석자들로 늘 만원을 이뤘다. 통상 무미건조한 기술적 토론을 해왔던 패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아수라장에 빠져든 듯 격렬한 말싸움을 벌였다. CDMA 비판론자들은 경쟁적인 관점에서 이 기술이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얘기했다. 심지어 퀄컴이 제시한 방법들과 지금까지 일궈낸 결과물들이 물리학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퀄컴은 일리가 있는 CDMA 비판론에는 즉각 대응했다. 특히 성능 문제에 관해서는 그것이 좋건 나쁘건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동안의 주장을 수정하거나 분명하게 설명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퀄컴의 엔지니어들은 CDMA 네트워크를 운영하면서 직접 경험한 문제점들은 기꺼이 인정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숨어버리거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이들은 오로지 문제를 인정한 뒤 그것을 바로잡는 작업만 했다. 하지만 일부 대중매체에서는 마치 CDMA 기술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처럼 왜곡하기도 했다.
기술에 관한 토론이 셀룰러 산업의 범주를 넘어가버리면 토론의 내용이나 정확성이 훼손되는 부정적인 결과가 뒤따른다. 물론 기술 포럼에서 지적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해 퀄컴이 제시한 솔루션을 놓고 합리적인 피드백을 도출한 토론도 꽤 있었지만, 상당수는 이차적인 정보와 알맹이 없는 주장으로 입씨름만 하다가 끝나곤 했다. 특히 수십 억 달러에 달하는 세계 통신시장의 주도권을 누가 잡을 것인지, 또 주식시장에서 얼마나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는지와 같은 주제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까지도 과연 CDMA가 맨 처음 제시했던 성능을 전부 구현했느냐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있지만, CDMA가 기술적으로 우수하다는 사실에는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지적재산권의 초석을 다지다
제이콥스와 비터비는 물론 퀄컴의 다른 엔지니어들도 훌륭한 솔루션을 고안해 복잡한 통신 문제를 풀어가는 작업은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링카비트 시절에도 제이콥스를 비롯한 기술진은 창조적 사고를 잘하기로 유명했다. 이들은 벽에 부딪친 것 같은 문제를 향해 다양한 솔루션을 쏟아냈고, 수많은 기회를 만들어냈다. 퀄컴의 핵심 개발팀은 현재의 통신망 체계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틈날 때마다 되짚어보면서 대개의 사람들이 놓쳐왔던 솔루션이 없는지 다각도로 연구했다. 만약 그렇게 연구했는데도 가능한 솔루션을 찾아낼 수 없었다면, 일단 그 문제는 옆으로 제쳐두기도 했지만 절대로 그냥 잊혀지는 경우는 없었다. 또 연구 결과 상용화 가능성이 엿보인다면, 기술진 전부가 달려들어 실행 가능한 계획을 짜냈다. 제이콥스와 퀄컴의 기술진은 정부 발주 용역을 수행하면서 아주 광범위한 경험을 쌓은 덕분에 자신들이 만들어낸 솔루션을 회사 내부의 엄격한 서류작업을 통해 보호하는 데 애썼다.
CDMA 기술을 이동통신에 응용하기 위해서는 상용화된 시장에서 쓸 수 있는 제품의 생산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상당한 수준의 기술혁신이 요구됐다. 퀄컴이 내놓은 수많은 독보적인 솔루션은 대역확산을 다중접속 시스템에 접목시키는 데서 나타나는 결정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해주었고, 퀄컴은 처음부터 이런 아이디어에 대한 특허 신청을 철저히 준비했다. 회사가 나중에 직접 제품을 생산하든 아니면 합작회사를 설립하든, 기술진 입장에서는 우선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1990년대 초까지도 CDMA 이동통신 분야에서 경험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CDMA 연구에서 누구보다 앞서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구 성과를 정확한 날짜별로 서류화하는 것은 비즈니스 모델의 방향이 어떻게 잡히든 일단 자신들이 누구보다 앞서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퀄컴이 다른 경쟁자들과 가장 확실하게 차별화되는 점은 셀룰러 네트워크에 CDMA를 구현할 때 나타나는 몇 가지 결정적인 문제점들, 즉 신호 강도 조절과 통화 중 핸드오프 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 아주 탁월했다는 것이다. CDMA에 이런 문제점들이 있다는 것은 학계에서는 이미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간단한 해결책조차 아직 개발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제이콥스와 비터비, 그리고 퀄컴의 핵심 기술진은 이런 문제점들을 하나씩 제거하다 보면 완벽한 솔루션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현재의 기술수준으로 보더라도 이들이 내놓은 솔루션이 궁극적인 것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디지털 통신이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를 지니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당시 이들의 솔루션은 너무나도 정교한 것이었다.
셀룰러 통신산업협회(CTIA)가 1993년 CDMA를 북미지역의 표준으로 채택했을 무렵, 퀄컴은 이미 CDMA를 이동통신 네트워크에 구현하는 방법으로 지적재산권의 중요한 초석을 다져놓은 상태였다. 다른 표준들의 경우 다수의 기업들이 참여해 프로토콜의 서로 다른 부분들을 개발했지만, CDMA의 핵심 기술은 1990년대 초 표준으로 채택될 때까지 퀄컴이 유일한 개발업체였다. 셀룰러 업계의 대다수 업체들은 그들이 보기에 더 안정적이고 수익성도 좋을 것 같은 TDMA와 GSM 분야에 매달렸다. 퀄컴은 그래도 계속해서 CDMA를 상용화하는 데 죽기살기 식으로 덤벼들었다. 그건 엄청난 도박이었고, 결국은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실로 대단한 헌신이 필요했다.
CDMA 표준에 쏟은 엄청난 지적 노력 덕분에 퀄컴은 CDMA가 최소한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뒤부터 라이센스 조건이나 로열티 협상에서 강력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다. 퀄컴은 당시 다른 어느 업체보다 더 많은 리스크를 부담했기 때문에 1세대 CDMA의 로열티를 효과적으로 관리해나갈 수 있었던 셈이다. 반면 GSM 같은 표준은 수십 개 업체들이 각자 필요한 지적재산권 확보에 공헌했기 때문에 광범위한 차원에서 기여도에 따라 로열티를 서로 나눠가졌다. 따라서 GSM 기술을 구현하려는 기업은 시장 진입에 앞서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는 서로 다른 업체로부터 교차 라이센스를 받아야 했다. 퀄컴은 CDMA 구현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초기 라이센스 수수료를 청구하고, 이후에도 계속적인 로열티 수입을 받아 추가적인 기술개발을 해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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퀄컴이 이동전화 분야에서 CDMA를 개발하는 데 독보적인 경쟁적 우위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CDMA가 실제로 작동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수단들을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CDMA와 대역확산 분야에서는 세계 각국의 기업과 연구소, 미군 당국이 상당수의 특허와 지적재산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다중접속 이동통신 시스템에서 CDMA를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은 아무도 갖고 있지 못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