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서 출발하여 IBM이라는 세계 일류의 첨단기업을 설립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까지 끝없는야망과 도전, 치열한 투쟁으로 점철된 왓슨의 삶과 그가 일구어낸 IBM만의 독특한 문화 탄생의 배경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1990년대 몰락의길을 걷던 IBM이 루 거스너에 의해 부활할 수 있었던 배경에 창립자인 왓슨이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으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근대사를 아우르는 이야기 속에서 미국 대공황 사태, 제2차 세계대전 등 시대적 파고를 헤치고 IBM이 컴퓨터 산업의 강자로 우뚝 서기까지의과정을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저자는 특히 왓슨이 지닌 ‘불굴의 의지’란 유전자가 개인의 삶은 물론 조직에 얼마나 커다란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낱낱이 파헤침으로써 계속되는 경제 불황과 어려운 기업 환경의 돌파구를 찾는 경영자들에게 길잡이의 한 모델로서 제시하고있다.
■ 저자 케빈 매이니(Kevin Maney)
「USA 투데이」의 칼럼니스트.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비즈니스 저널리즘 업계에서 "최고의 칼럼니스트"로 뽑혔으며, MarketingComputers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칼럼니스트"로 네 차례나 선정하기도 했다. 「비즈니스위크」의 베스트셀러 MegamediaShakeout의 저자이기도 하다.
■ 역자 김기영
연세대학교 상경대학을졸업하고 미국 워싱턴 대학교에서 MBA와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경영대학원장, 연세대학교 부총장, 한국경영학회회장, 미국 Decision Sciences Institute 부회장(평생 Fellow)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경영대학명예교수(석좌교수), 미국 University of Washington 경영대학 특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생산관리』『계량의사결정론』『생산 전략』『한국 제조업의 경쟁력 재발굴』 등이 있다.
■차례
프롤로그
1장 매버릭 탄생하다
2장 플린트와 만나다
3장 C-T-R이라는 이름의 회사
4장 젖먹이 IBM을 기르다
5장 도전과 행운
6장 친구, 영웅 그리고 예스맨들
7장 적 그리고 착각
8장왕과 성
9장 왓슨 주니어
10장 왓슨의 전쟁
11장 노인의 새로운 전자 시대
12장 세계 정복
13장매버릭 그리고 그의 인간성
14장 시간은 흐르고
내 인생에 타협은 없다
매버릭 탄생하다
NCR 설립자 존 H. 패터슨과 2인자인 채머스(Hugh Chalmers)가 왓슨을 데이턴 시로 불러들였다. 당시 왓슨은 조직에서 훌륭한 금전등록기 영업사원 가운데 한 명일뿐이고 한 차례 승진하여 뉴욕 로체스터에 있는 NCR 지점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채머스와 패터슨은 왓슨에게 NCR 자회사로 중고 금전등록기 회사를 세워줄 것을 제안했다. 당시 중고 금전등록기가 NCR의 신제품 수익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왓슨에게는 커다란 기회였다. 왓슨은 NCR 기록에서 1903년부터 사라져 1907년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왓슨은 세컨드 핸드 캐시 레지스터 컴퍼니라는 위장 회사를 NCR의 자금으로 설립했다. 위장은 정교해서 회사 발행 주식 증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계략이었다. 이 회사는 이익 목적이 아니라, 금전등록기 업계 내 경쟁체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일은 옳지 못한 일이었고, 왓슨은 이 때문에 나머지 생애 동안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패터슨은 나폴레옹 같은 독재자처럼 NCR을 운영했다. 그는 모든 직원의 삶을 조종하고 싶어했다. 아무 이유 없이 직원을 해고하기도 했고, 역시 아무 이유 없이 직원을 승진시키기도 했다. 그는 심지어 샤워 규칙, 호텔 내에서의 팁 규칙, 넥타이 구매처까지도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임원들을 해외에 보내 호사스럽게 돈을 쓰고 오게 했다. 부유한 생활에 맛을 들인 임원들은 돈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되었고 패터슨이 만족스러워할 만큼 열심히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패터슨이 어떤 동기로 시작했건 간에 NCR은 일하기 좋은 혁신적이고 우수한 시설을 갖춘 장소가 되었다. 왓슨은 패터슨의 방법을 흡수했고 또 많은 부분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50대 패터슨은 30대 왓슨을 문하생으로 삼았고, 왓슨은 열정적으로 일했다.
1912년까지 왓슨은 NCR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왓슨은 항상 자기 출신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데이턴 시 상류층과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했고 여러 협회에서 자리를 차지했다. 이러한 노력은 왓슨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 왓슨은 NCR 내부에서 평생 친구를 몇 만났는데 그 가운데는 키터링(Charles Kettering)도 있었다. 그는 훗날 제너럴 모터스로 옮겨가 미국 역사상 위대한 제품 개발자가 된다. 키터링은 왓슨에게 공학 부문과 영업 부문 사이의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발명품이 얼마나 사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이다. 또한 사교계의 한 클럽에서 평생의 반려자인 재닛 키트리지(Jeannette Kittredge)를 만난다.
일생 동안 왓슨은 NCR을 떠나기로 한 것은 자신의 결정이었다고 말했지만, 왓슨 사후 IBM 일부 문서에는 왓슨이 해고당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어떻게 문하생으로까지 생각되던 패터슨과 왓슨의 좋았던 관계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나빠질 수 있을까? 한 가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NCR 고위 간부층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음을 들 수 있다. NCR은 반독점법 형사상 위반 혐의로 왓슨을 비롯한 직원 30명이 연방 대배심에 기소되었다. 그러나 운 좋게도 데이턴 시에 홍수가 일어나고, 패터슨은 회사 건물을 이재민 대피소로 공개하며 명성을 되찾는다. 그러나 패터슨은 재판을 치른 직원들에게 갑자기 등을 돌렸다. 아마 패터슨은 NCR에 어떠한 오점도 남기지 않으려고 그들을 제거하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 1913년 왓슨은 회사를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나이 40에 왓슨은 인생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플린트와 만나다
1914년 초 겨울, 왓슨은 플린트(Charles R. Flint)를 만나 삶을 바꿀 자리를 제의 받는다. 플린트는 발명품과 기계를 좋아했다. 그는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을 찍는 시간기록계를 생산하는 모든 회사를 최대한 인수하고 뉴욕 엔티콧에 인터내셔널 타임 레코딩 컴퍼니(International Time Recording Company : ITR)를 설립했으나 이 회사는 경영이 잘 안되어 부실한 회사로 꼽혔다. 1911년 플린트는 ITR을 포함한 여러 회사를 합병하여 컴퓨팅 태뷸레이팅 레코딩 컴퍼니(Computing-Tabulating-Recording Company : C-T-R)라는, 이름만으로는 어떤 회사인지 상상하기 어려운 이름으로 회사를 만들었다. 이 회사도 잘 되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왓슨을 만난 이유였다.
C-T-R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1,200명의 직원들이 분산되어 있었고, 총자본은 300만 달러인 데 비해 부채는 650만 달러였다. 하지만 왓슨은 지금 C-T-R이 고전하고 있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1914년 12월 7일 월요일, 새 총책임자인 왓슨은 C-T-R의 영업사원 30명 앞에서 자신은 천공카드 작성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어떻게 판매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누군가 조그맣게 킥킥댔다. 그는 직원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모든 상사들은 부하직원이 자신을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해야 하며, 부하직원은 상관을 단지 명령을 내리는 사람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왓슨의 이러한 태도는 직원들의 마음을 열게 했다.
1914년 가을, NCR측 변호사는 반독점 판결에 대한 항소를 신시내티 항소심 법원에 제기했고, 원심 판결이 파기되었다. 윌슨 정부는 재판 대신 피고인들에게 거래를 제시했다. 정부는 패터슨과 다른 피고인들이 서명하기만 하면 다시 항고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모든 피고인들이 서명했지만 왓슨은 서명하면 죄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자신은 어떠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했다. 정부는 왓슨 한 사람만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재판 비용을 치르지도, 위험을 감수하지도 않았다. 결국 왓슨은 인생 최악의 사건에서 자유로워졌다. 이제 왓슨이 할 일은 패터슨의 실수와 자신의 도덕적 정직함을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C-T-R을 위대하고 존경받는 회사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C-T-R은 당시 삐걱거리는 조그만 회사였다. 왓슨은 예언자이거나 바보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젖먹이 IBM을 기르다
컴퓨팅-테뷸레이팅-레코딩이라는 회사의 이름 때문에 왓슨은 골머리를 앓았다. 회사의 이름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는 이유 때문에 C-T-R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가? 그 이름은 왓슨이 원하는 소위 ‘영향력’이 없었다. 1917년 왓슨은 C-T-R을 재정비하고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세 개의 캐나다 회사를 하나로 통합시키고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머신즈(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왓슨은 이 이름을 좋아했다. 이 이름은 진로를 가로막지도 않았고 거대 조직다운 느낌이 있었다. 물론 그때까지는 급성장하는 작은 회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1920년대에 왓슨은 10년 전 그가 C-T-R에 처음 왔을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세상을 맞이했다. 순식간에 3분의 2의 가정에 전기가 들어왔고, 반 이상이 전화를 갖게 되었으며, 3분의 1이 라디오를 소유했다. 린드버그는 항공기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해 사람들에게 세계가 작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1920년대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활짝 개방되어 있었다. 왓슨은 자신이 가장 먼저 ‘데이터처리(data processing)라고 부른 분야에 점점 더 관심을 돌렸다. 또한 왓슨은 특허권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특허권은 경쟁자가 유사한 발명품을 내놓는 것을 저지해줄 수 있었다. 이는 21세기의 기술 산업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는 비법이었다.
왓슨은 언제나 거의 불가능한 목표를 좇느라 자신을 압박했고, 자기와 똑같이 하지 못하는 사람을 참아내지 못했다. 이런 태도는 IBM의 사무실이나 공장 금언에 반영되어 있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할 수 있다.” “절대로 만족하지 마라.” 왓슨은 자신은 관리자들에게 신랄한 비난을 퍼부어도 별 문제없다고 생각했으며, 대부분의 경우 그랬다. 아무도 감히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거나 거역하지 못했다. 그들은 IBM의 일부분이길 원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기계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모두 함께 뒤섞여 회사를 인생과 야망으로 삼는 멀쩡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괴상하지만 매력 있는 사교(邪敎)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왓슨의 부는 10년 동안 점점 늘어갔다. 예전의 가난했던 시골 소년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향유했다. 반면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낸 재닛은 가정 경제에 대해 더욱 보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IBM의 주식은 1927년 주당 54달러로 시작했고, 1929년 최고치일 때 주가는 4배 이상 뛰었다. 회사는 성장으로 활기를 띠었다. IBM은 엔디콧과 데이턴에 공장을 운영했고 캐나다, 독일, 프랑스, 영국에 생산지를 두었다. IBM은 저울, 육류 분쇄기, 시계, 직원 시간기록계, 쿠폰 인쇄기, 태뷸레이팅 머신, 분류기, 천공기, 천공카드를 판매했다. IBM은 당시 미국 산업에서 특별히 큰 존재는 아니었지만 다른 회사들이 당할 수 없는 에너지와 활력으로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도전과 행운
1930년대 초반 왓슨은 회사의 사활을 건 모험 수를 띄웠다. 1930년대 미국 경제는 하락했고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기업들은 공장문을 닫고 생산량을 줄였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면서 공급업체는 생산량을 줄이고 인력을 감축했다. 기업들은 천공카드 작성기, 타임 레코더, 저울 등을 새로 들여놓을 여유가 없었다. 사무기기 시장은 50%나 하락했고 이러한 하락세는 계속되었다. 왓슨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첫째, 공장을 계속해서 운영하고 감원을 실시하지 않는다. 둘째, 전 세계 대부분의 기업이 연구개발비를 대폭 삭감하고 있지만 IBM은 연구개발비를 늘린다. 이러한 결정은 회사를 망하게 할 수도 있는 위험한 결정이었다. 1932년 왓슨은 IBM 총 연매출액의 6%에 달하는 100만 달러를 투자해 당시만 해도 유례를 찾기 힘든 기업 연구소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왓슨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가치는 이를 공유하거나 인정한 사람들을 그의 주위에 만드는 요인이었다. 회사 전체가 이러한 문화적 유대감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과정에서 기업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한 왓슨의 역할은 이를 뒷받침하고 가꾸는 것이었다. 왓슨은 ‘100퍼센트 클럽’이라는 것을 만들어 그 해에 100% 실적을 올린 IBM의 사원만이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 클럽에 가입하면 승진이 보장되는 등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100% 클럽은 IBM인이라면 누구나 가입하길 희망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1935년 왓슨은 「싱크」라는 월간지를 창간해 IBM 사내와 고객이나 정치인들, 기타 왓슨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배포되었다. 1930년대 중반 THINK라는 문구는 미국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IBM과 왓슨의 동의어인 것처럼 인식되었다.
1934년, 왓슨에게 기적이 왔다. 뉴딜정책으로 정부에서는 정보 처리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더 많은 IBM 제품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1935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회보장법에 서명했다. 이 제도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모든 기업이 근로자의 노동 시간과 임금을 추적해 사회보장기금에 납부할 금액을 계산해야 했다. 그러면 연방정부는 수백만 건에 달하는 보고서를 하나하나 처리해 금액을 추적하고 수혜자들에게 수표를 발송해야 했다. 회계 기계에 대한 수요가 하루아침에 급증했고,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업은 IBM 하나뿐이었다. IBM은 데이터처리 산업을 완전히 장악했고 이는 역사상 어떤 기업도 따라올 수 없는 기록이었다.
적 그리고 착각
왓슨이 IBM 제국을 키워가는 동안 불행하게도 세계 정세는 점차 위태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유럽은 붕괴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았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대공황의 어두운 그림자가 걷히지 않고 있었고 모래폭풍이 중서부 지역을 강타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새로운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기술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36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고 영국의 처칠과 함께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대항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왓슨은 자신도 재계의 루스벨트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는 행동으로 옮겨졌다. IBM의 놀라운 성장을 배경으로 왓슨은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진출했다. 국제상공회의소(ICC)의 회장직을 맡게 된 것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럽고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ICC의 회장직을 맡는다는 건 많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히틀러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설득시켜야 한다면 그 누구보다 자신이 그 일에 적임자라고 왓슨은 생각했다. 그러나 ICC가 열린 베를린에서 왓슨은 독일 훈장을 받는 엄청난 정치적 실수를 했고, 이탈리아에서 독재자 무솔리니를 찬양하는 정치적인 실수를 또 한번 저지르게 된다.
이 문제 외에 왓슨 사후에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문제도 있다. ICC와 십자 훈장말고 ‘그와 IBM은 1930년대 말 나치 독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왓슨이 나치를 일부러 도운 것은 아니지만 히틀러 정권이 IBM 제품을 어떤 용도로 사용할지 짐작하면서도 이를 무시하고 독일 정권의 돈을 챙기기 급급했던 도덕 관념이 없는 자본가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독일 내 자회사인 데호마크의 인구 조사용 천공카드 작성기는 어찌나 제품이 우수했는지 IBM 본사에서도 인구 조사용 제품 생산을 중단하고 데호마크의 제품을 수입했다. 나치 정권은 데호마크의 기계를 이용하여 쉽게 유대인을 색출할 수 있었다.
1937년 왓슨은 나치가 데호마크의 IBM 제품을 어떤 용도로 이용하는지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왓슨의 어정쩡한 처지는 곧 나치에 동조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기업가로서 왓슨은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독일 내의 IBM 자산을 보호하고 궁극적으로는 독일 내 IBM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을 확보하려고 애썼다. 이유야 어찌 됐건 왓슨은 나치당 고위층이 귀를 기울이는 거의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왓슨이 독일에서 사업을 철수하고 나치 억압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분명하게 냈다면 어쩌면 역사의 흐름까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왓슨은 나치에 협력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 반대하지도 않았다. 왓슨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닮고 싶어했고 세계 무대에서 그와 같은 위치에 오르기 위해 노력했지만 왓슨에겐 루스벨트 대통령이 갖고 있던 한 가지 중요한 기질이 부족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용기였다.
왓슨 주니어
1914년 1월 8일, 오하이오 주 데이턴 시에서 재닛이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 토머스 존 왓슨 주니어로 지어졌다. 왓슨 주니어의 반란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10살 무렵, 왓슨 주니어는 근방에 이미 ‘악동 토미 왓슨’으로 알려졌다. 첫딸 제인은 왓슨의 총애를 받았다. 제인과 왓슨 사이는 왓슨 주니어에게 평생 동안 괴로움을 주었다.
왓슨 주니어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는 성적이 아주 나빠 그를 받아주는 고등학교를 찾아 이곳 저곳을 전전해야만 했다. 그는 몇 차례에 걸쳐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왓슨 주니어는 아버지가 자신이 IBM에 입사하는 것은 물론 왓슨의 뒤를 이어 회사의 최고 경영자가 되길 바란다는 것을 알고 몹시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아들인 왓슨 주니어로서는 자신이 분명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IBM을 망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포자기에 이르렀고, 그 상태에서 왓슨 주니어가 선택한 것은 반항이었다.
왓슨은 아들을 미국 명문 대학 중 하나인 브라운 대학에 집어넣었다. 졸업 후 왓슨 주니어가 IBM 뉴욕 영업소 판매사원으로 막 배치되었을 때 보이지 않은 손들이 엄청난 액수의 수익성 좋은 게좌를 왓슨 주니어의 영업 관할로 옮겼다. 별다른 노력 없이 왓슨 주니어는 IBM의 최고 판매왕에 올랐고, 4월경에 100퍼센트 클럽에 가입했다. 하지만 왓슨 주니어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고, 유럽에서 터진 전쟁이 그에게 돌파구를 만들어주었다. 왓슨 주니어는 아버지에게 미국방위군에 조종사로 입대하겠다고 말했다. 전쟁 동안 IBM은 많이 달라졌다. 방만하게 확장하면서 복합적인 기업으로 변모했고 회사 규모도 배나 커져서 왓슨에겐 효과적으로 운영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한편 전쟁 동안에 왓슨 주니어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새롭게 변모한 왓슨 주니어는 아주 적당한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왓슨은 다음 10년 동안 순간마다 아들과 권력다툼을 벌였다.
왓슨의 전쟁
1940년 7월 8일, 전국의 신문사들은 일제히 왓슨의 극적인 발표를 보도했다. 왓슨은 미국 정부가 IBM을 긴요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말했다. 왓슨은 군수 물자를 이용해 나치를 물리치는 것 외에도 대규모 군수품계약을 따냄으로써 IBM을 더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군대와 정부는 전쟁 중에 수천 대의 IBM 기계를 사용했다. 그 기게는 수만 명의 군인과 그들의 봉급, 보급품, 비행기, 선박, 총, 기타 상황을 파악하는 데 사용했다. IBM은 그 기계들을 모두 대여했다. 전쟁은 IBM이 기계를 반납 받아 정상 상태로 수리해 계산기로 환원시키는 데 일조를 했다. IBM은 그 기계들을 이용하여 저가 시장을 새로이 열 계획이었다. 또한 저가품을 유럽 회사에 판매할 수 있다. 그들은 폐허가 된 유럽 대륙의 경제를 다시 가동시켜야 하므로 싼 물건을 찾아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전쟁 중에 IBM은 거의 모든 신규 인력을 순식간에 충성스러운 사원으로 만들었다. 다른 회사에서 해고된 영업사원들을 고용해서 공장에 배치했고, 군복무중인 IBM 군인은 임금의 약 25%를 계속 지급할 것이며, 그들이 제대했을 대 IBM으로 환원시킬 것을 보장하겠다고 공표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왓슨의 계획은 미래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내기를 한 셈이었다. 그의 결정을 문제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왓슨의 최고경영진은 나약한 예스맨이었다. 1942년과 1943년 전투가 점차 확대되면서, 군수 물자 생산은 거의 모든 제조업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IBM은 공장의 핵심 부분을 전쟁물자 설비로 재정비했고, 공장 건립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의 확장은 왓슨으로 하여금 아직 경험이 없어 미숙해도 재능이 있는 젊은 사람을 찾아 IBM의 거대한 조각을 떼어 운영을 맡겨야 할 상황으로 만들었다. 이때 왓슨은 커크를 발견했고 그에게 IBM의 모든 군수 물자 생산 관리를 맡겼다. 그는 20밀리 소총 생산라인의 효율성을 높였고, 8개월만에 200만 달러의 비용을 절감시켰다. 커크의 패기와 유머 덕분에 직원들의 사기가 진작되었고, IBM 도처에 친구와 동지들이 많이 생겨났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처음 몇 달 동안, 미국은 예측했던 대로 경기 침체가 심화되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왓슨의 수호천사가 나타났다. 소비자들이 전쟁 동안 사라졌던 물건을 사기 시작하면서 미국 경제가 다시 활기를 띤 것이다. 수백만 명의 귀향군인들은 집이 필요했고, 수백만 채의 집이 지어졌다. 이 모든 제품을 생산하느라 갑자기 바빠진 기업들은 물건을 실어 나를 트럭이 필요했고, 사업의 진척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전자계산기나 전자 회계기가 필요했으며, IBM 대문에는 이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노인의 새로운 전자 시대
하버드 대학에 초고속 계산기에 대해 매우 파격적인 글을 써 온 에이켄(Howard Aiken)이라는 괴짜 연구원이 있었다. 그는 IBM의 계산기 부품으로 ‘어느 정도의 추가 작업과 배선작업’만 하면 실험용 초고속 계산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왓슨은 에이켄의 구상이 현실이 될 것이라 믿지 않았지만 하버드 대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그의 계획에 자금을 댔다. 1943년 초 에이켄과 IBM 기술자들이 마크 I을 개발하고, 기자들이 이를 보러 몰려들자 왓슨은 그제야 이 기계의 가치를 깨달았다. 그러나 IBM에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IBM은 복수 차원에서 전자제품 산업에 뛰어들었다.
IBM은 세계 최고의 슈퍼계산기 제조업체가 되어 에이켄을 납작하게 만들겠다는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그때 왓슨의 나이는 73세였다. 하지만 전자계산기 사업의 구체화가 시작됐음에도 왓슨은 여전히 전자제품을 천공카드기를 대체할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부가 사업 정도로만 여겼다. 왓슨은 IBM이 컴퓨터 사업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그의 결정은 보수적이었던 것이다. 이 일을 추진하는 와중에 뜻밖에 커크가 괴이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사실 커크가 회사에 있는 동안 왓슨 주니어는 그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곤 했는데, 이 때문에 IBM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왓슨 주니어는 애초 커크의 보좌관으로 일하기로 했으나 그는 공공연히 커크에게 도전하며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 했다. 왓슨 주니어는 커크를 위해서는 일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아버지에게 자신과 커크 중에 택일할 것을 요구했다. 왓슨은 꾀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멀리 여행을 하다 보면 둘이 함께 일할 방법을 찾을 것이라 기대했다. 왓슨 주니어와 커크는 각자 부인을 대동하고 1947년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그런데 6월 16일 커크가 43세의 나이에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왓슨은 동료이자 친구이고 가장 신뢰하던 임원을 잃었지만, 한편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하나가 풀린 것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IBM 내부의 충성경쟁은 왓슨 주니어에게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전자기기에서 전자계산기로 정보 기술이 바뀐 것은 IBM으로서는 시기적절한 변화였다. 신기술이 등장했을 때 왓슨은 전자공학 분야에서만큼은 아들에게 주도권을 주었다. 젊고, 성질 급하고, 과감한 왓슨 주니어는 아버지의 위임을 받자마자 전자공학 분야에 달려들어 IBM 내부에 전자공학 붐을 일으켰다. IBM이 전자제품으로 급속히 주력 업종을 바꿀수록 왓슨은 자신이 점점 밀려난다고 느꼈다. 그럴수록 왓슨은 그런 생각을 떨치려고 몸부림쳤다. 두 사람은 권력을 놓고 많이 다퉜고, 변화를 놓고 충돌했다. 그러나 왓슨 주니어가 권력을 쥐고 IBM을 전자공학 분야로 이끌고 나간 것은 IBM으로서는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매버릭 그리고 그의 인간성
IBM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성장해왔다. 1953년 4억 9,700만 달러라는 수입 기록은 불과 5년 전 수입의 3배 이상, 1941년 수입의 8배 이상이었다. 직원 수는 4만 6,170명으로 5년 만에 거의 2배로 늘어났다. 왓슨의 시대는 지났다. 하지만 왓슨은 퇴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에게는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IBM의 최상부에 계속 자리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왓슨은 점점 옛날 전쟁 영웅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아직도 집에서 제복을 입고 기상나팔에 맞추어 가족을 정렬시키려고 하는 사람 말이다. 왓슨과 왓슨 주니어는 서로의 관계에서 그리고 IBM에서 세력을 차지하려 계속 격심한 투쟁을 벌였다.
1953년 6월 26일, 왓슨은 유럽으로 향했다. IBM 국제 무역부의 사업차 2달 동안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그와 그의 수행원들은 1등급 기차를 타고 대륙을 질주했으며 최고급 시설에 머물며, 이동할 때면 항상 화려한 장식으로 외부를 꾸몄다. 유럽에서 돌아오고 나자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은퇴가 아니라 자신에게 새로 주어진 시간에 왓슨은 IBM 지부로 여행을 갈 수 있었고, 백악관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날 수도 있었고, 상류사회 연회의 주빈석에 앉아 있을 수도 있었다. 그저 아무 일 없이 돌아다녀도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뒤로 물러나 있으면서 왓슨 주니어가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왓슨 주니어가 경영상의 과오를 범한다 하더라도, IBM 문화에 내재된 자기 동기부여와 응집성이 일을 계속 진척시킬 수 있고, 왓슨의 아이들은 이미 다 자라 있었던 것이다. 왓슨 주니어도, IBM도.
하지만 노회한 왓슨이 약해지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위장 기관이 막히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궤양으로 상처가 나 있던 근육이 위에서 소장까지 이르는 그의 소화기관을 서서히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뼈만 남을 정도로 살이 빠져버렸다. 한 1년 전 왓슨의 주치의가 수술을 해서 초기에 치료를 하면 수명을 늘리 수 있다고 했지만, 왓슨은 거절했다. 그는 수술 같은 건 전혀 받아본 적이 없었고 당시 그것은 생각하는 것조차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왓슨은 죽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1956년 6월 19일 화요일, 왓슨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고, 그는 폐로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더니,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토머스 왓슨 경은 위대한 미국인의 삶을 살았다. 그는 가난에서 출발하여 위대한 회사를 설립했으며,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세상을 변화시켰다. 이런 일을 해낸 그에게도 여러 가지 큰 결점이 있었다. 그가 화내는 성미는 때로는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들들은 우울증과 알코올 남용 같은 악령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그는 더 허영에 물들어갔고, 말년 그의 찬사에 대한 욕망은 어처구니없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왓슨의 강인함은 실로 엄청났다. 그는 자신에 대해 결코 흔들림 없는 신념이 있었으며 이러한 특성으로 그는 엄청난 사업 리스크를 감수해낼 수 있었다. 왓슨은 허영에 차 있기는 했지만 회사를 위해 산 인물이었다. 그의 개인적 야심은 아주 조금도 IBM에 대한 그의 야심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사업에서 위대한 성공을 이끌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