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의 생각 없는 생각

   
료 (지은이)
ǻ
열림원
   
20000
2025�� 06��



■ 책 소개


“Being yourself, not being someone.”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작고 소박했던 런던의 한 카페에서, 다양한 인종과 연령의 사람들이 완벽한 하나의 합을 이루며 각자의 방식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에 커다란 울림을 받은 료는 이렇게 회상한다. “오랫동안 저는 타인을 관찰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나는 나 자신을 진심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나?’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그 순간 생각했어요. ‘어쩌면 내가 원했던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었을까? 평생 하리라 믿었던 일을 그렇게 내려놓고, 직업을 일순간에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저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렇게 “목표 대신 자유를 원했다”는 료.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아티스트로 태어났으며, 삶이라는 무대에서 모두가 배우로서 각자 자신만의 연기를 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는 료가 추구하는 삶의 핵심 가치이며, 그녀가 만들어 온 브랜드의 철학이다. 매일, 매 순간을 ‘진짜 나’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녀에게, 일과 삶, 일상과 예술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간을 만들고, 옷을 입고, 음식을 만들고, 타인과 함께 하는 모든 사소한 일상의 아름다움 속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것. 그것은 결국 ‘고유함에 대한 예찬’이다. 

■ 저자 료
런던베이글뮤지엄, 아티스트베이커리, 카페 하이웨스트, 카페 레이어드를 창업하였으며, 현재 브랜드 총괄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 차례
Prologue

1 나를 뒤흔든 런던
2 그저 시작할 수 있는 용기
3 진짜의 베이스는 외로움
4 매일의 아름다움
5 생각 없는 생각
6 준비된 즉흥성
7 내가 나로 산다는 것
8 모든 질문의 끝에 사랑이

Epilogue_interview

 

 

 




료의 생각 없는 생각


나를 뒤흔든 런던

지금의 카페 '하이웨스트'나 '레이어드'가 생기게 된 건 14년 전, 코번트가든 근처의 이곳을 우연히 들르게 된 것에서 시작된다.


지나는 길에 커피가 마시고 싶어, 정보 없이 들어섰던 10평 남짓의 이 자그마한 카페에서 필터 커피를 주문했다. 좁은 칸막이 테이블 사이로, 아무 생각 없이 커피 내리는 장면을 보고 있던 나는, 그라인더에 꽂은 종이 필터에 바로 갈린 원두가 수북이 차고, 달랑 두 번에 나눠 무심하게 '확' 붓다시피한 더운물 아래로, 서버 가득 커피가 차오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분명 그게 일차적 컬처 쇼크였는데, 그렇게 들이부은(?) 커피의 맛이 나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으로 마음에 드는 게 더 문제였다. '필터 커피'라면 주둥이가 얇을 대로 얇은-뭐 그런 곡선이 멋진 주전자로 빙글빙글 돌려 원두를 잔뜩 부풀리거나 물방울점 드립은 들어봤어도-이건 가히 충격적인 비주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각기 다른 인종과 다른 연령대로 보이는 바리스타 간의 부드러운 커뮤니케이션과 손님을 향한 스타일리쉬한 응대에, 홀딱 더 반하고 만 것이다. 그 이후 한 달가량 런던에 머무르면서 시간이 될 때마다 이곳에 왔고, 어떤 일로써 나에게 이렇게 큰 울림을 준 경험은 난생처음이라, 너무 당황하면서도 결국엔 신이 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랫동안 한 가지 직업으로 살았고, 앞으로도 크게 변할 것 같지 않던 나에게 '몬머스 커피'는 그랬다. 직업을 순식간에 바꾸고 싶을 만큼. 서울에 돌아와 '커피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결정하고, 쫄보의 마음으로 조금씩 다가가는 시간을 지나, 5년 뒤 나는 어느덧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오늘 몬머스에 오니까, 고스란히 그때 기억이 나고, '그때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하는 배부르고 재미없는 어른 같은 마음도 들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이곳이 너무 좋고,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 더 자주 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


늘 여행은 나에게 모든 걸 보여주고, 내가 그것들을 얼마만큼 알아채는가에 관한 게임 같다. 서울에서의 삶도 나름 급하게 가지 않으려고 마음도 다잡고, 작은 기쁨들을 놓치지 않으려 이리저리 애쓰는 편이지만, 막상 여행을 와서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그간 나는 '또 그렇게 옭아매는 매일을 보낸 거였구나-' 하는 자책 아닌 자책을 하게 된다.


여행지에서는, 답답하거나 불편한 일투성이에도 믿을 수 없게 불평 없는 내가 있다. 작은 주방과 석회로 가득한 물, 오래 걷는 일, 집 평수와 상관없는 라디에이터,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위생 개념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적응한다. 집에서는 눈썹을 최대한 이마 중간으로 올려 '과일이나 채소들을 베이킹소다에 담가놓는 것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의심 가득 날이 선 채로 지내면서도, 어느덧 과일을 사서 그냥 씻지도 않고 먹고, 줄이 길어도 짜증 내지 않으며, 뭘 하든 세상 일등으로 잘해야 한다는 강박도 전혀 없는 나의 행동은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여행 중에 가장 많이 했던 이야기는 행불행을 논하다, "결국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이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로 마무리되었다. 그게 모든 삶의 방식에 적용되면서, 옷을 입는 스타일부터 집 안의 인테리어, 감정의 표현 방식, 일을 좀 더 즐겁게 하기 위한 나의 자세, '맞고 틀리다'의 잣대들. 새롭고 안 해본 것들에 대한 편견까지도, 자유롭고 탄력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또 내 안에서 긍정적으로 변화되어 표현하게 될 것이다.


여행하는 동안 일을 쉬는 즐거움도 많았지만, 있는 내내 얼른 서울로 돌아가, 카페 레이어드와 하이웨스트에서 좀 더 자유롭고 좋은 에너지로 일하고 싶고, 위트 있고 그저 사랑이 많던 손님들도 많이 만나, 자유롭고 멋진 에너지로 서로에게 영향 주고, 또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새로운 걸 먼저 알아채는가'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매일매일 새로운가'를 알아채는 게임에 나는 더 관심을 갖는 편이다.



그저 시작할 수 있는 용기

눈 깜짝할 사이, 우수수수. 새롭고 빠른 세상이 보란 듯이 선보인다. 열심히 산다고 사는데, 나보다 당겨 사는 사람들은 지천에 널렸다는 걸 설마 아직도 모르는 건 아니냐고 비웃듯이, 나의 시간은 나답게 가도, 세상의 시간에 부합하기엔 턱없이 느리다. 쏟아지는 정보들은 다 알아보기도 전에 스무 배만큼 몸뚱이를 부풀려, 또 우수수수 소리를 내며,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줄지어 서 있다. 빠르게 쏟아지는 정보의 비를 피해, 작은 지붕 아래에서 나는 매번 숨을 고른다.


다방면의 전문가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름의 중심을 잡고 간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모양새가 같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매번 회초리를 맞는 것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는 아무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당황하고 섭섭한 마음에, 기댈 곳 없는 모퉁이에 자꾸만 선다. 자기로 태어나, 그저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도 어려운 세상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런저런 시절의 경계 없이, 마음의 요동은 늘 공존한다. 나는 그저 숨을 가다듬고, 진정한 나를 찾아 누구의 수행자가 아닌, 내 생각의 실행자로서 그저 다시 용기 내어 걷기로.


진짜의 베이스는 외로움

외롭다고 느낄 때는, 누군가의 사랑이나 이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찾아오는 어쩌면 무척이나 귀한 시간. 슬퍼하거나 쓸쓸해하기보다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나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있는지 나 스스로를 찬찬히 살펴주고, 세심하고 다정한 질문을 한 뒤, 그 대답을 잘 들어주고, 원하는 것을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시간을 만든다. 특히 매번 제일 뒷전으로 마지막까지 모르는 척하던 나에게, 잊지 않고 또 찾아준 순수한 마음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해주는 시간까지가 꼭 필요하고, 그래야 한 챕터가 끝이 난다.


자존심 같은 것도, 밀고 당기기도 없이 그저 꾸욱 참다가, 꽤나 힘들 때 순수하게 찾아온다는 생각이 드니까. '나'라는 녀석은 참 모자랄 만큼 착하고, 귀여우며, 짠할 만큼 어른스러운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세상 말고, 무던하고 착한 자식 더 많이 챙겨주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애늙은이 같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좀처럼 변하지 않고 있다.



매일의 아름다움

날씨는, 봄은 그랬다. 카페 레이어드에 있던 커다랗게 벌어진 봉오리의 분홍빛 튤립도, 거리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벚꽃 나무들도, 너나할 것 없이 카메라를 꺼내 드는 사람들이 모두 일행 같던 주말.


'이제부터 차가운 것은 먹지 않겠다.'던 어차피 깨질 약속도 올해의 첫 '아아'로 일찌감치 끝나버렸다. 얇은 블라우스 하나 입고도 얼굴이 발갛게 익었고, 거리를 지나다 보이던 늘 같던 그래피티들도 봄 같던 컬러들만 눈에 들어온다. 레이어드에서 제일 상큼한 레몬케이크를 포장했고, 참기름과 식초가 많이 많이 들어간 차가운 도토리묵이 먹고 싶어진다는 건 나에게 진짜 봄이 왔다는 증거.



매일이 매번 색다르듯, 매일매일 펼쳐지는 현상들도 다채로워, 쉬운 일 하나 없이 서툴고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해. 그래도 그런 마음들은 아름다운 엔딩으로 가는 길을 찾아 헤매는 시간들임을 잊지 말아요. 매일매일이 엔딩을 위해 소모되는 시간이 아니라, 찾아가는 그 시간들만으로도 소중해, 그것이 모이고 쌓이는 것이 결국 아름다운 엔딩일지도 모르니까요.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선명한 길을 찾아가는 매일의 날들임을, 찾아가는 그 길들이 모이고 모이는 것이 더없이 아름다운 엔딩이라는 걸 깨닫는 그 순간까지. 소란스럽지 않게, 나다운 방식과 속도로.


***

가끔은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질 때, 핑계 삼아 다 같이 멈춰진 듯한 시간들을 보내게 되는 일이 싫지만은 않을 때가 있는데, 내게는 '장마'가 그렇다. 꿉꿉하고 축축한 건 영 별로이긴 하지만, 약속이나 한 듯 다 같이 느림보가 될 때, 최고의 느림보 주인공이 내가 되어도 왠지 뻔뻔하게 합당한 듯한 기분이 좋고 그렇다. 이럴 때면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까치발로 걷거나, 투명하고 기포가 예쁜 잔을 모두 꺼내어, 먹지도 않을 물을 죄다 담고 그저 바라보거나, 드뷔시, 마이클 프랭스를 듣거나, 반바지에 따끔거리는 겨울 스웨터를 입고 출근해 에어컨 아래 앉아 일하거나, 모기에 두 다리를 내어주고서 괜시리 골목에 서서 동네 친구와 옛적에 끝났어야 하는 대화를 나누던, 나에겐 정말 귀한 시간.


***

인형, 동물, 옷, 음악, 공간, 가구, 그리고 그저 모든 빵을 좋아하는 나는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겠지. 대단한 명분이나 엄청난 성공 같은 것 없어도 터벅터벅.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귀여움, 낭만, 멋짐을 매일 만들어내고, 내가 좋아하는 아주 단순한 생활들을 매일 이어가면서, 그 습관과 일상이 모여 어떤 그림이 되는 어느 날, 낯선 길가에 그 그림을 수줍게 내놓을 때,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오가며 '이것은 귀엽고, 이것은 슬프고 예쁘구나. 넌 이런 걸 표현하고 싶었구나.'라고 판단 같은 것 없이 타인의 물리적 시간만으로도 그 작품을 귀하게 여겨주고 따뜻하게 이야기해주는 다정한 장면을 나는 상상한다.


나를 가리켜 뭐 대단하고 매콤한 경제 원리 같은 것 없는, 그냥 슴슴한 세상을 매일 꿈꾸는 이상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생각 없는 생각

생각을 매일 다잡지 않으면, 정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것에 어느새 끌려가기 쉬운 세상에 살고 있다. 이것이 너의 생각인지 나의 생각인지, 그리고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것과 해 두어야 좋을 것 같은 일이 혼동될 만큼.


설령 돌고 돌아 처음 생각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해도, 고민 끝에 처음과 같은 생각에 다다른 경우와, 고민해도 어차피 같은 결론일 거라 깊이 고민할 시도조차 안 하는 경우는 분명 다른 삶이 펼쳐진다고 나는 믿는다.


날씨가 무척 흐리고 어색하지만, 싫지 않은 집 안의 무드와 떠다니는 생각이 함께인 오후.


***

생각보다 순했던 3월, 떼쓰는 것처럼 날씨는 바람이 불고 방향성 있는 눈이 왔으며, 햇빛이었다 구름이 되었다 바람이 된다. 갑자기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Save me from myself가 연거푸 듣고 싶어진다는 건 아무래도 날씨 때문인 것 같다고 생각했으며, 대략 3천 개쯤 꽃이 달려 있던 목련 나무 앞으로 자꾸만 사선 방향의 눈송이가 날려 한꺼번에 두 계절을 받아들이기가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요일, 폼이 가득한 소이라떼는 먼저 부피감 있는 폼을 먹어치워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으로 커피 타임은 생각보다 멋없고 스피디하게 끝나, 한꺼번에 먹어치우지 못할 만큼의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다시 만든다. 뭐, 생각으로는 '호호' 불어가며 '찬찬히 시간을 보내야지' 하고서는, 예상 없이 스치는 것들을 뒤적이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시간을 흘려보낸 죄로 지저분한 크레마가 부실하게 떠 있는 그나마나 잔이 되었다. 무언가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에서 '되지 않아도 의미가 있다.'를 이해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에 대해 내내 생각해 보는 중. 아직은 머리보다 마음으로 이해하는 진짜의 답을 찾지는 못했으며, 누군가는 '시간을 잃는 것이 가장 시간을 멋지게 찾는 법.'이라고 말했다.


***

독학력을 키우면 아무리 바빠도 모든 것이 흥미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능력을 좀 더 상승시키고 싶어진다. 그러나 능력을 향상시키려면, 클래식한 방법 외에는 잘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나에게 적합한 것은 역시나 양으로 뻔하게 밀어붙이기.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쓰고, 많이 찍고, 그리고 많이 먹고, 많이 말하고, 많이 관찰하고, 많이 성찰하고, 많이 통찰하는 것. 눈앞의 세상 모든 것들을 빠짐없이 내 안에 투과시켜 마음에 빼곡히 담고, 하나도 시시하지 않던 매일의 순간들을 소매치기가 얼씬도 못하도록 수시로 꺼내 다시 확인하는 일.


독학은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지만, 어원은 '스스로를 교육한다.'에서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두 명의 '나'를 서로 마주 보게 세워놓고, '나'라는 학생 하나, 그리고 '또 다른 나'는 진짜 스스로의 근사한 선생님이라고 상상해 보면 어떨까. 성실히 학습하고 복습하는 나와, 그 진지하고 귀여운 학생을 잘 가르치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경험도 열심히, 좋은 교육자료 준비도 열심히 하는, 따뜻하고 섬세한 선생님이 동시에 되려고 해 보니, 평상시에 준비할 것도 너무 많고 책임감도 상당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지만, 나 혼자 괜히 흥미진진.



내가 나로 산다는 것

자신의 신념을 지켜,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는 길에는 어떤 방법이 있나요?'라고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그러나 방법을 따로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들일 뿐이다. 사실 그건 이유랄 것도 없는 너무나 간단한 이유인데, 누군가의 덕을 봤다거나, 누군가를 탓할 수 있는 여지를 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일이 잘되어 '덕분에'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때, 그 덕의 끝엔 자기 신뢰에 대한 불안이 존재하고 있다. 뜻대로 되지 않던 반대의 상황에는, 누군가를 탓해 원망해야만 마치 내가 살아나는 비겁한 내가 있다는 것 또한 알기에, 그저 혼자 묻고, 혼자 주저앉고, 혼자 일어서기를 내내 반복하는, 방법 아닌 방법. 복잡한 걸 쉽게 하는 그 누군가가 정해준 시스템을 따르기보다는, 그저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무엇을 바라거나 탓하지 않는, 내 몸과 머리를 써서 정갈하고 명쾌하게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고 싶다. 누가 만들어놓은 지름길은 그 자신이 돌고 돌아 만들어낸 그 사람의 길이니까. 누구보다 나 자신을 원한다면서 누군가의 길로 가는 건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인 걸 알고는 있어, 나는 나대로 또 돌고 돌아 나만의 지름길을 만드는 시간. 누가 아닌 가장 선명한 나로 하루하루 가까워져가는 길, 그게 전부인 아주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매일들.


***

신중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때그때 온전한 나였던 선택들이 모여만 간다. 하나하나 거창하고 사소한 내가 투영된 그때의 사물들을 차분히 바라본다. 매일매일 누구보다 진짜의 나를 궁금해하고, 다정하게 때로는 냉정하게 질문을 던지고, 일이든, 말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사물이든, 무엇으로든 대답하는 시간이 빼곡히 모여, 다른 누가 되지 않고 내가 되어가는 시간.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만지고, 먹으며, 담아두고, 기억해내고, 귀찮아하지 않고 각기 다른 내 안의 도구들로 꺼내어 다시 보고 담아 두는 일의 무한반복을 통해, 스스로에게 조금 더 가까워지는 길. 진짜 나로 살 수 있는 용기에 힘을 실어주는, 사소하지만 늘 발견되는 소중했던 길. 인구 충격, 부동산 대변혁


대한민국에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만들어지다
대한민국 부동산이 불패일 수밖에 없는 이유
망쇠를 극복하고 흥성하게 된 대한민국의 저력

대한민국은 특별한 국가다. 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견디고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겨우 해방을 맞이했지만 곧 한국전쟁과 냉전시대라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단기간에 겪게 되었다. 1950년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에 종전이 아닌 휴전이란 불안한 상태로 반쪽짜리 국가가 되어버렸는데 그간의 발전은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할 정도로 눈부시다.


1960년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불과 158달러로 가나나 콩고민주공화국보다도 낮았는데, 2022년에는 3만 2,142달러로 동 기간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20,343%라는 놀라운 상승률을 보였다. 또한 국가경쟁력 28위(2023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 전 세계에 미치는 문화 영향력부문 6위(2021년, Good Country Index 기준)를 했고 경제, 문화,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놀라운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해방과 휴전 후 냉전의 접경 속에서 높은 군사비 부담과 긴장감으로 그야말로 험난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백 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망쇠를 극복하고 흥성하게 된 대한민국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이는 부동산 시장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빠른 산업화로 인한 이촌향도와 지가 상승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국가 주도의 빠른 발전과 도시 건설이 가능했을 것이다. '새마을 운동'으로 대표되는 박정희 정부에서의 철저한 계획 경제는 소득 증대, 경제 발전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 동안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8.5%라는 놀라운 결과로 이어졌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서울 강남지역 개발계획 등 국토개발 계획이 본격화되면서 논밭이었던 영등포의 동쪽 영동 개발은 강남땅을 금싸라기 땅으로 만들었다. 며칠 밤새 뚝딱 지어지는 주택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밀려드는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지어지는 대로 팔리며 지가 상승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대도시로의 진입이 곧 성공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서울 드림을 꿈꾸는 이촌향도 현상이 확산되었다.


부동산 경기 활성화와 대규모 주택 공급 정책

한 토지를 저렴하게 일괄적으로 수용해 택지화할 수 있었고, 노원구 상계동, 중계동 및 양천구 목동 지구 등에 대규모 아파트를 공급하게 되었다.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는 과열된 주택 가격 상승을 잠재우기 위해 '200만 호 주택 공급(수도권 90만 호, 지방 110만 호)'을 목표로 정했고, 실제 1991년 말에 214만 호를 착공하게 된다. 분당, 일산, 평촌 등 1기 신도시도 이 법을 근거로 탄생할 수 있었다. 수요가 넘쳐나는 곳에 큰 장애물 없이 신속하게 주택을 공급했기 때문에 지가는 계속 상승했다. 국가의 정책과 공급자인 건설사, 수요자인 국민들의 공통된 목표는 기막힌 타이밍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1985년부터 시작된 '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의 3저 현상으로 인한 풍부한 유동성과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특수 등으로 인한 서울의 발전은 서울 주택 가격 상승을 더욱 가속화했다.


대한민국은 아파트 공화국
인구 급증으로 인한 주택 부족 현상을 손쉽게 해결하는 수단은 아파트

사실 아파트 공화국이란 말은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 교수가 우리나라 주택 정책을 연구하면서 집필한 박사 논문을 한 출판사에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지어진 제목이라고 한다. 외국인의 눈으로 봤을 때도 아파트 중심의 주거 문화가 꽤나 신기했던 모양이다.


이 논문에서 줄레조는 "한국에서 아파트는 권위주의적 정부 정책과 재벌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대표적인 주거 형태가 되었다. 한국 정부가 주택 수요를 실질적으로 책임지지 않고 재벌급 건설업체에 맡겨 대량 생산하는 방식으로 주택 정책을 펴나갔다" 며 날카롭게 한국 주거 정책을 평가한다. 공급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수요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주거 안정을 책임져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 갑자기 늘어나는 인구를 빠르게 수용할 만한 주택 유형은 아파트가 유일했을 것이다.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정책적인 기반과 택지만 마련되면 공사는 기업이 책임지고 단기간에 집을 대량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건설사는 신규 아파트를 신상품이라고 불렀다.


국가는 택지와 토목 인프라를 책임지고, 건설사는 아직 미완성인 아파트를 모델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가장 아름답게 포장하고 홍보해 구매를 결정하게 만들었다. 또한 주택 구입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 대출 제도를 활용해 서민들이 계약금만 있으면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국가의 부담을 덜어주고 국가와 기업의 경제를 동시에 성장시킬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아파트 건설이었고 이로 인해 수혜를 입는 개인도 이 정책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구가 더 이상 늘지 않는다면, 아니 유지조차 되지 않고 줄게 된다면 그때도 아파트가 대한민국의 주거 문화를 주도할 수 있을까? 개인보다 집단을 더 중시했던 한국인들의 문화가 MZ세대 이후 점차 개인화되고 결혼과 출산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고 있는 새로운 환경에서도 4인 가정에게 맞춰져 있는 국민주택 규모의 아파트가 최고의 주택 유형이라는 평가는 유효할 수 있을까?


더 늦기 전에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예측해야 하며 새로운 대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당장 눈앞의 현안에만 함몰되어 공급만 외치다가 유령도시, 폐허도시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도시 구조 및 인구 구조의 대전환 시대
지금 대한민국 대도시는 어떤 상황인가?
국토의 16.6%밖에 안 되는 대도시에 70%가 넘는 인구가 거주한다

대한민국은 100,449km2(2023년 기준)의 면적에 약 5,175만 명의 인구(통계청, 장래인구추계)가 살 고 있다. 이 중 수도권 면적은 전체 국토의 11.8%인 11,872km2에 불과한데 인구의 절반이 넘는 (50.8%) 약 2천 600만 명이 모여 산다. 한편 5대 광역시와 세종특별자치시를 합한 면적은 국토의 4.8% 수준이고, 인구의 19.5%인 약 1천만 명이 살고 있다. 이를 합하면 수도권과 광역시 등 대도시는 전체 국토의 16.6% 정도에 불과한데 여기에 70%가 넘는 대다수의 인구가 살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80%가 넘는 국토인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은 전체 국민의 30%도 채 되지 않는다.


2030세대로 연령대를 좁혀보면 도시 집중 현상은 더욱 극명해진다. 전국의 20세부터 39세까지의 인구는 약 1,26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30% 정도를 차지한다. 이 중 수도권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700만 명으로 전체의 56% 정도이고, 광역시와 세종특별자치시를 포함하면 950만 명 정도로 전체의 75%가 대도시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구의 도시 집중 현상은 대한민국에 국한된 일은 아니다. 2022년 유엔무역개발협의회(UNCTAD)의 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약 56.9%가 도시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에는 79.7%가 도시에 거주하고, 개발도상국은 52.3%만 거주하는 등 국가별 격차가 컸지만, 지난 10년간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등의 개발도상국은 빠르게 도시화되고 있고, 최근에는 아프리카의 도시화도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산업 발전과 경제 성장은 자연스럽게 인구의 도심 집중 현상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대한민국은 유례없는 빠른 경제 발전으로 초스피드 도시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준비 없이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동시에 지역 양극화, 지방 소멸 같은 낯선 단어는 어느덧 불확실한 가설이 아닌 확정된 리스크로 삼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금이 바로 인구 감소, 지방 소멸, 출산율 제로 등 인류의 존재 자체를 흔들 수 있는 두려운 리스크가 현실화되어 이슈가 되지 않도록 현상을 적시하고 올바른 인구와 관련된 정책과 지역별 도시 계획의 방향성을 현명하게 바로잡아야 할 골든타임이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심각한 양극화
지역 양극화는 왜, 얼마나 진행되었나?
부동산의 지역별 양극화, 도대체 얼마나 심각할까?

주택은 매입 가격 자체가 매우 높기 때문에 개인이 보유한 대부분의 현금 자산과 대출을 활용해서 매입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의 자산은 주택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또한 주택은 자산의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거주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출퇴근을 하는 시간에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쇼핑몰이나 병원을 이용하거나 운동을 하는 것에 소요되는 시간도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주택 매입은 개인의 자산을 대부분 투입하는 동시에 삶의 만족도까지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선택이다.


서울 내에서도 주택 가격의 지역별 편차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서울과 비서울, 심지어 같은 지역 내에서도 대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간의 격차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지역별 주택 수급이 균형을 이루면 이러한 지역별 양극화 현상은 완화될 수 있다. 공급 과잉이 되더라도 경제 상황이 나아지면 실수요자들이 소화를 해줄 것이고 공급 부족 시기에도 전국 주택보급률 평균이 102. 1%이기 때문에 구축 주택을 매입하거나 임차를 하면서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인구 감소와 수도권 집중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대비한 공간 재배치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다. 인구 과잉 지역과 소멸 위기 지역에 대한 수요 예측과 그에 맞는 공급 대책이 필요했으나, 오랜 기간 이런 부분이 간과되어 왔다.


결과적으로 인구 소멸 지역에는 주택이 과잉 공급되어 미분양이 장기화되고 있고, 수요가 집중된 서울은 재개발·재건축 등의 유일한 공급 방식이 사실상 멈춘 지 십여 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주택시장 수요자 유형은 너무나 다양해졌고, 그들의 요구사항도 복잡해진 상황이다.


부동산 양극화의 원인과 전망

전국적으로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었으나, 서울의 주택보급률은 93.7%(2022년 기준)로 전국에서 가장 낮다. 또한 자가 주택 보유율도 56.2%로 전국 평균에 못 미치며, 주택 매입 의지가 있는 수요자는 약 74%에 달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선호하는 아파트의 비중은 전국 평균보다 낮은 59. 5%에 불과하고, 실제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는 비율은 46.6%로 절반도 되지 않는다. 즉 아파트를 매입하려는 신규 수요와 비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전환하고자 하는 수요가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이다.


한편 15년 이상 된 노후 아파트의 비율이 서울 전체의 68.2%나 되니 신축 또는 5년 이내 준신축 아파트의 인기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은 서울에 거주하며 실거주를 목적으로 매입을 원하는 수요와 직결된다. 또한 현재는 서울에 거주하지 않지만 교통 편리성이나 생활 인프라의 이점 때문에 경기도나 인천 등 인접 지역에서 서울로 이전을 꿈꾸는 수요도 존재한다. 이것은 서울에서 실거주를 목적으로 주택을 매입하려는 다양한 수요층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주택 매입 수요자들은 과거와는 다르게 가능한 자산 규모 내에서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후보지 중 최선의 주택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에 지방의 투자 목적 수요가 더해진다. 단순히 단기 차익을 노리는 투기성 수요도 있지만, 실거주 겸 투자 목적의 수요도 적지 않다. 지방의 자산가 들의 자녀들이 학업을 위해 수도권에 거주하거나, 향후 수도권으로 이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장 계획이 없더라도, 미래를 대비해서 매입해두려는 경우도 많다. 서울 아파트가 일종의 안전 자산이라는 인식이 강해진 것이다.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주택 가격이 빠르게 상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지방에 거주하는 부모들은 "나는 아니지만 내 자식은 서울에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본인은 지방에서 살아왔지만, 자녀가 나중에 서울에 정착하려고 할 때 주택 가격이 너무 상승해서 주거가 불안정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러한 노파심이 지방 거주자들도 서울 주택을 매입하려는 수요로 이어지고 있다.


산업 구조의 변화도 서울 주택 수요 증가의 또 다른 요인이 되고 있다. 조선업과 자동차 산업 등 탄탄한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지방 광역시들은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중이다. 하지만 제조업 활성화를 통한 인구 증가 방안이나 대체 산업 개발 계획은 전무하다.


지역 경제의 기반이 되어왔던 주요 산업들이 침체되면서, 대기업에 하청을 받아 운영해온 1차 2차 벤더사 중 자녀에게 사업을 승계하려고 하는 경우는 극히 소수이다. 과거에는 열심히 일하면 지역 내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보장이 없을뿐더러 경쟁이 매우 치열하기 때문이다.


외국 유학과 글로벌 경험을 쌓은 자녀들도 부모처럼 고생할 것이 뻔하다며, 가업을 물려받기를 꺼린다. 이에 따라 지방의 건실한 중소기업들은 가업 승계를 대신해 서울의 번듯한 건물이나 아파트를 매입해 부동산 임대업으로 전환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이었던 지방의 많은 중견 기업들은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부동산 임대업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지방에서 서울로 인구가 이동하기도 전에 자산의 이동이 먼저 이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역 양극화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성장에 따른 필연적 사회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좁은 국토 안에서 서울만 비대해지는 것은 다양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서울의 주거비가 급등하고, 지방은 자산가치가 하락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계층 간 양극화가 가속화되어 박탈감, 소외감, 위화감 등이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


지역 양극화는 중산층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청년 세대에게는 노동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게 만든다. 땅을 소유한 자와 땀을 흘리는 자로 계층이 양극화되는 사회는 건강한 미래가 보장될 수 없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벌어질수록 사회의 건강성은 약해진다는 말이 있다. 인구 구조 변화를 고려한 전국적인 공간 재배치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구 감소가 지방 부동산에 미치는 영향
고령자 양극화가 부동산시장에 미치는 영향
과거에 생각했던 노인과는 다른, 노인 같지 않은 신노년 세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노인'이라는 말은 단순히 나이 많은 사람이란 중립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경륜과 지혜를 가진 존경할 만한 사람' 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노인'은 나이가 많아서 허약하고 능력 없고 고집 세고 사회적으로 부담이 되는 존재라는 다소 부정적인 단어로 인식되는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는 '노인'이라는 말이 다시 긍정적인 의미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요즘 노인들은 노인 같지 않아"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카페에 가면 고상하게 차려 입고 생기발랄하게 수다를 떠는 노인들을 종종 볼 수 있고, 헬스장에는 청년 못지않은 정정하고 탄탄한 몸을 가진 노인들이 눈에 띈다. 65세가 넘었다고 해서 모든 노인들이 신체나 정신적으로 나이가 드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건강상태나 자기관리, 마인드에 따라서 신체와 정신, 경제력, 사회적 활동 범위와 영향력은 천차만별이다.


2023년은 그 유명한 58년 개띠가 65세(만 나이 기준)가 된 해다. 대한민국 인구와 경제가 쑥쑥 성 장만 하던 시기에 태어났던 58년 개띠는 1차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를 대표하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2023년에 0.72명인 합계출산율이 당시에는 6명이 넘어서 1958년에 태어난 인구는 99만 3,628명이다. 이들이 상급 학교에 진학할 때 고교 평준화, 일명 뺑뺑이가 되어서 대학 진학률이 높아졌고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는 '3저 호황' 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호경기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다.


한국 경제의 성장기에 한창 일할 나이로 그 시대를 주도했던 58년 개띠의 세대가 바뀔 때마다 자산과 소비 시장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이런 그들이 노인이 되었고, 2025년 이후에는 1960년대생이 차례대로 노인 세대에 진입하게 된다. 과거에 생각했던 노인과는 다른, 노인 같지 않은 신노년 세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교육수준이 높고 다양한 사회 활동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들이다. 어느 세대보다도 자산 축적의 기회가 많았던 축복받은 세대가 이제 65세 이상의 노인이 되고 있다.



인구 이동이 서울 부동산에 미치는 영향
학군지·일자리 유목민 vs. 여가생활·힐링 유목민
학군 유목민과 일자리 유목민

좋은 도시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가치를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만 도시에 부여되는 정의를 잘 이행하고 있는 도시가 좋은 도시라고 한다면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도시란 '일정한 지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따라서 인구수나 경제 성장, 소득 수준, 생활 인프라 등의 지표를 통해서 도시의 수준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지방 소멸 위기 지역의 주된 원인은 저출생 문제가 아니라 인구 이동이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은 합계출산율이 0.55(2023년 기준)로 전국에서 가장 낮고, 반대로 지역 소멸 위험도가 가장 높은 전남은 0.97(2023년 기준)로 가장 높다. 서울은 부부 100쌍(200명)의 자녀 수가 불과 55명이고 세대를 건너면서 인구수가 4분의 1로 줄어들게 된다. 출산율만 놓고 보면 전쟁 중이었던 우크라이나(합계 출산율 0.7)보다도 격렬한 격전지나 다름없는 수치지만 서울의 소멸 위험도는 전국에서 세종시 다음으로 낮은 수준이다. 결국에는 소멸 위험이 낮은 지역,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한 도시가 되려면 아이를 낳기만 하는 지역이 아니라 기르고 싶은 지역이 되어야 한다.


기후가 열악한 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은 삶의 가장 큰 목적이 가축을 잘 키우고 가족들이 배불리 먹고 잘 사는 것이기 때문에 기후 조건이 좋은 지역으로 터전을 옮겨 다닌다. 전쟁 후 한 세대만에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는 시기를 벗어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이제 각자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분야의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으로 터전을 옮겨 다닌다.


이제 도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아이를 어디서 출산하는지 보다 어디서 양육하는지를 고려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아이가 경제 활동을 할 만큼 장성했을 때 어느 지역에 터전을 잡는지를 고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결국에는 경제 활동을 시작하는 지역에서 소득과 소비가 일어나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도시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부동산시장의 새로운 흐름

자산 형성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다름 아닌 ‘국가’다

"한 사람이 자산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일까요?" 부동산 강연의 마지막에 자주 제시하는 질문이다. 질문에 대한 답으로 흔히 교육, 소득, 재테크, 결혼, 습관, 운 등이 나온다. 모두 그럴듯한 답변이지만, 필자가 정답으로 제시하는 것은 국가다.


내가 만일 South Korea가 아니라 North Korea에 태어났다고 상상해보라. 지금처럼 자유를 누리면서 고등 교육을 받고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는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국가는 개인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다. 국가는 단순한 생활의 터전 이상으로, 정치, 경제, 법률, 정책, 사회적 안전망 등을 제공하는 경제 동맹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국가에서 태어났는지, 어떤 경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지는 개인의 경제적 기회와 자산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경제가 안정적이고 사회적 이동성이 높은 국가에서는 자산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지만, 경제 불안정성이 높은 국가에서는 자산 형성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국적은 같지만 세대마다 마치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것처럼 정치·경제·사회적 배경이 다르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한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고, 경제는 거의 붕괴 상태였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경제 개발이 시작되었고, 이를 통해 급속한 경제 성장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산업과 문화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명실상부 선진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1950년대에는 다른 나라의 원조를 받던 최빈국에서 불과 50여 년 만에 다른 나라를 도울 수 있는 선진국의 위치가 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자랑스러운 성과지만, 그 과정에서 조부모 세대는 후진국에서, 부모세대는 개발도상국에서, 자녀 세대는 선진국에서 자란 것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각 세대는 단순한 문화적 차이를 넘어, 자산 형성 방식, 경제적 가치관, 그리고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부모 세대는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해 부동산이 자산 증식의 주요한 수단이 되는 시기를 경험했다. 부동산 투자에 일찍 눈을 뜬 사람들은 주택 구매와 투자가 재산을 불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열광적으로 부동산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다. 현재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는 첨단 기술과 자본주의가 깊이 뿌리내린 사회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공유 경제와 개인의 취향을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자라났으며,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성향과 자율성을 더 중시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처럼 부동산 투자에 큰 열의를 보일 가능성이 낮다.


현재의 젊은 세대가 주도하게 될 새로운 주택 수요

앞으로 대한민국의 주인이 될 젊은 세대는 철저한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가치를 내면화한 세대다. 그들은 부모 세대와 달리 부동산을 단순한 투자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취향에 맞는 공간,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주택을 선택하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길 원한다. 1인 가구와 맞벌이 가구의 증가, 그리고 비혼 문화의 확산 등은 이들의 주거 형태와 선호 유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는 기존의 부동산시장을 재편하게 될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부동산시장은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유지될 수 없다. 젊은 세대가 주도하는 새로운 주택 수요는 개인의 취향, 삶의 질, 경제적 자율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는 부모 세대가 경험한 부동산 투자 열풍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앞으로 부동산이 단순한 투자 대상이 아니라 삶의 가치와 경험을 중시하는 공간으로 변화하게 될 것임을 말해준다.


이러한 부동산시장의 새로운 변화는 부동산 개발자와 정책 입안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미래의 부동산은 단순히 자산 증식의 수단이 아닌, 개인의 삶과 경험을 반영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되고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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