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선, 면 다음은 마음

   
이현호
ǻ
도마뱀출판사
   
14000
2023�� 01��



■ 책 소개


이 책에는 “사물에 깃든 당신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한 편의 글마다 하나의 사물을 이야기하며, 그 사물에 얽힌 사연과 생각을 풀어놓는다. 사물에 남겨진 흔적에서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을 향한 그리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저자가 이야깃거리로 삼은 사물들은 여느 집에나 있는 흔하디흔한 것이어서 누구나 쉽게 그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다.

점과 점이 모이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이 모이면 면이 된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모든 사물과 사람은 하나의 점처럼 외따로 존재하지만, 끝내 혼자는 아니다. 인연과 기억과 그리움이라는 선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선이 모여 만드는 면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저자는 이러한 점, 선, 면이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지는 입체가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 저자 이현호
시인.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비물질』과 산문집 『방밖에 없는 사람, 방 밖에 없는 사람』, 『점, 선, 면 다음은 마음』을 펴냈다.

■ 차례
들어가며

1부 혼자 먼저 건네는 인사같이
사물 편지
기다림의 무게
마음과 태그
낡고 해어지기를
반가운 죽음
원래 그래
시절인연
너의 이름은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
보고 싶은 귀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말의 힘

2부 그리워할 사람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만나서
고독의 밝기
안녕, 도깨비
가장 순한 네발짐승
겨울 아침
착한 사람
잘 있거라, 길고 길었던 밤들아
내가 사랑한 바보상자
그릇과 그릇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리움
점, 선, 면 다음은 마음

3부 희미해지는 것은 깊어지는 일
당신이 바꾸어놓은 세계
오해 없이
희미해진다는 것
하나의 문으로 열리는 천 개의 방
따듯해서 시원한
사랑을 쓰기 좋은 곳
당신이 바꾸어놓은 세계
더는 욕이 아닌
끝과 시작
충전이 필요해
사물 편지

4부 아무것도 아닌 자의 모든 것
가만가만히 섬기는
인연의 끈
가장 차가운 울음
사물의 편에서
당신이 바꾸어놓은 세계
모쪼록 쓸모없기를
영원히 새로 쓰이는 책
사물을 보는 56,728가지 방법
낮은 데로 임하소서
사물 되기
들고 다니는 작은 집
사물 편지

나가며

 

 

 




점, 선, 면 다음은 마음


혼자 먼저 건네는 인사같이

원래 그래

도마

“배송이 완료되었습니다. 상품을 문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분실 우려가 있으니 바로 확인 부탁드립니다.” 문자메시지가 왔다. 빼꼼 현관문을 연다. 큰 종이봉투 하나가 문 옆에 놓여 있다. 두 손으로 끌어안아 올리는데, 무게가 제법이다. 별로 든 것도 없는데, 괜히 무겁기만 한 것이 꼭 내 생활 같다. 나는 행여 밑이 터질세라 아기를 안듯이 조심스레 그것을 받쳐 든다. 그러고 간신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려서 그새 닫힌 문의 손잡이를 잡는다. 고작 두세 발짝 움직였을 뿐인데, 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난다.


종이봉투 안에 있던 것들을 식탁 위에 꺼낸다. 고무장갑, 수세미 따위의 주방용품과 김치, 김, 달걀, 라면 등 먹을거리다. 찬장으로, 냉장고로, 그것들을 제자리에 놓는다. 마지막으로 포기김치를 그대로 냉장고에 넣으려다가 멈칫한다. 이번에는 잘 썰어서 넣어놓아야지. 경험상 포기째 냉장고에 넣은 김치는 여러 날 안 먹게 된다. 김치를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다가도 당장 썰기가 귀찮아서 그냥 안 먹고 만다. 나는 미래의 내가 먹을 김치를 미리 썰어 두기로 한다. 귀찮음은 잠깐이지만, 그 귀찮음을 무릅쓰고 한 일의 결과는 오래 남는다.


도마를 싱크대에 올리고 그 위에 비닐을 덮는다. 도마에 김칫국이 배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고 도마 위에 포장을 뜯은 포기김치를 척 올린다. 칼날 가운데 구멍이 숭숭 뚫린 채소용 식칼로 총총총 김치를 썬다. 도마 위로 김칫국이 흠뻑 배어난다. 도마 밖으로 흘러나오려는 김칫국을 훔치며, 손가락 두 마디쯤 크기로 썬 김치를 반찬통에 옮겨 담는다. 작은 반찬통이 금세 김치로 꽉 찬다. 별일도 아닌데 괜스레 뿌듯하다. 다시 빈 반찬통을 도마 옆에 놓고, 총총총, 김치를 썰고 담는 일을 서너 번 반복한다. 막상 하고 나면 그리 귀찮지도 않은 일을, 왜 자꾸 미루는지. 그러나 언제나 반성은 짧고, 망각은 길다. 다음에도 이런 부지런을 떨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빈 반찬통에서 이제는 김치통이 된 것들을 냉장고에 넣는다. 이왕 김치도 썬 겸에 라면이나 하나 끓일까 하다가 그만둔다. 싱크대 뒷정리가 남았다. 인제 와서 일을 미룰 수야 없지. 다시 싱크대 앞으로 간다.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도마 주변으로 김칫국이 흥건하다. 언제 튀었는지 싱크대 앞 바닥에도, 주방 벽면에도 군데군데 김칫국이 묻었다. 김치를 자를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무슨 재난이 휩쓸고 간 자리 같다. 행주로 그것들을 닦고, 행주를 빨아서 다시 닦는다. 이 일을 여러 번 되풀이하고 나서야 주방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집안일은 정말이지 반복의 연속이다. 방바닥을 쓸고 닦고, 쌓인 먼지를 털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이런 일들을 평생 하고 또 한다. 지루한 일이지만, 우리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일들이 대부분 그렇다. 설거지하지 않으면 밥을 놓을 데가 없고, 빨래하지 않으면 입을 옷이 없다. 집안일은 며칠만 미뤄도 금방 티가 나고, 일상에 지장이 생긴다. 하루가 여느 때와 같이 흘러간다는 것, 집 안이 늘 한결 같다는 것은 누군가 저 지루한 반복을 묵묵히 견디고 있다는 뜻이다. 지구를 공전하는 달처럼 말없이 곁에 머물며 보살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혼자인 사람은 자전하며 스스로 돌봐야 한다.


무엇이든 반복되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원래 그래.”라는 말. 그러나 원래부터 그런 일은 별로 없다. 잊고 있다 뿐이지 반복되는 일에는 그만한 사연이나 까닭이 있다. 문학에서 ‘반복법’은 어떤 말을 강조하고 싶을 때 흔히 쓰는 수사법이다.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잠언이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잔소리도 그렇다. 무언가 반복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계속 되풀이되는, 원래 그런 것들의 힘으로 삶을 이어간다. 밥통이 밥을 짓고, 세탁기가 빨래를 돌리는, 너무나 당연한 일들의 도움으로.


도마를 덮었던 비닐을 걷어낸다. 칼질하며 힘 조절이 서툴렀는지 비닐 여기저기에 칼집이 나 있다. 그 진집으로 스며든 김칫국에 도마가 벌겋게 물들었다. 그간 칼질을 받아내며 곳곳이 팬 도마가 김칫국을 뚝뚝 흘리는 것을 보니, 생채기를 입고 피를 쏟는 생물 같다. 묵묵히 제 일을 거듭하는 사물 중에서도 도마에는 좀 처참한 면이 있다. 그저 온몸으로 칼날을 받아내며, 베이고 또 베이는 일. 그것이 도마가 겪는 지루한 반복이다. 불현듯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라서 마음이 짠하다.


주방 창문을 열고, 깨끗이 씻은 도마를 그 앞에 세워 둔다. 햇빛으로 도마를 말리고, 소독한다. 도마에 햇빛을 쏘이면, 신기하게도 김칫국 얼룩이 말끔히 사라진다. 미안함에 얼룩진 마음도 햇볕에 내어 말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는 없으니, 대신 나는 그 얼굴을 거듭거듭 머릿속에 되새긴다. 불교에서 백팔배를 하는 것처럼, 기독교에서 때마다 주기도문을 외는 것처럼. 마음이 금세 지루해지는 것을 보니, 그 얼굴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면도기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면도한다. 삼 일쯤 내버려 둔 수염이 썩 까끌까끌하다. 손바닥으로 턱을 문질러보니 질 나쁜 사포를 쓰다듬는 느낌이다.


코밑과 턱 주위에 쉐이빙폼을 척 바른 다음 면도기를 가져다 댄다. 눈삽으로 눈밭을 한번 길게 쓸고 간 것처럼 면도날이 서걱거리며 지나간 자리로 제법 말끔해진 피부가 드러난다. 파릇한 수염 자국이야 아무리 면도날을 바투 들이민대도 어쩔 수 없다.


적당히 힘 조절을 해가며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손에서 힘을 너무 빼면 면도날이 수염에 걸려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너무 힘을 주면 생채기가 나기 십상이다. 무슨 일이든 적당히, 적당한 것이 중요하다. 세안으로 면도를 마무리하고, 다시 거울을 본다. 면도용품 광고에는 면도를 마친 남성이 흐뭇한 표정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곧잘 나온다. 거울에 턱을 이리저리 비춰보는 광고 모델은 한결같이 몹시 흐뭇한 표정이다. 좀 잘생겼는데? 이런 느낌이랄까. 나도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면도하고 나서 말끔해진 얼굴.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밖에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야 할 때만 면도한다. 집에서는 수염을 기른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기르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자라는 수염을 방치하는 것이지만. 바깥출입을 하기 전에 삐죽삐죽 자란 수염을 깎아 없애는 것은 일종의 통과의례다. 내 세계에서 벗어나 당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의식이다.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신경 쓰고 있다는, 예의를 갖춰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나 혼자 먼저 건네는 인사 같은 것이다.


면접을 보러 갈 때 면도를 하지 않는 남성은 거의 없다.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은 자기 관리를 잘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어서다. 또한 수염은 반항을 상징하기도 한다. 수염을 기른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선언이다. 그러니 면접을 보는 사람이 면도하지 않기란 힘들다. 당신들의 질서에 편입하려면 먼저 나를 버려야 하니까. 면도는 그 항복의 표현이다.


수염과 면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 한 편이 떠오른다. 백석의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이다. 평소에도 생활이 고단할 때면 종종 찾아서는 읽는 시다. 이 시를 읽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면서 없던 힘이 난다. 없던 입맛도 생긴다. 시에서 되풀이되는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라는 말을 무슨 주문처럼 읊조리면,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도 별것 아닌 양 가볍게 외면해도 괜찮을 성싶다.


백석의 다른 시「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는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과「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를 함께 생각하면, 내가 모른 척하고 고개를 돌리고 싶은 것은 이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그 세상은 내가 몸담은 현실이면서 때로는 나 자신이었다가 때로는 나 아닌 누구 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전문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를 읽으며 외면하고 싶은 것들을 실컷 외면하고 나면, 마음속에는 기분 좋은 것만이 남는다. 나는 ‘잠풍 좋은 날씨’와 ‘가난한 동무의 새 구두, 꼭같은 넥타이’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을 떠올린다. 그것들이 “내 많지 못한 월급”같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새삼 깨닫는다. 그러고 나면 이 세상에는 더러워서 버리고 싶은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다시금 사는 일에 힘이 붙는다.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해서 더러운 세상과 싸우는 일이 힘에 부친다. 세상이 더럽다며 손가락질할 만큼 스스로 깨끗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자기 관리도 잘하지 못하고, 눈치 보며 가슴 졸이는 일도 너무 많다. 그래서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일 같은 것은 엄두가 안 난다. 그저 며칠씩 집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이나 남몰래 지저분한 수염을 길러볼 따름이다.


수염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란다. 마음도 그렇다. 누군가를 억지로 좋아할 수도 없고, 부러 싫어하기도 쉽지 않다. 마음은 수염처럼 시간이 기른다. 어떤 마음은 오래오래 길러지기도 하고, 정성껏 다듬어지기도 하고, 어떤 마음은 면도하듯이 잘려 나가기도 한다.


면도한 자리가 따끔따끔 시리다. 일주일에 한 번쯤은 하는 일인데도 영 능숙해지지 않는다. 면도날이 낡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여봐란 듯이 기르지도 못할 수염인데 깎기라도 잘해야지. 까맣고 까칠하게 내 속에 숭숭 박혀 있는 것들을.


이것만큼은 외면하지 말고.



그리워할 사람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만나서

읽을 책을 고르는 것과 새로 사람을 사귀는 일은 비슷하다. 일단 첫인상이 중요하다. 책의 첫인상을 사람의 그것에 비유하자면, 한눈에 들어오는 표지는 얼굴이다. 크기도 두께도 저마다인 판형은 체격이고, 제목은 눈빛이나 목소리, 말투쯤이다. 유광·무광·에폭시 따위의 후가공은 옷차림이다.


책의 겉모습은 마음에 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과 마찬가지로 외양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대화로써 사람을 알아가듯이 표지를 넘기고 내면을 좀 더 들여다보아야 한다.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실례지만, 그래도 처음 만난 사람끼리는 이름이나 사는 곳 정도는 묻고 답하며 말꼬를 트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상대의 신상을 파악한다. 한동네에 산다든지 취미가 같다든지 무언가 통하는 점이 있으면 금세 서로 가까워진다. 저자 소개와 차례(목차)를 보는 일도 그렇다. 어떤 저자 소개와 차례에는 저절로 다음 페이지를 펼치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제는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눌 때다. 말을 섞을수록 나와 맞지 않음을 깨닫는 사람도 있고, 알아갈수록 마음이 가는 사람도 있다. 마음이 간 사람과는 자주 연락하게 되고, 그만큼 만나는 일도 잦다. 그렇게 누구는 그저 지인이나 스쳐 지나가는 이가 되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더 가까이 곁을 내주게 된다.


책도 다르지 않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책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앞부분 몇 장만 읽고 도로 서가에 꽂는 책이 있고, 한동안 마음을 빼앗겼으나 끝내 마지막까지는 읽지 못하는 책이 읽고,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는 책이 있다. 다 읽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수시로 다시 펼쳐보는 책, 사랑하는 사람의 말같이 페이지마다 밑줄을 그어가며 읽게 되는 책도 있다.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본다. 한 출판사의 시리즈로서 또래 친구들처럼 어깨를 겯고 있는 책들도 보이고, 인종과 국적이 다른 친구들의 모임처럼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책들이 한 칸에 웅기중기 모여 있기도 하다. 각양각색의 책들이 한 책장에 모여 있는 광경은 한 동네, 한 나라, 하나의 별에서 어울려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64,657종, 79,948,185권(대한출판문화협회 통계). 2021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책이다. 뒤의 발행 부수를 앞의 발행 종수로 나누면, 새로운 책을 펴낼 때 평균적으로 1,200부 안팎을 찍은 셈이다. 근 8천만 권이라니, 어마어마한 숫자이지만, 이것도 아주 많이 줄어든 것이다. 20여 년 전쯤에는 매년 2억 부에 가까운 책이 세상에 쏟아졌단다.


79,948,185권 중에 끝내 폐기되지 않고 독자의 손에 닿은 것은 극소수다.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 명 남짓이니, 한 권의 책을 만나는 일은 확률적으로 사람 간의 인연보다 귀하다. 이 가볍지 않은 인연을 생각하며, 비좁은 책장에 빼곡히 모여 사는 책들을 다시 본다. 대부분 상태가 양호하지만, 어떤 것들은 유난히 표지가 해지고, 손때를 많이 탔다. 그만큼 자주 들추어 보아서다. 곁에 두고 그 이야기를 듣는 데 마음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책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책과 책 사이에 있는 빈자리다. 당신이 빌려 가서 여태 돌려받지 못한 책이 있던 자리다. 앞으로도 그 책은 돌려받을 일이 없을 듯싶다. 그래도 괜찮다. 다만 그 책이 당신의 손때로 반질반질해져서 당신의 책장에서 오래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어떤 인연은 그렇기도 하다.


점, 선, 면 다음은 마음

수건

바닷가의 풍광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해안부터 수평선 끝까지 고깃배나 작은 섬 하나 눈에 걸리는 것 없는, 시원하고 잠잠하고 망망한 바다. 혹은 파도가 끊임없이 발목을 적시는 모래사장이나 휴양지 숙소의 창문 너머로 건너다보이는 해변. 수건을 볼 때면 문득 눈앞에 그려지는 바닷가의 모습들. 그때마다 파도의 높이라든가 시야는 조금씩 다르지만, 언제나 수건이 내게 주는 심상은 바다의 풍경을 벗어나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던 일을 오늘은 곰곰이 따져본다. 해몽하듯이 수건은 왜 내게 바다의 이미지로 다가오는지 헤아린다. 첫째는 수건의 생김새 때문인 듯하다. 쫙 펼쳐놓은 수건은 앞에서는 면(面)으로, 옆에서는 선(線)으로 보인다. 내 상상 속에서 수건의 면은 수면(水面)으로, 수건의 선은 수평선으로 변주된다. 어두운 색채의 수건은 밤바다로, 밝은색 수건은 아침이나 정오 무렵의 눈부신 바다로 되살아난다.


막 세탁기에서 꺼낸 수건은 널기 전에 툴툴 털어 주름을 편다. 파도의 이미지는 이때 물결 모양으로 펄럭이는 수건에서 온 듯싶다. 볕 좋은 날 건조대에 널어놓은 수건이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나풀거리는 데서 왔을 수도 있다. 아예 날아가 버리기에는 무겁고, 바람을 무시하기에는 너무 가벼운. 그래서 바람이 불 때마다 나부끼는 수건은 마찬가지로 바람에 등 떠밀려 수평선과 해안가 사이를 쉼 없이 오가는 파도를 닮았다.


휴양지 숙소에서 바라다보는 바다의 심상은 특히 흰 수건을 볼 적에 자주 떠오른다. 몇 번 가본 적 없지만, 동해에 놀러 가서 머물렀던 숙소에는 늘 새하얀 가운과 수건이 걸려 있었다. 집에서는 생전 입어본 일 없는 가운을 어색하게 걸친 채 창가에 끌어다 놓은 의자에 앉아 가만히 쳐다봤던 바다. 해변에 닿은 파도가 만드는 우윳빛 물거품. 그리고 욕실 수건걸이에 깔끔하게 접혀 있는 수건. 집에서 흰 수건에 얼굴을 닦을 때 불쑥 솟아나는 휴양지 바다의 심상은 이것들과 연관이 있다.


우리 집에 있는 수건은 총 열 장. 그중 한 장은 늘 수건걸이에, 나머지는 욕실 수납장이나 빨래통에 들어 있다. 손이나 얼굴을 씻은 것은 몇 번이고 다시 쓰지만, 샤워를 하고 몸을 씻은 수건은 빨래통에 집어 넣는다. 너무 축축해서다. 빈 수건걸이에는 수납장에서 꺼낸 새 수건을 다시 건다. 수건걸이에서 빨래통으로, 세탁기로, 건조대로, 수납장으로, 다시 수건걸이로 돌아오는 궤적이 우리 집 수건의 생활이다.


어디가 시작인지는 잘 모르겠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질문과 비슷하다. 바로 수건걸이에 걸어 쓴 것도 있고, 새것이라 한 번 세탁해서 쓰려고 먼저 빨래통이나 세탁기에 넣은 것도 있고, 수납장으로 직행한 것도 있다. 무슨 표식을 새긴 것도 아니고, 순서대로 쓰는 것도 아니라서 한 장 한 장 수건의 생애를 다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 수건 중 하나가 우리 집 사물들의 최고 선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괜스레 미안하기도 하다.


이사할 때면 몇 가지쯤은 헌 것을 버리고 새것을 사기 마련인데, 수건만큼은 그런 적이 없다. 우리 집에서 수건이 퇴출당하는 사태는 고양이나 내가 사고를 쳤을 때 벌어진다. 커피나 주스처럼 색깔이 있는 액체를 왕창 쏟았을 때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액체가 눈앞에서 점점 번지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수건을 찾게 된다. 일단 액체가 더는 번지지 못하게 수건을 덮어두고, 휴지나 물티슈 따위로 뒷정리한다. 수건으로 시간을 버는 셈이다.


오염된 수건은 으레 빨래통이나 세탁기 안으로 들어간다. 세탁소까지 찾아가는 비싼 옷과는 처지가 다르다. 물든 데가 말끔히 씻기면 다행이지만, 얼룩이 남은 수건은 쉽게 버려진다. 사실 그대로 쓴다고 무슨 탈이 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왠지 얼룩덜룩한 수건은 쓰고 싶지 않다. 청결해야 한다는, 수건이 가진 이미지 때문일 테다.


수건은 순교자나 희생양처럼 남의 잘못을 덮어쓰고 사라진다. 오랫동안 타인의 몸을 구석구석 닦는 궂은일을 묵묵히 해온 그를 내 실수 때문에 저버리는 것이다. 세상에 작은 흠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속된 말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이었다면 이해하고 용서하고 눈감아줄 만한 오점일 텐데, 유독 수건에는 가차 없다. 사물을 대하는 태도로 그 사람의 성정을 가늠한다면, 나는 몹시 매정하고 무자비한 사람이다. 우리 어머니는 못쓰게 된 수건을 걸레로라도 쓰며 품고 살았다. 무엇이든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었다.


부모님과 살던 집에는 항상 수건이 많았다. (그만큼 걸레도 많았다.) 욕실 수납장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창고에도 포장을 뜯지 않은 수건이 가득했다. 모두 어딘가에서 받아 온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수건을 사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돌잔치, 개업식, 퇴임식, 동창회 등 각종 행사 자리에서 선물로 받거나 어느 회사에서 홍보용으로 나눠주는 것을 얻어오고는 했다. 어머니에게 수건은 돈을 주고 사는 물건이 아니었다. 수건을 사는 것은 사치였다. 그렇게 돈 한 푼 들이지 않은 물건이건만 걸레가 될 때까지 쓰고, 더러워진 걸레 하나 버리는 것을 아까워했다.


처음 자취를 하려고 집을 나설 때 어머니는 내게 수건을 한가득 안겨줬다. 지금 수건을 개어놓은 수납장을 열어 확인해보니 그때 받은 수건은 한 장밖에 남아 있지 않다.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나 엉뚱한 회사명이 적힌 수건을 쓰는 것이 어딘가 겸연쩍고, 또 우리 집에 놀러 온 누군가가 그것을 본다고 상상하면 괜히 부끄러워서 버린 것이 많다. 물론 나와 고양이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버려진 것도 여러 장이다. 여태껏 살아남은 저 한 장 말고 다른 수건들은 모두 내가 돈을 주고 산 것이다.


“강한별 첫돌. 2012.8.20.” 어머니에게 받은 수건 중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에 새겨진 문구다. 분홍색으로 테를 두른 하얀 수건. 문구 위아래로 토끼 한 마리와 알록달록한 하트가 그려져 있다. 어째서 이것만이 남았을까. 여느 수건과 다르게 귀여운 디자인도 한몫했겠지만, 어린아이의 이름과 그 아이의 첫돌을 기념하는 마음이 바느질된 것을 버리자니 공연히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나 보다. 이 수건을 보고 있자니 또 바닷가의 풍경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번에는 파도를 발로 차며 노는 한 아이의 뒷모습도 거기 있다. 아이의 발길질에 아랑곳없이 다가와 발등을 적시고는 물러가는 파도. 문득 파도의 그 끝없는 율동이 마치 사람 간의 인연 같다. 이제껏 내가 만나고 헤어진 숱한 사람들. 내 마음 한 자락을 적시고 떠난 사람들과 밀려오는 파도처럼 앞으로 마주칠 사람들. 그중에 강한별도 있을까. 나는 그 이름과 생일을 몇 번이고 되뇐다. 언제고 강한별이라는 사람을 만나면 기억하려고. 생일을 물어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덕분에 한 시절 깨끗하게 살았다고 말하려고.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듯이, 사람과 사람을 이으면 인연이 된다. 선과 선이 모이면 면이 되듯이, 인연과 인연이 모이면 세상이 된다. 수건들은 내게 점, 선, 면 다음은 마음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그저 아무렇게나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인 하나의 점. 그것은 선과 면이 되었다가 마침내 면과 면이 만나 입체가 되며 부피를 갖는다. 부피는 곧 깊이다. 한 장의 수건, 아니 물기를 머금고 머금어 한 장의 바다가 된 수건. 나는 젖은 얼굴을 닦을 때마다 그 깊고 깊은 수건에 사는 심해어 같은 마음들과 입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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