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응급실

   
곽경훈
ǻ
싱긋
   
12000
2022�� 10��



■ 책 소개


응급실이라는 청진기로
세상사에 귀를 기울이다

저자에게 응급실이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매일의 삶이 이어지는 배경이기도 하다. 응급실은 흰 벽과 천장과 바닥, 수많은 의료기구, 수술복과 가운 차림의 의료진과 저마다 다른 이유로 찾아온 환자들이 매일 같은 듯 다른 듯 스치며 만들어가는 곳이다. 

저자는 의학 기술의 발달과 사회의 변화, 메뉴 선정과 음료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을 풀어내며 지금까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생생한 응급실 관찰일지를 전한다. 병원과 세상을 잇는 연결통로이자 대문, 문간방인 응급실을 청진기 삼아 세상을 들여다보면, 응급실에 대한 오해도 풀고, 이 세상도 조금은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 저자 곽경훈
1978년 겨울 대구에서 태어났다. 무력한 책벌레로 시작하여 반항기 넘치는 괴짜로 거듭난 학창시절을 보냈고 종군기자, 연극배우, SF소설가, 인류학자처럼 관찰자 겸 이야기꾼으로 일할 수 있는 직업을 희망했으나 현실적인 이유로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된 후,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려 노력하고 있다. 메디컬에세이 『응급실의 소크라테스』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 『의사가 뭐라고』와 인문교양서 『반항하는 의사들』 『침 튀기는 인문학』을 집필했다.

■ 차례
프롤로그
응급실과 음식

1장_응급실의 정기거주자
보안요원, 환자분류 간호사, 그리고 행정직원
응급의학과의사
간호사

2장_응급실의 임시거주자
모든 생명은 심장으로 통한다
칼잡이 중의 칼잡이
영혼의 집을 고쳐라
응급실의 이방인
피라미드의 맨 아래
홀로 죽음을 맞이하다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다

에필로그

 




날마다, 응급실


응급실의 정기거주자

응급의학과의사

오늘날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응급실’은 역사가 매우 짧은 개념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응급실이 존재했으나 오늘날과는 달리 그저 ‘외래가 끝난 후 간단한 진료를 제공하는 공간’에 불과했다. 경력이 짧고 미숙한 의사가 근무했으며 응급 상황을 다루는 전문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응급실이 새롭게 정의되었고, ‘응급의학과’라는 임상과가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한국의 상황은 한층 열악해서, 1980년대까지도 응급실은 다양한 임상과의 젊은 의사가 교대로 근무하는 공간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병원 내 금연’이라는 규칙도 확립되지 않아 야간의 응급실은 자욱한 담배연기 아래 주먹구구식 진료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응급의학과가 출범했으나 내가 레지던트로 수련한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까지도 병원에 따라 응급의학과의 역할과 기능이 정착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요즘에도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꼭 필요한가? 솔직히 응급실은 인턴이 근무해도 충분하지 않나?’라는 괴랄한 생각을 지닌 의사를 종종 마주한다. 응급의학과의 역할을 나름대로 인정하는 사람도 ‘심정지 같은 상황에서 심폐소생술에 특화한 인력’ 혹은 ‘기관내삽관(Endotracheal intubation, 긴 플라스틱을 입을 통해 기관까지 삽입하여 인공호흡을 할 통로를 확보하는 시술)’과 인공호흡기 운용에 특화한 인력으로 착각할 때가 적지 않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심폐소생술, 기관내삽입, 인공호흡기 운용 같은 일은 응급의학과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응급의학과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역할은 ‘진단’이다.


***


응급실은 외래와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부분이 다르나 ‘어떤 환자가 방문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크게 도드라지는 차이다.


예를 들어, 심장내과 외래에는 심장질환을 가졌을 가능성이 큰 환자가 방문한다. 정형외과에는 당연히 근골격계 질환에 해당하는 환자가 방문할 것이며 소화기내과, 신장내과, 호흡기내과, 산부인과, 정신과, 신경외과, 신경과 등 대부분의 임상과 외래에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범위의 환자가 방문한다.


그러나 응급실에는 어떤 환자가 방문할지를 예측할 수 없다. 예를 들어, 119 구급대가 ‘의식이 없는 환자’를 이송했다면 그 원인은 뇌출혈, 뇌경색, 약물중독, 일산화탄소중독, 저나트륨혈증, 고나트륨혈증, 저혈당, 간성혼수, 실신, 간질발작, 심각한 부정맥, 다양한 종류의 쇼크, 심지어 패혈증까지 매우 다양하다.


복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위장염, 담낭염, 간농양, 담관염, 복부 대동맥박리, 췌장염, 신장경색, 요로결석, 장간막동맥혈전, 위장관 천공, 충수염, 내부탈장, 장폐색, 거기에 때로는 심근경색 환자도 상복부통증을 호소하기 때문에 원인이 될 수 있는 질환은 매우 많다. 외상도 마찬가지다. 중중외상을 입은 환자가 신체의 여러 부위를 다친 경우, 수술의 우선순위를 판별하려면 진단이 정확할 뿐만 아니라 신속해야 하고, 그렇게 진단하는 동안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켜야 하며, 최소한 악화하지 않도록 유지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응급실을 방문하는 다양한 환자를 기존의 전통적인 임상과에서 바로 진료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몇몇 의사는 ‘응급실은 인턴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그들은 과연 그렇게 인턴에게 맡겨둔 응급실에서 얼마나 많은 ‘예방 가능한 사망’이 발생했는지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했을까?



응급실의 임시거주자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다

오전 6시에서 오전 7시 사이의 응급실은 어수선하다. 의사의 경우에는 밤근무가 끝나는 무렵이라 은근한 피로를 느끼기 시작한다. 간호사의 경우, 대부분 3교대로 근무해서 오전 6~7시는 밤근무조와 낮근무조의 교대 시간이다. 그래서 이른아침의 응급실은 약간 정신없고 번잡하다.


레지던트 시절의 ‘그날’도 그랬다. 그날따라 밤새 바빠, 나와 응급실 인턴들 모두 표정은 초췌했고 어깨는 무거웠으며 종아리는 팽팽했다. 그러나 구급차가 요란한 불빛과 함께 응급실 입구에 멈추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구급차의 문이 열리고 다급하게 뛰어내린 구급대원이 이동식 침대를 밀며 응급실 내부로 달려오자 순식간에 피로가 사라졌다. 한층 명료한 의식과 함께 팽팽한 긴장과 묘한 힘이 혈관을 가득 채웠다.


“20대 여성이며 아침에 가족이 발견했습니다. 기저질환은 없다고 하며 현장 도착 당시부터 간질발작을 확인했습니다.”


119 구급대원이 기관총처럼 건넨 말의 내용은 정확했다. 구급대의 이동식 침대에는 젊은 여성이 누워 있었다. 평균 정도의 키에 약간 마른 체구였다. 제대로 감기지 않는 눈꺼풀 아래로는 눈동자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고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나왔으며 팔과 다리는 경직되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어서 침대로 옮기고 즉시 정맥주사를 연결해 아티반 2mg을 투여하세요.”


아티반(Ativan)의 성분명은 로라제팜으로 안정제이며 간질발작을 멈추는 용도로도 사용한다.


“자발호흡이 있지만 의식상태가 나빠 기관내삽입을 시행하겠습니다. 인공호흡기도 준비하세요.”


간호사가 환자의 팔에서 정맥을 확보하여 아티반을 투여하는 동안, 나는 환자의 머리맡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기관내삽관을 진행했다. 아티반을 투여하자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팔다리는 움직임이 다소 잦아들었다. 하지만 기관내삽입을 완료하고 인공호흡기를 연결한 후에도 여전히 눈동자가 한쪽으로 치우친 상태였다. 팔다리의 움직임만 잦아졌을 뿐, 아직 간질발작은 끝나지 않았다.


당혹스러웠다. 기저질환이 전혀 없는 젊고 건강한 여성이 갑작스레 간질발작을 일으켰다면 자발성 뇌출혈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하지만 자발성 뇌출혈의 전형적인 증상과 조금 달랐다. 다음으로 약물 중독을 떠올릴 수 있으나 자살 목적으로 흔히 복용하는 약물 가운데 그 정도로 심한 간질발작을 일으키는 종류는 드물다.


하지만 우두커니 있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혈압과 맥박은 안정적이라 일단 기본적인 혈액검사와 머리 CT를 처방했다. 응급실 인턴과 간호사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때 환자의 혈액을 뽑아 간이혈당계에 떨어뜨린 간호사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혈당이 12예요!”


그 외침과 함께 의문이 풀렸다.


***


이른 아침 경광등의 요란한 빛을 내뿜으며 응급실 입구에 멈춘 구급차는 불길하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깊은 밤에 응급실에 도착한 구급차가 훨씬 심각한 환자를 이송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른아침의 구급차가 심각한 환자를 데려올 가능성이 크다. 깊은 밤에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향하는 환자는 심각한 질환이 발병한 후 시간이 그리 경과하지 않은 상태일 가능성이 큰 반면, 이른 아침에 구급차가 데려오는 환자는 밤새 방치된 상태일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환자가 홀로 생활하면 그런 위험이 한층 크다. 또, 가족과 함께 살아도 몇몇 질환은 알아차리기 힘들다.


저혈당이 바로 그런 질환이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저혈당은 혈액 내 포도당 수치가 지나치게 감소하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혈당이 정상범위인 70~110을 벗어나 현저히 감소하는 상황을 저혈당이라 부른다. 물론 언뜻 생각하면 혈당이 감소해도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듯하다. ‘포도당이 부족하면 지방과 단백질 같은 영양소를 사용하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 대부분은 포도당이 부족하면 지방이나 단백질을 사용한다. 다만 딱 한 가지, 뇌세포는 오직 포도당만 사용한다. 따라서 혈당이 지나치게 감소해 포도당이 심각하게 부족해지면 뇌세포의 기능이 저하된다. 쉽게 설명하면 ‘배고픈 뇌세포가 기절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굶주린 뇌세포는 단순히 기절하는 게 아니라 사망한다.


이러한 저혈당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발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저혈당은 당뇨병 환자에게서 발생한다. 당뇨병은 혈당이 지나치게 증가하는 질환이라 경구약이든 인슐린 주사든 대부분의 당뇨병 치료제는 기본적으로 혈당을 낮춘다. 그런데 의사가 당뇨병 환자에게 약을 처방할 때는 ‘정상적으로 식사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때때로 당뇨병 환자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의사가 처방한 용량 그대로 약을 복용하거나 인슐린 주사를 맞으면 혈당이 지나치게 감소하는 상황, 그러니까 저혈당에 빠진다.


그렇다면 그날 아침의 환자는 왜 저혈당에 빠졌을까? 당뇨병이 있었으나 가족에게 숨긴 것일까? 안타깝게도 아니다. 환자는 젊고 건강한 여성이었다. 당뇨병이 있어 인슐린 주사를 처방받은 사람은 환자의 할머니였다. 환자는 스스로 삶을 끝낼 목적으로 할머니의 인슐린 주사를 훔쳐 자신에게 투여했다. 계산해보니 환자의 침대 옆에서 발견한 텅빈 인슐린 주사에는 대략 1~2달 분이 들어 있었다. 환자는 잠자리에 들면서 그 엄청난 양의 인슐린을 투여했고 저혈당에 빠진 상태로 밤을 보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발견되었을 때는 심각한 뇌손상이 발생해서 무시무시한 간질발작을 일으켰다.


***


안타깝게도 환자의 뇌손상은 너무 심각했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지만 뇌는 이미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식물인간이 단순히 대뇌의 기능만 손상된 상태라면 뇌사는 혈압, 맥박, 체온, 호흡 같은 기본적인 생명기능을 담당하는 뇌간까지 손상되어 인공호흡기 치료를 지속해도 짧으면 며칠, 길어도 몇 주밖에 생존할 수 없는 상태다.


그렇다면 환자는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부모님이 이혼한 후,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았으며 최근에는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였다.


그런데 환자는 장기기증에 대한 서류를 남겼다. 장기기증을 결심한 것과 ‘극단적인 선택’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오래전부터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하면서 장기기증을 떠올렸을 수도 있으나 장기기증과 극단적인 선택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도 다분하다.


어쨌거나 서류를 확인한 후 후속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지체할수록 기증할 수 있는 장기의 숫자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신경과에서는 뇌사를 판정하기 위한 검사를 시행했고 병원의 윤리위원회도 급히 소집되었다. 장기기증을 담당하는 코디네이터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환자가 남긴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절망으로 가득했을 죽음에 조금이라도 희망의 빛을 더하기 위해 관련한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뇌사판정과 장기이식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환자가 남긴 각막과 간, 신장, 심장이 적지 않은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했다.


하지만 환자는 그렇게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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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