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지은 집

   
강인숙
ǻ
열림원
   
19000
2023�� 01��



■ 책 소개


단칸방 신혼집에서 각자의 서재가 있는 집에 이르기까지,
더 나은 집필 공간을 찾아 떠나고 머문 불가피한 순간들에 대한 기록

『글로 지은 집』은 빈손으로 시작해 원하는 서재를 갖춘 집을 갖기까지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다. 신혼 단칸방부터 이어령 선생이 잠든 지금의 평창동 집에 이르기까지, 더 나은 집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투쟁의 역정이 담겼다. 1958년부터 현재까지 떠나고 머문 공간,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함께 존재했던 부부의 삶이 강인숙 관장의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책은 한 여자가 새로운 가족과 만나 동화되는 과정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어령 선생이 그야말로 ‘글로 지은’ 집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어령 선생과의 결혼식 날 풍경, 집을 찾은 여러 문인과의 추억, 동네 한복판에서 두 눈으로 목도한 4.19와 5.16 역사의 현장, 이어령 선생의 집필 비화 등이 책 곳곳에 소개되어 있다.

■ 저자 강인숙
문학평론가, 국문학자. 1933년 10월 15일(음력 윤 5월 16일) 사업가의 1남 5녀 중 3녀로 함경북도 갑산에서 태어나 이원군에서 살다가 1945년 11월에 월남했다. 경기여자 중·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숙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데뷔했으며, 1958년 대학 동기 동창인 이어령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건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퇴임 후 영인문학관을 설립했다. 

■ 차례
머리말

1) 집1. 성북동 골짜기의 단칸방(1958년 9월~12월)
사회 초년병
야간학교의 매력
도배지 한 장만 붙인 신방
혼례식
신혼여행 생략하기
꽃분홍 치마
자장면 파티
예고 없이 오신 손님

2) 집2. 삼선교의 북향 방(1959년 1월~3월)
방 두 개만 있는 일각대문집
어항이 얼어붙은 방
현대평론가협회
키 큰 손님

3) 대가족 이야기
유산과 가독권家督?
아버님의 공작새
그 집안의 어른들
그 집안의 효도 풍경
아버님의 기도
‘페닌슐라’에서 점심을
아버님의 노년
가는 정, 오는 정

4) 집3. 청파동 1가(1959년 3월~1960년 3월)
별채 같은 방
병든 여인의 모성
그 집에 온 손님들
남조 선생과의 만남

5) 집4. 청파동 3가의 이층집(1960년 3월~1961년 3월)
친구 집에 세 들기
셋방살이의 의미망
가난한 마님의 품위
장판 소동
4.19

6) 집5. 한강로 2가 100번지(1961년 3월~1963년 4월)
내 집 갖기
야밤에 들려온 총소리
교사와 학생 겸하기
텔레비전과 오디오
그 집에 온 문인 손님들
이 집 남자들 왜 이리 션찮아?

7) 집6. 신당동 304-194(1963년 4월~1967년 3월)
1963년 신당동
집수리
대궐 같은 집
남자아이의 엄마 되기
경이로운 신세계
1963년의 4중고
세 번째 아이
부록: 『흙속에 저 바람 속에』
그 집에 온 손님들
일터에서 만난 친구들
- 은인 같은 친구: 정금자
- 보호자 같던 연상의 친구: 김함득
- 갈대같이 하늘거리는 여인의 균형 감각: 서정혜
- 타고난 훈장: 이정자
에필로그

8) 집7. 성북동 1가의 이층집(1967년 3월~1974년 12월)
언덕 위의 이층집
연탄으로 큰 집 덥히기
‘봉사와 질서’
이웃
그 집에 온 손님들
부록: 《신상新像》
에필로그

9) 집8. 평창동 이야기(1974년 12월~ )
소나무와 바위산
길이 넓어진 사연
파격적인 땅값
언덕 위의 하얀 집
하얀 집의 문제
그해의 산타클로스
1974년 평창동은……
다람쥐와 꾀꼬리
이웃
“어떤 새끼들이 이런 데서……”
항아님 같던 세배객들
집 허물고 박물관 만들기
‘오늘의 과업’과 ‘모든 날의 과업 ’
너와 나의 쉼터

강인숙 집필 연도

 




글로 지은 집


집1_성북동 골짜기의 단칸방(1958년 9월~12월)

도배지 한 장만 붙인 신방

장판은 몰라도 도배는 하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둘이 직접 하기로 했다. 결혼 전주의 일요일 날, 우리는 학교에서 빌려온 책상 위에 올라서서 종이 한 장을 맞잡고 천장 도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뜰 아랫방에 세들어 사는 부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우리에게 너무 나쁜 정보를 알려주었다. 안방 사람들이 집을 통째로 월세를 얻어가지고, 자기네와 우리에게 전세를 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도배는 중단되었다. 우리의 신혼 생활은 천장에 새 벽지가 한 장만 붙어있는 이상한 방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안집 사람들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때의 내 안목으로 보면 안방 주인은 계획적인 사기꾼이었다. 그래서 나의 신혼 생활은 안방 사람들과 복덕방 영감을 상대로 하는 전투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당장 나가겠다고 방방 뛰었다.


머지않아 그런 일이 없어도 우리는 그 집에서 이사를 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때 성북동에는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그러니 삼선교에서 내려 선잠단 근처까지 두 정거장을 걸어서 가야 했다. 낮에 둘이 이야기를 하면서 갈 때는 먼 줄을 몰랐는데, 막상 혼자 밤 열시가 넘은 시각에 두정거장을 걸어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시월 이십삼일에 결혼했으니 날씨는 나날이 추워지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임신까지 했다. 입덧이 심해서 수도극장 앞에서 내려 토하고, 숨을 고른 후 다시 버스를 타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면 도착 시간은 더 늦어진다.


좀 더 있으니 도저히 밤길을 걸어서 다닐 수 없는 건강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고 언제 닿을지도 모르는데, 글이 밀려 밤을 새우는 신랑을 두 정거장 걸어 나와 기다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어서 복덕방에 방을 빼달라고 사정했다. 그런데 안방 사람들이 오는 사람을 모조리 내쫓아서 방이 나갈 가망이 없었다. 석 달 만에야 안방 댁의 사정이 좀 피어서 집주인과 재계약을 했고, 새 사람을 받겠다는 결정을 내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겨우 그 굴에서 벗어났다. 그 집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불신을 배웠다. 비싼 수업료를 낸 것이다.


자장면 파티

최근에 어디엔가 처박혀 있던 신혼 당시의 가계부가 나타났다. 평범하고 조그만 공책이다. 그 공책을 통해서 나는 신혼 초에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이 정확하게 이만 구천오백 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사의 한달 월급만 한 액수다. 교통비 이백 원, 담배 백 원, 파마 칠백원, 쓰레받기 백 원 하는 식의 유치원 아이 같은 지출 내역이 서투른 글씨로 적혀 있는 결혼 초기의 금전출납부를 반세기만에 보니, 남의 일처럼 재미있었다.


십일월 말에 남편 월급이 나왔다. 이만 오천 원인데 봉투에는 만 칠천오백 원이 들어 있었다. 여러 가지 공제액 외에 음식 외상값 오천 원이 공제되어 있었다. 결혼한 달의 얼마 안되는 기간의 외상값이다. 내가 나가 일하는 저녁 시간에 신랑이 친구들과 시켜 먹은 음식 대금이다. 자장면이 주였고 고작해야 탕수육 정도가 첨가된 것이지만 그달에는 그것도 부담이 되었다. 이미 타 쓴 곗돈을 빼면, 남은 것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나도 공제액이 많은 편인데, 앞으로 시댁도 도와야 하니 우리는 한동안 많이 가난했다. 그런 일이 되풀이 되니까 액수가 좀 커졌던 다음 달에는 외상 음식값으로 다툰 일도 있다.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웃을 만한 자장면 값도 부담이 되던 그 시절의 가난이, 회혼을 넘긴 자리에서 보니 사랑스럽다. 그때 우리는 가난 같은 것은 거뜬히 견뎌낼 자신이 있어서, 겁도 없이 빈손으로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피난지에서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본 일이 있는 우리 세대는 밑바닥까지 가본 자의 배짱이 있다. 설마 전시 같기야 하랴는 생각이다. 둘 다 직장이 있으니 굶어 죽기야 하랴고 생각하면 무서울 것이 없다.



집2_삼선교의 북향 방(1959년 1월~3월)

방 두 개만 있는 일각대문집

십이월에 이 선생 학교에서 보너스가 나왔다. 이만 오천 원이었다. 결혼한 후 보너스를 처음 받아본 우리는 그 말이 얼마나 황홀한 단어인가를 몸으로 실감했다. 그 돈을 밑천으로 해서 전찻길 근처로 이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집도 나갔으니 내 월급을 보태서 삼선교 전차 정류장 근처로 오 만원을 더 주고 집을 옮겼다. 그런데 이만 오천 원의 초과 지출 때문에 그달에 생활비가 모자랐다. 빚을 지지 않는 것이 원칙인 나는, 두 주일 동안 콩나물국만 먹으며 다음 월급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밤중에 입덧을 하면서 개천가의 어두운 길을 두 정거장이나 걷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니, 그 보너스가 너무 고마웠다.


새로 얻은 집은 먼저 집보다 작고 격이 낮았다. 젊은 부부가 자투리땅에 지은 집이어서 먼저 동네의 집장삿집 수준에도 못 미쳤다. 방이 두 개뿐인 일자(一字)집인데, 두 방이 모두 북향이었다. 불이 잘 들지 않아서 겨우내 추웠다. 그런데도 정류장이 가까우니 오십 프로나 더 비쌌다.


이사 간 날은 십이월 말일이었다. 짐은 얼마 없는데 마당에 묻은 김칫독을 파내는 게 큰 일이었다. 땅이 얼었기 때문이다. 물이 세 동이는 들어갈 큰 독에 김치가 가득 들어 있어서 무겁기도 했다. “집에 이만한 독 하나는 있어야 한다”면서 김장을 도와주러 온 그의 누님이 같이 가서 산 독이다. 우리 시댁은 남자 형제는 대체로 섬세하고 소심한 예술가형이시다. 그래서 비관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런데 여자분들은 사교적이고 활달하고 진취적이다. 충청도가 본래 여자가 씩씩한 고장이다. 겨우 열여섯 살 된 여자아이가 독립운동을 주도한 고장은 거기밖에 없다. 그의 누님도 배포가 큰 옵티미스트였다.


누님은 정신대 세대여서 6.25 때 우리 큰언니처럼 스물세 살에 아이 둘을 데리고 청상이 되셨다. 그러니 형제 중에서 가장 어려운 형편의 여자 가장이었다. 그런데도 형제들이 이사해서 집들이를 하는 날이면, 우리는 언제나 누님의 웃음소리로 새집을 찾아냈다.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아 앉아 지내던 말년에도 누님은 꽃이 잔뜩 피어 있는 독신자 아파트에서 현관문을 열어둔 채 즐겁게 사셨다. 그림을 그리며 그렇게 활달하게 웃으면서 사신 것이다. 나는 그 김칫독을 오래 가지고 있었는데, 볼 때마다 가슴이 확 트이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 스케일이 누님이 만년에 그린 활달한 그림들에 남아 있다.



집3_청파동 1가(1959년 3월~1960년 3월)

그 집에 온 손님들

첫 아기를 낳고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이어령 씨 제자들이 아기를 보겠다고 몰려왔다. 경기고등학교에 부임한 해의 가을이다. 검은 교복을 입고 여드름 난 학생 네댓 명이 맨발로 들이닥치니 방이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잘 자란 전나무같이 풋풋하고 믿음직스러웠던 그때의 방문객들도 이제는 여든 줄에 들어서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반세기 후에도 여전히 이 선생 주위에 남아 있다. 이 선생은 경기고등학교에 사실 일 년 남짓밖에 있지 않았는데, 2010년대까지도 외국에 나가면 생각지도 않았던 경기고 제자가 공항에 마중 나오는 일이 많았다. 대사관이나 기업체의 장, 공항 출입기자 중에 경기고 출신이 있어서, 탑승자 명단에서 이름을 보고 옛 스승을 도우러 오는 것이다. 그 정성이 대를 이어 평생 이어진다. 직접 배우지 않은 제자들까지 그 일에 동참해주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언택트풍이 유행하는 가운데 옛 제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육십 년 전 스승을 찾아오는 것은 감동적인 일이다. 그들은 개인적인 일에서도 늘 서포터가 되어주었다. 이 선생이 암에 걸리자 의사를 소개해주고 귀한 약을 구해 보내는 제자도 있고, 책을 가져오는 제자도 있으며, 몇 해 동안 보름마다 식품을 보내오는 제자도 있다. 그 분들은 이어령 선생의 정신적인 자식들이다. 그래서 그는 가지 많은 나무처럼 땅에 지지 않는다.


그 빛나던 제자들도 이제는 모두 정년퇴임을 한 지 오랜 노인이 되어가고, 더러 먼저 세상을 떠난 분들도 있다. 이십 대에 만난 제자들이라 칠팔 년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엊그제도 한 제자의 부음을 들었다. 생명이 있는 자는 사망하기 마련이지만, 손아래 사람들이 앞서는 일은 더는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집5_한강로 2가 100번지(1961년 3월~1963년 4월)

교사와 학생 겸하기

나는 인복이 많은 것 같다. 아기를 돌보는 언니들이 대체로 유능하고 성실했다. 그 무렵에 시골에서 가출해 오던 소녀들 중에는 나이가 어려서 책임감이 없는 아이들이 많았다. 조카네 도우미는 다섯 살 된 아이를 데리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지자 아이를 그냥 거리에 버리고 귀향해버렸다. 공장에 들어간다고 후임도 정해놓지 않고 느닷없이 나간 언니네 도우미는, 공장에서 힘들어 견디다 못하게 되자 골탕을 먹이고 떠난 언니에게 빼내달라고 매달린 일도 있다. 그렇게 경우가 없고 책임감이 없는 소녀들에게 아이를 맡겨야 하니 직장 여성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집 도우미는 머리가 총명하고 신실했다. 그녀는 아이에게 음계를 정확하게 가르쳐주었고 동요도 가르쳤으며, 책을 읽어주고, 푸성귀 다듬는 법도 가르쳤다. 가정교사 역할을 한 셈이다. 그녀는 아이들을 잘 다루었다. 부모를 잘 만났더라면 훌륭한 유치원 교사가 될 수 있었을 인품이다. 열여덟에 우리 집에 온 그녀에게 육 년이나 기른 우리 딸은 세상에서 만난 첫 아기여서, 자기 아이를 낳아도 이렇게 이쁠 것 같지 않다며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해주었다.


한번은 아버님이 오셔서 어떻게 남을 믿고 아이를 종일 맡기느냐고 걱정을 하셨다. 과자 같은 것도 제가 먹고 아이에게 안 줄 수도 있지 않느냐는 걱정은 형님이 하셨다. “혼자 다 먹지는 않을 거예요. 그 애 몫도 사놓으니까요” 했더니 어른들이 조그만 여자가 통도 크다며 웃으시더란다. 세 아이를 남의 손에서 기른 내 경험에 따르면, 세상에는 갓난아기를 해치는 여자는 드문 것 같다. 모든 여자에게는 갓 태어난 생명에 대한 모성이 준비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자기가 아기 때부터 기른 아기는 누구나 사랑해주어서, 떠날 때는 둘 다 울면서 헤어졌다.


큰 아이를 기를 때의 도우미와 나는 호흡이 잘 맞았다. 그녀가 부지런하고 유능해서 내가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나서 가장 많은 신세를 진 사람이 그녀여서 우리는 지금도 서로 연락을 하며 형제처럼 지낸다.


하지만 도우미하고 아이가 아무리 친해도 문제는 남아 있다. 도우미는 엄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첫아이는 다섯 살에 아우를 보아서 혼자 자란 기간이 길었다. 그래서 엄마에 대한 집착도 컸다. 내가 집에 있어도 곧잘 나가 놀던 아이가, 이상하게도 내가 숙제를 하려고 하면, 갑자기 엄마와 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이는 엄마가 딴 짓을 하려고 자기를 밀어내는 낌새를 귀신같이 알아챈다. 그러면 불안해지니까 엄마에게 엉겨 붙고 싶어지는 것이다. “조금만 놀다 오면 종일 같이 놀아줄게” 하며 사정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아이는 화가 나서 문 앞에서 “엄마 숙제 하지 마!”하면서 울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이웃 사람들에게 숙제하는 엄마라는 사실이 들통이 났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지 말라고 매달리고, 숙제 하지 말라고 떼를 쓰는 아이를 기르며, 공부도 하고 일도 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선택을 요구한다. 그건 아이에게 죄스러운 일이기도 해서, 일하며 공부하는 여자는 항상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요즘 같은 유아 학교가 없을 때여서 유치원에 갈 때까지 집에 아이들을 데리고 있어야 했으니 가정에서 양육 기간이 길었다. 1950년대의 김지영들은 그런 짐을 지면서 살았다.


하지만 한강로에 살던 시기는 결혼 후 내가 맛본 처음이자 마지막인 안정기였다. 딸은 네 살이 되어 혼자도 잘 놀았고, 학교에서는 시간을 적게 맡았으며, 건강도 회복되어서 대학원과 직장을 병행할 수 있었다. 석사 과정을 끝내 논문만 쓰면 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갔다. 시댁을 도우면서도 저축을 할 여유가 조금씩 생기니 살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으로 절약해서 온전한 집으로 이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아이를 하나 더 낳아야 했기 때문이다.


뜨는 해밖에 볼 수 없는 어두운 집에서 우리는 5.16을 겪었고, 화폐개혁도 겪었지만, 첫 집은 첫아이 같아서 좋았던 일들만 생각난다. 한강로 2가 100번지. 번지수도 간결하고 이쁜 그 집을 우리는 본적지로 삼았다. 분가해서 따로 호적을 만든 것이다. 그 집에서 1961년 사월부터 만 이 년간 살았다. 우리의 이십 대의 마지막 세월들이다.



집6_신당동 304-194(1963년 4월~1967년 3월)

대궐 같은 집

신당동 집은 그때까지 우리가 산 집 중에서는 제일 근사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시골의 국민주택 수준을 넘지 못하는 낡은 적산가옥이었다. 적산가옥은 값이 쌌다. 처음에는 소유권이 확실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마루방을 사이에 두지 않고 침실이 맞붙어 있는 구조여서, 대가족이 사는 한국인에게는 맞지 않아 후일에도 인기가 적었다. 집이 낡은데다가 대부분이 교통이 불편한 사대문 밖에 있는 것도 반갑지 않은 조건이어서 가격이 파격적으로 쌌던 것이다.


우리 새집은 그런 적산가옥인 데다가 대지가 사십팔 평이고 건평은 이십사 평에 불과했다. 부속 건물까지 합쳐도 이십팔 평밖에 되지 않아서, 어느 모로 보아도 호화 주택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집이 문단에서 화제가 되었다. 이어령이 베스트셀러를 내서 대궐 같은 집을 샀다고 소문이 난 것이다. 그건 틀린 말이다. 그의 첫 베스트셀러였던 [흙속에 저 바람 속에]는 우리가 한강로에서 살 때 연재가 시작되었지만(1962년 팔월) 끝난 것은 이사 간 지 한참 후였고, 책이 나온 것은 그해인 1963년 십이월이었다. 우리가 이사 간 지 팔 개월 뒤에야 나온 것이다. 젊은 작가가 대중소설도 아닌 에세이집 인세로 대궐 같은 집을 샀다면, 그건 문단을 위해서 경하할 일이지만, 인세로 집을 샀다는 말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호화 주택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십사 평짜리 낡은 호화주택은 없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사 년이 된 맞벌이 부부가 국민 주택 수준의 집을 마련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는 것은 그 무렵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때는 온 국민이 모두 가난한, 절대빈곤의 시기였고 그중에서도 문인들은 더 가난했다. 직장을 구하기 어려워서 대부분의 문인들이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용 집필실이 있는 작가들이 많은 요즘 문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처절한 빈곤이었다. 글을 쓰라고 제공하는 작가의 집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던 시기의 이야기다. 그때 우리나라에는 아직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개념도 없었고, 어쩌다가 글을 써도 원고료를 못 주는 매체가 많았다. 1963년은 아직 1970년대가 아니어서 ‘조국의 근대화’는 시발점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 집이 대궐같이 보인 것은 그런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된 일종의 착시현상이었을 것이다.


사 년 후에 우리가 막상 큰 집을 샀을 때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신당동 집보다 두 배나 큰 성북동 집을 샀던 1967년에도 이어령 씨는 계속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래서 우리는 소문처럼 인세로 큰 집을 성북동에 샀는데, 그때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사 년 동안에 집이 있는 문인이 늘어날 정도로 우리나라의 경제가 고도로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과 몇 년 동안에 우리나라의 GNP는 엄청나게 뛰어올랐던 것이다.



집7_ 성북동 1가의 이층집

‘봉사와 질서’

성북동에 이사 간 지 이틀 만에 국민학교 2학년이 된 딸아이는 더 멀어진 학교에 가기 위해 외할머니를 따라 전차 정거장까지 걸어갔다. 돌아올 때는 그 동네에 사는 같은 반 남자애가 동행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넘어도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아이 집에 전화를 거니까 그 애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큰일 났다. 학교에서는 제때에 갔다고 하니 아이들이 실종된 것이다.


도우미 처녀에게 아이를 업혀서 동네를 한 바퀴 돌게 하고, 나는 삼선교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니 집에는 다섯 살짜리 둘째만 남게 되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집에 누가 남아 전화를 받아야 연락이 되기 때문에 아이를 혼자 두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전화 심부름을 곧잘 하던 아이는, 집을 혼자 볼 수 있느냐고 물으니까 문제없다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어른 대접을 받는 것 같아 신이 났던 모양이다. 전화를 받아 정확하게 전하고 누가 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있으면, 곧 언니야가 올 것이니 걱정 말라고 일러놓고, 아빠한테 파출소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삼선교를 향해 뛰어 내려가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넓은 천지 어디에 가서 아이를 찾아내느냔 말이다.


다행히도 얼마 있지 않아서 아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이가 돈암로 남쪽에 있는 삼선교 파출소에 있다고 했다. 달려가 보니 아이들은 순경과 이야기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처음 보는 파출소 안이 신기해서 기기의 기능 같은 것을 열심히 묻고 있었다. 데리고 오면서 길을 잃은 이유를 물었다. 아침에 외할머니가 집 아래에 있는 성북파출소에 써 있는 ‘봉사와 질서’라는 글씨를 가리키면서, 올 때는 길 건너에 있는 ‘봉사와 질서’만 찾으면 경신학교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고 했다는 것이다. 천하에 못하는 일이 없던 우리 어머니가, 그런 현판이 거기에만 있는 줄 아는 시골 할머니 같은 짓을 한 게 신기해서 나는 쓴웃음을 웃었다.


집에 두고 온 꼬마가 걱정이 돼서 헐레벌떡 언덕을 올라와 보니, 우리 집 대문 앞에 경신학교 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전화를 받아 잘 전해주던 아이가 시간이 지나니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나 보다. 엄마가 문 밖에 나가면 안 된댔으니까 나가지는 못하고, 아니는 문간에 서서 지나가는 형아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집에 혼자 있는데 무서워 죽겠으니 엄마 올 때까지만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아이 엄마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한없이 기다려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섯 살짜리를 혼자 두고 가는 것도 못할 일이어서, 학생들이 아이 주변을 둘러싸고 의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의 사건은 그렇게 쉽사리 마무리되었다. ‘봉사와 질서’가 한곳에만 있는 줄 알고 손녀에게 길을 잘못 가르쳤던 어머니는 반세기 전에 돌아가셨고, ‘봉사와 질서’가 너무 많아서 길을 잃었던 딸도 세상에서 사라진 지 십년이 지났다. 성북동 집과 우리 사이에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집8_평창동 이야기(1974년 12월~)

너와 나의 쉼터

1974년 평창동에 정착한 후 우리는 다시는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중간에 재건축을 하기 위해 잠시 옮겼을 뿐 사십 칠년간 같은 주소에서 살고 있다. 평창동 499-3번지. 지금은 평창30길 81번지다. 거기 새로 지은 집이 우리의 마지막 집이다. 박물관을 지으면서 우리의 주거 공간이 삼십오 평으로 줄어들었다. 박물관 위주로 공간을 분할하니 집은 좁아진 것뿐 아니라 미워졌다. 집은 기차간처럼 남북으로 긴 공간이 되어서 공간 배치가 엉망이다.


지하의 두 층은 박물관에 기증하고 2016년에 문학관을 법인으로 만들었다. 작년이 개관한지 이십 주년이 되는 해였다.


대학 때 외국어 교재에 자기가 만약 어른이 되어 넓은 정원이 있는 집을 가지게 되면 그곳을 개방하여 사람들과 함께 즐기겠다는 내용의 짧은 글이 있었다. 허물기 전의 평창동 옛집에는 내가 열심히 가꾼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대지가 이백 평이니 백 평이 넘는 잔디밭이 있었던 것이다. 잔디밭 가장자리에 꽃들이 항상 피어 있었다. 아침마다 내가 묵은 잎을 따주어서 항상 정결한 정원이었다. 앞마당의 현관 앞에는 집 지을 때 일꾼들이 심어주고 간 목련나무와 신구농장에서 신축 축하로 기증해준 큰 백일홍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해마다 키를 잘라주었더니 나무들은 브로콜리처럼 옆으로 퍼져가면서 봄과 여름에 풍성한 꽃대궐을 만들었다.


우리 집 옛 정원에는 나무로 만든 오래된 마차가 잔디밭에 잘 어울려서 사람들이 그 위에 앉아 노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그 정원에서 아이들이 연주하는 음악도 들었고 여름에는 돗자리를 깔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1981년에 딸의 결혼사진을 그 마당에서 찍었다. 롱 테이크로 찍어놓으니 잔디밭이 엄청 큰 것처럼 보여서, 미국에 있는 그 애의 클래스메이트들이 우리 집을 장원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사람도 정원도 그때가 정점이었던 것 같다. 십사 년 동안 그 정원을 거쳐 간 관람객이 많다. 애초에 여기 문학관을 지을 예정이었다면, 터를 좀 더 넓게 잡았을 걸 하는 사치한 후회도 해본다. 좀 더 넉넉한 정원을 문학관 관람객들에게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깊은 산속 같은 기적적인 동네 평창동에 나는 항상 감사한다. 늙어서 나다니기가 어려워지니까 되도록 이곳에 머물면서 낮에는 원고의 먼지를 털고 밤에는 글을 쓰며, 나날이 줄어드는 여생을 누리고 있다. 김남조 선생이 최근에 쓴 시구에 자연이 아름다운 것이 “내 복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평창동의 산들을 보면서 그 말을 음미한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문학을 생각하는 장소를 마련하게 해준 것은, 신이 우리와 영인문학관 가족들에게 허락한 특별한 축복이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반세기가 가까워온다. 이어령 씨의 장엄한 반세기가 평창동 499-3에 담겨 있다. 머지않아 그이와 나는 쓰던 글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사는 일에서 손을 놓을 것이다. 신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이 집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평창동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우니 어느 철에 가도 무방하지만, 이왕이면 송홧가루가 시폰숄처럼 공중에서 하느작거리는 계절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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