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석 위의 열흘

   
최예신
ǻ
마인드빌딩
   
16000
2022�� 09��



책 소개


나의 쓸모를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이 책의 저자는 사회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겉보기엔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까지 올라갔으나, 생각하던 위치에 올라가고 나니 정작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스스로 질문한다. 내가 원하는 게 이것인가? 변하지 않는 가치는 없는가? 

사회가 요구하는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게 행복과 멀리 떨어져 있는 가치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어쩌면 ‘사회가 요구하는’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게 우리를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아닌, 남이 나에게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는 삶을 살다 보니 우리는 결과를 위한 과정에서 애를 쓰며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를 쓰며 힘들이지 않고 ‘중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인생의 기준부터 뿌리째 뽑아 다시 세워야 한다. 오로지 ‘나’에 초점을 맞추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우선으로 하여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과정까지 행복한, 진정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 저자 최예신
자유로운 삶을 찾는 사람. 누가 자유로운 삶을 사는지 궁금했다. 대기업 임원으로 생활하며 자신을 잊고 살았다. 갑작스레 자리에서 내려온 후에야 답을 찾아 나섰다. 열흘 동안의 위대한 침묵 속에서 명상을 하며 자유로운 삶에 대한 답을 얻었다.

지금은 그 답이 맞는지 삶에 적용하며 확인하는 중이다. 작가, 감정코치, 스타트업의 경영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명상심리상담을 공부하고 있다. 실험은 계속될 것이며 다양한 방법으로 결과를 알릴 계획이다. 그것이 나의 길이라 믿는다.

■ 차례
프롤로그

1. 도착
1.1 각양각색
1.2 노을에 빠져
1.3 명상을 접하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2. 첫째 날
2.1 시작의 종소리
2.2 더디고 빠른
2.3 호흡의 본질
명상은 일상에서 도망치는 행위인가?

3. 둘째 날
3.1 마음과 생각
3.2 바다와 파도
3.3 야생 코끼리
명상이란 생각하는 일인가?

4. 셋째 날
4.1 들숨과 날숨
4.2 어느 날의 툇마루
4.3 고름 덩어리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

5. 넷째 날
5.1 7센티
5.2 옥상 칼싸움 사건
5.3 어떤 틀
명상 중에 호흡이 거슬린다면

6. 다섯째 날
6.1 나물 반찬
6.2 춤을 추듯
6.3 한 톨의 찌꺼기
명상, 잘하고 있는 걸까?

7. 여섯째 날
7.1 면담
7.2 삶이 데려온 곳
7.3 근원
알아차린다는 말

8. 일곱째 날
8.1 300보 마당
8.2 미세한 감각
8.3 좋은 삶
명상은 수면과 같은 것인가?

9. 여덟째 날
9.1 고양이의 영토
9.2 저마다의 십자가
9.3 위대한 침묵의 밤
명상으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10. 아홉째 날
10.1 6과 46
10.2 반성문
10.3 미네르바의 올빼미
반응하지 않기

11. 열흘째 날
11.1 나를 위한 방석
11.2 마지막 저녁
11.3 언제나 둥근 달
좋아하는 일, 명상으로 찾을 수 있을까?

 




방석 위의 열흘


당시 내 삶은 겉으로 보기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니, 다른 이들이 보기엔 아주 잘나갔다. 일, 엄청나게 열심히 했다. 술, 엄청나게 열심히 마셨다. 인정, 좋은 눈치와 강한 추진력으로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잔뜩 받았다. 진급, 당연히 빨랐다. 날 부러워하는 사람이 가득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한숨이 잦아졌다. 알코올 중독자처럼 술을 마셨고 손을 떨었다. 담배와 커피를 달고 살았다. 술과 담배, 늦은 퇴근만 해도 나쁜데 운동도 안 했다. 술, 담배, 불규칙한 생활 때문에 생긴 고지혈증은 급기야 당뇨로 발전했다. 일상적으로 어지럼증을 느꼈으며, 또 이유 없이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런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하지 않았다. 늘 같은 생활을 반복했으며, 원치 않는 일을 의무감 때문에 꾸역꾸역 했다. 늘 피곤했으며 우울했다. 겉모습은 말짱해 보였다. 하지만 내 영혼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자존감마저 영혼의 크기만큼 작아졌을 무렵,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마음수련’이라는 간판을 봤다. 마음이라는 것이 수련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반짝이는 간판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나를 당긴다고 했던가? 의미 없는 생활에서 의미를 찾던 나는 마음에 관한 책들을 접하기 시작했다. 마음과 치유에 대한 책이 눈에 들어왔고, 급기야 손도 안 대던 책을 출퇴근 지하철에서 읽기 시작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던 중에, ‘고엔카의 위빠사나 명상’이라는 책을 읽었다. 솔직히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려웠고, 재미가 없었고, 하품이 나왔고, 당장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읽었다. 책 끝머리에는 고엔카의 위빠사나를 수행할 수 있는 담마코리아 명상 센터의 홈페이지 주소와 운영 규칙이 적혀 있었다. 센터의 명상 코스에 들어가면 열흘 동안 말없이 명상만 해야 하며, 기부로 운영되고, 한 번 들어가면 열흘 동안 절대 나오지 못한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책을 덮어버렸다.


매년 11월이면 회사의 임원 인사에 대한 무수한 소문들이 나돌았다. 내가 임원이 되기 전에는 그런 가십거리에 끼어들어 누가 잘리고, 진급한다는 등의 소문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19년 11월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해 갑자기 임원이 되면서 혜성처럼 소문에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안했다. 초짜 임원은 무난하게 한 해는 더 가는 위치였다. 처음이기에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역량을 다 보여주기에 사실 짧았다. 그런데 불안했다. 불안이 씨가 된 건지, 예견을 한 건지, 나는 그해 11월에 보직 해임을 당했다.


처음 임원이 되었을 땐 아주 갑자기, 기대한 적 없는 임원이 되어 정신이 없었다. 겨우 정신을 좀 차릴 만할 때 갑자기 해임을 당해서 두 배로 정신이 빠져버렸다. 마치 직각으로 세워진 롤러코스터를 타고 올라각서 신나게 직각으로 하강한 기분이었다.


막상 해임 당하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하루에 일고여덟 개 회의를 쫓아다녔지만 이제 회의 따위는 없었다. 아무도 찾지 않았다.


오랜만에 할 일이 없었고, 시간이 많았고,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과 꼴도 보기 싫은 정치꾼들이 수시로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고, 잠은 오지 않았고, 눈은 충혈되었으며, 한숨이 길게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은 일은 그저 잠수를 타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전라북도 진안군의 담마 코리아 위빠사나 명상 센터에 들어갔다. 센터에 입소하려면 6개월은 기다려야 했지만, 마침 취소한 사람이 있었다.



첫째 날

시작의 종소리

4시 30분, 새벽 명상을 위해 담마홀에 들어갔다. 수행자 대부분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새벽 한기를 피하기 위해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방석 위에 앉았다. 곁눈질로 수행자들을 보며 그들처럼 눈을 감았다.


지난밤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던 생각에 빠져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 어릴 때처럼 울타리를 뛰어넘는 양도 세어보았지만 허사였다. 내게 모멸감을 주었던 빌어먹을 높은 분들과 말도 안 되는 상황과 사건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수천 마리 양을 세도 잠들지 못하자 천장의 구멍 난 텍스를 세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이어지는 불면증은 여전했다. 이곳에 왔다고 마법처럼 잠이 오지는 않았다. 쉴 수 없는 내 몸을 영혼이 떠나기라도 하면 어쩌나 두려움에 빠졌다. 밤새도록 비몽사몽 헤맸다. 오히려 새벽 명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반가웠다.


잠을 설친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이 여기저기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목이 결렸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렸다. 발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왼쪽 고관절이 묵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른쪽 어깨가 올라갔다. 어디선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위대한 침묵도 신음을 막지는 못했다. 화답하듯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신음이 홀 안을 가득 메울 즈음 새벽 명상이 끝났다. 어느새 두 시간이 지나버렸다.


8시. 위대한 침묵을 지키며 간소한 나물 반찬과 밥을 먹은 후였다. 포만감에 만족하며 침대 위에서 잠에 빠져들 무렵 아침 명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비몽사몽 멍한 채로 자리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고엔카 선생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오늘 명상은 호흡에 주목합니다. 여러분은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코에 집중해야 합니다. 호흡을 조절하지 않습니다. 어떤 낱말이나 상상의 모습도 떠올리면 안 됩니다. 오로지 호흡만 관찰합니다. 이 수행법을 아나빠나라고 합니다.


마음의 집중이 이 수행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낱말이나 상상의 모습을 떠올리는 방법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집중은 더 높은 단계로 이끌기 위해 도움이 되는 단계일 뿐입니다. 마음을 정화하고 번뇌와 내면의 부정성을 제거하여 고통으로부터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 이 수행의 목적입니다.


호흡을 관찰하다 보면, 마음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앞뒤 순서 없이 떠오르는 생각에 완전히 빠져버리면, 호흡을 잊습니다. 그러다 문득 호흡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럴 때는 조용히 다시 호흡에 집중하면 됩니다.


고엔카 선생의 말씀이 끝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사람들은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었다. 나는 코에 주의를 기울이며 들숨과 날숨을 느꼈다. 하나, 둘, 셋, 넷. 차가운 공기가 코를 통해 들어온 후 가슴과 배가 순서대로 부풀었다.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데워진 공기가 코를 통해 나가고 배와 가슴이 가라앉았다.


코에 집중하며 계속 호흡을 했다. 하나, 둘, 셋, 네... 고개가 툭 떨어졌다. 이게 아닌데. 머리를 흔들며 다시 호흡에 집중했지만 또 고개를 꾸벅거렸다. 순간순간 빠지는 잠이 달콤했다. 하지만 잠들지 않으려 오른쪽 다리를 슬쩍 내밀어, 반가부좌를 만들었다. 등을 쭉 펴고, 오른쪽 어깨를 올리며 목을 오른쪽으로 쭉, 왼쪽으로 쭈우욱 밀었다. 잠을 깨고 호흡에 집중했다. 하나, 둘, 셋, 넬. 숨을 들이쉬었다. 다섯, 여섯, 일고...노력이 무색하게도 다시 고개가 떨어졌다.


얼마나 졸았을까. 수행법사가 휴식 시간을 알렸다.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양팔을 뒤로 젖혀 기지개를 켰다. 굳었던 몸에 겨우 피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간밤의 피곤이 다 풀린 듯 개운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개운함이었다.



둘째 날

명상이란 생각하는 일인가?

명상할 때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 내가 명상에 대해서 잘 모를 때 가졌던 궁금증이다. 아마도 명상을 잘 모르는 이들이라면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앉아서 뭘 하는 거지? 비생산적이야. 지겹지는 않나?’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생각과 감정, 감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


이 질문에 대한 수많은 명상가의 답이다. 솔직히 말해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는 ‘선문답인가?’ 하고 생각했다. 감각은 그렇다고 쳐도 도대체 생각이라는 걸 어떻게 안 할 수가 있으며, 어떻게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명상을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훈련’정도로 이해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상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아니라, ‘긍정과 부정에서 떨어져서 사물 혹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어렵다. 대부분 ‘내 생각, 내 감정’을 ‘나’라고 여긴다. ‘내 생각’을 나라고 생각하니,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보면 견디질 못한다. 굴복시키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내가 아니다. ‘내 생각’이라는 말은 ‘내가 가진 생각’ 혹은 ‘내가 하는 생각’의 축약일 뿐이다. 사람은 오만 가지 생각을 품고 있는데, 그렇게 많은 생각을 자신과 동일하게 여긴다면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맛있는 빵 하나를 두고도 머릿속에서는 맛있다고 하는 목소리와 너무 달다는 목소리가 싸우지 않던가.


내가 하는 생각, 나에게 올라오는 감정이 내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생각은 끊임없이 올라온다.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 아무 제약도 없이 기억을 헤집고 다니며 현재와 미래를 마음대로 재단한다. 알아차려야 한다. 내 머릿속에 지금 어떤 생각이 흘러 다니는지를 알아차릴 때 생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게 가능하다.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콧구멍으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고기가 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아. 알아차림의 능력을 키우려면 호흡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는 게 좋다. 끊임없이 숨을 쉬어야 하니까. 가장 연습하기 좋은 대상이다. 지금 한 번 해보자.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호흡을 느껴보자. 호흡을 알아차리고 미세한 감각을 느껴보자. 이것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생각과 감정 또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올라올 것이라 믿는다.



넷째 날

어떤 틀

가끔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칭찬을 하기도 하고 흠을 잡기도 한다. 말하는 이는 그저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외모를 평가했겠지만, 만약 듣는 사람이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면 화내며 과격하게 반응할 수도 있다. 그 반응은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들기도 하고 싸움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싸움으로 발전하면 인생의 사건이 되어서 마음속에 앙금이 가득한 기억으로 남는다. 이 기억은 내면에 잠들어 있지만, 미래 언젠가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면 과거의 기억과 함께 정말 빠른 속도로 깨어난다. 그리고 문제를 더 불거지게 만든다.


하지만 무의식 상태에서 반응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고엔카 선생이 자문자답했다. 무의식에 따라 습관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아무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으로 감각을 알아차리고 반응하지 않는 훈련에 정진하면 그 사이클을 깰 수 있다. 불쾌한 감각에 무의식적인 반응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감각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고 선생이 말했다.


삶의 모든 순간에 맑은 의식으로 존재하기 위한,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으로 사건‧사고를 만들어내지 않기 위한 기술이 위빠사나였다. 지금 여기, 이곳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이었다.


내가 가진 틀은 무엇일까? 선생의 법문을 들으며 나의 틀을 생각했다. 혹시 나도 내가 만든 틀 안에서 스스로 갇혀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생은 사람 행동의 95%는 무의식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의식적 차원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면 무의식적인 반응으로 하는 행동도 없앨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위빠사나 명상은 의식적 차원에서 알아차리기 연습을 통해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허물 수 있다고 했다.



다섯째 날

나물 반찬

새벽 명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지난밤처럼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몸을 일으켜 베개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간단히 세면을 하고 명상홀에서 마실 따뜻한 물을 받았다. 평소보다 빨리 명상홀에 들어갔지만 역시나 많은 사람이 그들만의 방석 위에서 명상에 빠져 있었다.


두툼하게 깔린 방석 밑으로 방석을 하나 더 넣었다. 어제부터 엉덩이에 방석을 접어 넣은 사람들을 보고 따라 했다. 엉덩이가 올라가자 허리가 곧게 펴지고 다리 저림이 덜했다. 눈을 감았다. 호흡에 집중했다. 몸속에서 데워진 공기가 콧구멍에 부딪히며 밖으로 나갔다. 미세한 바람이 인중을 간질였다. 호흡이 점점 더 느려졌다. 또 깊어졌다.


기분이 좋았다. 오늘 점심은 뭘까?


“야야, 밥 먹고 자라. 밥 먹고 자.”


유난히 햇빛이 좋던 어느 날, 낮잠에 빠진 어린 나를 깨우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구멍으로 밥이 한 숟갈 쑥 들어왔고 뭔지도 모르고 입을 오물거리며 먹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바라보던, 장난스럽게 웃고 있던, 사랑이 묻어나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의 얼굴. 사랑이 묻어나던 엄마의 목소리. 엄마가 해주던 나물 반찬.


유난히 햇빛이 좋은 날이었다. 센터의 정원이 온통 온기로 가득한 날이었다.



열흘째 날

나를 위한 방석

열흘째 새벽 종소리가 울렸다. 마지막 날, 절대 흐르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이 어느새 흘러버렸다.


열흘 동안 몸에 익은 것인지, 아나빠나부터 위빠사나까지 자연스럽게 명상을 진행했다. 물론 한 시간 반이 넘게 앉아 명상하는 것은 열흘이 지난 후에도 어려웠다. 새벽 명상을 마칠 무렵에는 통증이 온몸을 잠식했으며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도 익숙해져서 처음처럼 죽을 맛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오히려 좀 더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으니 말이다. 평안한 마음으로 몸의 미세하거나 거친 감각을 관찰하는 것이 즐거웠다.


식당 안의 분위기가 들떠 있었다. 마지막 날이었고, 내일이면 집에 갈 수 있었다. 또 점심 이후에는 말을 할 수 있었으니 분위기가 들뜰 수밖에 없었다. 나도 분위기에 동화가 되었다. 기분이 좋았다.


종소리가 울리자 명상홀로 이동했다.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방석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나도 두툼한 방석 위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콧구멍을 통해 들어온 숨이 가슴을 타고 단전을 지나 더 깊은 아래쪽까지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막힘이 없는 호흡. 아무렇지도 않은, 무심한 평안함이 밀려왔다.


나를 위한 방석이 있다는 것. 눈을 감으면 한없이 깊은 내면으로 평안하게 빠져들 수 있다는 것. 너무나 고마웠다. 너무나 감사했다. 무한한 감사와 행복, 자애의 마음이 내면 어디선가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