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가게

   
장 퇼레
ǻ
열림원
   
14000
2022�� 12��



■ 책 소개


“실패한 삶을 사셨습니까? 저희 ‘자살가게’로 오십시오!”
장 퇼레가 남긴 불후의 소설

프랑스의 타고난 이야기꾼, 파격적 블랙코미디의 대가로 불리는 장 퇼레. 올해 10월,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작가가 남긴 불후의 소설 『자살가게』가 재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섬뜩한 제목과 달리 암울한 현실에도 여전히 반짝이는 삶의 조각들을 우리 앞에 넌지시 내놓는다. 가문 대대로 자살 용품을 판매해온 상점. 목매달기용 밧줄, 동맥절단용 면도날, 할복자살용 단도, 독 묻은 사과와 사탕, 투신 자살을 위한 콘크리트 블록…… 가게에는 이른바 죽음의 상품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손님들의 슬픔과 우울을 먹고 승승장구해온 얄궂은 가업은 어느 날 ‘삶의 기쁨’이라는 끔찍한 적과 마주한다. 성병으로 죽으려는 손님을 위해 제작된 구멍 난 콘돔을 시험하다 원치 않게 가졌던 막내아들 ‘알랑’. 날 때부터 웃는 얼굴이던 알랑은 삶을 사랑하고, 그의 전염성 강한 행복 바이러스는 ‘자살가게’의 전통을 뿌리째 뒤흔든다. 가족은 과연 자살가게의 암울한 미래를 지켜낼 수 있을까?

■ 저자 장 퇼레
1953년 생로에서 태어났다. 시립학교에서 자동차기계학부 3학년을 졸업할 예정이었던 그는 선생님의 격려로 그림학교 콩쿠르에 참가해 현재의 막시밀리엉 복스에 입학했다. 그는 만화, 영화, 방송 등 여러 분야에 종사했지만 장르를 가리지 않는 전방위 작가로 글쓰기를 가장 좋아했다. 1991년 출간한 『랭보를 위한 무지개』가 1996년 영화화되고, 이후 『오랜 고통』 『중력의 법칙』 『오 베를렌』 『몽테스팡 수난기』 『천둥꽃』 등 다수의 소설을 발표하면서 독자와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그중 2006년 출간한 『나, 프랑수아 비용』이 전기소설상을 수상했고, 2007년에는 『달링』(1998)이, 2012년에는 『자살가게』(2007)가 작품성을 인정받아 영화로 제작되었다. 2022년 10월 18일 6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역자 성귀수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시인으로 등단해 시집 『정신의 무거운 실험과 무한히 가벼운 실험정신』과 내면일기 『숭고한 노이로제』를 펴냈다. 옮긴 책으로는 아폴리네르 시집 『내 사랑의 그림자』, 소설 『모차르트』(전4권) 『오페라의 유령』 『팡토마스』(전5권) 『적의 화장법』 『불가능』 『내 이름은 꾸제트』 『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전10권) 『물의 살인』(전2권) ‘매그레 시리즈’(공역, 전19권), 인문서 『힘이 정의다』 『침묵의 기술』 『노예국가』 등 백여 권이 있다.

■ 차례
자살가게
옮긴이의 글

 




자살가게


이곳은 장밋빛 화사한 햇살 한 올 스며들지 않는 조그만 가게. 창이라곤 출입문 바로 왼쪽에 하나뿐인데, 그나마 깔때기 모양의 종이봉투들과 판지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어 가려진 상태고 빗장에는 석판이 한 장 매달려 있다.


“알랑!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니? 우리 가게에서 나가는 사람들한테는 ‘안녕히 가세요’라는 평범한 인사는 하는 게 아니야. ‘명복을 빕니다’라고 아예 작별 인사를 해야지. 대체 언제가 돼야 알아들을래?”


뤼크레스 튀바슈는 웬 종이를 한 장 움켜쥔 두 손을 뒷짐 진 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있다. 부아를 참지 못해 부들부들 떠는 손안에서 반쯤 구겨진 종이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반바지 차림으로 코앞에 서서 해맑은 얼굴로 올려다보는 막내를 그녀는 엄한 표정으로 굽어보며 온갖 설교를 늘어놓고 있다.


“그리고 제발 좀 웃지 말라구! 손님들 죄다 도망가게 만들고 싶어서 그러냐? 그렇게 똥그란 눈알 굴려가며 알랑대면서 사람들 맞이하는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냐구! 손님들이 네 웃는 얼굴이나 보려고 여기 오는 줄 아니?”


“그리고 너, 유치원에서 가져온 이 그림은 또 뭐냐? 길이 꼬불꼬불 가 닿는 곳에 창문하고 문하고 활짝 열린 집이 한 채 있고 그 뒤로는 화사한 햇살이 내리비치는 푸른 하늘이라니! 네 녀석 풍경 속에는 공해물질도 구름도 한 점 없단 말이냐? 우리 머리 위에 아시아의 병균 섞인 똥이나 잔뜩 싸대는 철새들은 다 어디 간 거야? 방사선이랄지 테러리스트들이 터뜨리는 폭탄들은 다 어디 있는 거냐구! 그림이 완전 비현실적이지 않니! 뱅상이나 마릴린이 네 나이 때 그린 그림들을 좀 본받으란 말이다!”


깡마른 체격의 열다섯 살 먹은 뱅상은 머리를 온통 붕대로 친친 감은 채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입술을 깨물고, 열두 살에 약간 통통한 몸집의 마릴린은 등받이 없는 걸상 위에 맥없는 몸뚱이를 잔뜩 웅크리고 앉아 세상 집어삼킬 듯 하품이다.


***


“네, 자살가게입니다!”


시뻘건 핏빛 점퍼를 걸친 튀바슈 부인은 전화를 받자마자 잠시 끊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불안과 근심으로 얼굴이 말이 아닌 한 여자 손님에게 부지런히 거스름돈을 쥐어준다. 잠시 후 손님은 환경친화적 분해용지로 된 쇼핑백을 손에 들고 밖으로 나간다. 한쪽에는 ‘자살가게’, 다른 쪽에는 ‘실패한 삶을 사셨습니까? 저희 가게로 오십시오. 당신의 죽음만큼은 성공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라는 문안이 새겨진 쇼핑백이다.


뤼크레스는 손님의 등 뒤에 대고 “명복을 빕니다, 마담!” 외치고는 수화기에 대고 통화를 계속한다.


“장례식에 우릴 초대하시겠다구요? 어머, 자상도 하셔라! 근데 언제 식을 치르실 건가요? 아, 벌써 목에 밧줄을 거신 상태라구요? 그럼, 가만있자…… 오늘이 화요일, 내일이 수요일이니까…… 그럼 장례식은 목요일에 치르겠군요! 잠깐만 끊지 마세요, 남편한테 물어볼게요…….”


“얘야, 마릴린, 이리 좀 와봐라.”


마릴린 튀바슈는 이제 열일곱 살이다. 그녀는 깃털 총채를 손에 쥐고서 동맥절단용 면도날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선반 가장자리를 건성으로 털고 있다. 면도날 중 일부는 녹이 슨 상태이고 그 옆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적혀 있다.


충분할 정도로 깊이 자르지 않으면 파상풍의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 ‘트리스탄과 이졸데’ 꽃집에 가서 장례용 화환 작은 걸로 하나만 사오거라. 어서! 리본에는 이렇게 써달라고 해. ‘무슈 창 고객님의 명복을 빕니다. 자살가게.”


***


“오, 천만에요! 이래 봬도 우린 살인은 안 합니다. 아시다시피 그건 금지된 일이에요. 우린 다만 필요한 것만 제공할 뿐, 나머지는 사람들이 알아서 헤쳐나가는 거죠. 그건 어쨌든 각자의 사정이니까요. 우린 그저 양질의 상품을 팔아서 그들을 돕는 일에 종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면서 손님을 금전등록기 쪽으로 은근슬쩍 유도한다.


“가만 보면 아마추어들이 너무 많아요…… 아시겠지만 15만 명이 자살 시도를 하는 가운데 무려 13만 8천 명이 실패를 하고 만답니다. 그 사람들 대부분이 휠체어 신세를 진다든지 평생을 불구로 살게 되는 셈이죠. 처음부터 우리한테 도움을 청했으면…… 우리가 제공하는 자살은 철저하게 성공이 보장된 것입니다. 만약 죽지 않는다면 전액 환불이니까요! 자자, 손님 같은 탄탄한 분이시라면 이번 구매에 대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저 깊게 심호흡 한번 하고 단호히 뛰어드세요! 제가 늘 하는 말이지만, 제아무리 잊을 수 없는 혹독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습니까!”


***


“사실 말입니다, 우린 셋째 아이를 원하지 않았어요. 그 아이는 구멍 난 콘돔을 시험해보다가 태어난 거라구요. 아시죠 왜, 섹스를 통해 감염되어 죽고 싶은 사람들에게 파는 물건 있지 않습니까!”


뤼크레스는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어디 있냐는 듯 고개를 쳐든다.


“딱 한 번 시험해본다는 것이 그만…… 이렇게 재수 없을 수가 있냔 말입니다!”


“아, 그거요! 저희 ’죽어도 상관 안 해‘ 상사의 콘돔은 무엇보다 구멍이 송송 뚫려 있다는 점을 자신 있게 보장하는 제품입니다. 우리를 확실하게 믿으셨어야죠.”


판매원의 대답에 뤼크레스는 할 말을 잃은 듯 탄식만 내뱉는다. 


순간 알랑이 가게 안으로 뛰어들며 정신없이 떠들어댄다.


“봉-주-르- 엄마! 봉-주-르- 아빠! 봉-주-르 무슈! (판매원 아저씨한테까지 아무 거리낌 없이 달려들어 볼에 뽀뽀를 한다) 보셨어요? 비가 와요! 아주 좋은 일이죠. 물이 부족하던 참인데 말예요!”


“그래 학교는 어땠니?”


엄마가 못마땅한 얼굴로 묻는다.


“아주 좋았어요. 음악시간 내내 내가 노랠 불러서 반 아이들을 죄다 웃게 만들었거든요.”


“보세요, 제가 뭐랬습니까…….”


튀바슈 부인이 돌아보며 하소연하자, 판매원은 방금 뽀뽀받은 볼을 훔치면서 말한다.


“그러게요, 만만한 경우는 아니로군요. 그래도 다른 두 아이들까지 저렇진 않겠죠?”


“물론이죠. 걔들이라면 손님을 보고도 그냥 한숨이나 쉬며 지나칠 거고, 어쩌다 옷깃을 스쳐도 실례한다는 말 한마디 없을 거예요. 맏이는 식욕이 너무 없는 게 탈이지만, 거의 항상 자기 방에 틀어박혀 우리에게 만족만을 준답니다. 우리 가엾은 마릴린은 이제 곧 열여덟 살인데, 자기 자신을 항상 못생기기고 쓸모없는 계집애라 생각하죠. 더위를 잘 타고 언제나 땀을 흘린답니다.”


***


“와, 이거 정말 맛이 끝내주네요, 엄마!”


뤼크레스는 눈을 하늘로 치뜨면서 다짜고짜 신경질이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이게 뭐가 맛있다는 거냐? 그냥 아무렇게나 만든 거란 말이다. 무작정 굽고 나서 유지에 생선을 싸는 것처럼 알루미늄 포일로 싸바른 거거든! 심지어 설탕 잔뜩 뿌리고 나서야 소금하고 후추를 뿌려야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


“아, 그랬구나……(알랑의 얼굴은 그럴수록 달아오르는 식욕으로 환해진다) 어쩐지 달콤한 캐러멜 맛이 살짝 난다 했어요! 굽고 나서 알루미늄 포일로 싸다니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그래야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말랑말랑하죠.”


그런데 꼭 발작을 일으키는 고흐 같은 표정으로 뱅상도 접시 쥔 손을 요리 쪽으로 쭉 내미는 게 아닌가! 아빠와 엄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멀뚱하니 쳐다본다. 이내 형에게 고기를 덜어주는 엄마를 보며 막내는 더더욱 좋아라 호들갑이다.


***


미시마와 뤼크레스는 아까부터 면도날 선반 앞에 나란히 팔짱을 끼고 서서, 어떻게든 여자 손님에게 가면을 팔아치우려고 애쓰는 아들을 말없이 지켜보는 중이다.


“웃어보세요! 그냥 모든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세요. 자, 어디 좀 보자구요. 어서 웃으시라니까요!”


“삶이란 있는 그대로의 삶 자체를 말하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이죠! 서툴거나 부족하면 서툴고 부족한 그대로 삶은 스스로 담당하는 몫이 있는 법입니다. 삶에 그 이상 지나친 것을 바라선 안 되는 거예요. 다들 그 이상을 바라기 때문에 삶을 말살하려 드는 겁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 모든 것을 좋은 면에서 받아들이는 편이 나아요. 목매달 밧줄이나 권총 따위는 여기 이곳에 맡겨두고 말이죠. 겁에 질리고 불안에 떨 때 밧줄이든 뭐든 목에 걸고 어디 한번 잡아당겨보세요.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다 의자에서 떨어져 무릎 깨지는 건 순간이죠. 무릎 아프지 않으세요?”


“아픈 데가 어디 한두 군덴가.”

“그래요, 근데 무릎은 어떠세요?”

“거긴, 글쎄……”

“그거 아주 잘됐군요! 그런 식으로 계속 사시는 거예요.”


“자, 이제 포장을 해드릴게요. 부디 최대한 신경 써주세요. 그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여자니까요.”


“저기요. 유리병에 든 사탕 하나 고르시죠.”


마지막으로 알랑이 빙그레 웃으며 권하자 여자 손님은 머뭇머뭇 묻는다.


“아, 그래……근데 설마 이 사탕에도 혹시?”

“오, 천만에요! 자, 그럼 무릎도 안 아픈 여인이여, 안녕히 가십시오!”


***


얼마나 지났을까,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가 텅 빈 가게가 적막 속에 다시 밤을 맞이한 시각, 튀바슈 부인은 알랑의 방에 와 있다. 그녀는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깊은 잠에 빠진 막내를 굽어본다.


알랑은 앙증맞은 코를 치켜올린 채 찬란한 낙원을 꿈꾸고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그는 권태의 사막에 자리 잡은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다. 푹신한 베개 깊숙이 머리를 묻은 채, 꿈속의 어느 한 이야기에 사로잡혀 헤매는 듯 연신 입술을 움직거린다. 달님처럼 부드럽고 긴 속눈썹을 내리깐 눈꺼풀 사이로 그의 내부에서는 그토록 시대착오적인 희망이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인간의 머리를 꿈으로 가득 채우는 이 어린 소년은 세상 만물을 기분 좋게 적시며 졸졸 흐르는 한 줄기 시냇물과도 같다. 그는 우리를 미증유의 신천지로 이끄는 저 아름다운 수평선과도 닮았다.


오늘 밤은 왠지 달님이 훨씬 더 느긋하게 꿈을 꾸는 듯하다. 튀바슈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알랑의 황금빛 곱슬머리를 살짝 쓰다듬는데, 아이 눈이 반짝 떠지면서 쌩끗 웃는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등을 돌리고 다시 잠에 빠져든다. 지금 알랑이 노니는 꿈속의 삶에는 분명 바이올린의 선율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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