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정혜진
ǻ
미래의창
   
14000
2022�� 09��



■ 책 소개


국선전담변호인, 빙산의 일각에서 풍경을 보다

“마음에 큰 병이 있는데도 수십 년 방치되고 치료받지 못해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들, 폭력이 일상인 환경을 견뎌내고 살아남아 폭력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미워했으면서도 어느새 자신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발견하는 한때 피해자였던 가해자들, 돈이 너무 궁한 나머지 앞뒤 가리지 못하고 대출이나 취업의 미끼를 덥석 물었다가 부지불식간에 엄청난 범죄 조직의 하수인이 되고 만 이들, 절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이를 지지해줄 사회 안전망이 없는 상황에 순간의 유혹 앞에서 번번이 무너져버리는 무력한 이들, 어리숙하고 모자란 탓에 ‘진짜 나쁜 놈들’에게 이름을 빌려줬다가 범죄자가 되고 자신도 모르는 빚까지 떠안는 이들···.”

국선전담변호사인 저자는 사건이 벌어진 지 3~4개월, 대개 6개월이나 1년 후, 어떤 경우는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이들의 사연을 듣는다. 성범죄 및 마약범죄 전담 재판부에 배정돼 매달 살피는 25건 내외의 형사 사건에는 범죄 자체만이 아니라 국선변호인을 만날 자격을 갖춘 취약 계층이 맞닥뜨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현실이 있었다. 그리고 저자는 사건을 적나라하게 분석할수록 이들의 사연은 개인의 잘못과 우리 사회의 문제가 만들어낸 잔혹한 현실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책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빙산에서 본 이 사소한 이야기도 분명 우리 사회의 모습이었다.”

■ 저자 정혜진
법학전문대학원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15년의 기자생활을 접고 대학원에 입학해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제1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서울고등법원 재판연구원을 거쳐 9년째 국선전담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세상에 들려지지 못한 사소하고 작은 이야기들을 법의 언어로 풀어쓰며 사람과 법을 공부하며 살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빙산의 일각에서 본 풍경

1장 그에게도 가족이 있다
- 각자의 시간
- 아이들의 편지
- 당당한 거짓말이 그리워질 때
- 미처 하지 못한 말
- 아버지와 아들

2장 그날 이후 삶이 바뀌었다
- 낙숫물이 바위를 뚫은 기적
- 이러려고 대한민국에 왔나
- 생과 사
- 장발장법, 그 뜻밖의 인연
- 어떤 소나기

3장 재범은 늪과 같아
- 예견된 조우
- 죄는 미워도 미워지지 않는 선수
- 중독의 굴레
- 나도 피해자라고요

4장 변론의 처음과 끝, 소통
- 그들의 변호인
- 뫼비우스의 띠
- 주제넘은 상담
- 좋은 국선, 나쁜 국선

5장 법과 사람 사이
- 무죄가 부끄러울 때
- 일명 자뻑 변론의 종말
- 돈과 국선의 상관관계
- 이웃집 아줌마의 가르침

에필로그 사소하고 조각난 이야기를 넘어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


그에게도 가족이 있다

각자의 시간

구치소 변호인 접견실에서 다시 만난 그는 왼손에 검은색 시계를 차고 있었다.


“변호사님, 시계도 못 보는 애가 영치금으로 시계를 샀다는디 거기서 시계가 왜 필요해유? 시계 사느라 영치금을 다 썼대유”라고 하소연하던 그의 어머니 전화를 받고 접견을 온 참이었다. 그동안은 늘 그의 부모와 함께 만났기에 그와 일대일로 대화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수용된 후 처음 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수용자용 하얀 고무신 위로 맨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추운데 왜 양말 안 신었어요?”


“양말이 없어요.”


표정 없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구치소에 들어가던 날 민원실에서 양말과 내의, 속옷을 두 벌씩 사서 넣어줬다는 이야기를 그의 어머니로부터 분명히 들었는데 말이다.


“지난번에 엄마가 양말이랑 내의 넣어줬죠?”


“아, 내의, 있어요.”


40대 중반의 덩치 좋은 남자가 스스럼없이 윗옷 수의를 펼쳐 내의를 보여준다. 그가 일곱 살 정도 지능을 가진 정신장애 환자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는 급히 눈을 아래로 내리고 괜히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양말은 같은 방 누군가에게 뺏긴 모양이다. 어리숙한 수용자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는 폐쇄병동에서 벌어진 사소한 싸움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가 과자를 먹는데 다른 환자가 뺏어 먹으려고 했고, 둘은 싸우다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가 일어나서 아직 바닥에 누워 있던 환자의 배를 걷어차고 과자를 지켜냈다. 그 환자는 심한 복통을 호소하다 이틀 만에 저세상으로 갔다. 얼마나 세게 찼던지 환자의 대장이 끊어졌고, 그 자리가 세균에 감염돼 급성 패혈증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는 폭행치사죄로 기소돼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이런 사건에서는 피해자 유가족에게 용서를 받는 이른바 ‘합의’가 가장 중요한 양형 사유가 된다. 그런데 피해자 유족 중에 연락이 닿는 사람이 전혀 없어 애초부터 합의가 불가능했다.


아직 경험이 별로 없는 얼치기 변호사였던 나는 선고 결과를 징역형의 집행유예로 예상했다. 사람이 죽긴 했지만, 피고인이 정신질환자이고 우발적 범행인 데다 무엇보다 합의할 유가족이 없는 사건이어서 ‘설마 실형이야 나오겠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징역 1년6월과 치료감호 명령을 선고받아 법정구속됐다. 나는 당황했지만 그의 부모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고, 변론을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미안한 마음에 다른 피고인을 접견하는 날, 이미 판결 선고까지 받은 그를 만나기 위해 변호인 접견을 신청했다. 그의 부모는 도시 중심부에서 좀 떨어진 작은 도시에 살았는데, 차도 없고 다리도 불편해 마음만큼 자주 아들을 보러 가지 못했다.


동갑내기, 그의 시간

시계를 왜 샀는지 그에게 물었다. 기초생활수급대상자인 그의 부모가 최소 한 달을 쓸 만큼 넣어준 영치금이었는데 시계를 사느라 일주일도 안 돼 다 써버리다니 황당한 노릇이었다.


“시간 알아야 해요.”


“시간 알아서 뭐 하게요?”


“언제 나갈지...시간 봐야...하니까.”


의미 없이 서류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순간 멈췄다. 일곱 살 정신연령이라고 해서 폐쇄병동에 있든 구금시설에 있든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자유를 갈구하는 마음은 여느 수감자와 똑같았다. 하지만 몇 시인지 안다고 출소할 날이 빨라질 리 없었다.


그가 시계를 읽을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지금이 몇 시인지 물었다. 접견실 벽시계를 보니 오후 1시 35분이었다. 손목시계를 보며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1시...1시...55분.”


“큰 바늘 한 칸에 5분씩이에요. 한 칸이면 5분, 두 칸이면 10분. 일곱 번째 칸에 바늘이 있죠? 그럼 몇 분이에요?”


그는 끝내 35분을 맞히지 못했다. 그가 일곱 살 수준의 지능에 머물게 된 것은 스무 살 때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면서부터다. 밤에 외진 곳에서 사고를 당해 늦게 발견됐다는데 이미 엄청나게 많은 피가 뇌 안에서 응고돼버려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유순했던 그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불같이 화를 냈고, 그렇게 잘 모시던 부모에까지 주먹을 휘둘렀다. 그 후 그는 정신병원 입, 퇴원을 반복했다. 병명은 기질성 뇌장애.


그는 나와 동갑이다. 내가 살아온 만큼 그도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그 세월이 나와 전혀 동떨어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40대 중반의 남자가 스무 살 이후로 흔히 겪었을 일, 군 복무를 하고, 먹고 살 일자리를 구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버지가 되고, 가장의 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다가도 자식새끼 자는 모습을 보면 괜히 힘이 나는, 내 또래 남자들이 살아왔을 그런 평범한 삶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그다.


스무 살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그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폐쇄병동에서 과자를 놓고 싸우는 일상과 읽지도 못하는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는 구치소에서의 일상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무엇보다 그에게 1년6월은 형사 재판이 의도한 정당한 처벌과 반성의 시간이 될 수 있을까.


접견을 마치고 나오니 칼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구치소 민원실에 들러 그의 수용번호를 적고 면양말 두 개를 사며 속으로 되뇌었다. ‘동갑내기야, 이번에는 제발 양말 뺏기지 마라, 응?’



그날 이후 삶이 바뀌었다

어떤 소나기

혼자 사는 마흔 살 그녀는 두 개의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2층 원룸에서 창밖으로 던진 화분이 주차된 차 보닛에 떨어져 재물 손괴 사건으로 하나, 그리고 병원에서 접수를 안 받아준다고 소란을 피우며 병원 직원을 밀쳐 업무방해 및 폭행 사건으로 하나였다.


가로막힌 대화

재판 전에 피고인과 상담을 해야 하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화하면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고, 문자를 남겨놓아도 회신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수사 기록만 보고 첫 재판에 나갔다.


재판장이 나를 보며 공소사실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대개는 변호인이 재판 전에 서면을 제출하기 때문에 재판장이 피고인 입장을 대충 알고 들어오는데, 이 사건에서는 미리 제출한 서면이 없었다. 나는 일단 “피고인을 오늘에서야 만나게 돼서 아직 의견을 나눠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하고선, 옆에 앉은 그녀에게 작은 소리로 “화분을 던진 사실이나 병원에서 소란을 피운 사실 자체는 인정하는 거 맞죠?”라고 물었다. 근거 없이 물은 건 아니었다. 수사 기록에는 잘못을 인정하는 식으로 조사를 받은 것으로 돼 있었다. 그녀는 “뭘 인정한다는 거예요? 제 행동이 죄가 된다는 거예요?”하며 날카롭게 말했다.


친절한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어떤 주장인지 직접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장황했다.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수술을 했는데 그 이후로 복숭아뼈 근처가 계속 아팠고, 여기저기 병원도 가봤지만 다들 이상이 없다고 한다... 공소사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가 10여 분 이어졌다.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방청석에 가득했고 재판은 늘 그렇듯이 예정보다 지연되는데, 상담도 안 된 피고인이 핵심을 비껴간 이야기로 시간만 끌고 있으니 나는 상담을 하지 못한 게 내 잘못이라도 되는 양 불편했다. 그래서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왜 화분을 던졌는지 그걸 물으시는 거예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다시 쏘아붙였다.

 

“지금 그 이야기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변호사님 말투는 저를 책망하는 말투 아닌가요?”


아차 싶었다. 평범하지 않은 분이라는 걸 아까 알았는데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까지 없다니. 그녀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다리가 너무 아픈 거예요. 제가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근데 계속 하는 거예요. 하지 마, 하지 마, 하는데도 말이에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장황을 넘어 이젠 횡설수설 수준에까지 이른 것 같았다. 재판장이 차분하게 “피고인, 누구한테 ‘하지 마’라고 하셨다는 거예요?”하고 물었다.


“제 다리한테요.”


순간 법정 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잠시 후 눈치 빠른 재판장이 약간 과장된 어투로, 마치 유치원생에게 하듯 말했다.


“그래서 화분을 던지셨군요.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계속하니까 화가 나셔서요.”


“그렇죠. 그런데 저 때문에 차 수리비가 들었다고 해서 그건 물어줬어요.”


병원에서 소란을 피운 것에 대한 주장을 요약하면 자신의 다리를 수술하던 의료진이 그 위치에 몰래 칩을 넣었다는 걸 알게 돼 그 병원에 다시 가서 칩을 빼달라고 했는데 진료를 계속 안 받아줬다는 것이다.


직원 증언을 들어보니 그 병원도 참다 참다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신고한 것 같았다. 그녀가 다리 수술을 한 의사를 찾아와 칩을 왜 심어놨느냐고 따지면서 여러 번 괴롭혔다고 했다. 의사 앞에서 양말을 벗어 집어던진 것도 있고, 휴대폰을 던진 적도 있었는데 의사가 그때마다 참았단다. 이번에 신고하게 된 건 진료실이 아니라 병원 로비에서 카트를 넘어뜨리는 등 다른 환자들이 보는 앞에서 소란을 피워 할 수 없이 신고한 것이라고 했다.


소나기에 갇힌 사람들

그날 다른 사건이 많아 재판은 퇴근 시간 무렵에야 끝났다. 곧장 집으로 향했다. 법원에서 집까지 걸어서 20분 거리였다. 가을 하늘을 만끽하며 한창 걷고 있는데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는 것 같더니 갑자기 장대처럼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소나기였다. 공교롭게도 그날 내가 택한 길은 어느 아파트 후문을 지나 공원을 거쳐 가는 길이었는데 근처에 비를 피할 건물 처마도, 우산을 살 수 있는 편의점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소나기를 맞기로 했다.


처음엔 대책 없이 비를 맞게 된 게 당황스럽고 짜증스러웠지만, 마음을 내려놓고 비를 한참 맞으니 오히려 자유로운 기분도 들었다. 이런 비를 맞는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다만 가방 안에 비가 들어가지 않도록 가방은 꼭 안아 쥐었다.


집 근처까지 오니 요란했던 소나기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가방을 열어보니 휴대폰은 다행히 많이 젖지 않았는데 사건 기록은 엉망이었다. 기록을 하나하나 펴서 말리다 그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가족력도, 과거 병력도 없었던 그녀는 어쩌다가 잠시 피할 데도 없는 소나기에 갇혀버린 걸까.


그녀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환자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계속 자신을 괴롭히는 다리에게 ‘하지 마!’라고 하다가 다리가 말을 듣지 않으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화분이든 쓰레기통이든 또 던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어떤 사람이 2층에서 날아오는 물건에 머리를 맞고 뇌진탕에 걸리는 불운을 겪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그런 운 없는 사람이 되는 걸 원치 않는다. 그러니 그녀도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의 어머니가 너무 지쳐서 나 몰라라 한다거나, 아파서 일을 못해 병원비를 낼 수 없는 일은 결코 일어나선 안 된다. 청소 일을 하는 그녀의 어머니가 모든 책임을 떠맡고 있으니 그 짐이 얼마나 무거울까.


하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시 맑아져 있었다. 창밖을 보지 않고 다른 일에 열중하던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저녁이었을 수도 있다. 지나가는 소나기에 흠씬 젖었던 나도 옷과 가방과 신발을 말리고 나면 소나기 따윈 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소나기에 갇혔는지 설명할 수 없는 사람, 소나기가 지난 후의 그 평온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도 그들에게 짧은 처마조차 돼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내 일을 마무리했으니 사건 또한 잘 끝났다고 하기엔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와 그녀 어머니의 힘겨운 삶은 이제 막 시작일 테니 말이다.


사소하고 조각난 이야기를 넘어

마다가스카르섬에 사는 ‘헤미헤라토이데스 히에로글리피아’라는 종의 나방은 잠자는 새의 눈꺼풀을 들어올려 새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을 마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금과 단백질 같은 영양을 보충한다. 한 작가가 이를 이야기의 은유로 읽었다. 이야기를 하는 이가 있고 듣는 이가 있다. 주는 행위는 능동적이고 받는 것은 수동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눈물을) 주는 이(새)는 잠들어 있고, 그걸 받는 이(나방)은 깨어 밤을 가로지르며 날아간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의 ‘불완전하고 조각난, 미완의’ 자아의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라고 그 작가는 썼다.


나도 가끔은 잠든 새의 눈물을 마시는 나방이 됐다. 마음에 큰 병이 있는데도 수십 년 방치되고 치료를 받지 못해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들, 폭력이 일상인 환경을 견뎌내고 살아남아 폭력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미워했으면서도 어느새 자신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발견하는 한때 피해자였던 가해자들, 돈이 너무 궁한 나머지 앞뒤 가리지 못하고 대출이나 취업의 미끼를 덥석 물었다가 부지불식간에 엄청난 범죄 조직의 하수인이 되고 만 이들, 절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이를 지지해줄 사회 안전망이 없는 상황에 순간의 유혹 앞에서 번번이 무너져내리는 무력한 이들, 어리숙하고 모자란 탓에 ‘진짜 나쁜 놈들’에게 이름을 빌려줬다가 범죄가가 되고 자신도 모르는 빚까지 떠안는 이들….


내가 그동안 살아온 제도권 주변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상처 난 삶이 여기저기 그렇게도 흔하게 널려 있었다. 고백건대 미처 눈물을 보려고 하지도 않거나 혹은 애써 외면하며 지나친 적이 훨씬 더 많았지만,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린 몇몇 이들이 내어준 눈물을 마신 덕에 나는 변호사로, 그 이전에 한 인간으로 조금씩 성장했다.


사소하고 조각난 이야기들을 마무리하며 내가 그 잠든 새가 되길 바란다. 누군가 내 눈물로나마 날아오를 힘을 얻었으면 한다. 빙산의 일각에서 본 보잘것없는 이야기들이 다른 누군가의 마음으로 건너가 닫힌 물을 열어젖히고 그 누군가가 들려줄 또 다른 이야기의 재료가 됐으면 좋겠다. 국선변호제도를 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방법이든, 더 크고 구조적인 ‘악’에 대한 대책이든, 범죄에 취약한 계층의 자립을 돕는 방안이든, 형벌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제안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내가 선 이 자리에서는 이렇게 작고 분절된 이야기밖에 할 수 없지만, 우리들의 이야기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결국은 널찍한 공간을 만들어내 그 안에서 우리 사회의 ‘불완전하고 조각난, 미완의’ 경계를 조금씩 넓힐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의 힘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