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얼굴로 울 수 없어

   
기미지마 가나타(역:박우주)
ǻ
달로와
   
16000
2022�� 08��



■ 책 소개


우리는 ‘왜’ 함께 살아가는가

모두 이유를 물을 것이다. 사카히라와 미즈무라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음에도 왜 화해하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냐고. 『네 얼굴로 울 수 없어』는 그 대답을 잊은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다. 작가 기미지마 가나타는 성별 전환이란 판타지 요소가 가미된 이야기를 그려내면서도, 남녀 간의 연애 감정으로 이야기를 풀지 않고 동지로서의 관계로 풀어내어, 이 문제를 비단 남녀 간의 애정 문제가 아닌 모든 사람의 삶에 대한 고민으로 치환했다. 이 소설은 성별 전환이란 판타지로 문을 열고 내가 왜 삶과 화해하고 사람들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대답으로 문을 닫는다. 

■ 저자 기미지마 가나타
1989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2021년 본 작품 『네 얼굴로 울 수 없어』로 제12회 소설 야성시대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네 얼굴로 울 수 없어』는 몸이 뒤바뀐 남녀의 이야기를 연애 감정 없이 함께 살아내는 동지로서의 관계로 풀어낸 작품이다. 현대적인 해석과 시선으로 소설가 모리미 도미히코, 츠지무라 미즈키의 극찬 속에 주목을 받았다. 

■ 역자 박우주
서울여자대학교와 세이신여자대학에서 일어일문학을 전공하고, 나고야대학 대학원 인문학연구과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며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일대조언어학을 연구하다 현재는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오가와 이토의 『토와의 정원』, 아오야마 미치코의 『도서실에 있어요』, 후지오카 요코의 『어제의 오렌지』 등이 있다.

 




네 얼굴로 울 수 없어


15년 전, 우리의 몸이 뒤바뀌었다. 그렇게 15년. 지금에 이르기까지, 몸이 원래대로 돌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는 건 눈앞에 펼쳐진 분홍색 커튼이다. 상쾌한 아침과는 동떨어진 핫핑크 물방울무늬는, 잠에 취한 내 뇌를 단숨에 각성시켰다. 애초에 자신이 일어난 곳이 침대임을 깨닫는다. 원래는 다다미 바닥에 이불을 깔고 남동생과 나란히 누워 자는데. 그러고 보니 동생도 없다. 못 보던 책상, 못 보던 책꽂이, 못 보던 파자마. 섬뜩한 기분이 들어 상체를 일으킨다. 그 순간, 아랫배에 묵직한 통증이 일었다. 배를 문지르며 침대에서 기어 나와 전신 거울을 확인한다.


거기엔 낯익은 여자가 있었다. 같은 반인 미즈무라. 체크무늬 파자마를 입고 배를 움켜쥔, 미즈무라의 모습이 비쳐 있었다. 그때까지 혼란으로 지배돼 있던 머리가,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사르르 냉정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미즈무라가 되고 말았다. 꿈이나 망상 따위가 아니라고, 왠지 그땐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쳐도 왜 미즈무라일까. 딱히 친하지도 않고, 친하긴커녕 제대로 말을 섞어본 기억도 없다. 그저 같은 수업을 듣는 수많은 학생들 중 한 명일 뿐이다. 더구나 어제는 아무 일도 없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원래의 나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불안감이 스친다. 문득 집에 전화를 걸어볼까 싶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 안에 음악이 울려 퍼졌다. 책상 위에서 휴대전화가 번쩍번쩍 깜빡이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당황한 채로 그럴듯한 버튼을 누르자 어찌어찌 통화가 연결된다.


“여보세요.”


그렇게 반사적으로 내뱉고서야, 상대가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전화를 받아버린 사실을 깨달았다. 위화감을 주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그만 몸이 굳어진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 말이 없다. 주뼛주뼛 다시한번 “여보세요?” 하고 말을 건넨다.


“여보세요.” 기어들어 가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걸 끝으로 말을 이으려는 기색이 없다.


“저기, 미즈무라인데요.”


무음이 되는 게 두려워 말을 건넨다. 상대가 작게 아아,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전 아마 사카히라일 거예요.”


방금보다 더 가냘픈 목소리였지만, 그 말로 마침내 하나의 가능성이 확신으로 바뀐다.


“너 미즈무라지?”


전화 너머로 숨을 크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카히라?” 


그 말을 듣고, 나는 이날 처음으로 안도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지금 우리가 놓인 상황을 그제야 알아차리게 된 것이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동시에 새로운 당혹감이 덮쳐 온다. 휴대전화를 한 손에 든 채 침대 위에서 몸부림치고 있자, “저기. 있잖아, 사카히라” 하고 말을 걸어왔다.


“일단 만나서 얘기할까? 나올 수 있겠어?”


30분 뒤 이방인에서 보기로 약속하고, 큰길로 나가는 방법을 서로에게 일러준다. 거기까지 나가면 찾을 수 있을 거라며 전화를 끊었다.


***


이방인에는 미즈무라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딸랑, 문을 여는 종소리에 안쪽 자리에 앉은 남자가 홱 하고 얼굴을 든다. 영락없는 나였다. 내 얼굴을 한 남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어서 오세요, 하는 주인아줌마의 술에 찌든 목소리를 등지고 미즈무라의 맞은편에 앉는다. 불안감에 서렸던 두 눈이 어느새 호기심을 띤 채 나를 쏘아보고 있다.


나라는 존재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하지만 저건 내가 아니다. 엄청난 거북함이 느껴졌다. 약간은 공포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사카히라, 잘해보자.”


그렇게 말하며 웃는 미즈무라의 뺨은 어제와는 달리 경직돼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아아, 미즈무라도 역시 불안하구나, 생각했다. 그런데도 애써 웃으며 나를 격려해주고 있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그대로 계단을 내려간다. 괴로워하는 내 얼굴을 보는 건 괴롭다. 물론 그건 미즈무라라고 다르지 않다.


그때, 나는 다짐했다. 미즈무라가 미즈무라의 인생을 언제 되찾아도 상관없도록, 미즈무라가 마음 아파할 필요 없도록 완벽하게 미즈무라로 살아가며,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감쪽같이 속여내고야 말겠다고.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나날이었지만, 어쨌거나 별 탈 없이 흘러갔다. 나는 아무리 지나도 여자애들의 대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성적도 오르지 않았다. 미즈무라는 내 몸이라 그런지 운동은 나름대로 잘 소화해냈지만, 동아리 활동은 너무 버거운 나머지 거의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우리의 몸이 뒤바뀐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그러긴커녕 주위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가 대화 몇 마디 나눈 적조차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서로의 집에는 수시로 놀러 가게 됐다. 어느 날 미즈무라가 말했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와 페로가 보고 싶다고. 이 나이에 집에 남자를 데려갔다간 이상한 오해를 살 수도 있겠다 생각했지만, 울상을 지은 채 입술을 깨무는 미즈무라의 얼굴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 심정은, 나 역시 뼈아플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집이 그리워서, 그 감정이 폭발해서, 밤에 잠들기 전 얼굴을 베개에 처박고 소리 죽여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나 싫었던 엄마도, 투명 인간 같던 아빠도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로쿠와 또다시 바보 같은 얘길 하며 웃고 싶었다. 물론 미즈무라에게는 말할 수 없었지만.


미즈무라의 부모님은 딸의 이성 친구를 몹시도 환영했다. 가족끼리 원래 사이가 좋았기 때문인지, 그 남자는 순식간에 그 집에 녹아들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정답게 이야기하는 미즈무라의 모습을 보며 따끔히 가슴이 아팠다.


***


“돌아가는 날이 올까.”


무심코 입 밖에 내고 만다. 이런, 하고 황급히 입술을 물었지만 미즈무라에게도 똑똑히 들렸을 것이다. 그런 말은 더 이상 입에 담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여름이잖아. 올해 여름이 끝날 때까진 버텨보자.”


그럼에도 미즈무라는 그저 해맑게 웃는다.


“여름?”


“그래, 여름. 뭐랄까, 이런 신기한 이야기는 한 여름 동안의 이야기란 느낌 안 들어?”


뭔 소리야, 하며 나도 모르게 웃는다.


“그러니까, 올해 여름까지만 잘 이겨내 보자.”

“그래, 그러자.”


그렇게 결국 미즈무라에게 격려를 받고 만다. 미즈무라도 차라리 우는소릴 해주면 좋을 텐데. 두 번 다시 못 돌아가면 어쩌지, 하고 둘이 함께 눈물을 쏟아내면 좋을 텐데. 서로를 향한 의미 없는 위로일지라도 억지로 미소 짓는 것보다야 훨씬 좋을 텐데.


***


여름이 끝나면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라는 우리의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도 우리 몸은 뒤바뀐 채였고, 나는 절망적인 기분에 젖어 있었다.


두려웠다. 이제 다시 나는 남자로, 사카히라 리쿠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여자를 사귀고, 입을 맞추고, 육체적 관계를 맺는 그런 경험도 못 해본 채 생을 마감할 것이다. 자포자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미즈무라에게 몇 번이나 큰소리친 기억이 있다. 장난하냐? 어쩔 건데. 내 인생 돌려놔.


같은 처지인 미즈무라에게 화풀이라니 꼴불견도 그런 꼴불견이 없지만, 미즈무라 말곤 그 심정을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이 달리 없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즈무라는 웃고 있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눈 떠보면 뚝딱 돌아와 있기도 한대. 그 태평함이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그 태평함에 위로를 받는 부분도 있었다.


이제는 안다. 그 긴장감 없는 언행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걸. 패닉에 빠져 악을 쓰고 싶은 건 미즈무라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마음을 한사코 숨긴 채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전부 나를 위해서. 가슴 속에 회오리치고 있었을 불안도, 공포도 입 밖에 내려 하지 않았다. 사실 그 덕에 나는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삶을 언제 미즈무라에게 반납해도 상관없게끔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미즈무라는 이때부터 이미 미즈무라 마나미로서의 삶을 내게 맡기고 사카히라 리쿠로 살아갈 결심을 굳혔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기말시험을 앞두고 있었던 일이다. 상의할 일이 좀 있는데, 하고 미즈무라가 날 불러냈다. 옥상 문 앞으로 가려고 했더니 이방인으로 가잔다. 그 말과 온순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경계심이 든다.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이방인에서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언제부턴가 생겨나 있었다. 미즈무라가 뭔갈 상의하고 싶다고 말한 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이 이때뿐이었다.


“너는 진로 같은 건 어떻게 할 생각이야?”


미즈무라가 물어 온다.


“아아, 맞네. 그 부분을 상의해야지. 몸이 언제 돌아오든 상관없으려면, 무난하게 여기 있는 대학으로 가는 게 제일 좋으려나.”


“왜, 무슨 할 말 있어?”

“나, 대학을 도쿄로 가고 싶어서.”


도쿄.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미즈무라의 입에서 튀어나와, 순간 사고가 정지된다.


“너도,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해.”


주먹에 콧대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쭉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언제 되돌아갈진 모르겠지만, 그날이 언제 찾아오든 상관없도록. 그런데 미즈무라는 아니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길을 선택하려 하고 있었다. 내가 옆에 없더라도. 도리어 내가 있으면 본인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듯한 투로.


문득 발밑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 홀로 내팽겨쳐진 기분이 든다.


***


그렇게 고등학교 생활이 끝을 맞이했다. 집 가는 길을 따라가며, 다음번에 이 길을 걷는 건 언제가 될까 생각해본다. 결국 나는 이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미즈무라가 말했을 때부터 나는 줄곧 생각해왔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 어떤 길을 가고 싶은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생각해본다. 진짜 가족을 남겨두고 도쿄로 떠나려는 미즈무라의 본심을. 도쿄로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도 거짓은 아닐 것이다. 미즈무라는 성적도 우수하고, 나로선 이해할 수 없지만 공부를 좋아한다. 그래도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곳에 머무르면 미즈무라는 계속 사카히라 리쿠란 남자를 연기해야만 한다.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물론 아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리운 사람들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그토록 가까이 있으면서도.


미즈무라는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내뱉은 걸까.


그렇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제 미즈무라 마나미를 그만 연기하자고. 어둡고 과묵한 나는 고향에 내버려 둔 채 떠나자고.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미즈무라 마나미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도쿄라는 곳은 그러기에 적합한 장소로 여겨졌다. 그 생각을 미즈무라에게 전하자 얄미울 만큼 싱그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응, 좋은 생각이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