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박완서
ǻ
열림원
   
15000
2022�� 05��



 

■ 책 소개

그리운 작가, 박완서의 특별한 정원
꽃과 나무처럼 꾸준한 애정으로 삶을 돌보다

『호미』는 박완서가 2011년 80세로 삶을 마무리하기까지 마지막 13년을 보낸 ‘아치울 노란집’에서의 소박하고 정겨운 생활을 담은 산문집이다. 그는 60대 후반에서 70대 전반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바로 그 시절, 그 공간에서 박완서가 뿌리고 거두었을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 변덕스럽지만 원칙을 깨지는 않는 자연의 질서, 작고 사소할지언정 경이로운 생명들……. 나이가 들며 “나도 모르게 어질고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글을 소망하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책 곳곳에 지친 삶을 쓰다듬는 상냥한 온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저자 박완서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1950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중퇴하였다. 1970년 마흔이 되던 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장편소설로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이 있고, 소설집으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엄마의 말뚝』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노란집』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두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모독』 『빈방』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2011년 1월 22일 80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 차례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 │ 돌이켜보니 자연이 한 일은 다 옳았다 │ 다 지나간다 │ 만추 │ 꽃 출석부 1 │ 꽃 출석부 2 │ 시작과 종말 │ 호미 예찬 │ 흙길 예찬 │ 산이여 나무여 │ 접시꽃 그대 │ 입시추위 │ 두 친구 │ 우리가 서로에게 구인이 된다면

그리운 침묵
내 생애에서 가장 긴 8월 │ 그리운 침묵 │ 도대체 난 어떤 인간일까 │ 좋은 일 하기의 어려움 │야무진 꿈 │ 운수 안 좋은 날 │ 냉동 고구마 │ 노망이려니 하고 듣소 │ 말의 힘 │ 내가 넘은 38선 │ 한심한 피서법 │ 상투 튼 진보 │ 공중에 붕 뜬 길 │ 초여름 망필(妄筆) │ 딸의 아빠, 아들의 엄마 │ 멈출 수는 없네 │ 감개무량

그가 나를 돌아보았네
그는 누구인가 │ 음식 이야기 │ 내 소설 속의 식민지시대 │ 그가 나를 돌아보았네

딸에게 보내는 편지
내가 문을 열어주마 │ 우리 엄마의 초상 │ 엄마의 마지막 유머 │ 평범한 기인 │ 중신아비 │ 복 많은 사람 │ 김상옥 선생님을 기리며 │ 이문구 선생을 보내며 │ 딸에게 보내는 편지

작가의 말

 

 




호미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

마당에서 철 따라 피고 지던 일년초 중 맨 나중까지 붉게 피던 백일홍마저 올겨울 첫추위에 얼어 죽고 난 마당이 너무도 허전하여, 내년엔 일년초 따위 부질없는 것들 심지도 말아야지, 하다가 문득 목련나무를 쳐다보았다. 목련나무는 마당에 꽃이 없긴 왜 없냐고 시위라도 하듯이 가장귀마다 솜털 보송보송한, 내년에 필 꽃망울을 촘촘히 매달고 있었다. 내거 너한테 또 졌다고, 소리 내어 말하고 나서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목련나무하고 나하고는 말이 잘 통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사연이 좀 있다.


그 나무는 내가 우리 집을 짓기 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큰 거목이었지만 목련은 성장이 빠르다니까 나이를 그렇게 많이 먹은 건 아닌지도 몰랐다. 아무튼 나는 넓지도 않은 마당에 그렇게 큰 나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집을 야트막하게 지을 작정인데 집보다 높은 나무도 싫었다. 그래서 집 앞에 있는 하천부지나 뒤란 쪽으로 옮겨 심을 궁리도 해보았는데 정원 일을 하는 식물 전문가하고 의논해보니 옮겨 심는 값이 어마어마했다.


많은 돈을 요구하면서도 정원사는 그 일이 별로 탐탁지 않은 듯 새로 사 심는 것보다 돈이 훨씬 더 많이 드는 짓을 뭣 하러 하느냐고 했다. 별로 비싸거나 귀한 나무도 아닌데 손쉽게 베어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말투였다. 정원사의 말도 말이지만 내가 원래 목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까닭도 있고 해서 베어버리기로 했다.


목련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꽃이 질 때 산뜻하게 지지 못하고 오래도록 갈색으로 시든 꽃잎을 매달고 있는 게 누추해 보여서 안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간단하게 그럼 베어달라고 부탁했다. 집을 짓고 있는 도중이었기에 어느 날 없어져버렸는지도 모르게 그 나무는 사라졌다. 그리고 곧 목련이 거기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해 5월에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고 마당 정리하면서 보니 나무를 밑둥에서 베지 않고 1미터 정도 남겨놓았다. 말뚝으로 쓸 일도 없는데 왜 남겨놓았을까 싶었지만, 그 자리가 눈에 거슬리지 않는 담 모퉁이여서 신경 쓰지 않았다. 여름이 되니 새로 깐 잔디보다 잡초가 더 무성해져서 그걸 뽑느라고 마당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자연히 목련나무 그루터기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게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그루터기 윗부분에서 푸릇푸릇 새싹이 돋아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원치 않는 잡초 취급해 너까지 왜 속을 썩이느냐고 투덜대며 손바닥으로 훑어서 없애버리곤 했다. 그래도 그 그루터기는 죽지 않고 줄기차게 새싹을 토해냈고, 나는 그걸 또 집요하게 훑어낼 때마다 투덜대는 대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게 됐다. 그해 여름내 그 짓을 했다. 그러다가 겨울이 됐으니, 그 나무는 확실하게 죽었으려니 안심을 했다.


그러나 웬걸, 그 이듬해 봄 좀 오래 여행을 하고 돌아와보니 그 나무 그루터기는 사방으로 이파리가 아닌 가장귀를 뻗고 있었다. 가장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자라며 잎도 무성해졌기 때문에 키는 작지만 동그랗고 건강한 나무의 모양을 갖추어갔다. 그해 그 나무는 살아나려고 온 힘을 다하느라 그랬는지 꽃은 피지 않았다. 나는 그 나무의 왕성한 생명력에 질린 나머지 미안하다는 말 대신 내가 너한테 졌다고 무조건 항복을 하고 말았다.


그 후 목련나무는 나의 가장 친한 말동무가 되었다. 가장귀가 너무 촘촘하게 나서 톱으로 솎아주게 될 때에도 아플까봐 미리 양해를 구하는 말을 했고, 전지를 끝낸 후에는 거 봐라 얼마나 시원하냐고 생색을 내기도 했다. 전지를 해주었는데도 이파리들이 어찌나 극성맞게 빈틈없이 밀생(密生)을 하는지 한여름에 그 나무를 보고 있으면 앙리 루소가 그린 식물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이곤 했다.


그러나 잎만 그렇게 무성할 뿐, 이듬해 봄에도 꽃은 피지 않아 나를 안타깝게 했고, 나는 또 나무에게 말을 걸게 됐다. 미안하다고, 너를 죽이려 한 것도, 너의 꽃을 싫어한 것도 사과할 테니 내년에는 꽃 좀 피우라고 자꾸자꾸 말을 시켰다. 그랬더니 그 이듬해는 시원치는 않지만 꽃이 몇 송이 피었고, 지난봄에는 더 많은 꽃이 피었다. 아마 오는 봄에는 더 장하게 꽃을 피울 모양이다.


벌써부터 여봐란 듯이 자랑스럽게 준비하고 있는 솜털 보송보송한 수많은 꽃봉오리들을 보니. 그래서 나는 요새도 나의 목련나무에게 말을 건다. 나를 용서해줘서 고맙고, 이 엄동설한에 찬란한 봄을 꿈꾸게 해줘서 고맙다고.



그가 나를 돌아보았네

음식 이야기

비 오는 날의 메밀 칼싹두기

비 오는 날이면 요즈음도 나는 수제비가 먹고 싶어진다. 그건 아마 어린 날의 메밀 칼싹두기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벽촌의 비 오는 적막감은 내가 아직 맛보지 못한, 그러나 장차 피할 수 없게 될 인생의 원초적인 고독의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랑채 툇마루에 오도카니 앉아 있으면 비에 젖어가고 있는 허허벌판과 큰 나무들과 나직한 동산과 몇 채 안 되는 초가지붕과 불어나고 있는 개울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럴 때면 대식구 속에서 귀염 받는 어린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핑계만 있으면 울어버리고 싶게 청승스러워지곤 했다. 그런 날은 아마 나뿐 아니라 식구들이 제각기 다들 까닭 없이 위로받고 싶어지는 날이 아니었을까. 할머니나 엄마 아니면 작은엄마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칼싹두기나 해 먹을까 하는 소리가 나왔다.


우리 집에서 칼싹두기 하면 그건 으레 메밀로 하는 걸로 돼 있었다. 밀가루로 하는 칼국수보다 면발이 넓고 두툼하고 짧아서 국수보다는 수제비에 가까웠다. 그건 아마 꼭 그렇게 해야 된다는 조리법이 있는 게 아니라 메밀가루가 밀가루보다 덜 차지기 때문에 저절로 그리되었을 것이다. 마을에서 메밀밭을 따로 본 기억은 없다. 물이 풍부하고 벌이 넓어서 논농사가 주였고 밭농사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텃밭 정도였다. 텃밭에서도 이효석이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다고 절묘하게 표현한 메밀꽃을 본 기억이 없으니 아마 텃밭머리에서 뒷동산으로 올라가는 척박한 둔덕 같은 데다 베갯속이나 별식용으로 조금 심었을 것이다. 메밀가루도 밀가루도 집에서 맷돌에 갈아 체로 친 거였으니까 요새 우리가 먹는 것보다 훨씬 거칠고 빛깔도 희지 않았다. 그중에도 메밀은 더 누렇고 거뭇거뭇한 티도 많았다.


그걸 적당히 반죽해 다듬잇방망이로 안반에다 밀어서 칼로 썩둑썩둑 썰어서 맹물에 삶아 약간 걸쭉해진 그 국물과 함께 한 대접씩 퍼 담는 것으로 요리 끝이었다. 간은 반죽할 때 하는지 삶는 물에다 소금을 치는지 잘 모르겠다. 따로 양념장을 곁들이지도 않고 꾸미를 얹지도 않았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무던하고 구수한 메밀의 순수 그 자체였다. 또한 그때만 해도 한 가족끼리도 아래위 서열에 따라 음식 층하가 없을 수 없는 시대였지만 메밀 칼싹두기만은 완벽하게 평등했다. 할아버지 상에 올릴 칼싹두기라고 해서 특별한 꾸미를 얹는 일도 없었지만 양까지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막대접으로 한 대접씩 평등했다. 한 대접으로는 출출할 장정이나 머슴은 찬밥을 더 얹어 먹으면 될 것이고, 한 대접이 벅찬 아이는 배를 두들겨가며 과식을 하게 될 것이나 금방 소화가 되어 얹히는 일이 없었다.


땀 흘려 그걸 한 그릇씩 먹고 나면 배 속뿐 아니라 마음속까지 훈훈하고 따듯해지면서 좀 전의 고적감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이렇게 화목한 집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기쁨인지 감사인지 모를 충만감이 왔다. 칼싹두기의 소박한 맛에는 이렇듯 각기 외로움 타는 식구들을 한식구로 어우르고 위로하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요새도 비 오는 날이면 밀가루 수제비라도 먹고 싶어진다지만 같이 먹을 사람이 없으면 수제비를 뜨지 않는다. 나는 단지 내 입맛만을 위한 요리도 즐겨 하는 편인데 수제비만은 혼자 먹으려고 하질 않는다. 내가 잊질 못하는 건 메밀의 맛보다 화해와 위안의 맛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근래에 기적처럼 메밀 칼싹두기를 먹어본 적이 있다. 조각가이자 미식가로도 소문난 이영학 씨 댁에서였는데 끓는 물에 삶아 건진 칼국수를 찬물에 재빠르게 헹구어 일식집에서 메밀국수 국물로 나오는 것과 비슷한 양념국물에 찍어 먹으라는 것이었다. 칼국수와 소바를 짬뽕해놓은 것 같아 그닥 맛있을 것 같지 않았는데 맛을 보니 기가 막혔다. 양념국물 때문이 아니라 국수 자체가 그렇게 깊이 편안하고 감칠맛이 있었다. 칼국수와도, 파는 소바와도 닮지 않은 이 맛은 무엇일까? 그 맛 속에는 나를 끌어당기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건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였고 만드는 방법도 큰 도마에다 밀어서 칼로 썬 옛날 우리 집에서와 같은 수제였다. 다만 메밀가루가 정제된 고운 것이어서 옛날의 칼싹두기보다 훨씬 하얘졌을 뿐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옛날 맛에 대해 치사할 정도로 집요한 내 입맛에 나는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한 식탁에서 그것을 맛본 딴 손님들도 다들 그것을 맛있다고 했지만 나하고는 달랐다. 나의 찬탄은 거의 감동 수준이었다. 나는 그 메밀 칼국수를 한 번 맛본 걸로는 성이 차지를 않아 한 번 더 초대해주길 간청해서 실컷 먹어보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 댁에 전화를 걸어 그 재료를 어디서 구했는지 알아보았는데 농협에서 산 봉평 메밀가루에 약간의 밀가루를 첨가한 거라고 했다.


강된장과 호박잎쌈

애호박이 가장 잘 열리고 또 예쁠 때는 처서 지나 찬바람 날 무렵이다. 나는 왜 못생긴 여자를 호박 같다고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반들반들 윤기가 나고 허리가 잘록한 애호박을 보면 뭐 해 먹겠다는 예정 없이도 무조건 사고 본다. 또 길 가다 남의 집 담장이나 울타리를 타고 올라간 호박 덩굴 사이에서 동그란 토종 애호박을 발견하면 도심(盜心)까지 동해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호박잎이 가장 부드럽고 맛있을 때도 바로 찬바람 날 무렵이다. 예전 같으면 곧 김장밭을 갈기 위해 걷어버리기 전의 호박잎이다. 그러나 여름이라도 연하고 어린 호박잎을 골라서 딸 수만 있으면 된다.


싱싱한 호박잎을 잎맥의 까실한 줄기를 벗기고 깨끗이 씻어서 뜸 들 무렵의 밥위에 얹어 부드럽고 말랑하게 쪄내는 한편 뚝배기에 강된장을 지진다. 된장이 맛있어야 된다. 된장을 뚝 떠다가 거르지 말고 그대로 뚝배기에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마늘 다진 것, 대파 숭덩숭덩 썬 것과 함께 고루 버무리고 나서 쌀뜨물 받아 붓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풋고추 썬 것을 거의 된장과 같은 양으로 듬뿍 넣고 또 한소끔 끓이면 되직해진다. 다만 예전보다 간사스러워진 혀끝을 위해 된장을 양념할 때 멸치를 좀 부숴 넣어도 좋고, 호박잎을 밥솥 대신 찜통에다 쪄도 상관없다.


쌈 싸 먹는 강된장은 슴슴하고도 되직해야 하기 때문에 집된장이 좀 짠 듯하면 양파와 표고버섯을 잘게 썰어 넣으면 되직해지면서 맛도 더 좋아지지만 이 강된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풋고추이다. 풋고추의 독특한 향기는 강하되 매운맛은 너무 독하지도 밍밍하지도 않은, 생으로 아직 깨물고 싶게 싱싱한 풋고추를 된장 반 춧고추 반이 되도록 넣어야 한다. 새로 지은 밥을 강된장과 함께 부드럽게 찐 호박잎에 싸 먹으면 밥이 마냥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움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흐뭇하고 나른해진다.


그까짓 맛이라는 것, 고작 혀 끝에 불과한 것이 이리도 집요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 맛은 반세기도 너머 전의 고향의 소박한 밥상뿐 아니라 뭐든지 덩굴 달린 것들은 기를 쓰고 기어 올라가던 울타리와 텃밭과 장독대뿐만 아니라 마침내 고향에 당도했을 때의 피곤한 안도감까지를 선연하게 떠오르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분수에 넘치게 비싼 음식이나 보기만 해도 뱃살이 오를 것이 걱정스럽게 기름진 양식으로 외식을 하고 나서 비위도 들뜨고 오장육부도 자리를 못 잡아 불편할 때 이걸로 입가심을 하면 비위와 속이 편안하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너무 단순 소박하고 볼품이 없기 때문에 이걸로 손님 대접을 한 적은 없다. 이건 딴 음식하고 같이 내놓을 성질의 음식이 아니다. 밥하고 강된장하고 호박잎은 서로 완벽하게 궁합이 맞으니까 딴 음식에게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손님이 아닌 내 자식들에게는 더러 해준 적이 있지만 맛있다고는 하면서도 나처럼 허둥대며 탐하진 않기 때문에 잘 안 하게 된다.


왜 이 음식만은 극찬을 받고 싶어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 음식은 순전히 나만의 입맛과 나만의 추억을 위한 음식인데도 1년에 몇 번을 해먹는다.


젊었을 적의 내 몸은 나하고 가장 친하고 만만한 벗이더니 나이 들면서 차차 내 몸은 나에게 삐치기 시작했고, 늘그막의 내 몸은 내가 한평생 모시고 길들여온, 나의 가장 무서운 상전이 되었다. 몸에는 혀만 있는 게 아니다. 입맛이 원한다고 딴 기관에 해로운 걸 마냥 먹게 할 수도 없다. 내 몸의 그 까다로운 비위는 나 아니면 맞출 수가 없다. 또한 내 손맛에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곰삭은 맛, 내 고향의 맛, 엄마의 손맛이 깃들어 있다. 그걸 기억하고 동의해주는 게 내 몸이니 아하고 내 몸이 가장 죽이 잘 맞을밖에.


나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건 참을 수 있지만, 맛없는 건 절대로 안 먹는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딸에게 보내는 편지

어젠 집에 잘 들어갔느냐. 네 운전경력이 20년 가까운데도 나는 네가 차를 몰고 다니는 게 늘 불안하다. 특히 친정에 왔다 갈 때면 운전 조심하라고 타이르고 나서도 집에 도착할 시간까지 내내 기도하는 심정이 되곤 한다. 우리 집에서 너희 집까지는 서울의 끝에서 끝 아니냐? 밀릴 때는 엄청 밀리고, 안 밀릴 때는 속도가 무시무시한 그 기나긴 강변북로를 생각하면 나는 지레 아찔하고 차라리 네가 친정에 자주 오지 말기를 바라게 된다.


말로는 그러면서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만나는 게 습관이 되어, 네가 오면 시킬 일, 부탁할 일, 의논할 말을 늘 마음속에 준비하고 있으니 딱한 어미로구나. 너는 맏이라 어른들의 귀여움을 가장 많이 받았고, 나나 너희 아빠도 우리만 딸 가진 것처럼 너를 위해 받들어 키웠으니 응석받이로 자랄 수도 있었으련만 너는 천성이 늠름하여 걱정 끼칠 일이라고는 안 하고 잘 자라주었다. 내가 다산 체질이어서 네 밑으로 동생이 넷이나 더 생기면서 너는 더욱 내 딸이라기보다는 믿음직한 동반자가 되어갔다.


그때만 해도 할머니도 계시고 애 보는 소녀도 두고 살았으니까 너한테 동생을 업어주라든가 기저귀 심부름 따위 궂은일은 안 시켰지만 매사에 동생들의 모범이 되기를 바랐으니 어린 너에게는 버거운 주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넌 한 번도 내 기대에 어긋난 적이 없지만 요새는 때때로 생각하곤 한단다. 너를 좀 더 자유롭게 키워 가족의 테두리 밖으로 밀어냈더라면 넓은 세상에서 한가닥 할 수도 있었을 것을 기껏 동기간의 가정에 좋은 본을 보이기 위한 모범 주부로 머물게 한 게 아닌가 하고.


어려서부터 너에게 시켜 버릇한 건 모범생 노릇 말고 또 하나 있지. 온갖 어려운 심부름은 다 네 몫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켰을까 잘 믿어지지 않을 심부름을 나는 너에게 시켰었다.


학교 갔다 온 어린것에게 전차를 갈아타고 가야 하는 먼 거리를 어떻게 큰돈을 들려 보낼 수가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지만 그때는 조마조마하는 마음조차 없이 믿거니 하고 예사롭게 너에게 그런 일을 시켰다. 너는 나에게 그렇게 믿음직한 맏딸이었다.


엄마가 늦은 나이에 소설가로 등단을 하게 된 건 네가 고등학교 가고 나서였다. 초등학교 때 현금 나르는 일을 시킬 만큼 너를 어른 취급해왔으니까 중학교 가고부터는 집안의 대소사나 근심거리를 마치 동서끼리나 친구 사이처럼 기탄없이 의논해왔다. 그러나 소설 쓰는 것만큼은 너에게도 눈치 못 채도록 감쪽같이 해치웠지. 좀 황당했을지도 모를 엄마의 변신을 네가 앞장서서 환영하고 격려해준 것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엄마는 40세란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는 데 그다지 열등감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신문사나 출판사 같은 데 가는 걸 몹시 수줍어해서 어떡하든지 기피하려고 했다. 엄마의 이런 사회성 부족을 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정도의 작가도 되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원고 심부름이 네 전담이 되었다. 이제 연로하여 원로가 된 언론인 중에는 흰 깃을 단 교복을 입고 신문사 편집국으로 연재소설 원고를 나르던 너를 기억하고 안부를 묻는 분이 더러 있단다.


등교할 때 원고를 줘 보내면 하교할 때 전하고 왔는데 그동안을 엄마는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전차나 버스 간에 놓고 내릴까봐, 또는 학교에서 행여 누가 장난삼아 감추거나 훔쳐볼까봐, 온갖 망상으로 조마조마했다. 어린것에게 큰돈 심부름을 시키고도 천하태평이던 엄마가 원고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전전긍긍했는지. 그래도 동생들 제쳐놓고 원고 심부름만은 꼭 너한테 시켰던 것은 너도 나만큼 원고를 소중히 여겨줄 것 같은 믿음 때문이었다.


근심이 생겨 너한테 털어놓을 말을 머릿속으로 굴리기만 해도 근심의 반은 사라지고, 미운 사람 욕을 너한테 하고 나면 미움은 거의 사라지고 만다. 도저히 인력으로는 해결 안 되는 어려움이 생겼을 때는 너한테 기도 좀 해달라는 부탁까지 하니 나는 얼마나 한심하고 뻔뻔스러운 엄마냐.


그러나 이해해 다오. 내 기도발보다는 네 기도발을 더 믿는 것은 모성애보다 더 깊은, 네 진국스러운 인간성에 대한 신뢰감이라는 것을. 너는 딸이요 친구인 동시에 근래에는 내 문학의 적절하고 따뜻한 비평가 노릇까지 겸해주었다.


늘 뭔가를 시키고 부탁만 해서 미안하지만 한 가지만 더 하겠다. 만약 엄마가 더 늙어 살짝 노망이 든 후에도 알량한 명예욕을 버리지 못하고 괴발개발 되지 않은 글을 쓰고 싶어 한다면 그건 사회적인 노망이 될 테니 그 지경까지 가지 않도록 미리 네가 모질게 제재해주기를 바란다. 엄마가 말년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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