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 나리 김나리

   
김나리
ǻ
도마뱀
   
14000
2022�� 06��



■ 책 소개


『나리 나리 김나리』는 “이러쿵저러쿵의 세계”에 관한 책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러쿵저러쿵의 세계란 “인간관계와 세상 돌아가는 일들 사이를 자세히 관찰해 이러쿵저러쿵 글로 펼쳐놓은 것”이다. 애정이 담긴 시시콜콜한 순간들, 이 귀퉁이 저 귀퉁이에 처박힌 비밀스러운 말들, 사랑받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 결국 사랑의 상처로 고꾸라진 마음,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지난 시간의 결들. 이 책은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되었는지 일일이 진심으로 궁금해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다.

작가는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도 쓰러뜨리기도 하는 마음을 사람이 사는 동네에 비유한다. 자신의 마음이란, 지긋지긋해서 다른 동네로 이사 가고 싶다가도 결국 가장 익숙해서 편안한, 그럭저럭 살 만한 내가 제일 잘 아는 동네다. 이 책은 자기 동네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작가가 동네방네를 다니며 손수 기록한 지도 같은 것. 작가의 다정한 눈길을 따라 이 동네를 구경하다 보면, 어쩐지 이곳의 풍경이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작가가 얘기하는 위안과 행복에 흔쾌히 공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만 아니라 당신도, 당신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겪은 삶이 여기에 있어서다.

■ 저자 김나리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습니다. 해방촌의 동네 책방과 작은 식당에서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 글을 씁니다. 시간을 벌고 싶어 돈은 적게 법니다. 사소한 이야기들과 연결된 사려 깊은 생각들을 찾고자 합니다. 목소리가 들리는 글쓰기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 차례
프롤로그

얼른 치킨 한 조각을 먹으렴
마음껏 사랑하려고 쓰는 글
해방촌 골목 끝 작은 식당 ‘혼고’
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궁금해하는 사람
세탁기로서 글쓰기-일단 시작해야 다 쓸 수 있다
애틋한 마음으로 이름 짓기
끝없는 친구들
사랑을 시작해도 될까
가장 나다운 시간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변기 막힌 날
TMI의 귀여움
나의 안부
회복의 밀과 보리가 자란다
가끔만 딸이 되고 싶다
커튼이 된 엄마
도시락 한 보따리
엄마의 사과
그 사람의 눈썹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어! 안녕! 어디 가니!
낯설고 친절한 울릉도
좋아하는 마음 다음에는
외로움에 조금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 다정하다
들숨과 날숨의 이해
우리 같은 사람들 말이에요
인생 구간 입장료
고마움의 액수
내가 나를 미워하는 날
계속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수영장 락스 냄새
전화기 동화
잔뿌리가 하는 일
피로 골절
가서 말하고 오세요
물이나 떠 와

에필로그

 




나리 나리 김나리


애틋한 마음으로 이름 짓기

해방촌 혼고는 ‘혼자 고기 먹는 식당’이라는 뜻이 있다. 은정은 오래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 하고 생각하다가 고기를 좋아하니 고깃집을 차리자, 혼자서도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가게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해방촌 골목 끝자락에 작은 가게를 차렸다.


혼고에서는 고기와 함께 먹는 반찬으로 삼삼한 양념에 참나물을 무쳐 손님에게 내어주는데, 고기와 궁합이 잘 맞는다. 참나물을 물에 헹궈 가위로 손질할 때면 당연하게도 향긋한 참나물 향이 물씬 풍긴다. 나는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 손님들은 이따금 참나물을 미나리나 취나물이라고 말하며 리필을 요청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참나물이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무려면 어떤가 싶어 참는다. 하지만 실은 아무려면 어떤가가 안 되는 모양인지 참나물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때마다 참나물인데, 싶어 아쉽다. 참나물이라서 냄새가 이렇게 좋은데.


오늘은 서점에 출근하며 감을 샀다. 작은 바구니 하나에 오천 원. 감 두 개는 서점 앞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던 동네 할머니 두 분께 나눠드렸다. 서점 앞에는 고양이 사료와 물을 두는 자리가 있다. 그 그릇에 사료가 떨어졌다고 내가 알아차릴 때까지 서점 문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해 보이는 고양이 수지에게는 사료를 한 컵 쏟아주었다. 할머니 두 분이 건물 앞 계단 턱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이, 햇볕에 앉으시지, 안 추우세요?, 할머니 햇볕에 앉으세요, 이렇게 말하면 할머니들은 여기가 시원해서 좋다며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감이 참 예쁘네.”


할머니 두 분은 감을 받으면서도 말씀하시고 감을 다 먹고도 말씀하셨다. 감이 참 예쁘네. 그쵸, 감이 참 예뻐요. 응, 감이 예쁘고 맛있네. 고마워. 어떻게 감을 줄 생각을 했지?


“혼자 먹기는 많아서요.”

“그랬구나.”


서점 앞에서 밥을 먹는 고양이들에게는 우리끼리 부르는 이름이 하나씩 있다.


통유리로 된 서점 문 밖으로 까만 얼룩이 있는 고양이 이백이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이백이가 좋아하는 캔을 꺼내 밖으로 나갔더니 그 사이 이백이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캔 사료를 담은 그릇을 들고 두리번거리다, 이백아, 하고 작게 말해보았다. 이백아. 연달아 두 번 불렀을 때 물론 그것은 이백이의 본명이 아니고 나와 서점 사장님이 부르는 별명일 뿐인데, 실제로 이백이가 저쪽 담에서 후루룩 걸어 나왔다. 어? 내가 당황하며 이백아? 라고 말하니 얌전히 내 앞으로 와 몸을 늘어뜨리고 앉았다. 나는 이백이 앞으로 캔 사료를 담은 그릇을 놓아주었다.


“이백아. 너 어떻게 네가 이백이인 거 알았어?”


배가 고팠던 것은 아니었는지 몇 번 입맛만 보다가 다 남기고 이백이는 어느새 사라졌다. 고양이들은 늘 영역을 살피느라 발길이 바쁘다.


서점 앞에 찾아오는 고양이들 뿐 아니라 인근 몇 군데에도 하루에 한 번씩 고양이 밥과 물을 챙겨준다. 나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일 뿐이지만 황인숙 시인님과 서점 사장님은 매일같이 몇 곳을 정해두고 고양이 밥을 챙긴다. 시인님은 더 넓게 저 후암동 아랫동네 일대까지 보살핀다. 아무리 고양이를 좋아한다지만 이 일은 때로 귀찮다. 사료와 캔과 물과 빈 그릇을 챙겨야 하고, 걸어야 하고, 혹시 누군가 시비를 걸지는 않을까 눈치를 살펴야 한다. 하루쯤 건너뛴다고 고양이들이 죽기야 할까. 그런 몹쓸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배고픈 고양이를 떠올렸다.


배가 고파도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없는 고양이. 목이 말라도 물을 틀어 마실 수 없는 고양이를. 그리고 오늘 내가 먹고 마신 것들. 이 시간까지 그저 길을 쏘다니기만 했을 고양이들.


하루는 서점에 외국인 여성이 들어왔다. 영어로 말할 수 있는지 묻기에 나는 서툰 영어로 필요한 책이 있는지 되물었다.


“지금 밖에 고양이요. 이름 알아요?”

서점 앞에서 삼색이가 밥을 먹고 있었다.

“삼색이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외국인이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저 고양이 이름은 뷰티폴이에요.”

“뷰티폴이라고요?”

“제가 이 동네 사는데 집 앞에서 뷰티폴 밥을 줬거든요. 지난겨울부터 뷰티폴이 계속 안 보여서 걱정했는데. 오, 세상에! 여기서 밥을 먹고 있다니! 여기서 이렇게 사료를 기부해주고 있는 걸, 정말 정말 고마워요. 지나갈 때마다 고마웠어요. 그런데 뷰티폴도 여기서 밥을 먹었다니!”


“저희도 고양이를 좋아해요.”

“정말 고마워요!”


우리는 연신 서로 고맙다고 대꾸했다. 그녀는 인스타그램을 열어 밥을 먹고 있는 수많은 뷰티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름답죠? 아름다워서 이름이 뷰티폴이에요!”


삼색이의 이름이 어딘가에서 뷰티폴이었다니.


호명에는 대상을 대하는 기운이 담겨 있다. 사전에는 낱말의 의미와 그 용법은 정리할 수 있겠지만, 단어마다 각자가 다르게 느끼는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애정을 담을 수는 없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면 그 사람이 나를 대하는 마음이 전해진다. 같은 이름인데도 그때그때 뉘앙스가 다르다.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도 혼나는 기분이 들 때도 많다. 나는 혼잣말로 내 이름을 스스로 부르는 버릇이 있는데, 불안할 때 계속 이름을 부르면 묘하게도 조금 진정이 된다. 기운 내, 반가워, 사랑해, 괜찮아, 괜찮아? 그 모든 감정을 전할 수 있는 이름 부르기. 이름 부르기는 부르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기보다 대상을 대하는 마음과 둘 사이의 거리를 보여준다.



나의 안부

옷가지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늘어진 방바닥. 쌓여 있는 설거지 더미. 이런 나태한 슬픔의 시간을 꾸짖으려는 엄마의 텔레파시였을까. 무음으로 설정된 핸드폰에는 엄마가 집으로 오고 있다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나는 번개처럼 이불 밖으로 뛰쳐 나갔다.


엄마가 갑자기 집에 오겠다고 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집 안 청소와 생필품 구비였다. 나는 마트로 달려갔다. 마트에 도착한 나는 장바구니를 들고 불과 5분 전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르고 정확하게 행동했다. 쌀과 사과와 화장실 곰팡이 제거젤, 설거지 세제. 포장김을 샀다. 자, 이것으로 기본은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널려진 옷가지를 세탁기 안으로 몰아넣고, 설거지와 화장실 청소를 20분 간단 코스로 마치는 일. 할 수 있을까. 나는 장 본 것들이 담긴 종량제봉투를 들고 최고 속도로 달리며 생각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연애가 끝장나고 만신창이가 된 마음과 몸으로 몇 주 동안이나 고생했다. 사랑이라는 게 실은 인간에게 해로운 것 아닐까. 실체를 알게 되면 아무도 사랑할 엄두를 안 낼까 봐 온 세상이 작당하고 사랑하면 무조건 좋다고 주입하는 것은 아닐까. 내내 믿음, 소망, 사랑 그중 제일은 사랑이라는 너무 큰 환상을 품고 자랐다. 사랑과 마음고생과 희생은 진실한 사랑의 필수 자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잘못된 사랑은 한사람의 인생을 흔들고 몸을 부순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메신저로 다수의 사람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치근대기를 일삼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내 처지의 실상이었다. 나도 설마 피해자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나는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일탈의 피해자지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나는 배신을 확인한 순간에도 그가 오래전에 또한 근래에 정확하게 나를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주요하게 판단하려고 했다. 내가 믿었던 사랑이 얼마나 진실했는지에 연연하며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되살리는 데 몇 주의 시간과 마음을 썼다. 설거지와 빨랫감을 쌓아두고 쓰레기도 치우지 않고 방치한 채로.


그러나 나는 엄마가 온다는 소식에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 응급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직관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식사와 청소와 빨래. 의식주의 안와가 곧 최전방의 안부다. 동이 난 지 오래인 쌀을 사러 뛰쳐나가며 세월 좋게도 나는 제대로 사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내가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구나.


집에는 쌀이 있어야 한다. 내가 빼앗긴 것은 쌀을 먹고 집을 치우고 빨래를 하고 과일을 깎아 먹는 시간이었다. 자도 자도 비탄에 빠진 생각이 멈추지 않아서 수면제를 연달아 먹으며 잠 다음에 바로 다시 잠을 계속 이어가려고 했던 시간 속에서 제대로 사는 일이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일단 상대의 참회를 포기해야 했다. 살면서 알게 된 인간 세계의 비밀이라면, 나에게 해를 끼친 상대에게 나와 같은 방식의 참회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나쁜 행동을 여러 번 저지르는 사람은 앞으로도 사과나 반성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언젠가 벌을 받을 것 같지만, 그런 일은 흔치 않다. 그들은 사과할 일과 사과할 상대를 기억에서 간편히 지워버리고 마음 편히 살아간다. 밥을 먹고 몸을 씻고 방을 치우고 태평하게 과일을 깎아 먹으면서. 그렇게 그의 시간이 제대로 굴러가는 장면을 떠올리면 자꾸만 눈물이 났다. 나는 아직 일상을 찾기에는 이렇게 멀었는데 어떻게 상대에게는 그런 멀쩡한 삶이 계속될 수 있을까.


결국 나는 끝끝내 상대의 참회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상대의 참회 여부가 내 생활을 모조리 갈아 넣을 만한 일인가. 현재로서는 내 피해가 너무 크다.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인내심 좋은 인간이 되어야 할까.  



그 사람의 눈썹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우연한 일로 제주에서 한 달을 지내게 되었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아무 정보도 없는 이 먼 곳에서 내가 한 달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 나지 않았다.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 잠이 덜 깨서인지도 모르겠다. 제주공항에서 나와 100번 버스를 타고 가다가 터미널에서 702번 서일주 노선버스로 갈아탔을 때, 왠지 그냥 다시 집에 가서 눕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캐리어와 옷가방을 옆에 앉혀둔 채 설렘도 없이 가만히 창밖만 바라보았다. 버스가 출발하려고 막 움직이는 찰나에 눈에 띈 빨간색 중국집 간판을 보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저기서 짜장면을 먹고 가야지, 아무것도 기대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런 걸 계획했다.


그때 할머니 두 분이 출발하려던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얼른 타세요, 얼른 타세요. 일단 타시고 카드 찍으세요.”


운전을 멈추고 재촉하는 버스 기사님의 말에 아랑곳없이 할머니들은 달려오던 기세는 간데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버스에 탑승했다. 어서 출발해야 한다는 기사님의 말은 안 들리는 척 태연히 인사만 던진다.


“고맙수다.”

“고맙수다.”

“나 카드 없수다. 아이고 또 잊어부렀지. 카드 하나 만드는 걸.”

“오백짜리이무다. 허호~”


허호, 하며 휘파람을 불 듯 웃는 할머니의 웃음소리가들리기 전부터 나는 갑자기 설레는 마음으로 가득해졌다. 입안에 바람이 가득 들어가는 것 같은 제주도의 말.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제주가 그냥 좋아지는 것 같았다. 여기는 진짜 먼 곳이구나. 말이 아주 다르구나. 여기서 저 말을 많이 듣고 가야겠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한 달 동안 묵을 숙소의 바로 앞에 해변이 있었다. 한 발자국만 건물 박으로 딛어도 거짓말처럼 해변의 모래를 밟을 수 있었다. 가져온 옷은 그대로 캐리어에 놓아둔 채로, 나는 숙소에서 만난 사람이 내어준 펄럭이는 냉장고 바지와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도착한 다음 날부터 바로 화장도 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이 거센 바람에 날아갔다. 담배에 불을 붙이면 나보다 먼저 바람이 다 피워버렸다.


숙소 주변에는 높은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내 키에서 바다를 봤다. 그러던 어느 날, 화창한 한낮에, 2층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갈 일이 생겼다. 그 건물의 계단 청소를 돕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빗자루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큰바람이 불어왔다. 무서운 마음에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부서지는 태양 아래, 저 멀리서부터 흰 포말을 잔뜩 품은 파도가 몇 겹이나 몰려오고 있었다. 눈썹처럼 보이는 짧은 물결이 총총히 몰려오는 걸 보자마자, 나는 그 한 겹 한 겹의 모든 파도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썹 수염, 그밖에 모든 털로 보이는 걸 알았다. 파도마다 그 사람의 얼굴이 두둥실 떠오른 채 몰려오고 있었다.


이때까지 나는 그 사람이 파도를 닮았다는 걸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가슴이 사정없이 두근거리고 일렁였다. 나는 그 순간 그 사람이 전보다 더 많이 좋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파도를 닮은 사람이라니. 그렇게 말이 안 되는 사람이라니. 나는 그게 무척 좋았다. 나는 파도가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다.



외로움에 조금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 다정하다

그리워한다는 말은 어쩜 이렇게도 절묘할까. 그리워한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그를 계속 이어서 생각한다.’이다. 여기 있는 내 공간에는 없는 그와 나를 어떻게든 이으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생각한다. 그런 아련함이 애처롭다.


마음이 심란해지면 가만히 있기가 쉽지 않다. 책도 몇 줄 읽을 수 없고 중요한 업무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럴 때는 세탁과 요리가 안정제가 되어 준다.


세탁기를 돌리려고 빨아야 할 옷과 이불을 모은다. 빨고 넌다. 빨래 건조대가 하나뿐이어서 이후의 세탁물은 집 안 온갖 곳에 널어야 한다. 옷걸이와 의자를 최대한 활용한다. 베란다 문을 열어 환기까지 하면 더욱 효과가 좋다. 깨끗한 세제 냄새가 온 집안을 쾌적하게 물들인다.


날씨나 심란함 등의 이우로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땐 요리를 하는데, 그중 채소 써는 일이 으뜸이다. 혼자 살면 음식을 버리게 되는 일이 많지만, 썰어 둔 채소는 샐러드, 월남쌈, 볶음밥, 각종 볶음요리, 김밥 등등으로 계속해서 활용할 수 있다.


채소를 사와 채소를 썬다. 혹은 냉장고의 채소를 발굴해 썬다 채소를 계속 채 썬다. 당근, 양파, 양배추, 파프리카, 무 등등.


오늘의 심란함에는 우엉차가 선택되었다. 큰 냄비에 한가득 물과 우엉을 넣고 끓였다. 무언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니 열심히 한다. 물을 끓이고, 우엉을 넣고, 건져내고, 식힌다. 그사이 다시 다른 냄비에 물과 우엉을 넣고 끓이고 불 앞에서 괜히 물을 저으며 우엉이 물에 우러나기를 기다린다. 미지근하게 식은 우엉차는 간이로 만든 깔때기를 이용해 빈 생수병에 담아 냉장고에 차게 보관한다. 과정을 더 늘이고 싶은 날에는 여러 작물을 혼합한다. 인삼, 대추, 버섯 같은 것들을.


복작거시를 사이 가스처럼 팽창했던 심란함이 많이 꺼져 있다. 집중력이 산만함을 조금씩 떼서 몸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요리형 인간이 아니라 청소형 인간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래도 꽤 차분하고 이로운 방식으로 불안을 몰아낼 수 있다. 전이라도 부쳐서 이웃과 나누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아직 쉽지 않다. 주요 목적은 어디까지나 내면의 심란함 몰아내기에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재료는 시간과 조리를 거쳐 요리로 이어진다. 마음의 부산스러움도 시간과 그 대응을 거쳐 다른 것으로 이어진다. 나는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만져진다는 것이 좋았다. 마음에는 근육도 있고, 마음에는 이동 경로도 있고, 마음에는 얼굴도 있다. 시간을 들여 그러한 면면을 살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음속 대화를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사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과 사랑한다고 말하는 마음의 차이를 알고 싶다. 이런 생각은 보통 답이 없고, 답이 없는 이유는 별로 쓸데가 없기 때문인데, 보통 아주 쓸데없는 말들은 대개가 외로움을 견디는 말이다. 외로움에 조금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 더 다정하다. 외로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상대가 적어도 자신의 태도로 인해 외로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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