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이어령
ǻ
열림원
   
13000
2022�� 03��



■ 책 소개


슬프고 아름다운 이별의 마침표,
시대의 지성 이어령 유고시집

2022년 2월 26일, 시대의 지성이자 큰 스승이었던 이어령이 향년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보다 먼저 ‘하늘의 신부’가 된 딸 이민아 목사의 10주기를 앞두고 선생은 사랑하는 딸과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는 소진되어가는 생의 끝에서 오래도록 이 시들을 모아 정리하고 표지와 구성 등 엮음새를 살폈다. 그리고 먼 길을 떠나기 며칠 전, 어렴풋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서문을 불러주며 이 시집을 완성했다.

헌팅턴비치는 딸 이민아 목사가 생전 지내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도시다. 일찍이 떠나 닿을 수 없게 된 딸을 그리워하는 ‘아버지 이어령’의 마음은 정제된 시어를 통해 투명한 슬픔으로 빛난다.

■ 저자 이어령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석좌교수,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으로 편집을 이끌었다.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주관했으며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냈다.

대표 저서로 『지성에서 영성으로』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생명이 자본이다』 『젊음의 탄생』 등이 있고, 소설 『장군의 수염』 『환각의 다리』와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펴냈으며, 희곡과 시나리오 「기적을 파는 백화점」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사자와의 경주」 등을 집필했다. 2021년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선정되어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2022년 2월 26일 향년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 차례
서문

1 까마귀의 노래
당신에겐 눈물이 있다
꽃과 빵
야곱의 우물물이 눈물이 되던 날
눈물 없이는 먹을 수 없는 빵
기도는 접속이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제비
비둘기
까마귀의 노래
독수리의 눈
지팡이를 드신 분
욥의 노래
생물
십자가
까치밥
백두산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꽃 하나의 의미

2 한 방울의 눈물에서 시작되는 생
빈 운동장의 경주
추위에 바치는 노래
한 방울의 눈물에서 시작되는 생
바다와 하늘로 만든 김자반의 맛
돌상의 책과 금반지
쓴 사과
나의 몸 나의 방
미친 금붕어
어머니는 단청 같은 문화예요
어머니 냄새
생각하지
볼보를 만드는 사람들
다이애나 허그
달리기
왜 늑대가 온다고 했는가
35억 년의 진화
보이지 않는 십일면관음보살
까마귀와 편견
마음을 열고
사랑으로 크면
마음
손을 펴봐요

3 푸른 아기집을 위해서
사자의 눈
말 한마디로
젓가락의 의미
내일은 없어도 모레는 있다
푸른 아기집을 위해서
뜸 들이기
거울 보기
비행기
그네 타기
초록색 별
천억 개의 컴퓨터를 가진 아기
세워놓고 보는 동전
신 포도를 먹고 사는 사람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듯이
활이 아니라 하프가 되거라
네 머리에 나비가 앉으면 리본이 되지
찰흙 놀이
엄마 아빠는 한 사람
이 세상에서 제일 값진 방울
시계
혀가 이겨
뭐든지 아빠처럼
잠은 솔솔

4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살아 있는 게 정말 미안하다
오늘도 아침이 왔다
네버랜드로 가자
달리다 굼
목숨의 깃발
숨겨진 수의 기적
죽음의 속도계
겨울이 아직 멀었는데
만우절 거짓말
사진처럼 강한 것은 없다
사진 찍던 자리
하나의 아침을 위하여
전화를 걸 수 없구나
기억 상자
네가 앉았던 자리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네 생각
그 많은 사람들이 저기 있는데
돈으로 안 되는 것
죽음에는 수사학이 없다
무덤
지금 몇 시지
가나의 결혼식
하늘의 신부가 된 너의 숨소리
혹시 너인가 해서
바람 부는 저녁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5 부록
만전춘의 오리가 우리에게로
마음을 담은 연적
비취보다 더 푸르고 아름다운
어디에 있다가 이제 왔는가
국화, 점들의 기도
너와 내가 하나가 되듯
천년의 침향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까마귀의 노래

당신에겐 눈물이 있다

당신에게 눈물이 있다는 것은

영혼이 있다는 것

사랑이 있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하고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것

그리고 뉘우친다는 것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비가 그치자 나타난 무지개처럼 아름답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는 것은

가난 때문이 아니다

가난을 넘어서는 사랑의 눈물에서만

영혼의 무지개가 뜬다.



생물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천의 물결로 빛나는 강물이거나

천의 이파리가 흔들리는 수풀이거나


움직이는 것은 모두 다 아름답다


살아서 소리 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천의 지저귀는 새소리거나

천의 갈래로 쏟아지는 빗소리거나


소리 나는 것은 모두 다 즐겁다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고

그리고 이슬에 젖은 포도알을 터뜨리는

여름 아침


살아서 어금니로 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



까치밥

감나무에 감들이

저녁 해처럼

빨갛게 빨갛게 익으면

가을이 오고

나뭇잎이 지고

서리가 내리고

그러면 겨울이 온단다


사람들은 겨울에 먹으려고

감을 딴단다

그러나 감나무 꼭대기에

가장 큰 녀석 하나는 따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단다


왜?

까치가 먹으라고

그래서 나뭇가지 위에 혼자 남은 감을

까치밥이라고 한단다

겨울, 추운 바람에 배고픈 까치가 와서

배불리 먹으라고

까치밥이라고 한단다.



한 방울의 눈물에서 시작되는 생

빈 운동장의 경주

어머니 운동회 날입니다

줄마다 만국기가 휘날리는 하얀

운동장을 달렸습니다 햇빛이 너무 부셔

모자 차양을 세우고 달렸습니다


숨이 차고 발이 떨어지지 않아도

심장이 터지라고 뛰었습니다

상장이 탐나고 박수를 받고 싶어

그렇게 뛴 게 아닙니다

마치 먹잇감을 쫓는 사자처럼

혹은 사자에게 쫓기는 가젤처럼

옆에 아이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오늘에서야 압니다 어머니 운동회가 끝났는데도

운동모자와 러닝셔츠를 벗었는데도 나는

지금도 뛰어야 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누가 호루라기를 불어서가 아닙니다


목숨이 있어서 바람이 불어서 숨차냐 하고

어머니가 물으셔도

나는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생명의 나무들과

함께 경주를 합니다.



생각하지

‘사랑’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생각’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생각한다는 것을 사랑한다고 했지요

희랍말도 그래요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오래 생각하는 것이고, 참된 것은 오래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어줍시다

어머니가 읽어준 동화 한 편, 어머니가 불러준 노래 한 곡조,

어머니가 꽂아준 꽃 한 송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갖지 못한 이처럼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달리기

무릎을 깨뜨리면서도 아이들은 달리기를 합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뛰기 위해서,

남보다 한 발짝이라도 앞서기 위해서,

아이들은 달리기 내기를 합니다

산다는 것은 달리기이지요

그것은 경쟁, 그것은 승부, 그것은 성취입니다

아이들이 달릴 때 우리는 대신 달려줄 수는 없지만,

응원을 할 수는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에다 하나를 보태는 것도 모르는 아이라고

에디슨을 비웃었을 때

그에게 용기를 준 이는 어머니였습니다

그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이해하고 도와준 사람은 어머니였지요

어머니는 달리는 아이의 응원가입니다

관심, 그것이 바로 힘찬 응원가입니다



푸른 아기집을 위해서

푸른 아기집을 위해서

아이들은 엄지손을 안으로 쥐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열 달 동안 자기를 키운 아기집이 상처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음에 태어날 동생들을 위해서,

조심스럽게 두 주먹을 꼭 움켜쥐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내 손자와 그 손자의 손자들을 잉태하고 키워갈 천년의 모태를

백 년도 못 사는 몸 하나 보신하자고 강철의 손톱으로 찢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임자가 아닙니다

잠시 맡아 있는 관리자일 뿐


그래요, 그 옛날 고려가요에서 천년을 노래 부른 서경별곡처럼,

구슬이 바위에 떨어져도 그 끈은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즈믄 해를 외로이 있어도 믿음이 그치지 않는 것처럼,

아기의 주먹 쥔 작은 손 안에 그 끈이 있어요

그 믿음이 있어요

아기집을 상처 지게 하지 않으려고

엄지손을 안으로 쥐고 이 세상에 태어나듯이

푸른 숲, 푸른 대지, 푸른 강을 위해서 주먹을 쥐세요

천년 동안 내 아기들이 살아갈 아기집을 위해서 주먹을 쥐세요.



잠은 솔솔

잠은 아무 소리도 없이 오는데

사람들은 

잠이 솔솔 온다고도 하고

잠이 살살 온다고도 하고


눈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히 내리는데

사람들은 눈이 펑펑 내린다고도 하고

눈이 사락사락 내린다고도 하고


새는 아무 소리도 없이

하늘에서 날고 있는데

사람들은

새가 훨훨 난다고도 하고

새가 씽씽 난다고도 하고


그러나 나도 들을 수가 있어요

내가 엄마에게 뽀뽀를 할 때

엄마 가슴이 뛰는 소리를

내가 아빠에게 뽀뽀를 할 때

아빠의 가슴이 뛰는 소리를


잠처럼 솔솔

눈처럼 펑펑

새처럼 훨훨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어요.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살아 있는 게 정말 미안하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네가 혼자 긴 겨울밤을 그리도 아파하는데

나는 코를 골며 잤나보다


내 살 내 뼈를 나눠준 몸이라 하지만

어떻게 하나 허파에 물이 차 답답하다는데

한 호흡의 입김도 널 위해 나눠줄 수 없으니


네가 울 때 나는 웃고 있었나보다

아니지 널 위해 함께 눈물 흘려도

저 유리창에 흐르는 빗방울과 무엇이 다르랴

네가 금 간 천장을 보고 있을 때

나는 바깥세상 그 많은 색깔들을 보고 있구나


금을 긋듯이 야위워가는 너의 얼굴

내려가는 체중계의 바늘을 보며

널 위해 한 봉지 약만도 못한 글을 쓴다


힘줄이 없는 시

정맥만 보이는 시를

오늘도 쓴다

차라리 언어가 너의 고통을 멈추는

수면제였으면 좋겠다


민아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살아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것이

미안하다 민아야

너무 미안하다.



사진처럼 강한 것은 없다

사진처럼 힘이 센 것도 없더라

웃고 있는 너의 미소를

눈빛 속의 생명을

세상 어떤 고통 어떤 질병도

너의 얼굴을 지우지 못한다


사진처럼 영원한 것도 없더라

죽음의 그림자도 너의 빛을

가리지 못한다

겨울이 오고 바람 불고

밖에 서리가 내려도

사진 속 장미는 시들지 않아


사진처럼 슬픈 것도 없더라

손을 뻗어도 다가오지 않는 너

정적밖에는 듣지 못하는 너

나는 울고 있는데 너는 웃는다

딴 세상 속의 고요


하나님은 사진사

사진처럼 힘세고 슬픈 것도 없더라.



네가 앉았던 자리

네가 앉았다가 떠난 의자에

내가 앉는다

네가 빠져나간 것만큼

가벼워진 나의 몸무게


과학실험을 했더니

영혼의 중량은 21그램

라면 한 젓가락의 무게

영화 제목이 그렇게 말하더라

정말

그렇게 가벼우면 좀 좋으랴


그렇게 가벼우면 떠서 난다

구름이 흘러간 자국처럼

네가 앉았던 자리에 놓인


물건들마다 공중부양

요술처럼 떠다닐 거다

너처럼 지하에 묻히겠는가


네가 앉았던 자리가

소파와 방석과 하얀 시트가

눈부신 하늘의 구름이 된다


오늘 살아서

나 혼자 땅끝

하늘의 구름을 본다


네가 못 보는 강가의 조약돌

바다의 모든 것

산의 모든 것


황혼과 그냥 까맣기만 한

밤을 나 혼자 본다


네가 못 듣는 빗방울 소리

나 혼자 누워서 듣는다


오늘 살아서

시계를 보고 집을 나선다

어제처럼 네가 없는 시간 속으로

혼자 간다


네가 없다

같이 있었는데

같이 있었는데


정말 같이 있었는데

네가 없다


거기 그 자리 네가 앉아 있었는데

네가 없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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