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은한 청진기엔 장난기를 담아야 한다

   
이낙원
ǻ
21세기북스
   
15000
2022�� 03��



■ 책 소개


논문보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문제적 의사’ 이낙원,
생사를 가름하는 숙명의 무게를 버티며 자신과 타인을 지켜나가는 이야기

이 책은 한마디로 마스크 밖으로 청진기 밖으로 흘러넘친 사랑과 회복에 관한 이야기다. 위드 코로나 시대라는 공간과 사건 속에서 ‘의사’의 시선을 빌려 자신와 타인의 이야기들을 부지런히 옮긴 이 책을 통해 힘들어서 곧 넘어질 것 같은 사람, 뭐라도 붙들고 일어나야 하는 사람, 직종에 관계 없이 ‘충분히 지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뜨거운 격려를 받아안을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이낙원
연세대학교 원주 세브란스병원에서 내과와 호흡기 분과를 연마했으며, 현재 인천 나은병원의 호흡기내과 의사이자 중환자 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바이러스’와 ‘세균’은 몸만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몸 밖으로 드러나는 감정, 몸과 몸이 맺는 관계들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 때문에 미생물과 함께 살아가는 몸을 소재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지은 책으로는 『바이러스와 인간』, 『별, 할머니, 미생물, 그리고 사랑』, 『우리는 영원하지 않아서』, 『몸 묵상』 등이 있다.

■ 차례
들어가는 말_ 의사는 되어가는 것입니다

1 의사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어쩌다 내과의사
병원은 내 속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책임진다는 것의 무게
스스로 차가워지기
측은한 청진기
분별 있게 화내기
무료한 ‘방 생활’을 버티는 법
감정의 시소 플레이어
차가워진 가슴에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2 의사의 일상, 환자의 비일상
감정의 불시착
기댈 수 있는 작은 언덕
마지막 안부
환자의 시간, 의료진의 시간
쫄깃쫄깃한 힘
‘흰’으로 돌아가다
환자의 멋
든든한 맛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모순

3 논문보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의사
의사는 무얼 먹고 사는가
의사가 있어야 할 곳
내면에서 뛰쳐나온 기쁨
호기심으로 공부하기
말랑한 정신에 유머가 깃든다
의사의 진로
감정의 청진기
소설 읽는 의사

4 ‘위드 코로나’ 의사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백신 접종실의 루틴
불안 바이러스
격리된 나날
지구전이다
누를 수 없는 버튼
어떻게 벗느냐
격리되지 않는 마음
눈이 뻑뻑한 가을을 기다리며
위드 코로나, 위드 마스크, 위드 스마일
유전자의 바다
한 줄로 쓰기엔 아까운
길 잃은 슬픔
극도의 긴장
미안하다, 한 명만 더!

맺음말_ 나는 의사다

 




측은한 청진기엔 장난기를 담아야 한다

의사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측은한 청진기
나는 잠을 잘 때 넥타이로 눈을 가리는 습관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 말로 내가 잘 때 내 눈에 흰자위가 조금 보인다고 한다. 눈꺼풀이 선천적으로 약간 모자라 눈을 다 덮지 못하는 모양이다. 24시간 불이 켜진 당직 방에서 쪽잠을 자려면 빛을 가려야 하는데, 목에 달린 넥타이는 휴대용 수면 안대의 역할을 했다. 

당직방 소파에 누워 넥타이로 눈을 가리는데, 시간이 새벽 2시였다. “아, 인간적으로 이건 불행해”라고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그래도 괜찮아”라는 말을 속으로 한 적은 없지만, 어딘가 다른 당직방에서 누워 잠을 청하는 동기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위로가 되었고,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쾡한 눈으로 병동을 돌아다니는 동료들을 생각하면 견딜 힘을 얻었다. 

돌아보면 혼자라면 포기하고 말았을 일들이었으며, 미리 알았다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생활이었다.

넥타이와 더불어 청진기는 우리와 희로애락을 같이 하는 물건이었다. 1년 차가 되자마자 단체로 구입한 청진기를 나누어 맨 우리는 청진기에 이름의 이니셜을 새기는 일부터 했다. 이후로 청진기는 자는 시간을 빼고는 줄곧 우리 어깨를 타고 다녔다. 시간이 모자라 뛰어야 할 때는 어깨에 걸려 있는 청진기 머리가 가슴을 내리쳐서 청진기를 손에 들고 뛰었다. 

전공의 시절,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해봄직한 ‘일탈’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도망’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홀연히 모든 일손을 놓은 채 잠적해버리는 것이다. ‘사직’이라든가 ‘이직’과 같은 일반적인 단어를 쓰지 않는 이유가 있다. 사직서를 제출한다거나 다른 직장으로 옮긴다거나 하는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체적 정신적 일과들을 감당하느라고 벼랑 끝까지 몰렸던 몸과 정신이 헛발질을 하고 마는 형국이랄까. 

예를 들어 밤사이 환자가 한 명이 사망했고, 심폐소생술을 두 건을 했고, 사망한 환자의 보호자는 병원의 실수라면서 화가 나 있고, 밀린 일들이 남아 있는데 회진 시간이 다가온다.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고 일부는 나의 능력을 벗어나 있으며, 이 모든 것을 평가받는 시간이 다가오면 눈앞이 깜깜해진다. 

“아, 더는 못 버티겠어” 하는 자괴감과 “더는 이렇게 일할 수 없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면 가운을 벗어놓고 홀연히 병원문을 열고 나서게 된다. 물론 삐삐는 당직실에 놓고 휴대폰은 꺼놓은 채로. 

아침에 아무개 전공의가 연락이 안 된다는 소식이 병원에 퍼지면, 위의 연차와 같은 과에서 함께 일하는 동기들은 비상이다. 남아 있는 일들을 함께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원망이나 비난하는 마음은 없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원망하는 맘에 비난이라도 한다면 동기가 영영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한 며칠 쉬다 보면 좋아지겠지 하며, 며칠 후 연락을 해보고 설득한다. 

함께 일하던 몇 명의 전공의들이 도망을 갔었지만 모두 돌아왔다. 돌아온 이유의 절반 이상은 아마도 함께 일하는 동료들 때문일 것이다. 병원 일이라는 게 의사 수에 맞추어서 조정이 되는 곳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전문의는 환자에 대한 처치를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무거운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병원은 실수에 대해서 관용적일 수 없는 곳이다. 수련 생활을 마치고 일선 병원에 나와서 일하며 가끔 병원이 ‘야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홀로 결정하고 처치하고, 그에 대한 평가가 다시 고스란히 내게 돌아온다. 실수한다고 용서해주지 않으며, 뒷걸음질치거나 넘어질 때 누가 잡아주지 않는다. 도망간다고 대신해서 일을 거들어주는 사람도 없다. 성체가 되어서 홀로 무림을 누비는 야생고양이과 동물의 삶에 가깝다. 

그러나 고양이도 성장 과정에서는 또래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무리를 지어 몰려다녀야 하고 친구들과 장난치며 생존방식을 익힌다. 의과대학과 수련 과정을 함께했던 친구들은 함께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또래들이었다. 그 길을 함께 준비했던 동료들이 있었음에 새삼 감사한다. 


의사의 일상, 환자의 비일상
환자의 멋
환자의 아들이 진료실을 찾아왔다. 우리는 폐렴으로 입원치료 받고 있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폐렴이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다 보니 환자는 환자대로 지치고 가족들은 그런 환자를 보는 것이 고통이었다. 아들은 아흔이 넘은 아버지를 편하게 돌아가시게 해드리고 싶다고 했다. 가족들 모두 같은 의견이라고, 더 이상 고통 속에 사는 것을 보는 것도 힘들다고 했다. 나는 가족들 의견에 동의했고, 적극적인 처치는 일체 중단하기로 했다. 기관지내시경으로 가래를 뽑아내는 수고로운 처치도 하지 않기로 했고, 혹시 효과가 있을지 몰라 사용하던 고가의 항생제도 중단했다. 최소한의 수액과 콧줄로 투여하던 식사만 유지하기로 했다. 

다음 날 회진을 돌 때였다. 바로 그 환자의 병실로 들어서는데 환자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경관식이를 하는 콧줄에다가 산소를 공급하는 비강 캐뉼라까지 있으니 얼굴이 여러 선으로 복잡했는데, 그 위로 안경을 쓰고 있었다. 금빛 안경테가 할아버지의 황금빛 민머리와 잘 어울렸다. 이제 보니 아주 지적인 신사분 아닌가. 

나도 모르게 “안경이 멋지셔요. 잘 어울립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부적절한 표현이었다. 폐렴으로 고통받고 있고, 곧 돌아가실 날을 기다리는 분에게 안경이 멋지다니. 가족들이 들었다면 불쾌했을 수 있는 표현이었다. 나는 가족들이 주위에 없음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런데 내 말에 할아버지 눈빛이 움직였다. 할아버지는 크고 검은 눈동자를 돌려 나를 또렷이 쳐다봤다. 평소에는 거의 반응이 없던 분이었는데, 처음으로 나에게 관심을 표한 것이다. 아마도 얼굴 표정을 움직일 힘이 있었다면 미소를 지었을 것 같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쾌해졌다. 

오늘 환자를 대할 때 달라진 것은 커다란 생각 하나를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이다. 그 ‘의도’를 내려놓고 회진을 도니 안경이 보였다. 그리고 ‘방정맞은’ 입도 터졌다. 생이 얼마 안 남은 분에게 안경이 어울린다고 했다. 

‘죽음 앞에서 안경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며칠 안 남은 생이기에 더더욱 어떻게든 이 순간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몸에 걸친 하나라도 예쁘고 멋져 보인다면, 또 그것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방법이 된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면 실존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고 했다. 맞는 말 같다. 예정된 죽음이 뚜렷하게 보이는 현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순간,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안경, 그것도 황금빛 이마와 어울리는 안경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안경이 어울리는 그 사람이 지금 여기 있다는 ‘실존’이 드러나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집착하다 보면 정작 진짜 중요한 순간을 놓칠 수도 있다. 

60대 중반 여성 환자분의 회진을 돌 때였다. 환자는 폐암으로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고, 부작용으로 인해 머리카락도 빠지고 피부 트러블도 심했다. 병실에 들어서는데, 환자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손가락을 오므렸다. 나중에 대화하다가 보이는 손가락 손톱에는 네일아트가 그려져 있었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네일아트를 해주는 행사를 했는데, 아마도 행사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환자는 자기 손톱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적어도 나는 그랬을 거라고 추측했다. 생과 사를 가를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인 항암치료를 받는 사람이 손톱과 같은 사소한 일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 역시 못 본 척했다. 돌아보면 아쉬운 순간이다. 그 순간에 “손톱이 예뻐지셨네요”라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 것이다. 환자도 나도 한순간 또는 몇 시간 동안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생각해보니 요즘 회진을 포함한 병원 생활이 부쩍 재미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환자들과의 대화도 그렇고, 농담도 잘 안 한다. 머릿속에 온갖 다른 생각들이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 앞자리에 앉은 박과장에게 농담 삼아 물었다. 

“야, 사는 게 왜 재미가 없냐?”

박과장이 말했다. 

“생각이 많아서 그래. 술이나 마셔.”

이 재미진 현답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것인데, 두고두고 맞는 말이라서 잊히질 않는다. ‘생각이 많아서’가 문제다. 이것 때문에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그냥 묻힌다. 생동감 있는 ‘순간’들이 으레 겪고 지나가는 따분한 순간이 되어버린다. 생각을 놓아야 현실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많이 생각하는 문제가 중요한 문제라고 착각하는 오류에 빠진다. 우리의 골통은 작아서 쉽게 사소한 생각들에 점령당해버리고 만다. 사소한 것들이 골을 반복적으로 치면 세상 중차대한 골칫거리로 둔갑한다. 사실 따져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이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압도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 가끔은 정신을 리셋해야 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로 이 땅에 왔음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회진을 돌 때 환자들의 얼굴을 오롯이 쳐다보았다. 집중하니 느낌이 다르다. 다 내려놓고 그저 얼굴만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할 말도 생기고 여유도 생기고 재미도 생긴다. 이참에 더 노력해보기로 한다. 좀 더 실존적 자세로 삶을 대하는 것이다. 여러 계산을 내려놓고 회진을 돌 것이며, 만나는 ‘얼굴’들에 집중할 것이며, 안경이 멋진 분 또는 손톱이 예쁜 분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논문보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의사
감정의 청진기
환자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보겠노라고 1년 정도 열심히 글을 쓴 적이 있다. 치료 과정에서 생겼던 일이나 환자 또는 가족과 나누었던 대화가 이야기의 주재료가 되었다. 사실 평소 바쁜 일정 때문에 환자의 이야기를 길게 듣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이 시기에는 가급적 많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진료실에서 환자가 나가자마자 바탕화면에 한글 프로그램을 띄우고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를 적었고, 심지어 환자가 작심하고 긴 이야기를 할 때는 적으면서 듣기도 했다. 입원 환자들을 회진하고 나서 진료실에서 제일 먼저한 것 역시 환자와 나눈 생생한 대화가 기억에서 소실되기 전에 적는 것이었다. 

그렇게 쓰인 문장들을 시간이 날 때 다시 읽어보았고, 거기에 나의 느낌을 입혀서 하나의 에피소드를 완성했다.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2년이 걸렸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얻은 것들은 단순히 책을 출간했다는 것 이상이었다. 기대 이상의 예상하지 못했던 수확이 있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의사에게 글쓰기가 왜 중요한지 정리해보았다. 

글은 세밀한 감정의 청진기
병원은 두 가지의 시간대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의사들의 ‘일상’이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과 환자와 가족들의 절박한 ‘비일상’이 흘러가는 카이로스의 시간. 하여 의사는 스스로 자각하지 않는다면 ‘일상’의 눈으로 ‘비일상’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 때문에 대부분의 경험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기 쉽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의료인이 아니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사건들임에도 의사는 무심히 흘려버리고 잊어버린다. 누군가가 병에 걸렸다면 ‘병원이니까’ 생기는 일인 것이고, 나는 직업이 의사니까 그런 일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글은 이런 무심히 지나쳐버린 일상에서 ‘의미’들을 건져 올리는 낚시 같은 역할을 한다. 무심히 기억나는 대로 쓴 글에서 평소 같았으면 그냥 버리고 말았을 의미가 낚이기도 하고, 가끔이지만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을 건져 올릴 때도 있다. 나 자신의 대응이 과도했다는 성찰을 하게 되기도 하고, 환자나 가족의 세심한 감정을 뒤늦게 파악하게 되기도 한다. 가끔은 뒤늦은 발견에 짜릿함이나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글쓰기의 재미를 더해주고 글쓰기를 계속하게 해주는 동력이 되어준다. 손맛을 알면 낚시를 놓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2017년 출간한 『우리는 영원하지 않아서』라는 책을 쓰면서야 알게 된 사실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임종을 앞둔 가족들과의 면담 과정에서 느꼈던 것인데, 그들의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과거보다 더욱 크다는 것이다. 대화를 깊게 할수록 그것을 더 확연하게 느꼈다. 

그 변화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시작한 공부를 통해 죽음을 다루는 문화와 제도가 바뀌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역시 글을 써보지 않으면 몰랐을 사실들이다. 또한 죽음 앞에서 의연하며, 죽기 전까지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 연로한 어머니들의 마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회진 시간에 있었던 몇 분간의 진료일 뿐이지만, 그 순간을 글로 남기고 나면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여러 감정을 뒤늦게 알 수 있다. 글은 세밀한 감정의 청진기라 할 수 있다. 

문제적 글쓰기
의사로 살면서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감정을 다루는 스킬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 이것을 학생 때는 가르쳐주질 않았을까 의구심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나와 타인의 감정선을 조율하고, 적절한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이 진료 현장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의사들의 훈련 과정은 지식과 기술 습득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 현장에서는 감정을 다루는 일이 질병을 다루는 못지않게 중요한데 말이다. 아마도 학문의 대상에 ‘나 자신’이 포함되지 않는 현대과학의 한계가 아닐까. 

의학이라는 학문 분야는 현대과학의 최전선의 결과물들을 사람에게 적용하는 학문이라 논문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지나치다는 느낌이 있다. 논문의 중요성을 폄하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균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교육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논문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문학과 인문학이 지나치게 경시되어 있는 것 같다. 배우는 과정도 부족하고 학생들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나 역시 학생 때 소설을 읽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봤자, 허구잖아, 잠깐의 재미지 뭐가 남겠어?’라고 생각했따. 아마도 많은 의대생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독서와 글쓰기는 그 효능이 서서히 살면서 나타난다. 시험 위주의 생활 속에서 사실, 이 두 가지를 수행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들에게 논문이 아닌 글쓰기는 매우 낯선 영역이다. 말 그대로 ‘문제적’이다. 동료 의사들만 보아도 독서를 하고 글쓰기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드물다. 그러나 진료 현장에 나와서 10여 년 일을 해오면서 글쓰기가 아니었다면 나의 삶이 질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거라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글은 세밀한 감정의 청진기이고, 나를 주인으로 회복해주는 길잡이다. 또한 글쓰기를 자신과 타인을 더욱 잘 이해하는 방법이다. 진료 현장에서 의학적 지식 다음으로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위드 코로나’ 의사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위드 코로나, 위드 마스크, 위드 스마일
아침 회진을 돌고 내려오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 보호복과 마스크를 벗을 날이 당분간은 오지 않겠구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스크를 벗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대화하게 되는 기대를 어찌 접겠는가. 백신 접종률만 높아지면 가능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기대를, 이제는, 정말 접어야 한다. 두 달만 버티면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두 달이 아니라 2년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위드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 할 일이 생겼다. 코로나19가 인간 사회에서 나갈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그 존재를 인정하면서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첫 번째는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위드 코로나는 곧 위드 마스크이고, 위드 손 씻기이며, 위드 추가접종이다. 바뀌어버린 생활습관을 받아들이고 나서도 꼭 필요한 게 하나 더 있다. 위드 스마일. 돌아보니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후 웃는 일이 부쩍 적어진 것 같다. 코로나 19의 대유행 이후 유머도 장난기 섞인 농담도 많이 줄었다. 

시인 이성복은 본인의 문학을 지탱하는 축 세 가지로 진지함, 측은함 그리고 장난기를 들었다. 시인의 자질로서 진지함과 측은함은 당연한데, 장난기는 의외라고 생각을 했었다. 고뇌하고 사색하며 단어 하나하나를 써내려가는 시인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성복 시인은 진실에 대한 지향을 위해 ‘진지함’이, 윤리적 책임감을 위해 ‘측은함’이, 예술가가 되기 위해 ‘장난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예술? 맞다. 무엇이 예술인지는 깊이 이해하지는 못해도 느낌은 알 것 같다. 남들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만 있어서는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생각 느낌이 있어야 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예술가다. 그런 사람이라야 타인에게 공감도 할 수 있으리라. 장난은 나 자신을 찾는 시작이 아닐까. 내 느낌대로 어떤 흐름에 어깃장을 놓는 것, 그 순간 내 느낌만 가지고도 미소를 짓게 할 수 있는 것이 장난이다. 

2019년 시작된 거대한 무엇이 나에게 마스크를 강제할 수는 있어도, 강제로 미소를 짓게 할 수는 없다. 미소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니까. 썩소(썩은 미소)도 좋고 키득거리는 미소도 좋고, 그냥 뭐가 좋은지 몰라 허공에 피워내는 미소도 좋다. 미소를 되찾자. 똑같은 삶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처연한 생존기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발랄한 예술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이 될지는 삶의 주체인 당사자의 결정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