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넘는 거, 습관이시죠?

   
봄쏙 외
ǻ
필름(Feelm)
   
14800
2022�� 01��



■ 책 소개


“선은 넘지 말라고 있는 겁니다!”
제멋대로 선을 넘나드는 사람들과 안전거리 지키는 법

우리의 인생은 늘 고통의 연속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매일 아침 힘겹게 눈을 떠야 하고, 이유 없이 시비를 거는 사람, 호의를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 거짓말하고 뒤통수치는 사람 등 사고는 나 혼자 조심하고 배려한다고 안 생기는 건 아니다. 오히려 양보하고 배려할수록 우습게 볼 때가 더 많고, 상대가 100% 잘못해도 쌍방 과실이 될 수도 있다. 알다시피 고통의 정수는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人災)’가 대부분이다. 

저자는 이처럼 매 순간 겪게 되는 삶의 고통사고를 100% 공감 가는 사례를 통해 설명하며, 제멋대로 선을 넘나드는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안전선을 그어 주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남들이 뭐라 하든 고통사고로 힘들어하는 나 자신에게 큰 소리로 “보험처리 다 되니까, 기죽지 말자!”고 외친다.

■ 저자 
봄쏙
나무늘보 같은 집순이지만, 무언가를 찾아 놀고 먹기엔 혈안인 어른이. 어쩌다 보니 기사 쓰고 콘텐츠 만드는 미생으로 살았고, 〈회의하는 회사원〉 SNS에 힘을 보태다 글까지 같이 쓰게 됐다. 지금은 어쩐지, 글쓰기나 포토샵 외에 자기가 그린 캐릭터들과 노는 데에도 열심이다.

마음의 선을 지키는 글과 그림을 전하고 싶다. 이 책도 그랬으면 좋겠다.

@bomssok

서제학
1.9kg의 약한 몸으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갔지만, 그 덕에 온갖 한약을 들이켜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다. 한 회사의 TV 광고에 감명받아 광고학을 전공했는데, 그 회사의 경쟁사에 입사해 광고와 마케팅 일을 하고 있다. 〈회의하는 회사원〉 SNS의 인기로 공중파 방송 섭외까지 들어왔지만, 직장 눈치 보다 인생 세 번의 기회 중 한 번을 날려버렸다. 이 책이 두 번째 기회다.

가족, 지인들의 마음은 잘 보듬어 주는 편이지만, 막상 내 마음 곪아 터지는 줄 모르고 살았었다. 다행히 지금은 괜찮다. 오히려 좋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글을 쓰면서 나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곤 한다. 착한 사람들이 행복하고, 나쁜 놈들은 벌 받았으면 좋겠다.

@whoesawon

■ 차례
프롤로그

PART 1 고통사고도 보험처리가 되나요?
쿠크다스 멘탈
힘들어 죽겠다?
유체 이탈이 필요한 날
자신감과 자존감의 경계
칭찬은 새우도 춤추게 한다
평가의 가치
경력과 능력의 상관관계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PART 2 나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어
피해, 피하라고!
예의 없는 자들을 위한 예의
선의를 빌려주지 마라
또라이 백신 도입 시급
클랙슨이 필요한 순간
인간 코스프레
을질주의보
이(놈) 또한 지나가리라
양치기 직장인

PART 3 변화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니까
방향제 솔루션
의지박약인의 마음가짐
비흡연자의 대처법
행복의 알고리즘
포기를 아는 남자
마음가짐의 묘미
당근이세요?
오늘의 특별 보상
과정 없는 결과는 없어

PART 4 모두가 같은 속도로 달릴 필요는 없어
행복이 뭐 별건가
아웃스타그램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든다
내 몸에 맞는 옷
인생은 속도가 아닌 거리
우리 다음 신호에서 만나자
‘High Risk’ or ‘No Risk’
꼰대의 기준
백발의 키다리 아저씨

PART 5 가끔은 적절한 브레이크도 필요한 법
쉴까, 말까 할 땐
가장 부질없는 것
오늘은 분리수거하는 날
추진력을 얻기 위함
빨강 머리 맨
뭣이 중헌디
완벽한 무계획
세잎클로버와 네잎클로버
우리의 시간은 소중하니까

엔딩크레딧

 




선 넘는 거, 습관이시죠?


누구에게나 사고는 일어날 수 있으니까

고통사고도 보험처리가 되나요?

쿵! 순식간이었다. 좁은 길에서 마주 오던 사량이 멈춰있던 내 차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묵직한 충격이 가해졌다. ‘왜 계속 이쪽으로 오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일어난 접촉 사고였다. 면허를 딴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터라 특히나 더 조심하며 방어 운전을 했는데, 어이없게도 아파트 단지 내에서 첫 교통사고를 겪게 된 것이다.


생애 첫 교통사고의 충격에 잠시 나가 있던 내 정신을 불러들인 건 상대 차량 운전자의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아니 이 좁은 길에 가만히 서 있으면 어떡해! 더 바짝 옆으로 붙였어야지!” 유튜브 채널 <한문철 TV> 애청자로서 판단했을 때, 10:0으로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무사고 운전경력 30년”을 운운하며 확신에 차 비난을 퍼붓는 상대방의 말에 되레 ‘내가 잘못한 건가?’ 싶어졌다. 나는 막 수면 내시경을 마친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다 결국 죄송하다며 사과를 해버렸고, 상대 가해자는 “피차 큰 기스 없으니 그냥 넘어갑시다!”라며 그 자리를 유유히 떠나버렸다.


요즘 같으면 “쿵!” 하기도 전에 뒷목에 손부터 얹고 ‘합의금으로 뭘 살까?’하며 상상 속 장바구니를 가득 채울 터인데, 그때의 나는 너무 순진했고, 상대보다는 나 자신을 자책하는 게 더 쉬운 길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삶에서도 이런 억울한 교통사고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잘못은 남이 했지만 사과는 내가 하고, 지시는 상사가 했지만 책임은 내가 지고, 믿은 건 나지만 상처는 내가 받는, 그런 일들 말이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일반화, 합리화에 의한 억울함까지 추가되어 내가 받는 고통은 2배 아니, 3배가 되는 이른바 ‘고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고통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집 밖에 일절 나가지 않고 배민과 요기요 VVIP로 생활하며 사회와 단절한다면 모를까.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형성하고,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한다면 우리 모두는 고통사고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이때 꼭 알아야 할 것은 마치 내가 처음 겪었던 교통사고처럼 피해자가 오히려 자신을 의심하고 자책하는 일만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해자인 ‘고통사고 유발자’들은 피해자의 그런 심리를 교모하게 파고들어 책임을 전가하고 가스라이팅하는 데 타고난 귀재들이기 때문이다.


고통사고에 대해 잘 알고 피할 수 있다면 무조건 피하는 게 베스트이고, 만약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되더라도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 사고 뒤처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1.나에 대한 비난이나 평가의 가치는 상대의 직급이나 연령의 고하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님을 명심할 것.

2.많은 이들이 나의 능력을 의심하고 인정하지 않더라도 나만은 끝까지 나 자신을 믿고 지지할 것.

3.행복의 기준을 남의 시선이 아닌 내 안에서부터 찾는 연습을 할 것.


아마도 고통사고 유발자들은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본인이 선을 넘는다는 자각조차 없을 터이니, 이 책을 읽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얘기하겠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매일같이 각자의 억울하고 힘겨운 고통사고를 겪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절대적으로 능력이 부족하거나 인생을 잘못 살아서 겪는 사고가 결코 아님을. 대부분은 가만히 있는 나에게 달려와 박는 고통사고 유발자들이 원인이며,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이 우리에게 전가하는 책임을 쉽게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말 자신의 실책이라고 생각이 되는 부분은 남이 아닌 내 스스로의 의지로 고쳐나가면 된다. 그러니 남들이 뭐라 하든 고통사고로 힘들어 하는 나 자신에게 큰 소리로 말해주자.


“보험처리 다 되니까, 기죽지 말자!”



나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어

이(놈) 또한 지나가리라

진한 실연의 아픔으로 밥 한 톨 목구멍으로 넘기기 힘들던 시간, 열심히 성공시킨 프로젝트가 홀랑 다른 팀의 공적으로 넘어가 버렸던 순간, 몸살감기도 힘든데 아픈 것도 능력 부족이라며 서러움에 눈물콧물을 삼켰던 순간, 포기할 뻔했던 수많은 고된 순간에도 나를 지탱시켜줬던 마법의 주문이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문구는 다윗왕과 그의 지혜로운 아들 솔로몬의 유명한 일화에서 시작된다. 이스라엘의 다윗왕이 반지 세공사를 불러 “내가 슬프고 힘들 땐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고, 기쁘고 즐거울 땐 오만해지지 않을 수 있는 문구를 반지에 새겨 달라”는 어려운 미션을 내렸다.


나였다면 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냐며 단톡방에서 씹어 댔겠지만, 그 반지 세공사는 나름 좋은 라인을 타고 있었는지 지혜롭기로 유명한 솔로몬 왕자에게 다이렉트로 도움을 청하게 된다. 직장으로 치면 회장의 지시를 받은 과장급 직원이 사장실에 바로 찾아간 격이다.


솔로몬은 고민 끝에 어떤 기쁨도 슬픔도 절대적이지 않으며 영원하지 않다는 뜻의 문구를 알려 줬고, 그것이 바로 직장인들의 대표 멘탈보호용 마법 주문인 “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이 또한 지나가리라)”이다.


나 역시 지쳐 쓰러지고 싶던 순간마다 저 문구를 떠올리며 힘을 내곤 했다. 하지만 이 마법의 주문이 만능은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힘든 순간은 잠깐이면 지나가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고통사고 유발자는 계속 옆에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긴 인생으로 보면 못 견딜 정도는 아니겠지만, 짧게라도 그놈과 붙어있어야 한다는 현실이 괴로울 따름이었다. 그는 자존감을 부숴 버리는 언어폭력과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기 위한 디테일을 가졌고, 책임은 떠넘기고 권한은 악용하는 업무 스타일을 갖춘 완전체 빌런이었다.


어쨌든 나는 왕의 아들도 CEO의 아들도 아니기에 그와 함께 직장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마음 굳게 먹고 지켜야 할 몇 가지가 있다.


1. 앞에서는 듣는 척하고 한 귀로 흘려버리자.

2. 업무든 일상이든 최대한 엮이지 않고 가능한 피하자.

3. 절대 측은지심을 가지지 말자.


특히 3번을 명심해야 하는데 고통사고 유발자들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싫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아주 가끔씩 그런 모습이 불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잠시 흔들린 판단력으로 손을 내민 순간! 그는 피라냐처럼 당신의 손을 덥석 물어뜯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비록 나를 지켜주던 마법의 주문은 깨졌지만, 수많은 고통사고로 단련된 나의 단단한 내공과 노하우의 결정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지혜로운 솔로몬보다 이직을 도와줄 알바몬이 더 생각나는 그런 밤이지만, 뭐 어쩌랴?


오늘 그와의 기억은 변기 물에 흘려버리고, 다시 내일을 긍정적으로 시작하자.


“이놈 또한 언젠가는 지나가리라!”



변화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니까

오늘의 특별 보상

등교와 출근,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하기 싫다’는 것이다. 만약 등교가 너무 기다려지거나 출근이 행복하다면, 아마 뭘 모르는 첫날이라 기대감이 크거나, 그곳에 썸 타는 사람이 있거나, 혹은 남들과는 약간 다른 사상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있다.


등교와 출근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싫어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무 교육은 마쳐야 하므로, 먹고 살아야 하므로 그 어떤 이유에서도 우리는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한다. 초등, 중등, 고등, 대학, 회사까지 우리는 수십 년간 매일 아침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아령보다 무겁다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학교로, 일터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렇다면 그 ‘하기 싫음’을 ‘하고 싶음’으로 바꿀 수 있을까? 대학 생활 내내 밤새 게임을 하며 코피를 흘리던 학교 동기도 게임 회사에 입사하고 나니 이제 그만 로그아웃 하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왔고, 그림 그리는 걸 너무 좋아하던 중학교 짝꿍도 작가가 된 후 의뢰받지 않은(돈이 되지 않는) 그림은 잘 그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좋아하던 것도 ‘일’이 되면 싫어지기 마련인데, 그럼 우린 각자의 일터에서 괴로움만 겪어야 할까? 대답은 ‘아니다’이다. 등교나 출근이 그냥 좋아지긴 당연히 어렵겠지만, 등교하면, 출근하면, 얻을 수 있는 나만의 ‘특별 보상’이 있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출근을 해내야만 마실 수 있는 비싸고 맛있는 브랜드의 커피, 등굣길에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어제부터 궁금했던 웹툰, 월요일에만 지르기로 나 자신과 약속한 장바구니 속 물건들 등 하기 싫은 일을 해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을 스스로 설정해 놓고 절제와 보상의 명확한 법칙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생활밀착형 셀프 동기부여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주말에 주문한 택배 수령처를 회사로 지정하고 회사에 가서 상자를 뜯을 기대감으로 월요병을 이겨낼 수 있다면 이보다 효과적인 시스템이 어디 있겠는가? 나 역시 이 원고를 마치고 나면 내가 정해 놓은 ‘1시간 게임’이라는 특별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아내의 눈치라는 막판 보스가 있긴 하지만…….


그러니 속는 셈 치고, 당장 내일부터 등교 또는 출근하면 얻을 수 있는 작은 보상 하나씩을 생각해보자. “이런 게 효과 있겠어?” 하면서도 평소엔 무겁던 눈꺼풀이 아침에 한결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하루하루의 특별 보상들이 모여, 우리 삶 전체를 특별히 행복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모두가 같은 속도로 달릴 필요는 없어

행복이 뭐 별건가

“대체 이 나이 먹도록 뭐했지?”


생활밀착형 프로그램들이 한창 인기를 끌던 때, 미디어를 도배한 ‘영앤리치’들의 호화로운 삶을 보다 보면 ‘저들이 어린 나이에 저렇게 성공할 동안 나는 뭘 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분명히 나도 한평생 큰 어긋남 없이 열심히 공부하고 뼈빠지게 일하며 나름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한숨 돌리며 돌아보니 뭐 이렇게 모아놓은 부가 없는지 허탈했다.


학생 때 그렸던 어른이 된 나의 모습은 예쁜 강이 보이는 마당 있는 2층 집 거실에서 왼손은 족보 있는 혈통의 골든 리트리버를 쓰다듬으며 오른손에는 값비싼 커피잔을 들고, 왜인지는 모르지만 영자 신문을 읽으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 뭐 그런 여유로운 중년의 삶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대출금이 0.1% 차이에 주거래 은행을 부리나케 옮기고 물건 하나 사겠다고 쇼핑몰 최저가를 이리저리 비교해보는, 경제적인 면에서 평범하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솔직히 화가 났다. 누군가는 적게 일해도 나보다 훨씬 큰돈을 벌고, 누군가는 태어난 것만으로도 훨씬 큰 부를 예약해 놓았다. 마치 내가 자전거를 타고 허벅지 터져라 페달질을 해봤자 속도는 50km밖에 안 나오는데, 옆에서 누군가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150km 속도로 부아아앙 앞질러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참을 혼자 씩씩댔더니 배가 고파져서 앱을 켰다. 세상에 맛있는 건 또 왜 이리 많은지, 화가 나는 만큼 많이 먹겠…….


“오! 3000원 할인 쿠폰!”


쿠폰을 다운받고 장바구니에 이것저것 신나게 담던 중 싱거운 의문이 들었다.


‘근데…… 나 진짜 불행한가?’


어제 저녁 나는 아내와 함께 광장시장의 신선한 육회 사시미를 먹고, 나오는 길에 달달한 꽈배기 하나씩을 입에 물고 이게 ‘찐 행복’이라며 헤벌쭉 웃음 지었더랬다. 며칠 전엔 구하기 힘든 게임을 당근마켓에서 싸게 샀고, 퇴근 후 즐길 생각에 월요병조차 느끼지 못했다. 큰돈은 아니라도 매월 불우아동을 위한 후원금을 보내고, 어린이의 웃는 사진을 받아보며 벅찬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뭐야? 나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네?’


성공의 기준을 돈으로 삼고 남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내 나이보다 적은 부의 성취가 부끄러웠다. 크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내가 뭐가 부족한지 스스로를 책망했었다.


불행의 시작은 결국 ‘비교’가 아닐까. 만약 내가 주식이 대박이 나고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경제적으로 풍족한 상황이 된다 하더라도 20대 때 억만장자가 된 마크 저커버그나, 연봉 100억을 받는 손흥민 선수와 비교하고 자책하기만 한다면 삶은 부의 규모와 상관없이 슬프고 힘들어질 것이다.


비교는 내가 충분히 바른 길로 잘 달리고 있음에도 더 빠른 차들만 보고 스스로 느리다며 자책하는, 그런 미련함의 씨앗인 것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심슨 가족’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생은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해. 하지만 (행복의) 요령은 순간에 주어진 몇몇 완벽한 경험들을 즐기면 되는 거야.”


결국 행복은 남의 속도와 비교하거나 대박만 기다리는 것이 아닌 나의 속도로 달리는 순간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평생 될까 말까 한 로또 한 방만이 행복이 아니라 매일 뜨는 5%, 10% 쿠폰과 같은 행복이랄까? 확실히 로또를 잘 안 사는 나로서는 후자가 더 낫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이 원고의 끝이 보여 참 행복한 기분이다. 저녁으로는 좋아하는 양념치킨을 시켜 치밥도 비벼먹을 예정이다. 확실히 지금 이 순간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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