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

   
술라이커 저우아드 지음(역:신소희)
ǻ
윌북
   
17800
2022�� 01��



■ 책 소개


고통과 혼란의 세상 앞에서
‘새로운 시작’을 고민하는 모두에게 건네는 이야기

갓 대학을 졸업해 종군기자를 지망하며 뉴욕에 올라왔던 스물두 살의 술라이커 저우아드는 파리에서 제법 번듯한 인턴 생활을 하던 도중 갑자기 생존률 35%의 백혈병 진단을 받는다. 절망과 고통의 나날 끝에 병은 치료하지만, 살아내기란 좀처럼 수월하지 않다.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고. 겨우 되찾은 삶은 꼬여만 가는 듯하다. 무엇보다 떠나가는 사람들로 인해 마음이 무너진다. 그는 고심 끝에 모든 걸 멈추고 긴 여정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 저자 술라이커 저우아드
작가이자 강연가. 암 생존자. 스물두 살에 생존률 35%의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병상에서 개인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한 투병기가 많은 사랑을 받았고, 《뉴욕 타임스》에서 ‘중단된 삶Life, Interrupted’이라는 제목의 정기 칼럼을 연재했다. 칼럼과 함께 제작된 부가 영상 시리즈는 뉴스와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에미상을 받았다. 훌륭한 강연가이기도 한 그는 완치 후에 TED 무대에 올라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가까이 다가온 죽음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 이 강연은 2019년 TED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연 TOP10에 꼽혔으며 500만에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암 정책 자문단으로 활동했으며 유엔과 국회의사당 등에서 암에 관해 알리는 보도와 강연을 해왔다. 《파리 리뷰》,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글을 썼고, 현재도 《뉴욕 타임스》, 《보그》, 《NPR》 등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한다. 전 세계 10만 명의 구독자들과 함께하는 크리에이티브 커뮤니티 ‘The Isolation Journal’을 창립해 운영하고 있다.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쉽게 분류할 수 없는 사람들과 주제를 찾아 탐구하고,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려 한다.

■ 역자 신소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출판 편집자로 일해왔다. 현재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번역하고 있다. 그동안 옳긴 책으로는 『피너츠 완전판』, 『야생의 위로』,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 『여자 사전』, 『플롯 강화』, 『날라와 함께한 세상』 등이 있다. 

■ 차례
1부
가려움
메트로, 불로, 도도
알껍데기
우주여행과 가속도
집으로
분기점
추락
불량품

2부
중간 지대
통과 의례
재진입
남겨진 이들을 위하여
긴 여정
살갗에 새겨지다
고통의 가치
살사와 생존주의자들
브록처럼 해보기
집으로
후기 감사의 말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


2011년 5월 3일, 우리 집 자동응답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생체검사 예비 결과가 나왔으니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부모님과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진료가 끝나고 의료진이도 모두 퇴근한 뒤였다. 근무 시간이 지났기에 진료실에는 희미한 불빛만 켜져 있었다. 잡지꽂이와 초록색 벽을 가로질러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의사가 대기실로 나와 우리 곁에 앉더니 딱 잘라 말했다.


“생체검사 결과, 제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병세가 밝혀졌습니다. 따님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좋은 얘기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나는 부모님의 경악한 얼굴로부터 눈길을 돌렸다.


“혈액과 골수를 침범하는 공격적인 암의 일종입니다. 바로 조치를 해야 합니다.”


스물두 살에 암 진단을 받으면 어떤 조치가 필요하지?

쓰러져서 흐느껴야 하나?

기절하거나 비명을 질러야 하나?


그 뒤로 의사가 말한 내용들, 상황이 심각하니 당장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말들은 그저 아련한 잡음처럼 귓가를 스쳤다. 의사가 메스를 들고 나를 내려다보며 내 인생을 난도질하고 내 자아를 두 갈래로 쪼개놓으려 한다는 느낌뿐이었다.


백혈병 진단은 내 삶을 돌이킬 수 없이 둘로 갈라놓았다. 그 이전과 이후의 삶으로.


**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직후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유학 중이던 동생 애덤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내가 백혈병 환자라는 걸, 그리고 (부담을 주고 싶진 않지만) 완치되려면 애덤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알려야 했다. 처음에 애덤은 내가 고약한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마침내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 애덤은 아연실색했지만, 두말없이 바로 유학을 중단했다. 며칠 뒤 동생은 골수이식에 필요한 검사를 받기 위해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검사 결과 애덤은 내게 딱 맞는 백 점짜리 기증자로 밝혀졌다. 우리는 이 일말의 희소식에 기뻐 날뛰었다.


암 환자들에게 골수이식 수술은 재탄생이자 제2의 생일이다. 물론 수술이 성공했을 경우에 말이지만. 담당 의사는 내가 장기간 생존할 가능성이 35퍼센트 정도라고 했다. 게다가 ‘장기간’ 살아남는다 해도 온갖 무시무시한 부작용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중엔 차후 새로운 암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도 있었다. 의학적 러시안룰렛 게임이 따로 없었다.


**


골수이식 수술 당일, 그러니까 ‘제0일’ 아침에 부모님과 윌이 병실로 왔다. 그간의 모든 두려움과 각오에 비해 실제 수술은 어쩐지 용두사미처럼 느껴졌다. 병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군인처럼 두 줄로 내 침대 양옆에 늘어서서 애덤의 줄기세포가 링거 주사로 내 몸에 주입되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몇 분 만에 모든 과정이 끝났고, 다들 내가 쉴 수 있도록 병실에서 나갔다. 담당 의료진이 일찌감치 경고했듯이, 애덤의 줄기세포가 내 골수에 자리 잡기까지의 시간이 가장 힘들 터였다. 나는 ‘격리’ 상태로 되돌아갔다.


**


우리 집 뒷마당에 있는 늙은 단풍나무의 잎이 말라붙어 화사한 주홍색으로 변할 무렵, 나와 윌의 기나긴 밀월에도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윌은 내가 백혈병 진단을 받은 뒤로 늘 곁에 있었고 임상실험이 끝날 때까지 그럴 생각이었다.


이기적인 얘기지만 나는 윌과 항상 붙어 있는 게 좋았다. 민머리에 가끔 오줌을 지렸고 부모님 신세를 지면서 침대에 묶여 있었지만, 그래도 윌 덕분에 내가 아직 정상이고, 젊고 사랑받는 사람이며 심지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지낼 순 없었다. 환자의 세상은 다른 사람이 일 년 내내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가장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차마 그런 고통은 기원할 수 없었다. 윌과의 관계를 지속하려면 그가 자기 인생을 되찾도록 격려해주어야 했다.


“너도 일자리를 찾는 게 좋겠어.”


어느 날 오후 나는 윌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처음에 윌은 우리 집 근처에서 직장을 찾으려 했지만, 새러토가 시내에서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바텐더나 종업원 정도였다. 하지만 구직 범위를 넓히면서 맨해튼의 대형 언론 매체에서 보조 편집자를 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새러토가는 맨해튼에서 차로 세 시간 반 거리였다.


윌이 그 언론사에 취직한다면 우리는 주말에만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윌은 임상실험이 곧 시작될 테고 내 건강도 위태로운데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건 무리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의 염려를 일소에 부쳤다.


윌이 합격했다는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쇠약한 몸에 남은 힘을 다해 그를 포옹했다.


“이젠 모든 게 잘 풀릴거야.”


**


나는 화학요법 치료로 입과 목구멍, 소화관 내벽의 점막이 타버려서 말을 할 수가 없었고, 얼음 조각 말고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한 시간이 멀다 하고 침대 옆 양동이에 타버린 살덩이를 게워 냈다. 진통제와 구토 방지제가 잠시나마 고통을 덜어주었지만, 그래도 깨어 있는 동안은 내내 동상이 된 것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뒤집히는 속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


윌은 매일 직장 일로 바빴다. 모든 간병인이 그렇듯 윌에게도 이런 상황에 따른 스트레스를 배출할 곳이 필요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가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바빠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마치 망원경의 양쪽 끝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고, 이렇게 느껴지는 순간은 점점 더 늘어났다.


**


수술 후 100일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몇 분 뒤면 병원에서 지난주에 받은 온갖 검진과 생체검사 결과를 확인할 예정이었다. 결과는 둘 중 하나겠지. 골수이식이 성공해서 다 나았거나, 아니면 실패해서 백혈병이 도졌고 머지않아 죽게 되거나. 제3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접수원이 내 이름을 부르고 우리를 뒤쪽 병동의 방으로 안내했다. 내가 숨을 고르는 동안 담당 의료진이 들어왔다. 임상 간호사와 내 골수이식 담당 의사였다. “좋은 소식은 지난주 생체검사 결과 환자분의 골수에서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골수이식 효과가 있는 것 같네요,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말이죠. 하지만 확신할 수 있으려면 몇 달은 더 걸릴 테고, 그동안 이렇게 진료도 받아야 할 겁니다.”


“그럼 나쁜 소식은요?”


“음, 나쁜 소식은 재발 가능성이 크다는 거예요. 골수 염색체 이상도 그렇고 골수이식 전에 백혈병 세포를 싹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환자분의 경우 백혈병 재발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유지 화학요법 치료를 시작하는 걸 권하고 싶네요. 체력을 적당히 되찾는 즉시요.”


좌절감에 익사해버릴 것 같았다.


**


10월의 어느 날 아침 정기 검진을 위해 슬론 케터링에 갔다가 담당 의사가 단기 병가를 냈다는 말을 들었다. 그동안은 버커 의사가 나를 맡을 거라고 했다.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혹시 제가 개를 키워도 괜찮을까요?” 나는 바커 박사와 첫 면담을 시작한 지 몇 분 만에 이렇게 물었다.


박사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요, 안 될 거 없겠죠.” 내 면역계가 예전보다 튼튼해지기도 했고 동물을 돌보면 치유 효과도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나는 바로 행동에 착수했다. 윌을 설득해서 그날 오후 늦게 퇴근한 그와 함께 소호의 동물구조단체를 찾아간 것이다. 곧바로 눈에 들어온 강아지가 있었다. 못생긴 테리어 잡종견으로 슈나우저와 푸들이 조금씩 섞여서 ‘슈누들’이라고 불리는 종이었다. 덥수룩한 염소수염, 짓궂게 빛나는 눈. 언짢고 불안한 표정으로 으르렁대고 있었지만 개성이 넘치는 녀석이었다.


“내 개를 찾았어.”

 

오스카와의 첫날 밤은 내가 기억하는 한 백혈병 진단 이후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스카가 내 가슴 위에 올라왔고 나는 이 털복숭이 친구가 잠들 때까지 배를 문질러주었다. 작고 까만 네 개의 발이 꿈속에서 토끼라도 쫓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오스카의 따뜻한 체온과 가슴 위로 느껴지는 규칙적인 심장소리에 긴장이 사르르 풀렸고, 나는 오스카를 안은 채 소파에서 잠들었다.


**


마지막으로 화학요법 치료를 받는 날, 가족과 친구들은 드디어 ‘끝’이라며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 수없는 생체검사와 항생제 주사, 구토받이 신세를 진 끝에 마침내 정상 세계로 복귀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암 투병에서 가장 힘든 시간은 치료가 끝난 다음에 시작되었다.


첫 번째 입원 전날 멀리사가 죽었다.


두 번째로 입원해 있는 동안 에리카와 뉴질랜드 요리사 커플이 콜로라도에서 소규모로 결혼식을 올렸지만, 나는 약속한 대로 신부 들러리가 되어주지 못하고 병실에 묶여 있었다.


세 번째로 입원하기 며칠 전에는 윌이 지난번 휴식보다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얘길 꺼냈다. 나가서 혼자 살 집을 구하겠다는 것이었다.


윌은 내 인생의 사랑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충분한 시간과 거리를 갖고 나면 결국 재결합할 수 있을 거라 간절히 믿고 싶었지만, 이제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산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설 자리를 찾고 싶다면,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관계를 되살리려 드는 건 그만둬야 했다. 나는 나 자신을 되찾기 위해 싸워야 했다.


**


나는 3년 반 만에 암에서 회복되었다. 가려움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계산하면 4년이 넘는 기간이다. 이 순간에 도달하면 승리감이 솟구칠 거라고 생각했다. 마냥 축하하고 싶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막상 회복되고 나니 새롭게 청산해야 할 문제들이 나타났다. 지금 나는 살아남았으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모른다는 걸 깨닫는다.


치료를 받는 동안 나는 단 하나의 신념에 매달렸다. ‘내가 살아남는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해. 난 그냥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잘 살고 싶어. 파란만장하고 의미 있는 삶을 누리고 싶어. 안 그러면 살아봤자 무슨 소용이야?’


내가 사랑한 여러 사람이 죽었는데 나만 살아남았다. 이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치료를 받으며 만난 내 또래 암 환자 중 지금껏 살아 있는 건 겨우 셋뿐인데.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마음을 굳혔다. 계속 이대로 지낼 순 없어. 뭔가 달라져야 해. 어쩌면 모든 것이.


**


“엄마?” 내가 프랑스어로 말을 꺼낸다. “고마워요.”

“뭐가?” 엄마 또한 프랑스어로 답한다.

“항상 나를 잘 돌봐주잖아.”

“고마워할 필요 없어. 부모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


내가 백혈병 진단을 받은 날부터 부모님은 줄곧 곁에 있어주었다. 내 고통은 두 분의 고통이었고, 내 좌절과 불안 또한 두 분의 좌절과 불안이었다. 딸의 암이 재발할지 모른다는 염려를 떨쳐내려면 두 분에게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리라. 나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 또한 지난 경험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고 있었다.


“삶이 뒤집혔고, 이제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순 없어.” 어머니가 말한다. “네가 인생을 재발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왔듯 나도 나만의 여정을 시작해 보려 해.”


**


인생은 통제하에 진행되는 실험이 아니다. 무엇이 다른 것으로 변하는 시점을 일일이 기록하거나, 누가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측정하거나, 치유의 연금술을 가능케 하는 특정 요소를 따로 구분할 수는 없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달도 뜨지 않은 그 외로운 길에서 내가 무엇이 될지 알려주는 지도 따위는 없다.


그러나 눈앞에 뉴욕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이 나타나고 밤하늘의 별빛이 흐려질 때쯤, 내 안의 무언가는 변화해 있다. 어쩌면 분자 차원에서부터.


내 면역계는 계속 오발탄을 날리고 있다. 나는 여전히 몸 생각을 않고 무리하곤 한다. 감기 합병증이 염증으로 도지는 바람에 입원하기도 한다. 내 신체적 한계와 느린 속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시행착오를 통해 거듭 실감한다. 의욕을 잃고 책 쓰는 걸 중단했다가 휴식 끝에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이후로도 한참 시간이 걸리고 몇 차례 우회를 거치긴 했지만, 결국 존과 나는 정식으로 동거를 시작한다. 우리는 조용하고 가로수가 우거진 브루클린의 어느 동네로 이사한다. 이삿짐 무더기 사이에서 촛불을 켜고 배달음식을 먹으며 함께 살게 된 첫날 밤을 축하한다. 나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더블베이스를 꺼내 먼지를 털고, 존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손을 푼다. 우리는 합주를 시작한다.


이제 초등학교 4학년 담임교사가 된 동생은 내가 지냈던 이스트빌리지의 아파트에 살며 자기만의 사연과 추억과 상심으로 그곳을 채워나가고 있다. 부모님은 잠시 튀니지에서 지내는 중이고, 나도 대학 시절 이후 처음으로 그곳에 찾아간다. 은퇴를 앞둔 아버지는 내가 지나온 여정을 따라서 자기만의 대륙 횡단 자동차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양육자와 간병인 역할에서 자유로워진 어머니는 그림에 전념하여 예술가 경력을 재개했고, 스스로 오래전에 끝났다고 생각했던 성공을 거두며 주체의식을 되찾는 중이다.


내가 차마 바랄 수 없었던, 도저히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소망들이 있다. 서른 살 생일 일주일 뒤 나는 하프마라톤 완주에 성공한다. 다시 오하이를 찾아가 캐서린이 일하는 학교에서 석 달간 방문교사로 일한다. 릴GQ를 면회한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처음으로 침대가 아닌 현장에서 기사를 쓴다.


털털거리는 차를 몰아 아직 눈이 쌓인 뒷산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산꼭대기에 이르자 길이 고르고 평탄해진다. 나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달리며 속도를 올려 고드름이 맺힌 상록수 숲을 통과한다. 오스카는 조수석에 앉아서 휙휙 스쳐 지나가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아이스박스 안에는 훈제 닭고기, 와인 한 병, 책 한 권이 들어 있다. 우리가 함께 떠나는 것도 꽤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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