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

   
함정임
ǻ
열림원
   
17000
2022�� 02��



■ 책 소개


소설과 여행을 사랑하는 작가 함정임
작가를 따라 세계의 작품 현장을 걷다

소설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고, 여행을 떠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프루스트를 생각하며 파리로 향하는, ‘여기가 아닌 그 어딘가’를 꿈꾸며 작가와 작품을 쫓는 마음이 자신에게는 일종의 불치병이나 다름없다고 함정임은 이야기한다. 시, 소설 가릴 것 없이 탐독하는 문학 애호가 함정임은 “밤낮없이” 여러 창작 현장을 기웃거리며 불후의 작품을 써낸 ‘그들’을 평생 사로잡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한다.

센강의 미라보 다리에서는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의 사랑의 추억과 실연의 아픔을, 시카고와 파리에서는 헤밍웨이 소설의 단서를, 그레이트넥에서는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를 둘러싼 비극적 운명을, 파리, 카프리, 산레모를 거쳐 포르부에서는 벤야민의 마지막 장면을……. 

책장 너머 생동하는 작가의 숨결을, “누군가의 문학이 비롯되는 원형들, 삶이 문학이 되는 진실한 힘들”을 발견하기 위해 그는 태양의 저쪽과 밤의 이쪽을 숨 가쁘게 가로지른다.

■ 저자 함정임
소설가. 이화여대 불문과와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프랑스대사관 문화과에 다년간 협력하며 한국과 프랑스 도서 소개 작업을 했고, 문학 전문 출판사와 문예지에서 현대 프랑스 문학 기획 및 에디터로 활동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한 이래, 소설집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버스, 지나가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 『사랑을 사랑하는 것』, 장편소설 『춘하추동』 『내 남자의 책』 등을 출간했고, 세계문학예술기행서 『소설가의 여행법』 『무엇보다 소설을』, 번역서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행복을 주는 그림』 『예술가들은 이렇게 말했다』 『작별의 의식』 등을 출간했다. 현재 동아대 한국어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 차례
1부
2부
3부
4부

에필로그
참고 및 인용 도서

 




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


사랑도 인생도 강물 따라 흐르네 _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의 센강과 미라보 다리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

파리 서쪽 미라보 다리 근처에 체류한 적이 있다. 춥고 음울한 겨울이나 라일락꽃 피어나는 초여름이나 거리마다 은방울꽃을 파는 오월이나 센강 둑을 걸으며 미라보 다리 쪽을 바라보고는 했다.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이 내 머릿속에 없었다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가장 오래된 퐁네프(Pont-neuf, 뜻은 ‘새로운 다리’지만 센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부터 최근의 보부아르 다리까지 센강에 놓인 다리들은 많았다. 이들 중 내가 강을 건널 때 선호하는 다리들이 있었다.


퐁데자르(예술고)에서 바라보는 퐁네프나 반대로 퐁네프를 건너면서 퐁데자르를 바라보는 풍경을 좋아했고,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을 잇는 솔페리노 다리, 위로는 6호선 전철이 지나가고 아래로는 자동차와 사람이 지날 수 있도록 건축된 비르아켐 다리를 좋아했다. 이들에 비하면 미라보 다리는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여간해서 닿는 일이 없었다.


어느 해 봄 파리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전시회가 열렸다. 16구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서 마리 로랑생의 그림들을 총망라해 선보였다. 프랑스에서는 거의 처음 열리는 특별전으로 그녀의 백여 점의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에펠탑과 미라보 다리 사이에 위치한 15구의 작은 아파트에 체류하던 나는 마리 로랑생의 전시를 보기 위해 삼월과 사월 두 차례 센강을 건넜다. 그중 한 번은 미라보 다리 위를 걸어서 갔다. 대학 시절 외웠던 시를 음송하며.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이 흐르고

나는 다시 우리 사랑을 기억해야 하네

기쁨은 늘 슬픔 뒤에 오는 것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중에서


파리에 온 여행자가 미라보 다리를 찾는다면 그는 필시 아폴리네르의 이 시를 아는 사람일 것이다. 단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의 한 구절을 읊조릴 정도로 문학 애호가일 것이다. 볼 것 많은 파리의 수많은 관광지 중에 파리 서쪽 센강의 한적한 미라보 다리를 찾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당도한 사람이라면 다리 위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이 시를 낳게 한 주인공 마리 로랑생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사람은 로랑생으로부터 거기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서로 손잡고 얼굴 마주 보고

우리 두 팔로 만든

다리 아래로

하염없이 눈길에 지친 물결 흘러만 가는데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중에서


사랑의 가교는 시가 되고 그림이 되고

이탈리아 출신의 아폴리네르는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어갈 힘을 모으면서 몽마르트르의 피카소와 연대해 예술운동을 도모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만난 인물이 마리 로랑생이다. 둘은 1907년 바토 라부아르에서 만나 1912년까지 오 년간 연인으로 지내면서 예술적 동반자 역할을 했다. 한동안 동거하기도 했지만, 원래 로랑생은 미라보 다리 건너 16구 오퇴유에 살았고, 아폴리네르는 6구 생제르 맹데프레에 살았다. 서로를 향해 달려가고 달려오던, 한몸으로 붙어 걷다가 입맞춤을 하고, 두 손을 맞잡고 영원한 사랑의 가교를 맹세했던 곳이 미라보 다리였다. 그러나 사랑의 정의는 영원하나 그 사랑에 개입되는 마음은 수시로 움직이는 것. 서로에게 시가 되고 그림이 되었던 아름다운 사랑은 깨어지고, 시인의 발아래에는 센강의 물결만이 출렁이며 흘러갈 뿐이었다.


사랑은 간다 흐르는 이 강물처럼

사랑은 떠나간다

삶처럼 그토록 느리게

희망처럼 그토록 격렬하게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중에서



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벤야민의 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_ 벤야민의 파리, 카프리, 산레모, 그리고 포르부

파리 - 보들레르, 19세기의 수도, 아케이드 프로젝트

일종의 병이라고밖에 내 마음을 생각할 수 없겠다. 파리를 향하는 마음, 보들레르를 생각하는 마음. 지난밤 나는 어떤 꿈을 꾼 것일까. 창밖에는 아침햇살이 가득하고, 밤새 치열했던 꿈은 햇살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심증은 분명한데, 실체는 묘연하다. 확실한 것은, 꿈에 나온 일 년 전 어느날, 누군가에 이끌려 파리의 거리들을 온종일 걸었고, 해질녘 어느 한 지점에 붙박히듯 서 있었다.


묵념을 하듯,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애도의 마음으로 나는 누군가의 묘석과 마주하고 있었는데, 아마 거기 잠들어 있는 누군가의 이름을 바라보고 있었으리라. 이것이 꿈의 장면인지, 여러 번 찾아가서 익숙해진 기억의 장면인지 가릴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거기, 묘석에 새겨진 누군가의 이름이다. 내가 그의 이름과 마주할 때면 수많은 문장들이 아우성친다.


불꽃으로 가득 찬 눈을 다시 뜨자

나는 내 누옥(陋屋)의 공포를 발견했다.

-샤를 보들레르, 「파리의 꿈」 중에서


파리에 관한 한, 가장 행복하고 충격적인 경험은 보들레르를 쫓아가는 것이다. 보들레르야말로 족보에 새겨진 진정한 파리 사람이고, 동시에 평생 파리를 벗어나고자 지독하게 파리를 쓴 ‘19세기 최초의 이방인’이고, 그것으로 ‘현대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의 기원을 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난밤 꿈에, 아니 일 년 전 수많은 날들, 나로 하여금 파리의 거리를 떠돌아다니게 만든 장본인은 따로 있다. 남프랑스 지중해의 동쪽 끝과 서쪽 끝, 그러니까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마주쳤던 뜻밖의 장면들 속의 주인공이다.


“모든 시대는 다음 시대를 꿈꾼다”라고 했던가. 19세기의 파리에 살지 않는 한, 그리고 더 이상 20세기의 파리에 갈 수 없는 한, 두 세기의 파리를 체화한 누군가의 안내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몇몇 작가들과 작품을 꼽자면 19세기에는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빅토르 위고 『파리의 노트르담』, 그리고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과 『파리의 우울』이고, 20세기에는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파트릭 모디아노『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그리고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다.


카프리 - 아샤 라시스와의 운명적인 만남

꿈의 내용은 아침햇살과 함께 사라졌지만, 뙤약볕과 폭풍우를 견뎌낸 몇 알의 붉은 열매처럼, 내 손 안에 보들레르가 이끄는 파리, 벤야민이 안내하는 파리는 분명해졌다. 때로 현실의 몇 시간, 아니 며칠을 꿈에서 촉발된 장면을 쫓아 살고는 하는데, 청명한 아침 뜻밖에 환기된 벤야민은 세속적인 일들일랑 잠시 제끼고 그동안 끊임없이 파리를 드나들면서 떠돌아다녔던 거리들, 아케이드들, 그리고 도서관들을 되살려내라고 나를 부추겼다.


행복하게도 나는 우정의 여러 감동적인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청준과 김현 선생을 향한 김윤식 선생의 우정, 프란츠 카프카를 향한 막스 브로트의 우정, 그리고 발터 벤야민을 향한 게르숌 숄렘의 우정. 이들의 우정은 상호적이며, 지극하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꿈의 끝자락에서 시작된 아침의 현실은 벤야민을 주인공으로 한 사랑과 우정의 여정이 되었고, 이제 보들레르를 지나 숄렘에게 이르렀다. 그리고 거기에서 급기야 또 다른 뜨거운 이름과 맞닥뜨렸는데, 벤야민의 그녀, 19세기의 수도를 해부해서 자본주의의 실체를 까발리고 자기식대로 재구성하려는 엄청난 포부를 가졌으나 사랑 앞에서는 바보천치처럼 소심했던 벤야민이라는 사내를 꼼짝 못 하게 했던 아샤 라시스였다.


나는 서가 귀퉁이 사진들로 꽉 찬 궤짝으로 달려갔다. 어느 해 여름, 나폴리에서 배를 타고 갔던 카프리섬의 장면들을 오래된 궤의 먼지와 어둠으로부터 햇빛 속에 꺼내놓았다. 1924년 5월과 6월 벤야민은 이 섬에 머물며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썼고, 마르크스주의자인 러시아 여인 아샤 라시스를 처음 만났다.


산레모와 루르드 - 숨 가쁜 도피와 은둔, 그리고 망명의 꿈

꿈에서 시작된 벤야민의 여로는 보들레르와 파리, 라시프와 카프리를 거쳐 두 개의 국경으로 향했다. 하나는 남프랑스 동쪽 알프스의 바다 쪽 산자락 국경지대인 이탈리아의 산레모이고, 다른 하나는 남프랑스 서쪽 피레네의 바다 쪽 산자락의 국경지대인 루르드다. 유대계 독일인 발터 벤야민은 나치의 추적을 피해 조르주 바타유가 사서로 재직하던 파리 국립도서관 지하 서고에서 십삼 년에 걸쳐 보들레르와 파리를 연구하는데, 그 결과물이 미완이지만 방대한 『아케이드 프로젝트』(1927~1940)라는 저작이다.


그러나 이 집필은 연구실에 붙박여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치의 추적으로 생사를 오가는 도피생활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순간순간 목숨을 노리며 조여오는 게슈타포의 공포 속에 끊임없이 장소를 바꾸며 안정된 연구처를 희구하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걸었던 희망은 미국행 배를 타는 것이었다.


오랜 도피생활로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린 벤야민은 북유럽과 남유럽을 가리지 않고 은신처를 찾아 떠돌았다. 1934년과 1935년에는 산레모에 체류하면서 파리의 아케이드 연구를 계속하는데, 프랑스 쪽 이탈리아 국경도시인 이 산레모는 이혼한 전처 도라가 살고 있었고, 벤야민은 그녀의 집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세상에 노출된 벤야민의 마지막 글은 편지다. 그는 산레모 이후, 주로 파리에서 지내다가 게슈타포의 추적이 극에 달하자 미국행을 단행한다. 편지는 1940년 8월 8일 피레네 산간 루르드에서 문학 동지였던 한나 아렌트에게 보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배를 타기 위해 벤야민은 루르드에서 피레네 국경을 넘었고, 1940년 9월 26일에서 27일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나 아렌트는 한 달 뒤 이 비극적인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몇 달 뒤 포르부로 벤야민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에서도 벤야민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찰나의 봄, 느린 사유 _ 사색적 삶의 향기와 혁명적 사랑의 욕망

향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닷가 언덕에 봄기운이 번져간다. 서재 창 너머 하늘과 바다는 봄빛으로 충만하다. 빛은 시간을 품고 있다. 또한 계절을 품고 있다. 맑은 날, 겨울의 빛은 수정 같고, 봄의 빛은 새싹 같다. 겨울에서 봄 사이, 두 갈래 상충하는 빛 속에 들어앉아 기다린다. 누구를, 또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대상 없는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비우는 과정이기도 하고, 멈추는 과정이기도 하고, 견디는 과정이기도 하다.


기다림 속에 있다보면, 제일 먼저 향이 다가온다. 향은 지난 일월 파리에서 따라온 것이다. 파리에서 향을 공부하는 가브리엘의 집에 머물다온 여파다. 가브리엘의 공간은 온통 향으로 충만하다. 은방울꽃잎이 농축된 향, 장미꽃잎이 농축된 향, 미모사꽃이 농축된 향……. 소설을 읽고 쓰는 일이 본업인 나의 공간은 눈 닿는 데마다 책이다. 마찬가지로 향을 연구하는 가브리엘의 공간은 향과 관련된 것들이 자리 잡고 있다. 수십 개의 시향지로 유리병 속의 향들을 하나하나 불러내, 하나의 다채로운 향으로 조성하는 가브리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다양한 악기들의 소리를 조화롭게 연출하는 지휘자 같기도 하고, 수많은 단어들을 조율하여 문장으로 뽑아내는 소설가 같기도 하다.


향과 향이 만나 탄생한 새로운 향을 접할 때면, 눈을 감는다. 첫 향이 닿고, 두 번째, 세 번째 향이 다가오고, 머물고, 사라진다. 사라짐에는 농도와 밀도, 속도가 관계된다. 이들의 강약 속에 내 안의 것들이 일어나고, 소용돌이친다. 향은 철저히 기억에 의존한다. 기억은 되찾은 시간의 어떤 삶이다. 향, 기억, 시간은 다시, 프루스트의 세계로 귀결된다. 문학이든 철학이든, 시간에 관한 한, 프루스트를 벗어날 수 없다. 세상에 쓰인 모든 ‘시간 담론’들은 모두 프루스트의 ‘시간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향하고, 거기에서 다시 풀려난다.


프루스트 소설의 핵심 체험은 잘 알려진 대로 보리수 꽃잎차에 담근 마들렌의 향과 맛이다. (중략) 향기로운 시간의 정수는 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중략) 지속성을 위한 프루스트의 전략은 시간을 향기롭게 만드는 것이다. (중략) 시간의 향기는 실제 향기를 타고 퍼져간다. 후각은 기억과 부활의 기관인 듯하다. (중략) 차의 향과 맛에서 촉발된 기억은 특히 강렬한 시간의 향기를 발산한다. 유년의 세계 전체가 이를 통해 소생하는 것이다. (중략) 단 하나의 향기에서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유년의 우주가 깨어 일어난다.

-한병철. 『시간의 향기』 중에서



순백을 향한 혼의 엘레지 _ 한강과 박솔뫼의 광주

한강, 흰 것에 바치는 비가(悲歌)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여름을 맞이하는 것이 때로 설레고 기다려지기도 한다. 소설을 쓰는 일이, 그것으로 살아가는 일이, 비록 천 개의 바늘 끝이 머리 한쪽을 수없이 찔러대는 고통에 시달리는 일이라 해도, 황홀하고 감사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아니, 이것으로 부족하다. 문장을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축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행동, 이런 마음, 이런 기억, 이런 세계와 맞닥뜨릴 때다.


오래전 그녀는 바닷가에서 흰 조약돌을 주웠다. 모래를 틸어낸 뒤 바지 호주머니에 넣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서랍에 넣어두었다. 파도에 닳아 동그랗고 매끄러운 돌이었다.

-한강, 「흰 돌」중에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은 ‘소설을 읽고 있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만드는 소설’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일 수 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붙잡고, 뜯어보고, 정의하려 했던 소설의 내용과 형식, 그러니까 소설이라는 장르개념에서 훌쩍 벗어난, 소설 너머의 글쓰기 같은 것이다. 혼의 울음, 또는 울림, 자기 자신, 또는 누군가를 위한 추모와 애도.


『흰』은 한강이 언젠가는 써야 할 ‘어떤 것’이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녀는 시인이 되어야 했고, 소설가가 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지난봄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이 어릴 때, 슬픔과 가까워진 어떤 경험을 했느냐고. (중략) 그 순간 불현 듯 떠오른 것이 이 죽음이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나는 자랐다. (중략)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 그이가 죽은 자리에 내가 태어나 자랐다는 이야기.

-한강, 「달떡」 중에서


『흰』은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달떡처럼 얼굴이 희었던 갓난아기, 그러니까 언니에 대한 애도 또는 추모의 글을 써야겠다고 작가가 다짐한 뒤, 내면을 들여다보며 길어 올린 목록들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작가가 불러낸 목록은 ‘강보’부터 ‘수의’까지 열다섯 가지. 이들이 시간과 공간, 세계로 점점 확산되면서 예순세 가지로 늘어난다.


‘흰’에 바치는 비가의 흐름으로 작가는 목록으로서의 서사, 목록을 통한 애도 서사라는 새로운 형식의 소설형식을 선보였다. 한편, 박솔뫼가 듣고 싶고, 하고 싶은 또 다른 이야기 세계도 있다.


박솔뫼, 호명으로 벌이는 해명의 글쓰기

내가 언제나 듣고 싶은 이야기는 어떻게 그해 여름이 지나갔느냐 하는 것인데 이건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해 여름은 매해 여름으로 나는 늘 여름이 어떻게 지나갔는가 하는 것을 집중해서 떠올린다.

-박솔뫼, 『머리부터 천천히』중에서


박솔뫼의 『머리부터 천천히』는, 보통 소설 문법이 작동하듯, 인물의 시점과 인물들 간의 관계, 현재형 또는 과거형의 선택과 집중, 공간성 등의 통일을 이루지 않은 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형태로 펼쳐진다. 이야기들이 서로 손을 주고받으며 나아가는데, 그 형상이 도마뱀의 꼬리처럼 잘려나가거나, 뫼비우스의띠처럼 어긋나며 이어진다.


이곳이 무덤은 아니지만 무덤이 되지도 않겠지만 그 옆에 역시나 큰 바위를 세워 누구를 또 누군가를 누군가의 누구의 이름을 새기고 그 사람이 누구를 죽이고 그 사람이 누구에게 죽었는지를 적습니다. 누구는 아들의 이름이고 딸의 이름이거나 할머니의 이름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버지이거나 친구, 할아버지, 고모의 이름이 됩니다. 그러고 나면 이 바다는 무엇이 되며 사람들은 이 바다를 무어라 부를까. 이 바다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나의 오래된 숙제라면 나는 이 바다의 이름을 무어라 붙여야 할까.

-박솔뫼, 『머리부터 천천히』중에서


한강과 박솔뫼의 소설을 읽다보면, 소설이란 일종의 호명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한강과 박솔뫼의 공통점은 둘다 광주 태생이라는 것이다. 박솔뫼는 1980년대에, 한강은 1970년대에 그곳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광주를 대상으로 문제작을 발표했다. 박솔뫼 단편 「그럼 무얼 부르지」와 한강 장편 『소년이 온다』가 바로 그것이다.


한강이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언니를 애도하는 제의의 뜻으로 세상의 ‘흰’ 것들의 목록을 작성해 하나하나 정갈하게 풀어간다면, 박솔뫼는 여름, 소설, 무덤, 바다 같은 보통명사와 속리산, 카프카, 부산 같은 고유명사, 그리고 병준과 이덕자 같은 익명에 가까운 인물을 호출해 뒤섞음으로써 다성적이고 다형적인 이야기의 카니발을 벌인다.


한강의 목록으로서의 애도 서사든, 박솔뫼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묘한 이야기든, 이들은 그 어떤 페이지에서도, 자기 안에 갇혀 있던 오래된 슬픔, 또는 자기 안팎에 떠도는 이름들을 제대로 호명해줌으로써, 신비로운 치유의 힘을 선사한다. 치유란 가벼워지는 것, 곧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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