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찬란한 어둠

   
김문정
ǻ
흐름출판
   
15000
2202�� 12��



■ 책 소개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를 실력으로 입증한 김문정 음악감독의 그 시작

《이토록 찬란한 어둠》은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정상 뮤지컬 음악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는 김문정의 첫 번째 에세이다. 저자는 20여 년 간 《맨 오브 라만차》《지킬 앤 하이드》《레베카》《마리 앙투아네트》《팬텀》 등을 비롯해 50여 편의 음악감독을 맡았고 네 번의 뮤지컬 어워즈 음악감독상 수상하며 ‘뮤지컬계의 작은 거인’이라고 불릴 만큼 업계 안팎에서 인정받는 인물이다. 그런 저자가 “지금쯤이면 꺼내놓아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음악감독으로 걸어온 지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 저자 김문정
대한민국 최고의 뮤지컬 음악감독. 국내 최초 뮤지컬 전문 오케스트라 THE PIT ORCHESTRA의 지휘자. 한세대 학교 공연예술학과 교수. 《명성황후》 건반 연주자로 뮤지컬 음악을 시작한 저자는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뮤지컬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며 지금까지 《레미제라블》 《맘마미아》 《미스 사이공》 《명성 황후》 《맨 오브 라만차》 《에비타》 《모차르트!》 《영웅》 《서 편제》 《레베카》 《웃는 남자》 《마리 앙투아네트》 《팬텀》 《광화문 연가》 등 50여 편의 뮤지컬 공연 음악감독을 맡았다. 종합 예술이라 불리는 뮤지컬 장르에서 때로는 음악감독으로 때로는 슈퍼바이저로 작품에 참여하며 무대를 음악으로 꽉 채워왔으며,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완벽을 기하는 노력과 그에 준하는 결과로 ‘뮤지컬계의 작은 거인’이라고 불린다. 2008, 2009, 2011, 2012 뮤지컬 어워즈에서 음악감독상을 수상했다. 

《내 마음의 풍금》 《도 리안 그레이》 《메이사의 노래》에 작곡가로도 참여하며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으며, 2008 한국뮤지컬 대상에서 《내 마음의 풍금》으로 작곡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21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 표창, 2019 문화체육 관광부 장관 표창, 2011 한국 YWCA 연합회 한국여성지 도자상 등을 수상했고, 지금도 명실공히 국내 최정상 뮤지컬 음악감독으로서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나아가 여러 채널을 통해 뮤지컬 장르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차례
Overture 이야기의 막을 열며

Opening Number ◆ 나비의 꿈
나비의 꿈을 꾸다 / 우연한 시작 / 푸른 돛은 바람을 타고 어디로 갈까?
방황하는 스물 / 은밀한 편지 / 뜻밖의 기회 / 그해 6월 / 기적이 나에게
인생이란 참 모를 일 / 세계무대로부터의 또 다른 배움

Exposition Number ◆ 뮤지컬이라는 마법
뮤지컬, 매지컬 / 완벽한 유니즌 / Yes, Yes, Yes! / 최고의 프로듀서란
사람이라는 홀씨가 낳은 / 그때 만약에 / 마음은 시간을 거슬러
함께 만드는 정원의 가치 / 무대와 함께 나이를 먹는다는 것
관객의, 관객에 의한, 관객을 위한 / 배우가 무대를 두려워한다는 것
무대에 우리가 없다면 /

Production Number ◆ 피트, 어둡고 찬란한 우주
이것이 ‘오케피’ / The M.C 그리고 THE PIT / 음악감독의 일 / 오디션,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진짜 내 꿈은… / 어쩔 수 없는 이별 앞에서 / 미래를 위한 고민 / 더 많은 우리가 모여

Curtain Call 거대한 장벽 앞에서

 




이토록 찬란한 어둠


Opening Number ◆ 나비의 꿈

나비의 꿈을 꾸다

음악을 하면서 알게 된 선배로부터 뮤지컬 《명성황후》 오케스트라의 건반 연주자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이가 아직 어린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하겠다고 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연습실에 도착해 연습을 시작하는데 꿈인가 싶을 만큼 그곳에 앉아 있는 내가 낯설었다.


그전까지는 주로 미디(MIDI) 작업을 했으므로 작은 모니터 안에서 기계로 각 악기의 소리를 만들어냈는데 실제로 그 악기들이 눈앞에 놓여 있다는 게 몹시 신기했다. 미디로 만들어 낸 소리도 좋았지만 현장에서 진짜 악기가 뿜어내는 소리의 매력은 생각 이상이었다. 


《명성황후》 본 공연을 앞두고 어둡고 좁은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섰던 첫 순간을 기억한다. 본 무대에서 한참 아래의 깊숙한 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좁았다. 연주자들이 연주할 때 서로 방해받지 않을, 딱 그만큼만 떨어져 앉을 수 있는 정도의 공간. 작은 상자 속 같았다고 해야 할까?


무대와 분리된 피트라는 공간은 연주자들만의 우주였다. 연주자들이 그 우주의 별이었고, 서로의 반짝임이 어우러지며 무대 위와는 별개의 아름다운 밤하늘을 만들어냈다. 그 공간이 정말 좋았다. 그곳에 내 운명이 있으리라는 걸 어슴푸레 짐작했다.


그러나 무대 위를 ‘보는 것’만큼은 포기가 되지 않았다. 깊숙한 피트 안에서 건반 연주자로 공연을 하면 할수록 무대 위에 대한 호기심, 무대 위를 보고 싶다는 열망이 끌어올랐다. 무대 위를 알면 공연에 더 좋은 음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트 안에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리는 딱 한 곳, 지휘봉을 잡고 서는 음악감독의 자리였다.


《명성황후》 오케스트라의 건반 연주자로 공연을 마칠 때쯤 진심으로 뮤지컬 음악감독을 꿈꾸기 시작했다. ‘직책’이나 ‘지위’가 아니라 단지 뮤지컬이라는 세계에 좀 더 깊이 들어가고 싶었다. 가는 지휘봉으로 땅을 다지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려 음악이라는 집을 짓고 싶다고 생각했다. 연주자와 배우, 스태프와 관객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아름다운 집을.


뜻밖의 기회

운이 좋았다. 창작 뮤지컬 《둘리》의 음악감독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은 건 뮤지컬 음악감독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공부를 시작한 지 1년쯤 됐을 때의 일이다.


《명성황후》 공연이 끝난 이후, 일주일에 이틀을 온전히 쏟아 부으며 음악감독이 되기 위해 기약 없는 준비를 시작했다. 저녁이면 국내에 오픈한 뮤지컬 공연들을 찾아 관람했고, 낮에는 음악감독이 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배웠다. 지휘를 하기 위해 클래식 지휘를 배웠고 배우들에게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그 또한 알아야 하니 실용음악 학원을 다니며 노래를 배웠다. 《명성황후》 음악에 국악이 쓰인 걸 생각해 사물놀이와 장구도 배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더욱 하루 한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가족들의 배려를 생각해서이기도 했고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절실함 때문이기도 했다.


하루를 열흘처럼 쪼개 쓰며 일 년을 보냈을 때, 2000년 밀레니엄을 기념한 뮤지컬 두 편이 기획되고 있었다. 교육부와 예술의 전당, 《명성황후》의 제작사 에이콘이 공동 제작하는 창작 뮤지컬 《둘리》와  라이선스 뮤지컬인 《키스 미 케이트》였다. 나는 그때 《키스 미 케이트》 오케스트라의 건반 연주자로 합류해 한창 연습 중이었는데, 3주 후 오픈인 《둘리》는 모든 곡이 아직 다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부 사정으로 일정이 엉켰고 음악감독 자리까지 공석이 된 상황이라고 했다. 《둘리》는 교육부와 함께 제작하는 작품이라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수습이 불가능했다. 공연 관계자들 모두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이콤의 윤진호 대표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둘리》 조연출에게 소개받았다며 대뜸 내게 《둘리》의 음악감독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이었다. 뮤지컬 음악감독이 되기를 그토록 원했지만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리 온 힘을 다해 공부하고 연습하며 준비해왔다고 해도 감독 경험이 없는 내가 맡기에는 여러 모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첫 작품을 이렇게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올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윤 대표의 부탁을 거절했고 그는 일단 알겠다며 물러섰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두 번 더 나를 찾아왔다.


세 번의 만남. 세 번의 부탁. 사실 나는 이미 두 번째 만남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윤호진 대표가 세 번째로 찾아와 거듭 청했을 때 나는 내 고민에 마침표를 찍었다.


“대표님, 해보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저는 이 일이 너무 하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준비했어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 갑작스럽게 투입돼 평가받는 건 좀 억울해요. 다음에 제대로 준비해서 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세요. 제대로 시간을 두고 준비해서 제 역량을 보여드릴 수 있는 진짜 기회요.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요.”


윤호진 대표는 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고 그날 이후 나는 공식적으로 《둘리》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20년 전 우리나라 뮤지컬이 부흥하기 시작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에이콤처럼 뮤지컬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전문 제작팀은 정해져 있고 뮤지컬 수요는 급격히 늘던 때였다. 공급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벌어진 《둘리》와 같은 일은 내가 아는 한 그 이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뮤지컬은 차근차근 발전해왔고 발전하고 있으며, 능력 있는 수많은 전문가를 배출하고 있다.


나는 내가 시대를 잘 만났다고, 운이 좋았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뮤지컬계에 다시없을 단 한 번의 위기가 내게 기회가 된 건 사실이다. 하필 마침 그때 내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 행운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세계무대로부터의 또 다른 배움

해외에서 뮤지컬 공연을 보고 참여하면서 배운 것이 많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사람’과 ‘시스템’이다. 런던에서 존 릭비를 만났던 것이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사이 나는 국내 뮤지컬 업계에서 꾸준히 작품을 하는 음악감독이 됐고, 해외에서 공연을 하거나 MR을 녹음하면서 해외 스태프와 일을 해본 경험도 꽤 많이 쌓였다. 그런 경험 끝에 알게 된 것은 일을 하는 데 국적은 크게 상관없다는 사실이다. 때때로 문화적인 차이를 느끼기는 하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면 누구든지 간에 그 공연의 스태프 중 한 사람일 뿐 각자의 출신과 인종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점은 전 세계 어디에서든 다 비슷하지만 시스템만큼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명성황후》 런던 공연에서 밤을 새서 악보를 수정해 새로 뽑아갔을 때의 일이다. 악보를 낱장으로 출력해서 가니 책처럼 넘겨볼 수 있는 악보여야 한다고 했다. 악보 테이핑을 해야 했다. 내가 바로 해오겠다고 하자 존이 나를 의아하게 보았다. 테이핑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왜 이걸 네가 하느냐는 거였다. 그때 나는 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잠시 후 시간당 보수를 받고 전문적으로 악보 테이핑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테이프를 종류별로 들고 와서는 꼼꼼하고 세심하게, 종이 사이사이에 갱지까지 붙여가며 견고하게 제본된 형태의 악보를 만들어냈다. 내가 했다면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떤 역할이라도 전문가가 있고 각자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 그것이 프로의 세계였다.


《명성황후》 LA 공연 때는 현지 오케스트라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LA 오케스트라 조합의 ‘콘트랙터’라는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의논이라기보다 통보에 가까운 말투로 연습 시간에 대해 설명했다.


“연습은 3시간씩 두 타임이고 연주자들은 무조건 30분을 쉬어야 합니다. 30분을 먼저 쉬고 연습을 시작하든 연습 중간에 쉬든, 뒤쪽에 쉬든 연습을 30분 일찍 끝내든, 어쨌든 30분은 무조건 쉬는 시간으로 정해져 있어요.”


‘아니, 연습이 더 필요하면 더 할 수도 있고 그런 거 아닌가? 여건이 되면 30분보다 더 쉴 수도 있고 아니면 덜 쉴 수도 있지 처음부터 왜 이렇게까지 못 박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거기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현지 연주자 조합에서 그렇게 정한 거라고 하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어진 말이 더 놀라웠다.


“연주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해요. 언제든 교체가 가능하니까요.”


그가 열어 보인 수첩에는 악기와 연주자 이름이 빼곡했다. 언제라도 대체할 수 있는 연주자 리스트였다. ‘대체 가능’이라는 말이 자극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의 말에서 내가 실제로 느꼈던 건 이것이었다.


‘맡은 일을 확실히 할 테니 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달라.’


그 이후 지켜보니 그들은 정해진 연습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쉬는 시간도 엄밀히 말하면 ‘자유 시간’이나 다름없었고, 그 시간에 연주자들은 서로의 악기를 배우느라 바빴다. 비올라 연주자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오보에 연주자가 클라리넷을 배우는 식이랄까? 알고 보니 연주자들이 뮤지컬 공연 일이 없을 때는 자기의 주 악기뿐만 아니라 다룰 수 있는 다른 악기를 이용해 재즈 클럽 같은 곳에서 연주한다고 했다. 오케스트라 안에서 다룰 수 있는 악기가 많다는 건 그만큼 자기 능력치가 올라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다양한 시도를 하고 계속해서 자기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그들의 생존 방식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연주자 리스트는 무엇이든 가능한 인력풀이었다.


‘맡은 바를 다하고 필요한 것을 요구한다’는 태도 역시 인상적이었다. ‘필요한 것을 요구한다’라는 것은 당시 한국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일이었는데, 프로로서 일을 해내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어느 분야에서든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누군가는 희생을 하고 무리한 조건을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 없지 않고, 그게 당연시되는 분위기가 있다. 뮤지컬 업계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더군다나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 흔의 말처럼 한국의 뮤지컬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고, 그 점은 환영할 일이지만 시스템은 속도와 정비례해서 발전하지 않는다. 스포트라이트 밖에 있는 스태프들의 작업 환경이나 업무 조건은 상대적으로 가장 늦게, 천천히 나아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침묵하면 그냥 넘어가게 되고 그게 당연해지면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다. 해외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자기가 맡은 바에 대해 확실히 책임을 지고, 권리를 찾는 데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뮤지컬 음악감독으로서 초기에 해외 경험을 다양하게 해본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나는 백지 같은 상태였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경험 하든 좋은 점은 빨리 내 것으로, 우리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뮤지컬 음악감독으로서 나만의 기준이 그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Exposition Number ◆ 뮤지컬이라는 마법

완벽한 유니즌

뮤지컬 한 작품을 만드는 데 적어도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다. 무대 위 배우를 제외하고도 제작자, 연출가, 극작가, 작곡가, 작사가, 안무가를 비롯해서 무대감독, 음악감독, 조명감독 등 필요한 역할만 헤아려도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당연히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수많은 논의와 협의를 거친다. 다만 라이선스 작품은 원작이 있는 만큼 이미 완성된 설계도를 가지고 만든다면, 창작 뮤지컬은 설계도를 그리는 것에서부터 자재까지 직접 결정하고 손수 지어 올려야 한다. 결국 더 깊고 세밀한 의견 조율이 필요하고 세세한 협의와 논의의 과정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더 어렵고 재미있는 것이 창작 뮤지컬이기도 하다.


나는 창작극에도 꽤 여러 편 참여한 편이고 작곡가로서 참여한 작품도 여럿 있다. 모든 작품이 특별하지만 뮤지컬이 협업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창작 뮤지컬 《내 마음의 풍금》은 지금도 내게 반짝이는 작품이다. 그 이유는 첫 공연 다음 날 ‘정상 콜’을 한 작품은 지금까지 《내 마음의 풍금》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정상 콜이란 개막 첫 번째 공연 이후 음향, 음악, 조명, 무대, 연출 등 어떤 파트도 수정 없이 그대로 진행하는 걸 말한다. 보통은 아무리 준비를 잘했다고 해도 첫 공연에서 부족한 부분이 드러나게 마련이고, 수정이나 보완이 필요한 부분을 확인하고 수정해가며 작품의 완성도를 더해간다. 그러니 뮤지컬 업계에서 ‘개막 첫 공연 다음 날 정상 콜’은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사건과 같다.


2008년에 공연됐던 《내 마음의 풍금》은 열일곱 살 초등학생 홍연과 시골에 부임한 젊은 총각 선생님 동수의 풋풋한 이야기였다. 이 작품의 음악감독 일을 의뢰받은 건 2006년, 《에비타》 음악감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제작사 쇼틱커뮤니케이션즈는 《내 마음의 풍금》을 준비하면서 각 분야의 실력 좋은 전문가들을 섭외했지만 팀이 거의 다 꾸려지도록 작곡가를 찾지 못했고, 우리는 급한 대로 대본 작업을 먼저 시작했다.


‘내가 작곡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 당시 아이들은 여전히 어렸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일은 힘겨웠다. 그러나 좀처럼 포기가 되지 않았다. 혼자 하면 공연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지만 다른 작곡가와 함께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연출진에 대중음악 업계에서 활동 중인 최주영 작곡가를 공동 작곡가로 추천했다. 다행히 최주영 작곡가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함께 곡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최주영 작곡가와의 공동 작업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같은 영역의 일을 두 사람이 함께하면 분란이 생길 수 있다는 염려가 무색하게도 우리의 작업은 오히려 더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움직이기 위해 처음부터 각 곡의 방향을 잡고 곡마다 각자 래퍼런스를 준비했다. 어느 정도의 리듬이 안무와 어울리는지, 빠르기가 적당한지 확인하고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쳐 정리한 뒤에 각자 곡을 썼다. 우리가 각각 최주영과 김문정 버전을 만들어 가면 함께 모여 들어보고 둘 중 나은 것을 선택했다.


대본 작업 역시 이희준 작가님이 대본을 뽑아 오면 회의 때마다 각 파트의 담당자들이 모여 대본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기억하기로는 수정 대본이 7.2고까지 나올 정도였다.


당시에는 드물었던 대본 발표회(지금의 쇼케이스)도 진행했다. 작은 소극장에 모여서 작품을 평가하고 배우들의 평가를 받아 보는 시간으로, 배우들의 의견과 제안도 대본에 반영한 다음 꼼꼼하게 준비해 연습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되자 다시 한 번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고 우리는 또 한 번 수정을 거쳤다. 공연장으로 예정된 호암아트홀 무대와 비슷한 규모인 구민회관 무대를 빌려 리허설을 여러 번 하기도 했다. 모든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이 업계에서 유니콘과 같은 ‘첫 공연 다음 날 정상 콜’은 이렇게 하나하나 세심하게 준비한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음악감독이자 작곡가로서 그 모든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완벽에 가까운 협업의 경험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좋은 배움이 된다. 그 과정 속에서 협업하는 방법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완성도 있는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나와 우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방법을 배운다. 작품의 색에 따라 어디에 어떻게 힘을 빼고 줄지를 생각한다. 나를 잃지 않으며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태도를 배운다. 좋은 동료와 좋은 경험을 함께 나누고 나면 그것이 하나의 기준점이 되고, 다음에도 그 같은 기준에 이르려고 애쓰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내 마음의 풍금》은 지금도 여전히 내게 별과 같은 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매 작품마다 그 같은 별 하나를 다시 만들어보고자 노력한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그 작품이 또 다른 기준점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Production Number ◆ 피트, 어둡고 찬란한 우주

진짜 내 꿈은…

“네가 문정이구나. 너와 일하고 싶었어.”


2004년 뮤지컬 《맘마미아》의 음악 슈퍼바이저로 온 마틴은 존 릭비에게 내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반가워했다. 런던의 스태프에게 함께 일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글로벌한 감독이 된 것만 같았다. 《명성황후》때 만난 뒤 2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는데도 먼 곳에서 잊지 않고 나를 소개해준 존이 새삼 고마웠다.


존을 다시 만난 것은 다시 그때로부터 20년 뒤 한국에서였다. 2015년 국내 《레미제라블》 두 번째 시즌의 음악 슈퍼바이저로 존이 왔고, 우리는 13년 만에 다시 함께 일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런던에서의 경험은 그 이후 LA, 호주, 뉴욕, 캐나다 등 외국 공연에서의 외국 연주자들과 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거기에서 나아가 외국 연주자들과의 협업은 그들의 시스템을 공부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 나 아니면 안 되는 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은.


음악감독으로 공연 계약을 할 때 제작사에 꼭 하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사람이 얼마 받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제 값을 매기는 데 비교 대상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돈도 일하는 환경입니다. 많고 적음을 떠나서 돈과 저와 동료들의 시간의 가치가 충돌하지 않으면 됩니다.”


음악감독이나 연주자 역시 여느 분야의 프리랜서와 같아서 출연 횟수에 따른 회당 보수를 받는다. 주연배우들의 개런티에는 한참 못 미치는 액수이지만 적어도 연주자들이 이 시간에 여기에서 왜 이걸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래도록 함께 일해온 우리 팀의 보수를 어느 정도라도 끌어올리려고 애써왔다.


더불어 꼭 요구하는 것도 있다. 피아노가 놓인 음악감독 개인 대기실이다. 방의 크기나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개인 대기실은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음악감독의 일을 잘하기 위해서다. 별도의 공간에서 배우들의 컨디션을 확인해야 하고 필요할 때는 배우들의 노래 연습도 지도해야 하는데 여럿이 쓰는 방은 나도 배우도 집중하기 어렵다. 게다가 서너 시간 동안 서서 지휘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15~20분의 인터미션 때라도 잘 쉬어야 2막을 문제없이 잘 마무리할 수 있다.


첫 공연 전에 오케스트라와 배우들이 모여 합을 맞추는 시츠프로브(Sitzprobe) 때 연주자들 간식을 마련해주는 것도 요구사항 중 하나다. 날을 잡아 진행하는 시츠프로브 연습은 종일 쉬지 않고 계속된다. 배우들은 배역에 따라 돌아가며 쉴 수 있지만 연주자들은 캐스트별로 계속 연주해야 하니 쉬지 못한다. 연습 중간에 햄버거나 샌드위치 등으로 간단한 요기라도 하지 않으면 몇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종일 연주하는 연주자들의 체력이 배겨나지 못한다. 안정적인 자리에 편한 자세로 앉아 잘 먹고 에너지를 채운 뒤에 하는 연주와 그렇지 않은 연주는 엄청나게 다르다.


공연 전 피트에 들어가서 연주 환경을 까다롭게 체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주자들의 의자가 흔들리진 않는지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 일일이 점검한다. 때로 의자가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그냥 앉겠다고 하는 연주자가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몇 달 가까이 공연이 지속되는데 계속 불편한 의자에 앉아 연주한다는 건 고역이다. 무엇보다 그 같은 신체적 불편함은 고스란히 연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무대팀에 꼭 의자 교체를 부탁한다. 보면등이 헐거우면 제대로 달아달라고 요청하고, 좌석 위치가 불편해 연주할 때 옆 사람과 부딪힐 것 같다고 하면 자리를 바꿔준다. 악기 튜닝 시간을 여유 있게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뮤지컬 음악감독이라는 이 일을 하면 할수록 좋고, 가능한 동료들과 오래, 행복하게 일하고 싶다. 오랜 시간 경험 속에서 배운 것들을 지금 여기에 적용하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앞으로 좀 더 오래, 함께’라는 마음이 커질수록 연주자들을 위한 좋은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 작곡이나 작사와 같은 창작부터 연출, 암무, 무개 등 뮤지컬 교육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는 꿈을 꾸기도 한다. 어쩌면 지금이 또 다른 시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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