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유미리
ǻ
소미미디어
   
13800
2021�� 09��



■ 책 소개


1964년과 2020년의 도쿄 올림픽 그리고 동일본 대지진
전후 일본의 쓸쓸한 근대사를 대표하는 한 노숙자의 고독한 삶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은 우에노공원의 늙은 노숙자인 ‘가즈’를 주인공으로 1964년의 도쿄 올림픽과 2020년의 두 번째 도쿄 올림픽을 잇는다. 태어날 때부터 짊어져야 했던 가난, 첫 번째 도쿄 올림픽 공사현장에서 돈을 벌어 가정을 꾸린 그는 다른 사람처럼 열심히 그리고 평범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에게 삶은 비극의 연속이다. 타지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아들에 이어 부인 역시 급사하는데, 이후 홀로 남은 자신을 걱정하는 손녀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던 그는 도쿄로 올라가 노숙자가 되는 길을 택한다. 빛과 소리가 가득한 도쿄의 한구석에서 고독하고 쓸쓸하게 저물어가는 노숙자들. 그들은 눈에 보이지만 기억에 남지 않고, 눈에서 사라지면 쉽게 잊히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이다.

모두에게 개방된 우에노공원이지만 언제고 타인의 필요에 따라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노숙자. 동일본 대지진의 가장 큰 피해자이지만 방사능 오염을 이유로 모든 곳에서 거절당하는 후쿠시마현 이재민.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끝까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재일한국인. 유미리는 일본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차별의 기저에 자신들은 결코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을 거란 믿음과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란 점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처음 구상에서 탈고까지 꼬박 12년이 걸렸다.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후쿠시마로 거처를 옮겼다. 다년간의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리얼리티를 확보한 작가는 시대의 비극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사라지지 않는 소리와 축축한 내음은 이미지화되어 주인공 의식의 흐름을 따라 들어와 독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부흥 올림픽’의 이름을 내건 2020년 도쿄 올림픽을 비웃듯 소외된 이웃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작가의 ‘차가운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 저자 유미리
소설가이자 극작가. 1968년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재일한국인 2세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뮤지컬 극단 도쿄키드브러더즈에 입단해 배우로 활동했고, 1987년 연극유니트 ‘청춘오월당’을 결성한다. 1993년 《물고기의 축제》로 기시다구니오희곡상 최연소 수상, 이듬해 첫 소설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문예지 《신초》에 발표했으며, 1996년 《풀하우스》로 이즈미교카상, 노마문예신인상을 수상하며 일본 문단에 파란을 일으킨다. 1997년 〈가족시네마>로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는데, 자신을 우익 단체 소속으로 밝힌 남성의 협박 전화로 인해 사인회 행사가 취소되는 사건을 겪는다.

파격적이고 거침없는 표현으로 사회 비판하는 작품을 꾸준히 발표한 작가는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2014)을 통해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선다. 사회가 애써 외면한 불우한 이웃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동일본 대지진 이후 ‘재건’을 표방한 2020년 도쿄 올림픽 준비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일본 국내의 불편한 시선과는 반대로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은 제71회 전미도서상 번역 부문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는다.(번역: 모건 가일스) 이는 일본 작가로서는 두 번째, 한국 동포 작가로서는 최초의 기록이다. 유미리 작가는 2015년부터 원전 사고로 피해를 겪은 사람들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 후쿠시마 제1원전으로부터 불과 16km 떨어진 곳에 이주해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 역자 강방화
1977년 일본 오카야마현에서 재일 교포 3세로 태어났다. 지금은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책과 영화 등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말로 옮긴 어린이책은 『쓱쓱 싹싹 목욕탕』, 『똑똑하게 사는 법』, 『매일 입는 내 옷 탐구 생활』, 『까만 크레파스와 하얀 꼬마 크레파스』 등이 있다.

■ 차례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작가의 말
작가의 말(2019년)
옮긴이의 말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JR 우에노역 공원 출구 개찰구를 나와 횡단보도 건너편 은행나무를 둘러싼 돌담에는 늘상 노숙자들이 앉아 있다.


피곤해서 잠시 얕은 쪽잠을 청하다가 내 코골이 소리에 중간중간 잠이 깬 때면 은행나무 잎들이 그리는 그물 같은 그림자가 흔들려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있는데, 이 공원에 온 지 몇 년이나 되었는데도.


돈을 벌러 도쿄에 온 것은 1963년 말, 요코가 5살, 고이치는 아직 3살 때였다. 우에노동물원에 판다가 온 것은 그로부터 9년 뒤로 둘 다 이미 중학생이어서 동물원에 가고 싶어 하는 나이는 지났었다.


동물원뿐 아니라 놀이공원, 해수욕, 등산에 데려간 적도 없고, 입학식이나 졸업식, 학부모 공개수업, 체육대회에도 가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고이치는 집에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는 아버지를 잘 따르지 않았고 응석을 부리거나 조르는 일도 없었는데 그날따라 내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아빠, 타고 싶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쉽게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주눅 들어 몇 번씩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문 끝에 화난 것처럼 빨개진 고이치의 얼굴. 하지만 돈이 없었다. 당시에 3천엔 정도였으니 지금이면 3만 엔도 더 된다……… 큰돈이었다…….


그날, 하늘은 한 장의 파란 천처럼 맑았다. 태워주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 후회가 남았다. 그 후회는 10년 뒤 그날, 화살이 되어 내 마음을 뚫고, 지금도 꽂힌 채 빠지지가 않는다.


종전을 맞이했을 때는 열두 살이었다.


전쟁에 져서 슬프거나 비참한 느낌보다 먹고살고 먹이고 살리는 일을 생각해야 했다. 아이 하나 키우기도 힘든데 동생들이 줄줄이 일곱이나 있었다. 당시 하마도리에는 도쿄전력의 원자력발전소라든가 도호쿠 전력의 화력발전소 같은 건 없었고 히타치 전자와 델몬트 공장도 없었다. 규모가 큰 농가는 농사만으로 먹고살 수 있었지만, 우리 집 논은 아주 작았기에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와키에 있는 오나하마항에서 더부살이하며 일했다.


허리를 다쳐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게 된 아버지와 나는, 가쓰오와 마사오가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 요코와 고이치한테도 앞으로 돈이 더 들어갈 거라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도쿄에 가기로 결심했다.


도쿄 올림픽이 열리기 1년 전, 1963년 12월 27일, 연말이 다가오는 추운 아침이었다. 아직 어두컴컴한 시간에 집을 나와 가시마역으로 가서 5시 33분 도키와선 첫차를 탔다. 우에노역에는 정오가 지났을 무렵에 도착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터널을 지난 탓에 얼굴은 증기기관차의 매연으로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그것이 부끄러워 승강장을 걸어가면서 열차 창문에 몇 번이나 얼굴을 비추며 모자의 챙을 올렸다 내렸다 한 기억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도쿄 올림픽 때 쓸 육상 경기장이나 야구장, 테니스 경기장, 배구장 등 체육 시설의 토목공사였다. 토목이라 해도 불도저나 삽차 같은 중장비는 본 적도 없었고 시골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은 애초에 그런 걸 다룰 줄 몰랐기 때문에 곡괭이나 삽으로 땅을 파서 손수레로 나르는 식으로 모두 인력으로 진행했다. 노동자는 도호쿠의 농가 출신이 많았다. 모두 “막일은 밭일이나 한가지라” 하고 웃었다. 5시에 일이 끝나면 같이 술을 마시러 가는 사람이 많았지만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술을 못 했다. 그래도 몇 번은 누가 술 사준다는 걸 도저히 거절하지 못해 같이 가긴 했으나 아무리 마시려고 해도 맥주 한 잔이 한계였으므로 차츰 말을 거는 이도 없어졌다.


도쿄 올림픽이 끝난 무렵부터 도호쿠나 홋카이도에도 도시 개발의 바람이 불었다. 간선도로, 철도, 공원, 하천 정비와 같은 토목공사가 활발해졌고 학교와 병원, 도서관, 시민 회관 같은 시설들도 잇달아 지어졌다. 다니가와 체육 주식회사가 센다이에 지사를 만든 것과 동시에 나는 기숙사를 세타가야에서 센다이로 옮겼고, 도호쿠와 홋카이도 방면의 건설 현장에 파견되어 야구장과 육상 경기장, 테니스 경기장과 같은 체육 시설 토목공사에 종사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고 나는 후쿠시마 스카가와 시청의 테니스장 예정지를 곡괭이로 파고 있었다.


밤에 숙소로 돌아갔더니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모리 씨, 아드님이 잘못됐다고 부인이 전화하셨어요. 라는 것이었다.


겨우 며칠 전에 세쓰코에게서 고이치가 엑스레이 기사 국가시험에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던 참이라 무언가 잘못 들었겠지 하고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고이치가 자취하던 목조 아파트에서 자다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고, 경찰에서 변사를 의심해 검시 중이라는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얼굴에 씌운 흰 천을 두 손으로 걷는다.


아들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건 갓난아기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집을 비운 20여 년 동안 이 집에서 식구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나는 모른다.


잠들어 있는 사이에 죽었고, 꼭 잠자는 것처럼 보이는 고이치의 나를 빼닮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 삶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어찌나 허무한 삶이었는지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딩동댕, 우에노공원 관리소에서 손님들께 당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공원 내에서 걸으면서 담배를 피우시면 주위 분들에게 피해가 갈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오니 삼가해주십시오. 담배는 재떨이가 있는 곳에서 피우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많은 이해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딩동댕.”


안내 방송이 나왔으나 막상 담배 연기는 용역꾼과 노숙자들이 앉은 벤치 주변에만 자욱했다.

옛날에는 가족이 있었다. 집도 있었다. 처음부터 골판지와 비닐로 만든 천막집에 살던 사람은 없었고 자진해서 노숙자가 된 사람도 없다. 이렇게 되기까지 각각의 사정이 있다. 사채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야반도주해서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도 있고 돈을 훔치거나 사람을 해코지해서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풀려 나왔어도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회사에서 잘리자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아이들과 집까지 빼앗겨 자포자기 상태에서 술과 도박에 빠져 무일푼이 된 사람, 직업을 전전하다 직업안정소를 열심히 다녀도 희망하는 일을 찾지 못하고 낙담한 나머지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4,50대 양복 차림의 노숙자도 있다.


결혼한 지 37년, 돈을 벌기 위해 외지에 가 있느라 아내 세쓰코와 함께 지낸 날은 모두 합해 한 해도 안 될 것이다. 세쓰코는 두 아이를 낳아 키우고 한참 어린 시동생들을 대학에 보내고 딸 요코를 시집보내고 나이 든 부모님 수발을 들면서 밭에 나가고 그러는 사이에도 부지런히 돈을 모아주었다. 국민연금도 매달 7만 엔씩 나오니 이제 죽을 때까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다며 세쓰코와 의논해서 상한 지붕과 벽, 부엌과 욕실 등을 수리했다.


센다이에 시집간 요코가 낳은 손자가 셋,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며칠씩 놀러 왔다. 첫째 여자아이가 열네 살, 아래로 열한 살과 아홉 살의 아들 둘이어서 이웃들에게 딱 좋게 낳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


세쓰코는 늘 일찍 일어나 내가 눈을 뜨는 7시 무렵에는 빨래와 마당 청소까지 한바탕 끝내놓고 부엌에서는 미소 된장국과 밥 짓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옆 이불에 세쓰코가 누워 있었다.


깨우려고 팔을 뻗었더니, 차갑다. 만져진 건 이불 위로 빠져나온 세쓰코의 팔이었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이불을 젖히고 몸을 흔들어봤지만 이미 사후경직이 시작되고 있었다.


고통스러웠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꾹 감은 채였다.


“왜?” 입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심장이 날뛰고 휑해진 머릿속이 시뻘겋게 비추어졌고 나는 이게 꿈이 아닌가 하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현실이었다. 익숙한 벽시계 소리가 온 집 안에 퍼졌지만 너무 놀라서 몇 번 울렸는지 셀 수가 없었다. 문자판을 보자 짧은 바늘이 7을, 긴 바늘이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허리가 아프다느니 다리가 아프다느니 하는 말은 했어도 일 잘하고 몸 튼튼한 것이 자랑이었던 세쓰코가 65세 나이에 죽다니, 왜 이런 일만 당해야 하나, 슬픔과 분노의 닻이 가슴 깊은 곳에 내려 더는 울 수 없었다.


딸 요코가 걱정해서, 하라마치에 있는 동물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게 된 손녀딸 마리를 자꾸 내게 보냈고 마리는 결국 내가 걱정된다며 살던 목조 아파트에서 나와 아예 우리집으로 이사를 왔다.


마리는 착한 아이였다. 매일 아침 토스트를 굽고 계란 프라이나 햄에그 같은 달걀 요리를 만들어주었다. 발치에 앉아서 기다리는 개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말을 걸고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아침 7시에 개를 차 조수석에 태우고 국도 6호선을 달려 하라마치로 나갔다. 밤늦게 돌아오는 일이 많아 점심과 저녁은 직접 해 먹었다. 밖에서 일할 때 기숙사 생활을 했으니 빨래와 취사 정도는 힘들지 않았으나 세쓰코가 죽고 나서 첫 오봉을 맞을 무렵부터 잠을 잘 수 없게 되었다.


고이치도 세쓰코도 잠에 목숨을 빼앗겼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 양쪽 겨드랑이가 오싹해지고 침이 끈적이고 입안에 신물이 고였다. 온몸의 신경이 긴장해 영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양손이 저려와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눈을 감는 게 무서웠다. 귀신같은 게 무서운 건 아니다. 죽음이, 내가 죽는 것이 무서운 것도 아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서웠다. 온몸을 누르는 그 무게에 저항할 수도, 그 무게를 견뎌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푹푹 찌네요.” 마리가 방충망만 남기고 반쯤 연 창에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빗소리와 함께 흘러들어 왔다. 비 냄새를 맡으며 마리가 만들어준 스크램블드에그와 토스트를 먹고 마리와 개를 현관까지 배웅했다. 막 스물한 살이 된 마리를 늙은 나와 이 집에 붙들어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하다. 할아버지는 도쿄에 간다. 이 집에는 이제 돌아오지 않을 거다. 찾지 말아라. 매일 맛있는 아침밥을 만들어줘서 고마웠다.” 그렇게 메모를 남긴 다음, 돈 벌러 나갈 때마다 썼던 검은 보스턴백을 벽장에서 꺼내 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챙겨 넣었다.


우에노공원에는 커다란 간판 두 개가 새로 내걸렸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하여! 국립서양미술관 본관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에 추천되었습니다.”


“지금 일본에는 꿈을 향한 힘이 필요하다. 2020년 올림픽·패럴림픽을 유치하자!”


세계유산 등재와 올림픽 유치를 심사하는 외국 위원들에게 노숙자들의 천막집이 눈에 띄면 감점 대상이 되는 걸까.


죽을 곳을 찾아 우에노공원에서 며칠을 지내다 너무나도 지친 나머지 5년이나 이곳에 눌러앉았다.


밤에는 추워서 좀처럼 잠들지 못했고 낮 동안 천막집에서 나와 고양이처럼 햇볕을 찾아 선잠을 자는 나날은, 과거에 내가 가족의 구성원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만큼 혹독했다.


그리고 그날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비참해지는 유독 힘든 아침이었다.


그날은 노숙자 사이에서 ‘강제 퇴거’라 불리는 ‘특별 청소’가 있는 날이었다. 천황가 분들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관람하기 전에 천막집을 치우고 공원 밖으로 나가야 했다.


시속 10킬로미터로 서행하던 차가 천천히 걷는 정도로 더 속도를 늦추고 뒷좌석 차창이 열렸다.


손바닥을 이쪽으로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은 천황 폐하였다.


바로 코앞에 천황, 황후 양 폐하가 계신다. 두 분은 온전히 온화함만을 띄운 눈빛으로 이쪽을 보며, 죄와 부끄러움과는 무관한 입술로 미소 짓고 계신다. 그 미소에서 두 분의 마음을 읽어낼 수는 없다. 하지만 정치가나 연예인처럼 속마음을 감추는 듯한 미소는 아니었다. 도전하거나 욕심내거나 방황하거나 하는 일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인생, 내가 살아온 세월과 같은 73년 전, 같은 1933년 출생이니 틀릴 수가 없다, 천황 폐하는 곧 73세가 되신다. 1960년 2월 23일에 태어나신 황태자 전하는 46세- 고이치도 살아 있었다면 46세가 된다.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과 같은 날에 태어나서 ‘活’라는 한 글자를 따와 고이치라 이름 붙인 맏아들.


불현듯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눈물을 참으려고 얼굴의 온 근육에 힘을 주었지만 들숨과 날숨으로 어깨가 흔들렸고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JR 우에노역 공원 출구 개찰구로 들어간다.


안내판에 쓰인 ‘도호쿠 신칸센 하야테-신아오모리행’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와 순간 저걸 타면 네 시간 반 만에 가시마역에 도착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흔들림은 고동 한 번으로 진정되었고 다시는 향수 때문에 가슴이 뛰거나 죄어 오는 일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한 미기타하마 해변을 걷고 있는데 들어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간 것 같아 밀짚모자 차양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와앙 하고 점보제트기가 이륙하는 듯한 소리로 땅이 울려 온갖 소리가 다 사라진 바로 다음 순간, 땅이 흔들렸다.


재해 방지 무선 사이렌이 요란스럽게 반복되었다.


“쓰나미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도달 예정 시각은 3시 35분입니다. 최대 7미터 높이의 쓰나미가 예상됩니다. 높은 곳으로 대피하십시오.”


6번 국도를 달려오는 차가 있었다. 운전하는 건 손녀딸 마리였고 조수석에는 허리가 긴 고타로가 앉아 있었다.


마리는 핸들을 잡고 액셀을 밟아 후진으로 6번 국도로 향했지만 검은 파도가 쫓아와 차를 집어삼켰다.


껴안을 수도, 머리와 볼을 쓰다듬을 수도, 이름을 부를 수도, 소리 높여 울 수도,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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