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해보니 나름 할 만합니다

   
김영우
ǻ
흐름출판
   
13800
2021�� 03��



■ 책 소개


매일 어제보다 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하여
생각하고 선택하며 책임지는 삶

이 책은 대한민국에서 아들로 태어나 평범과 평균을 벗어나지 않고 살아온 저자가 서울을 떠나는 선택한 뒤 달라진 삶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전원생활, 독립서점, 가사 노동, 채식 무엇 하나 쉬운 일은 없지만 “막상 해보니 나름 할 만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서 전보다 나은 사람이 되면 그걸로 충분하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에는 저자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매 순간 고민 끝에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려 애쓴 흔적이 담겨 있다.

■ 저자 김영우
서울의 어느 평범한 가정에서 남자로 나고 자랐다. 평범과 평균, 간혹은 그 이하를 오가며 살았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평생 비주류, 2군, 무명씨였다. 그런 줄 알았는데 가부장제만큼은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너무나 편하고 안전하게 살아 왔음을 뒤늦게 깨닫고는 당혹감과 부끄러움과 억울함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다. 23년째 글 노동으로 생계유지 중이며 가평의 동네 서점 ‘북유럽(Book You Love)’의 책방 주인을 맡고 있다. 오늘도 책방에서 없는 손님을 기다리며 읽고 고민하고 쓴다.

■ 차례
프롤로그

1부. 도시 생활자가 시골에 터를 잡고 살아보니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건 아닐까 / 자연스럽다는 것 / 저는 똥줄이 탑니다! / 연통 청소하기 / 진정한 ‘아저씨’를 느끼다 /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 김장을 나누는 시간 /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 슬기로운 분교 생활 / 북유럽 버티기 / 코로나19 임팩트 / 《인디고잉》을 ‘함께’ 읽으며 / 멍의 추억 / 청춘의 종말 / 보름달에게 / 삶을 소비하는 방법 / 어느 초가을에 쓴 편지

2부. 어느 날부터 괜찮지 않아서
주부(主夫)로 살다 / 가사 노동의 기쁨과 슬픔 / “미안한데 부탁이 있어” / 단발머리 귀신에 대한 소고 / 하이의 선물 / ‘에이, 아닌 거 같은데?’ / 엄마의 선택 / 아들 같은 사위 / 동화의 세계 / 동굴만큼 19호실도 / 우리의 세상 / 완벽히 비건이 되지 못하는 이유 / 고기를 만지며 / W 에게 / “야, 이 기지배야!” / 너보다 자기 / 성공이란 무엇일까

에필로그

 

 

 




제가 해보니 나름 할 만합니다


도시 생활자가 시골에 터를 잡고 살아보니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건 아닐까

가평의 시골마을로 이사 온 지 10여 년이 지났다. 전원생활의 꿈을 꾸기 시작한 건 아내가 임신했을 때였다. 그 당시 우리는 서울 변두리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예전부터 막연히 2층 집에 살고 싶다는 얘기를 종종 했는데, 그날따라 아내가 “그럼 알아봐” 하고 대거리해 주었다. 경기도에는 이 집을 팔아서 갈 수 있는 전원주택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섞인 힌트와 함께.


주로 기업이나 기관이 10년 단위로 발행하는 사사를 쓰거나 사보나 잡지 의뢰로 인터뷰나 잡문 기사를 쓰는 프리랜서인 나는 그날 밤,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 아내가 잠든 뒤에도 새벽까지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했다. 살고 있는 집 시세를 확인한 후 비슷한 가격대의 전원주택을 찾아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치밀하고 확고한 목표를 세운 건 아니지만 막연한 생각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가평군 설악면에 위치한 한 전원 주택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건강했던 딸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 급성 뇌수막염을 앓아 뇌수술을 마치고 퇴원한 직후였다. 원인 치료를 위해 1년 넘게 경과를 지켜봐야 했다. 그렇다면 보다 좋은 환경에서 지냈으면 좋겠다는 판단에 때마침 조금만 무리하면 갈 수 있겠다는 기대를 얹어 결심을 굳혔다. 아이 교육을 위해, 구체적으로는 ‘진학’을 위해서는 서울에 살아야 한다며 시골살이에 부정적이던 지인들도 적어도 내 앞에서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내 나이 마흔 살이었다.


그렇게 시골생활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시골생활에 적응해나갔다. 서울에 살 때는 전혀 하지 않았던 일들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월동을 준비하고 장마를 대비하고 풀을 뽑고 잔디를 깎고 마당을 쓸고 장작을 나르고 꽃을 심고 텃밭을 가꾸고 농작물을 거두었다. 불편한 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읍내 식당에는 메뉴가 제한적이었고 심지어 배달은 되지 않았으며 마트는 너무 작았고 그래서 필요한 물건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차 없이 서울에 나가려면 한 시간 간격의 배차 시간을 맞춰야 했고 서울에서 10시 막차를 타지 못하면 돌아오는 발길이 끊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조금씩 변했다. 몸이 환경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기다리거나 미리 준비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이전의 불편은 사는 데 전혀 지장을 주지 못했다. 처음에는 너무 멀게 느껴져 가 볼 엄두가 나지 않던 모든 곳들이 근사한 산책로가 되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마당에서 맞는 봄 햇살이 더없이 소중하고 반가웠다. 여름 들풀의 초록은 생명이 얼마나 질긴지 깨우쳐주었다. 가을의 울긋불긋한 색감을 입힌 단풍길은 늘 새로웠다. 다시 겨울에는 벽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사계절을 선명하고 뚜렷하게 즐겼고 그 계절마다 소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주차 문제로 신경을 곤두세울 일도, 물건을 사느라 줄을 설 필요도 없다. 전깃불이 하늘을 덮지 않아서 밤이면 쏟아져내릴 듯 별이 빛났다. 더구나 누군가와 비교하거나 비교당하지 않았으므로 괜한 스트레스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할지라도 내가 정한 대로, 나의 질서와 호흡대로, 내 방식대로 살면 그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가끔은 홀로 너무 동떨어져 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모두가 열심히 ‘달리는’ 시기인 40대에 나만 대열에서 이탈해 엉뚱한 곳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아파트 가격 폭등에 대한 뉴스는 내 불안을 부추기가 충분했다. 친구들은 ‘억, 억’ 거리며 아파트값이 얼마나 올랐느니 하는 은근한 자랑을 감추지 않았다. 지인들은 자기 아이들의 치열한 학업 생활을 늘어놓으며 교육, 그러니까 구체적으로는 ‘대학 입시’를 위해서라도 아이가 더 크기 전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충고를 슬슬 꺼내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위축되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가끔씩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건 아닐까” 하는 답없는 질문에 사로잡혔다. 설악면에서의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면서도 그때 이사 왔던 것이 과연 적기였나 하는 의심이 발끝에 걸렸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데 너무 앞뒤 재지 않고 혼자 판단하고 밀어붙여 지나치게 서두른 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자 아내는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지적했다.


“미뤘으면 못 왔지. 돈이 목적이었으면 돈 때문에 못 왔고, 애 교육이 목적이었으면 그것 때문에 못 왔겠지. 그리고 그때 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사는 우린 없지. 10년 동안 가평에서 살면서 생각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데. 전혀 다른 세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았을 자신이 어떻게 지금과 같았을 거라고 생각해? 더구나 그때 애가 아팠고 여기서 건강하게 컸다는 걸 잊지 말도록!”


아내의 말은 위로가 아니라 매섭고 따가운 죽비였다. 그제야 안개가 걷히는 듯 어수선한 정신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가정 따위로 미련을 두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깨달았다. 그때의 선택은 바로 그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고, 그때의 선택이 바로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전혀 다른 내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다 취할 수는 없다. 샴페인을 일찍 터뜨린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은 결과의 언어다. 병마개 속의 음료가 ‘샴페인’이었음을 전제하는 것 자체가 그러하다. 만약 마시지 못할 썩은 물이 담겨 있었다면, 말라 비틀어져 냄새만 풍길 뿐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면, 병이 깨져 있었다면, 지금 취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일이 가당키나 했을까.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취하지 못한 것까지 미련을 두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돌아온 길을 살피고 궁리하는 것일 터였다. 지난 10년의 시간이 샴페인처럼 얼마나 달콤하고 아름다웠는지, 우리에게 어떤 행복을 전해주었는지 감사하면서.


저는 똥줄이 탑니다!

“그런데... 운영이... 되나요...?”


아마도 계속 타이밍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한가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도로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작은 책방. 1000여 권 남짓에 불과한 편향된 책들. 커피나 음료 따위도 팔지 않는 ‘순수’ 책방을 무슨 수로 유지하는지 궁금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호기심일지 몰랐다.


하루에 두 권 판매가 목적이지만 종종 달성하지 못한다고 농담 삼아 답해준다. 그러고 나면 책방 운영의 열악한 환경이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가 된다. 자본 경쟁력과 지역적 특수성, 경영 노하우와 네트워크, 현실 감각까지 뭐 하나 받쳐주지 않는 상황에 대한 푸념이 줄을 잇는다. 손님은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눈에 뜨이는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나는 나대로 귀가 이만큼 커져 괜찮다 싶은 조언을 머릿속으로 구현해보느라 바빠진다.


다른 일도 하고 있느냐는 질문 뒤에 본업으로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손님의 얼굴에는 안도의 표정이 그려진다.


책방을 열었을 때부터 한동안 받은 오해 가운데 하나는 운영의 진정성에 대한 것이었다. 쉬엄쉬엄 재미삼아 하는 거 아니냐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차피 서점업 자체가 잘 될 리 없고, 더구나 시골이며, 규모도 너무 작고, 실제로 우리 부부에게 각자의 일이 따로 있어 생긴 오해일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해를 부른 장본인은 어쩌면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혼자 똥줄은 탔을지언정 그저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생각만 많았지 구현하는 데는 늘 머뭇거렸다.


언젠가 시인 겸 출판인이자 선배 서점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책을 만드는 건 끝내주는 아이디어도 탁월한 문장력도 아니라고. 오직 완성된 원고만이 책을 만드는 것이라고.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자 노동이라는 말로 나는 이해했다. 입으로만 떠드는 건 아무 소용이 없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결과도 가져오지 못한다.


최근에 가장 좋아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최윤필 작가의 《가만한 당신》에서 발견한 ‘완전 연소’다. 효율이 높다는 의미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다는 의미로 이 말을 애착한다. 아직도 겨우겨우 근근이 이어나가는 상태이지만 책방을 운영하는 덕분에 할 수 있는 게 많아졌다. 내가 할 일은 되는 데까지 ‘완전 연소’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새롭게 똥줄이 탄다.



어느 날부터 괜찮지 않아서

주부(主夫)로 살다

본격적으로 가사 노동을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났다. 책방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고 큰 충격에 빠졌다. 왜 그때 그 책을 골랐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책을 읽고 내가 제목 속 ‘남자’의 전형임을, 세상이 내가 인식하고 있던 것보다 심하게 이상하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평생 ‘마이너’이자 ‘비주류’로 살아온 삶을 마치 자랑처럼 떠들어왔는데 가부장제만큼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주류였음을 시인해야 했던 순간. 의구심과 호기심에 이제라도 자세히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조금씩 여성주의 학습자이자 지지자가 되어갔다. 그렇긴 해도 딱히 사는 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뒤늦게나마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림을 맡아서 해볼게. 생활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애한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고.” 어느 날 식탁에 앉아 있다가 즉흥적으로 결심을 굳혔다. 아내는 내가 뭐든 정해놓고 하는 걸 좋아하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선선히 동의했다. 하긴 가사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마다할 리 없었다.


처음에는 끼니마다 밥을 준비하고 치우는 일이 제법 재미있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재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대신 그 자리에 강한 책임감이 자라났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끼니를 챙기지 않는다는 생각은 몸을 먼저 움직이게 했다.


요리 실력은 갈수록 늘어나 웬만한 음식을 집에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밑반찬을 만들고 국과 찌개를 끓이는 것에서부터 김치 담그는 것까지 직접 하기 시작했다. 사 먹는 돈이 아까운 게 주된 이유였지만 시골에 사는 입장이라 맛있는 걸 먹기 위해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여간 편하지 않았다. 장을 보는 것이 당연히 내 일이 되면서 집 안 물품 대부분을 거의 모조리 챙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집의 질서가 조금씩 바뀌었다. 즉흥적인 결정이었을지언정 가사 노동의 책임을 가져온 건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아니, 나의 시야를 넓히고 변화시킨 좋은 일이었다. “왜 자기가 다해? 제수씨 있잖아?” 주로 남자인 동료나 지인으로부터 몇 차례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일도 하는데 좀 나누는 게 좋지 않으냐는 ‘순수한’ 의도의 궁금증일 것이다. 나는 아내도 일을 하고 빨래를 하며, 무엇보다 이미 15년 이상 했으므로 앞으로 15년 정도는 내가 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답했다.


가사 노동은 이전보다 가족과 더욱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가족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 내가 보다 건강한 가족 구성원이라는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 환경 속에서 아이만큼은 이성애 가정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대로 성장했으면 하는 기대를 갖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주부(主夫)가 되었다.


하이의 선물

하이는 생후 50여 일 만에 우리 집으로 입양됐다. 이른 봄날이었다. 키우던 개가 뜻하지 않게 새끼를 네 마리나 낳자 분양에 바빴던 처제의 꼬임에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딸이 넘어갔다. 동물을 지나치게 무서워하던 아내가 허락한 게 신기했다. 어쨌든 딸과 아내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 강아지를 키우기로 결정했다. 모든 게 결정된 후에야 통보받았으므로 내겐 반대할 기회도 명분도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식구 중 유일하게 개를 키워본 경험자라는 이유로, 심지어 그게 30년 전 불과 1~2년의 멀고도 짧은 경험이었음에도, 주도적인 양육에 임할 것을 명 받았을 뿐이다.


자기가 책임지고 돌보겠노라 했던 딸은 하이가 집에 온 첫날 저녁부터 울음을 터뜨렸다. 낯선 존재가 싸놓은 똥오줌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빠, 어미와 헤어지고 바뀐 환경에 주눅 들어 종일 끙끙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새끼 강아지에게 계속 미안해했다. 딸은 그날 일기장에 “내가 책임지고 하이를 잘 돌봐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를 적고 잠들었다.


의외로 아내는 하이가 마당을 수시로 드나들며 발에 묻은 흙은 집 안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강아지와 같이 사는 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며 넉넉한 마음으로 일관했다. 같이 자고 같이 걷고 마음을 주며 다른 종을 향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해나갔다. 하지만 아름다운 5월의 어느 날, 5만 원을 주고 잔뜩 사 와 마당 한편에 정성껏 심은 꽃 중 약 3만 2천원어치를, 하이가 고작 10여 분 만에 물고 뜯고 씹고 망쳐놓자 결국 비명을 질렀다. 하이는 즉심에 처해져 곧바로 정원 출입금지를 선고받았고, 현충일을 즈음해 특사로 풀려나 다시 앞마당에 진출할 때까지 한동안 뒷마당만 서성여야 했다.


그렇게 하이는 우리 가족이 되어갔다. 가끔 집에 돌봐줄 사람이 없을 때마다 책방에 데려가면서 동네에서는 책방 강아지로 불렸다. 처음 책방 문을 열 때 간판 아래에서 온 가족이 사진을 찍은 이후 매년 같은 날 기념으로 찍는 사진에 하이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인연의 신묘함에 대해 종종 생각하곤 했다. 한동안은 술에 취할 때면 하이를 끌어안고 “너는 어쩌다 우리 식구가 됐누?” 하며 답 없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다른 종에 대한 관심도 조금씩 커졌다. 이웃과 지인들이 키우는 반려견에게 친절해진 것을 넘어 이전까지 해롭게 여겼던 길고양이에게도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고기를 좋아해 어른들로부터 정육점에 장가보내야겠다는 소리를 들었고, 고기 없으면 햄이라도 부쳐야 숟가락을 들 정도로 ‘육식주의자’로 살아온 나였다. 물론 고기를 먹지 않게 된 것이 전적으로 하이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하게 트리거를 당겨준 존재는 하이였다.


나는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게 된 것을 하이가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고기를 먹지 않는 식습관이 얼마나 건강에 좋은지 또는 해로운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평생 주저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던 욕망 하나를 중단함으로써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변함없이 나를 보존하면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작은 실천으로부터 다른 종의 존엄을 지키며 환경과 동물권 등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고 살피는 시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내겐 중요하다.


고기를 만지며

식구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뭐 먹고 싶은 것 없느냐는 것이다. 살림의 대부분을 꾸리는 입장에서, 특히 주방의 ‘책임자’로서 입에 붙어버린 말이다.


딸과 달리 평소 딱히 특정 메뉴에 집착하지 않던 아내는 끈질긴 내 물음에, 내가 고기를 먹지 않기 시작한 즈음부터 꼭 먹고 싶었던 메뉴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음식을 찾아 먹는 스타일도 아니고 기회도 닿지 않아 아직까지 먹지 못한 모양이었다. 메뉴는 바로 소갈비찜이었다.


고기를 먹지 않는 건 ‘개 딸들(나와 가족들은 우리 집 반려견 두 마리를 이렇게 부르곤 한다)’을 제외하고 세 식구 가운데 나 하나뿐이었지만 내 결심은 어느 정도 우리 집 식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내가 주방 일을 도맡는 이유도 컸지만 함께 먹을 수 있는 메뉴를 고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식탁에 고기 메뉴가 오르는 일이 그만큼 줄어들었던 것이다.


소갈비찜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내 위주로만 생각하느라 식구들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자각이 밀려왔다. 딸은 워낙 학교 급식도 잘 나오고 영양 과잉도 경계하는 차원에서 고기 반찬에 별반 신경 쓰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나 못지않게 고립된 생활을 하는 아내만큼은 알아서 챙겨야 했다. 아내는 ‘그렇게 좋아하던’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나를 배려해 고기가 생각나도 참았던 것이다.


미안했다. 지금껏 왜 참고 말하지 않았는지. 고기를 끊은 지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나는 더 이상 고기가 당기지 않을뿐더러, 식구들의 밥상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고기를 다루는 게 그렇게까지 불편한 것도 없으며, 말도 안 되는 비교이긴 하지만 평소 식성이나 양으로 따져도 내가 끊기 전 먹은 고기의 양이 아내가 평생 먹을 양을 다 합쳐도 훨씬 많았을 테니 말이다.


주말을 앞두고 일부러 차를 몰아 마트에 다녀왔다. 12시간 핏물을 빼고 2시간을 끓여 갈비찜을 완성했다. 딸은 먹는 내내 감탄사와 엄지 척을 연발했고, 아내 역시 와인을 곁들이며 천천히 기분 좋게 식사를 즐겼다. 나는 찜에 들어갈 채소를 돌려 깎고 남은 재료를 모아 내 몫의 전을 부쳐 먹으며 함께했다.


이후로 아내는 어쩌다 한 번씩은 꼭 먹고 싶은 메뉴를 주문하곤 했다. 탕수육, 돼지고기 김치찜, 닭볶음탕, 아롱사태 수육 등등.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고기를 사 와 조리해 대령했다. 그리고 팬데믹이 시작됐다. 애초부터 고립된 생활을 한 덕분에 일상에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딸이 학교에 가지 않았으므로 하루 삼시 세끼를 챙겨야 했다.


고깃덩어리를 만져야 하는 일은 그렇게 조금씩 늘어났다. 딸의 영양도 생각해야 하고, 당연히 좋아하는 반찬을 올려주어야 하고, 무료하고 단조로운 일상에 먹는 것에서라도 기운과 기분이 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기왕이면 딸에게 조금이라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어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 몇 차례 고기 조리법을 검색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홈페이지를 클릭하면 온통 고기가 보이는 썸네일이 화면을 도배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고기 콘텐츠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작되는지 몰랐다. 더 정확하게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고기를 소비하는 줄 몰랐다. 여전히 고기를 먹고 있었더라면 미처 깨닫지 못할 풍경이었다.


나는 고기를 먹던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자주, 고기를 만지며 살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 가사 노동이고, 내가 가사 노동을 멈추지 않는 한, 혹은 식구들이 더 이상 고기를 원하지 않는 한, 계속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나는 식구들에게 고기를 먹지 않는 것에 동참하라고 할 권한이나 자격을 갖고 있지 않다. 고기 소비 문제를 개인의 결정으로만 짐 지우는 건 본질적 해결책이 아니며, 개인의 결정 역시 스스로 느끼고 선택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취향과 가치도 존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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