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ǻ
팩토리나인
   
13800
2020�� 07��



■ 책 소개


어른들을 위한 힐링 판타지 

꿈속에서 매일 ‘좋아하는 사람이 나오는 꿈’을 사는 여자. 꿈에서 깨어나고 나면 꿈을 산 것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 탓에, 그녀의 무의식은 점점 그 사람을 향해 있다고 생각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과연 그녀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어느 날 찾아온 환자복을 입은 손님. 그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달러구트에게 꿈 주문제작을 하는데, 그 꿈은 본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은 후 가족들에게 보내지는 꿈이었다. 남겨진 사람들이 괜찮기를 바라는 마음에 죽기 전에 주문해놓은 그들의 선물이었다. 끊임없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 꿈(Vision)의 강박관념에 매일 시달리는 한 남자의 꿈(Dream) 등 비밀스럽고도 가슴 뭉클한 에피소드들이 이 책의 재미를 더한다.

빠른 전개와 흡입력으로 책장을 덮고 나면 길게 남는 여운이 어느 순간부터 꿈을 꾸는 것이 힘들기만 한 괴로운 현실에 지친 성인뿐만이 아니라 청소년들에게도 공감과 따뜻한 위로를 선사할 것이다.

■ 저자 이미예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대에서 재료공학을 공부하고 반도체 엔지니어로 일했다. 클라우드 펀딩 프로젝트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달러구트 꿈 백화점》)으로 첫 소설을 발표해 10~20대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아 성공적으로 펀딩을 종료하였다.

잠을 자면 기억에 남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좋아하는 것은 8시간 푹 자고 일하기. 싫어하는 것은 잠도 못 자고 밤새워 일하기.

■ 차례
작가의 말
프롤로그 세번째 제자의 유서 깊은 가게

1.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
2. 한밤의 연애지침서
3. 예지몽
4. 트라우마 환불 요청
5. 꿈 제작자 정기총회
6. 이 달의 베스트셀러
7. Yesterday와 벤젠고리
8. 체험판 출시:타인의 삶
9. 익명의 손님께서 당신에게 보낸 꿈

에필로그 1. 비고 마이어스의 면접
에필로그 2. 스피도의 완벽한 하루

 




달러구트 꿈 백화점


가게 대성황의 날

페니는 드디어 오늘부터 일하게 될 꿈 백화점 앞에 섰다. 가방 안에서 단화를 꺼내 신고, 손바닥만 한 거울로 얼굴에 더러운 것이 묻지는 않았는지 요리조리 살폈다. 오늘따라 차분한 단발머리, 작은 코에 서글서글하게 큰 눈. 인상은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 급하게 나오느라 블라우스 다림질을 깜빡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페니는 가게 안으로 첫발을 내딛자마자 어마어마한 인파의 손님들 틈에 섞여들었다. 로비 중앙의 프런트에는 직원이 마이크에 대고 안내방송을 하고 있었다. 페니는 달러구트의 사무실로 가야 하는 건지, 직원용 앞치마부터 갈아입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때 누군가가 낚아채듯 페니의 옷자락을 잡고 프런트 안쪽으로 쑥 밀어 넣었다. “반가워, 오늘부터 일하게 된 신입 맞지? 여기서 일하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야. 특히 오늘처럼 손님이 몰리는 날에는.” 안내방송을 하던 중년의 여자 직원이 페니를 보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난 웨더, 1층의 매니저야. 그냥 웨더 아주머니라고 불러도 좋아. 달러구트가 네가 오거든 안내해주라고 했어. 너도 알다시피 우리 백화점은 1층부터 5층까지 다른 장르의 꿈을 팔고 있어. 일단 넌 2층부터 5층까지 돌아다니면서 그 층의 매니저들을 만나면 돼. 가서 층별 안내를 듣고, 몇 층에서 일하고 싶은지 알려주렴.”


***


페니는 이제 달러구트를 만나기 위해 1층으로 다시 내려가야 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층에서 일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5층에서 일하려면 길 한복판에서 노래 부르는 훈련을 하든지, 다시 태어나든지,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성격부터 바꿔야 할 것 같았다. 4층에서 일하려면 스피도에게 적응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가 될 것 같았고, 3층은 가장 무난하게 즐거워 보였지만 모그베리와 이야기할 때는 대화의 주제를 신중하게 골라야 할 것 같았다. 2층의 비고 마이어스와 일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험에 통과하기에 앞서 블라우스부터 제대로 다려 입고 다녀야 할 것이다.


페니는 어느 층에서 일하고 싶은지 정하지 못한 상태로 달러구트의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노크하려고 보니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달러구트는 혼자가 아니었다. 1층 프런트에서 일하는 웨더 아주머니와 함께였다. “달러구트, 우린 이제 너무 늙고 지쳤어요. 30년 전처럼 싸구려 도시락 하나만 먹어도 힘이 넘치던 시절은 진작에 지났어요. 1층 프런트에 새로운 직원을 더 구해야 해요. 당신과 나 둘이서 프런트 업무를 보는 건 너무 벅차요. 봐요, 오늘도 당신은 사무실에서 예약 건을 처리하고, 창고의 재고 건을 살피느라 계속해서 자리를 비웠죠. 그 덕에 나는 완전히 탈진 상태예요.”


페니는 최대한 태연하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두 분의 대화를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전 그저 층별 견학을 끝냈다고 말씀드리려고...”


“오, 그렇군! 괜찮아. 이쪽으로 와서 같이 앉게. 자. 그래서 어느 층으로 지원하고 싶지?”

“전 1층 프런트에서 일하고 싶어요.”


달러구트와 웨더 아주머니는 생각보다 훨씬 흔쾌히 페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밤의 연애지침서

페니는 지난 한 달 동안 그럭저럭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가장 큰 발전은 단골손님의 눈꺼풀 저울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된 것이었다. 이 밖에도 손님이 찾는 꿈이 몇 층에서 판매하는 상품인지, 신상품 입고일은 언제인지 등의 기본적인 안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프런트 업무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돈 관리, 즉 꿈값에 관한 업무는 아직 서툴렀다. 달러구트도 그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여태껏 손님들이 후불로 낸 ‘꿈값’을 관리하는 것은 전적으로 웨더 아주머니의 몫이었다.


“손님은 꿈을 꾸고 난 후에 느끼는 감정의 딱 절반을 요금으로 지불하게 돼. 감정이 풍부한 손님에게 팔면 꿈값을 많이 받을 확률도 높아지겠지? 그러니까 단골손님 관리가 중요한 거야. 우리 단골 중에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대부분이거든.”

“어떻게 감정을 돈처럼 지불하는 게 가능하죠?”

“그러니까 ‘드림 페이 시스템즈’가 훌륭하다는 거야! 일종의 IoT기술인 거지. 사물인터넷 말야. 우리 금고와 손님들, 그리고 이 시스템이 연결되어 있고, 손님들이 꿈값을 내면 금고로 들어오고 우린 그 데이터를 컴퓨터로 볼 수 있지... 페니? 자니? 알아듣는 척이라도 좀 해주렴.”

“죄송해요...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지. 당분간은 내가 해야겠구나.”


***


“웨더 아주머니, 곧 201번 손님이 오실 것 같아요.” 페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201번 단골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페니와 웨더 아주머니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거 맞죠?” 페니가 손님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나오는 꿈’이라고 적힌 라벨이 붙어 있었다. “네, 맞아요.” “여기 있습니다, 손님. 감사합니다.” “계산은 오늘도 후불로 하면 되나요?” 여자가 꿈 상자를 받아들고 웨더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늘 그랬듯이 자고 일어나서 느끼는 감정들을 조금 나누어 주시면 된답니다.”


***


여자는 일어나려던 시간보다 5분 먼저 일어났다. 알람이 울리지 않았는데도 상쾌하게 눈이 떠졌다. 어렴풋이 꿈에 어떤 가게를 갔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을 떠올리려고 애쓸수록 손에 움켜쥔 모래알처럼 머릿속에서 빠르게 빠져나갔고, 여자는 다시는 이것에 대해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여자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오늘도 꿈에 그 남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여자는 꿈속에서 그 남자가 자주 가는 식당에서 함께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매일 앉는 자리 옆에 다정하게 붙어 앉아, 긴 이야기를 나눴다. 둘은 그 자리에서 매일 만나기로 한 것 같았고, 꿈속에서 나눈 남자와의 대화는 오래 알던 사이처럼 편안했다.


여자는 꿈의 여운을 그대로 간직한 채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분명 설레고 있었다.


***


여자의 설레는 마음이 사라지기 직전, 꿈 백화점 1층 로비의 프런트에서는 알림음이 울렸다.


띵동.

201번 손님께서 요금을 지불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오는 꿈’의 값으로 ‘설렘’이 소량 도착했습니다.



트라우마 환불 요청

거대한 빌딩 꼭대기의 전광판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거리는 사람으로 가득했지만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다. 뉴스 속 앵커의 목소리만 빼놓고 전부 음소거 처리라도 된 듯 기이한 적막이었다. 앵커의 목소리만 한꺼번에 남자의 머릿속으로 곧장 걸어오는 듯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3배 이상 뛰어넘었습니다. 깎아지른 인구 절벽 시대, 올해 입영 군인 수도 사상 최저치를 경신했다는 소식입니다. 이에 따라 병무청에서는 만 30세 미만의 전역 군인을 대상으로 신체검사를 재실시하여 재입대를 추진하고 있는데요...”


남자는 움찔하며 현기증을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올해 29세로 이미 7년 전에 육군 만기 전역을 했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장면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남자는 이미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병무청에 와 있었다. 그는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새카맣게 운집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있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떠밀려 점점 앞으로 나아갔다. 남자는 기를 쓰고 뒷걸음질 쳐 병무청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발은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갑갑해 미칠 것 같았다. 남자의 차례는 순식간에 다가왔고, 그는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로 자신의 검사 결과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특 1급. 그는 1급 앞에 붙은 생경한 ‘특’자가 굉장히 거슬렸다. 건강한 건 좋지만 지금은 그걸 확인받기에 가장 나쁜 상황임이 틀림없었다.


***


그날 밤 꿈속에서 여자는 고등학생이었다. 다른 구구절절한 부연설명 없이도 여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시험이 딱 3일 남은 시점이다. 첫날의 시험과목은 아마도 수학, 화학, 그리고 물리. 벼락치기로 공식을 외워봐야 일절 도움 될 리 없는 과목들만 남은 상태였다. 꿈속의 여자는 생각했다. “내가 왜 공부를 하나도 안 했지?” 호흡이 가빠지고 머리에 피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느낌에 눈앞이 어지럽게 뭉그러진다. 눈은 뜨고 있지만 공간에 대한 거리감은 아득했다. 여자는 책상에 푹 엎드렸다. 책상의 싸구려 나무 냄새가 현실감을 더했다. 그녀는 왜 시험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이런 상황은 그녀답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이 떠올랐으나, 생각의 확장은 딱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꿈속의 그녀로서는 이게 다 꿈이라는 것도, 꿈에서 깨면 시험 같은 건 볼 필요도 없는 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된 사회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챌 도리가 없었다.


***


아침부터 어떻게 이따위 꿈을 팔 수 있냐며 흥분해서 찾아온 손님들이 벌써 수십 명째였다.


“여기 재입대한 꿈을 꾼 사람들만 벌써 몇 인지 아세요? 대체 이런 꿈은 왜 파는 거예요?”

“시험 치는 꿈은 또 어떻고요! 혹시 잠든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취미가 있는 것 아니에요?”

“맞아요. 꿈 백화점을 그동안 애용했는데 불매 운동이라도 해야 할까 봐요. 요즘 새로 생긴 꿈 상점들은 기분 좋은 꿈들만 판매한다고요. 이래서야 손님들이 남아나겠어요?”


페니는 삭막한 분위기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달러구트는 오늘도 더없이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손님 여러분, 저희는 상품 설명을 충분히 드린 후에 판매하고 있답니다. 물론 모든 분들이 그 사실을 기억할 수 있다면 이렇게 찾아오실 일도 없었겠지요. 저도 그 점이 참 안타깝습니다. 이럴 줄 알고 손님들께서 구매하실 때 각각으로부터 ‘구매 확정 서약서’를 받아뒀습니다. 한번 보시죠. 자필 서명도 하셨으니 알아보실 겁니다.”


분명 아래쪽에 있는 사인은 본인들 것이었기 때문에, 소동을 피우던 사람들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로 어떻게 정신 수련을 하거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는 거죠? 스트레스나 더 안 받으면 다행이죠.”


달러구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희 가게의 상품이 스트레스가 되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물론 이제라도 구입을 취소하시고 다시는 꾸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효과를 보지 못하셨기 때문에 꿈값도 지불되지 않았으니 환불 문제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달러구트가 고분고분하게 환불에 대해 받아들이자,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많이 누그러졌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거꾸로 생각하면 온 힘을 다해 어려움을 헤쳐 나가던 때일지도 모르죠. 이미 지나온 이상,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랍니다. 그런 시간을 지나 이렇게 건재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손님들께서 강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찻잔에 남아 있는 차를 마시며 달러구트의 말을 곱씹었다.


“하긴, 모든 심리 치료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말도 있으니까, 영 일리가 없지는 않은 것 같네요.”


체크무늬 잠옷을 입은 여자 손님이 얘기하자, 동의하는 몇몇 손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정확히 절반의 손님이 달러구트에게 구입 취소를 요청했다. 계속해서 계약을 유지하기로 마음먹은 나머지 절반의 손님들은 자못 비장하게 서로를 다독였다. “우리 꼭 잘 버텨봐요. 군대 가는 꿈, 내년에는 꾸지 맙시다!” “맞아요. 저도 시험 보는 꿈은 이제 그만 꾸고 싶어요. 꿈에서 깼을 때 긍정적인 기분이 들면 된다는 거죠?”


***


남자는 그 후로도 잊을 만하면 이따금 재입대하는 꿈을 꾸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기분이 나빴지만, 어느 날 문득 이깟 꿈 따위에 동요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는 이미 멋지게 전역했으니까. 그리고 다음번에 재입대하는 꿈을 꾸었을 때는, ‘그래, 군대도 다녀왔는데 내가 못할 일이 뭐가 있나’ 하고 웃어 넘겨버렸다.


그는 전역하던 날 사회로 향하던 어색한 발걸음과 마음가짐들을 가만히 떠올렸다. 그리고 그 꿈을 견뎌낸 이상, 그건 더 이상 트라우마가 아니라 그의 업적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달러구트의 가게로 꿈값이 지불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남자는 그 후로 두 번 다시 군대 가는 꿈을 꾸지 않았다.


***


여자는 반복해서 시험 치는 꿈을 꾸는 동안, 더 이상 시험을 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지만 그때의 압박감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게 분명하다는 자가진단을 내렸다. 그녀는 회사의 일은 물론이고, 결혼과 출산 등의 강제성도 없고 마감기한도 없는 모든 일에 스스로 기한을 두고 압박을 받는 자신의 모습도 알아차리게 됐다.


사흘 연속으로 시험 치는 꿈을 꾸고 일어난 어느 비 오는 아침,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무의식에 휘둘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비 내리는 창가에 편안한 자세로 눈을 감고 앉아, 시험 기간에 스트레스 받았던 순간을 떠올리는 대신, 어쨌거나 시험을 잘 치러냈던 순간들에만 집중했다.


‘난 지금까지 잘해낸 내가 자랑스러워. 이전에도 잘해냈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든 결국은 잘해낼 거야’ 자신을 무조건 믿는 마음, 압박감에서 벗어나는 마음. 여자에게는 이런 느슨한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여자의 꿈값이 지불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도 더는 시험 치는 꿈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난 뒤에는 과거에 그런 꿈에 시달렸다는 사실조차 잊게 되었다.


띵똥.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꿈’의 대가로 ‘자신감’이 대량 도착했습니다.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꿈’의 대가로 ‘자부심’이 대량 도착했습니다.



익명의 손님께서 당신에게 보낸 꿈

부부의 5살 난 어린 딸은 말이 느렸다. 다른 아이들이 문장으로 말할 때 단어 몇 개를 겨우 말했다. 발달 센터며 치료실을 전전하며 걱정이 커지기 시작했을 무렵, 아이는 극적으로 말문을 열었고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 사랑해.” 하고 말했을 때, 부부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머리 아파요. 안 아프게 해주세요.” 했을 때, 가족의 행복은 그날 그대로 멈췄다. 아이는 이후, 쭉 병원에만 있었고, 그 해를 넘기지 못했다.


아이가 떠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부부는 아직 젊었고, 각자 사회생활에도 열심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집에 더 이상 아이가 살던 흔적은 없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두 사람에게도 유효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부부는 그러다가도 이야깃거리만 있으면 끝도 없이 아이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는 울기만 했으나, 지금은 웃기만 하다 끝나는 날도 더러 있었다.


두 사람은 아이 이야기를 굳이 피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애써 잊으려고, 잊어야 산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문득 장난감 광고를 볼 때, 노란 버스가 지나갈 때, 어린이 보호구역 표지판을 볼 때, 어린 아역배우가 잘 자란 모습을 볼 때, 그리고 입학 시즌과 졸업 시즌을 지날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되는 것이었다.


아이는 5살에 멈춰버린 채, 둘만 늙어가는 시간이 너무나도 더디게 느껴졌다. 두 사람 모두 차라리 아이가 너무 외롭지 않을 때, 늦기 전에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차마 입 밖에는 낼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등을 맞대고 돌아누웠다. 부부는 딱 아이가 누울 만큼의 자리를 습관처럼 남기고 누웠다. 그 공간이 서로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둘은 서로가 상대의 울음소리를 못 들은 척해주며 지냈다.


***


페니는 달러구트가 얘기했던 인상착의의 손님들이 도착하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최대한 예쁘게 다시 포장한 꿈을 들고 손님 앞으로 나섰다.


“늦지 않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뭐죠?”

“꿈이에요. 아주 귀한 꿈이죠. 다른 손님께서 특별 주문 제작해서 보내신 물건이에요.”

“누가요? 보낼 사람이 없을 텐데...”

부부 중 남편이 되물었다.

“익명으로 보내셨답니다. 누가 보내셨는지는 꿔보면 아실 거예요.”

***


그들은 꿈속에서 먼저 떠나보낸 딸을 만났다. 꿈속의 아이는 말이 유창했다.


“나 엄마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이마안큼 많았는데, 그때는 마음은 엄청 많은데 할 줄 아는 말이 별로 없었어.”

“그랬어? 우리 딸 지금은 말을 엄청 잘하네. 얼굴도 더 예뻐지고.”

“엄마도 예쁘다.”


딸아이가 엄마의 얼굴을 감싸 쥐고 사랑스럽게 웃었다. 부부는 딸을 꼭 끌어안았다.


“아프다는 말만 하다가 가게 해서 너무 미안해.”

“아닌데? 나는 100개만큼 행복하고 1개만큼만 아팠는데, 지금은 1개도 안 아파.”

“아무것도 못 하고 너무 짧게 살다 가서 어떡해.”


아빠는 자꾸만 미안해서 애처롭게 아이를 봤다.


“아이 참, 아니라니까. 나는 대신 좋은 기억만 있어. 있잖아, 여기는 친구들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많은데, 사는 게 좋기만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대! 나는 좋기만 했는데! 굉장하지?”

“그러게. 우리 딸 굉장하네. 아빠도 좋은 기억만 있어. 우리 딸, 아빠 엄마 많이 보고 싶은데 혼자 있어서 속상하지 않았어?”

“나는 기억력이 엄청 좋아서 괜찮아. 안 봐도, 머릿속에 다 있어.”


아이는 버둥거리며 부부의 품속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부부를 보며 귀여운 목소리로 똑 부러지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나중에 천천히 만나. 이상한 생각하지 말구.”


부부는 눈물이 나오려다가 잔망스러운 딸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알았어. 천천히. 그래도 꼭 만나자.”

“응, 잘 놀고 있을게. 착하게 잘 있겠다고 약속할게.”


부부는 이게 전부 꿈이라는 걸 알았지만 진짜 딸을 만난 것처럼 벅찼다. 오늘처럼 꿈인 걸 알면서도 꿈을 꾸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잠에서 깼다. 아직 시간은 새벽 1시. 잠든지 채 2시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부부는 엉킨 이불을 서로 감싸 안듯 사이에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정신이 들었을 때, 서로 말없이 손깍지를 끼고 한참을 누워 있었다.


***


“달러구트 님,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을 맡기고 떠나나요?”

“아주 아주 많은 사람들이 남기도록 노력하지. 이쪽 일만 전문으로 하는 가게가 있을 정도로.”

“전 여기에서 일하게 된 이후로 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이에요. 더 놀랄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훨씬 놀라운 일이 벌어지거든요.”

“그러니? 그것참 일할맛 나겠구나.” 달러구트가 웃었다.


“네 말대로 참 신기하지. 갑작스런 사고든, 오래 병상에서 알았든, 잠든 사람들은 자신이 생명이 꺼져가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 같단다. 아마도 외부 환경의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는 원초적인 감각이 더 예민해지는 걸지도 모르지.”

“전 그런 어려운 얘기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요, 이 꿈들은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것만큼은 잘 알겠어요. 이 꿈을 남긴 손님들의 심정을 다 헤아리진 못하겠지만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남겨질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기 마련이지. 하지만 실제로 손님들을 만나보면, 떠나는 자신은 안중에도 없단다. 그저 남은 사람들이 괜찮기를 바라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가는 건 그런 것인가 보더구나. 나도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페니는 세월을 가득 담은 박스들을 보며 괜스레 코끝이 찡했다. 그녀는 상자에 남은 먼지 한 톨마저 정성스럽게 닦아냈다.


그날 퇴근 무렵, 페니는 새로 제작되어 온 눈꺼풀 저울을 진열장에 넣기 위해 빈 곳을 찾고 있었다. 거래처에 맞춤제작을 맡긴 지 꼬박 2달 만에 받은 물건이었다. 사다리에 올라서도 겨우 손이 닿을만한 곳에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페니는 조심스럽게 저울을 놓고, 눈꺼풀 모양의 추를 손가락으로 살짝 쓸었다. 저울의 눈금이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맨정신’과 ‘졸림’ 사이에 멈췄다. 그리고 잠시 뒤 ‘졸림’은 ‘잠드는 중’으로 바뀌었다.


페니는 사다리에서 내려와 가게 밖을 보면서 손님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리던 손님이 저 멀리서 가게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이내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손님!” 페니가 반갑게 손님을 맞았다.

“오늘은 아직 좋은 꿈이 잔뜩 남아 있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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