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

   
하현
ǻ
비에이블
   
14000
2021�� 06��



■ 책 소개


솔직히 들여다보면 내가 나여서 좋은 순간들

“괜찮아, 다음에 보자.” 오랜만에 잡힌 약속이 취소되었다. 그런데 서운하지 않고 은근히 공짜로 생긴 하루가 즐거움으로 차오르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아마 ‘실내형 인간’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약속을 잡을 때만 해도 반갑고 기대되는 마음이었다. 아마 약속이 그대로여서 외출했다면 또 세상 쾌활한 사람처럼 유쾌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다만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약간 피곤했겠지만. 반드시 주말 중 하루는 집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필요했겠지만 말이다. 실내형 인간들은 이 은밀하고 달콤한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다. 보편적이고 적당한 감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 특별한 기쁨을 발견할 줄 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는 바로 이렇게 내 마음대로 연결되고 고립되고 싶은 마음 등 솔직히 들여다보면 홀가분한 기분이 드는 여러 감정의 이면들을 포착했다. 하현 작가는 삶의 환절기 속 불완전해서 소중한 날들을 기록해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달의 조각》 이후 꾸준히 그 섬세하고 다정한 글로 독자들의 깊은 공감과 지지를 얻어왔다. 이번 책은 그런 그가 오랜 만에 펴내는 신작 에세이로, 좀 더 일상의 모퉁이에 숨겨진 감정의 조각들에 빛을 비춰 뜻밖에 내가 나여서 좋은 순간들을 발견해 보여준다.

■ 저자 하현
약속이 취소되면 마음속으로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일탈보다 일상에 관심이 많다. 《달의 조각》 《이것이 나의 다정입니다》 《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를 썼다. 장래희망은 부유하고 명랑한 독거노인이다. (인스타그램 @2your_moon)

■ 차례
Prologue _ 평범한 나로도 즐겁게

Chapter 1. 실내형 인간의 세계
외로운 건 솔직히 홀가분하거든요
김필준과 곽두팔
순금 한 돈어치의 고요
모과나무 길
모르는 사람들
스몰토크의 기술
고양이 한 마리면 충분합니다
확률과 가능성
또 다른 나

Chapter 2. 이렇게 내가 되어가는 중
이건 나는 게 아니라 멋지게 추락하는 거야
썩은 사과 이론
서초구 용사 벡터맨
수건을 깔고 자는 날
오늘의 배역
요양병원
이 세계를 겉돌 때
긴 터널
땅콩 껍질 같은 사랑
연막탄
인절미를 녹이는 시간

Chapter 3. 부족해서 좋고 넘쳐서 좋은
적당히의 감각
손끝과 발끝의 거리
샤브샤브 친구의 조건
커피의 맛
복숭아
크고 멀고 불확실한 행복
힐튼 호텔
체면보다 중요한 것
룸톤 타임
우연한 미래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


실내형 인간의 세계

외로운 건 솔직히 홀가분하거든요

날아갈 듯 기쁘지만 그 마음을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되는 순간이 있다. 건강하지 못한 연애를 하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던 친구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이별 소식을 전할 때, 직장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앞장서서 걷던 얄미운 상사가 개똥을 밟았을 때, 맛집 대기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직원이 문을 열고 나와 난감한 표정으로 우리 팀까지만 입장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리고 또 하나, 약속이 취소됐을 때.


직업이나 나이, 사는 곳과 가족 관계 같은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는 약속이 취소되면 마음속으로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가끔은 그게 나라는 인간의 본질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좀 이상하다. 밥을 사 주는 사람보다 약속을 깨주는 사람이 더 고맙게 느껴질 때가 많다. 급한 일이 생겨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간다. 하지만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오히려 상대가 서운해 할까 봐 적당히 아쉬운 척 대답한다. 어쩔 수 없지 뭐......(아싸!) 괜찮아, 다음에 보자. (안 그래도 나가기 귀찮았는데 고마워!) 그러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자비한 폭군 같았던 한낮의 뙤약볕이 갑자기 청량한 여름 풍경을 만드는 멋진 친구처럼 느껴진다. 세상은 한없이 아름답고 다정해진다. 내가 그것과 연결되어 있지 않을 때.


친구도 좋고 피자도 좋고 노래방도 좋은데 어째서 친구와 피자를 먹고 노래방에 가기로 한 약속이 깨지면 미안할 정도로 기쁜 걸까? 원하는 만큼 충분히 혼자 있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톨이가 되고 싶지는 않은 마음.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모순이 궁금했다.


몇 년 전, 육아용품 박람회에서 장난감 파는 일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맡은 제품은 친환경 원목으로 만든 자동차였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장난감 자동차 같은 그 제품에는 한 가지 비밀이 숨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앞쪽에는 조그만 고리가, 뒤쪽에는 캔뚜껑처럼 생긴 꼬리가 달려 있었는데 그걸 이용해 여러 대의 자동차를 연결하면 기차가 됐다. 사장은 그게 그 제품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했다.


제품에 대해 설명하면 손님들은 대부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차놀이 장난감을 따로 살 필요가 없겠다고,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할 뿐 막상 두 개 이상 구매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나는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열심히 손님들을 꼬드겼다. “하나에 팔천 원인데 세 개 구매하시면 20퍼센트 할인도 돼요!”


거절의 이유는 다양했다.


“세 개요? 집에 장난감이 잔뜩이라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

“글쎄요, 애들이 잘 가지고 놀지 모르겠네......”

“세 개는 좀 비싸서. 그냥 하나만 주세요.”


이런 패턴이 반복되자 의문이 생겼다. 하나만 필요하면 연결 기능 없는 저렴한 제품을 골라도 될 텐데 왜 굳이 이걸 사는 걸까? 이건 여러 개가 함께 있어야 의미 있는 장난감인데. 생각보다 저조한 매출에 기운이 빠져 함께 일하는 언니에게 하소연을 늘어놓고 있으니 어느샌가 다가온 사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몇 개 더 사서 연결할 수 있잖아. 사람들은 그 가능성을 좋아하는 거야.”


나의 모순에 대해 생각할 때면 그 말을 떠올리게 된다. 여러 대가 모이면 기차로 변신하는 자동차를 딱 하나만 사던 사람들처럼 나도 연결에 대한 가능성을 좋아하는 걸까? 연결될 수 없는 건 외롭지만 연결되지 않는 건 홀가분하니까.


약속이 취소되면 나는 함께라는 가능성을 가진 채로 기쁘게 혼자가 된다. 조그만 고리를 숨기고 있는 장난감 자동차처럼. 친구도 피자도 노래방도 좋지만 그게 조금 더 좋을 때가 있다. 그 안전한 고립감이 너무 달콤해서 들키지 않게 조용히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창밖은 푸르고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어느 맑은 날에.


순금 한 돈어치의 고요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보리차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우고 이른 점심을 먹는다. 대개 오전 11시 반쯤이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 텔레비전을 켠다. 그리고 습관처럼 13번을 누른다. 음, 오늘은 이탈리아군. EBS에서 방영되는 <세계테마기행>은 나의 오랜 밥 친구다. 리모컨 하나로 세계 곳곳을 누빌 수 있게 해주는 이 프로그램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최근에 본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북미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오! 멋진 데이’다. 밴쿠버 외곽에 위치한 버넌이라는 마을에는 아름다운 호수와 탐스러운 호박을 재배하는 농장들이 있다. 해마다 할로윈이 다가오면 호숫가에서는 호박 배 경주가 열린다. 참가자들은 튼실해 보이는 호박을 하나씩 골라 속을 파내고 배를 만든다. 무려 25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대한 호박으로 만든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사람들을 보며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던 나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내가 이 삭막한 도시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동안 지구 반대편에서는 웃음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들이 호숫가에 모여 호박 배 경주를 즐긴다. 물론 그곳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팍팍한 현실이 있겠지만 아주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의 즐거운 한때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안도감이 찾아온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을 잠깐 상상해보다가 나는 식사를 계속한다.


매일 여행 다큐멘터리를 보며 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해놓고 이렇게 말하려니 민망하지만 사실 진짜 여행에는 별 흥미가 없다. 진짜 여행은 뭐랄까, 당황스러운 선물 같다. 이를테면 인도 문화에 심취한 친구가 동묘 시장에서 사다준 거대한 코끼리 조각상 같은. 날 위해 준비했다니 일단 고맙게 받긴 했지만 그래서 도대체 이걸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우리 집엔 이걸 놓은 만한 공간도 없고, 내가 동물을 좋아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코끼리 조각상을 집에 들여놓고 아침저녁으로 쓰다듬을 정도까지는 아닌데...... 다 떠나서 집까지 들고 가기에 그 망할 코끼리는 너무 무겁다. 여행이란 게 내게는 그렇다. 이런저런 이유로 부담스럽지만 싫다고 말하기는 왠지 눈치가 보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는 호텔이다. 무엇보다 호텔에는 고요가 있다. 서른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집을 떠나 살아본 적 없던 나는 늘 고요를 꿈꾸며 자랐다. 하지만 네 식구가 복작복작 모여 사는 집에서 고요를 기대하는 것은 사과나무에 고양이가 열리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고요가 간절해 찔끔 눈물이 나려고 할 때마다 통장으로 조금씩 돈을 보냈다. 그리고 연말이 다가오면 그렇게 모은 돈으로 호텔을 예약했다.


창밖으로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호텔방에서 나는 오직 내가 만든 소리만 들었다. 그건 크리스마스보다 거룩하고 산타의 선물보다 반가웠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고요는 한층 짙어졌다. 달빛이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적막 속에서 집을 떠올렸다.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때는 숨막히게 느껴졌던 가족이라는 이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애틋해졌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고요해질 수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요리 대회 심사위원이 하나의 음식을 맛본 뒤 물로 입을 헹구듯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잘 듣기 위해서는 아무 말도 듣지 않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했지만 여전히 내 밤은 소란스럽다. 윗집에서 들리는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초저녁부터 술판을 벌이는 옆집의 떠들썩한 말소리에 한숨을 푹 내쉬며 층간소음 피해자 모임 카페에 접속한다. 거기에는 나만큼이나 간절하게 고요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랜 시달림 끝에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사람이 드디어 불면증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을 전하면 축하와 부러움의 댓글이 우수수 달린다.


나는 언제쯤 호텔에 가지 않고도 조용한 밤을 보낼 수 있을까? 얼굴도 모르는 이웃을 죽일 듯이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집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아직 그런 미래는 너무 멀어서 연말의 짧은 여행을 기다리며 다시 호텔을 검색한다. 언젠가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호텔의 1박 투숙료는 오늘의 순금 한 돈 시세와 똑같다. 정말이지 침묵은 금인가 보다.



이렇게 내가 되어가는 중

땅콩 껍질 같은 사랑

어느새 30대가 되었지만 출근하면 아직도 애송이 취급을 받는다. 나의 일터는 40대 중반도 새파란 청춘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일주일에 세 번,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대형마트로 출근해 커피를 판다. 커피를 판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추추출하고 스팀 밀크를 만드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북새통을 이루는 주말의 마트 식품 코너 한쪽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커피 믹스를 영업하는 것이다.


“고객님! 지금 구매하시면 스무 개 더 드려요. 할인 행사에 증정 행사까지 하고 있으니 이런 기회 놓치지 마세요!”


그건 내가 좋아하는 일도, 보람이나 흥미를 느끼는 일도 아니지만 남들보다 분명하게 잘하는 일이다. 매일 때려치우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그만둘 용기는 내지 못하는 일, 밥을 먹게 해주고 월세를 내게 해 주는 지겹고도 고마운 일.


이곳에서 일하며 얻은 몇 안 되는 좋은 것 중 하나는 언니들이다. 두부 언니, 만두 언니, 고추장 언니, 세제 언니, 면도기 언니...... 엄마와 비슷한 연배인 그들은 나는 거리낌 없이 언니라고 부른다. 환갑을 바라보는 중년 여성들과 어울리는 일은 의외로 즐겁다. 우리 사이에는 수십 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존재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서로가 조금씩 외계인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건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동료로서 좋아하지만 그 이상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바로 그 점이 우리 관계를 산뜻하게 유지시켜 준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애쓸 필요 없이 까르르 웃으며 신기해하기만 하면 되니까. 굳이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차이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일을 하며 느끼는 언니들과 나의 가장 큰 차이는 밥이다. 나는 휴식을 위해 밥을 포기하고, 언니들은 밥을 위해 휴식을 포기한다. 내 점심 식사는 10분이면 끝난다. 삶은 달걀 두 개, 사과 하나, 커피 한 잔, 늦게 일어나 아무것도 챙겨 오지 못한 날에는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는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 휴게실을 가는 길.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먹던 언니들이 말을 건다.


“또 라면 먹었어? 젊다고 그렇게 대충 때우면 안 돼! 이리 와서 밥 좀 먹고 가.”


언니들의 도시락을 볼 때마다 나는 매번 그들의 부지런함에 감탄한다. 각종 채소와 고기를 굽고 찌고 볶아서 만든 반찬들, 건강 정보 프로그램에 소개된 기능성 잡곡을 섞어 만든 반찬들, 싱싱해 보이는 쌈채소와 과일, 커다란 테이블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도시락들로 북적거린다. 언니들 중 음식에 야박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매장에서는 손님을 뺏기지 않으려고 아웅다웅하다가도 밥을 먹을 때면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듯 서로를 챙긴다.


먹을 것을 나누는 일에는 어딘가 애틋한 구석이 있다. 동료들의 몫까지 넉넉하게 싸 온 음식을 나눠 먹는 언니들의 뒷모습을 보면 뭐랄까, 마음이 든든해지는 동시에 희미한 슬픔이 찾아온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휴게실에 누워 까무룩 잠이 든다.


그날은 유독 일진이 사나웠다. 말끝마다 꼬투리를 잡아 시비를 거는 첫 손님을 상대하느라 아침부터 진땀을 뺐는데 마가 단단히 꼈는지 그 뒤로도 계속 진상 손님만 들이닥쳤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며 생떼를 부리는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느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점심때가 되니 맥이 탁 풀려 배도 고프지 않았다. 조용히 매장을 빠져나와 주차장 뒤 벤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옆자리 간장 언니였다.


“자기야 우리 밥 먹는 자리 알지? 일단 와, 빨리 와!”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반나절 내내 사람에게 시달렸으니 점심시간만이라도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귀찮은 마음에 혼자 툴툴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언니들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커다란 통에 담긴 오곡밥이었다. 간장 언니는 도시락 뚜껑에 밥과 나물을 덜어주며 말했다.


“이거 먹이려고 불렀지. 요즘 애들은 정월 대보름 같은 거 안 챙기지? 첫 보름엔 오곡밥에 나물을 먹어야 나쁜 기운이 도망가는 거야. 먹기 싫어도 조금만 먹어, 진상 안 붙게.”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젓가락을 받아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맛이 없었는데 담백한 오곡밥에 고소하고 짭조롬한 고사리볶음을 얹어 한입 먹자마자 참을 수 없이 허기가 밀려왔다. 매번 음식을 권할 때마다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를 뜨더니 막상 앉혀놓으니 제일 잘 먹는다며 언니들은 깔깔 웃었다. 언니들을 따라 웃다보니 형편없이 구겨졌던 마음이 반듯하게 펴지는 것 같았다.


밥을 다 먹자 만두 언니가 가방에서 땅콩을 꺼냈다. 우리는 그걸 하나씩 깨물며 새로운 한 해의 안녕을 빌었다. 몸에도 마음에도 부스럼 나지 않기를, 좋은 손님만 만나기를, 우리의 밥벌이가 우리를 해치지 않기를. 언니들 틈에 섞여 열심히 땅콩을 까는 동안에도 나는 예의 그 희미한 슬픔을 느꼈다. 뒤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앞에서 보니 그건 사랑이었다. 사랑인 줄 모르고 사랑하는 것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까. 바짓단에 붙은 땅콩 껍질처럼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발견하게 되는 마음이.



부족해서 좋고 넘쳐서 좋은

적당히의 감각

나는 적당히의 감각이 떨어지는 편이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알맞은 상태. 그 중간 지점에 도달하는 일이 자주 어렵게 느껴진다. 스파게티 면을 삶을 때는 늘 양 조절에 실패한다. 봉지 뒤쪽에 친절하게 1인분을 알려주는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지만 건조된 면을 그 안에 맞춰 보면 터무니없이 적어 보인다. 이게 1인분이라고? 말도 안 돼, 두 번 먹으면 없겠다. 한 줌만 더, 아쉬우니까 몇 가닥만 더...... 그러다 보면 결국 산더미처럼 불어난 면이 냄비에서 쏟아져 나온다.


아끼던 스투키는 물을 너무 많이 줘서 무름병에 걸렸고, 향신료로 쓰려고 키우던 로즈마리는 몇 번 먹기도 전에 잎이 바싹 말라버렸다. 월초마다 짜는 가계부 예산은 너무 적게 잡고, 약속 장소까지 가는 시간은 실제보다 훨씬 넉넉하게 계산해 한 시간씩 빨리 도착하곤 한다. 평소에는 운동과 담을 쌓고 살다가 한번 발동이 걸리면 무작정 공원으로 뛰쳐나가 무리해서 달리기를 한다. 그러고 나면 그날 저녁에는 어김없이 앓아눕는다.


아주 먼 미래에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적당히 레이더’가 개발될지도 모른다. 얇은 밴드 형태의 제품을 손목에 착용하고 스마트폰과 연동시킨다. 적당함의 기준을 알 수 없어 곤란한 상황에서 작동 버튼을 누르면 밴드 중앙에 있는 램프에 불이 들어온다. 부족하면 노란색, 과하면 빨간색, 적당하면 초록색. 명색이 적당히 레이더니 적당히 쓰다가 처분하고 싶은 고객들을 위한 단기 렌탈 서비스를 제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게 생긴다면 과연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부족함도 넘침도 없이 모든 게 적당한 삶. 아무도 아무것도 평균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 세상. 그런 상상을 하면 왠지 쓸쓸해진다. 때로는 곤란한 일을 겪기도 하지만 지금의 삶에는 부족하고 넘쳐서 생기는 뜻밖의 기쁨이 있다. 너무 많이 삶아버린 물만두를 처리하기 위해 가족들을 꼬드기며 시작된 한밤의 만두 파티.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가까워진 친구들과 처음의 어색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한바탕 웃는 시간.


어쩌면 결핍과 과잉은 그렇게까지 치명적인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건기와 우기처럼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일지도. 부족한 걸 빌리고 넘치는 걸 나누며 나는 생각보다 자주 즐거웠던 것 같다. 그런 기쁨이 있어 적당하지 못한 나도 적당히 살아간다. 치과에 가는 걸 무서워하는 보통 사람으로.


복숭아

올해 첫 복숭아를 먹었다. 여름이면 지천으로 널려 있는 흔한 과일이지만 나에게는 특별해서 먹기 전에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올여름에는 과연 복숭아를 몇 번이나 먹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내 태몽은 복숭아다. 물어볼 때마다 디테일이 조금씩 바뀌는 엄마의 기억에 따르면 풀과 꽃과 나무가 가득한 들판을 걷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탐스러운 복숭아를 주웠다고 한다. 실제로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 가장 좋아했던 과일은 포도였지만. 복숭아 꿈을 꾸고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딸을 낳았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일까?


복숭아는 정말 얄미운 과일이다. 황홀할 만큼 맛있는데 먹고 나면 입천장과 입술 주변이 못 견디게 간지럽다. 과즙이 직접 닿으면 물집이 잡힌 것처럼 입술이 부풀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라서 최대한 입술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가끔 맛보곤 하는데 나보다 심한 동생은 그마저도 할 수 없다.


몇 년 전에는 한밤중에 그 애를 데리고 급하게 응급실을 찾았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집에 있던 복숭아를 먹은 날이었다. 그날의 알레르기 반응은 지금까지 겪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얼굴과 몸에 두드러기가 돋고 기도가 부어올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동생은 수액을 맞고 나서야 겨우 안정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치료가 끝나고 응급실 밖으로 나오던 중 잠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급성 알레르기 쇼크라고 했다.


그 뒤로 우리 집 냉장고는 복숭아 금지 구역이 됐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어쩌다 한번 복숭아를 사 오면 검정색 비닐봉지로 둘둘 감싸 김치냉장고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동생이 없을 때만 몰래 꺼내 먹었다. 완전 범죄를 위해 껍질과 씨도 바로바로 버려야 했다. 참을성도 조심성도 없는 그 애는 뒷일이야 어떻게 되든 이 무서운 과일을 일단 한입 먹고 볼 테니까.


몰래 먹는 복숭아의 맛은 환상에 가까웠다. 뭔가를 몰래 먹는 게 이토록 스릴 넘치고 신나는 일이었다니. 시골에서 자란 엄마는 여름이면 종종 친구네 밭에서 수박이며 참외를 서리했던 경험담을 풀어놓는다. 그때 훔친 과일들도 이렇게 달콤했을까.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나는 복숭아를 먹으며 훔친 과일의 맛을 실감해본다.


미숙이 아줌마네 오빠가 키워서 보내줬다는 오늘의 복숭아도 그렇게 먹었다. 동생이 잠든 사이 후다닥, 엄마와 함께 내 방에 숨어서 몰래. “와! 엄청 달다! 내가 좋아하는 딱딱이 복숭아네!” “아냐, 이거 황도야. 익으면 물렁해져.” “미숙이 아줌마는 좋겠다. 오빠가 복숭아 농사도 짓고.” 이런 말들을 속닥속닥 입모양으로만 주고받으면서. 한 조각을 삼키고 나면 어김없이 입천장이 간지러웠다. 하지만 그 정도 괴로움은 얼마든지 눈감아줄 수 있는 맛이었다.


나를 임심했을 때 엄마는 한 번씩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배 속의 내가 너무 얌전해서. 정말 거기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태동이 없어서 숨을 죽이고 가만히 나를 불러봤다고 한다. 복숭아 꿈으로 존재를 알린 아기는 2.8킬로그램으로 세상에 나왔다. 남들보다 작게 태어났어도 무사히 잘 자라서 함께 복숭아를 먹는다.


복숭아를 앞에 두고 우리는 다시 조용해진다. “맛있지?” “맛있다!”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며 우리가 이 조금 무섭고 얄밉고 달콤한 과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가족이란 건 치명적이지 않은 알레르기 같다. 기쁨과 괴로움을 동시에 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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