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이어령
ǻ
열림원
   
17000
2021�� 03��



■ 책 소개


딸을 보내고 난 아버지의 독백은
남겨진 이들을 위로하는 대화가 된다

2016년 초판이 출간된 이후 10쇄까지 찍으며 꾸준히 사랑받아온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는 이번에 개정판을 펴내면서 암 투병중인 이어령 교수가 딸을 생각하며 새로 쓴 서문을 싣고, 초판에서 한 부를 차지했던 시들이 빠진 대신 따듯한 그림들을 넣어 1부와 2부 모두 편지글로만 묶었다. 1부는 떠나간 딸에게 전하는 아버지 이어령의 말이며, 2부는 고(故) 이민아 목사와 생전 주고받은 편지들을 묶은 것이다.

딸을 잃은 슬픔을 딛고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자 쓰인 이 글은 독자로 하여금 상실의 고통과 좌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다정한 독려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 저자 이어령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석좌교수,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30여 년간 재직했고,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으로 편집을 이끌었다.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과 식전 문화행사, 대전 엑스포의 문화행사 리사이클관을 주도했으며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냈다. 1980년 객원 연구원으로 초빙되어 일본 동경대학에서 연구했으며, 1989년에는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소의 객원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중앙일보』 상임고문, 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서로 『지성에서 영성으로』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생명이 자본이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짧은 이야기, 긴 생각』 『언어로 세운 집』 등이 있고, 소설 『장군의 수염』 『환각의 다리』와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펴냈으며, 희곡과 시나리오 「기적을 파는 백화점」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사자와의 경주」 등을 집필했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 이어령이, 딸 이민아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 가슴속에만 묻어놓았던 아버지의 못다 한 이야기를 담아 딸에게 보내는 영혼의 편지글이다.

■ 차례
1부 살아서 못다 한 말
0. PREFACE
- 네가 없는 굿나잇 키스
- 목마를 타고 떠나다
1. 탄생, 그리고 시작
- 너 멀리서 어떻게 왔니
- 사랑은 고통으로부터
2. 살고 싶은 집
- 아기집에서 세상의 집으로
- 세상의 집에서 영혼의 집으로
- 어둠 속에 몰래 우는 아버지
3. 여행의 꿈
- 바다에서 아버지를 잃다
- 피아노, 환상의 악기
- 경쟁 사회의 문
- 첫 번째 시험에 들다
4. 딸이 첫사랑을 할 때
- 너의 첫사랑
- 네가 결혼하던 날
- 아버지의 주례사
- LA에서 온 타전 신호
5. 딸이 아이를 낳을 때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하지 못한 것
- 할아버지가 된다는 것
6. 교토에서 부치지 못한 편지
- 까마귀 울음이 멈출 때
- 운명의 갈림길
- 깁스에 구멍을 뚫어주는 마음
- 원수를 사랑하라
7. 영혼의 눈을 뜨다
- 운명의 전화
- 어떤 미소에 끌리는 힘
8. 노을종
- 너의 마지막 밤
- 네가 나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
- 노을이 종소리로 번져갈 때
- 밭 속에 숨은 보물

2부 빨간 우편함의 기적
빨간 우편함의 기적
너는 나의 동행자
우편번호 없는 편지
엄마가 민아에게
뒤에 붙이는 글│이민아와 땅끝의 아이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살아서 못다 한 말

네가 없는 굿나잇 키스

네가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에게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는 글을 쓰는 시간이었고 너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내게 들려온 것은 “아빠, 굿나잇!” 하는 너의 목소리뿐이었지. 이 세상 어떤 새가 그렇게 예쁘게 지저귈 수 있을까. 그런데도 나는 목소리만 들었지, 너의 모습은 보지 않았다.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냥 손만 흔들었어. “굿나잇, 민아.” 하고 네 인사에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너는 그때 아빠가 뒤돌아보길 기대했을 것이다. 안아주기를, 그리고 볼에 굿나잇 키스를 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니면 새 잠옷을 자랑하고 싶어서 얼마 동안 머뭇거렸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 그때 네가 본 것은 어차피 아빠의 뒷모습뿐이었을 테니까.


어린 시절, 아빠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는 너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서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글의 호흡이 끊길까봐 널 돌아다볼 틈이 없었노라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때 아빠는 가난했고 너무 바빴다고 용서를 구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바비인형이나 테디베어를 사주는 것이 너에 대한 사랑인 줄 알았고 네가 바라는 것이 피아노이거나, 좋은 승용차를 타고 사립학교에 다니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하찮은 굿나잇 키스보다는 그런 것들을 너에게 주는 것이 아빠의 능력이요 행복이라고 믿었다.


너는 어느 인터뷰에서 그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였을 뿐이라고 날 두둔해주었지만, 아니다. 진실은 그게 아니야. 그건 사랑하는 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의 부족함이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겠다.


아무리 바빠도 삼십 초면 족하다. 사형수에게도 마지막으로 하늘을 보고 땅을 볼 시간은 주어지는 법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이면 된다. 그런데 그 삼십 초의 순간이 너에게는 삼십 년, 아니 어쩌면 일생의 모든 날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만일 지금 나에게 그 삼십 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하나님이 그런 기적을 베풀어주신다면, 그래 민아야, 딱 한 번이라도 좋다.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이 그때의 옛날로 돌아가자.


나는 그때처럼 글을 쓸 것이고 너는 엄마가 사준 레이스 달린 하얀 잠옷을 입거라. 그리고 아주 힘차게 서재 문을 열고 “아빠 굿나잇!” 하고 외치는 거다. 약속한다. 이번에는 머뭇거리며 서 있지 않아도 된다. 나는 글 쓰던 펜을 내려놓고, 읽다 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편다. 너는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긴다. 내 키만큼 천장에 다다를 만큼 널 높이 치켜올리고 졸음이 온 너의 눈, 상기된 너의 뺨 위에 굿나잇 키스를 하는 거다.


굿나잇 민아야, 잘 자라 민아야.



살고 싶은 집

어둠 속에 몰래 우는 아버지

아버지란 무엇인가. 특히 딸에게 아버지의 존재란 무엇인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만이 아닐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그럴 것이다. 병실에 누워 있을 때, 무료한 오후의 햇살이 방 안을 비출 때, 무엇보다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의욕을 잃고 내 손등의 파란 정맥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렇게 묻는다. 아버지란 도대체 무엇인가.


셰익스피어였던가. 사랑하는 사람과 미치광이와 시인은 닮은 구석이 많다고 했다. 그들은 실재하지도 않는 세계를 현실인 것처럼 걸어 다녀. 마치 몽유병자들처럼 말이야.


사실 네가 태어나기 전까지도 내가 그랬었지. 그렇게 살았어. 지금도 가끔 부부 싸움을 할 때, 나의 무책임했던 생활 태도가 도마에 올라. 왜인지 아니? 가정을 가진 사람이 툭하면 직장을 뛰쳐나가는 거야. 아침에 출근한 사람이 저녁이면 봇짐을 싸서 돌아오는 거지. 생각해봐. 도끼를 가진 사람, 가정을 지켜야 할 사람, 아내를 가진 사람,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직장에서 일하던 사람이 저녁이면 백수건달이 돼서 돌아오는 거야. 성에 차지 않는다고, 따분하다고.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남편을 아내가 어떻게 믿고 살겠니.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른 유별난 행동을 하는 거지. 책 속에서 살고, 글 속에서 꿈꾸고, 현실 속에서도 몽유병자들처럼 이상한 행동을 하지. 내 젊은 날은 전형적인 그런 문학청년의 모습이었단다.


그러나 너를 낳고부터는 쉽게 말해서 난 완전한 ‘속물’이 되었다. 보통 남편, 보통 아버지, 보통 사람이 된거지. 나는 너를 낳기 전부터 글 쓰는 사람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어. 어딜 가면 사람들은 “저 사람이 이어령이야” “저 사람이 그 사람이야”라고 말했지. 셋방에 들었을 때도 주인들은 “우리 집에 세 든 사람이 그 유명한 글 쓰는 이 아무개”라며 홀대하지 않았어.


그런데 너를 낳고 아버지가 된 순간 나는 글 쓰는 사람도, 교수도, 언론인도 아닌 한 아버지로 너와 함께 태어난 거야. 그때부터 아버지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 그래, 나는 앞으로 태어날 내 아이들을 추운 겨울날 방 안에서 떨게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단다. 나에게 가족이 없었더라면, 네가 없었더라면 내가 쓴 모든 글들은 아마 전혀 달랐을지도 모른다.


너로 인하여 나의 꿈은 항상 땅을 향해 있었어. 마치 그 전설의 새처럼 말이다. 눈은 땅을 보고, 꽁지는 하늘을 향해서 날아다닌다는 메롭스란 새, 하늘을 보며 나는 게 아니라 항상 땅을 보면서 거꾸로 비상하는 그 이상한 새처럼 말이야. 젊은 시절 그토록 경멸했던 ‘속물’을 자처하며 땅만 보고 달리는 소시민, 그게 너희들에게 주는 내 사랑, 온 희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딸은 망망대해를 달리는 배의 돛인가, 닻인가. 네가 대답해주렴. 너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굿나잇.



교토에서 부치지 못한 편지

까마귀 울음이 멈출 때

너에게 약속만 하고 보내주지 못했던 교토 일기 몇 편을 이제야 굿나잇 키스와 함께 보낸다. 네가 곁에 있었더라면 내가 직접 읽어서 들려주었을 텐데, 너는 내 육성이 닿기에는 너무 먼 데 있구나.


컴퓨터를 뒤져보니 십년 전인가 싶다. 교토에서 처음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쓰던 당시, 황폐했던 내 영혼의 한 파편들을 너에게 보내는 것이다.


아침 산책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갑자기 조용해질 때가 있지. 귀가 먹먹할 정도로 말이다. 그건 시끄럽게 소리치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울음을 멈춘 순간이야. 그러면 주위가 조용해지면서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여러 가지 소리들 혹은 낮은음자리표의 먼 거리의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단다.


숲속에서 우는 갖가지 새소리들, 벌써 풀숲에서 울기 시작하는 풀벌레 소리, 그리고 어쩌다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조깅하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옷 스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단다.


이것이 내가 교토에 온 고독한 선택이 아니었는가 싶다. 언젠가 네가 한 말이 생각난다. “아빠, 콘트라베이스 악기 아시죠? 키가 이 미터 되니까 교향악단 연주할 때 보면 다들 앉아 있는데 이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만 서서 연주하잖아요. 덩치가 제일 커요. 서양 사람들 키가 크다지만 웬만한 연주자보다 콘트라베이스가 더 크죠. 그런데 그 소리가 들려요?”


너는 나에게 아주 설득력 있게 하나님의 음성은 나지막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래, 교향악단에서 연주를 할 때 우리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고음뿐이야. 특히 바이올린 소리지. 바이올린은 육십 센티미터밖에 안 되니까 콘트라베이스에 비하면 아기 중에 아기인데도 우리가 듣는 소리는 바로 이 바이올린 소리야. 그보다 조금 더 큰 비올라, 첼로 소리도 잘 안 들려. 바이올린 소리 중에서도 퍼스트 바이올린의 연주가 가장 눈에 띄지.


현악기만 그런 것이 아니야. 관현악 연주 중에서도 트럼펫 소리만 우리 귀에 들려. 그런데 트롬본이나 튜바 정도 되면 아주 낮은 저음이기 때문에 부는 사람들의 제스처만 보이지. 뭐가 트롬본이고 튜바인지 잘 식별할 수가 없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어디선가 읽었는데 네 말이 맞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됐어.


우리가 빌딩을 지을 때 기초공사를 하지 않니. 그런데 빌딩만 보이지, 그 밑에 깔려 있는 초석은 여간해서 보이지 않아. 숨겨져 있기 때문에. 교향악단에서 모든 소리의 밑받침을 이루어주는 것은 바로 그 콘트라베이스라고 하더라. 가장 낮은 음이지. 그게 깔려야 고음들이 살아나고 전체 음악의 집이 지어진다는 거야. 일층, 이층, 삼층, 사층. 나는 왜 그 많은 악기 중에 덩치만 크고 청중들에게 잘 전달되지도 관심을 끌지도 못하는 콘트라베이스란 악기가 존재하는지 이따금 생각을 할 때가 있었어.


그런데 연주자 말을 들어보니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가 참 많더라. 연주장에서뿐 아니라 이 악기를 들고 이동할 때 가장 애를 먹는다는 거지. 비행기를 탈 때는 물론이고 지하철을 탈 때도 사람보다 덩치가 커서 여간해서는 개찰구를 통과하기 어렵다는 거야.


그런데 교향악단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콘트라베이스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참 드물다는 거지. 지휘자는 없어도 콘트라베이스 없이는 불가능한 게 교향악단의 연주라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 백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콘트라베이스의 나직한 음이 있기 때문에 그 다양한 악기 소리를 섞을 수 있는 거라고 해. 화려한 악단의 연주 밑에 깔려 있는 최저음. 음향기기로 치면 우퍼와 같은 역할, 프로가 아니면 여간해서 그 소리를 잡아낼 수 없지.


네가 그때 우연히 하나님의 목소리는 이 많은 세상의 음성 속에서, 그 많은 악기들이 연주하는 생명의 음악 중에서 가장 낮은 소리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듣지 못한다고. 그런데 그 소리가 없으면 어떤 화려한 고음의 악기라 할지라도 하나의 음으로 살아날 수 없다고 말했다.


엉뚱한 비유지만 갑작스레 까마귀 소리가 멈췄을 때, 아주 작은 소리, 숲속의 저음 악기 같은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지.


내가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같은 시를 쓰기는 했지만, 아직은 너의 소원대로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때였어.


그런데 오늘 아침 산책에서 말이야, 까마귀 소리가 멈추고 모든 게 조용해질 때, 숲속의 파란 이파리 사이로 지나가는 가장 낮은 바람 소리와 아주 미묘한 생명의 풀벌레 소리, 심지어는 내가 내는 발소리를 들을 날이 올 거라는 예감을 처음으로 느꼈어.


그러나 확실한 게 아니고 너무나도 비유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너의 소원대로 내가 주님을 맞이하겠다, 네 소원대로 내가 그 문을 두드릴 거다, 이 말은 못 해. 그렇지만 언젠가 너에게 나는 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연주하는 소리 없는 소리, 그 가장 낮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내 청각이 트일 날이 있을 것이라고 너에게 조금은 약속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노을종

너의 마지막 밤

나는 초콜릿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밸런타인데이만큼은 아니었어. 네가 힐튼 호텔에 머물고 싶다고 해서 가장 향이 좋은 방을 골라 너희 부부가 머물도록 했잖니. 밸런타인데이를 즐기라고 말이야. 그리고 나는 서프라이즈로 호텔을 예약해둔 것만이 아니라 너희들이 있는 동안 기쁘게 해주려고 가장 아름다운 꽃을 주문해서 저녁에 보내도록 짜뒀던 거야.


초인종이 울리면, 너희들은 호텔 직원일 줄 알고 문을 열겠지만, 그때 바로 아름다운 꽃이 배달되는 거야. 사랑의 날 밸런타이데이에 말이야. 기대하지 않았던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별안간 꽃이 배달되었을 때 네가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는 더 큰 기쁨을 느끼고자 최고로 좋은 꽃다발을 보냈던 거란다.


가까운 시내 호텔에서 네 엄마와 저녁을 먹고 너에게 갈 때쯤이면 이미 꽃이 도착했을 텐데 너에게 전화가 오지 않더구나. 나는 서프라이즈의 의미가 무색해지는데도 더는 참지 못하고 너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지. “꽃 아직 도착 안 했니?” 하고 물으면, “응, 그러지 않아도 전화할 참이었어. 너무 멋있어”라는 대답이 돌아올 거라 기대했지. 그런데 “아니, 아무것도 안 왔는데?”라는 네 대답을 듣고 네 엄마와 다시 상의했지. “배달 사고가 났나 보다. 이미 꽃을 보냈다고 얘기까지 해놨는데 배달이 늦게까지 안 오면 얼마나 실망하겠어. 좋아, 그럼 호텔에서 사 가자.” 같은 꽃이라도 호텔에서 파는 꽃은 비싸잖아. 호텔 안에 있는 꽃집에서 네가 좋아할 만한 꽃들을 전부 사서 간 거야. 그런데 그사이 내가 보낸 꽃이 배달되었고, 또 엄마 아빠가 호텔에서 사간 꽃다발까지. 너는 결국 두 개의 꽃 선물을 받게 된 거지.


이제는 꽃 이름도 기억이 안 나. 그러나 그 향기는 아직도 머릿속에 흔적을 남기고 있지. 오죽하면 네 엄마는 그 중 몇 송이를 뽑아 책갈피 속에 넣었단다. 그걸 일본말로 오시바나라고 한단다. 야생화를 꺾어 책 속에 집어넣으면 곧잘 말라서 책갈피로 변신해.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 되는 거야. 어쩌다 옛날 책을 뒤지다가 이 오시바나, 야생화를 말린 드라이플라워가 나오면, 그 책을 읽었던 몇십 년 전의 젊은 시절이 떠올라.


그날 밤 엄마 아빠, 그리고 너희 내외가 창가에서 내려다 본 서울의 밤은 너무도 아름다웠어. 저 반짝이는 불빛은 등불이 아니라 별들이 내려앉은 거라는 통속적인 표현이 더 어울렸던 그런 밤이야. 모든 등불이 너를 위해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꽃을 끌어안고 기뻐하는 네 곁에서 나는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었단다. 내 딸에게 이 기쁨의 밸런타이데이를 영원히 365일 동안 주소서. 내일도 모레도 밸런타이데이로 시간이 멈추게 하소서.


밸런타이데이 다음 날이었어. 회의를 하고 있는데 너에게 전화가 온 거야. 나는 얼른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지. 너는 평소 같지 않게 “아빠......” 하고 머뭇거리는 거야. 네가 아파서 응급실이라도 간 줄 알고 “뭔데?” 하고 놀라서 물었더니, “나 하루 더 있어도 돼?”라는 거야.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지. “야, 더 있고 싶으면 얼마든지 있으면 되지. 뭣하러 나에게 전화를 걸어. 당연하지. 내일도, 모레도, 더 있고 싶으면 계속 있으란 말이야.”


나는 네가 호텔비를 염려해 아빠에게 미안해하며 거는 전화가 너무나도 안쓰럽고 야속했어. 그까짓 돈이 뭔데. 왜 주눅 들어서 하루 더 있으면 안 되냐고 묻는 거야. 그때 네가 미안해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돈이라는 게 도대체 뭐니? 돈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지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하고. 또 그걸 버느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팽개칠 수도 있고, 우리를 주눅 들게 만들고 사랑을 산산조각 내는 그 돈. 남들이 다 좋아하는 그 돈 말이다. 나라고 별 수 있겠니? 겉으론 초연한 척하지만 돈이 얼마나 나를 주눅 들게 하고, 비굴해지게 하는지. 또 그걸 갖기 위해 거짓 웃음을 지어야 하고...... 이 세상에 매소부 아닌 사람들이 어디 있겠니. 돈 때문에 모두 웃음을 팔아. 진정을 파는 거야.


그러니 네가 하루 더 묵어도 되냐고 물었을 때 내 마음은 정말 돈 같은 건 무시할 수 있었어. 내가 저금해둔 돈, 네가 다 가져간다고 해도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다. 아버지 돈인데 왜 눈치를 보니.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야. 사랑이란 돈보다 훨씬 귀한 것이라는 걸 나는 비로소 깨달았어.


그 뒤 한 달이 지나 너는 밸런타이데이의 행복했던 밤을 다시 보내고 싶어 했어. 그때 바로 그 방에 머물고 싶다고 했지. 나는 똑같은 방을 예약해주었어. 그러나 너는 호텔에서 머물다가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응급실에 가서 복수를 빼내고 여러 가지 응급조치를 했지. 엄마 아빠는 바로 돌아온 네가 좀 더 편히 쉴 수 있는 기독교의 시설로 옮기자고 했고 너도 동의를 했다.


조금 떨어진 시골에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그 시설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어. 그게 바로 네가 실려 가기 하루 전날이었고, 그다음 날 우리는 새벽 세시에 응급실로 향하던 기사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 거야.


너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네 남편도 한국말을 못 해서, 구급차 기사가 한밤중에 우리에게 전화를 걸었던 거야. 그다음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나는 너를 그 응급실에서 보내지 않기 위해서 사방에 전화를 걸었지. 그리고 영안실이 아닌 특별히 환자를 위해서 만들어진 시설을 찾아낸 거야. 거기로 널 옮길 수 있다는 거였지. 나는 너를 떠나보내면서 절망했지만, 최소한 조용한 곳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며 사람들의 안타까움 속에서 너를 보내는 의식을 치를 방이 주어진 거야.


그 조용한 방, 새벽이 지나고 밝은 햇볕이 비치는 그 방에 서른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정말 네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모두 모였어. 그 속에서 너는 하늘의 신부로서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밸런타이데이, 이름부터 생소했던 그날, 너에게 꽃을 바쳤던 나의 마음과 하루 더 있고 싶어서 눈치를 보았던 너. 그게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현실 속의 아이러니야. 그전에도 그 뒤에도 나에게 밸런타이데이는 없어.


초콜릿이 아니라 작은 돌멩이라도, 지극히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주고 기억하는 날이, 나에게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네가 그토록 기뻐하던 날을, “아빠 하루만 더 있으면 안 돼?”라고 했던 그 한마디 때문에 나는 마음에 화상을 입을까봐 영영 묻어두고 말았단다.


“아빠 여기 하루 더 있어도 돼?”

호텔비가 뭐길래

그렇게도 작은 목소리로

너 전화했느냐.

아픔을 잊는 곳이라면

불면의 밤이 범할 수 없는 곳이라면

백날이고 천 날이고 어떠냐.

너 그곳에 있어라.

그까짓 호텔비가 뭐길래.


이제는 다시 전화 걸 일 없는 너.

그런데도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를 들면

네 목소리 들려온다.

“아빠 나 여기 하루 더 있어도 돼?”

숙박비 걱정할 곳이 아닌데

들려온다. 오늘도 너의 목소리

백날이고 천 날이고 좋다.

너 그곳에 있거라.


아니지 참 네가 있는 곳은

나그네들이 묵고 가는 숙소가 아니다.

나보다 크고 넓은 아버지가

거기 계시니

돈 걱정 말고 그 품에 머물거라.


지금 약속할게. 네가 다시 올 수만 있다면 하루가 아니라 삼백예순날이면 어떠냐. 서울 밤 풍경이 별처럼 빛나는 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거기 있어라. 이게 너에게 해주지 못한 말이야. 그 전화에 대고 이렇게 말할걸...... 이제야 이 시를 전한다. 굿나잇 키스와 함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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