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에서 온 남자 울릭

   
프랑수아 를로르
ǻ
열림원
   
14000
2021�� 04��



■ 책 소개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운 행복은 없다.”
우리는 왜 뒤따를 고통을 알면서도 사랑을 할까

북극의 이누이트 울릭은 어릴 적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된다. 하지만 그는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어엿한 사냥꾼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울릭이 사는 이누이트 마을이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선정되고, 카블루나는 이누이트 부족에서 대표를 뽑아 그들의 나라에 파견해줄 것을 요청한다. 사냥 규율을 어긴 죄로 약혼녀와 헤어질 위기에 처한 울릭은 파혼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대사가 되어 카블루나 나라로 떠난다. 그는 화려한 도시 속 외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어지러운 사랑의 풍경들을 마주한다.

『북극에서 온 남자 울릭』은 ‘꾸뻬 씨’ 시리즈로 잘 알려진 프랑수아 를로르의 두 번째 소설이다. 그의 첫 장편소설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은 12개국 언어로 번역되고 영화로도 제작되는 등 큰 성공을 거뒀다. 정신의학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던 그는 사랑으로 인해 행복하기는커녕 오히려 불행을 느끼고 진료실을 찾는 환자들을 보며 ‘사랑’과 ‘행복’의 관계를 고민했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 소설에 담아냈다.

■ 저자 프랑수아 를로르(Francois Lelord)
1953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고, 1985년 의학박사학위와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자폐증 전문가인 아버지를 보고 자라 정신과 의사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직업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에 전심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건축, 역사, 그림, 문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둔 그는 현대인들의 심리치료를 위한 또 다른 방법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자신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꾸뻬 씨’ 시리즈를 비롯한 다수의 작품을 집필했다

■ 역자 지연리
성신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파리 제 8대학에서 조형미술을 공부했다. 현재 화가, 삽화가,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Entre-temps 1과 2분의 1〉 외에 프랑스와 한국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쓰고 그린 책으로 어른을 위한 동화 『파란 심장』이 있고, 『두 갈래 길』, 『코끼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도 살아내겠습니다』, 『내가 언제나 바보 늙은이였던 건 아니야』, 『행복한 걸인 사무엘』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린 책으로는 『내가 혼자 있을 때』, 『Big et Bang』, 『Moi, je suis le plus fort』 등이 있다.

■ 차례
북극에서 온 남자 울릭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북극에서 온 남자 울릭


2.

출발 시간이 다가오가 소형 비행기가 모터를 덥히기 시작했다. 그가 타고 갈 비행기는 연료가 덜 드는 절약형 모델이었다. 그사이, 나바라나바가 아버지의 감시를 피해 울릭을 만나러 왔다.

“언제 돌아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물었다.

“곧.”

“네가 가면 나는 어떻게 해?”

“나바라나바, 내 영혼은 늘 너와 함께 있어.”

울릭의 말에 나바라나바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늘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카블루나 여자들을 많이 만나지는 마.”

“걱정 마, 안 그럴게, 나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조종사가 비행기에서 내려와 손짓했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짧은 포옹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각자 가야 할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울릭은 소형 비행기를 향해, 나바라나바는 엄격한 아버지가 기다리는 이글루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고도에 이르자 비행기 그림자가 눈밭에서 지워졌다. 커다란 원을 그리며 몇 차례 선회를 한 뒤에는 마을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승무원이 건넨 잔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울릭은 잔에 든 얼음을 보고 비행기에 오른 이유를 곱씹었다.


울릭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며 생에 첫 시련을 겪었다. 이누이트에게 고아가 되었다는 사실은 최악의 보육 환경 속으로 내동댕이쳐졌음을 의미했다. 부모 대신 보살펴줄 형제자매가 없었기에 그는 외삼촌에게 입양되었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가 사망한 후 얼마 못 가 숨졌다. 그러나 울릭, 그는 살아남았다.


울릭이 고아가 되고 기지 가까운 곳에 기상대가 세워졌다. 배고픔과 애정 결핍에 시달리던 어린 울릭은 기상대 문을 두드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카블루나 어른들은 이누크 고아 소년을 불쌍히 여겼고, 울릭을 안으로 초대해 밥을 먹이고 살뜰히 보살폈다. 울릭은 이렇게 성장했다. 그즈음 두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약혼녀와의 파혼이 그것이었다. 그가 고아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누이트 사냥꾼이 아닌 카블루나와 가깝게 지낸 탓이었다. 기상대가 문을 닫고 대원들이 전부 철수한 뒤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카블루나의 친구로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울릭이 북극곰을 연달아 사냥해서 나누크의 영을 모독하는 일이 일어났다. 결국, 그는 사냥을 금지당했고 약혼이 취소당했다. 나바라나바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명에 따랐지만 울릭을 바라보는 시선은 변함없이 따스했다.


이후 나바라나바의 새로운 신랑감으로 쿠리스티보크가 주목받았다. 소문에 의하면 추장의 추천이 있었다. 쿠리스티보크는 울릭보다 나이가 많고, 이미 아내가 있는 사내였다. 게다가 허풍도 심했다. 하지만 차기 추장으로 지목될 만큼 유능한 사냥꾼이었다.


같은 시기에 한 무리의 카블루나가 마을에 도착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석유탐사기지가 풍경을 뒤흔들며 세워졌고, 이누이트 부족이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누이트의 미래를 걱정한 어느 카블루나 남자의 부단한 노력 덕분이었다. 수염을 길게 기른 그 남자는 추장을 찾아가 이누크를 한 명 선별해 카블루나 나라로 보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이누이트와 카블루나 간의 문화적 교류를 위해서였다.


울릭은 이 소식을 듣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길로 추장에게 가서 대사가 되어 마을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조건은 하나였다. 돌아오는 즉시 파혼을 철회하고 나바라나바와 결혼하는 것. 울릭의 요구에 추장은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호탕하게 웃으며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울릭은 카블루나 나라를 향해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되었다.


5.

울릭은 마리 알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십대인데도 또래의 이투이트 여자보다 훨씬 젊어보였다. 열 살짜리 아들과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된 딸이 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남편도 있었다. 마리 알릭스는 남편을 두고 ‘떠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마리 알릭스가 울릭의 가이드가 된 것은 이누이트에 대한 풍부한 지식 때문이었다. 울릭은 마리 알릭스 같은 여자가 가이드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게다가 지위도 높았다.


이날 울릭은 다양한 부서의 공무원들을 만났다. 서로 다른 분야의 이누이트 전문가와 만나 점심도 먹었다. 공식 일정을 모두 마친 뒤에는 마리 알릭스의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울릭이 만난 카블루나들은 늘 그를 환영했다. 날생선을 먹는 에스키모가 카블루나 말을 하는 걸 보고 놀라는 사람도 많았다.


“울릭, 당신은 최고의 대사예요.” 마리 알릭스는 샴폐인 잔을 받아들며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9.

“오늘은 스튜디오에 매우 특별한 분을 모셨습니다. 이곳에 오기까지 먼 거리를 날아온 분이시죠. 울릭입니다. 그와 그의 부족은 얼마 전 유네스코에서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북극은 두 개의 공동체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유목 생활을 하는 이누이트 부족과 석유탐사기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후의 부족으로 기록될 이 이누이트 마을에 우리는 최첨단 기술을 통해 석유탐사기지를 세웠습니다.”


설명에 이어 썰매를 끄는 개들과 채찍을 손에 쥔 이누이트가 나왔다. 카메라 앞에서 웃고 있는 낯익은 얼굴은 허풍쟁이 쿠리스티보크였다. 다음으로 이글루 앞에 선 추장과 통역을 위해 온 남극에서 온 쿠아난비사자크의 모습이 보였다. 리포터가 추장에게 물었다.


“석유탐사기지가 세워지고 마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존중하며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기지의 원조 덕분에 우리 부족은 부족함 없이 잘 살게 되었습니다.”


장면이 바뀌고 석유회사 직원들이 돌무더기 언덕 위에서 무언가를 측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직원들은 현대식 장비로 가득 찬 천막 안에서 상하의가 연결된 북극 옷을 입고 활짝 웃고 있었다. 이글루 안도 보였다. 순간, 울릭의 얼굴이 붉어졌다. 천막과 달리 이글루는 어둡고, 더럽고, 연기로 가득했다. 다음 장면에서는 이누이트 아이들이 카메라를 향해 눈 위를 달려왔다. 웃는 얼굴로 과자를 달라고 손을 내미는 아이들을 보고 울릭은 또다시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누이트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천 년 전부터 척박한 환경에 적응해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최신 설비를 보급하여 이들도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울 생각입니다.”


수염을 길게 기른 카블루나가 말했다. 그는 이누이트를 인류문화유산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다음 장면에서는 이누이트 사냥꾼이 나왔다. 하나같이 썰매에 늘어져 있거나 개들에게 고함을 치며 썰매를 모는 모습이었다. 모피를 입고 지평선을 응시하는 여자의 모습도 보였다. 나바라나바였다. 그녀는 심장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고 여신처럼 신비로웠다.


18.

“울릭, 이 나라의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누이트 여성은 아름답지 않은가요?”

“이누이트 여성도 아름답습니다. 서로 다른 풍경도 각자의 멋을 뽐내며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누이트 여성들이 이곳에서 산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들은 행복할까요?”

“다양한 종류의 화장품을 보면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이누이트 여자들은 화장품을 직접 만들어 씁니다. 그래서 효능이 떨어집니다. 질도 나쁘고요. 제일 좋은 화장품이 동물의 지방이니까.”

“화장품 외에 이누이트 여성이 또 무엇을 좋아할까요?”

“직업이 생기면 좋아할 것 같습니다. 카블루나 여자들처럼 직장에 다니는 거요. 물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왜죠?”

“이미 다른 삶에 익숙하니까요. 이누이트 여자들이 남자들과 똑같은 일을 하고 살았다면, 우리 남자들은 벌써 설 자리를 잃고 도태되었을 겁니다.”

“우리는 여성도 일을 합니다. 아시다시피 남녀의 일에 큰 구분도 없습니다.”

“그런 것 같더군요. 저는 이곳 여자들을 보면서 여자도 남자 못지않은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부족에도 용감한 여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남자들만큼 개를 잘 몹니다.”

“우리나라 여성도 용감해 보이나요? 개를 잘 모는 이누이트 여성들처럼?”

“그렇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건 바로 용기를 내야 할 대상이 다르다는 겁니다. 이누이트 여성은 추위와 배고픔에 맞서야 합니다. 생후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나는 아기들의 죽음과도 맞서야 하고, 야영지에서 멀리 떨어질 때면 곰을 만날 위험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여자들은 어떤 점에서 용감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이곳 여자들은 고독과 마주할 때 매우 용감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만 하더라도 이 나라에 와서 처음 호텔에서 혼자 잤는데, 상당히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많은 여자들이 혼자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혼자 사는 여자와 당신의 외로움은 다르지 않을까요? 당신은 아니겠지만 이곳 여성들은 혼자 살겠다는 선택을 한 거니까요.”

“아마도요. 하지만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고독과 맞서려면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주 강한 추위나 곰에게 맞설 때처럼요. 둘의 성격은 다르지만,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우리나라 여자들이 왜 혼자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아직 배울 게 많습니다.”

“간단하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흠, 이건 그냥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이곳 여자들이 보호 본능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남자들로 하여금 여자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못 하게 하는 거죠.”

“여자를 보호하는 게 남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곁에 머무는 거라고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습니다. 남자의 보호 없이 여자는 식량을 구할 수 없으니까요. 물론 필요에 의해 구성된 관계라 해도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면 더 좋을 겁니다.”

“이누이트에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끝없이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이별에 아파하고, 그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까 두려운 것, 다른 일에는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24.

꾸뻬 박사는 울릭의 제안대로 폴라 비어를 주문했다. 폴라 비어는 처음이었다. 울릭은 호텔 바를 다시 찾게 되어 기뻤다. 카블루나 사회에 잘 적응한 모습을 보여줄 기회였다. 꾸뻬 박사처럼 멋진 친구를 데려온 것도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가능한 들뜬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꾸뻬 박사가 여전히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꾸뻬 박사는 우울한 표정으로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울릭은 실내를 둘러보며 바가 이글루와 비슷한 크기임을 알았다. 조명도 이글루 안처럼 어두웠다. 바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울릭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생각했다. 지금은 향수에 젖을 때가 아니야. 꾸뻬 박사를 도울 때야. 고민을 털어놓으라고 해볼까? 그랬다고 동정받는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이누이트 언어에는 ‘나클리크’라는 단어가 있었다. 나클리크는 동정 혹은 위로를 뜻하는 말로, 이누이트 중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타인으로부터 나클리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뿐이었다. 진정한 남자는 나클리크를 필요로 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자식을 저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냈거나 썰매를 잃어버리는 등 모두가 이해할 만한 불행이 닥친 경우는 예외였다. 울릭은 꾸뼤 박사가 나클리크에 흥미를 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클리크가 뭔지 아십니까?”

“아니요. 이누이트 풍습인가요?”


울릭이 나클리크의 의미를 말하자, 꾸뻬 박사는 큰 관심을 보였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재밌네요. 그러니까 내가 진료실에서 사람들에게 해준 게 나클리크로군요.”

“박사님께 상담을 하러 오는 사람들 말인가요?”

“네.”


꾸뻬 박사는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카블루나가 자기 같은 전문의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박사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자기를 이해해줄 사람이 없나요? 위로해줄 친구나 가족 같은?”

“꼭 그렇지는 않아요. 드물지만 가족이나 친구에게 위로받는 이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가족과 친구를 찾지는 않습니다. 도시 생활은 늘 바쁘거든요. 위로가 필요하다고 바쁜 친구를 잡아둘 수는 없지요. 그러다가 자칫하면 친구를 잃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모든 사람이 위로해줄 친구가 있는 건 아닙니다. 이 도시에는 외지에서 온 사람이 많습니다. 전부 생면부지의 상태로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죠. 이들 대부분은 관계에 매주 소극적입니다. 그래서 밤이 견딜 수 없는 적이 되지요. 매일 밤, 혼자 잠을 청하다 보면 외로움이 슬픔이 되고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슬픔은 상황을 악화합니다. 이 도시에는 이렇게 혼자 사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블루나 사회가 왜 이렇게 된 겁니까?”

울릭이 물었다.

꾸뻬 박사가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아마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 카블루나는 지난 백 년간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백 년 전만 해도 거의 모두가 농촌에서 살았거든요. 남녀 관계도 이누이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그때는 혼자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 않았죠.”

“그때가 지금보다 행복했나요?”

“음,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군요.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조상과 같은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특히 여성들이요. 옛날과 달리 현대여성들은 남편과 자식, 집안일보다 가치 있는 일이 많다고 배우며 성장했거든요.”

“카블루나 여자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대체 뭡니까?”

울릭의 질문에 꾸뻬 박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겁니다. 아까 보지 않았습니까. 그 질문엔 나도 답할 수 없다는 걸.”


“이누이트 여자들은 남자들이 자기를 보호해주기를 바랍니다. 먹고 살기 충분할 만큼 남자가 사냥을 해다 주기를 바라죠. 물론 만족스러운 잠자리도 원합니다.”

“이누이트는 어떤 여자를 좋은 신붓감이라고 생각하지요?”

“용기 있고, 바느질을 잘하고, 청소를 잘하고, 무난한 성격의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 뭐 그런 여자요.”


꾸뻬 박사는 생각에 잠긴 듯 술잔을 기울이며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여관계가 거래를 기본으로 한다면, 이누이트는 그 거래의 규칙을 이미 찾았나 봅니다. 우리는 그걸 잃어버려서 지금 새로운 규칙을 찾아서 헤매는 거고요.”


40.

며칠 후 플로랑스가 울릭을 찾아왔다. 광고를 찍기 위해서였다.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는 준비가 이미 끝난 상태였다.


“걱정 마세요. 이 녀석은 진짜 촬영에 익숙해요.”


울릭이 스튜디오 중앙의 조명 아래 서자 조련사가 곰의 목줄을 잡고 스튜디오를 한 바퀴 돌았다. 곰은 암컷이었고, 이름을 울라였다. 조련사는 울라가 사육장에서 태어나 새끼 때부터 훈련을 받아서 얌전하다며 울릭을 안심시켰다. 촬영 전에 충분히 먹이를 줘서 위험한 일도 없을 거라고 거듭 강조했다.


울릭이 두려웠던 것은 울라가 아니라 나누크의 영이었다. 울라가 북극곰의 영에 사로잡혀서 그를 벌할까봐 무서웠다. 그런데 그런 그와 달리 카블루나들은 눈앞의 살아 있는 곰을 덩치 큰 인형 정도로만 생각했다.


조련사는 사진사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촬영장 안으로 들어와 울라의 자세를 바꾸었다. 울릭도 사진사의 요구에 따라 이런저런 포즈를 취했다. 북극의 두 피조물이 카블루나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울릭은 자기와 같은 처지의 울라에게 동지애를 느꼈다. 그러자 나누크의 영도 더는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촬영이 막바지에 들어섰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사진사가 소리쳤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울라가 고개를 숙이고 울릭을 껴안았다. 사람들이 울릭을 빼내기 위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울릭은 포효하는 짐승의 품에서 이누이트 나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울라는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촬영이 끝나고 무사히 일을 마친 기념으로 티타임을 가질 때였다. 조련사가 다가와 고백했다. “울라가 이러는 건 정말 처음 봤어요.”


43.

울릭과 울라의 사진이 도시 곳곳을 뒤덮었다. 벽마다 광고 포스터가 붙고, 촬영 현장을 담은 사진이 일간지에 실렸다. 텔레비전에 광고도 실렸다. 캠페인 광고가 나간 주를 시작으로 사인을 해 달라는 사람이 많아져서 울릭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었다. 석유회사가 마련해준 호텔 객실에는 매일 새로운 꽃과 우편물이 배달되었고 울릭은 호텔을 사냥 기지처럼 드나들며 인기를 실감했다.


50.

일루이크 만 상공에 이르러서야 울릭은 모든 것이 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익숙한 풍경은 수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진 기지와 오렌지 빛깔의 창고, 철탑, 인공항만으로 지워지고 없었다. 그가 살던 마을도, 봄이면 바다코끼리들이 모여들던 해안도 전부 사라졌다.


울릭은 사람들이 알려준 대로 나바라나바가 일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출입구는 대형트럭과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로 복잡했고 운전자는 보행자를 배려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그냥 걷기에도 먼 거리를 아슬아슬 더디게 이동해야 했다.


폴라 바. 간판에 적힌 상호를 확인하고 그가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뚱뚱한 카블루나 남자들이 나른하게 앉아서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울릭은 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지만 홀 안에는 조그만 무대가 보였다. 무대 위로 알록달록한 조명 아래서 춤을 추는 여자가 보였다. 순간, 울릭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나바라나바!


그녀의 몸을 가린 것은 가죽 부츠가 전부였다. 물결처럼 흐느적거리며 무대 중앙에 박힌 봉을 잡고 회전하던 나바라나바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왔지만 나바라나바는 한 손으로 봉을 잡은 채 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51.

울릭은 나바라나바를 데리고 폴라 바를 나왔다. 그리고 조금 전 내린 소형 비행기를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 비행기는 남쪽으로 팔백 킬로미터 떨어진 폰드 일레트를 향해 날아오를 예정이었다. 비행기가 고도에 오르자 나바라나바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얼어붙은 지하실처럼 변해버린 이누이트의 삶은 도시에서 겪은 일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가 카블루나 나라에 가 있는 동안, 이누이트의 전통과 생활양식은 무참히 짓밟혔다. 덩치 큰 곰처럼 조용히 들어와서 집 안을 박살내는 카블루나 문명에게!


잠시 카블루나 나라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울릭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바라나바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내맡긴 채 잠든 한 여인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폰드 일레트에 도착하자마자, 울릭은 나바라나바를 자게 둔 채 플로랑스와 마리 알릭스에게 전화를 걸고 이메일을 보냈다. 돈은 문제되지 않았다. 캠페인 광고로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금액이 그의 이름으로 은행에 예치되어 있었다. 수익금은 토마스가 열거하는 별과 별 사이의 거리처럼 수많은 숫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울릭은 꾸뻬 박사와도 편지를 교환했다. 그는 여자친구와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혼자서 긴 여행을 다녀왔다. 조만간 세상에 태어날 아기와 함께할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딸입니다. 이 아이가 성장해 어엿한 숙녀가 될 무렵에는 혼란한 이 사랑의 나라가 조금은 안정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뜻은 아닙니다. 지난 세대와 똑같은 전철을 밟아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우리가 조금 더 성숙한 방식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녀관계는 지난 이백 년간 커다란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 변화는 인류의 백만 년 역사보다 훨씬 격동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가 길을 헤매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녀가 짝을 이뤄 가정을 꾸리고 사는 삶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지 여전히 궁금증은 남습니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기는 이 시대가 지나고, 결국 아무도 그 말의 의미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날이 온다면요.


울릭과 나바라나바가 새롭게 정착한 곳은 예전에 살던 곳과 기온차가 컸다. 그래도 생활방식은 비슷했다. 백여 개의 군도 중 사람이 사는 곳은 십여 개가 전부였지만, 모두가 가족처럼 지냈고, 남녀 모두 젊어서 결혼을 했으며, 아이들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뛰어놀았다. 그리고 몇 세대가 한 집에 모여 살았다.


울릭은 배 한 척을 장만했다. 평생을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은 돈이 남아 있었지만, 그는 매일 저녁 먹을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남자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배를 살지 고민할 때는 보다 작은 배를 선택했다. 그는 지난 경험을 통해 욕망이 삶을 갉아먹는 독임을 배웠다. 그리고 자기 안의 욕망을 다스리는 행위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모두를 위한 일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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