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괜찮아질 거야

   
한여름
ǻ
서사원
   
12000
2021�� 01��



■ 책 소개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분명 위안이 될 이야기
어제를 버텨낸 내가 전하는 위로가 당신에게 내일을 기다릴 힘이 되기를

과거 모두 없이 살 때는 가난의 모습이 비슷했다. 다들 비슷하게 힘들고 어려웠으니까. 그래서 그때를 지나온 사람들은 가난을 그저 불편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의 가난은 다르다. 사는 모습이 다양해지자 가난 역시 다양해졌고, 그 무게감 역시 각자 느끼는 바가 달라졌다. 그리고 이런 현대의 가난은 아이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아이가 어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가난에 관해 던지는 말들을 감수하고, “돈이 없으면 공부라도 잘해야지”라고 강요당하는 게 그저 가난해서 겪는 불편일 뿐일까.

환경이 어떻든 아이는 보호받고 자신의 선택을 존중받아야 한다. 이미 힘든 아이들에게 착하기를, 부모 몫의 힘듦을 나누어 짊어지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 어릴 적 기억은 꽤 오래 남고, 살면서 그 무게를 덜어내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 『내일은 괜찮아질 거야』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자신의 기준과 경험대로 아이에게 위로라는 강요를 하는 어른에게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볼 수 있는 경종을 울릴 것이고, 청소년들에게는 부모의 말에 자신을 옭아매지 않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 저자 한여름
딸이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는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릴 땐 학교 가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벌써 11년 차 교사이다. 학교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을 거울삼아 매일 버티고 있다.

차례
[ 이야기를 시작하며 ]
나 같은 사람

[ 나의 뿌리, 나의 유년기 ]
어린 시절의 사진
문제집
회색 눈동자
공부만 잘하면 돼
소외
친구
실패의 공기
가난한 아이의 진로

[ 내가 만난 거울들 ]
시험 점수가 궁금한 아이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
할머니와 사는 아이
자존심이 센 아이
소심한 아이
도벽이 있는 아이
성 조숙증이 있는 아이
칭찬을 갈망하는 아이
분노로 가득 찬 아이
밝고 긍정적인 아이
새로운 것이 두려운 아이

[ 이제야 보이는 것들 ]
11살 때의 차별
의도적 무관심
하루 6시간의 긴장
소수의 의견이 된다는 것
운동회
학부모 상담주간
현장 체험학습
아웃사이더
짝 바꾸는 날
급식 시간
교실끼리의 비교
아이들끼리의 다툼
맞벌이 부부의 아이로 자란다는 것
관심받기 위한 말썽
특별한 날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
장래희망
스무 살을 앞둔 아이
발표
자존심
학예회
성과
그런데도 교사를 꿈꾸는 이에게

[ 이야기를 마치며 ]
앞으로가 더 행복하기를

 




내일은 괜찮아질 거야


이야기를 시작하며

나 같은 사람

나는 학창 시절 내내 학교라는 곳에 온전히 동화되지도, 적응하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내성적이고 소심해서 교우관계도 불안했다. 가끔 누군가와 우정 어린 관계는 맺되 그것이 온전히 진심인 적도 없었다. 학교라는 곳은 나에게 늘 힘들고 불안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 마음과 다르게 학교는 나름의 시스템과 규율로 빠르게 굴러갔고 나는 그 안에서 허덕이다 졸업하곤 했다. 누군가를 갈망했다.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를, 손 내밀어줄 누군가를, 사랑해주는 누군가를.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가난한 집의 장녀였고 부모는 나와 동생에게 공부가 살길이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나와 동생을 위해 하는 말이었지만, 그 말 자체에서 느껴지는 자괴감과 깊은 무력감까지 나에게 전해져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디서도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면 그 관계에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사라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겨우 얻은 안정감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외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학교를 싫어했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스물넷부터 서른다섯까지 나는 수많은 아이와 함께했다. 내가 교사가 되었다는 게 주변 사람들에게는 다행스럽고 축하할 만한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아이들이 싫은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가진 역량이 교사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라 느꼈다. ‘학교에 다닐 때 행복했던 적이 없던 사람이, 늘 관계에서 힘들어했던 사람이, 어린 시절이 힘겨웠던 사람이 아이들의 유년기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어도 될까...’ 스스로에 대한 의심에 허덕이며 오랫동안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만난 아이들은 내게 내면의 거울이 되어 주었다. 몇몇은 보기만 해도 피하고 싶었고 몇몇은 안아주고 싶었다. 겉으로 드러낼 순 없었지만 아이들을 만나면서 겪은 마음의 파동은 제각각이었다. 아이들을 마주하고 나를 비춰보고 나서야 나는 진짜 나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학교라는 공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라는 사람은 작고 여리다 어찌 보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여전히 내성적이며 약간은 소심하다. 다수와 함께 있기보다는 소수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고 서른다섯이 되어서야 겨우 관계의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나는 내가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모든 아이에게 내가 좋은 교사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처럼 마음이 아팠던 아이들을 알아볼 수 있고 그 아이들에게는 마음을 알아주는 교사일 수 있다. 누구보다 섬세하게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나 같은 사람도 알고 보니 잘하는 게 있는 사람이었다.


이 책을 읽는 누군가는 꼭 나와 같은 유년기를 보내고 있을 10대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정에서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라는 말을 들으며 아득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누군가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가 가슴에 닿았으면 한다.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분명 위로가 될 것이다.



나의 뿌리, 나의 유년기

어린 시절의 사진

가끔 어릴 때 앨범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사진은 사촌 언니와 찍은 사진이다 사촌 언니가 어린 나에게 뽀뽀를 해주는 사진. 어린 나는 멜빵바지를 입고 있고 머리칼이 짧다. 볼이 통통하다. 누가 봐도 그 모습은 사랑스러운 아기의 모습이다. 이 사진 한 장으로 나는 큰 위안을 얻었다. 누군가에게 내가 아주 많은 사랑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것. 가족에게 큰 축복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받았던 순간을 기억해내고 싶다는 것은 이후의 삶에서 사랑을 거의 느끼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내가 기억하는 내 유년기와 관련한 감정의 대부분은 불안과 우울이다.


할머니와 부모님, 나와 동생. 이렇게 다섯 식구가 살았던 집은 방 2개에 거실 1개, 화장실 1개가 있던 14평짜리 임대아파트였다. 어릴 때는 할머니와 한방을 썼다. 나는 할머니가 좋았다. 할머니에 방에서는 마음껏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다.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면서 할머니와 나는 주로 누워 있거나 같이 이야기를 했다. 때론 화투를 치기도 했다. 할머니와 할머니 친구분들이 치던 화투에 나도 저절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이었는데 비슷한 모양을 찾아내고 점수를 계산하는 모든 과정이 재미있었다.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던 다른 이유는 아빠 때문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아빠는 나에게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뜻대로 삶이 풀리지 않던 아빠는 어느 순간 늘 지쳐 있고 말이 거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엄마와 종종 싸웠고 늘 큰소리를 쳤다. 아빠는 퇴근하자마자 나에게 공부는 했냐고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할머니 뒤에 숨었다. 할머니는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일을 나가지 않는 아빠의 눈치를 보며 나는 작은방에서 공부를 해야만 했다. 아빠는 기분이 내킬 때면 독후감을 쓰게 하고 검사를 하기도 했고 문제집을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의 의지는 얼마 가지 못했다. 며칠 못가 검사를 그만두고 친구와 술을 마시거나 일을 알아보러 다녔다. 술에 취한 아빠는 가끔 눈물을 흘렸고 나는 그 눈물이 부담스러웠다. 다가가서 위로를 하기에는 위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사실 내가 가장 바랐던 것은 건설 일을 하는 아빠가 먼 곳에서 일하게 되어서 집에 없는 것이었다. 엄마는 말했다. 내가 어릴 때 아빠가 나를 정말 예뻐했었다고. 아주 작았던 나를 배 위에 올려 두고 재우기도 했고 입이 짧은 나를 위해 뭐든 만들어 먹이는 다정한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학창 시절 내내 나는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 자신을 아빠의 피곤하고 지친 인생에 덧붙여진 짐이라 여겼다.


어린 시절의 사진들을 보면 믿을 수 있다. 내가 아주 많이 사랑받았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그때가 기억나지 않아서 억지로 믿어야 했다. 내가 사랑받는 아이였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성인이 된 후, 한 친구가 지갑 속에 가족사진을 넣어 다니는 것을 봤다. 단란한 네 식구의 모습이었다.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은 적이 없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을 스무 살이 넘어서야 알게 됐다. 집에 가서 어릴 때 경주에서 찍은 가족사진 한 장을 찾았다. 나와 동생이 앞에 서 있고 아빠와 엄마가 뒤에서 우리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오려 지갑 속에 넣었다.


공부만 잘하면 돼

“공부만 잘 하면 된다!”라는 말은 초등학교 다니면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그 말은 나를 옭아매는 족쇄인 동시에 면죄부가 되어주기도 했다. 말 그대로 공부만 하면 다른 건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내내 겉돌았고 교우관계는 편협했다.


비평준 지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좋은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중학생 때부터 입시에 매달렸다. 엄마의 목표는 주변 사람 모두 좋다고 하는, 60년 전통의 고등학교였다. 동생들을 공부시켜야 해서 엄마는 일찍 상고에 진학했고 엄마의 사촌은 그 고등학교에 가려고 재수까지 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친척들 사이에서 나는 ‘착하고 공부 잘하는 딸’이었기에 당연히 그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중학교 1학년 첫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후 주변의 기대는 더 커졌다. 부담스러웠고 동시에 불안했다. 중학교 졸업 전까지 있을 8번의 시험 중 단 한 번만 망쳐도 나는 그 고등학교에는 진학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스트레스가 극에 치달을 때마다 나는 머리카락을 뽑았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멍하니 앉아 있을 때마다 머리카락을 뽑게 됐는데 어느 순간 습관이 되어버렸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생긴 습관이었는데 그때는 이게 불안에서 기인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무의식중에도 옳은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지 늘 혼자 있을 때만 뽑았다.


집에서는 폭식했다. 늘 먹을 것을 입에 달고 살았다. 식구 중 누구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공부하느라 수고했다며 오히려 더 잔뜩 먹게 해주었다. 엄마는 학생 때 찐 살은 성인이 되면 빠진다고 했다. 외모에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잘하면 뭐든 다 해결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학창 시절에 찐 살은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빠지지 않는다. 그때 망친 생활 습관들도 쉽게 돌이켜지지 않는다. 대학을 가도 기적적으로 삶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지독한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했다.


가난한 아이의 진로

누군가는 가난은 그저 불편일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억지로 내 삶을 긍정적으로 보려 했을 때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가난은 그저 불편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자신을 둘러싸고 어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말을 감수하는 것이 그저 불편일 뿐일까. 돈이 없으면 공부라도 잘해야 한다고 공부를 강요당하는 것이 그저 불편일 뿐일까.


유년기의 가난이란 이런 것이다. 남들은 겪지 않았을 일상의 서러움을 간직하는 것. 그 깊은 감정이 각인되는 것. 결핍은 유년기 전체에 뿌리를 내린다. 밝은 척 행복한 척 언제 깨질지 모르는 가정의 안정을 모르는 척 살아가는 동안 그 뿌리는 더 굵고 튼튼하게 뻗는다.


가정환경이 어떻든 아이는 자신의 선택을 존중받아야 한다. 이미 힘든 아이들에게 역할극을 강요하지 말자. 당연하게 부모 몫의 삶까지 대신 짊어지라고 하지 말자. 이미 각인된 깊은 감정을 해소하는 것만으로도 그 아이들은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



내가 만난 거울들

자존심이 센 아이

나는 자존심이 센 아이였다. 자존심은 나의 슬픔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전혀 다른 특성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남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교사가 된 후, 나는 ‘밝고 긍정적인 선생님’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했다. 아이들에게 하는 칭찬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칭찬을 하긴 하는데 나조차 몸 둘 바를 몰랐다. 어린 시절의 나는 받아쓰기 백 점 받는 것 정도는 당연한 것이었기에 칭찬의 대상이 아니었다. 밥 잘 먹기, 줄넘기 50개 연달아 넘기, 그림 그리기는 부모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기에 칭찬의 범주에 들지 못했다. 그래서 일상의 자잘한 것들을 찾아 칭찬하기가 자연스러워진 것은 교사 7년차가 되었을 때, 즉 이미 서른이 넘어서였다.


매년 교실에는 말이 없는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과 소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기이다. 하루는 정말 말이 없는 여자아이가 일기에 그런 말을 썼다. “밥 잘 먹었다고 선생님이 칭찬해줘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급식을 골고루 잘 먹으면 “골고루 잘 먹었네!”라는 말과 함께 등을 토닥여 준다. 모두에게 하는 행동이라 나에겐 특별한 일이 아니었는데 그 아이에게는 정말 특별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나 역시 말이 없는 아이였기에, 누군가에게 말로 털어놓는 대신 일기장에 진짜 나의 이야기들을 쓰고는 했다. 선생님이 내 일기 아래에 댓글을 적어주는 날이 너무 좋았다. 빨간 볼펜으로 적힌 한 문장에서 나는 선생님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순간의 확신을 얻었다. 그때만큼은 내가 서른 명 중의 한 명이 아니다. 나는 관심 받는 소중한 한 명인 것이다.


갑자기 내 교실의 말 없는 아이들이 한 명 한 명 떠올랐다. 이 아이들이 바라보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어린 시절 나에게 담임 선생님은 사랑을 줄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존재였는데 이 아이들에게도 그렇지 않을까.


고백컨대, 나는 때때로 아이들이 부러웠다. 일상의 당연한 행동에서도 칭찬을 받는 아이들이, 생일날 네가 태어난 건 축복이라는 말을 듣는 아이들이.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을 듣는 아이들이. 그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줄 수 있는 위치를 직업적으로 가진 사람으로서 나는 어린 내가 들었다면 좋았을 말들을 그들에게 해 주는 데 익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아이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때때로 아이들이 받는 관심과 사랑을 보면 세상에 좋은 부모가 참 많다는 사실 때문에 내 어린 시절이 초라해질 때도 있었다.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내 어린 시절이 다시 돌아가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시간이었다면 나는 더 좋은 교사가 되지 않았을까. 사랑받는 것이 당연해서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지금쯤 어떤 교사가 되었을까.



이제야 보이는 것들

특별한 날

교사가 된 후 내가 만난 아이 대부분은 생일파티를 키즈 카페에서 한다. 그리고 당연히 선물을 받는다. 비단 생일뿐만이 아니다. 요즘은 챙겨야 할 특별한 날들이 많아졌다. 핼러윈은 이제 여느 명절 못지않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아이들은 일찍부터 핼러윈 의상을 준비하고 집에서 파티를 열고 친구들에게 포장된 사탕이나 선물을 나눠주기도 한다.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선생님은 어떤 분장을 할 거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핼러윈이라는 날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생소하기만 했다.


교사가 된 후 몇 년 동안 나는 나의 유년 시절이 교사로서는 패널티라고 생각했다. 행복하고 즐거운 유년기를 보내지 못했고, 학교를 싫어했으니까. 하지만 매해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유년기야 어쨌든 자기를 사랑해주고 관심을 두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의 유년기야 어쨌든, 그저 아이들의 특별한 날에 축하해 주고 함께 기뻐해 주면 나의 역할은 다 한 것이다.


성과

아이들이 점심밥 먹고 쉬는 시간에 나를 급히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교실로 가보니 교실을 가로질러 기다랗게 도미노가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젠가로 엄청 높은 탑도 쌓여 있었다. 한 남자아이가 “하나, 둘, 셋!” 하더니 도미노 한쪽을 밀었다. 도미노는 막힘없이 교실을 가로질러 드르륵 스러졌다. 단 한 번의 막힘도 없이 도미노가 쓰러지자 아이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나도 같이 크게 웃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웠는지 모르겠는데 그 순간 정말 깨끗하게 즐거웠다.


아이들이 선생님 키보다 높은 젠가를 쌓았다길래 보니 정말 높긴 높았다. 기념사진도 찍고 한참 웃다 보니 신기했다. 가장 길게 도미노를 쌓고 가장 높게 탑을 쌓기 위해 스무 명이 넘는 아이가 쉬는 시간 내내 싸우지도 않고 협동하다니.


어쩌면 학교에서 수업을 통해 협동을 가르치는 것은 정말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이렇게 놀면서 알아서 배우는데. 필요할 때면 알아서 협동을 하는데.


학교의 기준은 너무나 익숙하게 어른들의 성과 위주이다. 정량화할 수 있는 것들을 평가한다. 줄넘기든 영어든 모든 것에 급을 나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아이들은 학교에서의 매 순간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익숙하다. 잘하는 소수의 아이들을 위해 다수의 아이가 들러리가 될 필요는 없는데 모두 들러리가 되는 데 익숙하다.


쉬는 시간에 놀이하는 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삶에 필요한 능력, 즉 ‘함께 하는 법’, ‘문제를 해결하는 법’ 등은 스스로 배운다. 필요한 순간 몰두하여 한 번에 습득하기도 한다. 교실을 가로지르는 가장 긴 도미노를 만들기 위해 아이들은 책상을 밀고 쓰레기를 치우고 형태를 구성하고 함께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했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집중력 부족이라고, 산만하다고, 게으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저 수치화된 기준들이 흥미 없을 뿐이다.



이야기를 마치며

앞으로가 더 행복하기를

때로 아이들을 보면서 내 애정 욕구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된다. 우리 반 아이들이 나에게 의지할 때, 내가 필요할 때 묘하게 기분이 좋다. 내가 그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면서 사실 나도 그 이상의 사랑을 받는다. 아이들은 하나를 주면 온 마음을 내어준다. 교실 바닥에 떨어진 연필을 주워주며 따뜻하게 웃기만 해도, 사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아이들은 어느새 온 마음을 나에게 내어준다. 온 마음으로 나를 믿는다.


예전에는 이 아이들에게 내가 최고의 선생님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유치한 생각을 했다. 내가 너희에게 좋은 사람이었기를, 잊지 못할 사람이었기를,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었기를 바랐다. 그것으로 교사로서 내 위치를 검증받으려 했다.


아이의 말이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다가 무심결에 내가 한 말 한 마디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생각했다. 나를 무조건 믿는 아이에게 나는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가.


모든 사람은 유년기의 영향을 받는다. 아픈 유년기를 보낸 나와 같은 사람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큰 행운이었다. 덕분에 나는 과거의 나를 돌이켜 볼 수 있었고, 그 아이들에게 내가 누리고 싶었던 어린 시절을 작게나마 경험하게 해 줄 기회도 얻었다.


지금껏 내가 만난 수많은 아이는 모두가 내 내면의 거울들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 모두에게 나는 어느 정도 연기를 했다. ‘나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란다. 무섭지 않은 착한 사람이란다. 그러니 나에게 좋은 학생이 되어주렴. 나에게 사랑을 주렴.’ 이게 진짜 내 속마음이었다.


‘좋은 선생님’이라는 명함을 갖기 위해 그동안 나는 얼마나 애쓰며 살아왔는지. 내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상대는 그것을 느낄 것인데, 쥐어짜 낸 노력을 스스로도 진짜라 믿을 정도로 보이는 것에 애쓰며 살았다. 이제야 드디어, 아이들을 보면 다른 마음이 든다.


‘너희의 앞날에 나보다 좋은 선생님이 많기를.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기를. 앞으로의 날들이 지금보다 행복하기를. 너희들 덕분에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이 마음이 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야 출발선에 선 기분이다. 그 선은 오랫동안 내가 바라왔고 내가 도달하길 기원했던 곳이기에 의미가 크다. 남들보다 빨리 취직은 했지만 어른은 늦게 된 기분이다. 그렇게 고민하고 찾은 내 자리이기에 더욱더 소중하기도 하다.


지금 누군가 나와 같이 힘든 유년기를 보내고 있다면, 누구 하나 진짜 나의 마음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고 홀로 견뎌내고 있는 기분이라면, 절대 당신은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기를. 그 순간이 언젠가 당신을 보석처럼 빛나게 만들어 주리라는 것을 믿어 보길 바란다. 수많은 고민 끝에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당연히 자신의 자리에 가까워지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당신이 고민 끝에 선택한 곳은 잘못된 길이 아니니 안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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