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

   
이나미
ǻ
쌤앤파커스
   
14800
2021�� 02��



■ 책 소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자 분석 심리 연구가 이나미 박사가 써 내려간
황혼 녘의 단상과 삶에 대한 성찰

《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은 정신의학과 의사이자 분석 심리 연구가인 이나미 박사가 육십이라는 나이를 지나며 보이는 것들, 알게 된 것들, 받아들이게 된 것들을 담담하고 차분하게 써 내려간 책이다. 그는 의사로, 심리학자로, 저술가로, 작가로 TV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린,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성공한 여성’이다. 그와 동시에 어느 누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도 살아내고 있다. 딸, 며느리, 아내 그리고 엄마로서의 삶 말이다. 이제는 솜털 같은 손주를 둔 할머니로서의 삶도 추가되었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서의 삶, 그쯤에 서서 생각해보는 죽음과 여러 이별, 그리고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들은 같은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것들이다. 아니, 공감을 넘어 삶을 ‘공유’하는 차원의 감정의 교류를 느낄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삶의 숭고함을 가슴 저릿하게 경험할 수도 있다.

■ 저자 이나미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철저한 계획이나 거창한 목표는 없어도 그저 사고나 실수, 얼굴 붉힐 일 없이 넘기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살다 보니, 쓸데없이 나이만 잔뜩 먹었습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 내 힘만으로 살았던 순간은 없었는데도, 투덜거리고 불안해하고 원망하며 슬퍼했던 때는 왜 그리 많았을까요. 예전 같으면 노파라는 소리를 들을 처지라, AI와 로봇과 디지털 첨단 기술의 시대에 살려니 실수도 어려움도 답답함도 넘쳐납니다.

그럼에도 의사니, 교수니, 분석가니 하는 가면을 쓰고 숙고 없이 내놓은 수십 권의 책이 많이도 쌓였네요. 아, 정말 뻔뻔하군요! 딸, 며느리, 아내, 엄마 그리고 할머니로서의 삶이 앞뒤 재지 않고 지르는 용기를 주었기 때문일까요.

앞으로는 좀 더 지혜로워져야겠습니다. 옹졸하고 부족한 저를 참아주며, 귀한 시간, 귀한 자리를 저와 함께 나눈 분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하니까요. 환자로 친구로 친지로 가족으로, 제가 걸어온 길목마다 저를 성장시켜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 차례
들어가는 글 한 점 먼지와 같은 찰나, 그럼에도 빛이 났던 우리의

1부 홀로 서는 법을 절대 잊어버리지 말고
다른 세상으로 가는 웜홀┃아주 늙지도 않고, 아주 젊지도 않은┃홀로 서는 법┃당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배부른 소리 한 소절┃아주 위험한 주문┃내가 꿈꾸는 장례식┃새로운 친구 만들기┃안락사를 희망함┃죽어도 여한이 없진 않다┃때가 되면┃미지근한 사랑에 대하여┃매일 죽어가고 있다┃지구의 미래에 미안한 이유┃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공자님의 효심 때문에┃죽기 전이라도 강요할 수 없는 화해 ┃여전히 살아 있음으로

2부 우주가 선사한 우연한 현상
태도의 차이┃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매일 회개하는 삶┃성스럽고 저주받은┃내 작은 몸에서 벗어날 기회┃의사의 몫┃불운한 성공을 흉내내지 말 것┃어느 날 갑자기 완벽한 노후란 없다┃생명체 보존의 법칙┃때론 행복하고, 때론 끔찍한 것┃장례 파티를 여는 마음┃최선의 치매 예방법┃황혼 사랑에 대하여┃죽기 전에 비워야 할 것┃할 얘기가 없는 이유┃자식에게 실망하지 않는 법┃노인의 체력은 어디에서 오는가┃우리의 목표는 성공적인 이별┃노년의 목표┃돌봄 노동 앞에 서 있다면┃오로지 내가 할 일┃결국 모두 신이 된다┃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것 ┃최후의 여행┃노인들만의 나라가 되면┃주관적 행복┃구구팔팔칠칠의 진심┃밥상 차려주는 사람

3부 그냥 벌레 같이만 되지 않으면 좋겠다
연애는 자유다┃마지막 코미디┃운전대를 놔야 할 때┃부모의 부모 노릇┃축복받은 요절┃세상에 나쁜 음악 없다┃운명의 계산서┃세상을 제대로 보는 어른┃얇고 길고 밋밋하게 사는 것┃노인들의 노동은 빛이 난다┃그냥 벌레 같이만 되지 않으면 좋겠다┃어른답게 말하기┃공짜 없다, 비밀 없다, 정답 없다┃통제 대마왕 놀이 금지┃자연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

나가는 글 유쾌하고 따뜻한 유언장을 준비하는 나의 벗에게들어가는 글 한 점 먼지와 같은 찰나, 그럼에도 빛이 났던 우리의




 


 

 




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


홀로 서는 법을 절대 잊어버리지 말고

홀로 서는 법

아들, 며느리, 손주가 사돈댁으로 가 꽤 오랫동안 머물 때는 해방이 되는 느낌이다. 아이 없는 집이라 썰렁해도 모든 것을 노인에게 맞추며 살 수 있다.


마당에 쫓겨난 강아지들을 만져주고 예뻐해줄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해졌다. 정신없이 바쁜 아들, 며느리 생각하며 안 먹는 반찬이라도 더 해주고 싶다는 마음 가질 필요가 없으니 아침 저녁으로 여유만만이다. 혹시 예쁜 아이나 며느리 깰까 봐 건드리지 못했던 피아노도 새벽에 얼마든지 칠 수 있다. 주택이라 밤중에도 칠 수 있었던 피아노인데,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지 못했다. 손주를 데리고 자지 않으니, 팔다리 쭉 펴고 활개 치며 사는 기분이다. 사실 새벽잠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인지라 새벽에 손주를 받아 우리 방에 재우는 게 맞다. 손주가 너무 예뻐서 자꾸 안고 업으려 하다 보니, 제 뼈 아픈 줄 모르고 지나가게 된다. 순전히 내 잘못이다.


하지만 아이와 헤어지고 나면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자꾸 보고 싶다. 아이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나를 보며 쓱 웃어주는 미소가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내가 뭐라 하면 답을 해주는 그 소리도 들린다. 하루하루 새로운 음절을 내며 스스로 배우고, 어떤 때는 그 소리가 낯선지 눈이 동그래지는 손주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정신 차리자. 이나미. 아들, 며느리, 손주는 언젠가 내 앞에서 모두 사라져 제 갈 길 가는 별개의 존재다. 홀로 서는 법, 절대 잊어버리지 말고 갈고 닦아라.


걸핏하면 그만 일했으면 하지만 은퇴가 솔직히 두렵다. 꼬박꼬박 월급이 찍히지 않을 때, 그래서 점점 은행 잔고가 줄어드는 것도 무섭지만, 더 두려운 것은 나한테 주어진 시간을 정말 잘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의무, 누군가와의 약속 때문에 졸린 눈을 비비고 커피를 마셔가며, 무거운 몸을 스스로 밀어가며, 출근길로 나서지 않는 그 많은 시간에 과연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꿈꾸는 장례식

한동안 ‘내 장례식은 이랬으면...’ 하는 공상을 한 적이 있다. 예정되지 않은 일정을 빼서 와야 하는 것이니, 내 장례식장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미안하다는 마음이다. 판에 박힌 음식, 판에 박힌 꽃장식, 판에 박힌 인사나 종교 예절 같은 것들에 질린 문상객들에게 평소에 좋아하던 음악이라도 다양하게 틀어주면 어떨까. 혹은 아예 문상객을 받지 않고 SNS로 미리 찍어 놓은 메시지 –조금은 유머러스하게 자신의 죽음을 전달하는-라도 전달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들이다.


한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나의 장례식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은 내 가족들을 위한 것이다. 나란 존재는 떠나고 이제는 썩거나 불태워질 내 육체만 남은 것이니, 나는 내 장례식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는 셈이다. 다만 살아남은 내 자식들을 위해 장례식 비용을 미리 마련한다든지, 혹은 믿을 만한 공제회에 가입한다든지 하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만약 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 준비가 되지 않고 황망한 마음에 잠겨 있는 내 가족들은 문상객들로부터 꽤 많은 위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며, 혹시 내가 아주 오랫동안 아픈 데 없이 살다 죽으면 호상이라는 기쁨을 많은 문상객들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이라도 내가 들어놓은 공제회나 아들들, 남편에게 알려주고 장례식에 대한 부질없는 공상일랑 하지 말자. 주제넘은 짓이다. 자식들이 화장을 하고 싶으면 그렇게, 몇 시간 관 속에 넣은 시체를 보고 인사하는 서양식으로 하자면 그렇게, 선산에 묻고 싶으면 그렇게, 가까운 납골당이나 절에 맡기고 싶으면 그렇게, 이도 저도 말고 바다에 뿌리겠다면 그렇게 맡길 터이다. 제사를 지내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아예 잊어버리고 살고 싶다면 그렇게... 늙고 병든 부모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죽은 내가 뭐라고 자식들 잔치, 자식들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겠는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처지라면 거기에 어울리게 더 겸손할지어다.


여전히 살아 있음으로

나는 비록 가톨릭 신자이지만, 부처님이 마지막에 남기신 유언이 아무리 생각해도 참 좋다. 죽음이 이제 가까이 와 있지만, 이별해 가는 곳이 먼 곳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서로 이별하는 것이 이치니, 쓸데없이 슬퍼하지 말라는. 세상은 무상해서 나서 죽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이고, 육신이 못 쓰게 된 수레처럼 허물어지는 그 무상의 진리를 몸소 보이기 위해서라는.


부처님의 죽음을 통해 무상의 진리를 느끼고, 인간세계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고 그 진실에 눈뜨라는.


변화하는 것을 불변의 것으로 만들려는 것, 즉 죽어야 하는 목숨을 붙들고 죽지 말라고 집착하는 것 때문에 번뇌가 시작된다는. 번뇌의 뱀을 마음의 방에 넣어 두고 있지 말라는.


육신의 죽음과 부처라는 존재 본질의 죽음은 다르다는. 육신은 병들고, 상처 입고, 끝내는 허물어지기 마련이지만 깨달음은 영원히 법과 도로 살아 남는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깨닫는 사람만이 부처를 보는 것이지 부처의 육신이 부처가 아니라는.


부처가 죽은 후에는 부처의 설법이 스승이므로 그 법을 오래도록 보전하고 지키게 하는 것이 제자된 도리라는.


이런 훌륭한 가르침을 평범한 삶에다 구체적으로 대입해볼 수도 있겠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지만 그분들의 유전자를 내가 받았으니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는 것이고, 부모의 가르침이 내 머릿속에 있고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실천한다면 여전히 부모의 영혼이 내 안에 살아 있다는 것. 그러니 부모의 죽음, 먼저 가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그들과 나눈 시간과 경험과 지혜를 잘 간직해 가능한 많이 써먹으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까. 사랑하는 사람의 유전자 혹은 기억이 내 몸과 마음속에 있는 한, 죽음으로써 그들이 내 곁을 떠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우주가 선사한 우연한 현상

오로지 내가 할 일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는 사람 없고, 돌이켜보면 억울한 부분 없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여전히 분노하고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용서하지 못해 무거운 마음으로 생을 마감할 것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이 내 집착과 무지에서 나온 것인 줄 깨달으려 노력하고 행복한 왕의 언어로 말하고 마음을 살피는 것, 즉 체념의 경지로 갈 것인지는 오로지 내 몫이다.


결국 작은 자아, 본능과 사회에 사로잡힌 콤플렉스를 버리고, 우주와 합일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기실현이고 개성화이다. 하지만 개성화는 명상이나 참선 기도 같은 비세속적인 것으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서 이루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현실에서 지혜롭기가 산속에서 지혜롭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니 매 순간, 어떤 장소에 가서든 자신과의 끈을 놓지 말고, 주변에 휘둘리지 말아야 할 일이다.


최후의 여행

말기 암 환자들에게 보호자나 의사들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떠나는 사람과 달리 살아남는 것에 대한 미안함, 죄의식 때문에 병상을 피하고 진실을 알려주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말기 암 환자들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결국 죽게 될 것임을 안다. 현대 의학이 예수 부활을 약속하는 종교가 아닌 사실도 충분히 안다. 그리고 의사나 보호자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점 때문에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원하는 것은 꼭 무엇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끔 옆에 있어 주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마치 긴 여행을 떠나기 전, 가족들이 모여 송별 파티를 해주고, 같이 저녁을 먹으며 여행을 축하해주고,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 모르는 길을 가게 되니 불안한 감정을 대화로라도 풀어나갈 기회가 있다면 감사하고 행복해한 것이다.


죽음 직전의 가족 모임도 그러해야 한ㄴ다. 헤어지는 것은 서운하지만, 우리가 결국 모두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정말로 헤어질지, 어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행의 과정 중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리 준비해도 예측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적지 않은 이들이 떠나는 이들에게 먼저 가서 길 닦아 놓고 내 자리도 좀 준비해달라고 이야기한다.


죽음이란 여행은 알 수 없으니 무섭지만,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스릴 있고, 더 기대되고, 결국에는 모두 동참하는 알 수 없는 최후의 여행이다.


꼭 종교지도자가 아니더라도 무조건 죽음을 패배라는 논리로 볼 게 아니라, 환자들은 편안한 기대감으로 죽음 그 이후를 맞이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의사와 가족들이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밥상 차려주는 사람

노년이 되면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가 ‘쓸모없음’이다. 제아무리 좋은 직장이라도 일단 은퇴하면 남았던 사람 중에 찾고 반기는 후배들이 드물다. 물론 존경하고 좋아하는 면도 있지만, 그들 앞을 막고 걸리적거렸던 존재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부정적인 감정은 없어도 일단 직장은 그만둔 이들에 대한 남아 있는 관심은 빠르게 사라진다. 내 부모, 내 형제에게도 관심이 없는 세상인데, 동료나 스승에게 무슨 관심이 얼마나 가겠는가. 그러니 오로지 직장에만 모든 에너지를 다 쏟던 이들이 은퇴하고 나면, 일은 물론 사람 관계도 다 끊어지는 것 같아 그 허무함이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무언가를 시작하고 새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젊을 때만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나마 주택관리사, 공인중개사 같은 자격증을 따고 일할 수 있는 노년은 큰 축복이다. 그만큼 머리와 몸이 움직인다는 증거니까 대부분은 새로운 환경 자체가 스트레스라서 집 밖을 나가는 것이 겁나기도 한다. 이럴 때 스스로 밥 잘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로 이름 붙이고 누군가에게 정성스러운 밥상을 차려주는 일을 즐겨 한다면 나름 노년은 축복이다. 꼭 자식에게만이 아니라 후원하는 고아들에게, 외로운 노인들에게, 노숙자들에게, 정신질환자들에게... 나보다 처지가 못한 이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것만큼 숭고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어려서 외할머니는 거지가 집을 두드려도 꼭 정갈한 밥상을 차려주었다는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었던 적이 있다. 내게 그런 외할머니는 성모 마리아나 관세음보살의 현신처럼 보였고, 지금까지도 평생의 롤모델로 간직하며 살고 있다. 무엇보다 밥을 하는 행위는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이 상당히 섬세하고 때론 복잡할 수 있다 물론 젊어서부터 부엌이라고는 들어가지 않던 사람이 새삼스럽게 도마를 앞에 두고 칼을 들면 어쩔 줄 몰라 황망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무언가를 다듬고, 썰고, 씻고, 무치는 행위들을 집중해서 하면 마치 참선하는 것처럼 마음을 비우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누군가 내가 해주는 음식을 깨끗이 먹고 감사해 한다면 성취감을 느끼고, 그 대상과 끈끈한 유대감을 갖게 되기도 한다. 누구든, 밥상 차려주는 사람에게는 빚을 지는 것이니까.


지금도 365일 부엌에는 빠짐없이 들어간다. 아파도 들어간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정말 죽기 직전까지, 음식을 스스로 해 먹을 수 있을 정도로만 살 수 있다면 원이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음식 차리기란 대소변 내보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후의 창조적 행위이며 참 숭고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냥 벌레 같이만 되지 않으면 좋겠다

부모의 부모 노릇<
/P> 세상에는 어른이지만 아이인 ‘어른이’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젊은이인데 노인역할을 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 우선, 부모가 부모노릇을 못해 젊어서부터 부모를 부양하고, 부모를 보호하고, 부모를 꾸중하고 지도해야 하는 이들이다. 물론 그중에는 철없고 이기적인 부모들도 있지만, 한없이 착하고 성실하지만 불운이 겹쳐서 부모 역할을 못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희생자도 있다.


《할배의 탄생》,《나홀로 부모를 떠안다》,《아들이 부모를 간병한다는 것》,《아빠의 아빠가 됐다》

같은 책들은 이른 나이에 부모를 떠안고 노인보다 더 노인이 되어야 했던 훌륭한 젊은이들의 기록이다. 환갑이 넘어서도 여전히 부모에게 의존하면서 어른아이 노릇을 하는 이른바 금수저 자식들에 비하자면 얼마나 힘 있고 독립적인 삶인가. 물론 그들이 그런 말의 상찬을 받기 위해 부모의 부모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아무리 능력이 없지만, 아무리 무기력하지만 부모이니까. 인간이라면 한없이 허약하고 쓸모없는 부모라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부모의 부모 노릇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감상적인 눈물과 말이 아니라, 사회적 보호 장치, 나락에 떨어지고 있는 가족들을 구할 구체적인 도움의 손길일 것이다. 언젠가 상당히 평이 좋은 명의가 “치매를 왜 국가가 책임져야 하느냐. 치매는 각자 해결해야 하고, 그 가족이 일차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 것이 있는데, 정말 화가 났다. 아마 돈도 많고 능력도 있는 가족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아무 죄의식 없이 세금을 축내는 것을 보면서 불의하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그러나 만약 그 의사가 치매 걸린 자신의 부모를 마루에 모셔가며 직장 생활도 제대로 못하는 일을 직접 겪었더라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다. 간병인 하나를 24시간 쓰려면 한 달에 300만 원도 모자란다. 돈도 돈이지만 집안에 기저귀 차는 노인이 있을 때 가족들의 정신 건강, 육체 건강이 얼마나 피폐해지는지 그는 아마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아빠를 죽이고 싶었다.”라고 고백하는 치매 아버지를 둔 젊은이의 고백에는 죄가 없다. 그는 너무나 정직하게 자신의 힘든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장기간 아픈 가족을 간병하는 대부분의 자식이나 배우자들은 차마 그런 말을 하지 못할 뿐이지, 마음 한구석에 그런 소망이 불쑥불쑥 나오니 그 마음을 누루고 감추느라 힘들다. 백세 시대, 아파트에 갇혀 지내고 마을은 사라진 현대 도시인의 비극 중 하나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일찌감치 노인 역할을 한 젊은이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개성화 과정을 거친다. 노인들이나 알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생의 이치, 운명의 힘, 알고 보면 허접한 ‘자아’라는 환상,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자신의 의지 혹은 신념 등에 대해 그대로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지니게 된다. 자신이 돌보는 노인을 통한 간접경험의 지혜다. 드물게 노인 간병과 돌봄에 지쳐 자신을 버리는, 신문에 날 만한 이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돌봄과 책임의 경험을 통해 다시 강인하게 재탄생한다.


평생 부모의 돌봄만 받으며 그 후광으로 산 이들의 말년에는 돈이나 명예 같은 것과 상관없이 대개 인성이 비루해지는 것과 달리, 부모를 어른처럼 돌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쌓은 공덕과 인내로 찬란하게 빛난다. 부모 중 하나 혹은 양쪽을 일찍 잃고 그 빈자리를 채우며 주변 사람들에게 힘이 되었던 사람들에게는 신만이 누리는 영원한 ‘기억’이라는 선물이 주어지기도 한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영웅이자 위인이자 스승으로 추억하기 때문이다.


운명의 계산서

왜 특히 노인들이 가짜 뉴스에 잘 현혹되고 보이스 피싱의 타깃이 되는 걸까. 물론 노인들만 꼭 가짜 뉴스에 현혹된다는 증거는 없다. 노인들이 가짜 뉴스에 약하다는 통계적 검증 없는 결론은 또 하나의 가짜 뉴스일 수 있다. 세대별, 성별, 지역별, 직군별 등 무언가를 범주화하고 이들의 특징을 이렇다고 묘사하는 과학적 근거 없는 대부분의 주장들은 과학 혹은 논리에 분칠을 한 선동일 가능성이 높다. 노인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에 대한 접근성이 낮은 사람, 디지털 문맹, 확증 편향에 빠진 고립된 지역의 사람들이 가짜 뉴스에 선동될 가능성이 높다과 말한다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하지만 나이 자체가 가짜 뉴스에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면 몇 가지 가설은 생각해볼 수 있다. 완전하게 검증된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우선, 노인들의 굳어 버린 ‘뇌’가 문제다. 물론 모든 노인들의 뇌가 다 치매로 간다거나 경직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말년에 《파우스트》를 쓰고 젊은 여성과의 로맨스를 꿈꾼 괴테나, 90이 넘어서까지 끊임없이 바람기를 발휘했던 피카소의 뇌는 아마 웬만한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창의적이고 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뇌의 회백질과 백질이 남녀 차이 없이, 특별한 치매 증상 없이도 선형적으로 줄어든다는 논문들이 많으니, 특별한 천재들 빼고는 보통의 장삼이사들은 나이 들수록 젊을 때에 비해 기억력, 판단력, 창의력 등이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는 고립되거나, 편향된 대인관계가 반복되어 상상력, 포용력이 들어갈 틈이 점점 없어지는 노인들의 일상이다. 젊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제는 몰랐던 사실을 오늘 아는 일에 감사하게 될 확률이 높지만, 나이가 들면 체력이 줄고 사회적 망도 좁아지면서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진다. 익숙한 게 편안한 노인들로서는 일단 자신과 다른 낯선 이야기보다는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과 듣기 좋은 이야기만 걸러서 듣는 경향이 있다.


세 번째는 본인들의 감정에 의한 주장이나 판단을 가짜 뉴스에 등장하는 활자, 논리, 정보, 사실 등으로 포장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상대적으로 순수하게 자신의 생각을 별로 포장하지 않고 솔직히 털어 놓는 젊은이들과는 달리, 노인들은 뭔가 있어 보이게 이런 저런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전한다. 그냥 나는 여당이 싫다, 야당이 싫으면 싫다, 외국인이 들어와 내 일자리를 빼앗아 갈까 두렵다, 내가 믿는 기독교와 수천년 동안 싸웠다고 하는 무슬림이 싫다, 동성애자들은 그냥 징그러워서 싫다, 하는 식으로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여당은 혹은 야당은 이러이러한 음모들을 꾸미고 있다, 외국인들의 범죄율은 높다, 동성애자들이 에이즈를 옮기고 있다, 하는 식으로 이런 저런 가짜 뉴스들을 퍼날라, 자신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세력을 모으려 한다.


그렇게 해서 어떤 주장을 주장하는 세력을 형성해서 계속 성장시키면, 훨씬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남들과 달리 혼자의 목소리를 내면 얼마나 아프고 고생스럽고 서러운지 아직은 잘 모르는 젊은이들 중에는 깨지고 터지고 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그래도 잇따. 하지만 이미 상처를 받을 만큼 받은 노인들은 고독한 지점에 갇혀 홀로 순교자가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을 따라 집단을 형성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같이 죽는 것이 훨씬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자신들이 속한 하위 그룹에 충성심을 보내는 것은 나이를 막론하고 비슷하지만, 자주 변하고 뭔가 새로운 것이 있으면 금방 충성심을 잃고 다시 다른 집단으로 이동하는 젊은이들에 비해, 노인들은 일편단심 한 번 꽂히면 그 집단을 벗어나기 힘들다.


최근 모이기만 하면 나라 걱정하는 노인들이 점점 늘고 있다. 소셜 미디어가 보편화 되면서 어쩌면 과거에는 그냥 묻혔던 많은 부정, 부패, 비리들이 더 많이 늘어나는 탓도 있고, 독재 시대가 끝나면서 권위가 무너져 여기저기 갈등이 깊어지는 면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소외감과 좌절을 느끼는 저소득층 젊은이들 못지 않게 오히려 많이 누리고 가진 것도 많은 노인들이 한국의 미래에 대해 불안하게 느낀다는 점이다. “세상이 말세다”라고 말하며 혀를 찼던 사람들은 공자의 시대건 21세기건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에게 자기 자리를 조금씩 빼앗기는 기성세대가 대부분이다. 노인들이 느끼는 ‘말세’의 분위기는 어쩌면 본인들 자신이 사라져 가기 때문에 느끼는 개인적인 종말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무의식은 어쨌거나 자기중심적으로 이 세상이 돌아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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