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고 발칙하게

   
원진주
ǻ
미래와사람
   
13000
2020�� 01��



■ 책 소개


“먹고살려면 어쨌든, 일은 해야 하니까.”
오늘도 살기위해 버틴 모든 직장인들의 공감 에세이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방송계에서 사람과 일에 치이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작가의 경험을 담았습니다. 사회생활을 한다면 누구나 겪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친구처럼, 때론 언니나 누나처럼 이야기하면서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의 삶을 다독여 줍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달려 온 우리에게 저자는 조금 쉬었다 가도 된다며, ‘그래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앞으로의 여정을 위해 함께 하기 좋을 도서, ‘솔직하고 발칙하게’는 공감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작가 특유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해주며 읽는 이의 마음을 위로해 줄 것입니다.

■ 저자 원진주
10년 넘게 방송을 했지만
지금도 방송이 좋은 사람

여름에 마시는 맥주를
지극히도 사랑하는 사람

지나가는 길에 동물과 마주하면
리액션이 절로 나오는 사람

잘 쓰인 글보다는
편안한 글을 좋아하는 사람

■ 차례
여는 글

1부 먹고살기 고달프다
(태어난 지) 100일째 되던 날 / 밥은 먹고살겠니?
처음부터 꼰대는 아니었어 / 선인장처럼 나도 죽을 수 있다
나도 집에 가고 싶거든? / 보통의 기준
하이힐 너마저 / “Latte is horse”
벚꽃 축제? 벚꽃 지옥 / 내 나이가 어때서 
고소장이 날아왔다 / 발칙한 비밀 이야기 
아이 낳고 싶은(?) 대한민국 / 딱 받는 만큼만
무례한 사람을 대하는 방법 / 호의는 둘리 몫
청춘이라는 말 / 일요병을 아시나요?
88만 원 세대의 마라톤 / 부러움의 시대
잠 못 드는 밤 / 아픈 손가락
술기운에 작가 생활 / 출연료 VS 작가료
외모로 평가받는 방송국

2부 나를 버티게 하는 것들
소심한 복수 / 밤길 조심해
‘선플’은 나를 춤추게 한다
홧김 비용(火-費用)을 위한 노동 / 심신을 다스리는 법
이어폰에 숨겨진 비밀 / 감정을 쏟아부은 날
날 버티게 하는 인맥 /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순간
택시 안 초콜릿 / 서 있기도 힘든 마음
알코올 모임! / 내가 좋아하는 견(犬)
자체 휴무 / 과일은 제철이 아닐 때 맛있는 법
정신적 지주 / 스탭스크롤 / 아빠와의 대화

 




솔직하고 발칙하게


먹고살기 고달프다

보통의 기준?

“보통만 가도 잘하는 거다.”

“보통만 해도 밥은 먹고는 산다.”

“잘하지도 덜하지도 말고 보통만 해라.”


보통만 해. 학창 시절 유동 많이 들었던 말이다. 더도 덜도 말고 보통만 하라는 사람들 덕분에 나는 보통만 했다. 딱 보통만. 시험을 봐도 보통만 했고, 연애도 딱 남들 하는 보통만 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 역시 죽어라 하지 않고 보통만 했다. 내 삶은 보통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흘러갔다. 그런데 어느 날 친척 어른이 내 면전에 대고 말했다.


“보통만 하라니까 왜 보통도 못 해?”


나는 황당했다. 분명 모든 일을 보통으로 했다. 보통으로 하라고 해서 보통으로 했더니 보통이 안된다니. 이 무슨 일이지? 그래서 물었다.


“도대체 보통의 기준이 뭐예요?” 그랬더니 이런 말이 되돌아왔다.


“보통! 보통 몰라! 남들 하는 만큼 보통만 하라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수치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일들에 있어서 나는 내 나름대로 중간에 있다고 자부했다. 성적도 이 정도면 보통이라고 생각했고 돈을 쓰는 씀씀이도 이 나이대에 이 정도면 보통 수준에 맞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또 생각하는 것 역시 딱 보통 아이들에 맞게 생각했거늘. 왜 보통이 아니라는 걸까?


얼마 전 후배와 큐시트 (방송 프로그램 순서 표)를 놓고 실랑이를 했다. 10분이면 정리할 수 있는 작업을 하루 종일, 진짜 출근해서 퇴근하기 직전까지 붙잡고 있는 게 아닌가. 결국 기다리다 기다리다 화가 난 나머지, 높은 목소리 톤으로 한마디 했다.


“아니 이게 어려워? 제발 우리 보통만 하자.”


아뿔싸. 그렇게 듣기 싫었던 꾹꾹 눌러 놨던 ‘보통’이라는 단어를 내 입으로 발설하다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다음 날 후배를 불러내 어제의 단어 선정에 대해 사과했다. 살면서 내가 가장 어려웠던 게 보통만이었는데, 그 보통을 너에게 강요했다고.


나는 어른이 됐고 나름 판단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그런데 아직도 ‘보통’에 대해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도대체 어른들이 생각하는 보통은 무엇이고 보통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인생에서 보통을 알아내는 건 참 보통 일이 아닌 것 같다.


하이힐 너마저

“나의 20대는 화려할 거야.”

“드라마에 나오는 커리어 우먼처럼 되고 말겠어.”


누구나 취업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볼 것이다. 나 역시도 취업 후 성공한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방송작가가 되면 TV에 나오는 작가들처럼 연말에 상도 받을 줄 알았고, 우아하게 카페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면 되는 줄 알았으며, 연예인들 사이에서 박수를 받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꽂을 줄 알았다. 드라마에 늘 나오는 모습처럼! 하지만! 그 과정에 다다르기 위해선 거쳐내야 할, 포기해야 할 게 너무도 많았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 나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신입작가 일을 시작했다. 나름 큰 무대 위에서 현장을 누비며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연예인들과 함께 만드는 공개방송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자칭 패셔니스타였다. 아니, 패셔니스타이고 싶었다는 게 더 맞겠다. 20대 초반을 예쁘게 보내고 싶었던 마음 반, 연예인들을 매일 접하는 입장에서 그들에게 꿀리고 싶지 않았던 어린 마음 반이 한데 모인 결과였다.


나는 유독 하이힐을 고집했다. 해외 유명 패셔니스타들이 언급한 적도 있듯이 하이힐은 여성의 자존심이자 패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도 하이힐은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하이힐을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비가 보슬보슬 오던 날로 기억한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꽃단장하고 높은 하이힐을 신고 현장으로 향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녹화가 진행되던 가운데 메인작가가 나를 불렀다. 나는 공연장을 한 바퀴 돌아서(이 때 ‘한 바퀴’라고 하면 넓은 고등학교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아야 할 정도였다.) 그를 향해 달려갔다. 바로 그때 발목이 삐끗하면서 하이힐의 굽이 뚝하고 부러져 버린 것이다. 나는 그대로 넘어져버렸다. 하지만 내 얼굴을 더 붉게 만든 것은 메인작가의 앙칼진 호통이었다.


“너 내가 진작에 운동화 신고 다니라고 했지? 내 한번은 네가 그 꼴 날 줄 알았지! 네가 무슨 연예인이라도 된 줄 아는 거야?”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긴 출장이 끝나고 난 뒤 너무 피곤해 몸도 가누기 힘들었던 날, 딱 하루, 화장을 안 하고 출근한 적이 있다. 그때 그 메인작가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야! 너 연예인들이랑 방송 만든다는 애가 그렇게 쌩얼로 다녀서야 되겠어? 어디 가서 내 후배라고 하지 마. 창피하니까.”


그래놓고 인제 와서 연예인이라도 된 줄 아냐니….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날 부러진 하이힐은 내 가방 속에 고이 모셔두고 나는 녹화 내내 삼선 슬리퍼를 신고 뛰어다녀야만 했다. 높은 힐을 신었을 때보다 발은 편했지만,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비단 하이힐뿐만 아니라, 신입작가가 된 뒤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은 참으로도 많았다. 잦은 노트북 사용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내 눈을 크고 동그랗게 만들어주던 렌즈도 안경에 밀려나야만 했고, 큐 카드를 만드느라 종이를 오리고 붙이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인 네일 아트도 포기했으며, 빨간색 머리카락을 고집해온 나는 고지식한 어른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더 이상 빨간색으로 염색을 하지 말라는 얘기도 들어야 했다. 또 누구의 부름에도 빨리 뛰어가야 하니 치마도 입지 못했으며, 방송이 늘 그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이유로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 참석도 포기해야만 했다. 그중 하이힐은 그 수많은 포기 안에서 유일하게 지켜낸 내 자존심이었다.


그날 밤 나는 긴긴 시간 하이힐 생각으로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하이힐을 꺼내 신었다.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놓은 것이다. 역시나 사무실에서 만난 메인작가는 또 내 하이힐을 보며 말했다.


“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꼬라지로 넘어져 놓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니?”


보통 같으면 웃어넘겼겠지만, 그날은 메인작가를 향해 도끼눈을 뜨고 쏘아붙였다.


“제가 넘어질 줄 알았다면서 저한테 왜 뛰어오라고 하셨어요!!!”


하필 그 타이밍에 팀장이며 부장이며 팀원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게 뭐람.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뒤로는 누구도 내 하이힐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고 나는 1년가량 하이힐을 신고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배신은 어느 날 샤워실에서 혼자 있을 때 일어났다. 샤워하던 중 퉁퉁 부은 내 발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게 진정 내 발이야?’ 평소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내 발이 그날따라 유독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신발장에 모셔둔 하이힐의 먼지만 털어낼 줄 알았지, 그 높은 걸 신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변형된 내 발은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이다.


“주인 잘못 만나 너도 고생이다.”라는 말을 곱씹으며 나는 결심했다. 비로소 하이힐을 내려놓겠노라고. 누구의 강요도 권유도 아닌 오롯이 나의 선택으로 내린 결정이었기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동시에 방송작가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매 순간 깨지고 포기하고 또 깨지고 포기하는 순간들이 난무하는 방송국에서의 삶. 지키고 싶은 건 많지만 배신당하는 일들이 부지기수인 것은 방송작가의 숙명일까. 다 잊었다고 했지만 실은, 1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하이힐을 신고 우아하게 걷는 여자들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배신감에 서글퍼지곤 한다. 그리고 되뇌게 된다.


“오… 하이힐 너마저….”


딱 받은 만큼만

신입작가 시절 내가 받던 월급은 80만 원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100만 원. 그다음은 120만 원. 당시 최저 시급에도 미치지 못했던 금액이다. 그렇다면 현재 신입 작가들은 얼마나 받을까?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부분이리라 생각된다. 현재 우리 팀 신입작가의 월급은 최저 시급에 맞춰 185만 원. 식대 지급, 새벽 이동 시 택시비 지급이다.(물론 아직도 140~160만 원을 신입작가 월급으로 주는 곳도 꽤 존재한다.)


사람들은 겉에서 그냥 볼 때는 80만 원에서 185만 원이면 대단히 많이 올랐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방송작가들은 대부분 밤샘을 기본으로 하고, 주 52시간보다 훨씬 넘는 시간을 일한다. 그렇게 계산할 경우 한 달에 받는 185만 원은 절대 최저 시급에 해당하는 금액이 아니다. 때문에 나는 후배들에게 늘 그만큼의 대우를 해주려고 노력한다. 쉬는 날을 더 준다거나, 비상근으로 업무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대부분의 방송사나 제작사에서 눈치를 줄 경우 불가한 부분이다.


특히나 연차가 좀 있는, 경력이 좀 있는 후배에게는 받은 만큼만 일하라는 말을 꼭 하곤 한다. 우리는 프리랜서다. 그래서 안정적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랬다’고, 일이 몰리는 시기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게다가 방송작가 특성상 가치가 높은 연차가 있다.)


프리랜서라 프리할 것 같지만 무늬만 프리랜서인 우리는 투잡과 쓰리잡이 상당히 어렵다. 방송사의 눈치도 봐야 하고 상급자의 눈치도 봐야 한다. 왜 그들은 적은 돈으로 우리가 한곳에 얽매여 많은 일의 양을 해주길 바랄까? 비단 이런 문제는 프리랜서만의 문제가 아니리라. 한 기업에서 꽤 오래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나만 만나면 내가 부럽다는 말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덧붙인다.


“1년 내내 일해도 월급이 그대로야.”

“회사에 묶여 있는 시간은 긴데, 미래가 없어.”

“정시 출근, 정시 퇴근하고 싶어서 기업에 들어왔는데 맨날 야근이야.”


결국 이런 얘기들을 나누며 우리는 술이 술을 부르는 밤을 보내곤 한다. 어느 회사든 마찬가지인 현실. 돈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업무는 그 배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돈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출근은 매일 매일 하길 바라는 이상한 논리. 돈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책상 앞에 내가 없으면 죽도록 전화해서 찾아대는 놀부 심보.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더 단단하고 견고해져 간다. 나의 권리를 더 찾기 위해. 하지만 이런 권리를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일자리를 잃게 되거나 반 협박적인 언행들을 들어야 하는 게 이 바닥의 현실이다.


“내 돈 받고 일하면서 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원 작가는 너무 부당한 걸 부당하다고 말하는 편이야. 나랑은 안 맞는 것 같아.”

“원 작가랑 일하려면 들어줘야 할 게 너무 많아.”


내가 무리한 걸 요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을 하다가 대중교통이 끊긴 뒤에 귀가할 때는 택시비를 지급해 줘야 하고 주말에 나와서 일을 할 경우엔 주말 수당은 못 주더라도 그 노고를 인정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사에서 일하는데 왜 식대를 내 돈으로 내야 하는가. 요즘도 밥값을 안 주는 방송 제작사들이 많다. 그럼 밥을 먹고 오후에 출근하게 해주던가.


방송작가, 아니 사람이다. 나를 비롯해 그 누구든 일한 만ㄴ큼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 아니, 누구든 받은 만큼만 일할 권리가 있다.



나를 버티게 하는 것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순간

사람을 만날 때마다 웃는 게 습관이었다. 재미가 없어도 웃었고 관심이 없는 대화에도 웃었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땐 이해가 되는 척 또 웃었다. 직업 특성상 매일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다. 만나는 사람도 다양하다.


어는 날은 아침에는 한 병원의 의사를 만나 미팅을 한 뒤  점심에 변호사와 전화 취재를 하고 오후엔 한 기업을 찾아가 CEO와 대담을 하고, 그 이후엔 연예인 MC와 구성 방향을 논의하고 또 저녁엔 일반인 사례자와 통화하는 것으로 온종일을 다 쓴 날도 있을 정도다.


이뿐만이 아니다. 제작사 대표와 회의를 해야 하고 팀장과 회의를 해야 하고 피디와 논의를 해야 하면 작가들과 일일이 구성 논의도 해야 한다. 하루에만 족히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얼굴을 맞대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날 때면 진심으로 웃은 적도 물론 있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순간에도 늘 웃는 얼굴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을 웃으며 사람을 만나왔다. 그게 방송작가로 살고 있는 나였다. 그런데 딱 10년째 되던 날. 일이 하기 싫어졌고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사람을 만나서 웃는 게 싫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무기력해지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의 나는 더 이상 약속을 잡지도 누군가를 만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대신 혼술하는 횟수는 급격히 늘었다. 그때 내 상황과 비슷한 기사를 본 게 기억에 남는다. 미국에서 진행된 가짜 웃음과 관련한 실험 결과를 공개했는데 고객 앞에서 가짜 웃음을 지어야 하는 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시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한 기사였다.


그랬다. 나는 지극히 감정 소모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감정 소모를 해결하기 위해 혼술로 마음을 달래도 보고 맛집을 섭렵하며 먹방으로 스트레스를 날려 보기도 하고 흥청망청 돈을 쓰면서 해소해 보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표정이, 내 웃음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더 이상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을 닫아 버렸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웃기지 않으면 웃지 않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하는 척 애쓰지도 않았다. 그리고 화가 나면 화를 냈고 짜증이 나면 짜증도 냈다. 그리고 마음을 쓰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애타게 마음을 다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날이 거듭될수록 후련하기는커녕 얼굴은 더 경직됐고 마음은 심각하게 울렁이다 못해 요동쳤다.


그러다 결국 나는 집 안에 들어앉는 걸 선택했다. 그동안 한 번도 쉬어본 적 없던 내가, 일을 그만두고 방콕을 결정한 것이다. 애초에 혼자 뭔가를 한다는 건 내 삶에선 거의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그전에는 한 번도 혼자 밥을 먹어 본 적도 쇼핑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때는 이상할 정도로 혼자인 게 편했다. 무엇보다 사람을 마주하고 억지로 웃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바깥세상과 차단한 채 나만의 세상에서 지낸 지 한 달 남짓. 적막한 거실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정말 말 그대로 줄줄. 그냥 속상했고 그냥 아팠다. 그래서 울고 또 울고 하염없이 울었다.


생각해보니 일을 시작하고 10년 만에 감정을 다해 흘린 눈물이었다. 얼마나 울다 잠들었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늦은 밤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바깥세상에 나가 사람을 만났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맞장구를 쳤다. 얼굴 근육이 놀라지 않은 걸 보면 진심이었겠지. 실컷 쏟아붓고 나서야 다시 나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내 감정을 너무 소모한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종종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수많은 감정 소모를 하면 살아간다. 그리고 점점 지쳐간다. 버텨내려고 하지만 버텨내는 것이 버거운 순간이 온다. 그래서 혼자만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하루가 됐든 일주일이 됐든 한 달이 됐든. 우리에겐 우리의 마음을 다독이고 치유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이 존재할 때 우리가 더 활짝 피어날 수 있을 테니….


택시 안 초콜릿

방송작가가 되고 난 뒤 한 번도 밤샘이 없는 프로그램을 해본 적이 없다. 밤샘은 방송작가의 숙명과도 같다. 피곤이 쌓이다보면 그만큼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그게 택시에서도 이어진다. 보통 밤을 새우고 출근하는 길 도저히 걸을 힘이 나지 않아 택시를 자주 이용하는 편인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아, 그날은 조금 더 우울한 날이었다. 다다음날이 결혼식이었기 때문이다. 누구 결혼식? 바로 나의 결혼식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그날도 밤새 죽어라 대본을 쓰고 다시 출근하는 길이었다. 정말 집에 와서 한 일이라곤 옷만 갈아입은 정도. 눈을 비비며 택시에 올라탄 뒤 꾸벅꾸벅 졸고 있던 참에 택시 아저씨가 내게 무언가를 건네는 게 아닌가. 초콜릿이었다. 나는 그 초콜릿을 받아들고는 갑자기 고민에 휩싸였다. ‘어렸을 적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 받아먹지 말랬는데...’라는 유치하지만 현실적인 고민 때문이었다. 그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내 딸이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데 피곤해 보여서. 그거 내 딸이 챙겨준 거에요.”


잠시나마 아저씨가 건넨 초콜릿을 들고 고민했던 내가 우스워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바로 까서 초콜릿을 입에 넣는 순간. 그 달달함은 잊을 수가 없다. 피곤이 싹 날아가고 몸이 가벼워지는...이라고 하면 무슨 초콜릿에 그리 많은 수식어를 넣느냐며 오버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사실이다. 그때 느꼈던 기분은 그 이상으로 황홀했고 우울함마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잠시나마 아저씨로 인해 달달한 출근 시간이 됐다. 그렇게 초콜릿을 먹으며 아저씨와 수다를 이어갔다. 딸이 나랑 동갑이라는 얘기, 딸도 프리랜서인데 그렇게 밤을 많이 샌다는 얘기, 아저씨가 택시 운전을 시작하게 된 것도 딸을 위해서라는 얘기 같은... 어찌 보면 나의 얘기를 했다기보다는 아저씨의 인생사를 들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아저씨가 해준 한 마디가, 그동안 지쳐있던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오늘도 힘내요, 아가씨. 다 잘 될 거야!”


가끔은 아무와도 말하기 싫은 날이 있다. 모든 게 귀찮고 우울한 날. 하지만 그날 택시 아저씨와는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지금의 우울함도 고민도. 아마 우리가 서로 모르는 관계이기에 가능한 거겠지. 그래서 나는 이런 이유를 빌미로 택시를 더 자주 이용한다. 때로는 모르는 사람이 건네준 초콜릿이, 그 말 한마디가 이토록 달콤할 수도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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